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래서 석실묘는 기간도 길었고 백성도 많이 주엇다고 하네요. 세조에 이르러 회격실로 바꾸면서 기간과 인명피해를 줄렸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세계다른 왕릉과 달리 유교주의에 입각해 화려한 부장품으나 사치스러움은 없어 그나마 도굴의 위험이 적었고 도굴 자체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왕릉축조 기간동안 왕의 시신은 석빙고(지금의 냉동고)보존하여 부폐를 막아서 미라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cruelmay6103 지금 영릉이 새로 옮겨진 능이라 옮기기 전의 영릉을 구영릉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영릉은 여주에 있고 병풍석이 생략되었으며 묘실이 회격인데 반해 구영릉은 태종의 헌릉 옆(지금의 인릉자리로 추정됩니다)에 있었으며 병풍석을 둘렀고 묘실이 석곽이었으며 신도비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 논란으로 예종때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습니다 이때 문종 현릉과 세조 광릉의 영향을 받아 신도비 병풍석 석실 등이 사라지고 능제가 간소화되었죠.
돌 쌓일때 나는 소리 좋다ㅋ
송주현 ㅇㅈ ㅋㅋㅋ
ㅇㅈ
ㅆㅇㅈ
이 빙쉰 왕을 모독하는게냐
@송주현 ㅇㅈ
회격 졸라단단함 오페르트가 남연군묘 도굴하려했을때도 회격땜에 도굴못하고 일단 겁니딴딴함
사실상 시멘트라고 봐도 무방하니께 ㅎ
ㅜㅇㄷ ㅏ😮ㅈㅁ
Aㅏ! 진찌신기함.근데 옛날에 이렇게 만들려면 엄청난 노동력이...필요할듯
네 많은 희생이 있었죠.
그래서 세조때부터 석실로 인한 인명피해가 큰걸 아시고고 회격실로 바뀌지요.
피라미드나 진시왕릉에 피하면 참 검소한 유교주의식 장례문화인것 같아요.
DANIEL LEE ㅇㅇㅠㅠ
정조그림그리는
비록 왕릉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들어갈 무덤의 건축 과정을 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이 정도면 시신이 썩지 않는게 당연한 것 같다...
외재궁은 재궁 넣는 틀입니다
3d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마지막 장면에 능 앞에 놓인거가 여태까지 양초넣는걸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걸 통해서 보이는 곳이 다 그 능 혹은 묘의 주인의 것이라 하네요
저승에서 불을 밝히는 등이라 하여 장명등이라고 불립니다
존나 잘만들었다 영상
얼마전에 청령포 관광후에 장릉 보고왔네요...조선왕릉은 처음가본거였네요
네~ 저도 몇년 전 국립박물관에 납품했던 영상을
윤건릉 입구에있는 문화관 같은 데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선왕릉의 형태는 조선전기에만 해도 석각식으로 조성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회격식으로 바뀌었죠
브금조타..!
쑤정 난 수정이가 좋다..!!
이래서 세종이 자신의 릉에는 난간석만 두르라고 했구나...
조선왕조의 이성계계보집안은 전주이씨 대종직계가 아닙니다.. 이성계는 이자춘의 차남 즉 방계 혈통이구 전주이씨 대종직계는 따로 있습니다.
폭군이라 불리운 연산군 조차도 궁궐은 넓히지 않았고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능을 간소화 했죠 조선의 왕들은 다른나라 왕들보다는 검소했다 봐야하지 않을까 합니다.
연산군은 폐위되어서 능이라는 말 안써요
@@gudtjsdl123 연산군이 능을 간소화 했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왕들은 능을 간소화 했다는 것 입니다.수정은 했습니다.^^
처음에 보여준 영상은 이정도면 자연 미라가 될듯
네 그래서 석실묘는 기간도 길었고 백성도 많이 주엇다고 하네요.
세조에 이르러 회격실로 바꾸면서 기간과 인명피해를 줄렸습니다.
조선의 왕릉은 세계다른 왕릉과 달리 유교주의에 입각해 화려한 부장품으나 사치스러움은 없어 그나마 도굴의 위험이 적었고 도굴 자체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왕릉축조 기간동안 왕의 시신은 석빙고(지금의 냉동고)보존하여 부폐를 막아서 미라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첫번째 방식도 그렇지만 두번째 방식 역시 미라를 만듭니다
회격은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해서 시신이 부패되지 않아 자연 미라가 됩니다
돌 쌓는비쥐앰 어디서구해요 졸라조타 이거들으면서 자니까 딥슬림함 바로
저렇게 보면 시신이 미라가 될거 같은데 조선시대 왕이 죽으면 무려 5개월동안 무덤에 안장하기전까지 장례를 치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이미 시신은 거의 부패 ㄷㄷㄷ
@신한철 헐~ 조선시대 때 냉장고도 없는데 어디서 얼음을 구해왔나욤? 겨울이 아니고서야 -.-?
챱챱챱챱챱챱
마크 건축하는거 같음 소리도
조윤호TV 수준ㅡㅡ
저렇게 정성스럽게 해도 선정릉은 도굴 됐다는게 아쉽네
진짜로과거롤가면좋은데 나는 거기 가봤는데 세종대왕무덤 은 아직 하2021년이나2022년저도에 완성데대요
회벽은 세조 부터 쓴 걸로 아는데???
삼물이 뭐죠?
삼물, 삼화토라고도 하는데 석회석 + 진흙 + 모래를 섞은 반죽입니다.
2:22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하여? 그건 아닌듯.
기존 돌방무덤은 아예 땅속에 건물을 하나 짓는건데 노고를 덜기 위하여 맞지
와
잠만 조선전기는 14대임금 선조까지인데
예종은8대 임금인디
사카마치킨지로 14대 임금 선조는 중기에 포함이 될텐데..아닌가요..?..
빠나 물론 그렇긴한데 이 영상에서는 전기 후기만 표기가 되어있고 중기는 없어서
선조때까지를 전기라 했어요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게 아니라 세조의 광릉을 기점으로 왕릉 제작 방식이 변경된 것에 기준점을 두고 있는것입니다
저렇게 4중5중6중7중으로 둘러싼 조선왕릉을 일본놈들은 그걸또 도굴을 한것도 대단하다..
Hihihi
세조가 백성은 사랑했구나
네이버만 쳐봐도 알 수 있는데요.
왕위찬탈은 뭐라해도 잘못이지만..
농본주의나 백성을 위한 부분등 정치와 업적으로 보면 달리 평가 되는 왕입니다.
조선이라는 말 머리에 올라서 뭔가 하고 싶은게 많았던 분이지요.~^
이의상 세조가 조금 비열한 부분이 있었지만 머리는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똑똑 했다네요
그냥 별 볼일 없는 새끼.
돌 쌓는 소리 무슨 마인크래프트 하는줄
ㄴㄴasmr
왕릉 하나 만드는데 얼마나 노비들이 고생을 했을까...
현장체험학습으로 융릉만 구경해보신분 손!
왜 관이 2개인지 알수있을까요?
왕과 왕비가 합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합장릉 이라 그래요
이 영상을 만드는데 베이스로 된 것이 세종과 소헌왕후의 구영릉이었던것 같네요.
@@FerrariTifosi-d8v 구영릉이 뭔가요? 구영릉 신영릉 따로욌나요?
@@cruelmay6103 지금 영릉이 새로 옮겨진 능이라 옮기기 전의 영릉을 구영릉이라고 부릅니다. 현재 영릉은 여주에 있고 병풍석이 생략되었으며 묘실이 회격인데 반해 구영릉은 태종의 헌릉 옆(지금의 인릉자리로 추정됩니다)에 있었으며 병풍석을 둘렀고 묘실이 석곽이었으며 신도비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 논란으로 예종때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습니다 이때 문종 현릉과 세조 광릉의 영향을 받아 신도비 병풍석 석실 등이 사라지고 능제가 간소화되었죠.
저러니까 오페르트가 도굴에 실패했구나 곡괭이론 어림도 없었겟네
저렇게 회격을 쓰면 왠만한 도구로는 잘 안깨지죠. 사대부의 묘도 회격을 쓰곤 했는데, 그런 묘를 발굴할때는 중장비를 동원한다고 해요
전쟁때는 어디로 숨어 있었나.
살만하니 역사를 쓰시는군요.
그럴일없겠지만 다시깨어나도 바로 또죽겄네 ㅋ ㅋ ㅋ ㅋ ㅋ
일본놈들은 저 단단한걸 어떻게 도굴하고 시신을 뺐을까 (선릉)
아마 폭약 잔뜩 넣고 폭파시켜뺐을걸로...? 근데 저걸 빼서 고인 능욕하고 불태운거만 봐도 역대급 패악질...
능을만들연 몇백면
동원덴다는데 능 하는
동안 백명 이상 농동자
죽는다는데 관연 사람
생명 먼저안니가
안녕하세요
저는 바보입니다
왜바보?
저런거 만들지말고 백성들한테 쌀한포대라도 나눠주지
저렇게 왕릉을 조성하고 나면 그 주변 일대를 왕실에서 사들여서 왕릉 조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해요.
유럽식 따라하기
죽어서까지 저리 보존하고 싶었을까 욕심도 대단..제삿밥에다가
왕이자너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