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피디부터 작가, 연출같은 모든직에 여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방송 페러다임이 변화해서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프로인 리얼리티 쇼와 육아 예능과 음식,요리,관찰 예능같은 방송이 증가하고 남자들이 주로 시청하던 다큐멘타리, 시사프로그램, 역사방송과 심지어 전통사극 같은 프로그램도 사라지는 추세죠.
@@sunnyj7819 당연히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Sunny님처럼 지성미 넘치는 분들도 계시죠 ^^ 다만 한국여성들 평균이 그렇다는거에요. 네이버 같은데 성별 가장 많이본 뉴스 순위만 봐도 남자는 경제,사회,정치,국제뉴스인데 한국여자들은 패션,날씨,연얘인뉴스 같은거만 순위에 있어여 ㅋㅋ 그리고 저도 미국 UCLA 다닐때 거기 교수님 때문에 다큐 보기 시작해 History channel 다큐들과, BBC 자연다큐, NHK 과학다큐등을 많이 봤습니다. 특히 BBC에서 만든 대자연 다큐멘터리는 진짜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처음엔 어쩌면 너무도 아름다운 이상형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룰수 없는 사랑이라 마음만 아름답게 남겼는데, 그 아름다운 마음과 순간이 한 여인에게 남아 결국 그녀로 하여금 그를 돕게했는데, 전대값을 훨씬 웃도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았다. 순수한 조선남자를 홀리는 기방 기녀의 수법일수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진심을 가누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정한 연민은 눈으로, 음성으로, 공기로 와닿는다.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련가. 사기일수도 있었던 그 순간이 진짜였고. 진심이 통했다는 것을. 내게는 뮬란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 안진경님을 보는게 오랜만이네요. 옛날 방송이었지만 다큐속에서도 빛납니다.
오늘의 다큐는 조선 중기의 (통)역관 홍순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외교의 대상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여러 북방 민족이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언어를 학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숙주처럼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한 양반 계층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외국어는 하나의 기술처럼 여겨져서 외국어를 잘 하는 역관은 주로 중인 계층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홍씨와 장씨는 역관을 많이 배출한 대표적인 중인 명문가였습니다. 국제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당시 역관은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희빈 장씨(장옥정)의 당숙인 장현도 유명한 역관이었는데, 역관 활동을 통해 쌓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장옥정을 적극 후원한 것입니다. 홍순언은 중국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중국에서 맺어진 한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가 ‘대명회전’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바꾸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군(明軍)이 참전하도록 하는 큰 공을 세웁니다. 홍순언이 과연 어떤 여인과 어떤 인연을 만들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다큐 재미있게 보시고, 전에 정리해 놓은 글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blog.naver.com/jungyoupkim/220948717721 )
망해버린 명나라의 황제를 조상하며 사대부들이 올린 제례인 만동묘보다, 왕실에서 주체해 올린 제례인 대보단이 더 문제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현대에 명군이라 호평되는 '정조 이산'조차도 임진왜란과 관련없던 명나라 태조까지 소급해 제례대상에 포함시켰고, 제례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과거 자격 박탈, 관직에 있는자는 벌을 주며 사실상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했던 것을 보면, 가히 지상 최대의 컬트 수준의 사대국가였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리고 숭의묘, 동관묘 등은 삼국지의 관우를 숭배했던 명나라 황제와 그 장수들의 의지로 조선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기피되었지만 점차 조선에서 자발적인 민간신앙이 되어 무속에서도 군신마냥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들이 딱히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이웃나라 일본에서 숭배하는 신사가 약 8만개가 넘고, 이것들 중에 한반도 도래인들을 신으로 모셨거나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 상당하며 아직까지도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숭의묘, 동관묘 등이 일본제국의 지배를 겪으며 쇠퇴한 것이 맞으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내선일체를 꾀하던 총독부에게는 저런 대륙식 관우숭배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고, 이들이 일본 조상신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조선인에게 보급하다가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국가 의례로 의무화시켰으니, 이들이 딱히 더 나았다고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과대포장되었다고 하나, 명나라의 참전과 더불어 그의 승전들이 전쟁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중국이나 일본의 평가도 대개 마찬가지입니다. 임진왜란을 중국에서는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이라 부르고, 일본측의 유명한 임진왜란 사료들 중의 하나가 '조선정벌기'인데, 이들의 기술을 봐도 이순신의 공적은 분명하고, 이순신의 옥포해전 이후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북진해서 계속 선조를 추격했지만, 원래 일본군의 계획은 수륙병진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수송로가 막혀 원군은 커녕 보급조차 육로에만 의지해야 했었고, 이 보급품을 운반할 수송부대의 수는 적고 의병들의 방해까지 받아서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고 있었으므로, 이순신의 수군의 힘이 없었다면, 명나라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조선의 패망으로 일찍 끝났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물론 그만큼 북관대첩 등을 제외하면 전쟁 초반 조선의 육군이 엉망이었다는 반증도 될 것 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의 주요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아예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의 신이고, 최고의 신관으로 꼽힌 야사카 신사의 궁사인 마유미 쓰네타다씨도 이것을 인정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하타 가문이 신라계라고 인정하는 것은 일본 교수들에게서도 보이는데, 이 가문에 의해서도 신사들이 세워졌다고 하며, 나라의 도다이지의 대불전도 신라계가 752년에 처음 세웠다고 東大寺要錄 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내적으로 일신교가 아닌 수많은 지역신앙을 가진 국가였으므로, 지방까지 합쳐 약 8만개가 넘는다는 일본 신사들 중에 숱한 한반도 도래인들이 세운 신사가 하나도 없었다고 보는 것은 더 이상할 것입니다. 그 밖에 역사 다큐멘터리들의 인터뷰를 보시면 현지 관장들이나 교수들이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세워진 신사나 사찰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제 기억에 아마 역사스페셜도 있었던듯 합니다. 그리고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이 승전한 뒤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며 적의 교통로를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것이 당시 정세를 말해주는 정론으로서 교수분들 사이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님께서 딱히 다른 좋은 연구나 사료가 있으시다면 말씀주시면 되지, 제 담당교수마냥 사료를 제시해보라는 식으로 말씀주시니 좀 의아하네요.
토론이 제 논지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데, 대보단 만동묘처럼 청황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제사와, 청나라에서조차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관우를 위한 숭의묘 동관묘는 그 의미가 다르며, 숭의묘 동관묘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유교만큼은 아니나 꽤 정치참여적이었던 불교도 한중일 동북아에서는 외국 종교였지만, 이것들이 현지에서 토착화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시는 그 허약했던 조선을 명나라군과 더불어 그만큼 지켜낸 인물 중의 하나가 이순신이니, 그럼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를 인정하는 일본측의 사료에 대해서도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님의 물음에 답을 드려보자면, '원래 일본군의 계획은 수륙병진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수송로가 막혀 원군은 커녕 보급조차 육로에만 의지해야 했었고, 이 보급품을 운반할 수송부대의 수는 적고 의병들의 방해까지 받아서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고 있었으므로...' 저 글에 오해가 있으신듯 한데,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었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군이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위치에서 더 북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지, 새로 전쟁을 시작하는냥 다시 일본에서 출발해 한반도로 재진입해 들어오기가 어려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수군의 '한반도 북쪽'으로 나아갈 길을 끊었다는 것이지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길을 완전히 끊었다는 것이 아니며, 선조가 도주했던 의주까지 일본군이 북진할 기력을 잃었다는 것이지 일본군이 일본에서 한반도로 계속 들어올 여유가 아얘 없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조선 원정군과 히데요시의 본진과의 통신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수전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조선에 계속 남아서 학살하고 노예로 끌고간 것도 맞습니다. 제 말씀은 일본군의 원 계획이었던 한양 점령을 넘어, 선조를 잡기 위한 북진군이 수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수륙병진 실패와 보급문제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문제로 인해 평양을 넘어 선조가 있는 의주까지 도달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임진•정유재란에서 저 당시의 북진이란 표현은 관련 서적들에서도 곧잘 사용되므로, 보통 제가 말씀드린대로 해석들을 하고 받아들이시지, 저 표현을 님처럼 오해하시는 경우는 처음 뵙습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한 평양성 탈환, 조선의 한산도 해전과 같은 승전으로,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로 철수해서 여러 난공불락의 왜성들을 쌓아 계속 주둔하며 양군이 장기간 대치하다가,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거의 몰락하기도 하며 임진•정유재란이 7년이나 끌은 것은 정론이므로, 당연히 단지 조선 수군의 승전 때문에 일본군이 한반도 전체에서 몰살되었거나 완전철수를 해야 할 정도로 힘을 잃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히데요시는 전황이 좋아지면 자신이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뒤따라 한반도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 일본 본토에도 여력 자체가 부족했었을리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임진•정유재란에 대한 흔한 정론일텐데요. 징비록 만이 아니라 실록, 그리고 일본측의 조선정벌기에서도 그 당시의 이런 정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반도 도래인 이전에 일본에 현지 토착민족이나 국가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등이 일본에 넘어간 것은 좀 있다며 그건 도래인이라 말씀주셨는데, 그건 정론이고 제 견해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한반도 도래인이 당시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도 아닌데, 뭔가 오해하셨는지 제가 주장한 것도 아닌 것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중국문헌들이나 DNA 분석을 가져오시는 것은 이상하고, 그 도래인들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하며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는 것인데, 일본에 무려 8백만이나 있다는 신들이나, 8만개가 넘는다는 일본 신사들 중에 도래인들이 숭배하고 세운 신사가 전혀 없었다고 보시는 것도 이상하고,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에서 그 흔한 신사 하나 짓는데 굳이 그런 사실까지 기록한 중국문헌이 있으려는지도 의문이며, 말씀드렸다시피 하타씨가 신라계라고 하는 시각은 최근 일본에서도 상당한데, 도쿄대학교수 井上光貞의 연구를 인용하자면, 교토 서북쪽은 신라 도래인인 하타 가문이 세력을 키웠고, 大和岩雄 교수도 신라에서 하타 가문이 100여 년에 걸쳐 이주해와서 그 지역의 지배층이 되었다 하며, 이 하타 가문은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며 일본 전역에 많은 신사를 세웠는데 특히 이들이 세운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전국에 3만개가 넘는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으로 대규모 신사이고, 이 신사가 하타씨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사료를 찾을 것도 없이 가보시면 관련 팜플렛을 구할 수 있습니다. 딱 부러지게 신라에서 온 도래인인 하타씨의 어느 누가 신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한 문구로 동시에 적힌 사료외에는 인정못하시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은데, 찾아보면 그런 사료가 나올수도 있겠지만, 하타씨가 신라계이고 하타씨가 신사를 세운 것이 맞으므로 저명한 학자분들도 인정하는 것인데, 님의 요구는 좀 이상하군요. 님께서는 신사 설립에 대한 제 댓글 예시에 큰 의미를 가지고 정색을 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에는 상시 거주하는 궁사가 없는 초소형의 신사도 적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신사들까지 합치면 수십 만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찾아보면 분명 중국인 도래인을 위한 신사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혹 미군을 위한 신사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신사가 너무 많아서, 토착 일본인들외의 신사 설립에 대해 사료를 제시해보라는 식은 크게 의미없는 토론인 것 같습니다. 첫 댓글에서도 그랬듯이 재차 말씀드리지만, 숭의묘와 동관묘처럼 '종교적인 관점'에서 비교해 단순히 말씀드린 것이지, 마치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일 간의 우월성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올립니다. 사료제시 요구를 좋아하시며 그것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모양인데, 물론 사료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나, 토론만이 아니라 논문에서도 다른 교수들의 기존 연구를 인용하기도 하지 그 안의 모든 내용을 자기 스스로 항상 검증하지는 않습니다. 전문가의 연구를 빌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는 일이고 인용문구를 올리면 더 효과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본인 스스로가 찾아온 사료가 더 중요하느냐 다른 전문가의 연구인용이 더 중요하느냐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사료와 권위자의 연구를 인용한 것을 놓고 서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사료를 가져와도 수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인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관련 학문의 권위자를 중심으로 많은 동의를 얻어낸 연구가 정설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고, 또한 사료가 기록될 당시의 정치적인 이유로 기록이 미화되거나 축소되지 않았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기록된 그대로 내용을 해석하는 사관은 20세기 중반에 힘을 크게 잃었으며,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며 역사를 사실의 객관적인 편집이라 보는 것을 경계한 에드워드 카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토론에서 본인이 인정하는 사료만을 가져오지 않으면 상대의 견해가 틀렸다는 식의 토론법은 의아한데, 님께서는 이순신이 과대포장되었다는 님의 주장을 어떤 사료를 가지고 오셔서 증명해내실지 의문이고, 혹 가져오신다해도 그에 대한 해석이 또 제각각일 수 있고, 다수의 권위자들의 연구와 비교해 누군지 모를 익명의 인터넷 소수의견으로 대개 여겨질 뿐이며, 저도 딱히 님과 사료 경쟁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일본서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 견해에 공감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토론이 마치 댓글놀이인냥 상대를 조롱하며 즐기시는 분인듯한데, ㅋㅋㅋ 비웃으며 기한까지 정해 사료 제시하라고 말씀하시는 분과는 토론을 지속하기도 어렵습니다. 굳이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를 나누고 공유해봐도 계속 견해가 다르면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제 토론방식인지라, 님과의 토론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모순입니다. 저는 여기 시간대가 님과 다르기도 합니다. 말씀 잘 들었고, 제가 계속 댓글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건필하시고 좋은 하루되십시요.
한국사전 프로가 조기 종영된것이 역사 재현을 하는데 비용이 무대 조명 의상등 비용이 많이 들어 1년여만에 끝이 난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드라마 형식의 인물들이 옛 무대의상을 입고 재현하는 내용이 없다면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역사책으로 읽지 티브이를 보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두 아나운서 분들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니 비용이 많이 드는 프로임은 확실합니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만력제의 교육을 맡은 스승때문임. 평생 엄청 바르고 엄하게 교육시키고 잘못하면 심하게 꾸짖었는데.. 뒤로는 온갖 나쁜짓하며 비리와 부정부패 저지르며 살아온것이 들통남 ㅋ 그래서 배신감 느낀 만력제가 빡돌아 그때부터 이전과 180도 돌변해서 폭주시작한거 ㅋㅋㅋ
책이 아니면 알수없는 굿 퀄러티영상. 이래서 유툽으로 하루보내네. 유툽이 일상을 지배할줄이야. 그나저나 그냥 측은지심은 절대 아니지 싶은데 단순한 감정으로 몇억씨 내놓는게 말이 되나? 썸이 있었거나 그녀가 고위관리직들과 가까웠다거나 그당시 역관들의 정보력으로 뭔가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키나와어가 아니라 류큐어입니다. 그 당시에 류큐왕국이 존재했었고 일본 본토와 확연히 다른 언어체계였습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방언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라는 지명은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만들고 그 번을 폐지한 다음에 메이지 유신 때 정식적으로 오키나와현으로 정하게 됩니다.
그러게요... 공중파 정극 여주로 나와도 손색이 없겠는데... 웃긴 건 배우가 이런 다큐나 서프라이즈 같은 비드라마 영역을 통해서 데뷔하게되면 그쪽 바닥사람들에게는 이른바 '재연배우'라는 낙인아닌 낙인이 찍혀서 정극 쪽 작가나 PD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답니다. 그러면서 광고모델 출신은 왜 쓰는건지... 차라리... 엑스트라 출신으로 꾀 알려진 배우는 많아도 재연배우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은 재기억엔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엔 이영상에서 얘기했던 것 처럼 양반이 역관을 천시하듯 서얼 차별은 여전합니다.
중국어 발음이 몇 분빼고는 너무 어색한 것 같아서 차라리 그냥 한국어로 대화하게 하는 형식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는데... 연기자도 편하고 시청자도 더 편하고... 뭔가 일요일 오전 서프라이즈 배우들 보는 것 같은 느낌... 거기선 그나마 아시아권은 다 한국어로 해서..
당시 명의 황제 만력제는 조선왕이 아니냐는 말이 있을 만큼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 조선을 도운건 사실입니다. 당시 명의 상태도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여서 조선을 도우는데 많은 반대가 있었지요. 조선백성이 굶주린다고하자 산동성의 쌀 백만석을 보내 구휼하기도했고. 이당시 조선을 도운다고 재정을 낭비해서 명이 망한 한 원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홍순언의 저 미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종계변무 해결의 경우는 마침 중국이 그 구절이 실린 책의 개정증보판을 낼 시점이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임란 시 파병은 순망치한의 논리로 온 것이지요 홍순언이 역관으로 활약한 것은 맞으나 저 일화는 후대 각색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June0696 퍼온 글 ----- ‘통문관지’에 기록된 홍순언의 행적을 잠깐 살펴보자. “홍순언은 중국의 통주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고자 했다. 그런데 여인이 소복 차림인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여인은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고 했고, 여인의 말을 들은 홍순언은 선뜻 300금을 내주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묻자 순언은 성만 알려주고 나왔다. 훗날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의 첩이 된 이 여인은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통문관지’ 권7)
홍순원님의 감동적인 인연이 나라에 운명에 초석이되셨네요 또한석선 같으신 분은 꼭 도와드려야 되겠네요. 한국에 잘오셨네요. 뜻깊은 인연 역사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베풀고 보상을 바라지않은 대인배 로서 모습 또 은혜를 잊지않고 갚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와도 같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보여준 역사가 있었다니교육적으로 귀감이되는 귀중한역사 인것같다!
놀랍군요 ~~!
무어라고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애가 그러한
큰 결과를 가져왔네요.
이 프로 과거에도 보았고,
계속 유익한 프로이기에
요즈음도 다시 자주 봅니다
짧은 한 순간의 선행이 역사를 그렇게 바꿔 놓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고전을 읽는 착각을 했습니다.
한국사의 대하여 좋은 영상 잠시 머물다 갑니다ᆢ파이팅ᆢ
은혜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보답하였군요.
석부인과 석대인 진정한 4단(인의예지)을 실천했군요.
홍순원 역관 마음씨가 하늘을 움직였군요.
감사 ~ 감사!!
정말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오래된 다큐지만 좋은 다큐 만들어주시고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이런좋은방송을 많이 만들어 우리민족얼을 배우는 계기가되면좋겄어요
순수의 시대였군요
감동입니다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홍순언 역사의 숨은 공로자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지금까지 살아있는 역사네요!
정말 놀라운 스토리...감사합니다.
대인배의 기개와 인품은 예나 지금이나 언젠가는 세상에 돋보이게 됩니다
남양홍씨 해주석씨 고맙습니다
노씨와 그의 8명의 아들도 천년전에 망명해온 성씨입니다
이게 1화였다니.... 오늘 처음 알았네요... 전 이 프로그램 방영 할 때 안 봐서.... 유튜브 다시보기로 통해서 보지만 이게 1화일 줄은...
위와같은 선열분들이
있으셨기에 국난을극복
했군요. 책을통해 대략
아는내용이지만.
남아의용기와 측은지심!
후인이 기억해야할 사료
인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품위있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돌아와 기쁩니다. 리얼리티쇼에 질려 수신료가 아까웠거든요
방송 피디부터 작가, 연출같은 모든직에 여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방송 페러다임이 변화해서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프로인 리얼리티 쇼와 육아 예능과 음식,요리,관찰 예능같은 방송이 증가하고
남자들이 주로 시청하던
다큐멘타리, 시사프로그램, 역사방송과 심지어 전통사극 같은 프로그램도 사라지는 추세죠.
@@June0696 전 40후반 여성인데요... 런던 살때 BBC 다큐 참 재밌게들 봤었고, 한국도 못지 않게 훌륭한 작품들 많았는데.... 런던에서 돌아와 보니 트렌드가 확 바껴 요즘 볼게 없어요..
@@June0696 아무튼 여자들이 좀 시시콜콜한 얘기 좋아하는 건 맞지만 ,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진 않아요. 제 주변엔 제 취향을 가진 여성분들도 많아요
@@sunnyj7819
당연히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Sunny님처럼 지성미 넘치는 분들도 계시죠 ^^
다만 한국여성들 평균이 그렇다는거에요.
네이버 같은데 성별 가장 많이본 뉴스 순위만 봐도
남자는 경제,사회,정치,국제뉴스인데 한국여자들은 패션,날씨,연얘인뉴스 같은거만 순위에 있어여 ㅋㅋ
그리고 저도 미국 UCLA 다닐때 거기 교수님 때문에 다큐 보기 시작해 History channel 다큐들과, BBC 자연다큐, NHK 과학다큐등을 많이 봤습니다.
특히 BBC에서 만든 대자연 다큐멘터리는 진짜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이렇게 기묘한 인연이 있을수가!
흥미롭네요... 👍🏻
해주 석씨의 장손으로써 감사하고 재밌네요 ㅎㅎ 돌아가신 할아버님 뵐수 있는 영상이라 댓글 남겨요
이 다큐를 보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기다렸어요.
안진경 (베이비복스 리브)이 명나라 여인으로 출연해서 정말 좋아해요.
진경 아 ~, 너를 사랑해...너도 보고 싶어요.
처음엔 어쩌면 너무도 아름다운 이상형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돕고자 했다. 그러나 이룰수 없는 사랑이라 마음만 아름답게 남겼는데, 그 아름다운 마음과 순간이 한 여인에게 남아 결국 그녀로 하여금 그를 돕게했는데, 전대값을 훨씬 웃도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았다. 순수한 조선남자를 홀리는 기방 기녀의 수법일수도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진심을 가누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정한 연민은 눈으로, 음성으로, 공기로 와닿는다.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련가. 사기일수도 있었던 그 순간이 진짜였고. 진심이 통했다는 것을. 내게는 뮬란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 안진경님을 보는게 오랜만이네요. 옛날 방송이었지만 다큐속에서도 빛납니다.
석성의 부인으로 나온 탤런트 참 '순수'해 보이는 마스크네요.
섭외를 잘 했군요^^
불멸의 이순신에서 충무공 장군의 부인으로 나온 '최유정'씨도 참한 마스크였는데, 결혼해서 잘 사시겠지요?
마지막 작품이 '불멸의 이순신'이라 '공덕'이 큰 분일 거라 여겨집니다 ^^
그냥 지어낸 스토리인데 이걸 진짜로 믿네 ㅋㅋㅋㅋ
이건 그냥 야사에만 전해져오는 설임 ㅋㅋ
종계변무는 개정증보판 때문에 된거고
임란파병은 순망치한 논리로 이루어진거임.
저 스토리는 일종의
조선시대 판타지 픽션임 ㅋㅋㅋㅋ
@@June0696 순망치한...ㅋㅋㅋ..명사 만력제가 당시 어떻게 결정했는지 보고 애기해..교과서가 배워준대로가 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패스..
오늘의 다큐는 조선 중기의 (통)역관 홍순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외교의 대상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여러 북방 민족이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언어를 학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숙주처럼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한 양반 계층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외국어는 하나의 기술처럼 여겨져서 외국어를 잘 하는 역관은 주로 중인 계층의 몫이었습니다. 특히 홍씨와 장씨는 역관을 많이 배출한 대표적인 중인 명문가였습니다.
국제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당시 역관은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희빈 장씨(장옥정)의 당숙인 장현도 유명한 역관이었는데, 역관 활동을 통해 쌓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장옥정을 적극 후원한 것입니다.
홍순언은 중국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중국에서 맺어진 한 여인과의 인연을 통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가계(家系)가 ‘대명회전’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바꾸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군(明軍)이 참전하도록 하는 큰 공을 세웁니다. 홍순언이 과연 어떤 여인과 어떤 인연을 만들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다큐 재미있게 보시고, 전에 정리해 놓은 글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blog.naver.com/jungyoupkim/220948717721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라고 한국말을 할줄 아는 왜놈이 짖었다
망해버린 명나라의 황제를 조상하며 사대부들이 올린 제례인 만동묘보다, 왕실에서 주체해 올린 제례인 대보단이 더 문제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현대에 명군이라 호평되는 '정조 이산'조차도 임진왜란과 관련없던 명나라 태조까지 소급해 제례대상에 포함시켰고,
제례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과거 자격 박탈, 관직에 있는자는 벌을 주며 사실상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시행했던 것을 보면, 가히 지상 최대의 컬트 수준의 사대국가였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리고 숭의묘, 동관묘 등은 삼국지의 관우를 숭배했던 명나라 황제와 그 장수들의 의지로 조선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기피되었지만 점차 조선에서 자발적인 민간신앙이 되어 무속에서도 군신마냥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므로,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들이 딱히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이웃나라 일본에서 숭배하는 신사가 약 8만개가 넘고, 이것들 중에 한반도 도래인들을 신으로 모셨거나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 상당하며 아직까지도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숭의묘, 동관묘 등이 일본제국의 지배를 겪으며 쇠퇴한 것이 맞으나, 일본인과 조선인의 내선일체를 꾀하던 총독부에게는 저런 대륙식 관우숭배가 달갑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고, 이들이 일본 조상신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조선인에게 보급하다가 단순한 종교 의례를 넘어 국가 의례로 의무화시켰으니, 이들이 딱히 더 나았다고 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과대포장되었다고 하나, 명나라의 참전과 더불어 그의 승전들이 전쟁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중국이나 일본의 평가도 대개 마찬가지입니다.
임진왜란을 중국에서는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戰爭)'이라 부르고, 일본측의 유명한 임진왜란 사료들 중의 하나가 '조선정벌기'인데, 이들의 기술을 봐도 이순신의 공적은 분명하고,
이순신의 옥포해전 이후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북진해서 계속 선조를 추격했지만, 원래 일본군의 계획은 수륙병진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수송로가 막혀 원군은 커녕 보급조차 육로에만 의지해야 했었고, 이 보급품을 운반할 수송부대의 수는 적고 의병들의 방해까지 받아서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고 있었으므로,
이순신의 수군의 힘이 없었다면, 명나라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도 전에 전쟁이 조선의 패망으로 일찍 끝났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물론 그만큼 북관대첩 등을 제외하면 전쟁 초반 조선의 육군이 엉망이었다는 반증도 될 것 입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의 주요 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아예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의 신이고, 최고의 신관으로 꼽힌 야사카 신사의 궁사인 마유미 쓰네타다씨도 이것을 인정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하타 가문이 신라계라고 인정하는 것은 일본 교수들에게서도 보이는데, 이 가문에 의해서도 신사들이 세워졌다고 하며,
나라의 도다이지의 대불전도 신라계가 752년에 처음 세웠다고 東大寺要錄 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은 내적으로 일신교가 아닌 수많은 지역신앙을 가진 국가였으므로, 지방까지 합쳐 약 8만개가 넘는다는 일본 신사들 중에 숱한 한반도 도래인들이 세운 신사가 하나도 없었다고 보는 것은 더 이상할 것입니다.
그 밖에 역사 다큐멘터리들의 인터뷰를 보시면 현지 관장들이나 교수들이 한반도 도래인들에 의해 세워진 신사나 사찰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제 기억에 아마 역사스페셜도 있었던듯 합니다.
그리고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이 승전한 뒤 삼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머물며 적의 교통로를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것이 당시 정세를 말해주는 정론으로서 교수분들 사이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님께서 딱히 다른 좋은 연구나 사료가 있으시다면 말씀주시면 되지, 제 담당교수마냥 사료를 제시해보라는 식으로 말씀주시니 좀 의아하네요.
토론이 제 논지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데,
대보단 만동묘처럼 청황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제사와, 청나라에서조차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관우를 위한 숭의묘 동관묘는 그 의미가 다르며, 숭의묘 동관묘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유교만큼은 아니나 꽤 정치참여적이었던 불교도 한중일 동북아에서는 외국 종교였지만, 이것들이 현지에서 토착화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님께서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시는 그 허약했던 조선을 명나라군과 더불어 그만큼 지켜낸 인물 중의 하나가 이순신이니, 그럼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를 인정하는 일본측의 사료에 대해서도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님의 물음에 답을 드려보자면,
'원래 일본군의 계획은 수륙병진이었음에도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수송로가 막혀 원군은 커녕 보급조차 육로에만 의지해야 했었고, 이 보급품을 운반할 수송부대의 수는 적고 의병들의 방해까지 받아서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고 있었으므로...'
저 글에 오해가 있으신듯 한데,
'그 이상 북진할' 기력을 잃었다는 것은 당연히 일본군이 당시 한반도에 들어와 있던 위치에서 더 북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지, 새로 전쟁을 시작하는냥 다시 일본에서 출발해 한반도로 재진입해 들어오기가 어려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수군의 '한반도 북쪽'으로 나아갈 길을 끊었다는 것이지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길을 완전히 끊었다는 것이 아니며, 선조가 도주했던 의주까지 일본군이 북진할 기력을 잃었다는 것이지 일본군이 일본에서 한반도로 계속 들어올 여유가 아얘 없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조선 원정군과 히데요시의 본진과의 통신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수전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조선에 계속 남아서 학살하고 노예로 끌고간 것도 맞습니다.
제 말씀은 일본군의 원 계획이었던 한양 점령을 넘어, 선조를 잡기 위한 북진군이 수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수륙병진 실패와 보급문제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문제로 인해 평양을 넘어 선조가 있는 의주까지 도달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임진•정유재란에서 저 당시의 북진이란 표현은 관련 서적들에서도 곧잘 사용되므로, 보통 제가 말씀드린대로 해석들을 하고 받아들이시지, 저 표현을 님처럼 오해하시는 경우는 처음 뵙습니다.
명나라의 참전으로 인한 평양성 탈환, 조선의 한산도 해전과 같은 승전으로,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로 철수해서 여러 난공불락의 왜성들을 쌓아 계속 주둔하며 양군이 장기간 대치하다가,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거의 몰락하기도 하며 임진•정유재란이 7년이나 끌은 것은 정론이므로, 당연히 단지 조선 수군의 승전 때문에 일본군이 한반도 전체에서 몰살되었거나 완전철수를 해야 할 정도로 힘을 잃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히데요시는 전황이 좋아지면 자신이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뒤따라 한반도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 일본 본토에도 여력 자체가 부족했었을리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제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임진•정유재란에 대한 흔한 정론일텐데요.
징비록 만이 아니라 실록, 그리고 일본측의 조선정벌기에서도 그 당시의 이런 정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반도 도래인 이전에 일본에 현지 토착민족이나 국가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신라계, 백제계, 고구려계 등이 일본에 넘어간 것은 좀 있다며 그건 도래인이라 말씀주셨는데, 그건 정론이고 제 견해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한반도 도래인이 당시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도 아닌데, 뭔가 오해하셨는지 제가 주장한 것도 아닌 것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중국문헌들이나 DNA 분석을 가져오시는 것은 이상하고,
그 도래인들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하며 신사를 세우기도 했다는 것인데, 일본에 무려 8백만이나 있다는 신들이나, 8만개가 넘는다는 일본 신사들 중에 도래인들이 숭배하고 세운 신사가 전혀 없었다고 보시는 것도 이상하고, 한반도 도래인이 일본에서 그 흔한 신사 하나 짓는데 굳이 그런 사실까지 기록한 중국문헌이 있으려는지도 의문이며,
말씀드렸다시피 하타씨가 신라계라고 하는 시각은 최근 일본에서도 상당한데, 도쿄대학교수 井上光貞의 연구를 인용하자면, 교토 서북쪽은 신라 도래인인 하타 가문이 세력을 키웠고, 大和岩雄 교수도 신라에서 하타 가문이 100여 년에 걸쳐 이주해와서 그 지역의 지배층이 되었다 하며,
이 하타 가문은 자신들의 조상을 기리며 일본 전역에 많은 신사를 세웠는데 특히 이들이 세운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전국에 3만개가 넘는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으로 대규모 신사이고, 이 신사가 하타씨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사료를 찾을 것도 없이 가보시면 관련 팜플렛을 구할 수 있습니다.
딱 부러지게 신라에서 온 도래인인 하타씨의 어느 누가 신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한 문구로 동시에 적힌 사료외에는 인정못하시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은데,
찾아보면 그런 사료가 나올수도 있겠지만, 하타씨가 신라계이고 하타씨가 신사를 세운 것이 맞으므로 저명한 학자분들도 인정하는 것인데, 님의 요구는 좀 이상하군요.
님께서는 신사 설립에 대한 제 댓글 예시에 큰 의미를 가지고 정색을 하시는 것 같은데, 일본에는 상시 거주하는 궁사가 없는 초소형의 신사도 적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신사들까지 합치면 수십 만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찾아보면 분명 중국인 도래인을 위한 신사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혹 미군을 위한 신사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신사가 너무 많아서, 토착 일본인들외의 신사 설립에 대해 사료를 제시해보라는 식은 크게 의미없는 토론인 것 같습니다.
첫 댓글에서도 그랬듯이 재차 말씀드리지만, 숭의묘와 동관묘처럼 '종교적인 관점'에서 비교해 단순히 말씀드린 것이지, 마치 정치적인 관점에서 한일 간의 우월성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올립니다.
사료제시 요구를 좋아하시며 그것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모양인데, 물론 사료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나, 토론만이 아니라 논문에서도 다른 교수들의 기존 연구를 인용하기도 하지 그 안의 모든 내용을 자기 스스로 항상 검증하지는 않습니다.
전문가의 연구를 빌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는 일이고 인용문구를 올리면 더 효과적이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본인 스스로가 찾아온 사료가 더 중요하느냐 다른 전문가의 연구인용이 더 중요하느냐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사료와 권위자의 연구를 인용한 것을 놓고 서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사료를 가져와도 수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것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인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관련 학문의 권위자를 중심으로 많은 동의를 얻어낸 연구가 정설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고,
또한 사료가 기록될 당시의 정치적인 이유로 기록이 미화되거나 축소되지 않았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기록된 그대로 내용을 해석하는 사관은 20세기 중반에 힘을 크게 잃었으며,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며 역사를 사실의 객관적인 편집이라 보는 것을 경계한 에드워드 카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토론에서 본인이 인정하는 사료만을 가져오지 않으면 상대의 견해가 틀렸다는 식의 토론법은 의아한데, 님께서는 이순신이 과대포장되었다는 님의 주장을 어떤 사료를 가지고 오셔서 증명해내실지 의문이고,
혹 가져오신다해도 그에 대한 해석이 또 제각각일 수 있고, 다수의 권위자들의 연구와 비교해 누군지 모를 익명의 인터넷 소수의견으로 대개 여겨질 뿐이며, 저도 딱히 님과 사료 경쟁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일본서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 견해에 공감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토론이 마치 댓글놀이인냥 상대를 조롱하며 즐기시는 분인듯한데, ㅋㅋㅋ 비웃으며 기한까지 정해 사료 제시하라고 말씀하시는 분과는 토론을 지속하기도 어렵습니다.
굳이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견해를 나누고 공유해봐도 계속 견해가 다르면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제 토론방식인지라, 님과의 토론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모순입니다. 저는 여기 시간대가 님과 다르기도 합니다.
말씀 잘 들었고, 제가 계속 댓글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건필하시고 좋은 하루되십시요.
맞습니다 아름다운 고전을 읽는 것 같습니다
영화로 만들면 정말 재밌을듯하네요.
값진 인연. 소설 같은 인연.
갑자기 임상옥이 생각납니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라는 홍득주 어르신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현재와 이어져 있다.
서렌은 반복되고, 패배와 이어져 있다
우와 여운이 남는다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다.
문득 천녀유혼이 생각나네
사람이라는것이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조금 어리숙하다 해서 괴롭히거나 해서는 안된다
특히 자라라는 청소년에게 학폭을 왜 하면 안되는가에 대한 좋은 내용인것 같다
역사저널 이분들이 다시진행햇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누가
진행하는데요?
@@HyonCPak 역사저널 그날로 바뀌어서 아나운서랑패널들이 나와서 토크형식으로 진행해요
@@-hope777
답장 감사해요.
저도 두분 아나운서
가 진행하는 프로만
즐겨 봅니다.
@@HyonCPak 난세에는 영웅이 나온다
영문 때를 만든다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이라고 적힌 대명회전을 200년만에 고쳐준 당시 예부상서(외교부차관) 석성, 임란때에는 병부상서(국방부장관)까지 올라 신하들 다 반대하는 상황에 만력제에게 조선원군요청까지 하게 하다니.... 이런 영화 같은 역사가 있긴 하군요..
작은것이 모여 큰것을 이루는군요
역사만큼 재밌는 드라마가 없는듯
한국사전 1화네요^^
이거 드라마 상도에서 그대로 나온 스토리네요ㅎ
서프라이즈 tv에 한번 나왔던...
이재롱김현주 주연인 상도에서도 이런비슷한 장면이 나오더군요 임상옥과 중국기생의 인연
mbc드라마 상도.. 임상옥이 청나라 기방에서 미령을 구해주는 신이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군요...
저때 허준이순인만알았는데 홍성언이란 분도 계셨군요
📰구독 👍좋아요 ⏰알람 ...... 👌오케이. (^^) (__)(^^) 영상 잘보고 가요
한국사전 프로가 조기 종영된것이 역사 재현을 하는데 비용이 무대 조명 의상등 비용이 많이 들어 1년여만에 끝이 난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드라마 형식의 인물들이 옛 무대의상을 입고
재현하는 내용이 없다면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차라리 역사책으로 읽지 티브이를 보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두 아나운서 분들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니 비용이 많이 드는 프로임은 확실합니다.
모른 척 하며 뒤로 자기 이익을 계산하고 앞으로는 점잖은 척하는 하는 중국의 모습은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군요. 그걸 알면서 매달리고 기대는 우리 태도를 더 탓해야 하는건지...ㅠ
중국....싫지만...그래도 좋은사람들 많아서. 만약 싫지만도 않은...
인구가 많아서 인명경시 풍조도 있지만 옜부터 의리을 굉장히 중시 하는 민족인건 확실함 ㅎㅎ
만력본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당시 만력제 치하인듯? 이 황제가 중국 역사 속에서도 최고로 X이란 소리를 듣던 황제.... 그런데 신하들이 말하는 거 반대로 하는 사람이라, 정작 임진왜란 때 파병하고 지원해서 우리나라에겐 은인임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만력제의 교육을 맡은 스승때문임.
평생 엄청 바르고 엄하게 교육시키고 잘못하면 심하게 꾸짖었는데..
뒤로는 온갖 나쁜짓하며 비리와 부정부패 저지르며 살아온것이 들통남 ㅋ
그래서 배신감 느낀 만력제가 빡돌아 그때부터 이전과 180도 돌변해서 폭주시작한거 ㅋㅋㅋ
스승에 감정이 상했지만 중2로 모는것은 왜곡임.
책이 아니면 알수없는 굿 퀄러티영상. 이래서 유툽으로 하루보내네. 유툽이 일상을 지배할줄이야. 그나저나 그냥 측은지심은 절대 아니지 싶은데 단순한 감정으로 몇억씨 내놓는게 말이 되나? 썸이 있었거나 그녀가 고위관리직들과 가까웠다거나 그당시 역관들의 정보력으로 뭔가 있지 않았을까.
역사저널 그날 포맷도 시간대비 더 깊이있는 내용을 전할수있는 이런 포맷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현행은 너무 초심자 토론 예능식인데 재미도 없고 가볍다
그리고 오키나와어가 아니라 류큐어입니다. 그 당시에 류큐왕국이 존재했었고 일본 본토와 확연히 다른 언어체계였습니다. 지금도 오키나와 방언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라는 지명은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만들고 그 번을 폐지한 다음에 메이지 유신 때 정식적으로 오키나와현으로 정하게 됩니다.
해주석씨 기억 하겠습니다.
좋은 품성이
사람을 구하고
나라를 구한다.
ㅡ 진보당 당원
나태영
어째 이거 임상옥 이야기랑 흡사하다
축구 선수 석현준
이거 한 5년 후 이준익 감독이 영화화할 듯
공감!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
석씨 만나면 감사해야겠어요
1등 2007년쯤 실제 본방사수했었음
명의 잘못된 기록이 아니라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두 사람이 실수로 고려 왕족 이인임 으로 알려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긴 인연이네요.
그런 사상이 대를 이어 국민의 DNA가 되었으니 피부색이 나보다 진한 외국인을 멸시하는게 이상할게 없지. 반성해야한다.
정적이 아버지가 되다니 그것도 남의 나라 법률책에 말이죠.
상도에서 이걸 차용했구만!!
맞네요 나도 이걸보고 드라마 상ㄷ가 제일먼저 생각나데요
역관 홍순언* 큰일을 해내다
여자배우 엄청 이쁘네
그러게요... 공중파 정극 여주로 나와도 손색이 없겠는데... 웃긴 건 배우가 이런 다큐나 서프라이즈 같은 비드라마 영역을 통해서 데뷔하게되면 그쪽 바닥사람들에게는 이른바 '재연배우'라는 낙인아닌 낙인이 찍혀서 정극 쪽 작가나 PD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답니다. 그러면서 광고모델 출신은 왜 쓰는건지... 차라리... 엑스트라 출신으로 꾀 알려진 배우는 많아도 재연배우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은 재기억엔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직도 한국엔 이영상에서 얘기했던 것 처럼 양반이 역관을 천시하듯 서얼 차별은 여전합니다.
국민 세금 수 억을 해 먹은 외교관은 종신형을 받았구나 명나라의 녹을 먹으며 조선을 위해 일한 석성도 옥에서 죽었구나.결과는 아름다운데 과정은 쫌…
한상권 아나운서 멋진 목소리 빛납니다. 그런데 옥의티 자켓 아랫단추 하나는 풀러놓는것이 코디가 해주는것인데. 좀 촌스러움
중국인들자기 잘못 인정 안하는건 역사적인거구나
왜구만 할까?
긍정의 이야기 속에서 부정의 찌꺼기만 골라 내는 당신...
역시 1억정도는 써야 ㅋㅋㅋ
이것이 진실이요?그래서 석성이 파병을 주장???
성호사설에서도 임진왜란 일등공신을 석성 이등이 이순신 삼등이 이여송이라고 평가했음
아니 와.. 귀를 의심했다. 또 선조라고? 선조 이 발암새끼 부하 복 타고난 거 보소? 이순신 질투하고 괴롭힌 건 용서불가인데 부하 복 많은 것도 재능 같네 이젠. 군왕으로선 붕신인데 부하 복이 어벤져스네ㄷㄷ
아니, 미친 시키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순신은 세계해전사 레전드 압승 거두고 류성룡은 전쟁정리 기록 남기고 웬 통역관 하나는 알아서 선행 베풀어서 200년 동안 역대 선왕들이 못 해낸 족보수정의 영광을 안겨 줌. 미친 부하 복이다ㄷㄷ
중국어 발음이 몇 분빼고는 너무 어색한 것 같아서 차라리 그냥 한국어로 대화하게 하는 형식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는데... 연기자도 편하고 시청자도 더 편하고... 뭔가 일요일 오전 서프라이즈 배우들 보는 것 같은 느낌... 거기선 그나마 아시아권은 다 한국어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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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여자의 옷은 틀린다. 시녀의 옷도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옷이다 .보은 여자의 헤어스타일도 고려 여자의 스타일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역사 드라마다 , 잘 보겠습니다.
명나라가 일본임진왜란 막다가 망했져요
정말 듣기 거북한 소리로군
명나라가 파병하지 않았으면
조선이 왜군에 멸망했다는
얘긴데~
사실 명의 군대가 딴지나 걸고
불평이나 하고
왜군과 비일협상이나 했지
조선에 도움된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런 말같지도 않은 소리
안했으면 좋겠다
조선이 아닌 조선왕조를 구했다로 이해하시게요.
근데 명나라군의 만행의 근원도 조선의 화폐 사용거부 에서 비롯됨. 명나라군이 물자구입을 위해 은괴를 줘도 받지않자 약탈 한거임.
고구려 백제 중국사들- 전라왜국임나 일본사 이순신 장군이 도망자에 과장? 니놈 이름부터 알아봤다. ㅉㅉㅉ
고구려 백제 중국사들- 전라왜국임나 일본사 예 런조의 후손 런승만.
당시 명의 황제 만력제는 조선왕이 아니냐는 말이 있을
만큼 엄청난 거금을 들여서 조선을 도운건 사실입니다.
당시 명의 상태도 굉장히 좋지
않은 상태여서 조선을 도우는데
많은 반대가 있었지요.
조선백성이 굶주린다고하자
산동성의 쌀 백만석을 보내
구휼하기도했고.
이당시 조선을 도운다고 재정을
낭비해서 명이 망한 한 원인이
됐습니다.
중국어 개못하네 륙남이형~
그런데 홍순언의 저 미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종계변무 해결의 경우는 마침 중국이 그 구절이 실린 책의 개정증보판을 낼 시점이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임란 시 파병은 순망치한의 논리로 온 것이지요
홍순언이 역관으로 활약한 것은 맞으나 저 일화는 후대 각색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통문관지라는 공식적인 책에 기록된 것인데 믿지 말아야 하나요?
@@June0696 그런 내용이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지 않나요?
@@June0696 3:16 지점에 자세하게 나오는데요
@@June0696
3:16
연경에 가다가 통주에 이르러 밤에 기생집에 놀러가서...
보지도 않고 주장부터 하고 욕부터 하세요?
@@June0696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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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관지’에 기록된 홍순언의 행적을 잠깐 살펴보자.
“홍순언은 중국의 통주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하룻밤 인연을 맺고자 했다. 그런데 여인이 소복 차림인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여인은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고 했고, 여인의 말을 들은 홍순언은 선뜻 300금을 내주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여인이 이름을 묻자 순언은 성만 알려주고 나왔다. 훗날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의 첩이 된 이 여인은 홍순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통문관지’ 권7)
18:57 이상하다... 내가 아는 짱깨여자들은 모두 지삐모르던데....
임진왜란이 승리래ㅋㅋ
조선시대국가을위해봉사하신홍대감님의명복을빕니다빨갱이문가의역관출신외무장관허당도잊엊지만조선시대역관은위대했구나
아니이럴수가?... 아무리딱한처지라도,어떻게처음보는여자에게,억대에가까운돈을줄수있단말인가?... 제정신인가?...
역사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