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의 가장큰 패착중 하나는 근정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옹정이 과로로 병을 달고 살았음에도 건륭은 다도 및 온갖 사칭하 호사를 누렸고. 또한 본인 이 직접 언급한데로 산술에 능하지 못하여 화신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옹정이 실학적인 인재를 등용하여 대수로 건설등의 많은 치적을 쌓은것에 비교되게 실질적 진보가 없는 기득권 세력들의 부패를 용인함으로 매관매직을 통한 부패의 가속화를 극도로 이끌어 냈으며, 자신 농사도 망쳐서 그 후손중 특출나게 군정 또는 경영에 뛰어난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풍류에 가득찬 고풍스러운 취미를 즐겼을지 모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심히 부족 하였습니다.
제가 님채널에서 청나라 역사를 가장 좋아 합니다. 그이유중하나는 강희제가 추구했던 과학적 진실을 옹정제 이후로 건륭제때 이 1800년 쯤에 기회를 날린게 너무나 아쉬어서 입니다. 솔직히 전쟁을 공부하는 분들은 이미 1600년부터 서양국가들의 기술이 동양을 압도하기시작했다고 하죠. 하지만 옹정제가 4시간만 자고 부폐를 줄이고 내정에 전성기가 오면서 은이 넘처들어오던시기에 이정도 경제활동에 도자기 차 비단 등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에서 자본은 충분히 뉴턴이 발견한 미수학등 공학적인 기계화된 부분을 놓친 운명적인 사건이 이 만남이 아닌가 해서저는 특별히 아쉽다라고 봅니다. 건륭제때 조공 바치는 나라가 부근국가들은 다 지배당했고 러시아 빼고 일본은 중립 스폐인 빼고 등 네덜란드는 삼고의예를 한걸로 기억납니다 결국 도자기를 어마어마한 값에 영국 왕실에 팔아 넘겼다고 기록되있습니다... 건륭제님은 시계의 정밀한 서양의 기술 만원경 기술 기계학 수학 더나아가서 천문학은 강희제때부터 서양선교사분들이 중국식을 발려놨죠. 이런 부분들을 발전시키고 그때의 전성기이상을 추구할수있었던 어떤 운명적인 기회를 날린 후퇴의 신호탄으로 보면서 아쉬워서 저는 청나라 역사를 많이 그냥 봅니다.
7:05 낡은 거대한 전함이라는 말이 청나라랑 딱들어 맞네요. 정신차리고 낡은부분 다 떼네고 신식으로 무장하면 온 바다를 누리며 열강이 될 나라지만, 결국 계속 낡아있기를 원해서 1901년에 여덟 나라에게 갈기갈기 찢긴 청나라.. 일본은 1840년대 되서야 미국이랑 만나서 본격적으로 개항됬는데, 청은 그보다 40여년이나 일찍 만나고도 터져버린게 아쉽긴 하네요. 천자국이라는 자존심이 너무 과해서 상황판단을 못한건가 싶습니다
메카트니의 청국에 대한 평가가 소름이네요. 건륭제는 단지 시대와 선제들을 잘 만난 평범한 황제일뿐이네요. 어떠한 국가든 정보에서 뒤쳐지면 망하는 지름길인듯...영국에 대해 알아 볼 생각도 없었나...그들이 타고온 배와 같이 온 수행원들만 면밀히 관찰했으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텐데... 안일함과 자만심으로 가득찬 모습이 그려지네요. 혹...자신감이었을까요? 멀리서 온 영국군은 지쳐있을테고, 병력과 병참에서 우위에 있는 청의 승리를 확신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청이 망국으로 가는 길을 봐야겠지요? 흠...또다시 벌어지는 안타까움의 역사...
@@justice20000 영국과 청의 상황을 다 알고 이 영상을 다시 봐야할듯하네요. 단순하게 청의 어리석음만을 알고 영국의 생각까지 가늠할 수 없는 제 생각은 반쪽짜리...청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ㅋ.ㅋ 숲을 바라보는 시야와 나무의 줄기만을 보는 시선의 차이는 크니까요. 머 둘다 장단은 있지만~ 조지3세를 알아봐야겠네요.
@@MarieZorroIndiana 영국의 상황을 알고 싶으시다 하셔서 조금 오지랖을 펼쳐서 말씀을 드리자면, 영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왕의 권력을 제한한 시기가 빠른 국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입헌군주제라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영국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대헌장 -> 백년전쟁 -> 장미전쟁 -> 헨리8세 -> 엘리자베스 1세 -> 청교도혁명 -> 명예혁명 까지 이렇게 7개를 공부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영국이 왜 20세기 초까지 세계 최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해요. 조지3세는 그 후의 열매를 따먹은 왕일뿐입니다. 건륭제가 그랬듯이... 무례한 말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초록별님~
서세동점의 시대가 없었으면 동양은 아직도 1%가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였겠죠. 서세동점으로 황조, 막부의 권위가 박살나고 외세의 횡포에 대한 오욕감을 느끼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없음에도 신분제를 부정하는 혁명이 일어날수 있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러시아가 독일군에 박살나면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던 것처럼요
통치자의 절대 권력과 중산층 시민계급 사회는 상극입니다. 칭기스칸이나 히틀러 처럼 바닥에서 시작하면 어떤 사회체제를 갖추던 어떤 첨단 무기를 도입하든 제 마음이지만 건륭제처럼 세습 통치자 입장에선 자신이 아무리 개혁과 첨단 문물에 관심이 많아도 저항에 부딪힐수밖에 없읍니다.
매카트니의 방문 이전의 서양세계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 포르투갈이 명나라 찔러보다가 얻어터진거 때문에 감히 건드리기 힘든 동방의 대국이란 두려움이 있었는데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마냥 소수의 군대로 정복 및 식민지배 가능한 미개한 국가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계기.. 애초에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은 머만하면 백만, 가장 문명화된 지역, 부유하고 엄청난 도시 등으로 기록된게 큰 듯
당시 청나라는 세계최고 자체 생산국가라서 사실 교역자체가 필요없는 나라라서 더 그럴수 있겠죠. 영국,네덜란드은 해상을 통한 무역이 없으면 알거지가 되는 나라였고 그 당시 청나라 환경이면 교역할만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뭐가 부족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외국과 무역교역을 해야하는 환경이 아니다보니 아쉬운 쪽은 영국같은 무역으로만 생존가능한 국가였죠. 그리고 메카트니 말은 하나마나 소리같습니다.청나라뿐만 아니라 어디나라,민족이든 어느 왕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ㅎㅎㅎㅎ
영국이 대청외교를 못한듯. 영국의 요구는 건륭제 뿐만 아니라 강희제 내가 좋아하는 옹정제도 안 받았을듯 포르투갈만 해도 중국 생리를 잘 알아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구워 삶아 마카오를 사실상 할양 받는데 삼두구례인가랑 상관없이 요구 자체가 절대 안 받을 거를 받으라 했으니 당연. 거기다 심기까지 건드렸으니 더더욱
댓글이 검토 대기에 걸리는 바람에 이제야 봤네요. 답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유대인이 실소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처음 펀딩을 만들고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먼저 키운 것은 말씀하신것 처럼 레콩키스타로 쫓겨났던 세파르딤 유대인 후손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당시 네덜란드의 펀딩기술이 영국보다 훨씬 앞섰고 영국이 후에 네덜란드의 펀딩기술을 모방하지만 이미 뒤쳐져서 17세기 제해권은 네덜란드가 가져갑니다. 말씀하신것 처럼 뉴욕이전엔 뉴암스테르담이었고, 월스트리트가 영국인 등 기타 외지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건설된 장벽이었지요. 지금은 월가를 금융의 동의어 쯤으로 사용하는 것도 유대인들이 금융의 핵심이고 그들이 월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현재 그쪽에 고급 보석가게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해야했던 유대인들이 재산을 가볍게 하기 위한 조치의 유산이라고 강의를 들은 적이 있네요... 늦게 답변해드린 것이 죄송해서 주저리주저리 적어봤습니다... 불편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강대봉님~
@@justice20000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많은 지도편달 바라나이다 👍😍 네델란드 크리스티앙9세던가요, 러시아 알렉산드르3세의 왕비 아빠요, 그 분이 유대인 박해를 많이 했고 그 영향으로 러시아도 유대인 박해를 많이 하는 바람에 유대인들이 돈을 빼고 원한을 가지고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대주고 ~제정러시아가 멸망으로 가는 기폭제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종교맹신 특히 집권자의 맹신이 무서운 것 같습니다^^ 박×× 씨도 최순× (최태×교의 후계자) 교주의 신도라서 교주(최××)의 뜻을 거스르긴 어려웠을 거란 평을 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 한다든지 ~~, 이런 종교적 신념은 지위고하, 학식 유무, 인격 고매 여부 등등과는 별개일까요? 세계사를 보면, 학식이 높을수록 맹신이 더 심한 듯 보이거든요. 에라스무스 보면 루터 주장을 깨느라 자신의 학식을 총동원해더라구요^^
정조 만나 봤자 정조는 그나마 청나라 배우자는 박지원 탄압. 문자의 옥이 심하던 청나라 문체를 탄압하고 책을 불사름 만동묘에 친히 제사를 엄청 하고, 성리학 강조. 청나라랑 싸우자는 신하 후손 김조순 사위로 만들고 하여간 전혀 개혁군주 아님 영국 입장에서 도자기 차를 거래하니까 청나라랑 하지 조선은 가난하고 굳이 상대할 필요 없는 국가였으니 굳이
당시 영국의 조항은 청나라가 받아 들 일수 없는 조건이고 저것은 거의 무역전쟁시 강행할 정책이기에 당시 유럽에서 교역이 어떻게 이뤄졌든 유럽외에서 정말 무례한 사항이긴 합니다. 청나라의 운명에 별다른 감흥은 없지만 영국을 대표로 하는 제국주의 발상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게 자랑 서러운 역사라고 할 수가 없죠.. 아편전쟁을 왜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지도 생각 해 봐야 함..
참 그 대영제국 답지않게 청조를 방문할때 되게 정성스럽고 예의발랐네요. 대국은 대국이라 생각했는지 영국이 저자세였던 나라가 당시에 청이 유일함. 온갖 신무기 신기술 심지어 애드벌룬 등 산물등을 알아서 영국이 저자세로 환심사려고 갖다 바친 나라가 통상수교 원했던 나라가 18세기말 19세기 초 중국밖에 없었음.. 산업혁명 직후였는데도 생산단가가 청에 비해 떨어져서 모직물, 면직물 반응 시큰둥... 청의 도자기, 차 등은 엄청팔림. 영국 빡쳐서 아편 팔아버림..
말씀해 주셔서 저도 방금 뉴스 봤습니다. 아나운서가 친룽황제라 하니까 건륭제가 맞네요... 뉴스에서는 감정결과 1789년 이라했고, 사절단은 1792년 출발했으니까 조금 차이가 있긴 하네요... 뉴스에서는 그래서 어떤 이유로 대포가 영국에 왔는지는 알수 없다고 멘트를 달아놨네요... 당시는 이미 무역선들이 중국을 활발히 오가던 시기기 때문에 매카트니 사절단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동인도회사 선박이 싣고 왔을 수도 있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영상 초반에 영국의 면직물이 아니라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받은것이 아닌지요?
그렇네요. 모직물인데...
실수했네요. 댓글 고정해 두겠습니다.
구독자분들께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적 감사드립니다. 스텐터님.
자국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오만이 가져온 결과.. 어느 국가든 시대의 발전과 변화를 받아들이지않고 성장하지 못하면 강력했던 국가도 더 강해진 국가에게 먹힌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역사의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네. 동의합니다. 결국 영국도 세계의 패권을 쥔 후 현실에 안주해서 독일에게 추월당하며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되죠..
말씀 잘 들었습니다. R SM님~
과제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시절의 영국을 보면 그준비성과 분석력 그에 따른 행동의 조절이 뛰어나단걸 알게됩니다..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항상 잘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gw kang님~
알기쉽게 설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녁 식사하고 보면서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다시 처음부터 봤어요 ㅎㅎㅎ
네.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학선님~
이성과 과학으로 계몽된 유럽인의 자신감이 느껴지는군요. 일본은 서양 서적도 꾸준히 수입, 번역되고 난학 전문 사숙도 세워졌는데...
그래도 페리사마께 훈도시까지 탈탈 털림.^^
@@배달의기수-w7e거까진 안털림 ㅋ
한족한테 좋은짓만 하고 민족이 사실상 말살 되어버렸네
중국은 워낙 한족이 인구가 많아서 원 제외하고 다 지배민족이 한화됨
건륭의 가장큰 패착중 하나는 근정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옹정이 과로로 병을 달고 살았음에도 건륭은 다도 및 온갖 사칭하 호사를 누렸고. 또한 본인 이 직접 언급한데로 산술에 능하지 못하여 화신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옹정이 실학적인 인재를 등용하여 대수로 건설등의 많은 치적을 쌓은것에 비교되게 실질적 진보가 없는 기득권 세력들의 부패를 용인함으로 매관매직을 통한 부패의 가속화를 극도로 이끌어 냈으며, 자신 농사도 망쳐서 그 후손중 특출나게 군정 또는 경영에 뛰어난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풍류에 가득찬 고풍스러운 취미를 즐겼을지 모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심히 부족 하였습니다.
네. 좋은 말씀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B Shin님~
건륭제에 비해 강희제는 서양문물과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던데 둘의 통치시기가 달랐어도 아편전쟁은 피할수 없었을까요?
강희제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니 강희제가 아편전쟁 시기까지 살아있었다면
개인적으로는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이렇게까지 철저히 당하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중국사 정말 재미있습니다~ㅎㅎ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 역사님.~
저도 영상 올리실때마다 열심히 응원할께요~^^
@@justice20000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힘이 많이 납니다~^^
제가 님채널에서 청나라 역사를 가장 좋아 합니다. 그이유중하나는 강희제가 추구했던 과학적 진실을 옹정제 이후로 건륭제때 이 1800년 쯤에 기회를 날린게 너무나 아쉬어서 입니다. 솔직히 전쟁을 공부하는 분들은 이미 1600년부터 서양국가들의 기술이 동양을 압도하기시작했다고 하죠. 하지만 옹정제가 4시간만 자고 부폐를 줄이고 내정에 전성기가 오면서 은이 넘처들어오던시기에 이정도 경제활동에 도자기 차 비단 등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에서 자본은 충분히 뉴턴이 발견한 미수학등 공학적인 기계화된 부분을 놓친 운명적인 사건이 이 만남이 아닌가 해서저는 특별히 아쉽다라고 봅니다. 건륭제때 조공 바치는 나라가 부근국가들은 다 지배당했고 러시아 빼고 일본은 중립 스폐인 빼고 등 네덜란드는 삼고의예를 한걸로 기억납니다 결국 도자기를 어마어마한 값에 영국 왕실에 팔아 넘겼다고 기록되있습니다...
건륭제님은 시계의 정밀한 서양의 기술 만원경 기술 기계학 수학 더나아가서 천문학은 강희제때부터 서양선교사분들이 중국식을 발려놨죠. 이런 부분들을 발전시키고 그때의 전성기이상을 추구할수있었던 어떤 운명적인 기회를 날린 후퇴의 신호탄으로 보면서 아쉬워서 저는 청나라 역사를 많이 그냥 봅니다.
그렇군요. 말씀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경제때도 삼배구고두가 문제가 되서 영국사절 에머스트 가 끌려나갔죠
7:05 낡은 거대한 전함이라는 말이 청나라랑 딱들어 맞네요. 정신차리고 낡은부분 다 떼네고 신식으로 무장하면 온 바다를 누리며 열강이 될 나라지만, 결국 계속 낡아있기를 원해서 1901년에 여덟 나라에게 갈기갈기 찢긴 청나라..
일본은 1840년대 되서야 미국이랑 만나서 본격적으로 개항됬는데, 청은 그보다 40여년이나 일찍 만나고도 터져버린게 아쉽긴 하네요. 천자국이라는 자존심이 너무 과해서 상황판단을 못한건가 싶습니다
매카트니는 폴 매카트니의 조상인가요?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국제정세가 저때와 다르지 않죠
메카트니의 청국에 대한 평가가 소름이네요.
건륭제는 단지 시대와 선제들을 잘 만난 평범한 황제일뿐이네요.
어떠한 국가든 정보에서 뒤쳐지면 망하는 지름길인듯...영국에 대해 알아 볼 생각도 없었나...그들이 타고온 배와 같이 온 수행원들만 면밀히 관찰했으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알아차렸을텐데...
안일함과 자만심으로 가득찬 모습이 그려지네요.
혹...자신감이었을까요? 멀리서 온 영국군은 지쳐있을테고, 병력과 병참에서 우위에 있는 청의 승리를 확신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청이 망국으로 가는 길을 봐야겠지요? 흠...또다시 벌어지는 안타까움의 역사...
네. 당시 영국은 왕이 맘대로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으니
정의 정치제도를 보면서 참 후진적으로 느꼈을 겁니다.
서쪽의 영토를 넓혔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요즘은 대체로 좋지 않은 평이 많은 것 같아요.
환절기 건강 유의하세요. 초록별청개구리님~^^
@@justice20000 영국과 청의 상황을 다 알고 이 영상을 다시 봐야할듯하네요.
단순하게 청의 어리석음만을 알고 영국의 생각까지 가늠할 수 없는 제 생각은 반쪽짜리...청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ㅋ.ㅋ
숲을 바라보는 시야와 나무의 줄기만을 보는 시선의 차이는 크니까요. 머 둘다 장단은 있지만~
조지3세를 알아봐야겠네요.
@@MarieZorroIndiana
영국의 상황을 알고 싶으시다 하셔서 조금 오지랖을 펼쳐서 말씀을 드리자면,
영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왕의 권력을 제한한 시기가 빠른 국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입헌군주제라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영국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대헌장 -> 백년전쟁 -> 장미전쟁 -> 헨리8세 -> 엘리자베스 1세 -> 청교도혁명 -> 명예혁명 까지
이렇게 7개를 공부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영국이 왜 20세기 초까지 세계 최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해요.
조지3세는 그 후의 열매를 따먹은 왕일뿐입니다. 건륭제가 그랬듯이...
무례한 말이 아니었길 바랍니다. 초록별님~
@@justice20000 그렇잖아도 영상 중 그런 내용이 있던거 같아 다시보기 중~ㅋ.ㅋ
무례라니요! 배움을 받는 자가 어디 감히!
알아갈 뼈대를 알려주셨으니 살을 채우겠습니다!
저는 순간 비틀즈 폴매카트니랑 건륭제와 만났다는 줄 알았는데, 시기가 아니네요 ㅋㅋㅋㅋ
서세동점의 시대가 없었으면 동양은 아직도 1%가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였겠죠. 서세동점으로 황조, 막부의 권위가 박살나고 외세의 횡포에 대한 오욕감을 느끼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없음에도 신분제를 부정하는 혁명이 일어날수 있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러시아가 독일군에 박살나면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던 것처럼요
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륭제는 암군에 가깝다 봐야죠.. 실제 성군은 옹정제가 훨씬 가깝다고 보고 건륭60년간은 옹정의 유산을 털어먹는 시간이라 봐야함. 가경부터 내리막길이 아니란 말임.
매카트니의 '낡은 전함'에 비유한 견해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통치자의 절대 권력과 중산층 시민계급 사회는 상극입니다. 칭기스칸이나 히틀러 처럼 바닥에서 시작하면 어떤 사회체제를 갖추던 어떤 첨단 무기를 도입하든 제 마음이지만 건륭제처럼 세습 통치자 입장에선 자신이 아무리 개혁과 첨단 문물에 관심이 많아도 저항에 부딪힐수밖에 없읍니다.
비틀즈 폴 메카트니 얘기하는.줄
만약 매카트니가 건륭제가 아닌 4대 황제이자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강희제와 만났더라면 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청나라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강희제 시기만해도 아직 건국 초반이라 국가를 만들어가던 시기였고 규율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고 봐야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애볼님~
매카트니의 방문 이전의 서양세계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 포르투갈이 명나라 찔러보다가 얻어터진거 때문에
감히 건드리기 힘든 동방의 대국이란 두려움이 있었는데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마냥 소수의 군대로 정복 및 식민지배 가능한 미개한 국가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는 계기..
애초에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은 머만하면 백만, 가장 문명화된 지역, 부유하고 엄청난 도시 등으로 기록된게 큰 듯
비틀즈가 엄청 오래되었구나ㅏ
폴과 조지 둘이 형제인가요~~ㄷㄷㄷ
ㅋㅋㅋㅋㅋㅋㅋ뭔가했네
ㅋㅋㅋㅋㅋㅋㅋ
어쨋건 건륭제는 대단한 황제라고생각함; ; 무엇이됬든 완벽한 황제는 없으니 .. 만족이라도 ㅋ
당시 청나라는 세계최고 자체 생산국가라서 사실 교역자체가 필요없는 나라라서 더 그럴수 있겠죠. 영국,네덜란드은 해상을 통한 무역이 없으면 알거지가 되는 나라였고 그 당시 청나라 환경이면 교역할만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뭐가 부족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외국과 무역교역을 해야하는 환경이 아니다보니 아쉬운 쪽은 영국같은 무역으로만 생존가능한 국가였죠.
그리고 메카트니 말은 하나마나 소리같습니다.청나라뿐만 아니라 어디나라,민족이든 어느 왕이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ㅎㅎㅎㅎ
네. 그렇게 보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말씀 감사합니다.
영국이 대청외교를 못한듯. 영국의 요구는 건륭제 뿐만 아니라 강희제 내가 좋아하는 옹정제도 안 받았을듯 포르투갈만 해도 중국 생리를 잘 알아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구워 삶아 마카오를 사실상 할양 받는데 삼두구례인가랑 상관없이 요구 자체가 절대 안 받을 거를 받으라 했으니 당연. 거기다 심기까지 건드렸으니 더더욱
혹 당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사실상 스페인에서 1492년 쫓겨났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이 실소유주들이 아니었을까요?
뉴욕의 전 지명이 뉴암스테르담이었다는데, 맨하튼을 개발한 사람들도 당시 유대인들이었다던데요?^^
댓글이 검토 대기에 걸리는 바람에 이제야 봤네요.
답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유대인이 실소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처음 펀딩을 만들고 영국 동인도회사보다 먼저 키운 것은 말씀하신것 처럼 레콩키스타로 쫓겨났던 세파르딤 유대인 후손들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당시 네덜란드의 펀딩기술이 영국보다 훨씬 앞섰고 영국이 후에 네덜란드의 펀딩기술을 모방하지만 이미 뒤쳐져서 17세기 제해권은 네덜란드가 가져갑니다.
말씀하신것 처럼 뉴욕이전엔 뉴암스테르담이었고, 월스트리트가 영국인 등 기타 외지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건설된 장벽이었지요. 지금은 월가를 금융의 동의어 쯤으로 사용하는 것도 유대인들이 금융의 핵심이고 그들이 월가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현재 그쪽에 고급 보석가게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해야했던 유대인들이 재산을 가볍게 하기 위한 조치의 유산이라고 강의를 들은 적이 있네요...
늦게 답변해드린 것이 죄송해서 주저리주저리 적어봤습니다...
불편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강대봉님~
@@justice20000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많은 지도편달 바라나이다 👍😍
네델란드 크리스티앙9세던가요, 러시아 알렉산드르3세의 왕비 아빠요, 그 분이 유대인 박해를 많이 했고 그 영향으로 러시아도 유대인 박해를 많이 하는 바람에 유대인들이 돈을 빼고 원한을 가지고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대주고 ~제정러시아가 멸망으로 가는 기폭제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종교맹신 특히 집권자의 맹신이 무서운 것 같습니다^^
박×× 씨도 최순× (최태×교의 후계자) 교주의 신도라서 교주(최××)의 뜻을 거스르긴 어려웠을 거란 평을 하는 분도 있더라구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 한다든지 ~~, 이런 종교적 신념은 지위고하, 학식 유무, 인격 고매 여부 등등과는 별개일까요?
세계사를 보면, 학식이 높을수록 맹신이 더 심한 듯 보이거든요. 에라스무스 보면 루터 주장을 깨느라 자신의 학식을 총동원해더라구요^^
청나라가 저 지경이니 훨씬더 폐쇄적이고 민생은 등한시하고 성리학에 빠진 우물안 개구리 조선은 불문가지!
열강의 식민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
지금도 맹자 공자를 뜨더는 놈이 있으니!
화기무기는 명나라 때가 더 좋았다는게
서태후가 쐐기를 박았져.. 서태후에 비하면 민비는.. ㅋ
건륭제는 너무 오래 앉아 있었음
정말 중요한 시기에 시간 낭비하고 청은 망국으로 간거임
이런 케이스는 선대가 잘 물려준 걸 평타이상으로 친후 바로 망테크로 이끄는 역사에서 흔한 케이스 같습니다
전에 비유한 루이 14세가 가장 괜찮은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흔한 패턴이죠.
항상 감사드립니다. 오정우님!
"건륭제의 쇄국정책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같이 망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은 대단한 탁견이시군요😍💝
과찬이십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justice20000 👍😍
조선은 오직 중국만 보고 살았으니 중국이 서구 열강들에게 쥐어터지는걸 보고 어찌할줄 모르고 우왕좌왕!
끝까지 일본을 무시하고 얕봤으니 그당시 집권층이 유능했더라도 우리는 전쟁을 통해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변화 모르고 있으면 저리 뒤지는 거야
중국은 맞을때가 아름답지
지금중국은건륭제때부터 계속 자살골만넣는상태임 최근30년간좀 정신차린거지1940년대부터 민주주의장착한상태에서 발전했으면 어마무시한나라 되었을듯
매카트니의 견해가 정말 대단하다!!
청나라의 어리석음은 중국 한족과 동화되면서 시작됐다!! 여진의 북방 민족일 때 처럼 세계에 귀울이고 계속 발전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 여진일 때 그냥 변방 오랑캐였는데 세계에 귀를 어떻게 귀울이나요?
환빠 고졸 새끼라 여진족이 일기토하는 국뽕 소설만 보고 자람
댓작성자분이 "세계에 귀를 귀울인 여진족" 이 대목은 아마 서구식 홍이포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군대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일순간 청군의 군사적 기술이 확장되는 시기를 보고 이야기 한듯 싶군요.
중국이 외세에 그렇게 당했어도 조선은 변한게 없고.... 일본은 바꿨지요......
건륭제때매 망함 중국
부패한 관리들도 추가해 주세요~^^
메가트니가 만약에 정조를 만났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총국과 일본을
뛰어 넘을수 있는 국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정조 만나 봤자 정조는 그나마 청나라 배우자는 박지원 탄압. 문자의 옥이 심하던 청나라 문체를 탄압하고 책을 불사름 만동묘에 친히 제사를 엄청 하고, 성리학 강조. 청나라랑 싸우자는 신하 후손 김조순 사위로 만들고 하여간 전혀 개혁군주 아님 영국 입장에서 도자기 차를 거래하니까 청나라랑 하지 조선은 가난하고 굳이 상대할 필요 없는 국가였으니 굳이
당시 영국의 조항은 청나라가 받아 들 일수 없는 조건이고 저것은 거의 무역전쟁시 강행할 정책이기에 당시 유럽에서 교역이 어떻게 이뤄졌든 유럽외에서 정말 무례한 사항이긴 합니다. 청나라의 운명에 별다른 감흥은 없지만 영국을 대표로 하는 제국주의 발상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게 자랑 서러운 역사라고 할 수가 없죠.. 아편전쟁을 왜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지도 생각 해 봐야 함..
네. 말씀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기요. 청나라도 제국주의로 만들어진 나라에요. 가위바위보로 영토 넓힌 나라가 아니에요
청나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거 처럼 말하네.
조선상대로 한 짓거리가 바로 제국주의야.
참 그 대영제국 답지않게 청조를 방문할때 되게 정성스럽고 예의발랐네요. 대국은 대국이라 생각했는지 영국이 저자세였던 나라가 당시에 청이 유일함.
온갖 신무기 신기술 심지어 애드벌룬 등 산물등을 알아서 영국이 저자세로 환심사려고 갖다 바친 나라가 통상수교 원했던 나라가 18세기말 19세기 초 중국밖에 없었음..
산업혁명 직후였는데도 생산단가가 청에 비해 떨어져서 모직물, 면직물 반응 시큰둥... 청의 도자기, 차 등은 엄청팔림. 영국 빡쳐서 아편 팔아버림..
그렇군요. 말씀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정님~
어차피 들어 주지 못할 개소리잖아.
3.번은 섬하나를 화물 보관소로 달라는거고
4. "할양" 이란 소리는 땅을 때어주란 소리 잖아.
5.이건 무관세로 하거나, 세금을 적게 주라는 소리인데... 말이 안되는 소리지.
네. 이 때 이미 청나라를 만만하게 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합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신님~~
며칠전에 영국의 가정집 뒷마당밑에서 건륭제당시인 1789년 제작된 청나라대포가
발견됬다는데 발견된대포가
건륭제가 매카트니와 영국사절단에 준 선물이었을거라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말씀해 주셔서 저도 방금 뉴스 봤습니다.
아나운서가 친룽황제라 하니까 건륭제가 맞네요...
뉴스에서는 감정결과 1789년 이라했고, 사절단은 1792년 출발했으니까
조금 차이가 있긴 하네요...
뉴스에서는 그래서 어떤 이유로 대포가 영국에 왔는지는 알수 없다고 멘트를 달아놨네요...
당시는 이미 무역선들이 중국을 활발히 오가던 시기기 때문에 매카트니 사절단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동인도회사 선박이 싣고 왔을 수도 있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때 청나라가 영국과 교류를 활발히해서 서양세력에 눈을뜨고 일찍 개화를했다면 조선도 뒤따라 똑같은 테크트리를밟았을테고 그랬다면 치욕스러운 역사가 이어지지않았을텐데 라고 상상해봅니다ㅎㅎㅎ
네. 동의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왜 곡. 세 계역 사특. 히. 대 륙 조 선. 서 양. 왜 구. 만. 든. 이 름. 봍. 치 기ㅎㅎ아 세 아 유 럽. 미 쿡등. 등. 한. 국 도. 미국이 만 든 나 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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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회개와 믿음
조선과 존똑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