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변란사] 내전에 더 가까웠던 반란, 이시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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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21 дек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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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선변란사는 내전에 더 가까웠던 반란, 이시애의 난입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13년인 1467년 5월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세조(世祖)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해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란입니다.
이시애의 난은 단순한 봉기 이상으로, 함경도가 사실상 독립을 시도하는 것을 진압하는 내전에 가까웠고 이로써 한반도의 최종 국경이 확정되는 성격도 있습니다.
반란의 배경
함경도의 당시 지명인 함길도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 왕실의 발상지로 태조는 이 지역을 세력기반으로 했으며, 여진족들을 복속시키며 힘을 키웠습니다.
세종 때는 4군 6진 개척을 통해 두만강까지 강역을 확충했으며,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함길도를 확고한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북방 여진족과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를 방어하는 데는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치루어야 했고, 이것은 함길도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개국 이후 함길도를 효율적으로 통치, 방어하고 왕실의 발상지를 우대하려고 본토 출신 호족을 지방관으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일종의 자치를 인정한 것인데 세조가 등극한 후 중앙집권정책을 강화해 북쪽 출신의 수령을 줄이고 중앙에서 남쪽 출신 수령을 파견하자, 함길도 호족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축성 등의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함길도의 민심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토벌군에 참여했던 유자광은 반란이 커진 이유를 파견된 수령들이 무인이라 백성들을 혹사시켰기 때문이라고 파악했습니다.
세조는 전국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호패법을 실시해 주민의 이동을 단속하고 인구를 철저히 파악했으며, 보법(保法)을 통해 더 많은 백성이 군역을 지도록 했습니다.
보법과 호패법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함길도 지역은 지방토호세력이 강했고, 토호들은 자기의 수하들을 모두 자신의 호(戶)로 편입해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를 기준으로 세금과 군역을 물릴 경우, 호 내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호에 대한 세금과 군역만 부담하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