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조선 역사로 보면 조선초기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인재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신진사대부들은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시켰음 그래서 조선의 황금기가 조선 초기에 몰려있음 세종, 성종 같은 왕들의 시기. 오히려 조선후기에는 수학과 과학을 천시했기 때문에 조선이 망조를 걸은거임
가장 가능성 높은 이야기가 아닐지....보통 기득권 세력안에 본인만의 탁월한 능력만으로 진입한 사람은 기존 기득권 카르텔에서 언제든 구실을 만들어서 내쫓을려는 습성이 있죠. 당장은 탁월한 장영실의 능력 때문에 계속 벼슬이 높아져 가는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히 단죄할 건덕지를 잡았으니, 다들 떼거지로 들고 일어나서 세종에게 이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놈을 벌하지 않으면 왕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능멸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달달 볶았을겁니다. 현재 우리 기득권 사회 모습을 비춰봐도 아주 타당한 추론같네요.
80년대 자수성가한 멕시코계 이민자가 성공해서 꿈에그리던 부촌 비버리힐스에 집을서서 입주했는데 백인들이 멕시칸이 여길... 퇴거시킬 방법이없자 돌아가면서 소송검.... 백인1개가 짖어서 잠을 못잔다 법정 싸움 끝나면 백인2 밤에 불을 안꺼서 조명때문에 잠을 못잔다며 소송.. 이렇게 조리돌림 몇번하니까 변호사 비용으로 재산탕진해서 결국 거지돼서 이사간 사건도있었죠
장영실이 저렇게 사라졌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장영실에 관해서 배울 때 곤장을 80대 맞고 그 이후 기록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함. 그리고 그렇게 과학, 기술, 천재를 천대한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도 배워야 한다고 봄. 일본에게 빼앗기기 직전에 서양사람들에게 조선은 미개해 보였고, 실제로 그랬음. 그 시기(1910년대)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임. 이 어마어마한 격차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된걸까..
반대로 보면 다빈치는 구상 메모는 많지만 완성된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미술사에서 냉정하게 이야기 하는건 그가 결국 쫓겨난 삶을 산 것도 증명이 되는 배경과 팩트가 있어요. 고객이 의뢰한 거에 집중을 하거나 마감일을 지키는 건 신경 안 쓰고 이것 저것 다 깊게 들어가지 못한채 정작 할 일도 못했던 산만함은 재조명 되야 한단 의견도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기다리던 클라이언트들의 공분을 산 것도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같이 소처럼 일한 사람의 작품과 한 도시에의 업적을 둔 배경과 기록의 차이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노동꾼이 천재였어 청와대에 불려가서 재능을 인정받고 중급공무원까지 되었을때 거기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대졸 공무원이 자기랑 동급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밑에서도 일하고, 그러다 큰 사건이 터지자 잘됐다 싶은듯 곤장 제대로 5대만 맞아도 걸어가지 못하고 부축받아 끌고 갔다는데 80대면 사형선고나 다름 없음... (아마 형벌이 끝나기 전에 사망) 관련자료도 꼴보기 싫고 신분제도를 넘어선 무식꾼 자료 싹 없애야 직성이 풀렸겠지 근데 현대에도 신분제가 있다
그 실록을 뛰어넘어 1차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승정원 일기만 남아있어도 자세히 내용을 알 수 있을텐데 그 당시의 기록이 임란때 불타서 안타깝네요. 그나마 그후 일기들도 이괄의난때 불타고 또 한번불타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서체로 쓰여진 남아있는 분량들 또한 엄청나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길게는 100년정도 걸린다네요. 혹 거기에 그래도 장영실에대한 조그만 단서가 나올지 기대해봅니다.
장형도 아닌 곤장형이라~ 임금의 명에 따라 시행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맞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임 숙종때 장형의 남용을 막기위해 30대 이상은 행하지 못하게 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했는데 곤장은... 왠만하면 아마 뼈 살이 다 터지고 맞가다 죽을 가능성이 큼 세종 돌아가시기 10년 전부터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고 1450년에 돌아가시니 1440년대부터 치매와 시력이 나빠지는 내용도 실록에 나와있고...
@@TONYBOTTLE 네~ 세종실록을 보면 문종이 쇠약한 세종을 대신하여 세자로 정사를 돌본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 세종이 문종의 병약함을 걱정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1450년에 승하는데 10년전 그러니까 1440년도 쯤에는 건강이 매우 안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문종이 다른 군주와는 달리 국방에 관심도 많고 여러 병감과 병법서에 능통하다 나오는데 어머니 소헌왕후 3년상과 세종의 3년상이 연달아 있어 결국 건강에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 이방원도 세종대왕이 세자 이도였을때 원경왕후 3년상에 세자의 건강을 매우 해쳐 걱정하는 대목이 있고 자신의 사후 3년상에 고기를 꼭 먹을 것을 유언으로도 남겼지요~
곤장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장의 일종이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검색해보면 조선 초기부터 ‘곤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곤장은 조선전기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곤장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고려와 조선의 매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 태의 모양은 에서 보듯이 가느다란 회초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고 지름이 1센티미터가 채 안되었다. 그리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개인적으로 여러 과학적 산물이 명과의 외교 분쟁 소지가 될거 같아 처리 한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화사상에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며 동북아는 한자를 쓰며 중화 문명권인데 변방의 조선이 독자적인 도량형을 쓴다면 충분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일이죠. -------------------------------------------------------------------------------------------------------------------------------------------------------------------------------------------------------------------------------------------------------------------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이유는 당시 학문를 우선시 하며 기술을 천시,멸시하는 경향이 강해서 이를 굳이 남길 필요를 못 느껴서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영조시기 최천약 이라는 무관은 자명종을 한번 분해 해보고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고 (이전까지는 자명종 수리나 제작이 불가능했음) 일일히 가서 측정하지도 않고 육안으로 길이와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며 국가의 과학,건축에 관여 하며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정점을 찍었는데 작업에 참여한 이들에게 주는 포상을 안 받겠다고 거부했다고 합니다. (무관인 내가 그깟 천한일로 이름 떨치면 천한 기술자 따위로 알려지며 조롱당할까 수치스러워함) 또한 임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는 기록도 자주 보입니다. 도자기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든데다 국가에서도 천시,멸시하니 차라리 기술자 우대해 주는 일본에 남아서 대우 받으면서 살자는 생각이었죠. (일본 도자기 기술이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 갈 수 있는 원인)
당시 태종이 옹주를 시집 보낸다고 어느 군수에게 니 아들 내 사위해! 했다 군수가 아니 천한 무수리의 자식을 어디 우리집안과! 안해! 했다 그 집안 공중분해되고 아들은 평생 결혼 못하게했다는 전설이... 그 정도로 당시 양반들의 권위의식이 쩌렀는데 천한 장영실의 업적을 가만 뒀을까? 그냥 없는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세종대왕의 분별력이 떨어졌다면 비슷한 시기에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실정들이 있어야 되지 않나요? 다른 일에는 평소의 세종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유독 한 사건에만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세종 사후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해 궁 밖으로 내보낸것이 아닐런지.
80대를 찐으로 맞았으면 기록이며 업적들이 보존됬을거 같음.. 살려주는대신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기로 세종 이랑 사대부가 합의한거 아닐까? 저시대 사대부들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느냐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하니 자신들보다 우수했던 천민의 기록을 지우는걸 더 원했을지도..
@@놀부-f3j 킴복남 제가 여럿 오해하시도록 댓글을 남겼네요, 죄송합니다. 영화적 인물이해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부가적으로 얘기하면 영화에서 인물의 행동은 이유가 았어야 합니다 허구가 가미되어 있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면 몰입도가 죽잖아요 세종과 장영실의 마지막은 잘몰랐고 공교롭게 이방송에서 유작가님의 이야기로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영화만보면 선넘네 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 실제기록을 어떤식으로 부풀렸는지 생각하며 여러부분에서 납득이 되었다는 의미로 댓글을 남기게되었고, 영화는 영화로만 보니 걱정마시고 댓글하나에 남을 비방하려하는 편협한 사고는 정정되셨으면 좋겠네여 타인에게 하는 감탄사에 시발은 너네 가족한테나 쳐하시길바랍니다 으휴병신아
여기서 또 대다수에게 잘못 알려진 내용이 노비장영실을 세종이 대려왔다라고 하는데 실은 태종부터 눈에 띄여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는 상태였음 애초에 세종과 나이차가 7살이 넘음 즉 세종이 즉위할땐 이미 20대 후반이였음 물론 이미 그렇게 알려진 장영실을 제대로 쓴건 세종이였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장영실은 발명가라기보단 엔지니어에 가까웠고 지금의 삼성에서 갈려나가는 외계인 같은 공돌이였음 즉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 특히 문종과 세종이 내고 만들어와 하면 대가리 싸매서 만들어오는게 장영실
예전 방송에서 나온 내용중에.. 당시 중국과의 관계때문에 독자적으로 천문기술을 연구하는것을 숨겨야 했다고합니다. 때문에 장영실의 존재와 궁내에 있던 천문기관을 사신이 올때마다 걱정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압박때문에 일부러 내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장영실이란 사람을 위해서 기록도 남기지 않고요;;;
삭제 됐다기 보다, 없다라고 추론하는게 일단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지 않은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실록은 어찌됐든 다음 왕대에 작성하는 기록이고, 그때 승정원일기나 다른 1차 사료들을 기반으로 작성을 하는 거니까, 승정원 일기가 있었다면 기록이 더 남아있을 확률이 있는데, 없으니까 추론하는데 한계가 있죠. 뭐 결국 실록도 사대부들이 쓰는거니까, 장영실에 대한 양반층의 견제가 있을거고, 내용의 각색도 있겠지만, 흠... 진실은 사료부족으로 알 수 없다밖에.... 솔직히 이 정도 기구를 만든 사람이면 누구 개인 문집에라도 남겼을텐데 아무래도 기록이 없다보니 한계가... 아휴 아쉬울 뿐이죠. 기구에 대한 설명 기록같은 것도 남아있을 법한데, 전란도 너무 길었고, 세종실록 자체가 양이 많았는데, 기록 검토 + 작성 기간마저 엄청나게 길었던 지라 한계가 크기도 하고.... 답답할 따름.
네 그렇긴 합니다. 왕도 고위관직의 신하도 보는것 보차 안되는 기록이니까요. 그렇지만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종대 실록은 세종대 이후에 만들어 지니까요. 실례로 실록 연구 학자들도 그부분에 대해서 가장 개탄해 합니다. 실록의 객관성은 인정하되 후대에 의해서 편집되는 과정에서 누설과 누락등이 있었고 2-3번 정도 개편되면서 다시 손질이 가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안따까운 측면이죠. 허나 그 어느나라에도 없는 500년의 정부에 대한 정책이 전반에 걸쳐 기록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 전세계 유일무의합니다. 단순히 박503시절 그 7시간의 기록도 애매한 현실에서 보자면 과거의 저러한 역사 기술과 기록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합니다.
개인적인 주관으로는 누구보다 총명한 세종대왕께서 본인의 사후에 일어날일들을 예견하시고 장영실을 몰래 빼놓은거같다 기록에도 자취를 감출수있게 그렇게 아낀 장영실을 살리기위해. 광해군 꼴날까봐 임진왜란때 나라를 위해 애쓴 광해군이 중국에 인정도 못받은 구실과 여러구실등으로 뒤집어진거처럼
세종대왕이 70 80대 같이 장수한것도아니고 그시절도 왕케어받으면 충분히 더사실나이에 총명이 흐려져서라기보단 장영실 일가의 안위를 생각할때 얼마나 남지않은 본인의 생명을 생각하여 일부러 본인 손에서 처리하시고 기록도 없애라명하시고(장영실을 위해서) 시원미상으로 어디서 살게했을지도 난 세종대왕이 더이상총명하지않아서 모든기록을없애고 곤장80대를 허했을거라생각하지않음 그랬다고하더라도 그것이 총명하지않아서가아니라 세종이 생각한 어떤이유가 있었을듯함
조선왕조 초기라 지역 영주의 힘이 강했던 시기임 이방원이 때려잡은건 사실 그 혈족과 고려 일부충신들이지 토호세력과 기득권이 아님 부민고소금지법 말해주듯 죽는그순간까지 조선에 대신이란 작자들과 일부 기득권과의 싸움을 계속하기에 지쳐겠죠 그와중에 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이던 장영실님이 기록마저 말소되어 죽임을 당하신거고
조선 왕조 초기는 조선 건국의 방해가 되고 왕권강화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모조리 숙청하여 피를 보았고, 그로인해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세종에게 왕위가 물려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왕권강화의 과정에서 난을 피했던 신하들은 전부 낙향하여 사림이 되었구요. 지역 영주라고 말하는 낙향한 사림들의 세력은 아직 강성했을 시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집권중인 훈구파의 세력이 강성했을시기입니다. 세종은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신하들의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왕권강화와 신하의 나라가 상반되는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신하들의 나라였음에도 왕위가 안전했던건 세종의 아버지 즉 태종이 세종의 왕위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을 전부 숙청하였기에 신하들이 알아서 물고빨고씹고해도 세종은 안전했던거죠. 이와중에 듣도보도못한 천한것이 자신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 세종의 측근이 되었으니 훈구파 입장에서는 완전 눈엣가시였겠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훈구파를 달래고 이후 있을 한글창제 및 자신의 왕권가도에 있어서 장영실을 내어주는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겁니다.
당시 명나라가 장영실을 요구해서 장영실은 명나라로 끌려갈수 밖에 없는상황. 세종과 장영실은 당시 최고 천재들. 장영실이 명나라에 안가도 되는 상황만들기 위해 이 두 천재들이 뭘할수 있었을까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었을까요? 장영실이 감독한 가마가 부서진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가고 사실이라 해도 임금님 안위가 걸린문제인데 처벌이 곤장 80대?? 당시 시대상황에선 역모나 다름 없는 사건인데 압슬형이나 참수형이 아니고 장형으로 처벌한게 이상함 추측으로는 때린 시늉만 하고 몰래 은신 시키지 않았을까 생각됨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의심되도 함부로 장영실 행방에 대해 물어볼수 없는 입장이고
김정호 옥사설은 일본이 지어낸거라면서 지롤하면서 장영실에 대한 되도않는 음모론은 막 만들어도 되는건가? 오히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실록을 제외한 공식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얼마 안되는 반면 김정호는 거의 현대에 가까운 시절 사람인데도 신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니 이쪽이 더 이상한것 아닌가?
장영실이 노비출신이다 천문과 과학에 관심도 많았고 대장간에서 농민 국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 개발에도 신경을 많이 썼지요 중국한테 압박도 많이 받고 있고 중국이 장영실을 데려 가려고 하는 상황이 계속 전개되고 있었고 왕과 대화를 하면서 연구하기도 하였던 노비출신 장영실에 대한 시기 질투로 활화산처럼 부풀어 오르는 사대부세력이 장영실을 축출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고 봐야죠 80대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영실 기록도 전혀 없다 세종대왕 첩의자식 공주와 결혼시킨 장영실의 노력으로 승승장구하여 받은 대호군 높은 관직에 올라 있던 장영실이 사라졌다면 부인과 자식들도 모두 사라졌을까요??? 몰살시켰을까요??? 장영실 미스테리도 궁금하죠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장영실의 죽음 관한 설중에 가장 높은 확률 2가지가 1.기득권 세력의 질투와 압박 2.명나라 개입설 이에요. 1번은 뭐 다들 알다시피 사대부에서 압박한거고 2번 명나라 개입설도 상당히 가능성 있는 가설임. 조공국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명나라에서 세종대왕에게 정치적으로 압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함. 철저한 중화주의, 중국대륙이 최고라는 생각이 있는 명나라가 조공이나 바치는 조선의 과학 기술력 발전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라는 가설을 재구성해서 역사저널 그날에서 한번 다룬적이 있음. 이 가설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거 없는듯... 어차피 권력있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자기 밥그릇 지키려고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이더라도 칭찬하고 치켜 올려주는 것보다 깎아 내리기 바쁘니... 결국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면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 자신을 어떻게 수양할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성리학은 끊임없이 만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정치질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을 찾는 것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으니...
합리적인 추론은 유 작가님처럼 나가겠고 제가 상상한 픽션으로 나가면, 세종대왕님이 자신의 운명이 얼마 안남은 것을 알고 자신이 장영실을 처리한 것이죠. 자신이 그냥 죽으면 장영실은 물론이고 장영실의 모든 일족이 멸족 될태니 자신이 직접 처리해서 신원미상으로 살 수 있게 했다고 상상합니다.
출신 태생의 한계로 인한 약점이 정치적인 약점과 거래수단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함. 당시 가히 혁명적이었던 성과를 노비 출신이 이루어냈다는 것은 사대부를 기시한 양반 귀족들의 자존심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이념의 기반이 되는 사대주의에 의거한 계급제의 역순리를 눈엣가시로 여긴것.
장영실이 파직되는 시점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시점을 고려해보면 세종이 장영실로 어그로를 끌고 그 사이 한글창제에 막바지를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봄 ㅋㅋ 장영실의 기술력이면 분명 중국까지 소문이 났을테고 오직 중국만 가질 수 있는 천문학을 연구한 자라면 그를 처벌하고 파직시키는 등등의 소동이면 중국에서도 충분히 인지를 할테고 이정도 어그로는 있어야 훈민정음을 반포할 수 있다고 생각한게 아니었을까 싶음 ㅋㅋ 물론 내 생각 ㅋㅋ 아니면 장영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파직을 시키면서 이걸 민간에 알릴 창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찌되었건 양반출신은 아니니까 민간이랑 이어질 끈으로써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 같음 ㅋㅋㅋㅋ 그것도 아니면 장영실이 한글의 디자인 같은것을 맡았을 수도 있고 ㅋㅋ 장영실이 파직되는 시점이 되게 이상한게 훈민정음 반포되기 직전이라 좀 묘함 ㅋㅋ 아무튼 세종대왕의 성격상 신하를 그렇게 쉽게 나가서 쉬라고 하진 않았을것 같아서 ㅋㅋ
내가 볼땐 왕세자때부터 장영실을 지켜보던 세종인데 과연 나이가 먹고 중국의 핍박을 받았다하여 곤장맞고 죽게했을까? 세종은 이미 장영실 손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과학기술들이 신하들과 중국에 핍박을 받을 것이라 이미 생각하고 진행했을꺼라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해지자 장영실을 데리고 있다면 장영실은 무조건 죽은 목숨이였기에 일련의 사건을 일으키고 놓아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이 아끼던 신하를 이렇게밖에 꺼내줄 수 없었기에 기록도 남기지않고 말이죠 그리고 옛날 곤장을 때리는 사람에 의해 조금 손을 쓸 수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형은 본래 어느정도 강도로 때리는지 규정이 없기에 집행명령 내린 사람의 마음대로 죽일듯이 때릴수도 있고 그냥 처벌하는 시늉만 내릴수도 있음... 때문에 세종이 장영실의 장형을 2등급 감형하라는 말을 내린것 자체가 그냥 봐주긴 눈치보이니 대충 처벌하는 시늉만 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조선 초의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겨우 건진 실록 정도만 제외하고는 대다수 소실된 만큼 기록이 부족한건 장영실만 해당되는게 아님... 기본적으로 조정회의의 기록 위주인 실록에서 그때그때 동정을 자주 써주는건 조정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판서급 이상의 고관들이기에 실록에 기술직 관료인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건 당연한 일임... 이건 현대도 마찬가지라 어디 뉴스에서 늘상 정치인 이야기만 다루지 과학자 이야기를 다뤄주긴 하는지... 지금도 이러면서 조선 시대에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적다고 까는게 이상한 일...
세종실록의 팩트에서 더 넓게 합리적인 추론을 했으면 싶어요. ㅡ 조순생보다 장영실에게 처벌을 한 이유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마도 1.신분제의 주류인 신하들 2. 4군 6진 등 영토 분쟁과 천문과학기술 발달로 견제 중인 명(과 여진)에게 제스처를 쓴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요.
그게 가마가 부서지면서 사대부집안들에서 안그래도 눈에 가시같은데 잘됐다 싶어서 압박이 심하겠죠 사약 먹여서 죽여한다고....곤장치고 제가 알기론 세종대왕이 그래도 장영실 살리려고 귀향보낸걸로 알고있어요 세종대왕이 그렇게 바보가 아니잖아요 아시겠지만 귀향살이 하면 집마당까지는 나오지만 더이상 이동불가라 그래서 거기서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는걸로 기억합니다 뭐 아닐수도있고요 제가 알기론 그렇다는거에요 그리고 세종대왕은 당뇨로 빨리 생을 마감합니다 그당시는 당뇨가 뭔지도 모르는 시대이고 병의 원인도 모르니 당연히 치료방법도 모르죠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건 너무 어린나이때부터겠죠 무슨 말인지 인지하시겠지요?
유시민의 주장은 현대기준으로 이해가 안되는것이고 역사는 그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사건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무조건 현대 기준으로 납득을 할려고 하면 안된다고 역사학자들이 늘상 예기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도 그 자료들을 누가 남겼는가도 생각을 해야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지금은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그당시에는 당연한것들이 많다고 생각을 해볼 필요도 있음. 그리고 몇백년후 지금시대를 미래에서 보면 또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부분이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함.
저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다져두었던 신분제 체계가 한 사람으로 인하여 다시금 불완전해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조선은 세워진지 100년 남짓 안 됐을 때일 텐데 벌써부터 체계가 흔들린다며 사대부들이 압박을 넣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세종이 동의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한 일이 치졸한 토사구팽이고요...
언제 봐도 유익한 [#알쓸신잡] 시즌2 정주행하기😎
👉 ruclips.net/p/PLgbB1gJhmG7BW2B6lZ4NFGLlzZTBjzfGH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장영실같은 인물이 계속나오면 사대부들의 지위가 흔들리잖아요.
공감 강북에서 수능 1등부터 10등까지 나오면 강남 집값이 흔들림
David lee 강남집값이 높은 건 알고있었는데 그게 아이들 교육환경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거였군요.. 결국 나아가서 아이들이 좋은대학가고 부를 축적할수 있게 만들어 주니깐..
근데 조선 역사로 보면 조선초기에는 왕권강화를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인재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신진사대부들은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시켰음
그래서 조선의 황금기가 조선 초기에 몰려있음
세종, 성종 같은 왕들의 시기.
오히려 조선후기에는 수학과 과학을 천시했기 때문에 조선이 망조를 걸은거임
@@dtericnw1c9uw 오롯이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건 사실이죠
@@david-ji8tw 비유가 너무 좋아서 댓글남김 b
모두가 평등하다는 현재도 학연 지연 따지는데 그땐 오죽 했을까
@@HIDEKILLER83 그니까 지금은 표면적으로라도 그렇잖아
@@HIDEKILLER83 ㅋㅋㅋ개똥철학 시전은 친구들 한테나 하세요
문종이 진짜 오래 살았어야 했는데...세종 업적에 대부분 관여했고 군사적인 부분은 거의 도맡아 했고 역사책도 많이 편찬해서 진짜 나라의 근본을 만든 왕인데... 진짜 두고두고 아쉽다
인정합니다 . 세종대왕을 정말 빼닮은 문종이였는데 몸 약한것까지 닮아버려서...
백현준 너무 아쉬워 하지 마세요 문종이 오래 살았으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심지어 너무 잘생기기까지해서 사신들이 문종보고 난리였다네요ㅋㅋㅋ
오구 이유는요??
@@행인-s4z 나비효과요 그냥 정말 좁게 생각해도 저를 만들기위해서는 그시간에 그정자와 그난자가 만나야하는데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이게 저뿐만 아니라 제 조상들이 모두 그래야 하니깐 확률은 그냥 제로죠
'어린이 과학관에 왜 글이 없을까?'라는게 이렇게 심오할지 몰랐다 ㄷㄷ
조선 시대 중에 제일 궁금한 부분임ㅋㅋ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진짜 세종이 갑자기 판단력이 없어진게 아니라면 명 나라한테서 장영실 지키려고 수 쓴게 제일 맞는 거같긴한데
그렇게 좋아하고 믿어주던 장영실을 죽게 두긴 싫었을 수도 있으니 어디라도 가서 살도록 몰래 도망치게 뒤로 빼돌리고 그의 흔적들을 지우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상상도 해봄..
차라리 그랬으면
가장 가능성 높은 이야기가 아닐지....보통 기득권 세력안에 본인만의 탁월한 능력만으로 진입한 사람은 기존 기득권 카르텔에서 언제든 구실을 만들어서 내쫓을려는 습성이 있죠. 당장은 탁월한 장영실의 능력 때문에 계속 벼슬이 높아져 가는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히 단죄할 건덕지를 잡았으니, 다들 떼거지로 들고 일어나서 세종에게 이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놈을 벌하지 않으면 왕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능멸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달달 볶았을겁니다.
현재 우리 기득권 사회 모습을 비춰봐도 아주 타당한 추론같네요.
건덕지를 잡은게 아니라 만든 것이 아닐까 싶네요..
80년대 자수성가한 멕시코계 이민자가 성공해서 꿈에그리던 부촌 비버리힐스에 집을서서 입주했는데
백인들이 멕시칸이 여길...
퇴거시킬 방법이없자 돌아가면서
소송검....
백인1개가 짖어서 잠을 못잔다
법정 싸움 끝나면
백인2 밤에 불을 안꺼서 조명때문에 잠을 못잔다며 소송..
이렇게 조리돌림 몇번하니까
변호사 비용으로 재산탕진해서
결국 거지돼서 이사간 사건도있었죠
@@sshim8271 장영실 하나때문에 왕의 안녕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건 좀... 그거 발각됐다간 관련된 자들은 3대를 목뽑을텐데
@@박천-c4x 세종이 타고 있던 가마가 부러진게 아니라 시운행중에 부러집니다. 그러니 더욱 이해가 안되는 결정이긴하죠
장영실이 저렇게 사라졌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장영실에 관해서 배울 때 곤장을 80대 맞고 그 이후 기록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함. 그리고 그렇게 과학, 기술, 천재를 천대한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도 배워야 한다고 봄. 일본에게 빼앗기기 직전에 서양사람들에게 조선은 미개해 보였고, 실제로 그랬음. 그 시기(1910년대)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을 때임. 이 어마어마한 격차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된걸까..
공이 있는 신하는 졸기까지 적어줄 정도고 죽었다고 하면 언제 죽어서 뭘 보냈다 하는 기록도 있는게 실록인데 선대왕부터 쓰던 신하를 그렇게 보낸다라.. 유시민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네..
최만리도 기록 끊김
다시봐도 좋네. 유작가님의 추론에 동의하는 한 사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리고 만드는데 그것에 대한 기본 구상부터 온갖 것들을 그리고 기록했는데 거기에 버금가는 장영실이 아무런 구상과 기록도 없다는 것은 일부러 없앴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거겠죠?!
장영실이 훌륭하지만 다빈치와 비교는 좀..
반대로 보면 다빈치는 구상 메모는 많지만 완성된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미술사에서 냉정하게 이야기 하는건 그가 결국 쫓겨난 삶을 산 것도 증명이 되는 배경과 팩트가 있어요. 고객이 의뢰한 거에 집중을 하거나 마감일을 지키는 건 신경 안 쓰고 이것 저것 다 깊게 들어가지 못한채 정작 할 일도 못했던 산만함은 재조명 되야 한단 의견도 많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기다리던 클라이언트들의 공분을 산 것도 사실입니다. 미켈란젤로같이 소처럼 일한 사람의 작품과 한 도시에의 업적을 둔 배경과 기록의 차이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쵸 우리는 기록의 민족입니다. 온갖 것을 다 기록했는데 안했을 리 없음.
조선후기가면 실학자 같은 지식인들이 엄청 기록많이 남겼는데 조선전기라고 할지라도 합리적으로 기록을 안 남겼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
진짜 어렸을 때 위인전기 읽고 가장 존경했던 분이었는데...이런분의 인생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안타깝다 ㅠㅠ
초등학교도 못나온 노동꾼이 천재였어
청와대에 불려가서 재능을 인정받고
중급공무원까지 되었을때 거기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대졸 공무원이 자기랑 동급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밑에서도 일하고,
그러다 큰 사건이 터지자 잘됐다 싶은듯
곤장 제대로 5대만 맞아도 걸어가지
못하고 부축받아 끌고 갔다는데
80대면 사형선고나 다름 없음...
(아마 형벌이 끝나기 전에 사망)
관련자료도 꼴보기 싫고 신분제도를
넘어선 무식꾼 자료 싹 없애야
직성이 풀렸겠지
근데 현대에도 신분제가 있다
ㅇㅇ곤장 그거 단순 궁디팡팡 이 아니라고 들었음ㅜ
궁디팡팡 ㅠㅠㅠ 뭔데 웃기고 슬프다...얼마나 아팠을까여 ㅠㅠ
곤장 30대맞으면 생식능력이 없어진다는 기록이 있음 50대 맞기전에 보통 사망하고
뭘 멀리서 찾아..노무현이 그랬는데...그 당시 대통령 선거 나왔는데 전모씨가 상고 나온게 무슨 대통령 한다고...이 지랄하고 당시 한나라당 것들이 난 대통령으로 인정 못해...이 지랄 하고 탄핵까지 간건데...참 멀리도 간다..17년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ubermensch8852 곤장맞다가 사망하면 곤장때린애도 처벌받음
분명 천출 장영실을 두고 사대부의 여론이 좋지 못했을 거고 거기서 세종은 선택을 했어야 했었을 거다.
결국 일이 터졌을 때 사대부의 손을 들어주느냐 아니면 총애하는 장영실의 손을 들어주느냐인데 세종이 장영실을 희생하는 쪽으로 간 거겠지.
제일 가능성 있는 뇌피셜 인것 같습니다. 드라마 천문의 배경이지요?
저도 유시민님의 "더이상 세종대왕이 총명하지 않았다."에 설득되고 공감합니다.
치매가왔죠...그나이에
유시민 대가리에서 뭘 바라나 ㅉ
@@말라떼도신 ㄹㅇ ㅋㅋㅋㅋ
@@말라떼도신 너 대가리 보단 괜찮지 않을까
@@ellajung1995 글쎄 난 지가 한말도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 하진 않아
여기서 자막오류가 있는데 장영실을 발탁한 인물은 태종입니다. 천민출신이던 장영실은 원래 관직을 가질수없었지만 신분의 틀을 깨고 장영실을 발탁한 인물이 태종입니다. 참고로 태종도 장영실의 재능을 아주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ㅎㅎ
그래서 난 유시민이 흐려졌다고 봄
@@Geh-dj2zc 영상 앞내용에서 태종 떄부터 눈여겨 보고 아꼈다고 이야기 합니다. 짧은 편집영상만 말고 풀영상 보시면 다 나옵니다.
그놈의 사대부들. . .
전 세종대왕님의 총명하심이 흐려졌다기 보다는 사대부의 압박이 엄청났던 거라고 봅니다. 노비 출신이 성공한 사례로 남게 되면 양반이라는 신분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세종이 정3품까지 올려 놨는데 이제와서 압박을 못이긴다고 죽였다는건 조금 무리수인듯 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세종대왕 스스로 장영실을 신임할 생각이 없어졌던 것 같습니다.
사대부들이 권력이 한글로인해 많이 무뎌졌나? 한글보급이 언제부터였지?
곤장 80대면 사실상 사형이지 뭐...
ㄹㅇ.. 30대만 맞아도 거의 죽음 확정이였죠
그냥 회초리 찰싹찰싹도 아니고 그 커다란 나무짝으로 풀파워로 쳤을텐데...
10대 넘어가면 엉덩이가 허물어 터지고 장파열로 대변까지 터진다고 하죠.
80대? 안죽지않나
곤장이 엉덩이치는걸로아는데
어릴적운동할때 심하게사고쳐서
코치한다 야구빠따로 풀스윙30대맞고 뒤질뻔했는데 그기억생각해보면 야구빠따풀스윙이랑 곤장더크지만 무겁고 힘이 야구배트보다 덜 들갈것같은데 80대면 죽진않고 엉덩이터지거나 혹은 허리맞고 하반신마비정도..? 하긴 저당시 의학기술이딸려서 맞아서죽는것보단 2차감염으로 죽는게 맞다보네
@@디카프리오-f8j 곤장에 힘을 크게는 못주지만 곤장이 무거워서 그 무게가 힘을 만들어줘서 ㅈㄴ아픕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나이는 이길 수 없으니
더구나 일이 과중하기로 유명한 조선의 왕
그중에서도 일 많이하기로 유명한 왕이었으니
나이 들어서도 젊어서의 혈기, 총기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테죠.
이것이 영화 '천문'의 모티브가 되죠 ㅋㅋㅋㅋㅋ 참 궁금합니다 정말.. 무슨일이 있었을까요 ㅋㅋㅋㅋ
@@dgh06175 아...그렇네... 갑자기 사라지니까
천문에서 나온 정도의 사고면 사형이지... 왕 얼굴에 상처냈다고 왕비도 쫓겨나는데
크 잔잔히 깔리는 비숲 브금마저 완벽한 영상이다
그 실록을 뛰어넘어 1차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승정원 일기만 남아있어도 자세히 내용을 알 수 있을텐데 그 당시의 기록이 임란때 불타서 안타깝네요. 그나마 그후 일기들도 이괄의난때 불타고 또 한번불타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서체로 쓰여진 남아있는 분량들 또한 엄청나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길게는 100년정도 걸린다네요. 혹 거기에 그래도 장영실에대한 조그만 단서가 나올지 기대해봅니다.
장형도 아닌 곤장형이라~
임금의 명에 따라 시행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맞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임
숙종때 장형의 남용을 막기위해 30대 이상은 행하지 못하게 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했는데
곤장은... 왠만하면 아마 뼈 살이 다 터지고 맞가다 죽을 가능성이 큼
세종 돌아가시기 10년 전부터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고 1450년에 돌아가시니 1440년대부터 치매와 시력이 나빠지는 내용도 실록에 나와있고...
세종대왕이 54에 돌아가셨는데 40대중후반부터 치매였다구요..?
@@TONYBOTTLE 네~ 세종실록을 보면 문종이 쇠약한 세종을 대신하여 세자로 정사를 돌본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때 세종이 문종의 병약함을 걱정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1450년에 승하는데 10년전 그러니까 1440년도 쯤에는 건강이 매우 안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문종이 다른 군주와는 달리 국방에 관심도 많고 여러 병감과 병법서에 능통하다 나오는데 어머니 소헌왕후 3년상과 세종의 3년상이 연달아 있어 결국 건강에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 이방원도 세종대왕이 세자 이도였을때 원경왕후 3년상에 세자의 건강을 매우 해쳐 걱정하는 대목이 있고 자신의 사후 3년상에 고기를 꼭 먹을 것을 유언으로도 남겼지요~
@@TONYBOTTLE 치매라는 기록은 없지만 수시로 불같이 화냈다가 하는 감정의 기복과 실명정도의 시력약화와 건강에 치명적임에도 군주로서 자신의 일에 병적으로 완벽함을 보이는 것과 여러정황으로 짐작할 뿐이에요
@@aprovinus6834 치메라기보단 편집증이나 조울증 증세를 보였을수도 있겠네요
곤장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장의 일종이다.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검색해보면 조선 초기부터 ‘곤장’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번역상의 오류이다. 곤장은 조선전기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곤장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고려와 조선의 매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 태의 모양은 에서 보듯이 가느다란 회초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고 지름이 1센티미터가 채 안되었다. 그리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눈치로 바로 답하는 유현준 건축가님 ㄷㄷ
확실히 손권처럼 말년이 노망이 났을지도 모르는일이지 총명한 군주가 끝까지 총명하긴 어려운법이니까
무슨 소리예요? 승하하기 4년전까지만 해도 훈민정음을 반포했는데... 장영실 죽인 것만으로 노망이 난 거예요?
@@Son_ssi 노망 치매 한순간입니다...4년이면 충분한 시간이죠
@@Son_ssi 이미 여러 고질병을 앓고있던 세종대왕님이니 훈민정음 만드시느라 진 다빼고 만들고보니 반발하는 세력때문에 골치이고 정신이 안이상해지는게 더 힘드시죠
근데 손권은 원래 미친넘이었는데 손권은 노망난게 아님
근데 참 저당시엔 인터넷도 폰도 없던 시절인데다, 왕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정말 몰랐겠다..
개인적으로 여러 과학적 산물이 명과의 외교 분쟁 소지가 될거 같아 처리 한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화사상에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며 동북아는 한자를 쓰며 중화 문명권인데 변방의 조선이 독자적인 도량형을 쓴다면 충분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일이죠.
-------------------------------------------------------------------------------------------------------------------------------------------------------------------------------------------------------------------------------------------------------------------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이유는 당시 학문를 우선시 하며 기술을 천시,멸시하는 경향이 강해서 이를 굳이 남길 필요를 못 느껴서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영조시기 최천약 이라는 무관은 자명종을 한번 분해 해보고 그대로 복제해서 만들고 (이전까지는 자명종 수리나 제작이 불가능했음) 일일히 가서 측정하지도
않고 육안으로 길이와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며 국가의 과학,건축에 관여 하며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정점을 찍었는데 작업에 참여한 이들에게 주는 포상을 안 받겠다고
거부했다고 합니다. (무관인 내가 그깟 천한일로 이름 떨치면 천한 기술자 따위로 알려지며 조롱당할까 수치스러워함)
또한 임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는 기록도 자주 보입니다. 도자기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든데다 국가에서도 천시,멸시하니 차라리 기술자 우대해
주는 일본에 남아서 대우 받으면서 살자는 생각이었죠. (일본 도자기 기술이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 갈 수 있는 원인)
명나라 개입설도 장영실 죽음의 가설중 하나에요. 조공국 조선의 기술 과학 발전을 아니꼽게 보는 명나라에서 세종대왕한테 정치적 압박을 줬을 가능성도 있을것 이라는 설이 있고 이걸 재구성해서 역사저널 그날에서 얘기한적이 있음.
장형 100대에서 80대로 감형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장영실의 나이는 세종보다 15세 높은걸로 보아 장형 받을 시기의 나이는 55이상이라 추정됨.
그 시대의 나이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기에 장형을 맞고 살아있다는게 불가능할거라 본다.
너무 슬프다....
기록의 공백은 이야기의 산파..
그렇죠.
0:55 분위기 반전에 비밀의 숲 OST다. 찰떡선곡추 드립니다
😭넘나좋음 듣자마자 시모기 얼굴 떠오름
어딘가에 묻혀있고 언젠가는 꼭 찾아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00:46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 다시없을 천재과학자인데 세월이많이지났음에도 후대로서 죄송하구 마음이 아픕니다 ㅜㅜ
당시 태종이 옹주를 시집 보낸다고 어느 군수에게 니 아들 내 사위해! 했다 군수가 아니 천한 무수리의 자식을 어디 우리집안과! 안해! 했다 그 집안 공중분해되고 아들은 평생 결혼 못하게했다는 전설이... 그 정도로 당시 양반들의 권위의식이 쩌렀는데 천한 장영실의 업적을 가만 뒀을까? 그냥 없는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그거 전설이 아니고 사실이에요 집구석 노비되었다가 손자대에 다시 복권되었다 하네요
세종대왕의 분별력이 떨어졌다면 비슷한 시기에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실정들이 있어야 되지 않나요?
다른 일에는 평소의 세종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유독 한 사건에만 다른 모습을 보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세종 사후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해 궁 밖으로 내보낸것이 아닐런지.
장영실 보호명분은 더 말이 안됨...
사실상 저때 곤장 80대면 살아있어도 사실상 죽은거보다 못한 정도로 불구되는...
80대면 골반 박살남. 곤장이 되게 가벼운 형벌로 취급되는데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합니다. 엎드리면 남아있는 골반 뼈들이 제 자리를 못잡아 앉은뱅이가 되고 박살이 나면 애초에 반신불구
장영실을 살리기위해 80대때리고 내보냈다기에는..당시에는 엉덩이를 정확하게 가격하는것이 아니라. 뼈또 때리는추세라..
기록만 하고 실제 형을 집행안했을수도 있는거죠
역사를 그렇게 보면 한도 끝도 없음. 상상도 실마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거는 기록 자체가 깡그리 사라진거라서.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썩어빠진 사대부들이 세운 조선에 저런 임금 저런 학자가 나왔다는게 오히려 기적이지 고려때만 해도 저런 나라는 아니었는데
선조까지는 성공가도를 걸어간게 조선이엇습니다..ㅋㅋ
중학교 교과서만 읽어봐도 이런 소리는 못할텐데 ㅋㅋ
@@최용준-w7g 8jang , 한성은 ? 무근 댓 보고 하는 말?
역사를 곁할기 식으로 배웠나? 고려는 더 답없었음 ㅋ 고려는 스님들이 문제였지 그리고 원나라 앞잡이들 권력쥐고 악행이란 악행다지르고 그래서 백성들 조선시대때보다 더 굶었단다 ㅋ 그리고 공민왕이 게이야 그만큼 고려말 왕들 향락에 빠졌다봐야 ㅋ
고려까지만해도 그런나라 아닌데 무신정변에 원나라 시다바리 했나? ㅋㅋㅋ역사에 무지한 애새끠들 너무 고려 올려치기하는데
80대를 찐으로 맞았으면 기록이며 업적들이 보존됬을거 같음.. 살려주는대신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기로 세종 이랑 사대부가 합의한거 아닐까?
저시대 사대부들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느냐를 엄청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하니 자신들보다 우수했던 천민의 기록을 지우는걸 더 원했을지도..
너무 재밋어요!!
80대 안 맞고 숨겼을 것 같아요. 황희도 고령이 될때까지 퇴직도 못하게 했는데 자기가 아끼는 신하를 곤장 80대 사형 선고로 목숨 날려버리지 않으셨을듯
저도 음모론을 세울거라면 이쪽
그런데 숨기려면 무엇때문에 숨겼을까요 자신의 명이 얼마남지 알았다는걸 알아서 다른 신하들의 시기로부터 구해주려고?
ㄹㅇ 이건 나도 궁금함. 일각에서는 종의 쇼라고 보는 견해도 있던데..
타임머신이 있다면 장영실의 최후는 꼭 함 보고 싶음
타임머신 타고 가도 그때 언어가 이상해서 말을 이해 못한다던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천안편 ㅡ생각보다 너무 감동과 재미가 있엇던 편 !!ㅠㅠㅠㅠ
근데 곤장 80대면... 사실상 이미 그때 죽었다고 봐야... 10대만 맞아도 골반 뼈가 아작나는 마당에 그 나이에 80대 맞았으면 맞다가 죽었거나 맞고 나서 죽었거나인데...
이 화 덕분에 영화 을 재밌게 볼 수 있었어요 ㅎㅎ
무민 기여웡
ㄱㅇㅇ
이 이야기를 알고 영화 천문을 봤을 때 아 그랬을 수도 있겠다 설득이조금 되더라구용
천문은 역사왜곡영화임 ㅋㅋ
영화 보고 역사 배우는 병신이 있네 시발 ㅋㅋㅋㅋㅋ
영화를 보고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그게 100% 진실이다 라고 믿으시면 안됩니다!
@@놀부-f3j 킴복남 제가 여럿 오해하시도록 댓글을 남겼네요, 죄송합니다. 영화적 인물이해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부가적으로 얘기하면 영화에서 인물의 행동은 이유가 았어야 합니다 허구가 가미되어 있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면 몰입도가 죽잖아요 세종과 장영실의 마지막은 잘몰랐고 공교롭게 이방송에서 유작가님의 이야기로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영화만보면 선넘네 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 실제기록을 어떤식으로 부풀렸는지 생각하며 여러부분에서 납득이 되었다는 의미로 댓글을 남기게되었고, 영화는 영화로만 보니 걱정마시고 댓글하나에 남을 비방하려하는 편협한 사고는 정정되셨으면 좋겠네여 타인에게 하는 감탄사에 시발은 너네 가족한테나 쳐하시길바랍니다 으휴병신아
킴복남 piano 우리나라 영화보고 역사배우는 개돼지들이 대부분 아닌가?? 변호인만보고 노무현 찬양하고 ㅋㅋ 변호인에 놈현이 변호하던 학생부류들이 실제로 얼마나 공산주의사상에 쩔어서 단체 행동 했는지는 영화에 전혀 안나오지
알뜰신잡 또 만들어 주세요
코로나 끝나면 바로요~
고등학교때 저 비슷한말을 국사선생이 한것같다
여기서 또 대다수에게 잘못 알려진 내용이 노비장영실을 세종이 대려왔다라고 하는데 실은 태종부터 눈에 띄여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는 상태였음
애초에 세종과 나이차가 7살이 넘음 즉 세종이 즉위할땐 이미 20대 후반이였음
물론 이미 그렇게 알려진 장영실을 제대로 쓴건 세종이였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장영실은 발명가라기보단 엔지니어에 가까웠고 지금의 삼성에서 갈려나가는 외계인 같은 공돌이였음
즉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 특히 문종과 세종이 내고 만들어와 하면 대가리 싸매서 만들어오는게 장영실
그게 발명가입니다 추상적으로 만들자 하면 그걸 설계하고 제작하는게 발명입니다
대가리 싸멘다고 누구나 만들수있는건 아니겠지요
문종 세종이 설계도 주면서 만들라했으면 공돌이
이런거 만들어라 해서
설계부터 했다면 발명가
@@GforceRonier 자기가 직접설계해서 만들었던거도 많아요 공돌이라 비하하는건 왜이지요?
왕의 명에 만든것도 있지만 아닌것도 많습니다
brian jeong 그걸 왜 저한테 말하죠?
본문글이 왕이 설계까지 다하고 장영실은 도면대로 생산만 하는 공돌이인듯한 뉘앙스이길래
한말인데요
@@GforceRonier 세종대왕이 설계까지 했을까싶은데 모르는거지만 장영실이 설계부터 제작까지 안하면 저렇게 정교하게 안나옴 님은 그냥 만지면 나오는줄아는거같은데 제작의 모든 기초가 설계도를 짜는거임
예전 방송에서 나온 내용중에.. 당시 중국과의 관계때문에 독자적으로 천문기술을 연구하는것을 숨겨야 했다고합니다. 때문에 장영실의 존재와 궁내에 있던 천문기관을 사신이 올때마다 걱정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압박때문에 일부러 내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장영실이란 사람을 위해서 기록도 남기지 않고요;;;
예전에도 노비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실력있어도 주위사람들로부터 질투와 시기... 출신에 대한 차별받고 ....근데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바 없다라는거.....
어디든 언제든 자격지심에 빠져 남을 깎아내리기 바쁜 것들이 일을 망치지.
요즘도 변함없는게 국회의원대다수가 판검사야
서로 밀어주고당겨주니깐ㅋㅋㅋ
0:47 감탄을 금하셨다는거네요…ㅠㅠ
1. 장영실이 사라지면 이익을 얻는 자들은 누구일까?
2.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경우, 불이익을 받는 자들은 누구일까?
3. 문종이 죽으면서 이익을 얻은 자들은 누구일까?
삭제 됐다기 보다, 없다라고 추론하는게 일단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지 않은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실록은 어찌됐든 다음 왕대에 작성하는 기록이고, 그때 승정원일기나 다른 1차 사료들을 기반으로 작성을 하는 거니까, 승정원 일기가 있었다면 기록이 더 남아있을 확률이 있는데, 없으니까 추론하는데 한계가 있죠. 뭐 결국 실록도 사대부들이 쓰는거니까, 장영실에 대한 양반층의 견제가 있을거고, 내용의 각색도 있겠지만, 흠... 진실은 사료부족으로 알 수 없다밖에.... 솔직히 이 정도 기구를 만든 사람이면 누구 개인 문집에라도 남겼을텐데 아무래도 기록이 없다보니 한계가... 아휴 아쉬울 뿐이죠. 기구에 대한 설명 기록같은 것도 남아있을 법한데, 전란도 너무 길었고, 세종실록 자체가 양이 많았는데, 기록 검토 + 작성 기간마저 엄청나게 길었던 지라 한계가 크기도 하고.... 답답할 따름.
조선왕조실록은 왠만한 공작으로는 기록말살이 안됄텐데...
네 그렇긴 합니다. 왕도 고위관직의 신하도 보는것 보차 안되는 기록이니까요.
그렇지만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종대 실록은 세종대 이후에 만들어 지니까요. 실례로 실록 연구 학자들도 그부분에 대해서 가장 개탄해 합니다.
실록의 객관성은 인정하되 후대에 의해서 편집되는 과정에서 누설과 누락등이 있었고 2-3번 정도 개편되면서 다시 손질이 가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안따까운 측면이죠. 허나 그 어느나라에도 없는 500년의 정부에 대한 정책이 전반에 걸쳐 기록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 전세계 유일무의합니다.
단순히 박503시절 그 7시간의 기록도 애매한 현실에서 보자면 과거의 저러한 역사 기술과 기록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합니다.
@안감독 후대에 기록하니까 의도적으로 뺀것일수도 있는거
개인적인 주관으로는 누구보다 총명한 세종대왕께서 본인의 사후에 일어날일들을 예견하시고 장영실을 몰래 빼놓은거같다 기록에도 자취를 감출수있게 그렇게 아낀 장영실을 살리기위해. 광해군 꼴날까봐 임진왜란때 나라를 위해 애쓴 광해군이 중국에 인정도 못받은 구실과 여러구실등으로 뒤집어진거처럼
하ㅜ 가슴아프다ㅜ 천재과학자장영실도 아깝고ㅜ 사대부 썩을놈들이 시기해서 역사기록 지웠을 가능성이 커보인다ㅜㅜ
세종대왕이 70 80대 같이 장수한것도아니고 그시절도 왕케어받으면 충분히 더사실나이에 총명이 흐려져서라기보단 장영실 일가의 안위를 생각할때 얼마나 남지않은 본인의 생명을 생각하여 일부러 본인 손에서 처리하시고 기록도 없애라명하시고(장영실을 위해서) 시원미상으로 어디서 살게했을지도 난 세종대왕이 더이상총명하지않아서 모든기록을없애고 곤장80대를 허했을거라생각하지않음 그랬다고하더라도 그것이 총명하지않아서가아니라 세종이 생각한 어떤이유가 있었을듯함
조선왕조 초기라 지역 영주의 힘이 강했던 시기임 이방원이 때려잡은건 사실 그 혈족과 고려 일부충신들이지 토호세력과 기득권이 아님 부민고소금지법 말해주듯 죽는그순간까지 조선에 대신이란 작자들과 일부 기득권과의 싸움을 계속하기에 지쳐겠죠 그와중에 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이던 장영실님이 기록마저 말소되어 죽임을 당하신거고
영주?
조선 왕조 초기는 조선 건국의 방해가 되고 왕권강화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모조리 숙청하여 피를 보았고, 그로인해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세종에게 왕위가 물려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왕권강화의 과정에서 난을 피했던 신하들은 전부 낙향하여 사림이 되었구요. 지역 영주라고 말하는 낙향한 사림들의 세력은 아직 강성했을 시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 집권중인 훈구파의 세력이 강성했을시기입니다. 세종은 왕권이 강화된 상태에서 신하들의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왕권강화와 신하의 나라가 상반되는 말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신하들의 나라였음에도 왕위가 안전했던건 세종의 아버지 즉 태종이 세종의 왕위에 방해가 될만한 인물을 전부 숙청하였기에 신하들이 알아서 물고빨고씹고해도 세종은 안전했던거죠. 이와중에 듣도보도못한 천한것이 자신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 세종의 측근이 되었으니 훈구파 입장에서는 완전 눈엣가시였겠지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훈구파를 달래고 이후 있을 한글창제 및 자신의 왕권가도에 있어서 장영실을 내어주는건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겁니다.
좋은 흐름이라는것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것 같아요.. 모든 상황이 두루 맞아야하는데..
문종은 너무 빨리 죽어서 안타깝고.. 하필 그 다음왕이 너무 어렸던 단종인 바람에 다시 사대부들의 힘이 강해지고...
세종대왕이 더는 총명하지 않았다고 말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 주변의 압박으로
장영실을 감싸주지 못했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장영실 선생은 너무 맘아파요~자랄때도 힘드셨고
당시 명나라가 장영실을 요구해서 장영실은 명나라로 끌려갈수 밖에 없는상황. 세종과 장영실은 당시 최고 천재들. 장영실이 명나라에 안가도 되는 상황만들기 위해 이 두 천재들이 뭘할수 있었을까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었을까요? 장영실이 감독한 가마가 부서진것도 솔직히 이해가 안가고 사실이라 해도 임금님 안위가 걸린문제인데 처벌이 곤장 80대?? 당시 시대상황에선 역모나 다름 없는 사건인데 압슬형이나 참수형이 아니고 장형으로 처벌한게 이상함 추측으로는 때린 시늉만 하고 몰래 은신 시키지 않았을까 생각됨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의심되도 함부로 장영실 행방에 대해 물어볼수 없는 입장이고
김정호 옥사설은 일본이 지어낸거라면서 지롤하면서 장영실에 대한 되도않는 음모론은 막 만들어도 되는건가? 오히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실록을 제외한 공식기록이 소실되는 바람에 얼마 안되는 반면 김정호는 거의 현대에 가까운 시절 사람인데도 신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니 이쪽이 더 이상한것 아닌가?
장영실이 노비출신이다 천문과 과학에 관심도 많았고 대장간에서 농민 국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 개발에도 신경을 많이 썼지요
중국한테 압박도 많이 받고 있고 중국이 장영실을 데려 가려고 하는 상황이 계속 전개되고 있었고 왕과 대화를 하면서 연구하기도 하였던 노비출신 장영실에 대한 시기 질투로 활화산처럼 부풀어 오르는 사대부세력이 장영실을 축출하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고 봐야죠 80대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장영실 기록도 전혀 없다
세종대왕 첩의자식 공주와 결혼시킨 장영실의 노력으로 승승장구하여 받은 대호군 높은 관직에 올라 있던 장영실이 사라졌다면 부인과 자식들도 모두 사라졌을까요??? 몰살시켰을까요??? 장영실 미스테리도 궁금하죠
장영실의 출신배경과 업적에 시기 질투하던 기득권자들이 없앤게 맞네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 등용할때도 주변에서 반대했었다죠...
아닌데요
장수된 자 가운데 천민 출신도 있었으므로 장영실에게도 벼슬을 줄만 하다 라고 해서
찬성하는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yadukjibhabso 네 그렇죠 근데 그들은 비주류였다는게 문제였죠
@@미루나무빤쮸 비주류는 무슨...실록만 봐도 조말생, 유정현이 찬성하는데 그들이 비쥬류인가요?
Min Kyu Park 유시민 작가님 말대로 그 사건을 명분삼아서 장영실을 눈앳가시로 보던 사대부들의 계략(?) 이라고 보여집니다. 조순생은 가마가 부러질줄 알았을테고 괜찮다 문제없다 이러다가 부러지니까 나몰라라 장영실에게 덮어 씌우기..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장영실의 죽음 관한 설중에 가장 높은 확률 2가지가 1.기득권 세력의 질투와 압박 2.명나라 개입설 이에요. 1번은 뭐 다들 알다시피 사대부에서 압박한거고 2번 명나라 개입설도 상당히 가능성 있는 가설임. 조공국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명나라에서 세종대왕에게 정치적으로 압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함. 철저한 중화주의, 중국대륙이 최고라는 생각이 있는 명나라가 조공이나 바치는 조선의 과학 기술력 발전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라는 가설을 재구성해서 역사저널 그날에서 한번 다룬적이 있음. 이 가설도 상당히 가능성이 높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거 없는듯...
어차피 권력있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자기 밥그릇 지키려고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이더라도 칭찬하고 치켜 올려주는 것보다 깎아 내리기 바쁘니...
결국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면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내 자신을 어떻게 수양할까를 생각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성리학은 끊임없이 만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놈의 정치질 때문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을 찾는 것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으니...
저떄로 타임머신타고 가고싶다 ㄹㅇ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네
천년전이나 천년후나 기득권자들이 문제일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은 유 작가님처럼 나가겠고 제가 상상한 픽션으로 나가면, 세종대왕님이 자신의 운명이 얼마 안남은 것을 알고 자신이 장영실을 처리한 것이죠. 자신이 그냥 죽으면 장영실은 물론이고 장영실의 모든 일족이 멸족 될태니 자신이 직접 처리해서 신원미상으로 살 수 있게 했다고 상상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장영실 가족 없지 않았나요?? 결혼 안했던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아시는분...??
거기어디에요?
명나라의 몰래 비밀리에진행한거니 당연 명나라에 걸리면안되니까 그래서 기록이 남지않은거지
모든 기록 도면 글씨 자체가 안남았다는게 문제가 있는거지..
유시민 씨 말로 저도 그냥 다 없앴거나.. 아니면 미래에서 온자 일수도
출신 태생의 한계로 인한 약점이 정치적인 약점과 거래수단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함. 당시 가히 혁명적이었던 성과를 노비 출신이 이루어냈다는 것은 사대부를 기시한 양반 귀족들의 자존심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이념의 기반이 되는 사대주의에 의거한 계급제의 역순리를 눈엣가시로 여긴것.
장영실이 파직되는 시점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시점을 고려해보면 세종이 장영실로 어그로를 끌고 그 사이 한글창제에 막바지를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봄 ㅋㅋ 장영실의 기술력이면 분명 중국까지 소문이 났을테고 오직 중국만 가질 수 있는 천문학을 연구한 자라면 그를 처벌하고 파직시키는 등등의 소동이면 중국에서도 충분히 인지를 할테고 이정도 어그로는 있어야 훈민정음을 반포할 수 있다고 생각한게 아니었을까 싶음 ㅋㅋ 물론 내 생각 ㅋㅋ 아니면 장영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파직을 시키면서 이걸 민간에 알릴 창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찌되었건 양반출신은 아니니까 민간이랑 이어질 끈으로써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 같음 ㅋㅋㅋㅋ 그것도 아니면 장영실이 한글의 디자인 같은것을 맡았을 수도 있고 ㅋㅋ 장영실이 파직되는 시점이 되게 이상한게 훈민정음 반포되기 직전이라 좀 묘함 ㅋㅋ 아무튼 세종대왕의 성격상 신하를 그렇게 쉽게 나가서 쉬라고 하진 않았을것 같아서 ㅋㅋ
유시민님을 존경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이 모든것을 맘대로 할 수가 없는 나라라는 것을 아시는 분이.. 저런 추론을...
세종이 가진 왕권으로 조정할 수 있는 범위였다고 생각하신 듯
일단 자료가 공백 상태임.. 뭐가 없으니 추론이나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수 밖에..
내가 볼땐 왕세자때부터 장영실을 지켜보던 세종인데 과연 나이가 먹고 중국의 핍박을 받았다하여 곤장맞고 죽게했을까? 세종은 이미 장영실 손으로 하여금 만들어진 과학기술들이 신하들과 중국에 핍박을 받을 것이라 이미 생각하고 진행했을꺼라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해지자 장영실을 데리고 있다면 장영실은 무조건 죽은 목숨이였기에 일련의 사건을 일으키고 놓아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이 아끼던 신하를 이렇게밖에 꺼내줄 수 없었기에 기록도 남기지않고 말이죠 그리고 옛날 곤장을 때리는 사람에 의해 조금 손을 쓸 수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형은 본래 어느정도 강도로 때리는지 규정이 없기에 집행명령 내린 사람의 마음대로 죽일듯이 때릴수도 있고 그냥 처벌하는 시늉만 내릴수도 있음... 때문에 세종이 장영실의 장형을 2등급 감형하라는 말을 내린것 자체가 그냥 봐주긴 눈치보이니 대충 처벌하는 시늉만 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조선 초의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겨우 건진 실록 정도만 제외하고는 대다수 소실된 만큼 기록이 부족한건 장영실만 해당되는게 아님... 기본적으로 조정회의의 기록 위주인 실록에서 그때그때 동정을 자주 써주는건 조정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판서급 이상의 고관들이기에 실록에 기술직 관료인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건 당연한 일임... 이건 현대도 마찬가지라 어디 뉴스에서 늘상 정치인 이야기만 다루지 과학자 이야기를 다뤄주긴 하는지... 지금도 이러면서 조선 시대에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적다고 까는게 이상한 일...
세종대왕의 총명함이 사라진 어리석은 임금이 되었다는 가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냥 단 한번도 상상해본적이 없음..
장영실 진짜 좋아하는 위인이였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랐어.곤장 아플텐데
사람 사는건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비슷하군. 하긴 다를 리가.....
세종실록의 팩트에서 더 넓게 합리적인 추론을 했으면 싶어요.
ㅡ 조순생보다 장영실에게 처벌을 한 이유는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마도 1.신분제의 주류인 신하들 2. 4군 6진 등 영토 분쟁과 천문과학기술 발달로 견제 중인 명(과 여진)에게 제스처를 쓴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요.
글은 알았을까?
천문 영화에 보면 세종이 본인이 가마의 쇠를 부러뜨렸다고 하는데 장영실 데려오려는 빅픽쳐라고 알았는데 아닌가요? 진짜 가서 묻고 싶다...
그게 가마가 부서지면서 사대부집안들에서 안그래도 눈에 가시같은데 잘됐다 싶어서 압박이 심하겠죠 사약 먹여서 죽여한다고....곤장치고 제가 알기론 세종대왕이 그래도 장영실 살리려고 귀향보낸걸로 알고있어요
세종대왕이 그렇게 바보가 아니잖아요
아시겠지만 귀향살이 하면 집마당까지는 나오지만 더이상 이동불가라 그래서 거기서 쓸쓸이 생을 마감했다는걸로 기억합니다
뭐 아닐수도있고요 제가 알기론 그렇다는거에요 그리고 세종대왕은 당뇨로 빨리 생을 마감합니다 그당시는 당뇨가 뭔지도 모르는 시대이고 병의 원인도 모르니 당연히 치료방법도 모르죠 병의 원인으로 생각하는건 너무 어린나이때부터겠죠 무슨 말인지 인지하시겠지요?
힘있는자들에.의해 남겨진 역사 ... 분서갱유가 저때도 있었군요 ...
유시민의 주장은 현대기준으로 이해가 안되는것이고 역사는 그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사건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무조건 현대 기준으로 납득을 할려고 하면 안된다고 역사학자들이 늘상 예기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도 그 자료들을 누가 남겼는가도 생각을 해야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지금은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그당시에는 당연한것들이 많다고 생각을 해볼 필요도 있음. 그리고 몇백년후 지금시대를 미래에서 보면 또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부분이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일수 있다는 생각도 해야함.
기록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는거지...
합리적으로 추론하든 대충 추론하든.. 결국 사실을 알 순 없음.
저게 지금 봐서는 합리적인 추론이지...
그런 발명품을 개발하는데 문서 하나 글 하나가 없다는게 말이 안되지...
분명 다 없앴을 것이고 기록에서 지워버리려 했을거다... 그 당시 양반들이라면....
언제태어나고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다니
왜 장영실이 죽었을거라고 생각하지 당신 옆에 있을수 있어
아마 장영실 집안을 거의 몰살시켰을것같은데.
.그래도 누군가에의해 어디엔가 장영실에관한 고서적은 남아있지 않을까...
진짜 그렇겠네.. 그 사대부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겠지. 장영실에게 이런 숨겨진 사건들이 있었을 줄이야.
어찌보면 하품 나올 것 같은 역사학이란 것도 파고들면 정말 재미있을지도 모를 일이로군.
나의 조상님은 어떤분이셨을까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
그게아님 세종이 더이상 사대부들의 질투에의해 위험해진 장영실을 몰래 살려내보낸거고 궁내 장영실관련 한구령을 내린거임
저는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다져두었던 신분제 체계가 한 사람으로 인하여 다시금 불완전해지는 걸 용납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조선은 세워진지 100년 남짓 안 됐을 때일 텐데 벌써부터 체계가 흔들린다며 사대부들이 압박을 넣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세종이 동의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한 일이 치졸한 토사구팽이고요...
장형친다해도 노비가 대신 맞거나 사람사서 대신 맞게하거나 하고 거기에 때리더라도 하루에 다 때리는게 아니라 하루에 몇대이상 때리지 않습니다 맞고 상처가 아물면 다시 때리죠 기록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더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