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은 울산누리 2023년 11월 개인미디어 우수콘텐츠로 선정되었습니다. 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ulsan_nuri&logNo=223284565754&categoryNo=6&parentCategoryNo&from=thumbnailList
지정학적 위치와 열강들의 강대강 대치 속에서 조선처럼 사대주의를 펼치는 것이 전략적인 외교정책일 수도 있지만, 열강들과 피튀기며 깨질지언정 맞짱뜨는 고려의 역사가 더 마음이 가는 순간입니다. 조선이전의 역사가 좀 더 다양하게 부각되길 희망하며,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전쟁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그리고 고려는 조선처럼 중앙집권화를 아직 확립하지 못하여 호족들이 힘이 있었습니다.이 힘이 전쟁이 발생하면 장점이 되어 그대로 정규군이 되었죠. 예로 전쟁 조짐이 있어 왕이 호족들과 사찰에 군과 물자를 내놔 하면 잘 조직된 병사와 양질의 물자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2차 침입 때 고려실록 태조부터 목종 까지 소실되었습니다.이걸 나중에 복원 하는데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부실하게 복원 되었고 전승되었던 삼국의 사서들도 이때 많이 소실 되었을 겁니다.하지만 구삼국사란 사서는 남아 있었나 봅니다.이걸 베이스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했으니깐요.
@@jinyumin99 사실 삼국사기 이후에도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시대 서적이나 그런 것들도 여러 남아있었죠. 다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큰 재난들이 연이어 들이닥치고 , 조선 중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관념사상이 더 강해져서 이전 시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니 그런 사서들이 이어져오다가 사라진 거죠.
훈요십조에서 왕건이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차현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을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며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사실인 거 같습니다.
@@사적돌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의 성장에 도움을 준 곳이죠. 왕건이 말한 지역은 전주입니다. 고려사에도 현종이 무주로 피난갈 때 전주를 지나면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사적돌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이 성장하는 기반이 된 곳이죠. 왕건이 말한 지역은 전주입니다. 고려사에도 현종이 무주로 피난갈 때 전주를 지나며 이런 일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사적돌 이 덧글이 자꾸 지워지네요.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이 성장하는 발판이 된 곳이니 우대했으면 했지 차별하지는 않았습니다. 왕건이 말한 지역은 견훤백제가 있던 전주죠. 고려사에 보면 현종이 나주로 피란갈 때 이 말을 듣고 전주를 피해 갑니다. “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
거란 성종의 왕고 침공에는 이런 배경도 있습니다. 고려사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옥저)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동여진이 옥저라는 사실은 아래 고려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죠.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들을 동족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죠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이 영상은 울산누리 2023년 11월 개인미디어 우수콘텐츠로 선정되었습니다.
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ulsan_nuri&logNo=223284565754&categoryNo=6&parentCategoryNo&from=thumbnailList
울산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코앞에 사는데 전혀 몰랐습니다 ㅎㅎ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네요😄
백정의 시작~ 이제 알았네요^^감사드려요**💕
오 시청 감사드립니다😌😄
드라마를 보고 설명을 다시 들으니 더 재미 있네요~
오 저도 다시보니 더 재미있는듯합니다😄
언양 화장산 자락에 묘가 있군요.. 가까운데 한번 들러봐야겠습니다..
오 즐거운 답사되세요😄
다음주에 KBS에서 고려거란전쟁이라는 대하사극이 첫방송된다고 합니다. 무려 최수종님이 나오시는...ㅎ 얼마만의 정통사극인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저도 기대중입니다😄 제발 고증!좀 잘맞기를🙏
@@사적돌 짧은 영상을 본 의복 전문가의 말론 의복 고증은 좀 실망이다라고 😐
더욱더 번영 하세요😂😂😂😂😂❤😊
힘내서 열심히 제작하겠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와 열강들의 강대강 대치 속에서 조선처럼 사대주의를 펼치는 것이 전략적인 외교정책일 수도 있지만, 열강들과 피튀기며 깨질지언정 맞짱뜨는 고려의 역사가 더 마음이 가는 순간입니다. 조선이전의 역사가 좀 더 다양하게 부각되길 희망하며, 오늘도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어짜피 얻어터질거라면 한때 때려보기라도해야지요,🤔 시청 감사드려요😌😄
우리나라에서 고려는 웬지 잊혀진듯한 기분입니다,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시대였는데, 무신정권과 몽골의 침략, 호족의 발호로 저평가되는듯 하지요🤔 항상 즐겨 들려주심 감사드립니다😌
사극이 기대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가입 감사드립니다😄, 혜택도 없다시피해서 부끄럽네요😌
울산시가 선정하는 11월 개인 미디어 우수 콘텐츠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관련 내용 전달 드리려 하는데, 메일 주소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ㅎㅎ
오 안녕하세요😌 찾아주시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메일주소는 공개되어 있습니다 yasuar99@gmail.com 입니다
❤😂❤
저도 사극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수업중에 졸았나 싶을정도로 모르던 사실들이 많더라고요 김취려도 처음 알았네요
두근두근합니다 ㅎㅎㅎ, 대요수국의난은 아무래도 고려거란전쟁보다 덜 알려져서 그런가봅니다😌
고려사 영상이라 흥미로겠보왔습니다
거란과전쟁전후로 고려의흥망성세가
나뉘어집니다 또한고려황제국의 지위에서
왕의나라의 지위로바뀌는시기이요 원나라
강력한국가가 있어지만
고려가 강했던이유는 배척하지않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일고 유민들을잘융합했기에 강하지않을가요
😊
질문이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세종때까지 이슬람교믿는아랍인
과 상인들이주거했다는 기록있다는데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전쟁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그리고 고려는 조선처럼 중앙집권화를 아직 확립하지 못하여 호족들이 힘이 있었습니다.이 힘이 전쟁이 발생하면 장점이 되어 그대로 정규군이 되었죠. 예로 전쟁 조짐이 있어 왕이 호족들과 사찰에 군과 물자를 내놔 하면 잘 조직된 병사와 양질의 물자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회회교라 불렀는데, 보통 무역업에 종사했습니다. 푸른염료가 아라비아에서 들어왔기때문에 그렇기도합니다😌
sillok.history.go.kr/id/kda_10904004_004 상혼하여 우리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수있고
sillok.history.go.kr/id/kga_10905024_003 푸른염료이야기
sillok.history.go.kr/id/kka_10302003_003 회회교도가 아라비아에서 왔다는 증거
@@사적돌그들 후손이 덕수 장씨라고 얼핏들었습니다😮
@@사적돌 질문에 답글주셨서 감사힙니다
고려시대에는 아랍인들쁜만 다른국가의사람들이 많이
있어지요 또한정착했서 고려인되었지요
사적님!!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영상에서 처럼.... 사료/자료들이 많이 소실되었을까요? 고려역사서 들은 대부분 여몽전쟁 때 많이 사라지지 않았나용?
2차 침입 때 고려실록 태조부터 목종 까지 소실되었습니다.이걸 나중에 복원 하는데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 부실하게 복원 되었고 전승되었던 삼국의 사서들도 이때 많이 소실 되었을 겁니다.하지만 구삼국사란 사서는 남아 있었나 봅니다.이걸 베이스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했으니깐요.
정말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덕분에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별나무-c8e
@@jinyumin99 사실 삼국사기 이후에도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시대 서적이나 그런 것들도 여러 남아있었죠.
다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큰 재난들이 연이어 들이닥치고 , 조선 중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관념사상이 더 강해져서 이전 시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니 그런 사서들이 이어져오다가 사라진 거죠.
@@KIM_HS_0228특히 고대 사료가 부족한데 참 안타갑네요
오 공부가 되었습니다😌
김취려의 묘는 두 곳 인데 강화군에 김취려의 묘와 울산에 있는 묘의 연유는 무엇일까요?
강화묘가 실전되어 언양에 가묘를 썼다가 강화묘가 다시 발견되었다고합니다😮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네요
한반도 지도를 통해 전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시니 이해가 잘 됩니다
역사를 알려주는 좋은 채널 응원하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제작해가겠습니다😌😄
고려가 몽골에 먹히기전에 나라가 정말 개판이었군요..
무신정권기 였지요😞
백정 계급은 눈빛이 다르고 피부색이 달랐다는게 DNA차이군요.
그럴수 있겠다싶습니다😮
언양이 가묘 였군요 ~ 그나저나 묘 위치도 좋고 관리도 엄청 잘되어 있는듯합니다
얼마전에 발굴해서 새단장 해놓았지요, 종친회에서 신경 많이 쓰는듯합니다😌
양규와 김숙흥은 제 마음속에 우리민족 역대 장군 탑 3,4 입니다( 1,2위는 이순신,을지문덕)
기록은 얼마 없지만 거란에 끌려가는 백성들을 구하기위해 최후까지 사투를 벌이던 모습을 상상만해도 숙연해집니다
드라마에서 어떻게 나올지 참 기대됩니다😌
고요전쟁이지 어찌하여 여요전쟁인가?
그러게요 나말여초, 여말선초, 여요전쟁... 다 뒷글자를 따는군요🤔
조선의 얼척없던 외교 보다는
고려가 훨씬 더 자주적이어서
기분이라도 든든합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하면 상당히 진취적이고, 영민하기도했고, 실리적이기도했지요🤔
훈요십조에서 왕건이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차현 이남과 공주의 금강 바깥쪽을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며 난을 일으킬 수도 있다"며 "비록 양민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그를 관직에 올려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사실인 거 같습니다.
개경에서 멀고 생산력이 좋으니 경상도 전라도 이반을 조심하라는 뜻이었지요
2대왕 혜종의 모친은 나주호족 오다련 딸 장화왕후였고 고향도 목포였지요.
광종의 모친은 충주유씨 신명순성왕후, 충주에 숭선사도 지었고
첫째부인은 황주호족딸
둘째부인은 진천호족딸
견훤에 협조한 호족들이나 신라에 충성심이 깊었던 호족들도 걱정됐을겁니다
@@사적돌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의 성장에 도움을 준 곳이죠.
왕건이 말한 지역은 전주입니다.
고려사에도 현종이 무주로 피난갈 때 전주를 지나면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사적돌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이 성장하는 기반이 된 곳이죠.
왕건이 말한 지역은 전주입니다.
고려사에도 현종이 무주로 피난갈 때 전주를 지나며 이런 일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삼례역에 이르자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평상복 차림으로 어가를 맞이하였다. 박섬이 아뢰어 이르기를 “전주(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장곡역에 유숙하였다.
@@사적돌
이 덧글이 자꾸 지워지네요.
영산강 유역 무주는 왕건이 성장하는 발판이 된 곳이니 우대했으면 했지 차별하지는 않았습니다.
왕건이 말한 지역은 견훤백제가 있던 전주죠.
고려사에 보면 현종이 나주로 피란갈 때 이 말을 듣고 전주를 피해 갑니다.
“全州는 바로 옛 후백제이므로 태조께서도 싫어하셨으니 청하옵건대 주상께서는 행차하지 마옵소서.”
최충헌 정권 말기에 거란의 잔당을 강동성에 물리친 김취려,조충 장군이군요. 거란군을 몽골 동진 연합군과 함께 물리친 후 고려군이 개경에 당도 했을 때 개선식도 축소하고 연회도 하지 않는 등 최충헌이 한 짓을 생각하면.....😢😢
최충헌은....역사적으로 좋은평가가 나올수 없는 인물이지요😡
훈요십조의 거란 부분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 때문에 왕고 초기의 대 거란 외교가 적대적으로 흘러 여러 번 침략을 불러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죠.
왕고판 젤렌스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나라와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거란 성종의 왕고 침공에는 이런 배경도 있습니다.
고려사
하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옥저)을 공격하여 패배를 당하자 유종은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마침 여진족 95인이 내조하여 화주관에 도착하자 유종이 모두 죽였으므로 함께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여진족이 거란에 참소하자 거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의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것은 대역죄이므로 군사를 내어 죄를 묻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때의 동여진이 옥저라는 사실은 아래 고려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죠.
여진은 본디 高麗의 부락으로서 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그 땅은 사방 300리로 동쪽은 대해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長州·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高麗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들을 동족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죠
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을 행군하였다. 文乃泥村에 이르러 冬音城을 파괴시켰다. 石城의 남녀노소 모두 섬멸하였다. ❶ 윤관의 군대는 大乃巴只로부터 37개 촌을 격파하여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았고 ❷ 중군은 高史漢村 등 35개 촌을 격파하여 380명의 목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❸ 좌군은 深昆村 등 31개 촌을 격파하여 950명의 목을 베었고 ❹ 우군은 廣灘村 등 32개 촌을 격파하여 290명의 목을 베고 300명을 사로잡았다.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사적돌
덧글이 군데군데 지워져 연결이 좀 안되네요.
이때 양규가 없었으면 고려 망햇다.
양규를 다시 조명해야한다
양규도 고려거란전쟁의 영웅이지요😌
새로운 대하사극은 언제나 기대됩니다. 말씀중에 거란2차 침입에서 개경이 함락되고 많은 문서가 소실되었다는 부분이 후대의 사람으로서 정말 안타깝네요...
글씨 한자가 아쉬운데,,, 정말 통탄할일이었지요😞
거란 조질때는 진심이었던 고려.... 근데 여진하고 몽골은.....
몽골은😕 우리 역사에 너무나 뼈아픈 문화적 소실을 가져왔지요
고려시대에도 30만을 동원할정도라니 대단합니다.
신라말부터 아주 드물게 몇십만씩 동원되기 시작하는데, 인구가 꽤 많이 늘었던듯합니다, 모두 정규편성된 무장집단은 아니었겠지요🤔
강감찬 장군 ♡♡♡♡♡♡♡♡♡낙성대 역 ♡♡♡♡
ㅎㅎㅎ 서울살땐 자주갔었네요😁
최충헌이 아니었다면 고려도 몽골에게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을겁니다
고려라는 사회에 너무나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인물이지요😞
무신 정권의 안보를 위해 국가의 백성은 버리고 강화도에서 호가호위한 정권이죠 😂😂
외세침공으로 전투력이 가장 높았던 고려.. 영토만을 생각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저평가되어 아쉽네요.
저도 전투력 자체는 고려가 가장 높았던것 같습니다😮
문신상은 조선의 것보다 친숙한 느낌이네요 ... ㅎ
ㅎㅎㅎ 과하게 친숙합니다😅
안타갑게도 고려가 발해사를 기록하지 않은점과 동족은 이니더라도 동질성을 인식했다면 고려 기록몰에 그런 기록이라도 남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게말입니다, 그많은 발해유민, 사서하나만 남겨주었어도...🤔
제왕운기라도 있죠
거란 요 금 청여진 다 부여씨임.우리도 부여씨
결국은 같은 지배층이었다는 분석이 있더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