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 그러네욤. 광해는 살아있는 새어머니를 유폐시켰고 태종은 망자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별 이유 없이 수시로 옮기라 지시했죠. 원래 잦은 이장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웬만해선 안 옮기는 게 원칙인데 태종이 일부로 자신의 새어머니를 욕보이려고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하는 폐륜을 저질렀죠 그리고 그 호칭도 신덕왕후 혹은 어머니가 아니라 강씨로만 호칭했죠
@@유우진-g6z 아니요 신덕왕후 강씨는 오히려 이방원이 화날 만 도 했습니다 신덕왕후 자신은 왕씨학살에 참여했습에도 불고하고 포은을 죽인 살인마라 이방원을 안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신덕왕후는 고려 백성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정작 포은을 죽이는데에도 자신도 앞장섰는데 그걸 전부 이방원에게 떠 넘겼어요 예우 해 줄 필요가 없는 괘심한 여자입니다 지도 포은 죽이는데 참여 해놓고 지 죄를 이방원에게 덮어 씌우려 했습니다 광해랑 달라요 태종은 화 날 만도 했거든요 그러기에 신덕왕후를 욕 보인거고
인목왕후가 왕후 시절 영창대군의 복식, 칭호를 세자가 비슷하게 하는 등의 실수를 했고 선조가 이를 책망하지 않고 다 받아줬던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미 그때 영창대군의 죽음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죠 근대 이전 봉건 국가에서 적자 서자 여부를 떠나 일반 왕자가 왕이나 세자처럼 치장하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진배없죠 직접 죽인건 광해군의 신하들이지만 그 발단의 책임은 엄마 인목왕후에게 있었죠
-애민정신이 강한 개혁적 왕이었다는 재평가가 이뤄지는 이유 (임진왜란 승리/ 실리외교/ 대동법 등) 1.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망명길에 오른 못난 아비 '선조' 대신 아들인 광해군이 어린 나이 팔도를 누비며 군대와 식량을 모아 전쟁을 승리로 이끔. 심지어 당시 광해군은 정식 왕도 아닌 세자 신분였음 선조가 명으로 도망감서 총알받이로 분정 (왕대신 나라 정치를 일부 맡김)을 명하긴 했지만, 정식 왕도 아니었음에도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져버리지 않음. 결국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음 (역사상 왕도 아닌 세자가 군사들과 칼 들고 싸우고 군수 물자 모으며 나라 지킨 경우가 광해군이 유일) 2. 즉위 후 전후 복구 및 탕평책 (대동법/ 양전사업/ 호패제/ 궁궐 재건) 2-1 대동법 실시 광해군은 조선왕조 최초로 '대동법'을 도입, 탐관오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의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자 함. '대동법'이란 공물을 기존의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 제도임. 백성의 의무였던 공납은 원래 지역 특산물을 왕에게 진상해야 했는데, 그 지역에 나지도 않는 물품이 멋대로 할당되기 일쑤였음 때문에 백성들은 이를 억지로 사와서 바쳐야 했고, 탐관오리들이 대신 공물을 바친단 명목으로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는 일이 빈번했음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공납을 '쌀'로 처리하는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한 인물이 광해군임 2-2 호패제, 양전사업 실시 대동법을 위해 전쟁 후 호패제 (주민등록증)를 추진, 남은 인구를 파악했고, 양전사업(토지 측량 정책)을 시행함. 이를 기준으로 정확한 토지대장을 만들어, 이에 따라 논과 땅을 많이 가진 양반일수록 더 많은 쌀을 세금으로 거두게 함 2-3 대동법은 선조 이전부터 유생들이 꾸준히 왕에게 상소 올린 정책였으나 당시 깡그리 무시됨. 이유는 양반들이 반대한다는 것ㅎ;; 그걸 즉위하면서 즉시 실행한 왕이 광해군임. 비록 전국으로 시행되기까진 100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나 최초 시행하며 애민정책을 펼친 건 광해군. 덕분에 백성을 말라 죽이던 특산품 공납 대신, 땅을 많이 가진 놈일수록 많은 쌀로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이 시행돼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보존됨 3. 실리적 중립 외교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왕였음 쇠퇴하는 명나라, 강력한 후금(청나라)사이에서 실리적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을 지키고 이득을 챙김. 명이 쇠퇴하는 시기, 여진족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명나라를 공격함. 이때 명나라가 조선에 병사 파견을 요청함. 의리와 명분을 위해 성리학자들은 명을 도와야 된다 주장했으나, 후금의 세력이 막강해 잘못함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또 다시 겪게 될수도 있었음 광해군은 일단 명나라에 병사를 파견하였으나, 만약 후금이 전쟁서 이길 경우 바로 항복하라고 긴밀히 명함. 또 후금의 왕에게 조선은 어쩔수 없이 명을 도와준 것이며 중립외교를 펼칠 것을 전달해 후금의 마음을 얻음 4. 고려사, 국조보감, 동의보감(허준) 등의 책들을 복원했으며, 용비어천가를 인쇄해 보급함. 이 당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지금도 보존돼 내려옴 5.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을 다시 짓기 시작한 게 광해군.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문화 유산을 지금까지 갖게 된 것임
왕위 앞에서 무슨 형제애야... 전세계 역사를 다 뒤져봐도 형제한테 배려 다 챙겨주고 왕위 안전하게 지킨 황제나 왕은 없었음. 저 상황에 광해군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 다만 지지세력인 북인이 너무 적었고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엄마도 일찍 죽은 게 문제였지
전 티비에 나오는 인사들 별로 안좋아합니다 실력없는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승자의 기록을 가지고 그걸 역사라고 떠드는 저런 이념에 빠진 역사강사는 정말 조심해야됩니다 광해군일기 증초본이 남아있으니 그걸 가지고 이야기하시죠 당신이 말하는 역사는 그 광해군일기 초본을 지우고 삭제한 그들만의 역사이니깐요
광해군이 저렇게 된것도 선조의 영향이 컸다고 볼수있죠 임진왜란 터지고 총알받이로 불안정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어서 다 이용해 먹다가 아들이 잘 나가니 라이벌 의식 느끼고 적자가 태어나니 툭하면 들들 볶고 저런 스트레스를 받으니 사람이 미쳐버리지 그래서 잘못된 왕권강화로 나가버린거라고 생각합니다
@@ohilyeojoh-a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좀 얘가 다른 듯 합니다. 일단 그것을 광해군이 지시했다는 얘기는 못들었습니다. 제가 아직 모르거나 김개시가 개입되었다는 얘기도 있거니와 어째서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지지를 받고도 영창대군을 죽이려했는가는 의문이 드는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지지한 것이 순전히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여기고 지지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들어본 바도 없지만..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지지해도 정치적으로 대북파가 광해군 지지하였고,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지지했죠.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 역시 인목대비의 존재는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정확한 건 알수 없지만 김개시의 존재도 결단코 잊어선 안 될 듯 합니다.
@@최원석-z3p 쿠데타 세력이 잘했다는건 아니에요. 다만 집권후기 광해군이 총기를 잃고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정적들의 원한을 너무 많이 삿습니다. 그때까지도 광해군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면 애초에 반정 세력이 그리 크게 모이지 않았을 겁니다. 모인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광해군을 지키려 했겠죠. 전두환이나 박정희이 쿠데타도 어느정도는 그런면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은 쿠데타 성공후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위해 공을 들렸습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 정책을 펼쳤고 사회각계 유망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부정한 정치세력은 끝도 부패해서 파멸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지만요.
@@yune5597 백성이 무지하다면 무지한데로 방치한 왕의 잘못이 있는겁니다. 세종대왕이 왜 대왕으로 지금도 칭송받겠습니까. 왕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언문)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백성을 만세에 이롭게 해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어떠한 이유로도 갖다붙여서는 안되는 핑계가 백성탓입니다.
@@movavimp4 사실 광해가 감성팔이로 인한 사극들로 인해 미화가 되었지요. 말씀처럼 재위 중 광해는 영혼이 빠진 모습인데 대사량이나 발성보다 표정연기가 더 중요한데 진짜 베테랑 배우들도 어려워하더군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인목도 의외로 광해 걱정하는 모습들이 꽤 있었습니다. 대군 아들 업고 권력에 눈먼 어린 불여우 같은 기존의 이미지랑은 좀 다르더라구요.
형제 죽이는거야 태종도 그렇고 있었던 일이니 그런가보다 할수 있어도 명목상이라도 어머니인데 어머니를 자리에서 쫒아낸건 선을 씨게 넘었음 임진왜란 이후 그 뭣같은 유교사상이 엄청나게 보수적이고 꼰대적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광해군의 폐모는 더더욱 큰 죄가 되었고 반란의 명분으로 삼기 충분했지 ...조선초 태종,세조때랑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곤란함 . 왜란이후 성리학이 ㄹㅇ 븅신이 되버려서 쓸데없이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했던 시기였음
오늘날과 달리 죄인의 자녀라도 부모욕은 하면 안되는게 그 시절이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연산의 폐위사유 중 하나가 생모인 폐비윤씨한테 패륜을 저질러서가 크죠. 생모한테 복수했다는건 핑계고 기일에 묘지앞에서 충혜왕도 안했던 포르노 쇼를 했죠. (충혜는 밤에 몰래 했다 하잖아요) 효종도 아버지 잘못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니 조소용과 김자점 처리하고,, 진짜 죄인의 아들 정조도 아버지 사도한테 효를 다했지요. 효종은 나이어린 새엄마한테 정말 잘했어요.
@@yune5597 명나라로 튀려 했던건 당연히 ㅂㅅ짓이지. 근데 똑똑하고 정치 잘했던 건 팩트임. 이순신 그 자리까지 승진시킨 것도 선조고. 전후 수습은 개나 줘버린 내치 ㅂㅅ 광해군이랑 내치는 잘했지만 지가 세운 명분 때문에 친명배금하다 머리 꼴아박은 인조보단 나음.
광해가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확실히 인조보단 잘했지.. 태종도 본인 이복동생들 죽이고 세조도 자기 조카를 죽였는데 언제부터 왕실이 그리 깔끔 했었다고 유난인지..
ㄹㅇ...
인조는 지 큰아들일가를 죄 죽여놨는데 ㄹㅇ 조선 역사에서 이만한 업적은 영조 뿐임.
영조는 그나마 세자가 싸패라서라는 이유라도 있지, 인조는 지 자식일가를 역모몰이해 죽였음ㅋㅈㅋㅈㄲ
걔네는 사후 처리를 잘했고 광해군은 못해서 정치말아먹음 왕인데 말이야
ㅇㅈ 결국 살아남으면 성군인거고 쫓겨나면 패륜아되는거임
광해업적
1.전란이후 재정확정한답시고 매관매직성행
2.그렇게 확충한 돈으로 군사력증강이아닌 궁궐짓기시작
3.유일한 업적 대동법 경기권만 실행 대동법 반대한 임금이 광해군
4.임란이후애 겨우 마련한 조선최정예병력 파병시켜서 거의 괴멸함 말이 좋아 투항이지 그냥개박살난뒤에 항복함
5.이게 후대에 빨리는 광해의 중립외교의 실체임
6.정치도 ㅈ같이 못함 선조는 정치라도 잘했지 광해는 임란때 행적원툴
7.심지어 광해이새끼가 궁궐짓갰다고 국고탕진한게 인조때까지 이어짐
왕자리를 지키면 태종인거고 실패하면 광해가되는것
오호 그러네욤. 광해는 살아있는 새어머니를 유폐시켰고 태종은 망자였던 새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의 묘를 별 이유 없이 수시로 옮기라 지시했죠. 원래 잦은 이장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웬만해선 안 옮기는 게 원칙인데 태종이 일부로 자신의 새어머니를 욕보이려고 이리저리 옮겨다니게 하는 폐륜을 저질렀죠 그리고 그 호칭도 신덕왕후 혹은 어머니가 아니라 강씨로만 호칭했죠
@@유우진-g6z 아니요 신덕왕후 강씨는 오히려 이방원이 화날 만 도 했습니다 신덕왕후 자신은 왕씨학살에 참여했습에도 불고하고 포은을 죽인 살인마라 이방원을 안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작 신덕왕후는 고려 백성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앞장서고 정작 포은을 죽이는데에도 자신도 앞장섰는데 그걸 전부 이방원에게 떠 넘겼어요 예우 해 줄 필요가 없는 괘심한 여자입니다 지도 포은 죽이는데 참여 해놓고 지 죄를 이방원에게 덮어 씌우려 했습니다 광해랑 달라요 태종은 화 날 만도 했거든요 그러기에 신덕왕후를 욕 보인거고
태종은 동복형제는 안죽였습니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이 불변을 간과한 개소리들이 많네
@@j초야 그럼 역사 자체를 못 믿지ㅋㅋㅋ
임해군은 제거하는게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지
인목왕후가 왕후 시절 영창대군의 복식, 칭호를 세자가 비슷하게 하는 등의 실수를 했고 선조가 이를 책망하지 않고 다 받아줬던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미 그때 영창대군의 죽음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었죠 근대 이전 봉건 국가에서 적자 서자 여부를 떠나 일반 왕자가 왕이나 세자처럼 치장하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진배없죠 직접 죽인건 광해군의 신하들이지만 그 발단의 책임은 엄마 인목왕후에게 있었죠
발단의 책임은 인목왕후였을지언정 결과의 책임은 광해군한테 있죠
@@JH-ek5bn 뭔 개소리임 책임이 인목왕후에 있으면 그걸로 끝이지 결과의 책임을 왜 엉뚱한 광해군에 몰아 ㅋㅋㅋ도둑놈 잡아서 처벌하면 책임이 경찰한테 있는 거냐 ㅋㅋㅋㅋㅋ
@@hjchoi9079 정치가 그렇게 간단해 보이나ㅋㅋㅋ 왕 주제에 정치 말아먹으면 그 자체가 폐급임
@@hjchoi9079 살제해도 지켜보던 세력들 폐모까지 하니까 들고 일어나던거(광해군파 북인들도 꽤나 반대함) 십년넘게 내쫓아내고 망나니질 하다가 폐모 지지세력들 깽판치는거 컨트롤 못해서 잡아죽이고 쫓아낸애들 다시 불러들임 그리고...ㅋㅋ 이게 다 광해군 자업자득 자기책임이지 오죽 컨트롤 못했음 인조반정 일어날때 폐모지지세력이 반정한 줄 알았겠냐
인목대비는 성인adhd라서 감정제어를 원래 좀 못했어서 그래요. 오죽하면 반정 이후에도 인조랑 신하들이 감정 올라올때 진정시켰잖아요. 사위 홍주원한테도 어가 내렸어서 그걸로 역모일으켰다고 가정하는건 좀..
광해군에 대한 나쁜 기록들이 아에 없던 일었던 일은 아닐지몰라도 어떤식으로는 과장되긴 했을꺼임. 인조반정의 명분이 필요했을테니
그렇군 또다른 시점 메모메모...........
그냥 광해군이 잔인했던게 맞음......
ㅇㅇ 이거리얼ㅋㅋ 진짜로 선조인조극혐
-애민정신이 강한 개혁적 왕이었다는 재평가가 이뤄지는 이유
(임진왜란 승리/ 실리외교/ 대동법 등)
1.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망명길에 오른 못난 아비 '선조' 대신 아들인 광해군이 어린 나이 팔도를 누비며 군대와 식량을 모아 전쟁을 승리로 이끔.
심지어 당시 광해군은 정식 왕도 아닌 세자 신분였음
선조가 명으로 도망감서 총알받이로 분정 (왕대신 나라 정치를 일부 맡김)을 명하긴 했지만, 정식 왕도 아니었음에도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져버리지 않음. 결국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음
(역사상 왕도 아닌 세자가 군사들과 칼 들고 싸우고 군수 물자 모으며 나라 지킨 경우가 광해군이 유일)
2. 즉위 후 전후 복구 및 탕평책
(대동법/ 양전사업/ 호패제/ 궁궐 재건)
2-1 대동법 실시
광해군은 조선왕조 최초로 '대동법'을 도입, 탐관오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의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자 함.
'대동법'이란 공물을 기존의 '특산물' 대신 '쌀'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 제도임.
백성의 의무였던 공납은 원래 지역 특산물을 왕에게 진상해야 했는데, 그 지역에 나지도 않는 물품이 멋대로 할당되기 일쑤였음
때문에 백성들은 이를 억지로 사와서 바쳐야 했고, 탐관오리들이 대신 공물을 바친단 명목으로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는 일이 빈번했음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공납을 '쌀'로 처리하는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한 인물이 광해군임
2-2 호패제, 양전사업 실시
대동법을 위해 전쟁 후 호패제 (주민등록증)를 추진, 남은 인구를 파악했고, 양전사업(토지 측량 정책)을 시행함.
이를 기준으로 정확한 토지대장을 만들어, 이에 따라 논과 땅을 많이 가진 양반일수록 더 많은 쌀을 세금으로 거두게 함
2-3 대동법은 선조 이전부터 유생들이 꾸준히 왕에게 상소 올린 정책였으나 당시 깡그리 무시됨. 이유는 양반들이 반대한다는 것ㅎ;;
그걸 즉위하면서 즉시 실행한 왕이 광해군임. 비록 전국으로 시행되기까진 100년이란 기간이 걸렸으나 최초 시행하며 애민정책을 펼친 건 광해군.
덕분에 백성을 말라 죽이던 특산품 공납 대신, 땅을 많이 가진 놈일수록 많은 쌀로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이 시행돼 가난한 백성들의 삶이 보존됨
3. 실리적 중립 외교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왕였음
쇠퇴하는 명나라, 강력한 후금(청나라)사이에서 실리적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을 지키고 이득을 챙김.
명이 쇠퇴하는 시기, 여진족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명나라를 공격함. 이때 명나라가 조선에 병사 파견을 요청함.
의리와 명분을 위해 성리학자들은 명을 도와야 된다 주장했으나, 후금의 세력이 막강해 잘못함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또 다시 겪게 될수도 있었음
광해군은 일단 명나라에 병사를 파견하였으나, 만약 후금이 전쟁서 이길 경우 바로 항복하라고 긴밀히 명함. 또 후금의 왕에게 조선은 어쩔수 없이 명을 도와준 것이며 중립외교를 펼칠 것을 전달해 후금의 마음을 얻음
4. 고려사, 국조보감, 동의보감(허준) 등의 책들을 복원했으며, 용비어천가를 인쇄해 보급함. 이 당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지금도 보존돼 내려옴
5.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을 다시 짓기 시작한 게 광해군.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문화 유산을 지금까지 갖게 된 것임
어쩌면 말씀을 저리 맛있게 하시는지. 이야기에 완전 몰입되네요
광해에대해 자세하게 영상좀 올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후손들이라도 제대로 광해에대해 알았으면합니다
@@Jdoskw-i2s ㅋㅋㅋㅋ바랄걸바래라 민석이 동영상들어와서 이딴 쌉소리 늘어놓는 애들 수준보면 모르겠냐
진짜 광해군은 역덕에게서도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는 인물이라 그냥 네이버에 검색하지 마시고 어느정도 카페나 하다못해 나뮈키라도 보면 그나마 중립적으로 서술하는 편입니다
@@남호양-m5z 애초에 나무위키가 네이버 아닌가
재평가될수록 별로인 왕
@@아이알-t1e 그 반대던데. 가장 개혁적인 왕이더군. 특히나 임진왜란때 명으로 토낀 선조 대신 나라를 일으킨 대단한 군주더군. 그리고 폐모살제??ㅋ 너무 그 명분이 웃긴게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 대신 올라간 인조는 자기 아들, 며느리, 손자들까지 모조리 죽임ㅋ
난.. 광해의 입장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동복 형을 죽인것은 정말 잔인하지만. 광해의 입장이라면 누구든 그럴수 밖에 없었을것이라 생각되는데. 안그러면 훗날 적장자 이복동생에게 거꾸로 죽임을 당할수도 있으니까. 나보다 어린 새어머니가 어찌 어미로 받아들여질까.
백성을 살리려고 청나라에 투항하라고 명했던 광해군이 저랬을리가 없다. 모함이다. 원래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권력자들의 명분 만들기에 희생되었다.
3명중 2명이 전투에서 죽었는데 투항ㅋㅋ 항복이겠지
크 백성을 너무 사랑하셔서 궁궐을 그렇게 화려하게 지을려고하셨구나 백성들 굶어뒤지는데
했을리 없다.라는 만약이라는 요소는 역사에 개입되선 안됩니다.
그것은 왜곡이며 정말로 그런 것 마냥
서술되기 때문이죠.
@@JH-ek5bn ㅋㅋㅋㅋ
@@곰곰고고곰 ㅋㅋㅋㅋ
광해군이 잘못한건 능양군을 살려둔게 실수였다
임진정유 두번이나 이어졌던 큰전쟁을 굴복않고
왜군들을 몰아내고 극복해낸 조선인데 역적능양
삼전도의 치욕스런 굴복까지 겪게되는 역사됐다
왕위 앞에서 무슨 형제애야... 전세계 역사를 다 뒤져봐도 형제한테 배려 다 챙겨주고 왕위 안전하게 지킨 황제나 왕은 없었음. 저 상황에 광해군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 다만 지지세력인 북인이 너무 적었고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엄마도 일찍 죽은 게 문제였지
당시 대북천하였는데요? 광해만큼 왕권을 자유자재로 휘두른 왕도 별로 없을듯
ㅋㅋㅋㅋ 당시 집권세력이 북인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거기다 광해 즉위때 영창은 2살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 당시광해가 서른이 넘었는데 ㅋ
@@ohilyeojoh-a 집권세력이 북인이었던 거 아는데 수가 훨씬 적었음. 당연히 왕이 제 편이니 집권세력이라 불리는 거지 머릿수로는 훨씬 밀렸음.
@@마아아리 광해가 즉위할당시에는 서인과 남인들도 광해군을 지지했습니다 오히려 북인인 소북에서 영의정을 필두로한 극소수의 신하들이 영창을 지지했구요 , 광해는 정통성도 문제없었고 선조가 승하할당시에도 영의정이 세자를바꾸자 했을때 인목대비가 세자자리를 흔들지말라며 꾸짖었죠 즉위후 다른왕들은 1번도 많았다했을 옥사를 4번이나 일으켜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애초에 영창을 죽인건 이미 서인들이 2번의 연속 옥사로 몰락하고 난 뒤의 일이라 쉴드를 도저히 쳐줄수가 없습니다
광해를 다른시각으로 해석해보는건 좋은데. 인조의 정당성을 주는 가설을 진실인냥 설명하는건 안좋은 버릇인듯. 이런 시각도 있다고 전해줘야지.. 선조보다 무능한 인조가 반정으로 먹은 권력으로 조선을 얼마나 망쳐놨는데.
맞습니다. 인조역시 아들인 소현세자를 질투했죠. 마치 선조처럼
ㅈ도 모르면 제발 ㅋㅋ 대동법 강원도 확대와 영정법 실시는 인조의 공이고 효종, 현종, 숙종이라는 명군을 낳은 것도 인조의 공임
인조한테 정당성을 주는게 아니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킬 때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지를 알려주는 거 아닌가요
인조가 왜 무능한가요? 오히려 중국대륙에서는 명이 청나라한테 망하고 오랑캐처럼 머리를 깍을때
조선은 비록 군신관계를 맺긴 했지만 자주성을 지키고 망하지 않았습니다.
참 제대로 생각도 안해보고 편협한 역사관을 지닌사람들이 많네요
@@미스스-u6r주성이 있으면 소현세자를 왜 인질로 중국에 보내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분명한 건 무지한 능양군이었다는 것
조선시대 명분에 집착하는 성리학의 사슬은 왕도 피해갈 수 없었다...
가장 폭군은 선조와 인조다.
광해군을 누가 이렇게 띄어주는지 모르겠는데 흥선군이 경복궁 하나만 지어도 나라가 흔들리는데 전쟁 끝나고 나라 파탄난상태에서 궁을 몇개씩 공사했습니다. 근데 그게 뉴딜정책 이런거 아니고 조선식 무상동원으로 공사했음
와.... 역시 뇌리에 쏙쏙 박히네요
100프로 설명을 안해주네 왜 인목대비아빠를 죽였는지등 광해군 입장에서도 얘기를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맞음... 인목대비 아빠(김제남)가 먼저 반정자금 모으려고 자객들 시켜서 상인들 죽이고 은 탈환한 사건은 쏙 뺴놓고 얘기하네 ㅡㅡ
광해는 진정한 왕이다
진정한 암군이지
설쌤 항상 감사합니다♡♡♡
수정한 이유.. 오타땜 입니다....
전 티비에 나오는 인사들 별로 안좋아합니다 실력없는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승자의 기록을 가지고 그걸 역사라고 떠드는 저런 이념에 빠진
역사강사는 정말 조심해야됩니다 광해군일기 증초본이 남아있으니 그걸 가지고 이야기하시죠
당신이 말하는 역사는 그 광해군일기 초본을 지우고 삭제한 그들만의 역사이니깐요
나 한국사 좋아하는구나
불로 쪄죽인다? 이것도 논란 있는 기록 아님?
살제 안한 왕이 얼마없지
손찬 형님~
중립을 위한 고려에 있는 3가지 한국에 없는 3가지
자기 조카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그 뿐 아니라 자기 형수의 무덤을 파내고 폐위시킨 수양대군이 진정한 사이코 패륜아라 생각 됩니다.
광해가 아무리 욕먹을 짓을해도 쓰레기같은 인조 보다는 낫지
폐모살제 해놓고 정작 자기아들 독살한 인조 ;;
결국 승리자의 기록이기때문에 너무 맹신할순 없는듯
그것도 아주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낼 순 없는거임 폐모살제나 정적의 무리한 제거는 분명한 사실임
@@이옹굳ㄹㅇ 역사왜곡도 한계가있음
그렇게 치면 연산군도 성군이네요. 연산도 연은분리법 등 중립외교같은 획기적인 정책 있었으니.. 광해 내치는 인조보다 못했어요.
근데 광해가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도있는데.. 방송분량상 제대로 설명을 못 하신듯
맞아요 영창대군죽인것은 광해진심이 아니였는데
@@song007123 님은 어떻게 아시는데요
딱히 죽일 이유도 없었는데 죽인거죠
실제 역모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딱히 죽일 이유가 없었는데요???? 신하들은 물론 지지세력인 북인들마저도 ㅁㅊ짓이라면서 반대했죠
광해즉위때 영창이 2살이었는데 영창하고 인목대비는 지지기반이 0이 었음 그저 선조 총애 하나만 있었을뿐
아니 왜 광해군이 군임? 다른 왕들도 광해군이랑 비슷한거 많이 했으면서
그러면 선조랑 인조도 하성군 능양군이라 부르면 되죠. 고종도 명복이라 부르고.
임해군이 진짜 행실이 아주더럽다고 했음
동복이라도 죽이는데 꺼리낄게없었을듯
근데 광해군도 폭군끼가 상당히 있었던건 부정 못함 왜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한데 경복궁 궐 공사로 광해군의 민심은 바닥을 찍음..,
당시 행정기관이 궁궐인데 복원 사업은 어차피 했어야 했음.
임진왜란때 다 불타없어진거 선조 때부터 복원시작했던 건데, 만약 그게그렇게 잘못였음 이후 인조때 복원 중단했어야지 인조때도 계속 복원 공사함. 그냥 당시 광해를 끌어내릴 명분이 필요해서 쿠테타 일으킨 거지
민심으로 왕을 평가했으면
인조 선조는 진작 물러났어야지
연산군 말년 2년을 15년으로 늘려놓은 느낌
허준이 비상까지 쓰면서 살렸건만
동의보감도 불살랐다 는 설이
설민석 샘 광해군 진짜 칭찬 많이 했었는데^^
진짜 이중적인 인물이죠 광해군..
역사 강사들은 아무래도 대중적인 이미지도 많이 고려해야 하지요..
모든걸 사랑으로 했드라면 광해 다은 영창군이 임금이 되었겠지
인목대비가 결국 인조를 앉혀서...결국 또 백성들만 고생했음....
인목의 교서가 있어야 능양이 즉위가 가능했어서 능양이 인목 찾아간거에요.
솔직히 뭐 조선역사중에서 깨끗한 왕실이 어디 있었다고..죄다 드릅고 그렇지 그나마 인조 선조보다는 나은 왕이였지 한게 있었으니 뭐 ㅋ
그분도 그분의 아내도 미신과 무속을 상당히 의존하신다죠... 큰일이네
자꾸 광해 감싸려고 방원이 예시를 드는데 방원이식 숙청이었다면 반정은 개뿔 역모사건도 없었을거임. 개시랑 이첨이부터 제거했어야지
광해군이 저렇게 된것도 선조의 영향이 컸다고 볼수있죠 임진왜란 터지고 총알받이로 불안정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어서 다 이용해 먹다가 아들이 잘 나가니 라이벌 의식 느끼고 적자가 태어나니 툭하면 들들 볶고 저런 스트레스를 받으니 사람이 미쳐버리지 그래서 잘못된 왕권강화로 나가버린거라고 생각합니다
흠... 왕이 아직 정정한데 아들의세력이 커지면 당연히 견제를 할수밖에없죠 그리고 광해는 분조때 세자를맡은뒤로 단한번도 세자자리가 흔들렸던적이 없습니다 전쟁영웅이라 백성과 신하의 지지가 셌던것도있고 선조부터가 세자를 바꾸려한적이 한번도 없음 그저 견제만 한거지
그리고 광해 즉위때 영창은 2살배기 갓난 아이였음 선조가 광해를 왕으로 지목하도 죽었을때 인목대비는 유서를 조작해 세자를바꾸자는 영의정에게 세자의 자리를 흔들지말라 면서 꾸짖고 광해를 지지했음
그랬더니 나중에 광해는 인목대비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도 죽여버림 ㄷㄷ
@@ohilyeojoh-a 영창대군의 죽음에는 좀 얘가 다른 듯 합니다.
일단 그것을 광해군이 지시했다는 얘기는 못들었습니다. 제가 아직 모르거나 김개시가 개입되었다는 얘기도 있거니와 어째서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지지를 받고도 영창대군을 죽이려했는가는 의문이 드는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지지한 것이 순전히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여기고 지지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들어본 바도 없지만..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지지해도 정치적으로 대북파가 광해군 지지하였고,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지지했죠.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 역시 인목대비의 존재는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정확한 건 알수 없지만 김개시의 존재도 결단코 잊어선 안 될 듯 합니다.
-광해군이 성군까지는 아니더라도 폭군은 아니었다는게 최근 역사학자들 의견. 임진왜란 이겨내고 나라보건에 힘쓴 실리적인 개혁군주였다고 재평가하더군요. 가장 객관적인 평가라 생각됩니다
임해군 사이코패스인거는 애기를 안하시네요 ㅋㅋㅋ 연산군 2.0 임
광해는 15년 전부 폭군이면 연산은 2년만 폭군인데 임해랑 비교하다니;;
광해한테만 유난 떨었지…
설사 영창대군이 왕이 되었어도 그 불안정한 시기
에 왕재감은 아님 어차피 병자호란 터지면 결국
광해군이 재평가 된다.
그래도 인조보다는 죄가 없음
사기꾼이 진짜 대단하구나 완전히 연기에 몰입해있네요
연극영화과 출신이니까 당연히 연기를 잘하죠
설민석 덕분에 공무원 한국사 합격해서 공무원된 사람도 많음
@@이름그냥-r2w ㅇㅇㅇ설민석솔직히 자기 주업인 공무원 한국사+고등학교 한국사 수준까지만했음 욕안처먹었음 근데 본인 깜냥이상으로 깝치다가 뇌절한케이스
난...설쌤 덕분에 공부 재밌게 했는데....
윗분말대로 설민석은 고등한국사+공무원한국사까지였으면 썩 괜찮은 강사였음. 한국사 대중화에 기여한점도 있고.근데 본인 능력 이상으로 세계사라든지 삼국지 다루다가 훅 간 케이스임 까도 알고깝시다
광해군을 타락하게하고 자존감을 파괴한 악마국민들도 있었겠다 추측되
이승연 연기 다시 했으면 좋겠다 딕션도 좋고 재능이 넘 아깝네
인기강사와 한국사 전문가는 지식의 깊이차이 느껴지는건 왜일까요ㅠ
디스는아닙니다만 너무 광해군을 추켜세워주는것같은 기분이....
애매하게 아는 이들이 광해를 치켜세우는 경향이 좀 있죠. 팩트는 연산이 폭군이던 기간은 2년 광해는 15년
역시나 저짝편이라 그런지
헛소리작렬하네
광해군 업적은 실로 대단함 인조반정 없었음 조선 훨씬힘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함
반정이 성공했다는것 만으로도 광해군이 민심을 잃었다는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쿠테타로 정권잡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두고 민심잃었다는건 틀린말인듯. 국민들이 얼마나 거세게 반대했는데.. 반대한 국민들을 얼마나 도륙했고.
@@최원석-z3p 쿠데타 세력이 잘했다는건 아니에요. 다만 집권후기 광해군이 총기를 잃고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정적들의 원한을 너무 많이 삿습니다.
그때까지도 광해군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로 민심을 잃지 않았다면 애초에 반정 세력이 그리 크게 모이지 않았을 겁니다. 모인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광해군을 지키려 했겠죠.
전두환이나 박정희이 쿠데타도 어느정도는 그런면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은 쿠데타 성공후 집권 초기에는 민심을 얻기위해 공을 들렸습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 정책을 펼쳤고 사회각계 유망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이 부정한 정치세력은 끝도 부패해서 파멸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지만요.
백성이 무지한 것도 있었지. 광해 폐위한다는 이유 첫번째가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거였는데 사실 후금과 실리외교를 펼친것도 또 다시 임진왜란같은 전쟁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인데
@@yune5597 백성이 무지하다면 무지한데로 방치한 왕의 잘못이 있는겁니다. 세종대왕이 왜 대왕으로 지금도 칭송받겠습니까. 왕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훈민정음(언문)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백성을 만세에 이롭게 해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이 어떠한 이유로도 갖다붙여서는 안되는 핑계가 백성탓입니다.
@@movavimp4 사실 광해가 감성팔이로 인한 사극들로 인해 미화가 되었지요. 말씀처럼 재위 중 광해는 영혼이 빠진 모습인데 대사량이나 발성보다 표정연기가 더 중요한데 진짜 베테랑 배우들도 어려워하더군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인목도 의외로 광해 걱정하는 모습들이 꽤 있었습니다. 대군 아들 업고 권력에 눈먼 어린 불여우 같은 기존의 이미지랑은 좀 다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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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는 기록이 조작이라는 말은 그냥 광해군은 전형적인 암군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승정원까지 욕보이네 ㅋㅋㅋㅋ
인조 이후 기록은 솔까 신빙성이 떨어지지.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니
뭘해도 선조, 인조보다 나은 왕이 광해군인건 인정하자
그 기록이 조작이라면 연산군도 성군이죠. 연산도 의외로 획기적인 정책이 있었고 말년 막장짓과는 별개로 총기(?)는 있었지요. 그게 예술에 치중해서 반도판 송휘종이 된게 문제지
형제 죽이는거야 태종도 그렇고 있었던 일이니 그런가보다 할수 있어도 명목상이라도 어머니인데 어머니를 자리에서 쫒아낸건 선을 씨게 넘었음 임진왜란 이후 그 뭣같은 유교사상이 엄청나게 보수적이고 꼰대적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광해군의 폐모는 더더욱 큰 죄가 되었고 반란의
명분으로 삼기 충분했지 ...조선초 태종,세조때랑 절대적으로 비교하면 곤란함 . 왜란이후 성리학이 ㄹㅇ 븅신이 되버려서 쓸데없이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했던 시기였음
오늘날과 달리 죄인의 자녀라도 부모욕은 하면 안되는게 그 시절이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연산의 폐위사유 중 하나가 생모인 폐비윤씨한테 패륜을 저질러서가 크죠. 생모한테 복수했다는건 핑계고 기일에 묘지앞에서 충혜왕도 안했던 포르노 쇼를 했죠. (충혜는 밤에 몰래 했다 하잖아요) 효종도 아버지 잘못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니 조소용과 김자점 처리하고,, 진짜 죄인의 아들 정조도 아버지 사도한테 효를 다했지요. 효종은 나이어린 새엄마한테 정말 잘했어요.
선 광 인 셋다 문제였음
그나마 선조가 제일 잘했지 똑똑했고
임진왜란때 명나라도 도망간 왕이 무슨 제일 낫냐ㅋ
컴플렉스 덩어리에 자기보다 인기 많다고 아들 광해군을 시기질투하고 이순신을 귀향보내고 역사는 바로 알자
@@yune5597 명나라로 튀려 했던건 당연히 ㅂㅅ짓이지. 근데 똑똑하고 정치 잘했던 건 팩트임. 이순신 그 자리까지 승진시킨 것도 선조고. 전후 수습은 개나 줘버린 내치 ㅂㅅ 광해군이랑 내치는 잘했지만 지가 세운 명분 때문에 친명배금하다 머리 꼴아박은 인조보단 나음.
저도 셋다 모두 암군인데 그나마 인조가 제일 낫다고 봅니다. 머리는 셋중 제일 딸리지만 나름 광해가 망친건 수습하려고 노력했죠.
민석이 또 사기치고 있네 ㅋㅋ
무슨 사기를 친거죠?
@@cocority 폐모살제+궁궐공사+끊이지 않은 옥사 때문에 폐위된건데 폐모살제만 언급해서 사기친다고 한건가요?
@@IIlllIIIlI 이걸 왜 저에게…
넌 역사 강의하지마
쓰레기같은 자를 감싸지마라
이놈 구라쟁이자나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