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전투해설] 불가능한 대결, 설마리전투

Поделиться
HTML-код
  • Опубликовано: 18 сен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43

  • @-joshuaTV-
    @-joshuaTV- Год назад +17

    모든분들의 희생에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1

      안타까운 전투였어유😞

  • @victorchoi8102
    @victorchoi8102 4 месяца назад +2

    문산인데.. 늘 지나가던 적성이라... 한번가봐야겟네요

    • @사적돌
      @사적돌  4 месяца назад

      오 즐거운 답사되시길 바랍니다😌

  • @이춘우-r9t
    @이춘우-r9t Год назад +2

    감사합니다.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오 후원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 @lcg279
    @lcg279 4 месяца назад +1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설마리전투의 흐름이 머릿속에 잘 들어온네요....~~~ 감사합니다...~~~

    • @사적돌
      @사적돌  4 месяца назад

      영국군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 @Yun-JC
    @Yun-JC 7 месяцев назад +5

    와...ㅋ여기 바로 앞에 있던 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 했었는데..참 오래간만에 보네요.
    영국군 전적비에 5월인가 되면 추모 행사 하곤 해서 지원 나가고 했던 기억이..
    마지리의 중성산 지키는 게 임무였던 군생활 생각나네요.

    • @사적돌
      @사적돌  7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오 군생활 수고많으셨습니다. 일대 최고의 요충지지요😄

  • @가이브러시
    @가이브러시 Год назад +11

    한국군의 과속치량과 사고나서 돌아가신 워커장군ㅜ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2

      참 안타깝게 돌아가셨지요😞

    • @자유민주-w4f
      @자유민주-w4f Год назад +1

      그땐 차도 없을땐데
      군과속이라니

    • @sanha7007
      @sanha7007 Год назад +3

      워커장군의 상관 패턴 장군도 독일 아우토반달리다가 자동차사고로 순직하셨다던데 살아계셨으면
      아마6.25때 참전 전세가 어떻게되었을지!??

  • @tomandtrip
    @tomandtrip Год назад +5

    돌아가신 분들 참 안타깝습니다
    날 좀 따뜻해지면 가시지
    너무 힘드셨겠군요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2

      영상으로도 기온이ㄷ ㄷ ㄷ 저날 영하 14도😨였습니다😄;

  • @_Sam_Da_Soo_
    @_Sam_Da_Soo_ Год назад +4

    제 고향에서 이런 일 들이 있었다니 숭고해지내요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1

      임진강유역은 우리역사의 빼놓을수 없는 곳중 하나지요😌

  • @정우형-h5x
    @정우형-h5x Год назад +4

    중과부적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럼에도 아쉽고 궁금한건 왜 후방으로 진지이동을 못했을까 입니다. 객현리ㅡ감악산북쪽 고지를 적군에게 점령당했고, 그쪽이 점령 당했으면 235고지 뒤 무건리 고지능선을 따라 진지이동이 됐을법 한데 움직이지 못하고 계곡 입구 한곳에만 머물다가 희생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여러가지 정황이 그려지긴 합니다.
    첫째 이미 캐슬고지와 객현리 일대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둘째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면 희생으로 인해 시간을 벌어보자는 소임이 있었다.
    셋째 아군 지원측과의 소통에 오류가 있었거나 원활하지 않았다
    넷째 애초에 산악 고지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부대다.
    낮은 구릉지대(워털루)와 산악고지에서의 진지 구축 이동은 차원이 다르다.
    군시절 이 일대에서 수색과 작업을 참 많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전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캐슬고지나 182고지에서 전장을 살펴봐야 된다고 봅니다.
    이곳에서는 임진강 북방향 20키로 이상까지도 잘 보이고, 동서남방향도 산이 가로막는 시야까지는 두루 잘 보이는 곳입니다. 아마 d중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곳에서의 시야확보가 영향이 있었지 않았나도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영상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매서운 추위였는데 사적돌 선생님 영상 덕분에 군시절 이곳 추위 속 추억들이 어제일마냥 떠오릅니다.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2

      인근에서 군생활하셨군요 추운곳 고생많으셨습니다😌
      진지재배치, 이동이 늦었다는것에대해 많은 지적이 있었고 말씀하신부분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전투 분석해보니
      좌측 12연대와 공조가 안됐고, 중공군이 워낙 빠르기도 했습니다.
      공세 당일 이미 감악산과 설마리 통로에 침투했고
      이것은 우측 RNF대대와 거리가 너무 떨어져있다는것에 기인했습니다.
      벨기에대대를 임진강 이북에 두지말고 이남에 두었으면 어땟을까
      그럼 RNF대대가 감악산에 가깝게 있었을것이고 여단이 털리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189사단이 우회하기전 무건리로 이동만했어도 대대전투력은 유지가 됐을텐데...
      하다가 우리처럼 산악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참전수기를보면 전투식량도 235고지로 못옮겨서 굶고 있습니다😞
      국군이라면 감악산에 op부터 설치했겠지요
      결과적으로 3일동안 중공군전체공세를 지연시키도했지만
      아쉽기도하고 애닮기도한 전투입니다.
      겨울 막바지 건강 유념하시고 주말 잘보내세요😄

    • @hawk8873
      @hawk8873 Год назад +2

      현리패전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중공군과 북괴군의 산악 고속 돌파 기동이 매우 빨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국군은 비교적 적응이 빠른 편이였지만 아무래도 중장비와 차량 이동에 의존도가 높았던 서방측 군대는 경장, 경무장에 빠르게 산골짜기를 누비는 중공군의 고속 기동에 번번히 허를 찔리곤 했었죠. 따라서 기동력에서 못 따라 간다면 제대간 긴밀한 통신선 연결과 적절하고 강력한 화력, 항공 지원, 각 부대간 고립되더라고 충분한 저항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방어하는 점 단위 방어 거점 고수가 중요했고 이러한 전훈이 4월의 서부전선, 그리고 5월의 중부전선,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중공군 춘계 대공세의 예봉을 꺽고 최종적으로는 모두 격퇴하여 반격, 현 휴전선인 캔사스 라인까지 도로 밀고 올라가는데 주효했었죠. 51년 6월이 되면 사실상 모든 중공군의 공세를 꺽이고 북으로 모두 격퇴하게 됩니다.

  • @UCdBssCoN33GOGr5lVJSRWHQ
    @UCdBssCoN33GOGr5lVJSRWHQ Год назад +7

    어후 쭝궈놈들 사단이 대체 몇개냐 - -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1

      여단에서 병력운용을 좀더 유동적으로했어야되요
      대대하나가 3개사단을;;;

    • @자유민주-w4f
      @자유민주-w4f Год назад +2

      그냥 총있어 이긴게 아닌 인해전술. 영은 갖고있던 총알 다쏴도 끝없이 바다처럼 밟고지나감.ㅠ그때 그분들이 느꼈을 절망감이 가끔 느껴져요.ㅜㅜ영상봄

    • @자유민주-w4f
      @자유민주-w4f Год назад +2

      @@사적돌
      여기서도 칠곡 15살 중학생들도 그냥 맨손으로 나왔고
      ㅡ미에서도 계속 징집해 날아왔었어요.1.2차후에 여기 휴전이유는
      아이젠하워장군님이 남편 아들 몇씩 전사한 집에 더이상 징집할수 없어서였죠.

    • @hawk8873
      @hawk8873 Год назад +1

      대신 부대 규모는 작습니다. 서방측 사단이 1.2-1.5만,미 해병대는 2.5만까지 가는데 반해 중공군과 구 쏘련군은 1개 사단이래도 0.8-1만 정도 수준,,, 그리고 중공군은 군단 편제 없이 3개 사단 1개 군 편제이니 말이 군이지 실제로는 1개 군단 규모(2-3만)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설마리 전투때 투입된 병력은 2개 군단 규모 6만명 정도가 되는 것이죠.

  • @UCX3uYqSwUiT6DBd75BZaDnQ
    @UCX3uYqSwUiT6DBd75BZaDnQ Год назад +3

    외가에 가면 외사촌들이 영국군 묘지라고 부르던 곳이네요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비석있는곳이 전투시 희생자분들 임시로 안치했던 장소입니다;

    • @ccpout9210
      @ccpout9210 Год назад

      외가가 파주세요?
      전 저 근처에서 군생활했습니다. 적성면 25사단

  • @Cute_Joyuri
    @Cute_Joyuri Год назад +2

    영국은 한반도에 두차례 군대를 보냈네. 거문도 사건과 6.25 전쟁....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2

      거문도도 주민들에게 아주 잘해줬다는 얘기도 남아있고 곱게 물러난 경우라
      한국전쟁과 결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 @Cute_Joyuri
      @Cute_Joyuri Год назад +3

      @@사적돌
      1. 거문도 사건 - 러시아의 남하 저지 목적
      2. 6.25 전쟁 -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 저지 목적
      둘다 뭔가를 저지하려는 목적이 있네요.

  • @이승환-p5b
    @이승환-p5b Год назад +1

    혹시 자료출처가어떻게되시나요? 공부중이라서요 자료를더찾아볼수있을까요?

    • @사적돌
      @사적돌  Год назад +1

      오 반갑습니다😌
      회고록과 위키를 주로이용하였고 한국전쟁사와
      영국군 29여단 자료를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Imjin_River

    • @이승환-p5b
      @이승환-p5b Год назад +1

      @@사적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