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감사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습니다. user-rl6jk8dl6z님과 같은 분이 연구를 하면 됩니다. 저도 답답한 나머지 책으로도 써서 내봤고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들어 올리게 된 것입니다. "에이, 나는 학자도 아니고 대학교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대학 4년 다닌 게 끝이고, 석사과정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학회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책으로 써서 내 보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 올려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심한 역사학자들 답답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user-rl6jk8dl6z님이 직접 연구하셔서 밝혀내 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기기 바랍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곶넒] 정도로 일컬었던 지명을 한자로 古奚津이라 표기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串木野로 표기가 바뀌었고, 市來와 합쳐져 市來串木野가 되었다. 그것을 현재는 "이치키쿠시키노"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고시나르]를 古奚津이라 쓴 것이고, [쿠시너므/쿠시너르]라 부르는 지명을 串木野라 쓴 것이다....... 저는 串木野의 木이 본래 한국어 [나모]를 차자한 것이었는데, 임나어가 일본어에 흡수되면서 "키(き)"라 훈독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해(古奚)는 串(くし)과 대응되는 것이며, 木은 후대의 표기자들에 의해 추가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너르다'는 뜻의 [넒]을 [num]으로 여겨 木을 쓰고 [넒]을 [nur]로 여겨 野를 썼다는 말입니다. (중첩한 표기일 거라는 얘깁니다) 사실은 古奚津(고시나루)와 串野(쿠시노)가 정확히 대응되는 지명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지명은 串木野(쿠시키노)로 뜬금없이 중간에 木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이 木이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이 잘 가질 않는데요....... 바로 앞에서 [넒/nurm]을 표기하려다 보니 木과 野를 중첩해서 둘다 쓴 게 아닌가 추측했습니다만 또다른 가능성으로, 혹시 市來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실은 이 市來(시래)를 두고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市來(시래)는 현재 "이치키(いちき)"라 읽히고 있지만, 본래는 [시라/sira]를 음차한 표기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어를 잘하시는 분이니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느 정도 눈치채셨겠지요? 일본어로 新羅를 "시라기(しらぎ)"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섣부른 추측을 함부로 남발해선 안 될 일이라 요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얘기를 하나만 덧붙입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이 선덕여왕 13년(서기 644)에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의 성을 쳐서 대승을 거두고 가혜진(加兮津)을 열어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가혜진(加兮津)이 고해진(古奚津)과 아주 흡사해 보입니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지명이고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혜진(加兮津)은 현 후쿠오카의 "가시이(香推)"를 가리킵니다. [가히-나루]의 '가히'를 加兮(가혜)라고도 차자하여 쓰고 橿日(강일)이라고도 쓴 것입니다. (후대의 일본인들이 "橿日"을 "香推"라고 바꿔쓰게 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지명풀이-임나의 지명』 제2장 제7절. "김유신의 전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구교수님께서는 제가 만들어 올려놓은 다른 영상들은 아직 안 보신 듯한데요, 저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의 둘째며느리가 바로 신공황후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구형왕(=일본무존)의 둘째아들은 "중애(仲哀)천황"으로 되어 있는데, "중애(仲哀)"는 [가슳/kasur]을 차자한 표기로, 에 실려있는 가야국 "가실왕(嘉悉王)"과 동일인이며 에 나오는 "가수리군(加須利君)"과도 동일인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공황후는 "가실왕(=가수리군)"의 왕비라는 것입니다.
옛 문헌 등에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면 학자들이 진작에 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 위치 비정에 대해 이런저런 잡설들을 마구 남발하지도 않았겠지요. 또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해도 그 기록 자체가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되며, 그 기록을 연구자들이 엉터리로 해석하여 삼류잡설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점까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학자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님이 고문헌들을 뒤져서 직접 찾아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인 추론입니다.
그 어떤 역사학자가
선생님의 분석력, 통찰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엉터리 역사학자들 때문에 제가 더 답답하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습니다.
user-rl6jk8dl6z님과 같은 분이 연구를 하면 됩니다.
저도 답답한 나머지 책으로도 써서 내봤고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들어 올리게 된 것입니다.
"에이, 나는 학자도 아니고 대학교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대학 4년 다닌 게 끝이고, 석사과정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학회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책으로 써서 내 보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 올려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심한 역사학자들 답답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user-rl6jk8dl6z님이 직접 연구하셔서 밝혀내 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기기 바랍니다.
침미다례라는 이름을 보고 대충 '삼달'이라 불리는 어떤 지명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했는데, 딱 대응되는 곳을 결국 찾아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Ho-Jun Jang님, 아직 『임나의 지명』을 안 보셨나요? "침미다례"는 1년 전에 찾아냈고 책으로 썼는데, 아무래도 책보다는 영상이 더 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임나의 지명』 제1장 4절의 일부 내용을 영상으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古奚津 vs. 串木野
古奚津 [고기나루]
串 '곶/고' -- 한국훈
木 '키' -- 일본훈
野 '너르/널' -- 한국훈
古奚津 = 串木野 = 고키나루
2년전에는 이 설명을 따라가지 못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곶넒] 정도로 일컬었던 지명을 한자로 古奚津이라 표기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串木野로 표기가 바뀌었고, 市來와 합쳐져
市來串木野가 되었다. 그것을 현재는 "이치키쿠시키노"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고시나르]를 古奚津이라 쓴 것이고,
[쿠시너므/쿠시너르]라 부르는 지명을 串木野라 쓴 것이다.......
저는 串木野의 木이 본래 한국어 [나모]를 차자한 것이었는데, 임나어가 일본어에 흡수되면서 "키(き)"라 훈독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해(古奚)는 串(くし)과 대응되는 것이며, 木은 후대의 표기자들에 의해 추가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너르다'는 뜻의 [넒]을 [num]으로 여겨 木을 쓰고 [넒]을 [nur]로 여겨 野를 썼다는 말입니다. (중첩한 표기일 거라는 얘깁니다)
사실은 古奚津(고시나루)와 串野(쿠시노)가 정확히 대응되는 지명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지명은 串木野(쿠시키노)로 뜬금없이 중간에 木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이 木이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이 잘 가질 않는데요.......
바로 앞에서 [넒/nurm]을 표기하려다 보니 木과 野를 중첩해서 둘다 쓴 게 아닌가 추측했습니다만
또다른 가능성으로, 혹시 市來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실은 이 市來(시래)를 두고 좀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市來(시래)는 현재 "이치키(いちき)"라 읽히고 있지만, 본래는 [시라/sira]를 음차한 표기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어를 잘하시는 분이니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느 정도 눈치채셨겠지요?
일본어로 新羅를 "시라기(しらぎ)"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섣부른 추측을 함부로 남발해선 안 될 일이라 요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얘기를 하나만 덧붙입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이 선덕여왕 13년(서기 644)에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의 성을 쳐서 대승을 거두고 가혜진(加兮津)을 열어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가혜진(加兮津)이 고해진(古奚津)과 아주 흡사해 보입니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어원에서 분화된 지명이고 같은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혜진(加兮津)은 현 후쿠오카의 "가시이(香推)"를 가리킵니다.
[가히-나루]의 '가히'를 加兮(가혜)라고도 차자하여 쓰고 橿日(강일)이라고도 쓴 것입니다. (후대의 일본인들이 "橿日"을 "香推"라고 바꿔쓰게 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지명풀이-임나의 지명』 제2장 제7절. "김유신의 전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익혀가는즐거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도 사츠난제도 북부의섬들을 "오-스미" 제도 라고부고 잇네요 , 중심지 타네가 섬의 이름에서 다네의 흔적이 보이구요
마한의 신미제국이 침미다례가 아님을 알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신공왕후 또는 계체천황이 침미다례를 정복하여 백제에게 주었다는 것은 침미다례가 고구려계 안라인이거나 임나계(부여)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구교수님께서는 제가 만들어 올려놓은 다른 영상들은 아직 안 보신 듯한데요,
저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한 가야국 구형왕의 둘째며느리가 바로 신공황후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구형왕(=일본무존)의 둘째아들은 "중애(仲哀)천황"으로 되어 있는데,
"중애(仲哀)"는 [가슳/kasur]을 차자한 표기로,
에 실려있는 가야국 "가실왕(嘉悉王)"과 동일인이며
에 나오는 "가수리군(加須利君)"과도 동일인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공황후는 "가실왕(=가수리군)"의 왕비라는 것입니다.
大隅國의 옛지명를 忱彌 라 햇다 , 多禰國를 多禮 라고도 썻다 라는 구절만 일본책 어디서에서 찾아지면 참 좋겟습니다
옛 문헌 등에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면 학자들이 진작에 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 위치 비정에 대해 이런저런 잡설들을 마구 남발하지도 않았겠지요.
또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해도 그 기록 자체가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되며,
그 기록을 연구자들이 엉터리로 해석하여 삼류잡설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점까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학자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님이 고문헌들을 뒤져서 직접 찾아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