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가 없는 자는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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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 янв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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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doliTv
    @podoliTv  2 месяца назад

    샘에 흘러든 침전물은 내 태곳적 자궁에서 흘러든 것이므로 퀘퀘한 악취를 풍기지만, 시뻘건 내 샘에 흘러든 녀석은 무엇보다 새햐얘서 ‘나의 잃어버린 순수’를 어리석게도 자극한다.
    실체는 가려진 채로, 우리는 등잔 밑을 보지 못 하며 독단적인 생애를 이어가고, 그러한 세계에서 동물들은 가난하게 숨겨지고 버려진다.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어찌 되었든지 어제도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겠어? 이 세계를 피상 그 자체에로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 나의 시선을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마, 그건 어쩔 수 없는 타락이니까. 사실은 누구나 다 더럽혀지기를 바라지 않아?
    라고 자위하기엔, 세계는 어두운 데다 빛은 밝아서 또한 어쩔 수 없는 삶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살기 싫은 이에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감행한다는 점이다.
    물론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될 점이란, 빛에도 시신은 들었다. 우리가 그 빛의 작동을 OFF로 전환하면, 시신도 마찬가지로 숨겨지고, 버려진다. 죽음이다, 죽음! 죽음은 따라서 ‘버려지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결국에 배척 당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세계는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추모하거나 문화에 따라 고양과 예절을 자처하는데,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다. 사실 죽은 자는 그 모든 것을 정작 보지 못 하니까! 제기랄, 이 빌어먹을 세계는 망가졌다. 애써 숨은 자 앞에 멈춰서는, 빛을 받는 존재-광합성의 외롭지 않은 자가 보이는가. 사실 그들은 빛을 받으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속에 사는 것처럼이지만 그것은 정해진 행복이다! 그것은 푸른 하늘의 뻔뻔한 거짓말이자 자살의 진정성을 무마하기 위해 통제하는 CCTV의 눈, 우리의 동행을 감시한다! 아, 제기랄! 우라질, 넨장맞을!
    참고로 낯선 풍경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에 나는 우울하지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내 믿음에 - 물론 그것은 쾌락이다 - 오늘도, 추하게 나를 변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