충주 고구리비(국보 205호) 충주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근처에 장미산성, 누암리 무덤, 탑평리 칠층석탑 등이 있다. 예전엔 그곳이 중원군이어서 '중원 고구리비'라 했는데, 지금은 중원군과 충주시가 충주시로 합쳐졌기 때문에 '충주 고구리비'라 한다. 1. "영락7년 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광개토 7) 세워진 비석! 같은 해 '신라본기' 보면 "내물이사금 때인 397년 7월,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해 줬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이 세워진 지 2년뒤인 399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신라 공격으로 멸망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신라의 SOS를 받고 달려온 광개토태왕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해 준다. 학계에서는 2019년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새로 발견된 이 명문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아마도 481년(신유년) 세워졌을 것이다"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 신라왕을 '동이 매금(寐錦)'이라 부름 외부에서 신라 왕을 부를 때 '비단 금' 자가 들어간 '매금'으로 부르기도 했다. '잘 매' 자는 '누에'를 뜻한 것.. 누에가 그렇게 잠을 많이 잔다. 누에를 '잠'이라 부를 정도이다. 414년 당대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릉비에서 신라왕을 '신라 매금'이라 한 것과 달리, 충주고구리비에서 신라왕을 굳이 '동이 매금'이라 쓴 것은 중화사상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충주고구리비가 당대(397년 혹은 481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후대(조선)에 만들어졌으리라고도 볼 수 있다. 3. 자기 나라 고구리 태왕을 '고리 태왕(高麗太王)'이라 칭한다. 414년 당대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릉비에서 광개토태왕을 칭할 때 '태왕'이라 적은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비에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리 관직 이름과 광개토태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리 비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리와 신라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리 비이다. 4. 비석 내용 임자년(352년) OO를 공격했다(伐). 5월, 고구리 태왕(高麗太王)의 조왕공(祖王公)이 동으로 와서 신라 매금(寐錦 신라왕)과 형제맹약을 맺는다. 신라왕(寐錦) 기忌, 고구리태자 공共, 대사자 다혜환노(다우환노?), 주부 도덕(귀덕?) 등이 OO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共이 음식과 옷을 하사했다. 신라왕(동이매금)은 돌아가 신라사람들에게 OO을 주게 했다. 태자 共은 고구리 영토 내의 여러 관리(大位, 諸位) 상하에게도 옷을 내렸다. 12월 23일 고구리 관리들(다혜환노, 도덕)로 하여금 신라땅(동이매금의 땅) 우벌성(于伐城)으로 보내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고구리 관리(하부 발위사자)인 보노가 신라땅 안의 군지휘관(당주)을 맡았다(신라는 고구리에 종속된 관계). OO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땅 안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혹은 빼앗았다). 신유년(361년) 고구리 고위직(古鄒加) 共의 군대가 다시 우벌성(于伐城)에 다다랐다. 고모루성의 관리(古牟城守事 하부 소속의 대형) 야O 등장..
충주 고구리비(국보 205호)
충주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근처에 장미산성, 누암리 무덤, 탑평리 칠층석탑 등이 있다. 예전엔 그곳이 중원군이어서 '중원 고구리비'라 했는데, 지금은 중원군과 충주시가 충주시로 합쳐졌기 때문에 '충주 고구리비'라 한다.
1. "영락7년 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광개토 7) 세워진 비석!
같은 해 '신라본기' 보면 "내물이사금 때인 397년 7월, 하슬라에 흉년이 들어 죄수를 사면하고 세금을 면제해 줬다"는 기록이 있다. 비석이 세워진 지 2년뒤인 399년,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신라 공격으로 멸망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신라의 SOS를 받고 달려온 광개토태왕이 연합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해 준다.
학계에서는 2019년 3D 스캐닝 데이터와 RTI 촬영으로 새로 발견된 이 명문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아마도 481년(신유년) 세워졌을 것이다"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 신라왕을 '동이 매금(寐錦)'이라 부름
외부에서 신라 왕을 부를 때 '비단 금' 자가 들어간 '매금'으로 부르기도 했다. '잘 매' 자는 '누에'를 뜻한 것.. 누에가 그렇게 잠을 많이 잔다. 누에를 '잠'이라 부를 정도이다.
414년 당대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릉비에서 신라왕을 '신라 매금'이라 한 것과 달리, 충주고구리비에서 신라왕을 굳이 '동이 매금'이라 쓴 것은 중화사상의 관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충주고구리비가 당대(397년 혹은 481년)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후대(조선)에 만들어졌으리라고도 볼 수 있다.
3. 자기 나라 고구리 태왕을 '고리 태왕(高麗太王)'이라 칭한다.
414년 당대 만들어진 광개토태왕릉비에서 광개토태왕을 칭할 때 '태왕'이라 적은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비에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리 관직 이름과 광개토태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리 비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리와 신라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리 비이다.
4. 비석 내용
임자년(352년) OO를 공격했다(伐).
5월, 고구리 태왕(高麗太王)의 조왕공(祖王公)이 동으로 와서 신라 매금(寐錦 신라왕)과 형제맹약을 맺는다.
신라왕(寐錦) 기忌, 고구리태자 공共, 대사자 다혜환노(다우환노?), 주부 도덕(귀덕?) 등이 OO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共이 음식과 옷을 하사했다. 신라왕(동이매금)은 돌아가 신라사람들에게 OO을 주게 했다. 태자 共은 고구리 영토 내의 여러 관리(大位, 諸位) 상하에게도 옷을 내렸다.
12월 23일 고구리 관리들(다혜환노, 도덕)로 하여금 신라땅(동이매금의 땅) 우벌성(于伐城)으로 보내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고구리 관리(하부 발위사자)인 보노가 신라땅 안의 군지휘관(당주)을 맡았다(신라는 고구리에 종속된 관계). OO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땅 안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혹은 빼앗았다).
신유년(361년) 고구리 고위직(古鄒加) 共의 군대가 다시 우벌성(于伐城)에 다다랐다. 고모루성의 관리(古牟城守事 하부 소속의 대형) 야O 등장..
산서성 영락궁은 어느나라의 것이라 보십니까?
산해관 해신상이 문무왕을 본따 만들었고, 신라 선덕여왕은 낭산 어디쯤에 있을까요?
진덕여왕릉은 당태종 무덤 근처 소릉도에 있다고 하던데,,
sumin님 오래오래 기다렸습니다 환영합니다 고대사 바로잡기에 함깨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기다렸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어떤 사학자도 하지 않는 평이한 설명으로 대중에게 설득력을 이끌고 계신 선각자이십니다.
오랜만입니다 응원합니다 ㅎㅎ
오랜만의 영상,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 생각입니다.
답환래: 함께 뭉쳐서 돌아왔다
제중인?支: 치르다, 값을 지불하다
고대왕국토제위상하의복: 대왕국토제위에게 상화의복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다, 告로 시작하는 이 문장은 제사 예절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간만입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수민팍 행님 역시!!! 기대이상의 영상입니다!
흥미진진해요!😮
잘보고 있습니다 ^^
아~~~~!!!!
밤에 올라온 영상이군요~
안그래도 엄청 기다리고 있었어요!!!!!
수민 박님 감사합니다!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영상입니다^^
2탄 매우 기다려집니다!
영상 잘 봤습니다.
수민 박님, 2024년엔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영상 작업해주세요!!!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고구려비가 아니라
신라비인 것으로 보입니다.
향가의 어법? 문법이 그대로 보이네요.
여기가 내 고향인데, 가 본지 10년이 넘었네요.
역시! 기다렸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삶 자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다.
수민팍 웰컴백!❤ 라방에 참여를 못했네요 석고대죄 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드디어 오셨군요!!!!!!!❤
😘👍
엇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돌아와 계셨군요
감동입니다
당신의 정성으로 오늘도 보람 있습니다
‘오늘 삼국사기’로 머리를 깨웁니다
고대사 수수께끼 천천히 밝혀주세요.
찬란한 우리의 고대사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
일단 좋아요 먹으셈😊
네이버 웹툰 찐삼국사 작가 이용훈 입니다.
충주고구리비의 비문을 해석하여 널리 그리고 쉽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문을 통해 당시 고구리가 신라를 제후국으로 거느렸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편도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 🎉😊
고구리는 뭔가요?
@@TheJinNK한자 "려" 발음이 나라이름일 때는 "리"로 발음되므로 고구려를 고구리로 표기한 것입니다.
@@three.empires 리는 중국식 한자 발음이고 한국식으로 표기할때는 려로 표기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발행된 한글이 적혀있는 서책들보면 고구려로 표기 되어있습니다 세종연간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 영조연간에 편찬된 동몽선습 언해 , 정조때 나온 오륜행실도 등등이요
@@TheJinNK 서길수 교수의 고구리 영상을 추천합니다. 왜 고구리인지 조선 포함 그 이전의 문헌고증을 통해서 고구리가 맞다고 증명하였습니다.
@@TheJinNK 논쟁은 서길수 교수님의 영상에 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서길수 교수님의 주장이 더 깊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와 드디어 올라왓다
👍
어우야 진짜 오랜만이네요
비석의 밑둥이 깨진걸로 봐서, 개인적으로는 저 비석이 옮겨진 것인지 아닌지 부터 먼저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원 위치는 대륙이라고 보고 있구요...
믿고있었다구
오호 이제야 영상 올리시는군요 ㅠ
임금이 계신곳이 중국이고 강남이고 경성 이고 한양이고 서울인데 , 한민족이 동이일까요? 중화일까요?
동이는 고구려,백제,신라,왜,일본 이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면서 지명도 함께 사용했다고 합니다
@@jungjaejong7387 그런 기록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니까요?
@@jungjaejong7387 일본은 왜 포함시켰을까요? 왜가 일본이 아닌데!
@@암벽등반-q4h 당나라의 기록지 "구당서 "에 그렇게 기록도어있다네요
아마 그당시에는 왜와 일본이 다른 나라 였답니다
@@암벽등반-q4h 구당서에 동이는 5개 나라다고 서술되어있고, 중국의 사전에는 동이지역을 산둥과 그이나을 포함한다고 되어있다고 합니다
😅😅
해석이 부자연스럽네요
그런데 이제 라이브는 안하시나요?
박용숙 교수님 저서 읽어보셨나요?? 꼭 보셔야 되는데..
감사합니다
동쪽으로 왔다가 핵심입니다... 충주 위치를 고려하면 반도사관에서는 남쪽으로 왔다가 되어야하는데 동쪽으로 왔다?
비석 1970년대 만들어 졌지
지들이 만들고 발견했다고 해
진흥뫙순수비, 광개토대왕비 등 북미에 있음. 한반도유적은 다시 설치한 것임. 아메리카고조선 유트브 참고 바람 (지금은 영상삭제되고 없고, 럼블에는ᆢ)
떴다
오...
정상적인 비석은 깨지지 않습니다. 필시 저 비석은 인위적으로 옮긴거 아니면 가짜입니다.
책보고님과는 다른 맛이지만 어쨌든 맛집인건 똑같습니다. 역사맛집
💚💚💚💚💚
가짜 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