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모아주신 김범수님께 감사드리고 영상 만들어서 소개해 주신 매림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매번 지금 강단사학계의 주장을 볼때마다 속터지는데, 있는 자료도 연구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참 한심하고 부끄럽네요. 시민들을 비롯해서 제발 지금 배우는 학생분들께서는 꼭 제대로 된 역사를 연구하고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4:55 공험진 2,3학설 보니 헛웃음만 나네요....
그러면 궁금한게 있는데요. 공험진 선춘령의 정확한 위치하고 세종대왕이 개척한 4군 6진이 어디인지 알고계신 사람은 없나요? 저는 회령을 조사하다 세종이 개척한 영역을 조사하는데 함경도 회령시인거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 국경이 톄링-솽청 라인이고, 공험진 선춘령이 압록 두만 이북에 있었으면 회령은 어떻게 함경도 회령인가요?
소위 고려사 전공한다는 이익주 교수가 그의 채널에서 윤관9성을 언급할 때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700리에 있다"하고 "선춘령은 두만강 동북쪽700리에 있다"하여 문제가 된다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선춘령과 공험진을 동일하게 보는데 세종실록 지리지는 북쪽과 동북쪽으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지명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두만강 위쪽이라는 것 보다는 북쪽과 동북쪽이라는 차이를 강조! 그리고 윤관의 9성은 1년 정도 유지하다 돌려 준 까닭에 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강의를 하고 있죠. 원래 고려가 보유할 능력이 없는 영역이라고..
@@내원-f6q 말도 안되는 논리로 이익주 교수를 옹호하려고 하지는 마십시요. 명나라와 말기고려, 초기 조선이 국경을 가지고 협상할 때 주요 지역은 지금의 만주, 그러니까 그 당시 철령(위)(=지금의 심양 안팎)이었습니다. 명나라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이 만주 통제의 중심지로 삼았던 쌍성총관부 지역을 명의 통제하에 두고자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 지역(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원래 고려의 영토)는 명이 통제하고 철령 이남은 고려가 통제(만주의 반 이상을 거저 먹겠다는 명의 의도)에 대하여 고려와 조선이 항의한 것이 명과 고려, 조선의 국경 분쟁입니다.
아래 제 댓글에 답변 다신 내원 님, "문주 고주....함주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입니다. 모두 함경남도 지역입니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여태 일본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 국사학계에서 받아 적은 내용이고, 근래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것이 잘못된 내용이라 하고 많은 연구논문을 통해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익주 교수를 비난하는 것은 그러한 수정 요구에 대하여 학문적 토론은 피하고(이길 수 없으니) 여러 방송 채널 다니면서 일반 대중 상대로 식민사학 내용만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비 학문적 태도! 내원 님도 이익주 교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른 학문적 태도를 가지고 역사를 공부했으면 합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신라 동부 해변의 고을들이 대거 투항해오다 고려사 930년 02월 01일 (음) 2월 을미 신라(新羅)에 사신을 보내 고창(高昌)의 승리를 알리자, 신라왕도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서한을 보내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에 신라의 동부 해변의 주군(州郡)과 부락(部落)이 모두 투항해왔는데, 명주(溟州)부터 흥례부(興禮府)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먼저 각기 주장하는내용이 상식에 부합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1.조선 시대 쓰여진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의 동북국경은 고구려 보다 더 넓었다 하는데 어떻게 함경남도가 동북 끝이 될 수 있을까?, 2. 조선 전기 군주인 세종 대(1418~1450)에 이미 확실하게 두만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윤관의 9성 위치를 확인키 위해 김종서를 두만강 북쪽으로 보냈는데... 어떻게 함경남도 함흥에서 9성의 함주를 찾습니까? 3. 원의 쌍성총관부는 원이 남으로(중국내륙)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명의 철령위는 북쪽의 공격으로부터 중국 내륙을 지키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함인데.. 어떻게 함경남도에 그 교두보를 설치하겠습니까? 상식을 가지고 역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식!!!
@@내원-f6q 1. 함주: 세종 때 잘 모르니 북쪽으로 올라가 잘 살펴보고 보고하라 했는데 100년뒤에 발간된 책에 의거해 함흥이 윤관9성의 함주라고 단정하는 것은... 함흥 지역이 윤관9성의 함주라면 세종 때 그렇게 보고가 이미 들어갔어야 정상이겠죠. 두만강 북쪽 700리와 현재의 함흥은 하나의 작전 구역으로 묶어 부른다는 것이 상식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2. 복기대 교수 측은 고려 국경이 문제가 많으니 재검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고려 전기 서북 국경에 관하여'라는 고조선연구소의 윤한택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한 번 찾아 보세요. 매우 설득력있는 요의 동측변경 수비진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3. 철령, 철령위 및 쌍성총관부: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할 때 많은 분이 동문선에 실려 있는고려 말 권근이 주원장에게 올린 상소문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요동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내원-f6q 내원님, 이 글로 동북국경 관련하여 마지막 답을 드리겠습니다. 1. 함주: 함흥이 함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윤관9성에 속하는 함주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명백히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함흥을 놓지 못하는 것은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700리라 해도 함흥이 9성의 함주성에 해당된다고 가정하면 9성 축성이후 2년이 안되어 여진에 돌려준 것을 고려하면 함경남도까지는 고려 영토가 아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유지할 수 있다는 까닭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 상식적 입니다. 오히려 9성은 공험진에서 남서 방향으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2. 서북 경계: 맑을 록과 푸를 록에 대하여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밖의 많은 자료가 요동이 고려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많습니다. 3. 철령: 주원장이 철령 북쪽의 동서는 원래 원소속 이므로 개원로에 속하게 요동이 통치하게 하고 철령 남쪽은 원래대로 고려에 속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철령의 북쪽을 개원로에 속하게 한다했습니다. 개원이 어디에 있는 도시이고 개원로의 범위를 따져 보시면 쉽게 철령의 위치가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친절한 답변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내원-f6q 내원 님, 의견 감사합니다. 보내 주신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철령과 철령위의 정확한 위치는 축소 왜곡된 고려 국경을 바로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1387년 명의 주원장이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 사신 설장수에게 얘기하는 장면에 대한 명사의 기록은 "철령 이북은 요동에 속하게 한다" 입니다. 따라서 철령은 요동에 있어야 합리적입니다. 3. 또한 이에 관한 고려사 기록은 철령과 더불어 개원, 심양, 신주 등의 요동 지명을 거론합니다. 4. 주원장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대한 고려 권근의 이의 제기가 그의 외손자 서거정이 편집한 동문선에 나오는데"철령 이북의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자고로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라고 고합니다. 이어 요나라 건통7년에 여진의 난을 고려 예종이 평정(윤관 장군)하며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고 밝히며 후에 함주와 공험진을 여진에게 돌려주었을지라도 그 이남은 고려 영토였으며 원대에 이르러 반역 도당에 의하여일시(1258~1356) 화주 이북 지역이 원에 속하였으나 공민왕 때 다시 무력으로 회복된 고려 영토라고 항의합니다. 5. 여기서 "함주와 공험진 이남"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직주 교수를 비롯한 강단사학의 기존 고려 국경 통설은공험진에서 함주를 말할 때 함주를 현재의 함흥이라 주장하는데 그런 지리적 위치라면공험진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함주 이남은 고려 영토라 얘기하면 됩니다. 공험진과 함주가 거의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험진과 함주가 동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위치하면 권근의 표현대로 "공험진과 함주 이남은"이라 표현해야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6. "봉집보유지"가 유명해 지면서 어떤 학자는 철령(함경남도)과 철령위(요동의 심양시 아래쪽 옛 봉집현)의 위치를 분리해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요동 철령이 있고 현재 북한 함경도의 철령이 있긴 하지만, 명의 주원장이 철령위 설치를 얘기할 때 그 철령에 대한 명사의 기록과 고려사의 기록은 모든 요동 지역 지명을 거론한다는 것이 문제의 철령과 철령위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습니다. 국사학계는 이를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료를 제시해야 현재의 고려 국경론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길어져 다음에 이어 올리겠습니다.
@@내원-f6q 내원 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만약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소속 학자들의 논문에 대하여 강단사학계에서 내원 님처럼 응대를 해 주었으면 한국사의 쟁점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시작되어 한국사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원 님의 글을 보면서 철령과 철령위를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이상한 강단사학자들의 주장과 같다는 느낌이... 철령수비대의 이름이 "철령위" 입니다. 철령위의 지휘사사가 "봉집보"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당들도 심양시 남쪽의 봉집보의 위치를 확인하고 "봉집보유지"라는 흔적을 할 수 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물론 내원 님이 지난 번 글에서 확인한 것처럼, 철령위는 지금의 철령시로 위치가 변경되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항이라는 전제하에 얘기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갑자기 철령이 어디인지, 철령위가 정확히 어디인지 안타깝게도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철령위는 심양 남쪽에 있다 5년 뒤 현재의 철령시로 이전되었다"는 기본 전제는 파기하려면 확실한 사료에 근거해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령과 철령위에 대한 위와 같은 저의 생각에 이어 동문선에 남아있는 권근의 기록, "철령 이북에 있는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자고로 본국의 땅이었습니다"을 객관적으로 탐색해 봅니다. 공험진에서 남서로 비스듬이 내려오는 고려의 국경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관의 군대는 동북9성을 칠 때 현재의 철령(정확한 위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향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병 2,7000명도 필요한 것이었겠죠. 강원도와 함경도 동쪽 끝을 행군하는 군대의 모습에 수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문헌의 의한, 그리고 유물과 유적에 의한 고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증을 진행하려면 합리적 가설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강단사학의 국사 이론은 합리성을 상실한 이론입니다. 상식에 어긋난 이론.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 하려면? 여러가지 무리가 따르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내원-f6q 위 의견에 동의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목은 이색의 통한의 내용은 고려 산천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위글의 "쌍성"을 요동의 "화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길도 설명을 보면 주원장이 언급한 철령과 원산 옆의 철령이 전혀 다른 지명임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공민왕5년에 동북쪽을 수복해 동북면이라 불렀고 조선 태종 13년에 영길도라 고처 불렀고 태종 16년에 함길도라 고쳐 불렀다 하며 함길도의 남북 길이를 "북의 공험진에서 남의 철령까지 1천7백리" 라고 기록했습니다. 두만강 북쪽 7백리에 공험진 두만강 남쪽 1천리에 철령이 조선 세종 때 함길도의 남북 끝단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세종 때 함길도에 대한 기록이 이러한데 어떻게 주원장이 원산 옆의 철령 이북을 명의지배하에 두겠다고 주장했겠습니까? 위와 같은 기본 상식에 의거해 요동 철령설과 봉집보가 철령위 지휘사사라는 주장은 정확한 견해로 봐야 마땅합니다.
@@TV-en8xw 금나라가 대륙 북경 베이징 위쪽에 있었다면 북벌이 맞는 것이줘. 베이징이 고려 서경이라고 하니요. 금나라를 한반도 북쪽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말이 안되겠지요. 송나라도 2개 나라가 있는데 북송하고 남송이줘. 북송이 고려 인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베이징이 서경이 되지요.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보면 서긍이 남송 수도 항저우에서 산동을 통과 후 북경으로 이동했다면 베이징이 고려 수도줘. 딱 맞아 떨어지내요. 고황제를 왜 자꾸 주원장이라고 주장하나요. 실록에 주원장(주원수) 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요. 한번 얘기 다루어 주시줘.
**** 일제 마지막총독 아베 노부유키(아베의 조부)가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한 말 ***** ~~~ "조선은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섞어서 재 창조, 조작해 놨거든 ***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 식민교육, 사학자를 심어놨다. 조선인은 영원히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서로 이간질하도록 식민교육,사학자를 심어 놓은 그 결과 일제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교육부, 강단사학계,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등을 완전히 장악하여 100년 가까이 일본식민사학자들이 뒤죽박죽 섞어버린 거짓 역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대지명을 한반도에서 못 찾으면 모른다고 하거나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는 겁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하나로 통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한 수천년 전의 역사는 접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접근 방법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잃어버린 역사도 하나로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고대지명의 위치와 현 지명이 동일한 가를 확정짓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를 하면 아베노부유끼의 간교한 덧에 걸리게 됩니다.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이 하나로 공인되면 아베노부유끼의 간교한 덧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고조선의 갈석산을 시작으로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을 최우선으로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이덕일 논문 검토 요망) 고조선의 중심부 갈석산은 현재 어디인가?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이다. 아니다. 황하 부근 내륙이다. 아니다 현 갈석산이 맞다. 고조선의 중심부 갈석산의 위치가 규명되면 한민족 상고사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노부유끼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갈석산이 확인되면 요동, 압록수가 밝혀지고 고조선, 한사군, 부여,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강역,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정확히 규명할 수 있습니다. 규명된 고대지명의 위치를 기초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25사 등을 시대별로 모두 대조 연구하면 중국의 한민족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환단고기, 삼국대륙설 등 모두 밝혀지리라 봅니다. 이병도도 죽을 임시에는 고조선 뿐아니라, 12환국, 배달국도 실존했다고 토설했습니다. 고대지명의 위치조차도 명쾌하게 규명ㅎ지 않은 상태에서 아베누부유끼가 조작, 재창조한 역사를 기초로 연구하면 환국, 배달국 일만 년 역사는 고사하고 고조선 이후 반만 년 역사조차도 규명하지 못합니다, ***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우선되는 게 바른 접근 방법으로 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가 나와 좀 다르다 해서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조선의 강역, 고려의 국경, 대륙삼국의 존재등 각자 연구한 분야가 다른 것도 있고 그 깊이도 분야별로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동안의 노고와 연구실적은 서로 인정하시고, 고조선의 갈석산을 시작으로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을 최우선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진실확인을 위해 난상토론은 하시되 인격을 훼손시키는 언행만은 자제해야합니다. 토론으로 부족했던 점이나 오류는 받아들이는 **** 대인의 풍모****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는커녕 아집으로 유튜브 한 구석에서만 서로를 매도하고, 물고 물어뜯는 아베 노부유키의 영원한 개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아베 노부유키의 간악한 덧에서 벗어나십시오! 갈석산 확인으로 요동, 압록수가 밝혀지고 고조선, 한사군, 부여,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강역,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정확히 규명, 그 기본틀 안에서 한 목소리로 방송하고 강의하면 **** 전 국민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후에야 식민사관이 폐기되고 우리의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책보고, 오재성 역사 알림,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 이기훈 역사와미래, 고대사, 우리역사 바로알기, 김정민 카자흐스탄 단군, 매림역사문화, 심백강(사고전서), 문사, 이덕일 역사tv, 복기대, 고조선연구소, 박석재 천문 역사 tv, 쿠릴타이tv, 히스토피아, 김기홍역사퍼즐, 김설애tv, 역사이다, 매림등 모두 주장과 분야는 다소 다를 수 있어도 고생하신 분들입니다. 서로의 노고를 **** 인정하십시오! **** 그리고 만나십시오! **** 서로 토론하고 하나로 통일해서 **** 대한민국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십시오!. **** 동북공정이란 한국과 중공 간 나라의 존망이 걸린 치킨게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부탁드립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와....진짜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은 기레기보다 더 나쁜 매국노들입니다....
오늘 선춘령,공험진의 위치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비록 그 지역 현장답사는 되지 않으나 식민강단사학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거짓이고 대부분 시민들에게 이를 알려야합니다!!
고맙습니다.
스스로 독립하지 못해 외곡된곶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정요근 저 놈은 참고로 역사저널에 드럽게 많이 나옵니다.
식민사학자 본좌 정요근
티비에 나오는 대다수가 식민사학자라고 보면 돼요 슬픈 현실입니다
고맙습니다
초등학생이 땅따먹기를 해도 그런 길고 좁은 모습은 아닐 것ㆍ상식이하의 강단들
윤관 대원수님은 척지진국공신으로 책봉되셨는데요. 척지란 말은 땅을 개척했다, 고토를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지역이 동북9성이라면 척지공신이란 칭호를 붙일 수 없겠죠.
역사광복을 부정하는 반도사관? 화가난다!😠💦💥
일반인도 사료 몇개만 봐도 아는 고려말 국경을 사학자들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은 학자가 아니라 역사조작꾼이라는 의미.
우리 역사계에서 반드시 퇴출시켜야 우리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ㅡ
자료 모아주신 김범수님께 감사드리고
영상 만들어서 소개해 주신 매림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매번 지금 강단사학계의 주장을 볼때마다 속터지는데, 있는 자료도 연구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참 한심하고 부끄럽네요.
시민들을 비롯해서 제발 지금 배우는 학생분들께서는 꼭 제대로 된 역사를 연구하고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4:55 공험진 2,3학설 보니 헛웃음만 나네요....
숙종때(?) 세웠다는 백두산 정계비를 알고 싶습니다
어떤 놈들이 이런 사기를 칩니까? 역사공정을 정부는 안하고 뭐합니까? ㅉ
지금 사학계 교수?들? ㅋㅋㅋ
그러면 궁금한게 있는데요. 공험진 선춘령의 정확한 위치하고 세종대왕이 개척한 4군 6진이 어디인지 알고계신 사람은 없나요? 저는 회령을 조사하다 세종이 개척한 영역을 조사하는데 함경도 회령시인거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 국경이 톄링-솽청 라인이고, 공험진 선춘령이 압록 두만 이북에 있었으면 회령은 어떻게 함경도 회령인가요?
정요근 넌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 조작꾼이다.
무인년(1218)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몽고군과 거란군 및 동하국(東夏國) 원수 호토(胡土)의 병사 100,000을 거느리고 함사(喊舎)를 포위하였다. 고려(高麗)가 병사 400,000을 원조하여 그를 이겼다. 함사가 스스로 목을 매어 사망하였다.
소위 고려사 전공한다는 이익주 교수가 그의 채널에서 윤관9성을 언급할 때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700리에 있다"하고 "선춘령은 두만강 동북쪽700리에 있다"하여 문제가 된다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선춘령과 공험진을 동일하게 보는데 세종실록 지리지는 북쪽과 동북쪽으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한 지명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두만강 위쪽이라는 것 보다는 북쪽과 동북쪽이라는 차이를 강조! 그리고 윤관의 9성은 1년 정도 유지하다 돌려 준 까닭에 큰 의미가 없는 것 처럼 강의를 하고 있죠. 원래 고려가 보유할 능력이 없는 영역이라고..
@@내원-f6q 말도 안되는 논리로 이익주 교수를 옹호하려고 하지는 마십시요. 명나라와 말기고려, 초기 조선이 국경을 가지고 협상할 때 주요 지역은 지금의 만주, 그러니까 그 당시 철령(위)(=지금의 심양 안팎)이었습니다. 명나라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이 만주 통제의 중심지로 삼았던 쌍성총관부 지역을 명의 통제하에 두고자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 지역(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원래 고려의 영토)는 명이 통제하고 철령 이남은 고려가 통제(만주의 반 이상을 거저 먹겠다는 명의 의도)에 대하여 고려와 조선이 항의한 것이 명과 고려, 조선의 국경 분쟁입니다.
그럼 고려서경이 북경 이라는 가정하에 연구좀 해봐라
고려사 내용에 있는 지역명 구글로 검색해봐라 전부 90프로이상 북경부근 하북성 산동성 산서 하남 안휘, 요령성등 고려영토였다 분명 고구려보다 영토가 컸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백제 황산벌 검색해봐라 산동성부근에 황산 백마강 등 나타나있다
역사다시쓰고 다시 가르쳐야된다
500년 동안 고려사에서 한자 강화도로 검색허면 날짜있는 강화도가 3개중 2개는'
몽고가 말하는 강화도로 원사에는 강화가 없고 강화를 강화도로 기록돠어 있습나다
나머지 강화도 1개 있는데 원문이 확인 안되는데 고려에 강화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사데이타베이스 들어가서 강화도, 강화로 검색해 보세요. 관련사료 다 뜰겁니다.
바이두 들어가서 한자로 강화도라고 쳐서 검색해 보세요. 한국과 중국의 강화도 관련 지명이 검색될 겁니다.
아래 제 댓글에 답변 다신 내원 님, "문주 고주....함주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입니다. 모두 함경남도 지역입니다"라고 하셨는데 그게 여태 일본이 가르쳐준 대로 우리 국사학계에서 받아 적은 내용이고, 근래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것이 잘못된 내용이라 하고 많은 연구논문을 통해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익주 교수를 비난하는 것은 그러한 수정 요구에 대하여 학문적 토론은 피하고(이길 수 없으니) 여러 방송 채널 다니면서 일반 대중 상대로 식민사학 내용만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비 학문적 태도! 내원 님도 이익주 교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른 학문적 태도를 가지고 역사를 공부했으면 합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신라 동부 해변의 고을들이 대거 투항해오다 고려사 930년 02월 01일 (음)
2월 을미 신라(新羅)에 사신을 보내 고창(高昌)의 승리를 알리자, 신라왕도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서한을 보내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에 신라의 동부 해변의 주군(州郡)과 부락(部落)이 모두 투항해왔는데, 명주(溟州)부터 흥례부(興禮府)까지 모두 110여 성이었다.
흥례부興禮府를 주어로 한중사서 사료검색해 보세요.
바이두는 한자로 검색하세요.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먼저 각기 주장하는내용이 상식에 부합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1.조선 시대 쓰여진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의 동북국경은 고구려 보다 더 넓었다 하는데 어떻게 함경남도가 동북 끝이 될 수 있을까?, 2. 조선 전기 군주인 세종 대(1418~1450)에 이미 확실하게 두만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윤관의 9성 위치를 확인키 위해 김종서를 두만강 북쪽으로 보냈는데... 어떻게 함경남도 함흥에서 9성의 함주를 찾습니까? 3. 원의 쌍성총관부는 원이 남으로(중국내륙)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고 명의 철령위는 북쪽의 공격으로부터 중국 내륙을 지키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함인데.. 어떻게 함경남도에 그 교두보를 설치하겠습니까? 상식을 가지고 역사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식!!!
@@내원-f6q
1. 함주: 세종 때 잘 모르니 북쪽으로 올라가 잘 살펴보고 보고하라 했는데 100년뒤에 발간된 책에 의거해 함흥이 윤관9성의 함주라고 단정하는 것은... 함흥 지역이 윤관9성의 함주라면 세종 때 그렇게 보고가 이미 들어갔어야 정상이겠죠. 두만강 북쪽 700리와 현재의 함흥은 하나의 작전 구역으로 묶어 부른다는 것이 상식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2. 복기대 교수 측은 고려 국경이 문제가 많으니 재검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고려 전기 서북 국경에 관하여'라는 고조선연구소의 윤한택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한 번 찾아 보세요. 매우 설득력있는 요의 동측변경 수비진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3. 철령, 철령위 및 쌍성총관부: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할 때 많은 분이 동문선에 실려 있는고려 말 권근이 주원장에게 올린 상소문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요동에 위치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내원-f6q 내원님, 이 글로 동북국경 관련하여 마지막 답을 드리겠습니다.
1. 함주: 함흥이 함주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윤관9성에 속하는 함주인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명백히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함흥을 놓지 못하는 것은 공험진이 두만강 북쪽700리라 해도 함흥이 9성의 함주성에 해당된다고 가정하면 9성 축성이후 2년이 안되어 여진에 돌려준 것을 고려하면 함경남도까지는 고려 영토가 아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유지할 수 있다는 까닭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 상식적 입니다. 오히려 9성은 공험진에서 남서 방향으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2. 서북 경계: 맑을 록과 푸를 록에 대하여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밖의 많은 자료가 요동이 고려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많습니다.
3. 철령: 주원장이 철령 북쪽의 동서는 원래 원소속 이므로 개원로에 속하게 요동이 통치하게 하고 철령 남쪽은 원래대로 고려에 속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철령의 북쪽을 개원로에 속하게 한다했습니다. 개원이 어디에 있는 도시이고 개원로의 범위를 따져 보시면 쉽게 철령의 위치가 이해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친절한 답변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내원-f6q 내원 님, 의견 감사합니다. 보내 주신 글에 대한 저의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철령과 철령위의 정확한 위치는 축소 왜곡된 고려 국경을 바로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 1387년 명의 주원장이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 사신 설장수에게 얘기하는 장면에 대한 명사의 기록은 "철령 이북은 요동에 속하게 한다" 입니다. 따라서 철령은 요동에 있어야 합리적입니다.
3. 또한 이에 관한 고려사 기록은 철령과 더불어 개원, 심양, 신주 등의 요동 지명을 거론합니다.
4. 주원장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대한 고려 권근의 이의 제기가 그의 외손자 서거정이 편집한 동문선에 나오는데"철령 이북의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자고로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라고 고합니다. 이어 요나라 건통7년에 여진의 난을 고려 예종이 평정(윤관 장군)하며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고 밝히며 후에 함주와 공험진을 여진에게 돌려주었을지라도 그 이남은 고려 영토였으며 원대에 이르러 반역 도당에 의하여일시(1258~1356) 화주 이북 지역이 원에 속하였으나 공민왕 때 다시 무력으로 회복된 고려 영토라고 항의합니다.
5. 여기서 "함주와 공험진 이남"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직주 교수를 비롯한 강단사학의 기존 고려 국경 통설은공험진에서 함주를 말할 때 함주를 현재의 함흥이라 주장하는데 그런 지리적 위치라면공험진을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함주 이남은 고려 영토라 얘기하면 됩니다. 공험진과 함주가 거의 남북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험진과 함주가 동서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위치하면 권근의 표현대로 "공험진과 함주 이남은"이라 표현해야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다.
6. "봉집보유지"가 유명해 지면서 어떤 학자는 철령(함경남도)과 철령위(요동의 심양시 아래쪽 옛 봉집현)의 위치를 분리해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요동 철령이 있고 현재 북한 함경도의 철령이 있긴 하지만, 명의 주원장이 철령위 설치를 얘기할 때 그 철령에 대한 명사의 기록과 고려사의 기록은 모든 요동 지역 지명을 거론한다는 것이 문제의 철령과 철령위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겠습니다. 국사학계는 이를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는 사료를 제시해야 현재의 고려 국경론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길어져 다음에 이어 올리겠습니다.
@@내원-f6q 내원 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만약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소속 학자들의 논문에 대하여 강단사학계에서 내원 님처럼 응대를 해 주었으면 한국사의 쟁점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시작되어 한국사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원 님의 글을 보면서 철령과 철령위를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이상한 강단사학자들의 주장과 같다는 느낌이...
철령수비대의 이름이 "철령위" 입니다. 철령위의 지휘사사가 "봉집보"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당들도 심양시 남쪽의 봉집보의 위치를 확인하고 "봉집보유지"라는 흔적을 할 수 없이 남겨 놓았습니다. 물론 내원 님이 지난 번 글에서 확인한 것처럼, 철령위는 지금의 철령시로 위치가 변경되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항이라는 전제하에 얘기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갑자기 철령이 어디인지, 철령위가 정확히 어디인지 안타깝게도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철령위는 심양 남쪽에 있다 5년 뒤 현재의 철령시로 이전되었다"는 기본 전제는 파기하려면 확실한 사료에 근거해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령과 철령위에 대한 위와 같은 저의 생각에 이어 동문선에 남아있는 권근의 기록, "철령 이북에 있는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자고로 본국의 땅이었습니다"을 객관적으로 탐색해 봅니다. 공험진에서 남서로 비스듬이 내려오는 고려의 국경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윤관의 군대는 동북9성을 칠 때 현재의 철령(정확한 위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향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병 2,7000명도 필요한 것이었겠죠. 강원도와 함경도 동쪽 끝을 행군하는 군대의 모습에 수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문헌의 의한, 그리고 유물과 유적에 의한 고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증을 진행하려면 합리적 가설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강단사학의 국사 이론은 합리성을 상실한 이론입니다. 상식에 어긋난 이론.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 하려면? 여러가지 무리가 따르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내원-f6q 위 의견에 동의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목은 이색의 통한의 내용은 고려 산천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위글의 "쌍성"을 요동의 "화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의 함길도 설명을 보면 주원장이 언급한 철령과 원산 옆의 철령이 전혀 다른 지명임을 짐작케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공민왕5년에 동북쪽을 수복해 동북면이라 불렀고 조선 태종 13년에 영길도라 고처 불렀고 태종 16년에 함길도라 고쳐 불렀다 하며 함길도의 남북 길이를 "북의 공험진에서 남의 철령까지 1천7백리" 라고 기록했습니다. 두만강 북쪽 7백리에 공험진 두만강 남쪽 1천리에 철령이 조선 세종 때 함길도의 남북 끝단이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세종 때 함길도에 대한 기록이 이러한데 어떻게 주원장이 원산 옆의 철령 이북을 명의지배하에 두겠다고 주장했겠습니까?
위와 같은 기본 상식에 의거해 요동 철령설과 봉집보가 철령위 지휘사사라는 주장은 정확한 견해로 봐야 마땅합니다.
고려초기는 북경이 서경입니다 해결 안하시나요? 고려도경에 나와 있는데?
고려도경 지도가 없잖아요?
묘청이 금나라를 북벌(북쪽 금나라를 치는 것)하자고 서경천도 주장하다가 김부식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었는데
북경이 서경이면 고려가 어느 나라를 쳤다는 말입니까? 북벌이 아니라 남벌이 되는데 ...
그건 더 SF소설이 되는 겁니다.
@@TV-en8xw 고려의 전기 중기 후기의
지도는 왜없나요????
려말 여초시절은 대략 땅덩어리를 알겠는데
고려 전성기 시절은 알수 없나요?
고려 도경읽어보면 근데 서해 넘어온건 아님 100퍼 확신함
@@TV-en8xw 금나라가 대륙 북경 베이징 위쪽에 있었다면 북벌이 맞는 것이줘. 베이징이 고려 서경이라고 하니요. 금나라를 한반도 북쪽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말이 안되겠지요. 송나라도 2개 나라가 있는데 북송하고 남송이줘. 북송이 고려 인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니 베이징이 서경이 되지요.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보면 서긍이 남송 수도 항저우에서 산동을 통과 후 북경으로 이동했다면 베이징이 고려 수도줘. 딱 맞아 떨어지내요. 고황제를 왜 자꾸 주원장이라고 주장하나요. 실록에 주원장(주원수) 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요. 한번 얘기 다루어 주시줘.
현재까지 지탱 남아서 한반도 쭈구렁이 된 신세. 근원은 한개. 이리저리 분파되어 서로 저 잘났다고 엄연한 옛적 사실도 제 입맛맞게 잘도 꿰맟준다. 못난 후손들 아우성. 인류 역사상 거짓인간아닌경우 없음. 송두리 가짜!
**** 일제 마지막총독 아베 노부유키(아베의 조부)가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한 말 *****
~~~ "조선은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섞어서 재 창조, 조작해 놨거든
*** 우리 일본은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 식민교육, 사학자를 심어놨다.
조선인은 영원히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서로 이간질하도록 식민교육,사학자를 심어 놓은 그 결과
일제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교육부, 강단사학계,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등을 완전히 장악하여
100년 가까이 일본식민사학자들이 뒤죽박죽 섞어버린 거짓 역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대지명을 한반도에서 못 찾으면 모른다고 하거나 아무데나 가져다 붙이는 겁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하나로 통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눈으로 보지 못한 수천년 전의 역사는 접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접근 방법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잃어버린 역사도 하나로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고대지명의 위치와 현 지명이 동일한 가를 확정짓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를 하면 아베노부유끼의 간교한 덧에 걸리게 됩니다.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이 하나로 공인되면 아베노부유끼의 간교한 덧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고조선의 갈석산을 시작으로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을 최우선으로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이덕일 논문 검토 요망)
고조선의 중심부 갈석산은 현재 어디인가?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이다. 아니다. 황하 부근 내륙이다. 아니다 현 갈석산이 맞다.
고조선의 중심부 갈석산의 위치가 규명되면 한민족 상고사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노부유끼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갈석산이 확인되면 요동, 압록수가 밝혀지고 고조선, 한사군, 부여,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강역,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정확히 규명할 수 있습니다.
규명된 고대지명의 위치를 기초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25사 등을 시대별로 모두 대조 연구하면 중국의 한민족의 경계가 확실해지고 환단고기, 삼국대륙설 등 모두 밝혀지리라 봅니다.
이병도도 죽을 임시에는 고조선 뿐아니라, 12환국, 배달국도 실존했다고 토설했습니다.
고대지명의 위치조차도 명쾌하게 규명ㅎ지 않은 상태에서 아베누부유끼가 조작, 재창조한 역사를 기초로 연구하면 환국, 배달국 일만 년 역사는 고사하고
고조선 이후 반만 년 역사조차도 규명하지 못합니다,
***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우선되는 게 바른 접근 방법으로 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가 나와 좀 다르다 해서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조선의 강역, 고려의 국경, 대륙삼국의 존재등 각자 연구한 분야가 다른 것도 있고
그 깊이도 분야별로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동안의 노고와 연구실적은 서로 인정하시고, 고조선의 갈석산을 시작으로 고대지명의 현 위치와 강역규명을 최우선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진실확인을 위해 난상토론은 하시되 인격을 훼손시키는 언행만은 자제해야합니다.
토론으로 부족했던 점이나 오류는 받아들이는 **** 대인의 풍모****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는커녕 아집으로
유튜브 한 구석에서만 서로를 매도하고, 물고 물어뜯는 아베 노부유키의 영원한 개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아베 노부유키의 간악한 덧에서 벗어나십시오!
갈석산 확인으로 요동, 압록수가 밝혀지고 고조선, 한사군, 부여,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강역,
건국에서 멸망까지의 역사를 정확히 규명, 그 기본틀 안에서 한 목소리로 방송하고 강의하면 **** 전 국민에게 쉽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후에야 식민사관이 폐기되고 우리의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책보고, 오재성 역사 알림, 고대국가 위치를 찾아서, 이기훈 역사와미래, 고대사, 우리역사 바로알기, 김정민 카자흐스탄 단군, 매림역사문화, 심백강(사고전서), 문사, 이덕일 역사tv, 복기대, 고조선연구소, 박석재 천문 역사 tv, 쿠릴타이tv, 히스토피아, 김기홍역사퍼즐, 김설애tv, 역사이다, 매림등 모두 주장과 분야는 다소 다를 수 있어도 고생하신 분들입니다.
서로의 노고를 **** 인정하십시오! **** 그리고 만나십시오! **** 서로 토론하고 하나로 통일해서 **** 대한민국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십시오!. ****
동북공정이란 한국과 중공 간 나라의 존망이 걸린 치킨게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