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슈리성이 불타기전에, 오키나와 도자기마을에서 토기를 구매한적이 있는데, 도자기 장인아저씨가, 오키나와 사투리로 엄마가 '엄마'라면서, 자기들은 한국이랑 비슷한점이 많다며, 너무 반가워했습니다. 가게를 나서는데, 달려나오시며 한국 소주를 선물로 주시는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막강한 몽고군이라지만 몽고군 개개인의 전투력은 사실 별거 없었슴. 귀신같이 말을 다루며 활을 잘 쏘는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고려도 열심히 노력했지. 기병을 육성했슴. 그러나 기병수에서 차이가 나고 말위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말과 일체화되어 달리는 그들에 비해서 기동성 차이가 나는건 어쩔 도리가 없었지. 그래서 전면전으로는 그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임. 원거리 무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더 뛰어난 활을 만들고 궁수를 양성하려고 노력했고 근접전투에서 사나운 야만인들인 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오랑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검술뿐 아니라 장병기술을 연마하고 군대 무술처럼 일격필살 정신으로 맨손무예까지 수련했으니 주먹질과 발길질에 능숙했겠지. 공포스런 몽고군도 일단 말에서 내리게 해서 기동력이라는 장점을 제거시키면 고려군과의 육탄전에서는 절대 우위를 점할 레벨이 아니였슴. 약자의 전술로 전면전으로는 전력이 안되어 가망없으니까 어떻게든 근접해서 육탄전으로 대결하려고 한 거지. 삼벌초가 그런식으로 병력수가 차이나는 몽고군과의 싸움에서 활약했지만 같은 고려군이 삼벌초 토벌에 나서자 병력수가 차이나니 그냥 제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살자고 모국 버리고 오키나와로 도망쳤다는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인가??? 항거정신이 목적이면 끝까지 남아서 모국땅에서 죽었어야지
오키나와에 갔을때 이상하게 제주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알고보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돼지고기 요리도 그렇고 대표 요리라는 오키나와 소바라는 것이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제주 고기국수와 너무 비슷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고기 구이 집에 갔더니 고려초라고 씌어진 야채가 있더군요 배추를 그렇게 부른거라던데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주 오메기 떡과 닮은 떡이 있길래 집어 봤더니 오하기라고 씌어 있더군요 어찌 된건지 어안이 벙벙해 졌더랬습이다 확실히 뭔가 연관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태생 자체가 가짜라 도둑질밖에 할 줄 모르는, 허구의 한족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다. 그 외는 다 이민족 왕조로, 그 당시 한족은 가장 밑바닥 계급이었음. 몽골 왕조 원나라만 해도 1계급이 몽골인 2,3계급이 고려인,아랍인,여진인 등이고 4계급이 한족이었다. 상(은)나라 같은 상고시대 왕조는 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 왕조.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다. 5호16국이나 5대10국 모두 갈족,저족,강족,선비족 등 대부분 북방 이민족 정권이다. 북위나 수나라 당나라는 선비족 왕조, 요나라는 거란족 왕조, 원나라는 몽골 왕조, 금과 청나라는 만주(=여진=말갈=읍루=숙신)왕조다. 서방으로 간 투르크 등은 돌궐족 왕조 등 모두 북방 이민족 왕조다. 이이제이가 몽골이나 여진 등 북방 이민족 왕조로 들어서면 역으로 이한제한(以漢制漢) 곧, 한족으로서 한족을 제압한다는 방침으로 바꿔 세웠졌고,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원으로 들어가 한족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반항하면 아예 씨를 말리는 식으로 학살하는 원나라 청나라 초기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놈지도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차이나에서 유전적으로 한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각 외신들에 발표났음 장강 이북과 이남으로 북방과 남방 민족으로 크게 분류된다고도 했고 기사 검색하면 금방 나옴. 한나라 유방은 흉노에 패하고 그 후 오랫동안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지냈고 또 다른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섰을 때는 조공은 고사하고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노예처럼 지배를 받았으면서 어이가 없네. 그래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발해 등도 자기 것이라 우기고 유적 탐사를 막고 역사공정을 하나. 미래예측학자들은 차이나는 반드시 민족이든 빈부격차든 종교든 어떤 이유로든 분열하게 돼있다고 주장한다. 신장위구르와 티베트,내몽골 등에서 이미 조짐이 나오고 있다. 한족은 허풍과 거짓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아큐산법(阿Q算法)'이라는 것이다. 아큐가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실은 내가 이긴 거야.' 그리고 아큐는 의기양양하게 걸어간다. 1920년대 한족 지식인들은 노신이 쓴 이 을 읽고 '혹시 내 얘기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수치를 모르는 한족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조작하고 세뇌하면 된다.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라고 우기며 정신승리로 자위할 뿐이다. 차이나의 조작과 달리, 남북국시대 반도의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대륙의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한나라의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그들의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골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골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골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골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골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골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1000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3000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3000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골족 입장에서 중원대륙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골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임금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명나라에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골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골이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명나라에 조공하러 왔을 때 임금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조작된 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1000번을 거짓말해라 그러면 진실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도둑놈의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골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 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골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임금이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명나라 왕이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골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임금이 몽골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차이나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그들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원대륙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인데도,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차이나인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그들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 보면 동북•서북•서남 등 역사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한나라 역시 한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차이나는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동이족에게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우리 동이족에 비해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한족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6ygrene167 #선비족 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에 혈투를 벌인 이유!!!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원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원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는 중원대륙 선제공격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요동방어선은 중원쪽 나라들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원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원쪽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원대륙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원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원대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원대륙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했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차이나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소림사 무술은 인도가 기원이듯이... 가라데(공수도)는, 왜나라가 아닌, 오키나와의 류큐왕국 무술이다. 극진가라데는 최배달(최영의)가 창시했다. 오키나와의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 현지 학자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는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수수께끼 고려계 기와들의 주인공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 윤용혁 공주대 역사학과 교수는 한국중세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논문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를 발표했다 오키나와에서 온 기와 중에는 좀 더 확실한 내용을 전해 주는 암키와도 있었다. 기와에는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癸酉年高麗瓦匠造).' 1273년,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진압된 바로 그 해가 계유년이었다. 그렇다면 진도나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떠났던 일부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이 기와가 덮인 건물을 지었던 것일까? 이 '고려 기와'는 우라소에성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돼 오래 전부터 알려졌던 유물이지만 국내에선 그다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그 기와로 건물을 지었다면, 이는 아직도 고대사의 대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진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1000년경에도 석기를 사용하며 채집 생활을 했지만 삼별초가 패배한 13세기에는 ‘구스크’(성을 일컫는 오키나와 말)에 기초한 세력집단이 여럿 등장하는 등 사회조직이 급속히 발전했다. KBS의 김형운 PD는 “일부 학자는 오래전부터 외부 문명이 유입돼 오키나와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급속히 변모했을 것으로 추측했다”며 제주도에서 패배한 뒤 역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진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을 것이다”고 말했다. 삼별초가 한국사 기록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지역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큰 성도 축조됐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그런 기술이 유입됐던 것일까?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이 건국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삼별초"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별초 세력이 주도한 오키나와의 대형 건축 공사가 정치적 공동체의 출현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대해 윤 교수는 "현지 자료를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항쟁사의 차원에 머무를 게 아니라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15세기에 통일 류큐왕국이 출현한 오키나와는 조선과도 활발한 교역을 펼쳤으며 1879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독립국이었다. 2차대전 뒤 미국이 점령했고 1972년 일본에 모두 반환됐지만 여전히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홍길동도 실존인물이고 연산군의 국외추방령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후 무리를 이끌고 오키나와로 이주했다는 가설이 있는 걸 보면 삼별초도 가능성이 충분하고 오키나와 본섬에서 주류세력을 먼저 이루고 있어서 조선시대에 이주한 홍길동은 본섬으로 가지않고 부속섬인 미야코섬이나 이시가키섬쪽(본섬에서 비행기로 1시간거리)에 정착한 것 같다 이섬에 홍가와라라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기리고 있습니다
삼별초군, 800년전, 비록 한복에 어수룩한 모자를 썯을것 같은 용모지만 눈빛만은 지금의 우리 해병대 였을것 같네요...처절한 투쟁, 상무정신, 지금 우리 핏속에도 스며 있을것 이고..선인들 다시 머리숙여 집니다...마지막 먼 바다 망향의 유구향, 좋은 마무리 정착 했을 걸로 상상 기대를갖여 보았습니다....
항거정신 미화하는건 좋은데 삼벌초는 고려로써는 정말 골칫거리 집단이였슴. 오히려 원나라 오랑캐 세력에 굴복해서라도 뿌리 뽑아야할 적패였슴. 세개의 별기군으로 조직된 삼벌초는 사실상 최씨 집안 권력 비호를 위해 존재하는 정예군으로 사조직이나 마찬가지였음. 몽고군은 항거하는 지방은 완전히 멸할 정도로 파괴했슴. 남녀노소 가축 씨까지 마르고 문명을 가진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슴. 고려도 다를 것 없었슴. 몽고군은 고려를 칠 생각없이 공물을 더 내놓으라고 오랑캐 속성을 드러냈을 뿐인데 어짜피 굴복하게 될 것을 왜 그렇게 백성들 개죽음을 당하게 하고 나라 망하게 스스로 자초하며 항거했을까? 고려 집권층은 지능이 없었나? 오로지 최씨 권력욕 때문에 백성들 다 죽어도 괜찮다고 한 것임. 원나라가 간섭해오면 자신들 입맛맞는 이들과 소통해서 간섭하려 하니 자신이 소외될 수 있지. 자신의 권력 비호만을 위해서 고려를 그렇게 몰아간 것임.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이들은 잔인하게 도륙해서 제거하던 놈들임. 그놈들 눈치보며 나라 망하는 꼴 지켜보다가 완전히 철저히 파괴되어 남은것이 별거 없게 되었을쯤 고려를 위해 어떻게든 항복해야겠다고 목숨걸고 간 것임. 당연히 왕명에 항거하는 반란군인 삼벌초를 곱게 보지 않았지. 원나라군보다 고려군이 눈에 불을 켜고 반란군들 죽인다고 삼벌초와 싸운 것임. 막강한 몽고군은 왜 숫자도 많지 않은 삼벌초를 제압하지 못했을까? 대군 몰고가서 쓸어버리면 될텐데. 당연히 기마족 오랑캐들과 맞싸워온 역사가 있는데 정면대결할 일 없지. 말에서 내려온 상태의 몽고군을 상대로 육탄전으로 몰고가 죽인거임. 산지ㅣ에서는 말을 못 달리지. 산타는데 익숙한 삼벌초들이 게릴라전처럼 홈그라운드 잇점 살려서 몽고군 유인해 산속에서 백병전으로 몽고군들 일방적으로 죽인것임. 해상에서도 마찬가지지. 배위에서 말달리며 싸우겠나? 베타고 상륙한 몽고군이라봤자 그들이 기동력을 살릴 틈 없이 공격해버리면 손 쉬웠슴. 뚜벅이로 오는 몽고군이란건 별로 겁날 것이 없었지. 아예 몽고군이 탄 배에 해적처럼 뱃머리 붙여서 몽고군들이랑 배위에서 육탄전으로 죽이고 그렇게 싸워온것임. 용맹스런 몽고군이라봤자 말위에서 용맹스러운거지 흔들리는 배위에서 물위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육탄전에 개발린 것이지. 그러니 당하기만 하고 손 쓰질 못한 것임. 그러나 고려군이 삼벌초 진압에 가세하니 막강한 몽고군도 어쩔 도리가 없어 골칫거리던 삼벌초는 별 것 아닌 반란군 수준으로 쉽게 제압 된 것임.
여몽연합군이 굳이 일본정벌을 선택한 이유가 삼별초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몽고의 입장에선 삼별초가 오키나와가 아닌 일본으로 가서 일본 기존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키울수있다고 판단했을거같음.. 또한 삼별초의 입장에서도 기존 토호세력들이 있어 분쟁의 여지가 있고 고려와 가까워서 다시 몽고의 공격받을수있는 일본보다는 기존세력도 거의 없고 바닷길도 멀어서 공격이 쉽지않은 오키나와가 전략적으로 더 좋다고 판단했을수있고요..
박현윤 류쿠 왕조는 원래 독립적 국가로써 FACE를 봐도 일본인과 다름 니가 오키나와가보면 알겠지만 문화재 건축양식도 일본이 아닌 중국과 더 비슷함 일본은 원래 지금의 영토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분열된 국가였고 메이지유신 전에는 맨날 굶고 힘들어하고 지들끼리 싸우는 국가였기 때문에 맨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거리는거임 지금은 미국이 먹음
@@알고싶다그것이-f3z 홍길동은 실존인물은 맞는데 그냥 도적이었습니다. 홍길동전은 실존 인물인 홍길동을 모티브로 한 그냥 소설이고요. 율도국은 류쿠국에서 영향을 받은게 맞긴 한데 저자인 허균인 원래가 벼슬을 할 정도의 상류 식자층이었기 때문에 류쿠 왕국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를 차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조선시대에 많은 표류민들이 발생했는데 표류를 많이 한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오키나와였음 예전에는 류큐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이고 류큐가 표류민들을 데려오면 조선은 고맙다고 류큐가 생산할 수없는 무명등을 답례품으로 주었다고 했음 또한 성종때 류큐국 사신이 종2품의 벼슬을 받은적도 있음
@@zerosome-h3s 역사는 단편이 아닙니다. 각 시대마다 굴욕의 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흥망성쇠' 고대 사회의 흐름입니다. 그 어떤 시대가 이러한 과정이 없었을까요?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으면 합니다. 고려는 대단했지만 말기에 권문세족들에 무리한 정치로 인해 나라가 신진사대부에게 넘어갔지만 그어떤 시대보다도 개방적 사회인거는 맞는거 같습니다. 결론은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zerosome-h3s 조선보단 고려가 확실히 대단했음. 무작정 위대하다는게 아니라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론 확실히 대단한 나라였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선비국가가 들어온 것 때문에 더 아쉬움이 큰 거지 근데 다른사람보고 염병한다느니 평생 자위만 하라느니 말투가 왜케 공격적임? 뭐 직계 조상이 삼별초한테 돌아가심?? 틀니 악 물고 고려 못 까서 안달 났네 진짜 ㅋ
삼별초가 제주에서 마무리당할 때 역사는 거기서 삼별초가 끝났다고 하지만, 소수의 삼별초 잔당이 제주도에서도 탈출해서 오키나와로 도망간 다음 오키나와 문명의 발전에 주된 원인이 되었다라는게 정답 아닌가? 오키나와 원주민에게 삼별초 잔당이 발전된 문명을 전달했고, 그 댓가로 뭐 얻은건 있을듯. 근데 그 뒤로 류큐왕국이 고려를 잇는 등의 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어와 문화가 고려시대를 베이스로 해서 발전한것도 아닌데 굳이 국뽕에 빠질 필요는 없다 봄. 그냥 석기시대수준의 오키나와에 갑자기 고도로 발전된 철기문화를 가진 삼별초 잔당이 도망쳐왔고, 그로 인해 급속도로 빠르게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문명의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라는게 역사일듯.
류큐 왕국은 19세기에 일본에 점령당하고, 오키나와 출신은 일제시대에 착취도 많이 당했고 90년대까지 오랫동안 2등 국민 취급되어 왔습니다. 울트라맨의 작가도 오키나와 출신인데 재일교포마냥 자기 출신을 숨기고 일본에서 활동할 정도였습니다. 일본 사회는 피해자에게 적반하장이고 가해자의 잘못은 피해자가 부주의한 탓이라고 매도하는 사회니까요. 재작년 한국 여성이 일본 남성에게 강간당해도 "남자를 꼬신 한국여자가 나쁘다"라고 대놓고 TV에 방송하는 정도인데요.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의 주일미군 기지 70%를 떠안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군사기지 주변 땅은 보안을 이유로 제약이 많아지고 땅값 떨어지고... 70년대이던가? 일왕 히로히토가 오키나와를 전후 처음 방문한다고 할 때 저딴 놈이 왜 오냐고 화낸 사람 많았습니다. 뭐 그때는, 일제시대를 살아봤던 중년 세대는, 구 일본군 병사 오쿠자키 겐조가 히로히토에게 새총으로 쇠구슬 날렸던 적도 있을 정도로, 제국주의에 진절머리난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60년대는 전공투 등 반제국주의 극좌 운동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시기고. 결국 일본은 현재 노년층이 진보고 중년+청년층이 극우 보수인 괴상한 나라가 됐습니다.
삼별초가 류규(오끼나와)로 간 싯점이 류규에서는 선사시대였다. 선사시대의 원시인과 고려의 초절정 무사집단의 만남. 당연히 왕은 고려인이 되어야 하고, 고려성과 고려기와가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조선초에 조선으로 류규의 사신이 와서 아뢰기를 "류규를 조선에 귀부하려 합니다." 조선조는 좀 황당했을 것이다. 조공을 바치려 하지만 받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조공무역이기에 정중히 사절했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 일제가 류규를 강제병합하면서 일본영토가 되었고, 지금은 미군기지 주둔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하는 말이 가라데가 오끼나와에서 태동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전래된 무술일 것으로 간주하지만 한반도의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태권도가 가라데를 베꼈다? 고려시대에도 태껸은 이미 존재했고,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삼별초가 오끼나와로 도래했을 때는 아직 선사시대였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그건 초딩에게 물어도 답은 뻔하다.
지금도 오키나와에 고류카라테라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알기론 토요토미 쪽에 선 사츠마번 무사들이 에도막부에 패배하고 나서 당시의 류큐를 털면서 철과 배, 그리고 사탕수수를 전부 압수했기 때문에 무기를 만들 수 없어 나온게 고류카라테라고 하니까 시기적으로 그부분은 좀 맞지 않는거 같습니다. 철이 없기 때문에 쌍절곤, 돈파 등 철을 아주 부분적으로 쓰는 무기도 발달했고요. 물론 고려인들도 무인들이엇으니까 무술도 전수해 줬을 순 있겠지만요. 확실한건 그 부분은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태권도가 대중무술로 정립시키기 위해 카라테의 형식적인 부분을 참고한건 어느정도는 맞고요. 참고로 저 태권도 공인3단 선수 출신입니다 ㅋ. 제 관장님은 청도관 출신이신데 이승만정권때는 태권도를 당수도라고 했었다네요. 공수(카라테)도라고 불렀고요. 지역에 따라선 ..
현대태권도에 대해 태권도 관계자들도 태껸과의 관계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지. 가라테의 영향이 있던건 맞다고 보는데. 웃기는건 가라테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가라테를 소수민족 혹은 점령국가의 하위 문화취급하고 천하게 봤다는점이야. 오키나와 토박이들도 차별대우했지. 애초에 민족이 다르니까. 걔들한테 상위문화는 검도.유도.스모 였지 가라테는 아니었어. 가라테하는 사람을 깡패취급했지. 무려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 그러다가 최영의 선생같은분들 덕에 국제무대에서 가라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했지. 그리고는 태권도는 우리문화의 아류다!를 시전하는거지 그러면서도 오키나와어 대해서는 은근히 차별을 유지하는 이중성은 뭐..
류큐어라고 아직 사멸하지 않은채로 존재합니다. 원래 일본어 방언이지만 "본래 언어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으면 별개의 언어로 구별한다" 라는 언어 분류학의 기준에 따라 류큐어라고 부릅니다. 재밌는것은 제주어도 이 기준에 부합하여 "제주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분류하는게 대부분입니다.
류큐족은 중국계이고 일본족하고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중국인처럼 돼지고기를 즐겨먹는 민족이죠 삼별초가 몽고군에게 쫒겨 류쿠국에 상륙했을때는 원시부족이었던 류쿠는 삼별초에의하여 필요도없는 수많은 성을 쌓고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조선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수리성은 이때 지어졌으며 고려기왓장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차대전 말기에 트루먼은 전쟁후 식민지 영토문제에서 오키나와를 장개석에게 주겠다고했는데 모택동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팔려있던 장개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고합니다. 일본항복후 오키나와를 통치한 미국은 일본의 로비에 의해 1975년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넘겨주었습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합병된 류쿠국은 합병이후 대만처럼 별 다른 민족투쟁이없이 일본정부의 통치를 받다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원옥쇄의 명령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죠 제주도도 이오지마섬처럼 수많은 터널전 준비로 옥쇄전선이 될뻔했는데 원자폭탄이 대한민국을 구한겁니다
강화를 직역하면, 커다란강' 풀' 꽃' 세가지 입니다. 풀이하자면, 커다란 강이 막아주고 풀과 꽃이 널려있는 광활한 평야 입니다. 전쟁중에 200만의 지역민은 여자가 130만명, 남자가 70만명, 아이와 노인을 제외하면 30만명, 가족을 부양하거나 관리이거나를 제외하면 15만명, 이중에서 정규 병력은 5만명 궁을 지었다고 하니 궁이 있어야 하고, 각종의 관서와 장군부가 즐비하여야 하고, .......40년간 몽고와 항쟁에서 버틸만 한 곳.
행정 중심지를 벗어나 주민들이 많이 사는곳으로 가면 확실히 일본의 이주민과는 생김새부터 다르더라고요. 일본사람이라고 하기엔 한국과 대만인 모습 비슷한... 당연히 그 어르신들은 일본일을 싫어할수밖에 없고... 류큐인들이 많이 죽었고 기득권은 일본인인데다 미국도 엮여서 독립하기엔 힘들어 보여요
전 오키나와 놀러가기 전에 이러한 사실들을 공부하고 갔는데...제가 이런 이야기를 요약해서 개인적인 게시글을 남긴적 있는데, 한국 사람인척 하는 일본사람인지, 아니면 한국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부정적으로 댓글을 달더군요. 각설하고, 오키나와 분들이 본토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거 같습니다.
오키나와에 아주 오래된 그릇공방의 주인이 저희에게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감사인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당시에는 그냥 넘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오래전 부터 교역이 활발했다고 하더군요.
😅😅
오키나와랑 고려는 교역 많이함 그땐 일본속국이 아니엇으니
백제가 아니고,,
고려,,
입니다,,
🙂
삼별초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메시지를 알 수 없었다. 엔딩의 나레이션이 멋집니다. 작가님의 문학적인 순발력이 돋보입니다.
고려의 정예군사 삼별초가 역사의 추적으로 다시 살아나는군요. 참 흥미롭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작년, 슈리성이 불타기전에, 오키나와 도자기마을에서 토기를 구매한적이 있는데, 도자기 장인아저씨가, 오키나와 사투리로 엄마가 '엄마'라면서, 자기들은 한국이랑 비슷한점이 많다며, 너무 반가워했습니다. 가게를 나서는데, 달려나오시며 한국 소주를 선물로 주시는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오키나와에 돌잔치때 돌잡이 문화도 있다는걸로봐서 교류가 확실히 있었습니다.
쓰리랑카 인도에서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언니를 언니라고
우리를 우리
너를 니
등등 같은 언어가 많음
일본은 신라에게 전쟁에서 진 백제인들이 건너가 건국한 국가
일본은 부여족
한국은 흉노족
우리민족 입니다.
대박~~~첨 알앗네
엄마는 전세계가 비슷하죠 영어로도 마마
정말 유익합니다. 좋은 주제. 좋은 방송👏👏👏
정말 잼있게 봤네요 뒤에 이어지는 내용이 또 있는가요?
삼별초의 정신 꼭 기억하겠습니다
삼별초가 사라진게 아니고 그들이 간곳을 명확히 몰랐던 거지.
삼별초부대는 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운 고려 최고의 정예군이었다
삼별초는군이아니다역사교육똑바로받아라
최씨네권력유지를위한사병일푼이야
막강한 몽고군이라지만 몽고군 개개인의 전투력은 사실 별거 없었슴. 귀신같이 말을 다루며 활을 잘 쏘는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고려도 열심히 노력했지. 기병을 육성했슴. 그러나 기병수에서 차이가 나고 말위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말과 일체화되어 달리는 그들에 비해서 기동성 차이가 나는건 어쩔 도리가 없었지. 그래서 전면전으로는 그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임. 원거리 무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더 뛰어난 활을 만들고 궁수를 양성하려고 노력했고 근접전투에서 사나운 야만인들인 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오랑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도록 검술뿐 아니라 장병기술을 연마하고 군대 무술처럼 일격필살 정신으로 맨손무예까지 수련했으니 주먹질과 발길질에 능숙했겠지. 공포스런 몽고군도 일단 말에서 내리게 해서 기동력이라는 장점을 제거시키면 고려군과의 육탄전에서는 절대 우위를 점할 레벨이 아니였슴. 약자의 전술로 전면전으로는 전력이 안되어 가망없으니까 어떻게든 근접해서 육탄전으로 대결하려고 한 거지. 삼벌초가 그런식으로 병력수가 차이나는 몽고군과의 싸움에서 활약했지만 같은 고려군이 삼벌초 토벌에 나서자 병력수가 차이나니 그냥 제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살자고 모국 버리고 오키나와로 도망쳤다는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인가??? 항거정신이 목적이면 끝까지 남아서 모국땅에서 죽었어야지
그러곤..패퇴해서..
오키나와로가서..문명을 발전시켯지~~
오키나와에 갔을때 이상하게 제주도와 비슷하다고 느껴졌었는데 알고보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돼지고기 요리도 그렇고 대표 요리라는 오키나와 소바라는 것이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제주 고기국수와 너무 비슷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고기 구이 집에 갔더니 고려초라고 씌어진 야채가 있더군요
배추를 그렇게 부른거라던데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주 오메기 떡과 닮은 떡이 있길래 집어 봤더니 오하기라고 씌어 있더군요
어찌 된건지 어안이 벙벙해 졌더랬습이다
확실히 뭔가 연관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삼별초와 오키나와의 관계를 알려준 영상이었습니다.
매우 유익한 영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같은 문화를 공유하면 같은 역사인 것이쥬,, 더 유대가 깊어졌으면 좋겠네요
역사를 보면 류큐도 독립된 국가로 일본에 강제 병합된 나라. 지금의 오키나와. 삼별초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 일제 병합으로 잃어버린 역사가 많을것 같다. 만주도 그렇고 삼국지 역사도 그렇고.
격 공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 모르는것 같슴다.
홍길동전에 의하면 길동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왕이 된 곳이 유구국. 삼별초 후예들과 일전이 있었을지도...
이씨조선 500년 동안 수많은 진실들이 왜곡되고 묻혀버렸다고 봐야합니다.
다시 서서히 복원 되여야합니다
1930년 대에 공개된 유구무비지 라는
책에는 그 내용에 실린 그림에서는 당시 고려인이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고 시연을 하는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책제목: 택견사(고대사 편)
삼별초 아무튼 대단하다 항복할만도한데 끝까지 포기하지않고 오키나와까지ㄷㄷㄷㄷ생각지도 못하겠다
한줌의 군부세력인 줄로만 알았는데..
궁궐도 세우고 왕도 옹립하고 오키나와에 가서도 성을 건설할 정도면
엄청난 세력이었던 듯.. 삼별초를 주제로 한 정통사극 하나 만들어주세요~
고려 자체가 엄청난 나라니까
맞습니다일개사병일뿐입니다저들은오키나와원주민입장에서는삼별초가1910년한반도를식민지시킨일본과같은존재일뿐이다
가라테가 원래 오키나와 무술인데..삼별초가 남긴 고려 무술일수도..
한국색 지우려고.중국 남권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중국 남권의 초식과 확연히 다름.
태생 자체가 가짜라 도둑질밖에 할 줄 모르는, 허구의 한족 왕조는 한,송,명 3왕조뿐이다. 그 외는 다 이민족 왕조로, 그 당시 한족은 가장 밑바닥 계급이었음. 몽골 왕조 원나라만 해도 1계급이 몽골인 2,3계급이 고려인,아랍인,여진인 등이고 4계급이 한족이었다. 상(은)나라 같은 상고시대 왕조는 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 왕조. 만리장성으로 유명한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다. 5호16국이나 5대10국 모두 갈족,저족,강족,선비족 등 대부분 북방 이민족 정권이다. 북위나 수나라 당나라는 선비족 왕조, 요나라는 거란족 왕조, 원나라는 몽골 왕조, 금과 청나라는 만주(=여진=말갈=읍루=숙신)왕조다. 서방으로 간 투르크 등은 돌궐족 왕조 등 모두 북방 이민족 왕조다. 이이제이가 몽골이나 여진 등 북방 이민족 왕조로 들어서면 역으로 이한제한(以漢制漢) 곧, 한족으로서 한족을 제압한다는 방침으로 바꿔 세웠졌고,이 수법이 적중하여 이들은 쉽게 중원으로 들어가 한족을 지배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반항하면 아예 씨를 말리는 식으로 학살하는 원나라 청나라 초기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놈지도 나오고 얼마 안 있어 차이나에서 유전적으로 한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각 외신들에 발표났음
장강 이북과 이남으로 북방과 남방 민족으로 크게 분류된다고도 했고 기사 검색하면 금방 나옴. 한나라 유방은 흉노에 패하고 그 후 오랫동안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가며 지냈고 또 다른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섰을 때는 조공은 고사하고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노예처럼 지배를 받았으면서 어이가 없네. 그래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발해 등도 자기 것이라 우기고 유적 탐사를 막고 역사공정을 하나.
미래예측학자들은 차이나는 반드시 민족이든 빈부격차든 종교든 어떤 이유로든 분열하게 돼있다고 주장한다. 신장위구르와 티베트,내몽골 등에서 이미 조짐이 나오고 있다.
한족은 허풍과 거짓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른바 '아큐산법(阿Q算法)'이라는 것이다.
아큐가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사실은 내가 이긴 거야.' 그리고 아큐는 의기양양하게 걸어간다. 1920년대 한족 지식인들은 노신이 쓴 이 을 읽고 '혹시 내 얘기 하는 것 아닌가'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수치를 모르는 한족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조작하고 세뇌하면 된다. 우리를 지배했기 때문에 우리 조상이라고 우기며 정신승리로 자위할 뿐이다.
차이나의 조작과 달리, 남북국시대 반도의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대륙의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다.
한나라의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그들의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골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골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골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골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 겨자 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골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골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1000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3000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3000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골족 입장에서 중원대륙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골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임금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명나라에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골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골이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명나라에 조공하러 왔을 때 임금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조작된 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1000번을 거짓말해라 그러면 진실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도둑놈의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골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 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골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임금이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명나라 왕이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골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임금이 몽골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차이나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그들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원대륙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인데도,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차이나인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그들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 보면 동북•서북•서남 등 역사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한나라 역시 한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차이나는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동이족에게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우리 동이족에 비해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한족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당수는 중국게 확실하죠 철사장 수도치기 단련법 같은거 하지만 발짓은 고대 우리나라에서 왔다보여짐 중국무술이 발차기는 원래없음 홍콩영화가 우리나라 태권도를 도입해서 발차기로 유명해져서 권법에 발차기를 넣은것 우리나라 발차기를 보면 월도를 주로 사용했던것 때문인지 원심력의 원리가 들어간게 많음 검법도 비슷하고
@@6ygrene167 #선비족 왕조인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에 혈투를 벌인 이유!!!
당시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원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원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는 중원대륙 선제공격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요동방어선은 중원쪽 나라들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원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원쪽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원대륙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원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원대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원대륙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했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차이나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소림사 무술은 인도가 기원이듯이... 가라데(공수도)는, 왜나라가 아닌, 오키나와의 류큐왕국 무술이다. 극진가라데는 최배달(최영의)가 창시했다.
오키나와의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 현지 학자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는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수수께끼 고려계 기와들의 주인공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
윤용혁 공주대 역사학과 교수는 한국중세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논문 '오키나와의 고려 기와와 삼별초'를 발표했다
오키나와에서 온 기와 중에는 좀 더 확실한 내용을 전해 주는 암키와도 있었다. 기와에는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癸酉年高麗瓦匠造).' 1273년, 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진압된 바로 그 해가 계유년이었다. 그렇다면 진도나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떠났던 일부 삼별초 세력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이 기와가 덮인 건물을 지었던 것일까?
이 '고려 기와'는 우라소에성과 슈리성(首里城) 등 여러 곳에서 출토돼 오래 전부터 알려졌던 유물이지만 국내에선 그다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그 기와로 건물을 지었다면, 이는 아직도 고대사의 대부분이 공백으로 남겨진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1000년경에도 석기를 사용하며 채집 생활을 했지만 삼별초가 패배한 13세기에는 ‘구스크’(성을 일컫는 오키나와 말)에 기초한 세력집단이 여럿 등장하는 등 사회조직이 급속히 발전했다.
KBS의 김형운 PD는 “일부 학자는 오래전부터 외부 문명이 유입돼 오키나와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급속히 변모했을 것으로 추측했다”며 제주도에서 패배한 뒤 역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진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을 것이다”고 말했다.
삼별초가 한국사 기록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는 비로소 농경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지역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큰 성도 축조됐다.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그런 기술이 유입됐던 것일까?
이 때문에 최근 들어 "오키나와의 류큐왕국이 건국 기초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삼별초"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삼별초 세력이 주도한 오키나와의 대형 건축 공사가 정치적 공동체의 출현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 대해 윤 교수는 "현지 자료를 좀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항쟁사의 차원에 머무를 게 아니라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국제적인 맥락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15세기에 통일 류큐왕국이 출현한 오키나와는 조선과도 활발한 교역을 펼쳤으며 1879년 일본에 강제 합병될 때까지 독립국이었다. 2차대전 뒤 미국이 점령했고 1972년 일본에 모두 반환됐지만 여전히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황정원-c2i 선비족은 이름 그대로 조선비왕(비왕은 제후)의 백성 이라는 소리.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고조선의 옛땅에서 홀연히 나타난 민족인 선비족이, 고조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족이라고 우기는게 더 미친소리.
나중에 진도나 제주도에 갈 기회가 생기면 삼별초 유적지에 함 가보고싶네
오키나와는 솔직히 일본은 아니였죠 역사적으로 보나 강제병합이라고 보는게 맞을듯
오키나와는 얼마전 우리민족 궁전이 발견 되었는데. 일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죠.
일본인이 오키나와를 차별할 것이기에
언젠가는 독립할 것이다
@@김재진-g1g 그럼 탐라국이랑 우산국도 독립해야죠
ㅈ
@@김재진-g1g 중국사람입니까?
역사는 반복된다고 결국 힘이 없음 먹히고 그 역사도 사라진다. 우리나라 상고사처럼 ㅠㅠ
홍길동도 실존인물이고 연산군의 국외추방령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후 무리를 이끌고 오키나와로 이주했다는 가설이 있는 걸 보면 삼별초도 가능성이 충분하고 오키나와 본섬에서 주류세력을 먼저 이루고 있어서 조선시대에 이주한 홍길동은 본섬으로 가지않고 부속섬인 미야코섬이나 이시가키섬쪽(본섬에서 비행기로 1시간거리)에 정착한 것 같다 이섬에 홍가와라라는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기리고 있습니다
유구국(오키나와)은 홍길동의 율도(律岛)국이 아닙니다。율도국은 지금의 필리핀(菲律宾)입니다.
@@삼열조-e3w 도대체 필리핀이라는 근거를 대라..쫌.
@@삼열조-e3w그래요? 이시가키섬이라는 썰도 잇던데
:도저히 믿음이 안가네~썅🌋
어쩐지 영화나 게임에서 나오는 슈리성이 되게 일본과는 다른 느낌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런 영향도 한 몫 했겠군요... 흥미롭습니다.
일본과 다른이유는 슈리성은 대놓고 남중국식 양식을 따라서.... 우리건축이랑 관계가 없음.
오키나와(류규)의 당수도(가라테)를 크게 3가지로 나누는데, 그 중 하나가 '슈리테'입니다
즉 오키나와(류큐)는 일본과 별개의 나라라는거죠 독립해야됨
그건 중국영향임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다른 나라예요.
조선처럼 독립국가였죠!
슈리성은 경복궁처럼
국왕의 궁전입니다.
삼별초군, 800년전, 비록 한복에 어수룩한 모자를 썯을것 같은 용모지만 눈빛만은 지금의 우리 해병대 였을것 같네요...처절한 투쟁, 상무정신, 지금 우리 핏속에도 스며 있을것 이고..선인들 다시 머리숙여 집니다...마지막 먼 바다 망향의 유구향, 좋은 마무리 정착 했을 걸로 상상 기대를갖여 보았습니다....
국뽕 보소
@@박성환-o5b 열등감 쩌네
@@박성환-o5b 일뽕은 느끼지못하는것 미 개 ㅋ
멋진 표현력 입니다 😂
오키나와에 갔을때 뭔지모르게 본토보다 친숙한 느낌이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
류큐국의 아픈 역사도.. 그 옛날 우리 선조들께서 겪었던 아픈 역사와 비슷하죠. 오키나와 참 마음이 많이 가는 섬입니다...
27:30 삼별초가 제주도로 거점을 옮겼을 때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게 마음이 아프네요 ㅜ ㅜ
항거정신 미화하는건 좋은데 삼벌초는 고려로써는 정말 골칫거리 집단이였슴. 오히려 원나라 오랑캐 세력에 굴복해서라도 뿌리 뽑아야할 적패였슴. 세개의 별기군으로 조직된 삼벌초는 사실상 최씨 집안 권력 비호를 위해 존재하는 정예군으로 사조직이나 마찬가지였음. 몽고군은 항거하는 지방은 완전히 멸할 정도로 파괴했슴. 남녀노소 가축 씨까지 마르고 문명을 가진 도시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슴. 고려도 다를 것 없었슴. 몽고군은 고려를 칠 생각없이 공물을 더 내놓으라고 오랑캐 속성을 드러냈을 뿐인데 어짜피 굴복하게 될 것을 왜 그렇게 백성들 개죽음을 당하게 하고 나라 망하게 스스로 자초하며 항거했을까? 고려 집권층은 지능이 없었나? 오로지 최씨 권력욕 때문에 백성들 다 죽어도 괜찮다고 한 것임. 원나라가 간섭해오면 자신들 입맛맞는 이들과 소통해서 간섭하려 하니 자신이 소외될 수 있지. 자신의 권력 비호만을 위해서 고려를 그렇게 몰아간 것임.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이들은 잔인하게 도륙해서 제거하던 놈들임. 그놈들 눈치보며 나라 망하는 꼴 지켜보다가 완전히 철저히 파괴되어 남은것이 별거 없게 되었을쯤 고려를 위해 어떻게든 항복해야겠다고 목숨걸고 간 것임. 당연히 왕명에 항거하는 반란군인 삼벌초를 곱게 보지 않았지. 원나라군보다 고려군이 눈에 불을 켜고 반란군들 죽인다고 삼벌초와 싸운 것임. 막강한 몽고군은 왜 숫자도 많지 않은 삼벌초를 제압하지 못했을까? 대군 몰고가서 쓸어버리면 될텐데. 당연히 기마족 오랑캐들과 맞싸워온 역사가 있는데 정면대결할 일 없지. 말에서 내려온 상태의 몽고군을 상대로 육탄전으로 몰고가 죽인거임. 산지ㅣ에서는 말을 못 달리지. 산타는데 익숙한 삼벌초들이 게릴라전처럼 홈그라운드 잇점 살려서 몽고군 유인해 산속에서 백병전으로 몽고군들 일방적으로 죽인것임. 해상에서도 마찬가지지. 배위에서 말달리며 싸우겠나? 베타고 상륙한 몽고군이라봤자 그들이 기동력을 살릴 틈 없이 공격해버리면 손 쉬웠슴. 뚜벅이로 오는 몽고군이란건 별로 겁날 것이 없었지. 아예 몽고군이 탄 배에 해적처럼 뱃머리 붙여서 몽고군들이랑 배위에서 육탄전으로 죽이고 그렇게 싸워온것임. 용맹스런 몽고군이라봤자 말위에서 용맹스러운거지 흔들리는 배위에서 물위에서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육탄전에 개발린 것이지. 그러니 당하기만 하고 손 쓰질 못한 것임. 그러나 고려군이 삼벌초 진압에 가세하니 막강한 몽고군도 어쩔 도리가 없어 골칫거리던 삼벌초는 별 것 아닌 반란군 수준으로 쉽게 제압 된 것임.
오키나와와의 연결이라니 흥미진진합니다 👍
할아버지 목숨은 어느시대나 다 소중한것 이에요 엽전 열단냥으로 엿 바꿔 드셨다고 하셨시니 할아버지 시대에 교육을 이해하겠습니다
여몽연합군이 굳이 일본정벌을 선택한 이유가 삼별초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몽고의 입장에선 삼별초가 오키나와가 아닌 일본으로 가서 일본 기존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키울수있다고 판단했을거같음.. 또한 삼별초의 입장에서도 기존 토호세력들이 있어 분쟁의 여지가 있고 고려와 가까워서 다시 몽고의 공격받을수있는 일본보다는 기존세력도 거의 없고 바닷길도 멀어서 공격이 쉽지않은 오키나와가 전략적으로 더 좋다고 판단했을수있고요..
전남완도에 장군도는 삼별초의 이 성을쌓고 주둔했으며 이 있으며
사당을 지어 추모해왔습니다.
우리의 삼별초가 헤링본 디자인을 오키나와에 전파했군요~^^~
외세에 굴복하지않은 역사에 길이 남겨 추모해야 될 조상님들이네
옛날에 역사스폐셜인가 그 타이틀로 본거 같은데 또 봐도 재밌네요.
오키나와에 제주도 사람들이 여행가면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느낌이나 뭐나 집 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의 여행 정말 희한한 경험이었습니다.
삼별초랑 고려..제주도랑 무슨 상관이라고..ㅋㅋ 고려시대 건축물들을 남한사람즐이 보기힘드니..조선시대가만 남아서
@@BSjung1 영상은 보고 말하는건가?
원철아 그냔 잠이나 자라
25:00 새삼 놀랍습니다 배우 우현씨 장모인 故곽의진 씨네요 백년손님을 즐겨봤던 터라 소설가이신 건 알고 있는데 진도분이라서 그런지 진도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군요..
👍
대단한 분이시네.. 소설가이자. ㄷㄷ
류큐도 빨리 일본에서 독립해야 되는데ㅜㅜ
딸랑 기와 하나 밖에 없는게 아쉽네여.. 지배민족이 되었다면 기록도 많이 남겼을테고.. 기와는 물론 생활양식등에서 쉽게 발견할수 있을텐데... 오키나와에 정착한 여러 민족중의 gksk가 아니였을까 생각이 듭니다...
삼별초의 저런 항쟁에 몽고군도 리스펙트 해서 고려는 독립국으로 남겼지, 이것이 고려인의 정신이다. 가즈아 저 대륙 끝까지 달리자 삼별초의 후예들아
오키나와 즉 류큐왕국은 고려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한국과 매우 긴밀하고 친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들을 노리는 가장 큰 적인 일본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중국,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니가봣어???
박현윤
류쿠 왕조는 원래 독립적 국가로써 FACE를 봐도 일본인과 다름
니가 오키나와가보면 알겠지만
문화재 건축양식도 일본이 아닌 중국과 더 비슷함
일본은 원래 지금의 영토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분열된 국가였고 메이지유신 전에는 맨날 굶고 힘들어하고 지들끼리 싸우는 국가였기 때문에
맨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 거리는거임
지금은 미국이 먹음
@@암행어사출두여 그렇게 치면 세종대왕이 한글 만든거 니가 봄? 이순신장군이 일본군 무찌른거 니가 봄?
우리나라도 뭐 그리 떳떳하진 않긴한데...탐라하고 우산국 흡수시킨 과정만보면..
@@암행어사출두여 그렇게치면 너네 조상님을 니가봤어?
오키나와의 역사를 몰랐을 때 오키나와 여행갔었는데 왠지 마음이 아련했습니다. 이유가 있겠죠.
삼별초중 일부가 오키나와로 건너가서 행복하게 잘살았다
오키나와인이 고려의삼별초가 세운 류큐왕국 대단합니다. 한국과 함께 삽시다. 오키나와여~
홍길동전의 율도국도 오키나와 유구국이 모티브가 아닌가?
홍길동은 실존인물이고
류쿠국이 율도국이라 하는
역자학자들이 많음!
심지어 홍씨성도 뭐 중요한 가문으로 있다고 하던데
@@junegalaxy1199 홀길동은 서자 아님? 당연히 서자라면 첩의 아들이니 첩을 가지고 있다는건 양반가라는 거니까 홍씨 성이 있는건 당연한거 아니므
@@알고싶다그것이-f3z 홍길동은 실존인물은 맞는데 그냥 도적이었습니다. 홍길동전은 실존 인물인 홍길동을 모티브로 한 그냥 소설이고요. 율도국은 류쿠국에서 영향을 받은게 맞긴 한데 저자인 허균인 원래가 벼슬을 할 정도의 상류 식자층이었기 때문에 류쿠 왕국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를 차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알고싶다그것이-f3z 참고로 홍길동은 실제 역사에서는 고위 공직자를 빽으로 둔 조폭에 가까웠지 의적 활동을 하고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형인 홍일동이 당상관(정 3품 이상의 고위관료)이었고 조카딸이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였거든요.
조선시대에 많은 표류민들이 발생했는데 표류를 많이 한 곳 중에 하나가 바로 오키나와였음 예전에는 류큐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이고 류큐가 표류민들을 데려오면 조선은 고맙다고 류큐가 생산할 수없는 무명등을 답례품으로 주었다고 했음 또한 성종때 류큐국 사신이 종2품의 벼슬을 받은적도 있음
조선 태조 때부터 벼슬을 받았어요.
성현아 취직은 했냐?
확실히 향토사학자들이 지식은 엄청나네 부정확한 건 몰라도 방대하다
전종인 그런거임?
감사합니다
삼별초의 흔적이 오키나와에서는 박물관에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비닐봉다리에 들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런것이 나온다던가ㅋㅋㅋ
심각함..ㅠ
코리아가 그냥 코리아가 아니지.. 고려가 정말 대단한 나라지..
@@zerosome-h3s
헐~~~
그리 말하니 좋냐?
자긍심 좀 가져라~~!!!
@@zerosome-h3s
역사는 단편이 아닙니다. 각 시대마다 굴욕의 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흥망성쇠' 고대 사회의 흐름입니다. 그 어떤 시대가 이러한 과정이 없었을까요?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으면 합니다. 고려는 대단했지만 말기에 권문세족들에 무리한 정치로 인해 나라가 신진사대부에게 넘어갔지만 그어떤 시대보다도 개방적 사회인거는 맞는거 같습니다. 결론은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쿠빌라이의 막내딸을 시집보낸 나라다.. 몽골은 황금씨족이 아닌 그누구에게도 직계를 결혼시키지 읺았다.. 그것도 막내딸은 더더욱.. 공주 죽었을때 고려온 사신이 그랬다지.. 막내딸은 황상에게도 막내딸이라고. 모든 아비는 같음이라.. 몽고에 30년이상 항전한 나라도 없고, 니가 그리 빨아대는 강대국. 그래 그당시 동아시아 최강대국 금나라도 쌈싸먹은 몽고가 고려와는 사돈을 맺었다.. 그이후는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위상이 높았음이다.. 다같이 뚜드려 맞은 그시대에 말이다.. 신채호 선생이 남기심 어록이나 좀 살펴봐라 무식한 작자야.. 아시아의 역사를 새끼손톱만큼도 모르는 아둔한 자여
@@zerosome-h3s 조선보단 고려가 확실히 대단했음. 무작정 위대하다는게 아니라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론 확실히 대단한 나라였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라는 선비국가가 들어온 것 때문에 더 아쉬움이 큰 거지
근데 다른사람보고 염병한다느니 평생 자위만 하라느니 말투가 왜케 공격적임? 뭐 직계 조상이 삼별초한테 돌아가심?? 틀니 악 물고 고려 못 까서 안달 났네 진짜 ㅋ
@@zerosome-h3s 님 말하는 수준에 맞춰서 똑같이 해드린건데.. 남한테는 쌍욕 박으시면서 본인은 고려시대 조상님까지 챙기시네요?
이젠 관심 안 줄테니 혼자 실컷 욕 박으세요ㅋㅋ
삼별초!! 만세 만세 만만세!!!
삼별초가 제주에서 마무리당할 때 역사는 거기서 삼별초가 끝났다고 하지만, 소수의 삼별초 잔당이 제주도에서도 탈출해서 오키나와로 도망간 다음 오키나와 문명의 발전에 주된 원인이 되었다라는게 정답 아닌가?
오키나와 원주민에게 삼별초 잔당이 발전된 문명을 전달했고, 그 댓가로 뭐 얻은건 있을듯. 근데 그 뒤로 류큐왕국이 고려를 잇는 등의 행위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어와 문화가 고려시대를 베이스로 해서 발전한것도 아닌데 굳이 국뽕에 빠질 필요는 없다 봄.
그냥 석기시대수준의 오키나와에 갑자기 고도로 발전된 철기문화를 가진 삼별초 잔당이 도망쳐왔고, 그로 인해 급속도로 빠르게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문명의 발전이 가속화 되었다라는게 역사일듯.
뻘소리 하고 있네 ㅋㅋㅋㅋㅋㅋㅋㅋ
무슨 고려가 최선진국이고. 중국 주변 타국가는 미개한줄 알고 있네. ㅋㅋㅋㅋ
저때가 몇년도 인지나 알어?! 무슨 일본 중국놈들만큼 역사 왜곡하고 있네. ㅋㅋㅋㅋ
@@themaskedfighter-4041 얌마 방송이나 제대로 보고 말해라ㅋㅋ
일본도 그런경우지 한반도에서 패망한 국가들의 잔당이 일본으로 도래인이 명칭으로 가서 귀족대접받으며 살거나 무인으로 살았으니깐
woo-ram Hong 눈은 왜 달고 사는지
그러면 오끼나와 가라데가 고려무술임
와-! 우리나라 태권도와 같은 형제나 마찬가지인것이겠군요.
상당한 자부심을가져야될것같습니다.
태권도,당수도도 똑같은 맥락으로
바라봐야되겠군요.
잘알겠습니다.이상 승현이었습니다.
사실 피자도 마르코폴로가 조선에서 훔쳐간것!
무술이라는게 이것저것 섞이는거임.. 당수가 기본이고 삼별초에 영향을 받을 순 있겠지
NHK에서 오키나와에 삼별초가 정착했다고 다큐 제작했었음!!!
Forever Young 그런거임?
일본도 인정하는데 아니라며 인정못하는 일뽕은 머임?
오 신기하네요. 보고싶네요.
농협은행요?
@@박경환-o9z NHK는 일본 국영방송 이에요 ㅎㅎ
담엔 오끼나와 다녀와야 겠어요,
아름다운섬입니다.
이시국에?
이시국충 등판ㅉ
류큐왕국이라 하세욤
@@Unknownkim1 차라리 그시간에 답사 한번이라도 고고
솔직히 오키나와보다는 제주도가 좀더 낫습니다..
근데 합리적, 상식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몽골 싫어해갖고 진도,제주도로 가면서 항쟁하던
사람들이 다 전멸헤서 죽은 거 아니면
오키나와로 가는게 맞지
가라데의 발생은 오키나와.
그럼 가라데는 삼별초인들에 의해? 와....대박이다.
그럼 오키나와의 가라데 기원도 알려주세요.
H.
유도 용어도 거의 한국말 그래서 종주국은 한국입니다.
@@한우선-x7k 유도는 카자흐 스탄 씨름, 몽골 씨름, 한국 씨름 등의 북방 민족의 씨름에서 유래 했다 하며 유도는 이씨름들 과 같거나 유사한 기술들이 많습니다.
북방 민족은 우리 와 언어, 역사 등이 많이 유사하죠. 카자흐스탄에도 단군 신화가 있다합니다.
@@hypersonic8334 그쳐,절반, 한판승,
조르기, 등등 거의 한국말입니다.
같은 한자문화권이라 그런건데 ㄷㄷ
고려때 아랍상인들이 들락 거렸으니까, 오끼나와를 잘 알것이고, 신라와 고려는 해양국가여서 항해에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가라데가 오끼나와서 나왔는데, 고려때 수박이라는 무예가 있었는게, 삼별초 무인들이 그기가서 한게 아닌지 . . .
고려 삼별초나 홍길동이 사라진 율도국보다는 좀더 위로 올라가야 할 듯. 허균이 구전된 이야기를 입수해서 소설화했으니. 베일에 싸인 해상왕국 가락국 시기까지요. 가야제국은 탐라국과 쓰시마와 큐슈까지 확장되는데 오키나와 류큐 이전의 고대역사도 추적해 봐야 합니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제주도로 가기전 마지막으로 금갑리라는 마을에서 항전했다는 성터가 있는데 아무도 발굴하는이 없더군요.
돈이 없으니까요ㅇㅇ
역사가 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결정자들과 국민들이 많으니....
오키나와사람들은 일본본토와는다르게 인정할건인정하는구나...
류큐 왕국은 19세기에 일본에 점령당하고, 오키나와 출신은 일제시대에 착취도 많이 당했고 90년대까지 오랫동안 2등 국민 취급되어 왔습니다.
울트라맨의 작가도 오키나와 출신인데 재일교포마냥 자기 출신을 숨기고 일본에서 활동할 정도였습니다.
일본 사회는 피해자에게 적반하장이고 가해자의 잘못은 피해자가 부주의한 탓이라고 매도하는 사회니까요. 재작년 한국 여성이 일본 남성에게 강간당해도 "남자를 꼬신 한국여자가 나쁘다"라고 대놓고 TV에 방송하는 정도인데요.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의 주일미군 기지 70%를 떠안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군사기지 주변 땅은 보안을 이유로 제약이 많아지고 땅값 떨어지고...
70년대이던가? 일왕 히로히토가 오키나와를 전후 처음 방문한다고 할 때 저딴 놈이 왜 오냐고 화낸 사람 많았습니다.
뭐 그때는, 일제시대를 살아봤던 중년 세대는, 구 일본군 병사 오쿠자키 겐조가 히로히토에게 새총으로 쇠구슬 날렸던 적도 있을 정도로, 제국주의에 진절머리난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60년대는 전공투 등 반제국주의 극좌 운동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시기고.
결국 일본은 현재 노년층이 진보고 중년+청년층이 극우 보수인 괴상한 나라가 됐습니다.
인정은 다함 다만 우리의 근본의 나라가 중국이라 했을때 거부반응하는 것처럼 일본도 동일한 입장인 것뿐임.
오키나와사람들은 일본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jayroygroow2611 싫어할 뿐이지 이미 무의식적으로는 자기들도 실상 일본국민이라고 체념하고 있을 듯.
하물며 백 년 넘는 시간이 지나서 몇 세대가 지났고, 자기들이 쓰고 있는 언어도 일본어라서 당연히 자기들도 일본인이겠지 싶을 듯
원래 오키나와사람들은 본토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지금도.....일본은 자기네 들도 단일민족 국가라고 안합니다.
아니 이건 뭔 국뽕이야 욕하면서 봐야지
..... 했는데 진짜였다니;;
고려 행님들의 패기와 진취성은 한반도 탑급인것 같습니다. 배우고 갑니다.
국뽕이란 단어 쓰지맙시다
원래 존재하지않았던 단어이다.
어감도 좋지않다
마약이란 이미지가 있다
혐오스런 발음이다
이단어 폐기를 제의 한다
만일 한국인들 몇명이 건너갔다고 해서 류큐왕국이 한국인이 세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이 제주도로 흘러 갔는지도 궁금하네요 삼성혈 고양부 세 성씨가 고구려의 집권층 성씨 아닌가요?
맞죠!
맞습니다.
고. 양 .부라는 성씨는
부여에서갈라져나온부족으로 고구려에도 있습니다.고구려의 장군인 앙만춘장군은 당태종에게이긴 안시성의 성주이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씨라는성은 부여와관련이있고 부여에서 역시 갈라져나온 백제도 부여라는 수도명으로 사용했을정도로 우연이지나칠정도로 관련이 있으며 제주도가 석기시대지나고 청동기문화가없이 바로 건너뛰고 철기시대가 나오는점등이 철기문화를가진 북방계의 진출이 확실해보입니다. 그멀리 있던제주가 백제에게 점령당하기전부터 고구려에게 먼저 조공을 바치고있던점인데 고양부라는성은 고구려의 왕족인 고씨와 같은점과 부여의 부씨성을 썼다는점 고양부가 형제라서 같이 결혼안한다는점을 봤을때 귀족세력의 성씨가 확실합니다. 고양부라는 성이 만약 제주도의 원주민이라면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성을 사용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며 북방계의 진출이 확실합니다. 제주는 고양부라는 귀족이 제주에 지배층으로 진출한것으로보아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의 지방정권이 아닌가 생각되며 고구려에게 바친 조공은 조공이라기보다 세금으로 올린게 아닌가생각됩니다.제주의 고양부라는 성씨들이 같은종가라해서 혼인을 안했다는것은 고구려의 고씨와 양씨가 같은집안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제주를 이해하면 부여 고구려 백제가 더이해됩니다. 제주의 고양부의 진출시기는
고조선건국과 비슷합니다.근데 후에 고구려에
조공(세금)을 합니다. 또한 부여나 고구러의
성씨와 동일합니다. 제주의 역사로 인해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너무나 밝혀지지 않은게많고
모릅니다.
일본에 탐사금지로 봉인해둔 유적지가 많습니다. 대부분 한국조상 관련임.
슈리성 얼마전에 화재로 전소했죠. 복원한거긴 하지만.
feat. 오키나와 전투....ㅠ_ㅠ
한 번쯤 오키나와에 가서 우리 문화와 관련된 것을 보고 싶네요
정말 흥미롭다
오키나와 독립을 응원합니다.
#류큐국
제주도 독립을 응원합니다
#탐라국
독립하면 그 사람들 먹고 살게 없습니다. 지금도 일본 교부금 빨아먹고 사는 땅인데요.
@@hispe7 오끼나와는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돈만 받아도 먹고살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섬이라 그 바다만 해도 이미 부자입니다.
일본이 아니라 중국, 한국도 그냥 먹여살려줄 판입니다.
@@보봐르남 팩트는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가난하고 교부금 없이는 재정 운영이 안되는 곳인데요.
너무 재밌고
성벽을 쌓는 돌의 방식이 한반도양식 그대로네요
김찬재 그런거임?
역사 속에 문자는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삼별초가 류규(오끼나와)로 간 싯점이 류규에서는 선사시대였다.
선사시대의 원시인과 고려의 초절정 무사집단의 만남.
당연히 왕은 고려인이 되어야 하고, 고려성과 고려기와가 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조선초에 조선으로 류규의 사신이 와서 아뢰기를 "류규를 조선에 귀부하려 합니다."
조선조는 좀 황당했을 것이다. 조공을 바치려 하지만 받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조공무역이기에 정중히 사절했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 일제가 류규를 강제병합하면서 일본영토가 되었고, 지금은 미군기지 주둔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하는 말이 가라데가 오끼나와에서 태동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전래된 무술일 것으로 간주하지만 한반도의 태권도는 가라데에서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태권도가 가라데를 베꼈다? 고려시대에도 태껸은 이미 존재했고,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삼별초가 오끼나와로 도래했을 때는 아직 선사시대였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그건 초딩에게 물어도 답은 뻔하다.
신라는 빼자!
재섭다!
지금도 오키나와에 고류카라테라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알기론 토요토미 쪽에 선 사츠마번 무사들이 에도막부에 패배하고 나서 당시의 류큐를 털면서 철과 배, 그리고 사탕수수를 전부 압수했기 때문에 무기를 만들 수 없어 나온게 고류카라테라고 하니까 시기적으로 그부분은 좀 맞지 않는거 같습니다. 철이 없기 때문에 쌍절곤, 돈파 등 철을 아주 부분적으로 쓰는 무기도 발달했고요. 물론 고려인들도 무인들이엇으니까 무술도 전수해 줬을 순 있겠지만요. 확실한건 그 부분은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태권도가 대중무술로 정립시키기 위해 카라테의 형식적인 부분을 참고한건 어느정도는 맞고요. 참고로 저 태권도 공인3단 선수 출신입니다 ㅋ. 제 관장님은 청도관 출신이신데 이승만정권때는 태권도를 당수도라고 했었다네요. 공수(카라테)도라고 불렀고요. 지역에 따라선 ..
현대태권도에 대해 태권도 관계자들도 태껸과의 관계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지.
가라테의 영향이 있던건 맞다고 보는데. 웃기는건 가라테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가라테를 소수민족 혹은 점령국가의 하위 문화취급하고 천하게 봤다는점이야. 오키나와 토박이들도 차별대우했지. 애초에 민족이 다르니까. 걔들한테 상위문화는 검도.유도.스모 였지 가라테는 아니었어. 가라테하는 사람을 깡패취급했지. 무려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 그러다가
최영의 선생같은분들 덕에 국제무대에서 가라테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했지. 그리고는 태권도는 우리문화의 아류다!를 시전하는거지
그러면서도 오키나와어 대해서는 은근히 차별을 유지하는 이중성은 뭐..
ㅋㅋ 태권도는 뺍시다 가라데 영향 받고 현대에 만들어진 무술이라해서 우리나라 무술이 아니게 되는것은 아닙니다..
와.... 맞아요! 정확히 아시네요. 당신의 지식에 감탄합니다!
슈리성의 수막새 기와조각은 고려인
이 만든(계유년1273 高麗瓦匠造)
것이 진도의 기와와 같은 것으로 우라소에성에서도발견 ㅡ삼별초는 고려의 정예군 백척의 배로 이동
류쿠왕국에 대해 최근에 알게되었어요~
고려인의 숨결이 서린땅이군요~
삼별초 대단하다 끝까지 몽골군에 대항서
항복안하고 싸우는
그 정신
나는 그정신을. 삼별초 정신이라 부르고싶다
백제 계백에 수사 가 있고
신라 김유신 의 화랑 이있었고
고려 에는 삼별초 가 있다
그런게 있었군요.
29:36 4.3 사건 피해자도 비공식적으로 3만 여명 정도로 추정된다는데 불과 몇명 데려다가 죽였다니 말을 참 쉽게 하네…
대체 삼별초 규모가 몇 명이었길래...
저게 가능한거지?
현재는 사학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DNA를 수집을 하여 비교를 하고, 당시 선박으로 계절적으로 이동이 가능한지 연구를 하는것이 좋을것입니다.
옛날 오키나와에
홍길동이 넘어가 살았다고도 하던데
사실인지? 그러고보면 오키나와는
우리민족과 관계가 깊은듯합니다
네 옛날에 류큐와 우리나라가 교류도많이하고 친했다고 합니다 유구국이라고도 불리고 제주도 에서도 많이 교류하였다고 합니당
고려 삼별초의정신은 후리후손들이 반드시계승해야 될것이다!
그럼 류쿠왕국이 고려의 후손이었단 말인가? 어쩐지 오키나와 음악이 귀에 착착 감기더라니.ㅠㅠ
희대의 개소리네요 ㅋㅋ
오키나와 가봤군요 부럽다
오키나와 민요는 우리 전통 민요와는 완전 다른 이국적 느낌인데 무슨 친밀감을 느껴? 그러니 개소리라는 소리나 듣지 ㅋㅋㅋ
삼별초가 루손(필리핀)왕국까지 정벌했다고 하는데 알고싶네요
RYUKYU 왕국의 지배층들은 어떤 언어를 썼었는지 궁금합니다.
기와ㅡkawara
류큐어라고 아직 사멸하지 않은채로 존재합니다. 원래 일본어 방언이지만 "본래 언어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으면 별개의 언어로 구별한다" 라는 언어 분류학의 기준에 따라 류큐어라고 부릅니다. 재밌는것은 제주어도 이 기준에 부합하여 "제주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분류하는게 대부분입니다.
27:50 고증 무엇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오키나와 한국령 편입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홍길동도 울릉도로 가서 우산국을 세운게 아니라 오끼나와로 가서 권력자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단다, 이젠 우리도 오끼나와에 대한 권리보다도 관계를 유지시켜야겠다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다면 오키나와에서 지배층이었을것 그렇다면 고려말이 많이 남아 있어야하는데.
오키나와어 말투는 일본어와는 다르고 한국어 느낌과 비슷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말로 말하지 못하고 우리글도 쓰지못했는데 오키나와라고 자신들의 것을 지킬 수 있었을까? 강제로 일본화 시킨것이지.
궁금한건 삼별초군, 즉 고려인이 건너갔는데 왜 언어는 사라졌는가?
일부 언어는 비슷하게 남아 있죠~~ 원주민 의해 언어들이 현지 언어로 흡수됨
한국 역사교육은 몽골이랑 싸워서 독립유지한것 처럼 가르치는데 종속국은 종속국이었다고 정확히 가르쳐줘야한다고 생각함
걍 식민지 이죠
그래도 뭐 부마국이면 타타르의 멍에보단 ㅅㅌㅊ죠
이용상만봐도 조선인은 못깨달던데
학교에서 배웠던 삼별초.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이었나...?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우리의 역사.
오키나와 원시대부터중세시대까지 빠른업했네
고려의 정신 삼별초가 죽지않고 오키나와나 큐슈나 다른 세상으로 가서 새세상을 열었기를 700년이 지난 지금 빌어보네요 ㅠㅠ
류큐족은 중국계이고 일본족하고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중국인처럼 돼지고기를 즐겨먹는 민족이죠
삼별초가 몽고군에게 쫒겨 류쿠국에 상륙했을때는 원시부족이었던 류쿠는 삼별초에의하여 필요도없는 수많은 성을 쌓고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조선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수리성은 이때 지어졌으며 고려기왓장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차대전 말기에 트루먼은 전쟁후 식민지 영토문제에서 오키나와를 장개석에게 주겠다고했는데 모택동과 싸우느라고 정신이 팔려있던 장개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고합니다.
일본항복후 오키나와를 통치한 미국은 일본의 로비에 의해 1975년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넘겨주었습니다.
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합병된 류쿠국은 합병이후 대만처럼 별 다른 민족투쟁이없이 일본정부의 통치를 받다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원옥쇄의 명령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했죠
제주도도 이오지마섬처럼 수많은 터널전 준비로 옥쇄전선이 될뻔했는데 원자폭탄이 대한민국을 구한겁니다
인간들은 얼마살지도못하면서 욕심이 많아 전쟁을한다 죽어서가지고가지도못할걸 그놈의욕심 ㅡ
소름돋는다.
오늘날도 메세지를 보내어도 몰라보는 소경이 너무 많다.😲
영화300 처럼 우리도 3별초 영화로 만들어보아도 괜찮을듯
강화를 직역하면, 커다란강' 풀' 꽃' 세가지 입니다.
풀이하자면, 커다란 강이 막아주고 풀과 꽃이 널려있는 광활한 평야 입니다.
전쟁중에 200만의 지역민은 여자가 130만명, 남자가 70만명, 아이와 노인을 제외하면 30만명, 가족을 부양하거나 관리이거나를 제외하면 15만명, 이중에서 정규 병력은 5만명
궁을 지었다고 하니 궁이 있어야 하고, 각종의 관서와 장군부가 즐비하여야 하고, .......40년간 몽고와 항쟁에서 버틸만 한 곳.
행정 중심지를 벗어나 주민들이 많이 사는곳으로 가면 확실히 일본의 이주민과는 생김새부터 다르더라고요. 일본사람이라고 하기엔 한국과 대만인 모습 비슷한... 당연히 그 어르신들은 일본일을 싫어할수밖에 없고... 류큐인들이 많이 죽었고 기득권은 일본인인데다 미국도 엮여서 독립하기엔 힘들어 보여요
2차대잔때 일본군부가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인간폭탄으로 만들고 개지랄했잖아....
한국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갈 지 20년 전만해도 누가 알았겠나?
일본 망하면 모르는 거다.
일본본토도 백젝계가 대부분 장악한 줄 알지만
결국 그쪽도 신라계가 장악했다.
전쟁에 나가면 디지라는 신라의 임전무퇴와 카미카제 정신이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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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은 진짜,,, 충격중에 하나다. '고려와장조' 명백한 증거 앞에 여러 주장은 무용지물이다. 유구국은 삼별초가 세운 왕국이다.
전 오키나와 놀러가기 전에 이러한 사실들을 공부하고 갔는데...제가 이런 이야기를 요약해서 개인적인 게시글을 남긴적 있는데, 한국 사람인척 하는 일본사람인지, 아니면 한국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부정적으로 댓글을 달더군요. 각설하고, 오키나와 분들이 본토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거 같습니다.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들은 꼭 삼별초가 아닌 고려인들 평민들이었을 수 도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삼별초가 구성된 과정을 알게되면 이 부분이 더 흥미진진할 것 같네요.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오키나와 삼별초 그리고 가라데 무술 연관에 대해 연구 해야 합니다~~ 그건 일본의 역사 가 아니기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