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Period Jeongjo's aunt and the daughter of Royal Consort Jeong, the consort Yeongjo loved m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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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9 сен 2024
  • Princess Hwaeok (1717-1718) was Joseon's 21st king, Yeongjo's eldest daughter, the sister of Prince Hyojang, and Jeongjo's (Lee San) aunt.
    She was born in 1717, when Yeongjo was still a prince, Yeoning-gun, as the first daughter from his first love Royal Consort Jeong.
    When Princess Hwaeok was born, Yeongjo was 24 years old which in the Joseon days meant he had the first child at a late age.
    Princess Hwasun was Joseon's 21st king Yeongjo's daughter, her mother was Lee Junchul's daughter Royal Consort Jeong, her brother was the posthumous king Jinjong (Prince Hyojang), and her sister was Princess Hwaeok, and her nephew was Jeongjo (Lee San).
    Of all the Joseon princesses, she's the only one named virtuous woman. Jeongjo to honor his aunt Princess Hwasun's fidelity, he named her a virtuous women and made a virtuous woman gate for her.
    The mother of Princess Hwaeok and Princess Hwasun and Yeongjo's first love, Royal Consort Jeong became Yeongjo's consort when when was still Yeonging-gun.
    She comes from the same background as Royal Consort Ui (Seong Deokim) as a court lady, and still remains a mystery how Royal Consort Jeong was able to come out of the palace and get Yeongjo's love. #The Red Sleeve #JoseonDynasty #History

Комментарии • 38

  • @user-nk8zd1vw4q
    @user-nk8zd1vw4q 2 года назад +43

    영조가 화순옹주를 열녀로 기리지 않은 건 화완옹주를 배려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화완옹주의 남편 일성위 정치달이 바로 전 해에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화순옹주를 열녀로 기리면 화완옹주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한 거라는 겁니다. 저는 이쪽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보네요^^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20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는 것이 크나큰 불효이거늘... 차라리 자식이라도 있었으면 자식 보는 재미에라도 살았을 텐데 언니야 어차피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으니 그렇다 쳐도 엄마와 오빠가 일찍 사망하고 외롭게 살다 만난 남편마저 일찍 죽자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1720년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탄생
    1721년(만 1세): 아버지 영조가 왕세제가 되어 소훈 봉작, 하지만 이 해 어머니 사망ㅠㅠ
    1725년(만 5세): 아버지 영조 즉위
    1728년(만 8세): 유일한 형제 효장세자 사망ㅠㅠ
    1732년(만 12세): 김한신과 혼인
    1758년(만 38세): 남편 김한신이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본인도 사망
    아무리 아버지가 왕이라 옹주라 생활 자체는 풍족하더라도 아버지는 격무로 바쁜 가운데 엄마는 없고 하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나마 남편과의 금슬은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옹주가 남편을 아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지금 위키백과 찾아보니 남편 김한신에게는 측실에게서 낳은 딸이 하나 있네요? 부마는 첩을 둘 수 없는데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화순옹주가 그냥 눈감아 준 건지...? 그렇다면 아이를 낳지 못한 원인이 화순옹주에게 있다는 거니 이마저도 참 비극이네요...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5

    아래 간택 후궁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버지의 벼슬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간택 후궁을 선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지위보다는 그 "집안"이었습니다. 다들 조선 시대가 신분제 사회였다고 생각하시는데 신분제 사회였던 것은 맞지만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는 매우 어려워서 그렇지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어요. 과거 시험이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실상 오늘날의 고시 합격보다 어려웠던 시험을 양반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후원해서 합격시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을 뿐 심지어 노비 출신이었음에도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 벼슬을 지낸 반석평과 같은 사례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반대로 3대 안에 과거 시험 급제자가 없으면 원칙적으로는 양반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결국 기득권층이 어찌어찌 꼼수를 쓰기는 했지만...
    애초에 간택 후궁까지 갈 것도 없어요. 중전이나 세자빈이었던 사람들 집안만 봐도 왕에 따라서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되 그 아버지는 과거 시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해서 다소 몰락해서 외척 득세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집안을 더 선호하기도 했어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정순왕후는 워낙 영조가 늦은 나이에 들인 계비라 손자 정조를 생각하여 외척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특수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1758년(영조 38) 사마시 초시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낙방하였을 정도로 별 대단할 거 없는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었어요. (정순왕후와의 혼인이 1759년입니다)
    흥선대원군도 명성황후를 양반 가문이되 다소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는 점을 마음에 들어하며 며느리로 들였죠. 심지어 원칙대로라면 왕가 혼인은 한부모 가정에서는 들이지 않는데 명성황후의 아버지는 혼인 당시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을 정도에요. 문제는 훗날 이 며느리가 발톱을 숨긴 사자였다는 거지만...
    물론 저 사례들은 손자 정조를 생각해서, 흥선대원군은 본인이 권력 잡고 안 놓으려고라는 특수 사정이 있었고 저 사람들 외 중전/세자빈은 왕실을 빼고는 이런 명문가 집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세도가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승은 후궁과 간택 후궁의 차이는 신분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승은 후궁이라고 해도 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집안 출신이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물론 승은 후궁은 대부분 다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애초에 궁녀 자체가 그다지 인기 없는 직업이었으니까요. 먹고 살 만한 양인 집안에서는 농사 짓고 살 지언정 언제 능지처참당할지 알 수 없고 혼인도 못하는 궁녀를 선호하지 않아 미천한 신분 출신이 많았죠. 하지만 중인 집안이나 낮은 벼슬 지낸 집안에서는 궁인으로 딸을 입궁시켜 높은 사람의 시중을 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선조의 할머니이자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를 들 수 있어요. 창빈 안씨는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를 모시는 궁인이었는데 아버지가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어 정7품 적순부위라는 낮은 벼슬 지냈지만 아버지 안탄대의 출신 집안과 배경에 대해 알려진 점이 없다는 점에서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이 아버지만 딱 낮은 벼슬 지낸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요.
    선조가 가장 총애한 후궁 인빈 김씨도 명문가 출신도, 아주 한미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죠. 외조부가 효령대군의 후손인 집안이었어요. 다만 대대로 벼슬을 지내지는 못해서 인빈 김씨 대에 와서는 양반 간문은 아닌 상황이 된 거였죠.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3대 안에 과거 시험 급제자가 없으면 양반 신분을 박탈당했습니다.
    공빈 김씨의 고조부 김영정은 대사간을 지낸 인물이었고 공빈의 할머니는 정인지의 증손녀이자 세종의 아들 계양군의 외증손녀였고, 어머니는 태종의 딸 경안공주의 직계 후손(6대손)이었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낮은 벼슬 지내고 있기는 했지만 친척 관계를 따지는 유교 사회에서 왕실과 인연이 있는 친인척 관계였고 할아버지, 아버지대로 내려오면서 높은 벼슬을 지내지 못해 집안이 다소 몰락했다는 점은 오히려 중전이 아이를 못 낳고 있는 가운데 후사를 볼 목적으로 들이는 간택 후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때 함께 간택 후궁으로 들어온 귀인 정씨도 아버지 정황은 벼슬을 지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조상들이 병조판서, 김제 군수를 역임하고 고모가 인종의 간택 후궁 귀인 정씨로 들어갔을 정도의 명문가 집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별 대단할 게 없는데 집안이 대단했죠. 참고로 이 귀인 정씨는 정철의 조카입니다. 아버지 정황의 동생이 정철임.
    간택 후궁 선정에 중요한 건 "아버지의 벼슬"보다는 그 "집안 내력"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해 관계로 간택 후궁을 들일 때는 아버지의 벼슬이 더 중요하기도 했어요. 대표적인 예가 반정으로 왕이 되어 반정 공신의 딸을 간택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중종의 간택 후궁들이죠. (경빈 박씨의 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인 박수림, 희빈 홍씨는 그 유명한 홍경주의 딸, 장경왕후는 연산군 시절 유배를 갔다 풀려나 중종반정 당시 벼슬은 없었으나 참판 윤보의 아들이자 중종반정 참여로 공신 책봉, 연산군 시절 유배 갔다는 것은 오히려 호재로 작용)
    하지만 중전에게 후사가 없어 후사를 볼 목적으로 간택 후궁을 들일 때는 오히려 아버지는 벼슬을 못 지내서 다소 몰락했는데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어차피 후궁의 자식들은 다 중전의 자녀로 입적되기는 하지만 "진짜" 중전의 자녀가 되기 딱이거든요. 친모의 신분이 너무 미천하면 영조 같은 히스테릭한 인물이 될 가능성 100%고 너무 우수하면 중종 시절 대윤 VS 소윤 전쟁이 일어날 게 뻔하니까요.
    뭐 성종의 간택 후궁 출신 중전 정현왕후처럼 아버지가 병조참지였던 사례도 있기는 합니다. 공혜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해 들인 후궁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간택 후궁들은 꼭 아버지가 벼슬을 지내거나 고위직을 역임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서 길게 써 봤습니다.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고 의빈 성씨도 죽고 없자 들인 간택 후궁 수빈 박씨의 아버지 박준원도 벼슬을 못 지내 이미 몰락한 상태였죠. 다만 영조의 부마 박명원과 같은 집안인 반남 박씨 집안일 정도로 명문 집안의 일원이었죠.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10

    영조가 사랑한 후궁은 모두 궁녀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진종과 화순은 정성왕후가 친자녀처럼 돌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엔 화순을 영조가 미워하였다고 하지만 아마 화평보다 덜 사랑하였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벼루 이야긴 세자가 친하지도 않은 누나 집에 간 것도 말이 안되고 이런 일을 혜경궁이 적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간택한 왕비가 정순왕후 입니다.

    • @solsun412
      @solsun412 2 года назад +3

      화순이 아니라 화협이에요 영조가 젤 사랑한 게 화순인데...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solsun412
      한중록 에는 화평을 가장 사랑하고 남편과 화협, 화순을 미워하였다고 적었어요. 영조가 기복이 심하니 딸들이 죽을때 애통해하던 것 둘다 진실이라고 봅니다.

    • @jAy__Yo
      @jAy__Yo 2 года назад +2

      화순을 미워했다고도 했나요? 화평, 화순, 화완옹주가 사랑받았고 화협과 사도세자만 미움받은줄 알았는데… 화평옹주를 제일 좋아했던건 사실이지만 화순옹주가 시집갈때 옹주들이 받는 예물의 10배를 받아서 논란이 일었던적도 있다 했는데… 화평옹주가 그보다 더 받아서 그렇지 결코 미움받지는 않았고 오히려 총애받는 축에 속할걸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1

      @@jAy__Yo 세자빈이 시누이들을 유심히 보고 내린 결론이니 세세히 신경 안써도 됩니다. 영조는 이뻐하고 무관심한 것도 티가 나게 하거든요. 화협을 미워했다는 근거도 귀를 씻은 물을 옹주 집 쪽에 버려라 이정도 입니다. 직접 구박받은 것으로 치면 세자에 비할 옹주가 없어요.

  • @user-ft3vb3iq5b
    @user-ft3vb3iq5b 2 года назад +16

    이복동생 사도세자와 올케 혜경궁 홍씨의 딸들
    이자 옹주한테는 조카들인 청연군주 청선군주
    에 대해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세자의 적녀들
    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과 왕후로 추존되
    지 못해서 군주로 살아야 했던 청연,청선에 대
    해서도 듣고 싶어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4

      더 비참힌 세자의 딸은 청근현주 입니다. 어머니 빙애가 세자에게 맞아 죽고 동생 은전군 찬은 정조가 사사합니다. 정조도 은전군을 아꼈지만 홍국영이 강요하여 사사됩니다. 청근옹주는 화순옹주가 죽던 해에 태어나 1835년 죽었다고 합니다. 1757년 인원왕후, 정성왕후, 정치달이 죽고 이듬해 화순 죽고 영조도 기가 막히겠습니다.

    • @user-gv9rd1vc9t
      @user-gv9rd1vc9t 2 года назад +6

      청연공주가 태어났을때 영조는 오랜만에 군주가 태어났다며 기뻐했다 하네요.왕실에서 적통왕녀 공주로 태어난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소생 공주 둘(영조의 이복누나)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영조가 종종 손녀딸 집에도 들릴 정도로 많이 아꼈고 정조의 후궁 의빈과도 친했다고 해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8

    화순옹주의 올케 효순왕후를 아시는 분이 거의 없어요. 효순왕후의 오빠 조재호가 사도세자를 편들다가 죽지요. 조씨를 모시던 궁녀가 문숙의 인데 영조가 며느리 상중에 후궁으로 만들어요. 그러고선 세자가 인원왕후의 나인 빙애를 후궁으로 삼았다고 분노합니다.

  • @user-ry5bi1uv2q
    @user-ry5bi1uv2q 2 года назад +1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사랑한사이
    였군요

  • @Yollo101
    @Yollo101 2 года назад +1

    English translation please… Thank you

  • @cocoa4359
    @cocoa4359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생애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죽었다니.. 안타깝네요 그리고 그놈의 열녀문 ㅠ 진짜 저건 전혀 자랑이 아니다

  • @gigagenie9244
    @gigagenie9244 2 года назад +3

    선조의 첫번째 왕비 이야기 알려주세요~

    • @inyeobseo9369
      @inyeobseo9369 2 года назад +1

      의인왕후 박씨가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궁녀였던 김공빈을 선조가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공빈이 죽을때 중전에게 아들들을 부탁하고 의인왕후는 임해군, 광해군을 친아들처럼 키웠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인목대비와 광해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1

      @@inyeobseo9369 공빈 김씨가 미천한 신분 출신 궁녀라는 건 드라마 설정으로 인해 잘못 알려진 정보입니다. 그녀는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이었어요. 그리고 선조와 만난 시점도 의인왕후가 선조와 혼인한 시점보다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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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司圃)를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 해령부원군(議政府 領議政 海寧府院君)에 추증된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1553년 11월 16일 (음력 10월 11일)에 태어났다. 종2품 숙의(淑儀)로 있을 때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을 낳아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고, 차남인 광해군을 낳자 마침내 정1품 빈(嬪)에 책봉되었다. 김희철은 후일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전사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 형제의 주변에 힘이 되어줄 만한 인물들이 없어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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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 정보인데요. 아버지가 사포를 지냈다고 나오죠. 그리고 임해군을 낳은 시점에 종2품 숙의였고요. 후궁 품계는 낮은 순서부터 숙원 - 소원 - 숙용 - 소용 - 숙의 - 소의 - 귀인 - 빈 인데 명문가 출신 간택 후궁들은 입궁 시 숙의를 달고 들어왔어요. 임해군을 낳은 시점에 공빈 김씨가 만 19세인데 10대 중반에 승은을 입고 숙원부터 품계가 시작되었다면 불과 2~3년 사이에 숙의까지 올라갈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이 땐 선조가 대비 인순왕후의 눈치도 봐야 하던 시점이라...
      의인왕후와의 혼인이 1569년이에요. 당시로선 신랑 신부 모두 늦은 혼인이었던지라 바로 합궁했는데 아이가 안 생기자 1571년에 숙의 2명을 간택 후궁으로 뽑았다는 기록이 나와요. 이 중 1명이 공빈 김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 1명의 숙의는 1579년에 아이 낳다 사망했다네요. 그렇다면 공빈 김씨가 입궁 후 바로 총애를 받아 1572년에 임해군을 낳은 점, 이 시점에 숙의였던 점이 전부 설명이 되죠.
      그리고 다른 여인에게서는 쉽게 아이가 생기는 것을 안 선조가 본격적으로 의인왕후를 박대하기 시작하게 되는 거죠ㅠㅠ

    • @kcabeomckjr7401
      @kcabeomckjr7401 2 года назад

      공빈은 명문가의 간택 후궁이 아닙니다. 일단 공빈의 본관은 김해인데다, 선조가 숙의로 간택한 세 명은 정빈 민씨, 정빈 홍씨, 귀인 정씨 입니다. 이 중 귀인 정씨가 아이를 낳다 사망했고, 공빈이 간택후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빈이 아이를 낳지 않고도 숙의에 봉직된 점 때문에 간택후궁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신 듯 한데, 왕의 총애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숙종 때는 희빈 장씨가 경종을 낳기 전에 이미 정2품 소의였습니다.

    • @kcabeomckjr7401
      @kcabeomckjr7401 2 года назад

      그리고 공빈의 아버지가 사포를 지낸 건공빈이 후궁이 된 후일 수도 있는거고, 공빈이 첩의 딸일수도 있는 거고요. 실제로 공빈의 조상 중에서는 벼슬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공빈의 아버지만 벼슬이 있다는 점에서는 공빈이 후궁이 된 후 딸 덕에 벼슬을 갖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kcabeomckjr7401 그건 숙종 때 이야기고요. 숙종 시절엔 이미 외아들(현종)-외아들(숙종)로 이어진 계보로 인해 후궁 품계가 후해진 시기였습니다.
      당장 공빈 김씨 사후이긴 하지만 같은 선조의 후궁이자 선조가 평생 가장 총애한 여인인 인빈 김씨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빈 김씨는 미천한 신분 출신까지는 아니었지만 선조의 법적 모친이자 대비 인순왕후의 심부름을 하다 눈치가 빠르고 어려서부터 궁에서 생활해서 궁궐 법도에 대해 잘 알아 왕손 많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인순왕후가 추천해서 선조의 승은을 입었는데요. 이게 1573년입니다.
      그래도 대비의 추천 덕분인지 당시에는 공빈 김씨에게 총애가 쏠려 있던 시점이었음에도 아이도 없는데 바로 후궁 첩지를 받기는 했습니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10년을 승은 상궁으로 지내다 숙원에 봉해진 것과는 달리요.
      그런데 후궁 중 가장 높은 품계에 오른 건 무려 30년 후에요. 선조와의 사이에서 무려 4남 5녀나 낳았고 가장 많은 자식을 본 여인인데도요. 세세한 품계를 언제 달았는지까지는 인터넷에 안 나오지만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아이도 낳지 못했던 님이 말씀하시는 정빈 홍씨와 1남 1녀를 낳은 정빈 민씨는 이미 빈이었는데도요. 이 사람들은 숙의를 달고 들어왔고 집안이 좋으니 바로바로 승급을 시켜준 거죠. 참고로 이미 인빈 김씨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나 낳은 상태였습니다.
      위키백과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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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사촌언니이자 명종의 후궁이었던 숙의 이씨(경빈 이씨)가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인순왕후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인순왕후가 선조에게 후궁으로 추천하여 1573년(선조 6년)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었다.[4] 이후 정3품 소용(昭容), 종2품 숙의(淑儀), 종1품 귀인(貴人)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11월 12일, 정1품 인빈(仁嬪)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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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총애를 많이 받았고 아들도 많이 낳은 후궁이 빈을 단 것이 승은을 입은 1573년 이후 무려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입니다. 그런데 공빈 김씨도 미천한 신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나인 출신 승은 후궁이었다면 제아무리 첫사랑에 빠져 천지 분간 못하고 있던 때라 해도 아이도 낳기 전에 숙의에 봉하고 아들 낳았다고 바로 귀인, 빈으로 봉해줄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이 시점에는 선조가 의인왕후를 박대하는 걸 못마땅해 하는 대비 인순왕후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시기였는데요?
      이런 정황을 놓고볼 때 공빈 김씨는 100% 간택 후궁입니다.

  • @user-dj8ie2uw9e
    @user-dj8ie2uw9e 9 месяцев назад

    정빈? 영빈 아닌가요?

  • @DJ-qh1ds
    @DJ-qh1ds 2 года назад +2

    벼루얘기는 말도 안됨..

  • @wtf5_28
    @wtf5_28 2 года назад +6

    딸만 12명ㅋ

    • @user-uo6ih8ur1t
      @user-uo6ih8ur1t 2 года назад +5

      참 운명이란 게 얄궂죠... 영화 사도에서도 이야기하듯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어떻게 영조의 염색체는 다 X 염색체였던 것인지...

  • @user-jx4ng5vi6p
    @user-jx4ng5vi6p 13 дней назад

    영조가 너무 드세니까 주변사람들이 기가 약해서
    쉬이 병마에 져서 죽거나 굶어죽거나
    뒤주에 갇혀 죽었네.

  • @user-px2in8qp5c
    @user-px2in8qp5c 2 года назад +1

    묏자리가 왕자池 ㅋㅋㅋ

  • @user-zu6km2ui9x
    @user-zu6km2ui9x 2 года назад +1

    장초단타 ---- 기선제압
    당일단타 --- 창원개미
    마 인 드 --- 야손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