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해도 욕심이 더 많은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네요 에고가 좀 더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요. 무의식속에 더 감춰진 것이 있을 수 있죠. 그릇의 진흙물이 온전히 가라 앉은 사람도 있고 중간에 부유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수행자분이 수행 무용론을 말한 적이 있죠. 대부분의 모든 수행이 인위를 하나 더 붙이는 결과를 낳는다고요. 그렇지만 그 분의 그런 표현 또한 다른 수행자를 변하게 하거나 바꾸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들도 그가 보기에 어리석은 수행을 하고 있다 해도 언젠가는 스스로 자각을 할테고요. 어릴 적 생각했던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무아의 현존이지만 업식의 훈습에 따라 현생에 가져온 정보가 다릅니다. 그래서 에고의 성향은 80억 인구가 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아의 현존..은 수행의 유무와 전혀 관계없지만...그렇다고 무아의 공성에 빠지면 수행도 필요없다는 ..막행막식하게 되는 악취공에 빠지게 됩니다. 행위의 주체는 없는 안 아트만이지만..행위의 경험은 식을 이뤄서 윤회에 빠집니다. 무아를 체득하면 그 어떤 행위를 해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지고 무주상보시등 육바라밀을 이루게 되죠. 사랑을 베풀지만 사랑하는 자가 안에 없으므로 진정한 사랑을 이루게 되죠. 왜냐면 나를 내세우지 않고 무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무아를 설하는 부처님 설법의 대부분은 집착하지 마라의 의미로 많이 쓰였습니다.
@@foolBuddha 장문의 유익한 답글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나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관한 댓글을 쓴 이유는 굳이 지금 여기나 수행무용론에 관한 이야기를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으면 그렇게 될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전염되고 공명하게 될 텐데 오히려 그러한 표현이 인위적인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 바보붓다님.... 깨달을 내가 없다면서 마음이 있나요? 말하는거 들어보면 마음의 장난 마음 마음 이야기하는데 깨달은 나도 없다면 마음도 없어야하는거 아닙니까? 마음의 장난도 없어야죠 마음도 없는데.. 마음이 있다면 마음의 장난인줄 아는 그것은 있는데? 마음의 장난을 알고있는 그것은 뭡니까?
@@상응-p8m 마음이란 건 찰라(0.75초) 960번 변한다는 조건지으지며 생멸하는 현상이죠~~~ 마음이던 몸이던 어떤 개별체로 존재할 수가 없다 조건지으지면 생명하는 현상일 뿐이다 = 무아임 현재의 과학 정신학 교육학에서도 자아란 부동의 존재(아트만 영혼)가 아니라 생장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조건지으지며 만들어지는 "정체성"이라고하죠.
너무 앉아서 깨달음에 집착하기 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인연들을 통해 배우고 교훈을 얻어 더 지혜를 얻고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여 체득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종교에만 집착 하기 보다 삶속에서 살아 있는 공부를 통해 인과를 채득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발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더운 날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생 노 병 사 에 깨우침에 있어~ 태어나서 나에 모든 업보,,,업장,,,까르마들에서 완전히 해방,해탈되어지는 그런 기적을 체험 마주하게 되어진다면 360도 바뀌어지 나에 에고 몸뎅이를 마주하게 될것이고~ 그뒤 부터는 새로운 삶에 세상만사,,,삼라만상이 보여지고 들리어질 것이라는 것을 ~ 먼저 여여하게 마주한이가 흔적 남기어보고 가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상 만물과 세상사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인식하는 내가 없다면 그것들은 나에게 인식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TV에서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방영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보지 않는다면 영화가 나에게 보이고 인식됩니까? 영화가 나에게 보이고 인식된다는 것은 내가 있고,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시공간세상이 나에게 보입니다. 나는 주체이고 시공간세상은 대상입니다. 시공간세상과 시공간세상 속의 육신은 내가 아니고 내가 보는 대상입니다. 보는 내가 없으면 보는 행위가 있을 수 없으며 보여지는 현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공간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 보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세요. 단 육신은 내가 아닙니다. 육신이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일까 계속 찾아보세요.
@@신재식-n4s 육신이 내가 아니다는 지금의 수행자들의 사상이지 붓다의 사상은 아니지요 어떠한 차원의 연기는 육체로 부터 연유 하지요 붓다는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생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비추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인간중심 사상인 것입니다 비상 비비상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또한 자등명 법등명은 무엇이며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또한 첫번째 계율인 불상생은 중생의 몸을 보존 하라는 말이지요 육체는 내가 아니라면 인간은 모든 없으로 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업 또한 거론할 필요가 없지요 모든 생명체는 몸을 근간으로 하여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몸이 다른 이유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스님 말씀에 어제 X에서 읽었던 글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오네요.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글이어서 번역본과 원본 글 남길께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이제는 텅 비어 있다. 옛 학교는 여전히 있지만, 친구들은 없다. 어린 시절의 집은 그대로지만, 가족은 살지 않는다. 즐겨 찾던 카페는 여전히 있지만, 주문을 기억하던 바리스타는 떠났다. 거리는 익숙하지만, 사람들은 낯설다. 건물은 그대로지만, 그곳의 에너지는 달라졌다. 과거는 장소일 뿐이고, 현재가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You can return to the past, but it's empty now. Your old school is there, but your friend aren't. Your childhood home stands, but your family doesn't live there. The coffee shop you loved still exists, but the barista who knew your order has left. The street are familiar, but the faces aren't. The buildings are the same, But the energy has changed. The past is place, but the present is where life happens. So present is a gift🎁
말과 생각 행동 이전에 이미 이속에 이것이고 말과 생각 행동 이후든 이속에 이것입니다. 이속에 아바타를 끌고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절대 벗어날수 없으니 모두가 부처입니다... 의식의 관점만 확 돌이키면 이미 드러남과 합일. 이것이 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늘 현실속에 견성의 인연이 드러나 있지만 시절인연이 도래하고 못하고 차이. 한끗.
無. 사람아래 십자네개 아래 마음 40을 이루어서 마음 을 얻는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게 글자가 만들어졌는데 없다가 아니고 업다 입니다. 글자는 어떤 상태가 이루어짐을 표현하지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40을 이루어야 마음을 얻는지는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無는 업고 있는 넷을 십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밟는 중에 진실이 드러나고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요.
스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의 내용은 단순명료합니다. 깨달음(도, 법신, 해탈)이란 장시간의 어려운 수행, 참선, 실천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석가나 고승들처럼 특출한 소수만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수하다 코만지기 만큼 쉽고, 모든 중생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질문은, "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이 이미 주어져 있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온갖 백팔번뇌에 시달리고 있는가? " 입니다. 해탈과 깨달음이 모든 사람에게 지금 여기 있다면, 그들은 왜 아직도 온갖 번뇌, 혼란, 욕망, 걱정에 휩싸여 있는가요? "법신, 해탈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스님의 다음 번 영상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내 속에 뭔가를 발견하려면 그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관해야 한다. 바깥에 드러나는 것으로 속에 있는 놈의 실체를 밝혀 아는 것이 깨달음인데 속은 없다하고 하면 나는 못봤다 즉 모른다는 말이다. 한국 불교의 맹점이 나는 없다 있다에 빠지게 하는 연기법이다
예전에 전쟁이 터진 이라크에 돈을 벌러 간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이라크를 향하는 그를 모두 말렸었지만 이 한국인은 무척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걱정 안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내 곁에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라크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그렇게 이라크로 떠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라크의 무장 게릴라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게릴라들은 전세계에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납치한 한국인을 참수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납치당한 한국인이 공포에 떨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철수 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무장게릴라들의 카메라에 찍혀 전세계에 공개 되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군과 한국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결국 그 한국인은 인터넷으로 공개되는 가운데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공포 속에 몸부림치면서 희생당하는 그 영상은 그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를 찾아야 할 정도로 트라우마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수당한 사람은 그 한국인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납치당했던 이태리기자도 함께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이태리 기자는 “ 우리 이태리인들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죽일 테면 죽여라”라고 말하고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칼날을 받아들여서 이 또한 큰 인상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 이태리 기자가 종교가 있었는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깨달음의 요체는 바로 내가 평생 내가하는 생각으로. 내가 하는경험으로 살고 있기때문에 분별과 망상속에서 고통을 받는것을 깨닫고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으니. 그것을 깨닫기만한다면 . 우리가 평생 하고살았던 생각들 경험들이 그냥 바람이부면 흔들리는 나뭇가지 와 같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것입니다.. 우리집에 고양이를 세마리 키우는데 만약에 그아이들이 손이잘린다고 생각하면 아마 그아이들은 손이 잘리는 고통만 경험할뿐이지..우리들같이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나..또는 나는 왜 칠칠치 못하게 몸을 잘 살피지 못했나..하면서 자책하지 않는다는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내가하는 모든 생각.견해들이 헛되고 망상임을 알면 바로 붓다라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신것이죠
스님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써봅니다. 스님의 말씀의 핵심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깨달음(법신, 도, 해탈)이란 많은 수행과 참선과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또 석가나 고승들만 얻은 것이 아니고, 이미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머리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생들이 이미 깨달아 있다면, 어찌하여 온갖 백팔번뇌에 날마다 시달려야 하나요? 이미 깨달아 있다면, 석가처럼 조사들처럼 걸림없는 자유, 평온,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해탈이 , 깨달음이 "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쉽다." 면 어찌하여 무수한 중생들과 저는 아직도 온갖 갈등, 혼란, 애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요? 다음 번 동영상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준비해 해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나가다가 한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유신견으로 수십년을 살아왔습니다. 그 오염된 습은 깨어나도(유신견이 근본무명임을 알아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깨달으면 그 흐름(유신견 기반)에서 벗어나서 다른 흐름(무아 기반)에 들어가고 수행은 유신견의 습관 에너지를 지우는 과정입니다. 일상생활이 유신견을 근본으로 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유신견은 늘 우리 주변에서 으르렁 대며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방심하면 즉시 유신견에 오염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늘 깨어있으라고 했고 고타마는 방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저 푹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운동하면 되고 명상 기도 미사 제사 등등 따로 할 건 없지만 평생 유신견에 재오염되지 않기위해 깨어있기 방일하지 않기 이거 하나는 해야 합니다. 유신견에 재오염되면 무명이 시작되고 결국 유생노사 고통이 옵니다. 그럼 이만.
깨닳을 내가 없는데 무엇이 깨닳는가? --- - - - 지금 내가 없는데 스님은 누가 말씀하고 계십니까? 일체가 마음의 장난이고 환일 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알아가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하는 주체 또한 마음입니다. 없다 무아다 주장해도 - . 주장하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우리가 빈병이라 말하면 그것은 병이 없다는것이 아니고 . 병속이 텅 비었다는것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무아라 함은 내가 없다는것이 아니고.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이곧공이고. 공이 곧 색입니다.. 제법무아이자. 또 제법실상이지요.. 이것이 중도의 이치입니다..
깨닫는 내가 없다 하시지만 있습니다. 연기법이니 무이론에 의해 없다 주장하시지만 그냥 주장이지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렇다 하실것이면, 우습습니다. 부처님이 말하셨던 윤회도 부정하는게 현 불교계 아닙니까? 경우에 따라서만 부처님 말씀 가져다 사용하면 안되지요. 나란 존재 있습니다. 에고로 대표되는 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차원에서 본다면 소위 에고로 대표되는 나 란존재는 계속 변하기에 실체 없는 무상이기에 무아라 주장한다면 동의 합니다. 그러나 에고도 나 입니다. 뭐하러 아니라고 자꾸 무시합니까? 내손? 내 발? 나 맞습니다. 그러니 손 다치면 아프고 발 다치면 아픈겁니다. 아픈데 나가 아니니 무시하라 하면 안 아파집니까? 그냥 에고로 작동하는 윤회하는 무상한 나가 있다 인정하면 세상 쉬워집니다
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소승은 윤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고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에고인 의식을 통해서 나의 아뢰야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점수이고 수행입니다. 에고 역시도 법신의 한 부분이고 에고를 통해서 무아를 깨닫는 것이죠. 색을 통해서 공을 보듯이요. 무아의 현상적인 표현이 에고이고, 다만 현상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에고이기에 무상하고..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의 가합인 자아는 제법무아라 하신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제법무아인 에고가 없다면 성불또한 없습니다. 건강하세요. 자무합장
스님 먼저 쉬운 주제도 아니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장을 열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다만 댓글창은 굳이 안 열어두셔도 좋을듯 합니다. 댓글을 통해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아서... 불교의 모든 교리와 깨달음은 말로 문자로 해결할 수 없고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옆길로 새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음도 수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철저한 계와 선정으로 얻은 깊은 삼매를 통한 깨침이 아니고 인식론적인 전환을 깨달음으로 다 묶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착각도인이 많고 경전이 필요하지요. 감사합니다._()_
티벳불교를 보면 승려들이 서로 논쟁을 하는 법거랑 시간이 있는데… 상대의 말을 듣다가 그게 아니고 하며 박수를 탁 칩니다. 당신의 논에 대해 나의 논을 얘기하겠다는 것이죠. 서로 법에 대해 논의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건 좋다고 소승은 생각합니다. 다만 예의를 갖추지 않고 욕을 한다거나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비방하고 배격하는 글들은.. 조치를 합니다. 괴테의 말이 생각나네요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건강하세요.. 자무합장
지금 여기에서 짓고 있는 業이 나를 만들고 있음(集) 을 깨닫는게 無我입니다. 이 몸 안에 業을 지으면서 살고 있는 '나'란 놈은 본래 없음 을 깨닫는게 空이고요..무아니 공이니 사실 다 방편이고 언어시설입니다만은... 스님 법문 잘 들었습니다. 윤회나 천도같은 낭설이나 떠드는 가짜스님들이 여전히 유튜브에 판치고 있지만 최근들어 스님처럼 제대로 공부하신 분들의 영상들이 올라오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건승하세요.😊
부처의 깨달음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허투루들어서 못 깨달아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이 연기법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면 목표와 방법이 포함된 바를 알게돼 부처는 목표와 방법이 일치된것을 깨달은것 깨달으려는것은 집착이라 할 수 있지만 깨달으면 즉 연기법을 알고나면 그 집착은 해소돼 연기법은 무아나 공과 다르게 집착이 원천적 원리적으로 불가능 그래서 부처는 깨달았다고 선언했을 듯
아니요. 하셨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부처님도 오전엔 탁발을 하시고 오후엔 명상을 하셨습니다. 명상이 필요해서 명상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이 없으면 명상을 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누가 찾아오거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처리하시고 일이 없으면 고요히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 당시엔 승가집단에 주방이 없고 탁발을 했고 농사또한 짓지 않아서 법문하는 일 외에 사실 특별히 할 것이 없잖아요..^^ 그냥 고요히 선정에 있으신 거죠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면 일상이 명상이라 하거나 안하거나 별 차이 없습니다.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의 무아라 아니라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아안에는 나라는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죠. 그 무아가 생각, 감정, 오감등의 의식을 일으키지만 그 의식자체는 무상한 연기적 자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무상한 연기적 자아를 통해 아뢰야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니까 가짜를 빌려 진짜(무아)를 밝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은 공 자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공이기 때문입니다. 공을 인식하기 위해선 색을 빌려야 합니다. 색을 통해 우리는 공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색은 무상하기에 공으로 돌아갑니다. 공이 텅빈듯 하지만 그 안에 색을 드러내 공의 존재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진공이지만 묘유가 있고 그 묘유를 통해서 진공을 꿰뚫습니다. 달리말하면 주체가 없는 의식이 무상한 오온의 에고가 깨달아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고가 본성과 가까워지고 하나되는 과정이 곧 점수라 할 수 있죠. 석가는 갖은 노력과 수행을 하였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다가 깨닫고자 하는 나라는 자의식이 가장 문제 된다는 것... 용수보살의 말처럼 부처를 이루려는 그 마음이 가장 큰 방해라는 것 자의식이 사라지자 면면히 드러나는 무아를 체득하고 무상정득각을 이뤘다 볼 수 있습니다
“깨딜음이 그냥 무아를 깨닫는것이다“ 가 아니고 무아가 보살도의 시작입니다.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지면서 금강경의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이면 즉시 보살입니다. 선업을 쌓는 인간의 굴래에서 벗어나 진정한 보살도가 시작됩니다. 법화경을 봉독해야합니다. 모두 성불하세요. ㅋㅋㅎㅎㅎ
결과만 딱 따와서 정답인것 마냥 말씀하시는데 그걸 알기위해 온갖 수행을 하는것 아닌가요? 복잡한방정식문제에 그 정답만 알려준다면 그게 수학문제풀이의 의미가 있을까요? 참된 깨달음은 허접한 말장난이 아니라 아상을 비롯한 사상을 타파하고 연기법과 무아 공 무상 중도를 이해하고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법을 통해 갈애와 집착 분별심 탐진치 삼독심을 닦아 청정심을 이룬 후 아무런 조건없이 무주상보시를 실천 할 수있는 경지가 바로 깨달음이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로 나타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일회성견성체험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마음의 정체를 밝혀 모든 중생이 평온 고요하게 상락아정 할 수 있는 방도를 밝혀 주시는 것이지요. 모든 관념의 상을 떠난 무위의 관점으로 볼때 스님의 결론과 비슷하나 깨달음의 정답인양 결코 가벼히 입에 올릴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자신의 무아를 체득했다고 해서 수행이 불필요하고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아의 체득과 별개로..사성제와 팔정도, 무상, 연기, 공의 도리는 익히고 학습해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성품을 돈오했다고 이런 내용까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자신의 무아를 체득한 아래 공부를 하는 것과 자신의 무아를 체득하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과는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리고 무아적인 측면에서는 정진할 필요가 없지만 실질적인 면에서는 식을 바꾸기 위해 정진해야 합니다. 이 역시도 무아를 체득한 아래 정진하면 그 길이 더욱 빠르겠지요. 그리고 분명 깨달음은 가벼히 올릴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가 정진해가며 찾아야 할 문제겠지요.. 감사합니다. 여여하십시오.
@@foolBuddha 저의 무례한 글에 친절한 답변을 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분들에게 좋은 주제이기에 몇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스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무아는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즉 '나'라는 것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 불변하는 고유한 실체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원인과 조건들의 因緣和合(인연화합)에 의해 生成(생성)되었다가 變遷(변천) 消滅(소멸)하는데 지속 불변하는 主人公인 실체가 없다 보니 無我 無自性인 것이고 계속 변하다보니 空하다 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마침내 소멸되는 것이기에 無常(무상)한 것이며 그럼에도 현상계에 어떠한 相을 가지고 한시적으로 존재하기에 있다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는 非有非無의 中道라 불리는 것이지요. 또 이 모든 원인 조건들 또한 다른 원인 조건들에 의지하고 그것들 또한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생멸 변천하는 무한 연결 고리의 관계이므로 주와 객이 본래 하나(不二)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서 諸法無我(제법무아) 一切皆空(일체개공)과 諸行無常(제행무상) 中道實相(중도실상) 不二의 진리가 비롯되는 것이지요. 나아가 아무리 변하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끝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무상함에 집착하니 결국 괴로움이 생 하는 것이기에 一切皆苦(일체개고)라는 진리가 도출되며 이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이를 멸하는 방도를 제시하는 것이 四聖諦(사성제) 八正道(팔정도) 六波羅蜜(육바라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 공 무아 무상 중도 고 불이는 이름만 다르지 결국 한 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틀어 緣起空性아란 단어가 적합할 것 같습니다. 연기법이야말로 부처님께서 大覺(대각)하신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우주 법계에 두루 통용되는 만고의 진리이며 불교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청정심이라는 심정적요소와 이론적 요인으로서의 연기법 등이 합일되어 구축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무아만 따로 떼어내어 이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모든 진리를 체득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아상을 비롯한 사상과 탐진치 번뇌 망상을 떨쳐낸 청정심(본래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내 안에 이러한 청정심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마음전체를 이 청정심으로 리셑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모든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마구니를 물리치시고 見明星悟道를 이루신 심적 상태가 바로 이 청정심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스님께서 말씀하신 '지금 여기 이대로'를 번뇌 망상 이기심으로 채워진 我相이 다 떨어져 나간 청정심으로 본다면 이를 무아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장황한 알음알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eeking_the_truth_2073 감사합니다. 윤회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제법무아인데 무엇이 있어 윤회하는가라는 모순에 봉착하지만 윤회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하겠습니다. 윤회는 A가 죽어서 어떤 동일성을 유지한 체 내세에 A′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보다는 A가 지은 有形 無形의 선악의 업보와 A를 구성했던 원소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후대에 드러나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환경에 영향을 미쳐 그들의 운명에 개입하는 것으로 윤회를 재해석 할 수 있습니다. 九類衆生(구류중생)을 하나의 生命群(생명군)으로 볼 때 일종의 集團輪廻(집단윤회)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즉 끝없는 연기의 사슬이 윤회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계는 그 안의 내포물들이 생멸 변천하면서 상호 융합하여 또 다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변화하고 다시 사라지는 현상을 끝 없이 반복하는 존재 현상들의 집합체로서 법계에서는 앞선 제법은 반드시 현재의 제법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것들이 離合集散(이합집산)하여 다시 미래의 존재 현상을 일으키는 연기의 연속이 바로 윤회 현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어떠한 업도 짓지 않은 말 그대로 한 번도 로그인되지도 않은 그야말로 신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특성과 지능 성격등이 큰 틀에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유전이라 할 수 있지만 유전인자 와 더불어 나를 태어나게 한 모든 유무형의 인연들과 태어난 후 이 몸과 마음을 형성하게 한 모든 인연들의 화합이 현재의 나이므로 태어나기 전의 나는 나로 연기될 유무형의 가능성으로 분산되어 존재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나라고 정해지지 않은 無有定法인 공의 상태라 할 수 있지요. 다만 우리는 존재의 영역의 한계에 갇혀 살고 있기에 윤회의 주체를 무언가 시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실체의 묶음으로 파악하기에 혼돈이 일어나지만 그 주체를 무언가로 연기될 가능성의 총합으로 보면 윤회의 얼굴이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엷은 안개처럼 분산하여 두루 산재했던 전생의 나의 모습과 또 현생에 내가 지은 업과 나를 구성헀던 원소들로 영향 받을 미래의 다른 존재 현상을 통해 본래무일물이며 공한 내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추량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부처님처럼 생사 유무 시비 집착을 모두 여읜 청정공의 경지에서는 전생 현생의 모든 업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미래에 선순환만 일으키시므로 윤회를 극복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제 알음알이에 불과하니 단순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세요^ ^()
다 같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해도 욕심이 더 많은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네요
에고가 좀 더 있는 사람도 있을테고요. 무의식속에 더 감춰진 것이 있을 수 있죠. 그릇의 진흙물이 온전히 가라 앉은 사람도 있고
중간에 부유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때 유지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수행자분이 수행 무용론을 말한 적이 있죠.
대부분의 모든 수행이 인위를 하나 더 붙이는 결과를 낳는다고요. 그렇지만 그 분의 그런 표현 또한 다른 수행자를 변하게 하거나
바꾸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들도 그가 보기에 어리석은 수행을 하고 있다 해도 언젠가는 스스로 자각을 할테고요.
어릴 적 생각했던 의견을 적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무아의 현존이지만 업식의 훈습에 따라 현생에 가져온 정보가 다릅니다. 그래서 에고의 성향은 80억 인구가 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아의 현존..은 수행의 유무와 전혀 관계없지만...그렇다고 무아의 공성에 빠지면 수행도 필요없다는 ..막행막식하게 되는 악취공에 빠지게 됩니다. 행위의 주체는 없는 안 아트만이지만..행위의 경험은 식을 이뤄서 윤회에 빠집니다. 무아를 체득하면 그 어떤 행위를 해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지고 무주상보시등 육바라밀을 이루게 되죠. 사랑을 베풀지만 사랑하는 자가 안에 없으므로 진정한 사랑을 이루게 되죠. 왜냐면 나를 내세우지 않고 무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무아를 설하는 부처님 설법의 대부분은 집착하지 마라의 의미로 많이 쓰였습니다.
@@foolBuddha 장문의 유익한 답글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나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관한 댓글을 쓴 이유는
굳이 지금 여기나 수행무용론에 관한 이야기를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으면 그렇게 될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전염되고 공명하게 될 텐데 오히려 그러한 표현이 인위적인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심타-q2g 무아는 원어로는 anatman(직역하면 무본질)이라고 합니다.
an/ atman(본질)의 부정명사죠.
하..................... 바보붓다님.... 깨달을 내가 없다면서 마음이 있나요? 말하는거 들어보면 마음의 장난 마음 마음 이야기하는데 깨달은 나도 없다면 마음도 없어야하는거 아닙니까?
마음의 장난도 없어야죠 마음도 없는데.. 마음이 있다면 마음의 장난인줄 아는 그것은 있는데? 마음의 장난을 알고있는 그것은 뭡니까?
@@상응-p8m 마음이란 건 찰라(0.75초) 960번 변한다는 조건지으지며 생멸하는 현상이죠~~~
마음이던 몸이던 어떤 개별체로 존재할 수가 없다 조건지으지면 생명하는 현상일 뿐이다 = 무아임
현재의 과학 정신학 교육학에서도 자아란 부동의 존재(아트만 영혼)가 아니라 생장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조건지으지며 만들어지는 "정체성"이라고하죠.
스님, 고맙습니다.😊
고도로 수행하신 분들을 유튜브로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은 세상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말씀에 동감합니다.
살아생전에 이렇게라도 뵙게되는군요.
그쪽은 그쪽대로 이쪽은 이쪽대로 불국토를 만들어가요~
감사합니다 스님
깨달음을 위한 조건은 없다
지금 여기 이것뿐이다!!
이분 세상을 보는 눈이 참 좋아보입니다 🙏🏻 저도 할머니 산소에 갔다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순간적으로 깨달음이 시작되었어요 불경을 본다던지 성경을 본다던지 그런곳에서 오는게 아니란걸 알게 되었죠
최고의 최상의 개념정리가된
완전하고온전한 지고지산의
법문입니다 이순간직지 바로
깨어나는군요 참나를자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명쾌하게 깨달음을설명하셨네,,,,조주스님보다 더훌륭하신 스님!~감사합니다!!
스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깨달음이란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크게 생각했을까요
지금 이순간의 현존 인데..
관계없이 저는 이미 깨달았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한 법믄 입니다ㅡ 감사 합니다ㅡ
주머니에 돈이 있다 없듯이, 생각이 왔다 가고, 감정이 왔다가고, 인생이 왔다가고 , 그모든게 왔다가는 그 자리 그것. 항상언제나 있는 그것. 그것이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음의 상이 없다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분설명이정말 알기쉽계 설명하시내 아무리 좋은 설도 듯는 자가 알지 모한면 허공 설명인대 들을수록 맞이남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마저 가 잔소리가되는분이내요 감탄하갰내요
너무 앉아서 깨달음에 집착하기 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의 인연들을 통해 배우고 교훈을 얻어 더 지혜를 얻고 용서와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여 체득함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종교에만 집착 하기 보다 삶속에서 살아 있는 공부를 통해 인과를 채득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발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한물건도 없다.
깨달을 내가 없다 . 관념의 상에 속지마라 . 체험 대법문 감사합니다 🎉 !
감사합니다. 저는 해탈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그무엇도 제마음을 채울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그뜻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놓으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탄식이 절로나왔습니다...명법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다시는 분들도 장난 아니심니다
많은 의견과 토론이 나를 성장 시킴니다
붓다님 말씀을 들어보니 나에게 필요한 수행이 "무아" 라는 개념과 어느정도비슷한데
생각은 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막막 함니다
이것을 께달을수 있다면 전 그것으로 만족할것 겉습니다
스님 귀한법문 감사드립니다🎉
무더운 날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생 노 병 사 에 깨우침에 있어~
태어나서 나에 모든 업보,,,업장,,,까르마들에서 완전히 해방,해탈되어지는
그런 기적을 체험 마주하게 되어진다면 360도 바뀌어지 나에 에고 몸뎅이를 마주하게 될것이고~
그뒤 부터는 새로운 삶에 세상만사,,,삼라만상이 보여지고 들리어질 것이라는 것을 ~
먼저 여여하게 마주한이가 흔적 남기어보고 가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
맞는 말씀입니다. 아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과 세상사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인식하는 내가 없다면 그것들은 나에게 인식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TV에서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방영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보지 않는다면 영화가 나에게 보이고 인식됩니까?
영화가 나에게 보이고 인식된다는 것은 내가 있고,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시공간세상이 나에게 보입니다. 나는 주체이고 시공간세상은 대상입니다.
시공간세상과 시공간세상 속의 육신은 내가 아니고 내가 보는 대상입니다.
보는 내가 없으면 보는 행위가 있을 수 없으며 보여지는 현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공간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 보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찾으세요. 단 육신은 내가 아닙니다.
육신이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나일까 계속 찾아보세요.
@@신재식-n4s
육신이 내가 아니다는 지금의 수행자들의
사상이지 붓다의 사상은 아니지요
어떠한 차원의 연기는 육체로 부터
연유 하지요
붓다는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생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비추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인간중심 사상인 것입니다
비상 비비상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또한 자등명 법등명은 무엇이며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또한 첫번째 계율인 불상생은 중생의
몸을 보존 하라는 말이지요
육체는 내가 아니라면 인간은 모든
없으로 부터 자유로울 것이며 업 또한
거론할 필요가 없지요
모든 생명체는 몸을 근간으로 하여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몸이 다른 이유입니다
지금&여기&이것.
동영상 공유 하심에 항상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바램 하시는 모든 소원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추석 보내세요.
감사합니다.명쾌한 법문에 감동을 할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스님 말씀에 어제 X에서 읽었던 글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나오네요.
좋은 말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글이어서 번역본과 원본 글 남길께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이제는 텅 비어 있다.
옛 학교는 여전히 있지만, 친구들은 없다.
어린 시절의 집은 그대로지만, 가족은 살지 않는다.
즐겨 찾던 카페는 여전히 있지만, 주문을 기억하던 바리스타는 떠났다.
거리는 익숙하지만, 사람들은 낯설다.
건물은 그대로지만, 그곳의 에너지는 달라졌다.
과거는 장소일 뿐이고, 현재가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You can return to the past,
but it's empty now.
Your old school is there,
but your friend aren't.
Your childhood home stands,
but your family doesn't live there.
The coffee shop you loved still exists,
but the barista who knew your order has left.
The street are familiar,
but the faces aren't.
The buildings are the same,
But the energy has changed.
The past is place,
but the present is where life happens.
So present is a gift🎁
여여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지금 여기에 감사합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세요! 그게 성불입니다!
언제까지 무아곁에서 머무르실겁니까!
나무지장보살 나무미륵보살 나무비로자나불
옴기리기리 바아라 불반다 훔바탁~극락왕생
감사합니다 무상정등정각 경지의 깨달은자는 윤회없다
말과 생각 행동 이전에 이미 이속에 이것이고 말과 생각 행동 이후든 이속에 이것입니다.
이속에 아바타를 끌고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절대 벗어날수 없으니 모두가 부처입니다...
의식의 관점만 확 돌이키면 이미 드러남과 합일. 이것이 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늘 현실속에 견성의 인연이 드러나 있지만 시절인연이 도래하고 못하고 차이. 한끗.
모처럼 솔직한분을 뵙습니다
아하!!
無. 사람아래 십자네개 아래 마음
40을 이루어서 마음 을 얻는다는 뜻이 되는데 그렇게 글자가 만들어졌는데
없다가 아니고 업다 입니다.
글자는 어떤 상태가 이루어짐을 표현하지 이루어지지 않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40을 이루어야 마음을 얻는지는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無는 업고 있는 넷을 십으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밟는 중에 진실이 드러나고
생각이 바뀌어 집니다.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요.
와우~ 진짜 매트릭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신분. 육체에 갇힌한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의 균형이 필요할듯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진정 깨닫기를.. 🙏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여하십시오
🎉🎉🎉🎉🎉❤❤❤
내나이일흔을훌쩍넘긴사람입니다 지금까지숫한공부라고하는것을해보았습니다그런데도아무것도모르겟고아상만높이집니다그래서이제는자연의이치대로살자고마음정했습니다이우주가곧부처요천지만물이부처라생각하고오는거마다않고가는거잡지않고자연이주는대로먹고이렇게살고있습니다우주천지에맡겨두고살다보니이것도깨달으이아닌가하는생각이들어몇자오려봅니다스님늘건강하셔서어리석어서끌려다니는사람들의빛이되어주시면합니다()()()
너무간결하신각 을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순적이죠.
주체가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런 인식을 하는 건 주체가 있어야 가능한거죠
내가 없고 내가 있을 뿐이다
경험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것 ㅡ내 술 취함이 내것인듯이 ㅡ지 술취함 을 사깃치는 지칭 법사들이 많습니다ㅡ감사 합니다ㅡ
스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당히 도움이 되었으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의 내용은 단순명료합니다.
깨달음(도, 법신, 해탈)이란 장시간의 어려운 수행, 참선, 실천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석가나 고승들처럼 특출한 소수만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수하다 코만지기 만큼 쉽고, 모든 중생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질문은, "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이 이미 주어져 있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은 온갖 백팔번뇌에 시달리고 있는가? " 입니다. 해탈과 깨달음이 모든 사람에게 지금 여기 있다면, 그들은 왜 아직도 온갖 번뇌, 혼란, 욕망, 걱정에 휩싸여 있는가요?
"법신, 해탈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스님의 다음 번 영상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그것이 간절합니다.
저도 그것이 간절 합니다.
내가 없다는 식으로 나아가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내 속에 뭔가를 발견하려면 그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관해야 한다.
바깥에 드러나는 것으로 속에 있는 놈의 실체를 밝혀 아는 것이 깨달음인데 속은 없다하고 하면 나는 못봤다 즉 모른다는 말이다.
한국 불교의 맹점이 나는 없다 있다에 빠지게 하는 연기법이다
윤회의종식 내가없는데 누가윤회? 쏙이 시원합니다
휼륭하십니다
다만
업식인 상을 완젼히 벗어나지 못함이 왼뺨맞고, 오른뺨을 내밀지 못하네요!
희론은 풍성해도 막상 숨 넘어갈 지경이면 어떨까?😊
예전에 전쟁이 터진 이라크에 돈을 벌러 간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이라크를 향하는 그를 모두 말렸었지만 이 한국인은 무척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걱정 안한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내 곁에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라크에 가서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그렇게 이라크로 떠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놀라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라크의 무장 게릴라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게릴라들은 전세계에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납치한 한국인을 참수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납치당한 한국인이 공포에 떨면서 미군과 한국군을 철수 시켜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무장게릴라들의 카메라에 찍혀 전세계에 공개 되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군과 한국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결국 그 한국인은 인터넷으로 공개되는 가운데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공포 속에 몸부림치면서 희생당하는 그 영상은 그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를 찾아야 할 정도로 트라우마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수당한 사람은 그 한국인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납치당했던 이태리기자도 함께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이태리 기자는 “ 우리 이태리인들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죽일 테면 죽여라”라고 말하고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칼날을 받아들여서 이 또한 큰 인상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 이태리 기자가 종교가 있었는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숨넘어가는 경험만 있을뿐이죠..
@@남현주-d4y 그렇게되면 바로 기절...깨어날 무렵 이 몸띵이없음을. 인지할. 때 어쩌랴우?
깨달음의 요체는 바로 내가 평생 내가하는 생각으로. 내가 하는경험으로 살고 있기때문에 분별과 망상속에서 고통을 받는것을 깨닫고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으니. 그것을 깨닫기만한다면 .
우리가 평생 하고살았던 생각들 경험들이 그냥 바람이부면 흔들리는 나뭇가지 와 같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것입니다..
우리집에 고양이를 세마리 키우는데 만약에 그아이들이 손이잘린다고 생각하면 아마 그아이들은 손이 잘리는 고통만 경험할뿐이지..우리들같이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나..또는 나는 왜 칠칠치 못하게 몸을 잘 살피지 못했나..하면서 자책하지 않는다는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내가하는 모든 생각.견해들이 헛되고 망상임을 알면 바로 붓다라고 석가모니께서 설하신것이죠
@@남현주-d4y 내가. 뜻하는 바는 이런 믿믿한 담론이 아니예요..그리고 말씀이 너무 길어요...행위의 주체가 없이 행위함 정도라면 좀 줄인. 희론 이랄까 ㅎ
깨달음은 진리를 알게된다는뜻
일상이 해탈이다. 바로 지금 이것
관세음보살_ ()_
바보붓다다운 명쾌한 법문. 獨也淸靜. 😅
삶을 깨달어야지
평생 무아만 깨달으려고 하는것은 헛된망상입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산다는것이 다 꿈과 같은것을 깨닫는것인데 삶이나 인생을 망상속에서 살던 에고의 나에서 이대로 여법한 진정한 나로써 살아가자는것이 붓다의 가르침 이죠
간만에 인정, 사기꾼들과는 다른분
스님의 다른 영상보다가 궁금한게 생겼습니다. 노자의 천지불인을 인용하시면서 하늘은 인하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하늘에 기도해도 하늘은 응답이 없는건가요? 기도가 소용없다면 안 할려고요.
기도의 효용은 자신의 식과 마음을 정화하고 참회하는데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별개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효용은 분명 있습니다. 소승도 날마다 부처님께 절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는 나의 욕망 원을 위해 하는 것은 불교의 기도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늘은 바로 나입니다 인내천 아시지요? 사람이 곧 하늘이기 때문에...
깨달음도 현상으로 봐야할까요?
오르지 깨닫은 상태가 있고 깨달음이라고 하는 작용이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번뇌 망상이 죽끊듯이 일어나는 지금 마음이 먼 깨달음 인가~ 그걸 녹이는 정진을 해야지 멀 다 깨달아있다는 것인지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명을 깨친분 아닌가~ 그런분이 가르치는 손가락쪽만 쳐다보면 되는데. .
내가 없다 하면서 이렇게 유트브에서 말하는사람은 무엇입니까 무아이지만 개별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스님말씀 잘 들었습니다.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어서 이렇게 써봅니다.
스님의 말씀의 핵심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깨달음(법신, 도, 해탈)이란 많은 수행과 참선과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또 석가나 고승들만 얻은 것이 아니고, 이미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머리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중생들이 이미 깨달아 있다면, 어찌하여 온갖 백팔번뇌에 날마다 시달려야 하나요? 이미 깨달아 있다면, 석가처럼 조사들처럼 걸림없는 자유, 평온,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해탈이 , 깨달음이 "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쉽다." 면
어찌하여 무수한 중생들과 저는 아직도 온갖 갈등, 혼란, 애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를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요?
다음 번 동영상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준비해 해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나가다가 한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유신견으로 수십년을 살아왔습니다. 그 오염된 습은 깨어나도(유신견이 근본무명임을 알아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깨달으면 그 흐름(유신견 기반)에서 벗어나서 다른 흐름(무아 기반)에 들어가고 수행은 유신견의 습관 에너지를 지우는 과정입니다. 일상생활이 유신견을 근본으로 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유신견은 늘 우리 주변에서 으르렁 대며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방심하면 즉시 유신견에 오염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늘 깨어있으라고 했고 고타마는 방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저 푹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운동하면 되고 명상 기도 미사 제사 등등 따로 할 건 없지만 평생 유신견에 재오염되지 않기위해 깨어있기 방일하지 않기 이거 하나는 해야 합니다. 유신견에 재오염되면 무명이 시작되고 결국 유생노사 고통이 옵니다. 그럼 이만.
윤회는 영원합니다
그걸 벗어난다고
설정함 자체는 허무맹랑입니다
법문 감사합니다.
근데 괴롭고 싫은 마음은
어떻게 하는건가요?
갈애를 버리고 살아야 무지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본성인 갈애가 무지를 만듭니다. 무지를 벗어나는 것이 진리입니다.
깨닳을 내가 없는데 무엇이 깨닳는가? --- - - - 지금 내가 없는데 스님은 누가 말씀하고 계십니까? 일체가 마음의 장난이고 환일 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알아가는 것이 수행이고 수행하는 주체 또한 마음입니다. 없다 무아다 주장해도 - . 주장하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우리가 빈병이라 말하면 그것은 병이 없다는것이 아니고 . 병속이 텅 비었다는것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무아라 함은 내가 없다는것이 아니고.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이곧공이고. 공이 곧 색입니다..
제법무아이자. 또 제법실상이지요..
이것이 중도의 이치입니다..
오온개공으로서 이 세상의 나는 무아입니다.
금강경에서 이 세상은 꿈 속입니다.
이 꿈을 꾸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 존재가 진공묘유의 진짜 나인거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입니다. 아바타 속의 진짜 존재 ^^
깨닫는 내가 없다 하시지만 있습니다. 연기법이니 무이론에 의해 없다 주장하시지만 그냥 주장이지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그렇다 하실것이면, 우습습니다. 부처님이 말하셨던 윤회도 부정하는게 현 불교계 아닙니까? 경우에 따라서만 부처님 말씀 가져다 사용하면 안되지요. 나란 존재 있습니다. 에고로 대표되는 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차원에서 본다면 소위 에고로 대표되는 나 란존재는 계속 변하기에 실체 없는 무상이기에 무아라 주장한다면 동의 합니다. 그러나 에고도 나 입니다. 뭐하러 아니라고 자꾸 무시합니까? 내손? 내 발? 나 맞습니다. 그러니 손 다치면 아프고 발 다치면 아픈겁니다. 아픈데 나가 아니니 무시하라 하면 안 아파집니까? 그냥 에고로 작동하는 윤회하는 무상한 나가 있다 인정하면 세상 쉬워집니다
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소승은 윤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고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에고인 의식을 통해서 나의 아뢰야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점수이고 수행입니다. 에고 역시도 법신의 한 부분이고 에고를 통해서 무아를 깨닫는 것이죠. 색을 통해서 공을 보듯이요.
무아의 현상적인 표현이 에고이고, 다만 현상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에고이기에 무상하고..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의 가합인 자아는 제법무아라 하신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제법무아인 에고가 없다면 성불또한 없습니다. 건강하세요. 자무합장
어렵다 ㅠㅠ
@@soeony 걷고 걷다보면 길이 보이겠지요. 건강하세요
스님 먼저 쉬운 주제도 아니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장을 열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다만 댓글창은 굳이 안 열어두셔도 좋을듯 합니다. 댓글을 통해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아서... 불교의 모든 교리와 깨달음은 말로 문자로 해결할 수 없고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옆길로 새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음도 수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철저한 계와 선정으로 얻은 깊은 삼매를 통한 깨침이 아니고 인식론적인 전환을 깨달음으로 다 묶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착각도인이 많고 경전이 필요하지요. 감사합니다._()_
티벳불교를 보면 승려들이 서로 논쟁을 하는 법거랑 시간이 있는데… 상대의 말을 듣다가 그게 아니고 하며 박수를 탁 칩니다. 당신의 논에 대해 나의 논을 얘기하겠다는 것이죠.
서로 법에 대해 논의하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건 좋다고 소승은 생각합니다.
다만 예의를 갖추지 않고 욕을 한다거나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비방하고 배격하는 글들은.. 조치를 합니다.
괴테의 말이 생각나네요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건강하세요.. 자무합장
@@foolBuddha합장 올립니다_()_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에고를 소멸해야만 불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마구니(에고)를 항복시켜서 해탈을 하였죠. 그래서 화두, 묵조선, 염불 같은 수행을 통해서 에고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육조단경, 수심결, 직지심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
지금 여기에서 짓고 있는 業이 나를 만들고 있음(集) 을 깨닫는게 無我입니다. 이 몸 안에 業을 지으면서 살고 있는 '나'란 놈은 본래 없음 을 깨닫는게 空이고요..무아니 공이니 사실 다 방편이고 언어시설입니다만은...
스님 법문 잘 들었습니다.
윤회나 천도같은 낭설이나 떠드는 가짜스님들이 여전히 유튜브에 판치고 있지만 최근들어 스님처럼 제대로 공부하신 분들의 영상들이 올라오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건승하세요.😊
부처의 깨달음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허투루들어서 못 깨달아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이 연기법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면
목표와 방법이 포함된 바를 알게돼
부처는 목표와 방법이 일치된것을 깨달은것
깨달으려는것은 집착이라 할 수 있지만
깨달으면 즉 연기법을 알고나면
그 집착은 해소돼
연기법은 무아나 공과 다르게
집착이 원천적 원리적으로 불가능
그래서 부처는 깨달았다고 선언했을 듯
스님, 정말 궁굼한 것이 있는데요.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명상을 한 번도 안 하셨나요?
아니요. 하셨습니다. 아함경에 보면
부처님도 오전엔 탁발을 하시고 오후엔 명상을 하셨습니다.
명상이 필요해서 명상을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이 없으면 명상을 하셨습니다.
그 시간에 누가 찾아오거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처리하시고
일이 없으면 고요히 명상에 드셨습니다.
그 당시엔 승가집단에 주방이 없고
탁발을 했고
농사또한 짓지 않아서
법문하는 일 외에 사실 특별히 할 것이
없잖아요..^^
그냥 고요히 선정에 있으신 거죠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면
일상이 명상이라
하거나 안하거나 별 차이 없습니다.
무아라면 아무것도 없다면 - . 스님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스님의 그건 누구죠?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의 무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인연생기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이지 거기에 어떤 고정불변하는 자아기 없다는 얘기입니다.
깨달을 내가 없다는 걸 깨닫는 주체는 ?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의 무아라 아니라 나라고 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아안에는 나라는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죠.
그 무아가 생각, 감정, 오감등의 의식을 일으키지만 그 의식자체는 무상한 연기적 자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무상한 연기적 자아를 통해 아뢰야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니까 가짜를 빌려 진짜(무아)를 밝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은 공 자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공이기 때문입니다. 공을 인식하기 위해선 색을 빌려야 합니다. 색을 통해 우리는 공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색은 무상하기에 공으로 돌아갑니다.
공이 텅빈듯 하지만 그 안에 색을 드러내 공의 존재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진공이지만 묘유가 있고 그 묘유를 통해서 진공을 꿰뚫습니다.
달리말하면 주체가 없는 의식이 무상한 오온의 에고가 깨달아 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고가 본성과 가까워지고 하나되는 과정이 곧
점수라 할 수 있죠.
석가는 갖은 노력과 수행을 하였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다가 깨닫고자 하는 나라는 자의식이 가장 문제 된다는 것...
용수보살의 말처럼
부처를 이루려는 그 마음이 가장 큰 방해라는 것
자의식이 사라지자 면면히 드러나는
무아를 체득하고 무상정득각을 이뤘다 볼 수 있습니다
윤회가 더 재밌지 않습니까??
보살은 윤회에 오히려 뚸어들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무아에 윤회가 존재할 수가 없죠?ㅎ 애초부터 윤회할 존재가 없는데, 윤회를 어떻게 됨?
무아윤회 = 단멸론
유아윤회 = 상주론
ㅎㅎㅎ
깨달음이 아니라 깨어남 아닌가요?
그렇겠죠...깨어남 ^^
“깨딜음이 그냥 무아를 깨닫는것이다“ 가 아니고
무아가 보살도의 시작입니다.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지면서 금강경의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이면 즉시 보살입니다.
선업을 쌓는 인간의 굴래에서 벗어나 진정한 보살도가 시작됩니다. 법화경을 봉독해야합니다.
모두 성불하세요. ㅋㅋㅎㅎㅎ
뭔 소리를 하는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누누이 말해주는데도...
생각만으로 윤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냐..
습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깨달으면 법도 법이 아니거늘. 윤회라는 망상이 붙을 자리가 있기나 할까요..ㅎㅎ
@@남현주-d4y 생각과 습을 제거 못하고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 입니다.
한국불교 대표적인 표상 이라할수 있습니다
내가 내머리로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즉견여래
부디..내가 하는 모든생각이 허상이고 망상임을 깨우치면 바로 붓다 입니다..나무 아미타불
@@남현주-d4y ㅋㅋㅋ
결과만 딱 따와서 정답인것 마냥 말씀하시는데 그걸 알기위해 온갖 수행을 하는것 아닌가요?
복잡한방정식문제에 그 정답만 알려준다면 그게 수학문제풀이의 의미가 있을까요? 참된 깨달음은 허접한 말장난이 아니라 아상을 비롯한 사상을 타파하고 연기법과 무아 공 무상 중도를 이해하고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법을 통해 갈애와 집착 분별심 탐진치 삼독심을 닦아 청정심을 이룬 후 아무런 조건없이 무주상보시를 실천 할 수있는 경지가 바로 깨달음이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로 나타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일회성견성체험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과 마음의 정체를 밝혀 모든 중생이 평온 고요하게 상락아정 할 수 있는 방도를 밝혀 주시는 것이지요. 모든 관념의 상을 떠난 무위의 관점으로 볼때 스님의 결론과 비슷하나 깨달음의 정답인양 결코 가벼히 입에 올릴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자신의 무아를 체득했다고 해서 수행이 불필요하고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아의 체득과 별개로..사성제와 팔정도, 무상, 연기, 공의 도리는 익히고 학습해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성품을 돈오했다고 이런 내용까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요.
다만 자신의 무아를 체득한 아래 공부를 하는 것과 자신의 무아를 체득하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과는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리고 무아적인 측면에서는 정진할 필요가 없지만 실질적인 면에서는 식을 바꾸기 위해 정진해야 합니다. 이 역시도 무아를 체득한 아래 정진하면 그 길이 더욱 빠르겠지요.
그리고 분명 깨달음은 가벼히 올릴 문제가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가 정진해가며 찾아야 할 문제겠지요.. 감사합니다. 여여하십시오.
@@foolBuddha 저의 무례한 글에 친절한 답변을 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모든 분들에게 좋은 주제이기에 몇 말씀 더 올리겠습니다.스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무아는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즉 '나'라는 것을 비롯한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 불변하는 고유한 실체가 있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원인과 조건들의 因緣和合(인연화합)에 의해 生成(생성)되었다가 變遷(변천) 消滅(소멸)하는데 지속 불변하는 主人公인 실체가 없다 보니 無我 無自性인 것이고 계속 변하다보니 空하다 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마침내 소멸되는 것이기에 無常(무상)한 것이며 그럼에도 현상계에 어떠한 相을 가지고 한시적으로 존재하기에 있다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는 非有非無의 中道라 불리는 것이지요. 또 이 모든 원인 조건들 또한 다른 원인 조건들에 의지하고 그것들 또한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 생멸 변천하는 무한 연결 고리의 관계이므로 주와 객이 본래 하나(不二)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서 諸法無我(제법무아) 一切皆空(일체개공)과 諸行無常(제행무상) 中道實相(중도실상) 不二의 진리가 비롯되는 것이지요. 나아가 아무리 변하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끝내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무상함에 집착하니 결국 괴로움이 생 하는 것이기에 一切皆苦(일체개고)라는 진리가 도출되며 이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이를 멸하는 방도를 제시하는 것이 四聖諦(사성제) 八正道(팔정도) 六波羅蜜(육바라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 공 무아 무상 중도 고 불이는 이름만 다르지 결국 한 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틀어 緣起空性아란 단어가 적합할 것 같습니다.
연기법이야말로 부처님께서 大覺(대각)하신 우리의 삶 뿐만 아니라 우주 법계에 두루 통용되는 만고의 진리이며 불교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지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청정심이라는 심정적요소와 이론적 요인으로서의 연기법 등이 합일되어 구축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무아만 따로 떼어내어 이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 모든 진리를 체득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아상을 비롯한 사상과 탐진치 번뇌 망상을 떨쳐낸 청정심(본래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내 안에 이러한 청정심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마음전체를 이 청정심으로 리셑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모든 번뇌 망상을 일으키는 마구니를 물리치시고 見明星悟道를 이루신 심적 상태가 바로 이 청정심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스님께서 말씀하신 '지금 여기 이대로'를 번뇌 망상 이기심으로 채워진 我相이 다 떨어져 나간 청정심으로 본다면 이를 무아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장황한 알음알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승진-j7s이해하기쉽게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회하는 주체에 대해서 아직 선명한 이해가 부족한데 답변 가능하신지요?
@@seeking_the_truth_2073 감사합니다. 윤회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제법무아인데 무엇이 있어 윤회하는가라는 모순에 봉착하지만 윤회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하겠습니다. 윤회는 A가 죽어서 어떤 동일성을 유지한 체 내세에 A′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기 보다는 A가 지은 有形 無形의 선악의 업보와 A를 구성했던 원소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후대에 드러나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환경에 영향을 미쳐 그들의 운명에 개입하는 것으로 윤회를 재해석 할 수 있습니다. 九類衆生(구류중생)을 하나의 生命群(생명군)으로 볼 때 일종의 集團輪廻(집단윤회)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즉 끝없는 연기의 사슬이 윤회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계는 그 안의 내포물들이 생멸 변천하면서 상호 융합하여 또 다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변화하고 다시 사라지는 현상을 끝 없이 반복하는 존재 현상들의 집합체로서 법계에서는 앞선 제법은 반드시 현재의 제법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것들이 離合集散(이합집산)하여 다시 미래의 존재 현상을 일으키는 연기의 연속이 바로 윤회 현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는 어떠한 업도 짓지 않은 말 그대로 한 번도 로그인되지도 않은 그야말로 신제품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특성과 지능 성격등이 큰 틀에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유전이라 할 수 있지만 유전인자 와 더불어 나를 태어나게 한 모든 유무형의 인연들과 태어난 후 이 몸과 마음을 형성하게 한 모든 인연들의 화합이 현재의 나이므로 태어나기 전의 나는 나로 연기될 유무형의 가능성으로 분산되어 존재했다 할 수 있습니다.
아직 나라고 정해지지 않은 無有定法인 공의 상태라 할 수 있지요. 다만 우리는 존재의 영역의 한계에 갇혀 살고 있기에 윤회의 주체를 무언가 시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실체의 묶음으로 파악하기에 혼돈이 일어나지만 그 주체를 무언가로 연기될 가능성의 총합으로 보면 윤회의 얼굴이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엷은 안개처럼 분산하여 두루 산재했던 전생의 나의 모습과 또 현생에 내가 지은 업과 나를 구성헀던 원소들로 영향 받을 미래의 다른 존재 현상을 통해 본래무일물이며 공한 내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추량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부처님처럼 생사 유무 시비 집착을 모두 여읜 청정공의 경지에서는 전생 현생의 모든 업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미래에 선순환만 일으키시므로 윤회를 극복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제 알음알이에 불과하니 단순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성불하세요^ ^()
결론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이란 뭇 남성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는 미모의 한 여성이 제아무리 예쁜척 해봐야 자신이 똥 싸고 방귀 뀌다가 때가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라는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특별한척 잘난척 해봐야 한 낱 똥기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님의 몸이 스님 것이 아니라면...팔다리도 스님 것이 아니라면 ..제가 스님의 빰을 한대 때려도 됩니까? ㅋㅋ 그래도 고소 안하실거지요???ㅋㅋ
아.. 그래서 도선사의 청담스님이 하루는 법문을 하시다가 어떤 스님에게 싸다귀를 후려 맞은 적이 있지요
깨달음을
체득하신분께서
유투버 조회수에
집착하시면
안돼지않나요
개구즉착.
그래서 원래 선지식들은 되도록 말을 안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냥 똥물을 뒤집어쓰는 심정으로 어쩔수없이 법을 설하시는거죠..
그래서 법보시라 하는것입니다..
언어.생각너머의것을 말로 표현한다것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