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철쇄설을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동영상 만드신 분에 대한 공격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조차도 철쇄설을 내세울 정도로 명량해전 승리는 도대체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나의 가설에 대한 논리적 근거 부족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마치 무조건 거짓말인것 처럼 그리고 동영상 만드신 분이 허위 사실을 뻐뜨리는 것처럼 공격은 하지마세요. 제목 자체가 철쇄"설" 이라고 해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라 그랬는데, 명량해전 승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가 있긴 한가요? 철쇄설을 부정하고 싶으시면 님들이 더 정확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동영상 제작자가 무슨 학술대회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참.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한 어느 누구도 정확한 사실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하나의 가설에 대해서는 거품물고 달려드는 모습이 안타깝네요.
ruclips.net/video/i72cZ-53u7o/видео.html 37분에 일본기록과 난중일기에 철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되어 있네요. 그 당시 왜구를 막기위해 수중 장애물을 많이 사용 했다고 되어 있네요. 딱 그걸로 뭘 했다고 하진 않지만 언급은 많이 되었네요.
철쇄설은 설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조류 때, 녹진에서 우수영 쪽으로 중간 중간 쇠고리로 연결한 밧줄을 흘려보내고, 다시 연결해서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수백미터를 흘려보내지요. 철쇄 끝이 우수영에 닿지는 않지만, 조류 흐름으로 철쇄는 사선으로 우수영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정조기가 되면 물살이 약하기 때문에 판옥선으로 철쇄 끝을 우수영 쪽에 있는 목책으로 끌어와 결박합니다. 지금 진도대교처럼 직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연결해서 조류의 영향을 피할 수 있었고, 중간에 고리 역할을 하는 쇠고리가 밧줄을 수면 아래로 잠기게 했기 때문에 적의 눈에 띄지 않은 것입니다.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은 일본 전서에도 있고, 철쇄도 등장합니다. 위 영상에서는 직선으로 철쇄를 건 것으로 나오지만, 사선으로 걸었던 게 맞습니다. 철쇄가 없었다면, 12척으로 133척, 그것도 조류를 타고 달려오는 왜선들을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왜군들 입장에서는 울돌목만 지나가면 끝나는 건데, 숫적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있는 거죠.
약간의 공학적 지식만 있어도... 300여 미터, 시속 20km의 물 속에 그 당시 기술로 체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또 떠내려 가는 선박들을 잡아줄 정도이면 엄청난 강도/크기의 체인과 고정점이 필요합니다. 계산해 볼 필요까지 없습니다. 논쟁이 많은데 공학자들이 조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팩트 체크는 좀 하고 말을 하던가. 울돌목에서 물이 돌고 물살이 가장 거세고 좁은곳의 넓이가 293미터임. 300미터도 안됨. 몇km는 대체 어디서 가져온 판타지냐? 실제로 그정도 넓이면 철쇄설이 나오고도 남겠더라. 그리고 철쇄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쇠사슬 형태가 아니라 철사를 꼬아서 만든 형태일 거라더라. 뇌피셜로 떠들지 말고 좀 알고 떠들자.
@@보노보노-r5h 한국 수역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곳이 울돌목(명량)입니다. 쇠사슬이든 철사든 배가 지나가는 것을 방해하려면 튼튼하고 굵게 만들 수 밖에 없죠. 유속이 15 ~ 20 km/h가 되는 지역에서 무거운 배들이 지나가다가 부딪친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충격력을 견딘다는 걸 감안해야죠. 만약, 쇠사슬이든 철사로 뭔가를 만들었는데 왜 난중일기에 남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자료에 남았을 테고 훗날 일본도 정보를 입수해서 어딘가 기록했겠죠. 기록에 살고 기록에 죽는 일본인들이니까요. 그런 장비를 울돌목 물 속에 숨기고 있었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김억추의 현무공실기 기록은 현무공 김억추가 쇠사슬 달린 갈쿠리 같은거 던져서 왜군 군함들 부셨다는 소리인데. 과장적인 문체 때문에 ㅋㅋ 소설이야 그거로 평가절하되긴 하지만 당시의 유교 문학적 표현으로 볼 때 어떤 전공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단 뭔가 시적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음. 그런거 하나 하나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거임. '택리지'에는 이순신이 명량에서 철쇄 걸어서 왜선들 수백척 자빠뜨렸다고 나옴. 물론! 택리지는 전설급 얘기를 적은거긴 하지만 이런거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음. 택리지를 자세히 보면 이 때 철쇄를 걸은 곳을 바다 한복판에 있는 '돌 다리'라고 적고있음. 뭔가 얕은 여울이 있지만 엄연히 바다인 곳을 의미함. 그니까 이런거 진짜 쌩까지말고 유심히 봐야함. 이순신이 대단하니 이겼겠지~로 그냥 넘어가면 안됨. 분명 난중일기나 일본군 기록이나 여러 기록으로 보건대 구루지마 수군 30척이 전부 꼬로록 하는데도 뒤의 일본배 100척이 뒤에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건 말이 안됨. 물론 명량해협이 좁아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난중일기를 보면, 일본수군 133척은 이미 명량해협을 돌파해서 전라 우수영 해변가에 있던 이순신의 판옥선 12척을 '포위'함. 포위했으면 이미 진건데. 어떻게 이길 수 있는건지도 의아하고 왜선 133척이 왜 한번에 돌격하지않았는지도 의아함. 이런걸 보면 결국 철쇄설을 점점 믿고싶게끔 만드는건데. 문제는 왜선 133척은 이미 명량해협을 돌파했다는거임. 근데 지금의 지형으로 보면 도대체 어디에 돌다리가 있다는건지 알 수가 없음. 결국 해수면이 높아져서 그 시절 지형이 사라진거임. 그럼 결국 조선시대 옛 지도를 보며 살펴봐야함. 다행히도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전라우수영 옛 지도가 있음!
댓글들보니 무슨말씀하시는지도 알겟고 학계에서 정설로 치지못한다는 부분도 알고잇고 개인적으론 과연 가능한지 아닌지 수학적인 계산도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긴하는데요. 단지 그냥 그게 말이되냐 따위식의 본인들 생각만 써놓을거면 댓글달지마세요 존나 단순해 보이니까요. 참고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과거 KBS역사스페셜에서 이부분을 다룬적이 잇엇어요. 몇십년전 진도대교가 세워지기전엔 실제로 양쪽 육지에 임난당시 쇠사슬을 걸엇다고하는 고리가 실제로 존재햇다는 주민들 증언도 방송에 나왓구요. 그곳 나이많은 주민들에겐 그것이 임진왜란당시 그 쇄사슬을 걸엇다고 하는 고리라는게 구전으로 전해오던 팩트라고 여겨지는거 같더군요. 지금이야 미신도 구전동화도 없지만 과거 몇십년전만해도 각 지역엔 몇십몇백년을 거쳐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잇엇지요. 그런것들로 지명이 유래하기도하고 가문이 이어지기도하고 사건이 잇다면 사서와 구전이 동시에 동시대의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존재하기도 햇죠. 역사스페셜이라는 프로 역시 프로그램을 제작할때 하는 인터뷰어들이 대부분 공신력이 잇는것은 둘째치고 그분야 최고의 교수들이셧죠. 개인적으로 공중파에서 송출하는, 그런 신뢰가는 사람들의 자문으로 제작하는 방송에서 나왓던 이야기라고 한다면 아무 증거없이 본인 상상력으로만 그게 말이되냐라는 식의 한심한 반박보단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제말이 틀린가요.
말하는거 보니 살수대첩 뚝막았다가 터뜨려서 한방에 쓸어버린 것도 믿을사람일세 ㅋㅋ 명량 쇠사슬은 허구란게 밝혀진지가 언젠데 무슨 역사스페셜 드립이야... 육지 고리는 그용도가 아니고 젤 중요한 난중일기에는 쇠사슬 이용은 전혀 언급도 없음.. 설화나 야사에 나오는 자료를 더 믿는건 뭐지 대체...
당대의 자료중에는 철쇄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징비록 심지어는 이순신의 승전 장계에서도 철쇄는 단 헌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철쇄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에서 수백년 지난 1700년대 그리고 근대인 1900년대가 되서야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현무공실기는 거의 판타지 소설에 가깝습니다. 김억추가 스스로 철쇄 쇠사슬을 들어 옮겼다는 언급이나 관운장의 꿈을 꾸고 전투시에 활로 왜 장수 마다시를 쏴죽였다는 언급은 볼수록 기가 찰 뿐입니다. 이게 김억추의 후손이 쓴, 철쇄의 언급이 되어있는 현무공실기의 내용입니다. 실제 명량대첩에서 김억추는 끝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겁을 먹고 맨 뒤에 있었다는 걸 잘 알고계실텐데요. 결국 그는 전후 보직변경으로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동합니다. 그저 김억추를 미화하고 충무공의 공적을 깍아내리려는 김억추의 후손이 쓴 거짓글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런 기록은 신빙성이 1도 없습니다. 1751년의 택리지에는 충무공이 철쇄를 걸어 기다리니 왜선 500척이 알아서 도미노처럼 좌초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거의 소설에 가깝죠. 충무공이 전투 한번 안하고 오로지 철쇄의 힘에 의지해 무려 500척의 왜선을 침몰시켰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 덧붙여졌지만 나름 기록과 문헌에 근거해서 적어보았습니다.
@@TV-mh5ph 철쇄설 나온게 김억추가 썰 풀어서 나온건데, 김억추 배는 배들 중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서 전투가 보이지도 않았다죠. 철쇄를 사용했다는 개소리 하는 것도 자기가 전투에 참여했다고 어필하려고 썰푸는 거고. 개씹하남자 김억추... 그리고 철쇄를 걸 정도면 엄청난 양의 철이 필요했을 텐데 칠천량 패전하고 물자도 없는데 철을 철쇄 만드는데 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전략을 이순신 장군님이 난중일기에 적지 않는다?
@@이계절-g9r 맞아요. 일본 군함들이 작은배가 아닙니다. 사람이 200명 정도 타고 있었고 무기와 식량도 실려 있었구요. 그런 배가 돌진을 해오면 쇠사슬로 막아봐야 금방 끊어져 버리죠. 더군다나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를 하고 2개월 뒤에 명랑해전이 벌어지는데 2개월만에 무슨수로 철쇄를 ?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오.. 일단 유튜버님이 "철쇄설"이란 가설로 영상을 제작하셨는데, 실제로도 철쇄는 허구 입니다.. 명량해전에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은 영상에도 잠깐 등장하는 김억추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명량해전 당시 김억추는 이순신장군의 기함이 선두에서 왜적을 맞아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때, 조선함대 13척 중에 이순신장군의 기함에서 약 300~400미터 떨어진 맨~~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졸장중에 졸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철쇄의 유.무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혹 철쇄가 있었다면 맨 뒤에서 꽁무니나 빼고 있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철쇄설은 김억추가 지어낸 허구 입니다..
겁이 많다고 거짓을 썼다고 하는건 억측인듯하네요. 용감하면 진실하다는걸까요?? 허황된 예수 얘기는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 역사를 자기에 맞게 해석하고 그 근거를 찾는게 자연스러운거 같은데....부정적인 댓글이 좀 찜찜하네요. 화포. 나중에 만든 화승총인가. 화살촉. 각종무기들 다 왜란때 군 대장간에서 만들었을건데. 점령당하지 않은 전라도에서 쇠가 없거나 못만들었을지가 의문이네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우수영 가보셨나요?? 폭이 생각보다 좁아요. 그래서 물살이 센것일테고. 아래댓글처럼 3백미터도 안된줄은 기억안나지만. 급류에서 떠내려오는 나무배밑에 살짝만 걸어도 전복되는건 쉬울건데요. 나무배도 닻이 쇠였을거같고 화포등도 제작했고 항구근처에 대장간은 있었을테니. 아예 없었다고 보긴 어려운거 아닌가싶은데. 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봐요. 설일지라도.
@@홍성호-q3j 사료가 한정적이니. 비겁한장수이건 용감하건 회고한 글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역사적 근거로 삼는게 타당한거 같은데요. 철이 귀해도 전라도는 점령당하지 않았고 나주쪽 철생산지가 있는데 불가하다 하는건 스스로 자기역사를 깎아내리는거 아닌가. 드는 생각이네요. 화포생산하는 대장간도 있을테고 닻들도 있을테고. 구선도 만들었으니 타당성이 있어보이는데.
@@parkmi8573 철쇄만들어서 막았다는세 더 역사를 깎아내리는 거고요.. 역사에는 교차검증이란게 있어요. 사료라고 해서 다 믿는것도 아니고. 현무공실기는 난중일기처럼 당시에 쓴 책도 아니고 임진왜란 당시 쓴 글에는 철쇄얘기는 1도 없는데 김억추 후손이 쓴 글하나만보고 철쇄썼구나 믿는게 더 이상한거죠.. 그렇게 치면 검풍날려서 적선 침몰시킨것도 믿으셔야죠 사료가 한정적이지 않고요..징비록,조선왕조실록,난중잡록, 난중일기 등등 정황분석할만한 사료는 차고 넘칩니다. 난중일기 안읽어보셨죠?
@@parkmi8573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철쇄설은 당시에 존재 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기술이 되질 않습니다 지금도 사슬을 굻은걸 만드려면 한정된 곳 이외엔 만들수가 없구요 게다가 만약 그게 있었다 한들 일본의 배가 130척이나 되는데 선봉부대로 나오는 배만 수십척이 될텐데 그 무게는 어찌 감당낼지 생각은 해보셧습니까?사람의 힘으로 그걸 지탱한다는게 정말 가능할까요?지금 남아있는 흔적의 이유는 알수 없으나 현실적으로 쇠사슬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우리나라 수군을 다 말아 먹고 2개월 뒤에 명랑해전이 벌어졌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우수영에 도착 한것이 명랑해전 몇일 전인지는 아냐 ? 그 짧은 기간에 무슨 수로 ? 또 왜군이 울둘목으로 안오고 진도를 돌아서 서해로 간다면 ?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멍청 하다고 생각 ?
@@dhlee7628 명량대첩에 관하여 난중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은 "활과 포를 어지럽게 쏴 대니 적들이 덤비지 못하고 가까이 오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싸여 있으니 어찌 될 지 한 치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철쇄를 설치했다면 왜선들이 이순신이 탄 기함에 가까이 오다 멀어졌다를 반복할 수도 없고 몇겹으로 이순신의 기함을 포위할 수도 없습니다. 철쇄에 왜선들이 죄다 걸려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머지 11척도 물살이 바뀔 때의 몇시간동안 겁먹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슬슬 가서 철쇄에 걸리는대로 함포사격으로 침몰시켜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니까요. 11척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난중일기의 기록대로 대장선이 홀로 포위당해 위태위태하게 싸우는 전황을 보고 겁을 먹은것입니다.
철쇄를 건다고 하여 왜선 전부를 몽땅 감당하는 것으로 상상하네.....ㅋㅋㅋ 절대 안되고 그 정도 무게나 속력을 견디는 건 지금도 안되지...왜선을 명량 앞바다로 유인한 건 우리측 배가 절대 부족했고 사기도 바닥을 친 때에 수많은 왜선을 너른 바다에서 감당이 안되고 그걸 잡아칠려면 절대 그냥 맞서서 싸워도 이길수 없기에 자연의 힘....곧 거센 물살과 좁은 수로를 이용, 격퇴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지리를 모르는 왜선을 일부러 유인, 시간을 끌다 물살이 반대로 거세게 급변하고 몰아칠때를 기다려 이용한 전장이다.... 철쇄를 썼는지는 모르나 사실 그거에 대해선 설만 난무하지 아직 어떤 증거도 없어 확답은 못하나....해볼만하잖은가... 거센 물살에 떼로 몰려오는 배를 철쇄로 몇척만 거꾸러뜨린다면 그바람에 우르르 병목현상에 걸려 절로 부딪히고 깨져 손안대도 코푸는 격이지.....
철쇄설의 근거는 무엇인지? 기껏해야 후대에 쓰여진 현무공실기나 택리지 뿐이며, 정작 전투를 치루고 기록까지 하신 장군의 일기에도 없는 것을... 뒤로 4마장이나 뒤떨어져 겁에 질린 김억추의 후대가 쓴 행록 현무공실기에 어벤져스급으로 포장,미화한 기록의 철쇄설..! 근거와 사적 기록을 제시하시오!
@@war_simulation 철쇄설의 기록 중 뭘 보셨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대의 자료중에는 철쇄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징비록 심지어는 이순신의 승전 장계에서도 철쇄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철쇄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에서 수백년 지난 1700년대 그리고 근대인 1900년대가 되서야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영상제작에 참고하셨다는 현무공실기는 거의 판타지 소설에 가깝습니다. 김억추가 스스로 철쇄 쇠사슬을 들어 옮겼다는 언급이나 관운장의 꿈을 꾸고 전투시에 활로 왜 장수 마다시를 쏴죽였다는 언급은 보시고 영상 제작때 참고하신건지 의문입니다. 실제 명량대첩에서 김억추는 끝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겁을 먹고 맨 뒤에 있었다는 걸 잘 알고계실텐데요. 결국 그는 전후 보직변경으로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동합니다. 그저 김억추를 미화하고 충무공의 공적을 깍아내리려는 김억추의 후손이 쓴 거짓글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런 기록은 신빙성이 1도 없습니다. 1751년의 택리지에는 충무공이 철쇄를 걸어 기다리니 왜선 500척이 알아서 도미노처럼 좌초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거의 소설에 가깝죠. 충무공이 전투 한번 안하고 오로지 철쇄의 힘에 의지해 무려 500척의 왜선을 침몰시켰으니까요 철쇄설은 가설이 아니라 그냥 낭설입니다. 겁쟁이 김억추의 후손들이 만든 판타지소설에 무슨 가설입니까. 고생하셔서 영상을 만드신 건 좋은데 좀 더 정확한 고증을 하셨다면 어땠을 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정새로이-i1u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다시 명량을 보면 됩니다. 후에 인류에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500년전 과거를 보려면 지구로부터 500광년 거리로 가서 지구에서 오는 빛을 관찰하면 됩니다. 지구는 항성이 아니라 500광년이라는 먼 거리까지 빛이 전해지지 않겠지만, 혹여 전해진다면 또 그걸 볼수 있는 기술이 고안된다면 우린 500년전 명량해전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빛는 역사박물관이나 마찬가지죠
@@Ricky-wy4yd 쇠 가죽은 가능 할겁니다. 강물이 발목에서 무릎까지만 차게할 정도만 하면, 이정도만 되어도 강물에 있는 군사들은 기동성이 엄청 떨어지게 되어있고, 양쪽에서 기습 공격하면 상대편에서는 아비귀한 공포 그 자체가 될겁니다. 아직까지 실험을 한번도 하지않고 일부 역사 학자들이 당시 기술을 논하면서 말이 많은데요. 충분히 가능 합니다. 그러나 쇠사슬은 좀......,
야사중 하나가 인정된 케이스로 보여집니다. 아타케 실물 모형 봤으면 이건 정말 그냥 하나의 썰이구나 하고 인정할겁니다. 나고야 박물관에 가면 실물크기로 복원해뒀는데, 그 크기가 판옥선 버금갑니다. 그런배가 기록상 133척, 330여척이라는데 좁은 해협임을 감안해도 1대도 못막을거같은 얇은 철쇄로 틀어막았다?? 차라리 이순신 장군이 칼한번 휘둘러 왜구가 다 터져죽었다 하는걸 믿겠습니다
아다께는 판옥선과 같은 크기의 선박입니다. 하지만 동력은 노저는배입니다. 50명 200명이 노를 젓는다고 해도. 20명이 저어도 젓는 힘이 센거지 속도가 빠른게 아닙니다. 노젓는 배는 5노트 8노트 정도일듯,,, 명량은 10-12노트이므로 노군이 노를 젓어도 속도를 이길수 이ㅓㅄ어요 즉 조류에 배가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조류에 흐르는 배의 선체 아래에 저항이 걸리면 배는 전복됩니다.
옛날에 다큐 좀 보느라(ㄹㅇ 임진왜란 관심이 많았어서)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다케선은 전선은 아니라 대장선이라 뒤에서 진두지휘하는 배라고 기억하고 있음. 출정에서 싸웠던 배는 세키부네이고, 세키부네를 가지고 추측을 해야하는 거임. 그런 배가 좁다란 해엽에 들어가는 것과 해류가 세키부네쪽으로 밀고가는 거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가 않음.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의 가능성이고... 이걸 진짜로 사용했느냐 안했느냐인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쇄를 구하냐 싶지만서도 가설은 가설이니 진짜이다 가짜다 확신하긴 어려움. 그 만한 근거로 주장 해왔을 테고, 야사로 내려왔다지만 야사라고 꼭 다 거짓은 아니니까. 나는 명량해전이 매우 계산적이었다라고 생각함. 그 당시에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작은 것도 있지만 판옥선처럼 배에다 포구 만들어놓고 포를 쏠 수 없었나 봄. 배도 첨조선이라 한번 물살에 휘말리면.. 거기다 못이 쇠못이라.. 판옥선에 비해 약함
영상에 나오는 쇠사슬과 철쇄는 다른것입니다. 쇠사슬은 약하죠. 하지만 철쇄는 철사를 새끼줄처럼 꼬아서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밝혀진것도 없어요. 정상적인 해상전 이었을까요. 사상자도 11명밖에 없이 판옥선 12척으로 수백척을 무찔러요. 뭔가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것 아닌가요. 그럼 그전에는 왜 일본에 궤멸됐을까요. 그때는 배도 더 많았는데요. 그리고 처음에 많은 배들이 왜 전투에 참가않고 있었을 까요? 유인한것 아닌가요.
@@쇼두나테 공짜로? 무슨 보는 것만으로도 유튜브 올린 사람이 돈 버는 구조인데? 무슨 공짜? 봐주는 것만으로도 유튜버가 고맙다고 해야지. 유튜버들이 구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뭔데? 별 참. 이 영상을 보고 잘못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 생각은 안해봤니? 고증 잘못한 역사는 아예 올리지 말던가 아님 공상 소설로 올리던지. 제목은 역사 프로그램으로 올리면서 고증이 덜 된 내용이니 업로드 되니까 바로 잡아줄려고 그나마 댓글 달아주는거다. 알고 댓글이나 다쇼.
이 뭔 헛소리인지.. 일본측 정사로 인정받는 고산공실록(도도 다카도라 문집), 모리고동문서(모리 다카마사의 보고서) 등에도 세세한 차이는 있으나 큰 틀에서는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근대(즉 일제 강점기) 일본측 연구에서도 팩트로 결론나서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부분입니다. 명측 기록은 존재하지도 않고요. 원문 링크 좀 가져와보시죠?
과거 역사스폐셜 에서도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지역 어르신분과의 인터뷰 내용도 같았어요
쇠사슬 감아놓은 터가 남아 있었는데
지역도시개발 과정에서 철거 되었다고 합니다
난중일기에도 자세한 기록이 없어 의견이 분분 하지요
너무 안타까움 ᆢ
충무공 조차 난중일기에 명량해전의 승리는 진짜 하늘이 도왔다고 적어두실 만큼 말도 안되는 승리였습니다.
천행
진인사 대천명 하늘이 도왔죠.
그래서 명량에서 승리하지마자 충청도 지역까지 후퇴했던 걸로 압니다.
명량을 최신버전으로 부탁드립니다. 늘 잘보고 있어요
영상 리얼하게 현실적으로 잘 만드시는거 같습니다. 추천영상으로 홍보해 드릴께요.
고맙습니다~
오 참신한 구성입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보게 됩니다^^ 구독 좋아요^^
많은 분들이 철쇄설을 지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동영상 만드신 분에 대한 공격은 자제하시길 바랍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조차도 철쇄설을 내세울 정도로 명량해전 승리는 도대체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해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나의 가설에 대한 논리적 근거 부족을 지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마치 무조건 거짓말인것 처럼 그리고 동영상 만드신 분이 허위 사실을 뻐뜨리는 것처럼 공격은 하지마세요. 제목 자체가 철쇄"설" 이라고 해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라 그랬는데, 명량해전 승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근거가 있긴 한가요? 철쇄설을 부정하고 싶으시면 님들이 더 정확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 됩니다. 동영상 제작자가 무슨 학술대회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참.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한 어느 누구도 정확한 사실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하나의 가설에 대해서는 거품물고 달려드는 모습이 안타깝네요.
맞습니다!!만드신 분 노고가 그저 감사할 뿐이네요~
맞습니다. 역사논쟁은 다른데가서하고 . 컨텐츠는 컨텐츠 대로 즐깁시다. 설이라고 아주 친철하게 했는데도 자꾸 무의미한 논쟁거는사람들
그냥 본인의견정도쓰는걸로 만족하시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지지는맙시다.
근데 이영상 처음부터 끝까지 대장선 혼자했는데요?
사슬을 이용해서 적을 묶어놓고 섬멸했다면 그에관한 기록이 있었을텐데... 아무튼 명량은 하늘이 도왔던 해전임은 분명함
워낙 말도 안되는 승리였기에 이런저런 추측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이긴다는게 불가능한 이야기니까요.
악플러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특정 단어 장면만 생각해서 단다고 함. 마지막에 설이라고 나오는데 진짜 넘한다 ㅋ
일본배는 대부분 수송선인 상황에서 선봉대가 이순신 대장선에 접근하려다가 좁고 거센 수로에서 자기들끼리 엉켜서 무너졌고, 후발대가 접근하다가 썰물에 밀려나온 선봉대 잔해에 또 엉켜서 무너진게 아닐까 싶음. 다만 판옥선 1척으로 330척과 맞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
일본군 133척은 전함입니다
@@jino78 전함 133척을 판옥선 1척으로 어케이겼을까여....대체...대단한 이순신
울돌목의 겉잡을 수 없는 물살에 세키부네가 마치 철쇄에 얽힌듯 전진하지 못했었나보네요 나라를 지키느라 분투하는 조선군에게 하늘이 내려준 천재일우의 기회.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을 물살에 배가움직이지 않고 안정된 자세에서 포사격과 활을 쏘면서 싸우려고 만든거라면 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건, 정말 대단한 승리 였습니다.
철쇄설은 불가능합니다 그당시 전멸을 당하고 하물며 철쇄로 바다를 가르고 또 배들의 진입까지 막는다?? 지금시대 기술로도 엄청나게 힘든 기술인데 불가능 하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잘 보았습니다
난중일기에서도 하늘이 도왔다고 합니다.
더 신기한 것은, 정말로 13척중 아무도 돕지 않았으니, 이는 1: 70으로 싸운 것입니다.
난중일기는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설명 자체가 안되는 인물인데, 그가 그 기록을 했으니 더욱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냥 하늘이 이순신 장군님께 감동하여 도와주신 거라고 생각함...설명이 안 되니...
여기 바다물살이 진짜 역대급임... 무슨 아마존 급류 같다가도 잠잠해지고 ㅋㅋㅋ 이걸 잘 이용했다면 철쇄든 뭐든 가능 했다봄..
슝~~~~~~~~
댓글 감사합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봤던 내용이네요. 근데 사실 이런 방법이 아니었으면 그 전투에서 어떻게 이긴건지 상상이 되지 않아요 😂😂
ruclips.net/video/i72cZ-53u7o/видео.html
37분에 일본기록과 난중일기에 철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되어 있네요.
그 당시 왜구를 막기위해 수중 장애물을 많이 사용 했다고 되어 있네요.
딱 그걸로 뭘 했다고 하진 않지만 언급은 많이 되었네요.
이야재밌네요😂
철두철미하신장군님께서 적의손에죽더라도 제해권을 가져오려고 앞장서서 싸우신 장군님의 군인정신 배우고싶습니다 제가 이성계보다 이순신을 더 존경하는이유는 어떠한 권력도 탐하지않고 본분에 충실한점 때문입니다 😅
철쇄설은 설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조류 때, 녹진에서 우수영 쪽으로 중간 중간 쇠고리로 연결한 밧줄을 흘려보내고, 다시 연결해서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수백미터를 흘려보내지요. 철쇄 끝이 우수영에 닿지는 않지만, 조류 흐름으로 철쇄는 사선으로 우수영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정조기가 되면 물살이 약하기 때문에 판옥선으로 철쇄 끝을 우수영 쪽에 있는 목책으로 끌어와 결박합니다. 지금 진도대교처럼 직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선으로 연결해서 조류의 영향을 피할 수 있었고, 중간에 고리 역할을 하는 쇠고리가 밧줄을 수면 아래로 잠기게 했기 때문에 적의 눈에 띄지 않은 것입니다.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은 일본 전서에도 있고, 철쇄도 등장합니다. 위 영상에서는 직선으로 철쇄를 건 것으로 나오지만, 사선으로 걸었던 게 맞습니다. 철쇄가 없었다면, 12척으로 133척, 그것도 조류를 타고 달려오는 왜선들을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왜군들 입장에서는 울돌목만 지나가면 끝나는 건데, 숫적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한 이유가 있는 거죠.
와 12척 중에 3척만 기동했네.
그 당시 왕실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고, 저 시대에 대량의 사슬을 만들 재료와 주변성이 전무했을겁니다. 이 설은 그냥 설로 즐기는것이^^;;
설인데 썰인지? 진짜인지? 궁금함 예전에 쇠줄을 걸었다는 고리가 진도다리 만들때 없어졌다구 하는 글 본적있음. 그글에 쇠고리사진도 있었는데... 남쪽 수군영 박물관에 해군기지주변에 쇠줄로 두른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가 검색해서 본적 있음. 썰이라면 하늘이 도움거임.
@@JjJj-ik1pd 고견 감사합니다~^^
거북선 위의 쇠판이 있다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네요~;;^
영상 잘 봤습니다. 재밌네요. 다른전투도 많이해주세요. 영상4편인데 조금만 더하면 금방 조회수 오를듯. 근데 저 맨뒤에 김억추 저런새끼는 군법으로 목을쳐야되는거 아님? 실제로 제대로 싸운건 12척중에 3척아녀
약간의 공학적 지식만 있어도... 300여 미터, 시속 20km의 물 속에 그 당시 기술로 체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또 떠내려 가는 선박들을 잡아줄 정도이면 엄청난 강도/크기의 체인과 고정점이 필요합니다.
계산해 볼 필요까지 없습니다.
논쟁이 많은데 공학자들이 조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철쇄설이 사실이라면 조선의 로스트 테크놀로지이긴 하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오 명량해전 대박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크 왕국이 강에서 바이킹 상대할때 철쇄 쓰긴했는데 그나마 몇백미터라 썼던거지 저기는 몇km에 달할텐데 들어올리는것도 힘들거고 배를 막을정도면 더욱이 ㅋㅋ
팩트 체크는 좀 하고 말을 하던가.
울돌목에서 물이 돌고 물살이 가장 거세고 좁은곳의 넓이가 293미터임. 300미터도 안됨. 몇km는 대체 어디서 가져온 판타지냐?
실제로 그정도 넓이면 철쇄설이 나오고도 남겠더라. 그리고 철쇄가 지금 생각하는 그런 쇠사슬 형태가 아니라 철사를 꼬아서 만든 형태일 거라더라.
뇌피셜로 떠들지 말고 좀 알고 떠들자.
@@보노보노-r5h 한국 수역에서 물살이 가장 빠른 곳이 울돌목(명량)입니다. 쇠사슬이든 철사든 배가 지나가는 것을 방해하려면 튼튼하고 굵게 만들 수 밖에 없죠. 유속이 15 ~ 20 km/h가 되는 지역에서 무거운 배들이 지나가다가 부딪친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충격력을 견딘다는 걸 감안해야죠. 만약, 쇠사슬이든 철사로 뭔가를 만들었는데 왜 난중일기에 남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자료에 남았을 테고 훗날 일본도 정보를 입수해서 어딘가 기록했겠죠. 기록에 살고 기록에 죽는 일본인들이니까요. 그런 장비를 울돌목 물 속에 숨기고 있었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아르키메데스-z7j 울둑목을 이순신 대장선 1대가 막았다는것도 말이 안됨.
철쇠설 말고 다른 버전 부탁드립니다. 철쇠설은 이젠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어서요
폭이 얼마, 쇠사슬 굵기는? 해저탐사 유물은? 쇠사슬 만들거면 대포,탄환을 더 만들것 같다
해저탐사 유물은? 어휴 한심하다
썰이라잔아. 그만큼 불가능한 전투를 이긴거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수도있지
니가해라 그리 잘난게 댓글 나부랑이나 달고있나
쇠사슬 유물은 있고요. 노젓는 배는 3cm 굵기의 밧줄로만 묶어도 배가 나가지 않습니다 줄을 못이깁니다..
물론 육지에서는 50명이 당기면 줄이 금방 끊어지겠지만. 물에서 노젓기로 밧줄을 이길수 없어요.
@@yckim4901 어딨는데저시절에는철이부족했다 저정도만들려면포항재철소에문의해야한다
아랫분 말씀대로 제목그대로 가설중 하나인 철쇄설이라고 명시 하였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역사를 왜곡하지마라시는 분들 정말 역사 공부보단 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시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근데 님들 철쇄설이 어이없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런 도움도 없이 이겼다면 그게 더 말이 안된다는 건데 그걸 이순신은 해낸 거잖아요?ㅋㅋ
구래서 이순신장군을 성웅이라 부렀죠.
이쿠조하니 맨날 학교에서 이쿠이쿠 소리내던 조씨 성 친구가 생각나네요
쇠사슬 설은 여러 가설중에서도 가장 현실성이 떨어짐.
진짜 어캐이겼냐; 전쟁 시뮬레이터 굴려봐도 질거같은데 ㄷㄷ
철쇄가 문제 아니고 현재명량은 현대의 동력선으로도 쓸려내려가 운전이 매우 어렵다데스. 이순신배가 정박해 전투가 할 수없다데스. 임하도앞이 진짜 위치라함.
저시기에 철자체가 구하기도힘들고 바닷속에서 몆십척 배를 묶어 둘려면 엄청난 두께에 철이 어마어마 필요한데
저건 거짓으로 생각된다
많은 전문가 분들이 철사체는 거진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 입니다.
화살촉 화포 전쟁이니 만들었을테니. 이순신장군의 명이면 어려워도 구했을거 같은데요. 우수영 자주 들러본 편인데. 생각보다 폭이 좁아요.
급류탈때 대체로 급류이고 회오리구간이 있긴한데. 회오리보다는 급류가 크지 않았을까 추측했던 기억이 있네요.
급류에 밀려오는 목선은 살짝만 충격줘도 확 넘어질건데. 가능하다 생각했는데...
@@JjJj-ik1pd 김억추장군 검풍쓴거도 사실인가요?
@@JjJj-ik1pd 난중일기에도 기록안된 철쇄를 김억추 따위 사료에 나온걸 믿는다고? ㅋㅋ 그거 후손들이 허위조작한걸 고작 믿는다고?? 정사도 아닌 야사에 나오는 상상의 기록을 믿는다고??? 이햐~ 이사람 대단하네 ㅋㅋㅋㅋ 역사를 상상력으로 배우나봅니다
포를 날리는 탄환의 경우에도 철이 부족해서 돌을 날리거나 대장군전을 날리던 시절에 철쇄요?? 그 정도 철이 있고 가공 가능하면 무기를 하나 더 만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마 소설에 나오는 칼의 노래에서 인용 하신거 같은데..맞지요?
그만큼 말도 안돼서.철쇄설이 나온거 같아요 당시기술로는 철쇄를 만들수가없다네여 당장부족한 화포부터제작했지
@@엔슈-n1l 명량 백병전은 아니구 함포전인데 대장선이 좁은 울둑목을 죽기살기로 지켰다는 얘긴데 ...
김억추는 끝까지 안싸우는구나....
저런 사람이란게 무슨 전라우수사라니!!!
한심하다!!!!
제발 명량 새로 하나 만들어주세요 ㅠㅠ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진짜로
쇠사슬이 끊어진다 버텨라는 먼말이여??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맨 뒤에 13척중에 도움이 전혀 안된 함선 1척은 누구의 배인가?ㅋㅋ
억추님꺼 ㅋㅋ
단지 또 하나의 다른 가설 정도 쯤으로
가볍게 만드신 것 같은데 다들 왜 죽자고 달려드는지;;
설은 설일뿐이라는 거 다 알잖아요ㅋㅋㅋ
1척으로 이긴 케이스임 (실화)
그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장군의 현무공서에 보면 명량해전 당시 철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터가 진도대교 지어지기전까지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이 영상을 만들때 현무공서를 인용한 부분도 있습니다.
철쇄설이 뭔가 너무 궁금했어서요..
믿을게 없어서 김억추 사료를 보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억추의 현무공실기 기록은 현무공 김억추가 쇠사슬 달린 갈쿠리 같은거 던져서 왜군 군함들 부셨다는 소리인데. 과장적인 문체 때문에 ㅋㅋ 소설이야 그거로 평가절하되긴 하지만 당시의 유교 문학적 표현으로 볼 때 어떤 전공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단 뭔가 시적으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음. 그런거 하나 하나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거임.
'택리지'에는 이순신이 명량에서 철쇄 걸어서 왜선들 수백척 자빠뜨렸다고 나옴. 물론! 택리지는 전설급 얘기를 적은거긴 하지만 이런거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음. 택리지를 자세히 보면 이 때 철쇄를 걸은 곳을 바다 한복판에 있는 '돌 다리'라고 적고있음. 뭔가 얕은 여울이 있지만 엄연히 바다인 곳을 의미함.
그니까 이런거 진짜 쌩까지말고 유심히 봐야함. 이순신이 대단하니 이겼겠지~로 그냥 넘어가면 안됨. 분명 난중일기나 일본군 기록이나 여러 기록으로 보건대 구루지마 수군 30척이 전부 꼬로록 하는데도 뒤의 일본배 100척이 뒤에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건 말이 안됨. 물론 명량해협이 좁아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난중일기를 보면, 일본수군 133척은 이미 명량해협을 돌파해서 전라 우수영 해변가에 있던 이순신의 판옥선 12척을 '포위'함. 포위했으면 이미 진건데. 어떻게 이길 수 있는건지도 의아하고 왜선 133척이 왜 한번에 돌격하지않았는지도 의아함.
이런걸 보면 결국 철쇄설을 점점 믿고싶게끔 만드는건데. 문제는 왜선 133척은 이미 명량해협을 돌파했다는거임.
근데 지금의 지형으로 보면 도대체 어디에 돌다리가 있다는건지 알 수가 없음. 결국 해수면이 높아져서 그 시절 지형이 사라진거임. 그럼 결국 조선시대 옛 지도를 보며 살펴봐야함. 다행히도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전라우수영 옛 지도가 있음!
@@freesia4597 그 쇠고리 사진도 있었다. 진짜인지 모르지만 설시장할때 쥐가 일본군시설 복원한적 있어 쥐같은 넘이 진도대교 지을때 없애지 않았을까???
김억추가 검풍쓴거는 왜 안믿어 주시나요?
명랑해전 ㅠㅜ
저시기 저런 쇠사슬을 만들 수가ㅜ잇나요 저런 전시에??
댓글들보니 무슨말씀하시는지도 알겟고 학계에서 정설로 치지못한다는 부분도 알고잇고 개인적으론 과연 가능한지 아닌지 수학적인 계산도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긴하는데요. 단지 그냥 그게 말이되냐 따위식의 본인들 생각만 써놓을거면 댓글달지마세요 존나 단순해 보이니까요. 참고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과거 KBS역사스페셜에서 이부분을 다룬적이 잇엇어요. 몇십년전 진도대교가 세워지기전엔 실제로 양쪽 육지에 임난당시 쇠사슬을 걸엇다고하는 고리가 실제로 존재햇다는 주민들 증언도 방송에 나왓구요. 그곳 나이많은 주민들에겐 그것이 임진왜란당시 그 쇄사슬을 걸엇다고 하는 고리라는게 구전으로 전해오던 팩트라고 여겨지는거 같더군요. 지금이야 미신도 구전동화도 없지만 과거 몇십년전만해도 각 지역엔 몇십몇백년을 거쳐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잇엇지요. 그런것들로 지명이 유래하기도하고 가문이 이어지기도하고 사건이 잇다면 사서와 구전이 동시에 동시대의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존재하기도 햇죠. 역사스페셜이라는 프로 역시 프로그램을 제작할때 하는 인터뷰어들이 대부분 공신력이 잇는것은 둘째치고 그분야 최고의 교수들이셧죠. 개인적으로 공중파에서 송출하는, 그런 신뢰가는 사람들의 자문으로 제작하는 방송에서 나왓던 이야기라고 한다면 아무 증거없이 본인 상상력으로만 그게 말이되냐라는 식의 한심한 반박보단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제말이 틀린가요.
말하는거 보니 살수대첩 뚝막았다가 터뜨려서 한방에 쓸어버린 것도 믿을사람일세 ㅋㅋ 명량 쇠사슬은 허구란게 밝혀진지가 언젠데 무슨 역사스페셜 드립이야... 육지 고리는 그용도가 아니고 젤 중요한 난중일기에는 쇠사슬 이용은 전혀 언급도 없음.. 설화나 야사에 나오는 자료를 더 믿는건 뭐지 대체...
당대의 자료중에는 철쇄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징비록 심지어는 이순신의 승전 장계에서도 철쇄는 단 헌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철쇄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에서 수백년 지난 1700년대 그리고 근대인 1900년대가 되서야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현무공실기는 거의 판타지 소설에 가깝습니다. 김억추가 스스로 철쇄 쇠사슬을 들어 옮겼다는 언급이나 관운장의 꿈을 꾸고 전투시에 활로 왜 장수 마다시를 쏴죽였다는 언급은 볼수록 기가 찰 뿐입니다.
이게 김억추의 후손이 쓴, 철쇄의 언급이 되어있는 현무공실기의 내용입니다.
실제 명량대첩에서 김억추는 끝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겁을 먹고 맨 뒤에 있었다는 걸 잘 알고계실텐데요. 결국 그는 전후 보직변경으로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동합니다.
그저 김억추를 미화하고 충무공의 공적을 깍아내리려는 김억추의 후손이 쓴 거짓글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런 기록은 신빙성이 1도 없습니다.
1751년의 택리지에는 충무공이 철쇄를 걸어 기다리니 왜선 500척이 알아서 도미노처럼 좌초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거의 소설에 가깝죠. 충무공이 전투 한번 안하고 오로지 철쇄의 힘에 의지해 무려 500척의 왜선을 침몰시켰으니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 덧붙여졌지만 나름 기록과 문헌에 근거해서 적어보았습니다.
@@freesia4597 현재 기술로도 목재로 살수대첩 뚝막았다가 터뜨는건 불가능하다고 하죠 ~!!
영화 버전도 제작해주시면 좋겠는데…
말도 안되게 승리했기 때문에 철쇄설까지 나온게 아닌가 싶음
이거지..
거대 포함에 해적이 모타보트 타고 소총들고 덤비는 형세임 상륙만 않하면 무적 해군임
철줄에 걸려 부서지게 한걸 다들 모르니 안타깝네요
다행히 제대로 답을 하시네요
저시대에 철로..그 거리를 철로 엮어 돌리는 무게를 감당하는게 불가능하지않을까.. 영상 잘 봤습니다. 글로 보는거보다 이해가 잘되네요.
조선의 과학과 조상님들의 기술을 너무 얍보는 판단입니다 예전 kbs다큐에서 철쇄를 박았던 흔적들이 울둘목주변에서 발견되어 취재한 영상을 봤습니다
그리고 구전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TV-mh5ph 무시라고 말할것도 없고...정사도 아닌 야사에서나 나오는 내용을 믿는건 어떤 창의력임?? 철쇄 박았던 흔적 그거는 훗날 철쇄 묶는 기계랑 연관없다고 밝혀진지가 언젠데요
@@TV-mh5ph 철쇄설 나온게 김억추가 썰 풀어서 나온건데, 김억추 배는 배들 중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서 전투가 보이지도 않았다죠. 철쇄를 사용했다는 개소리 하는 것도 자기가 전투에 참여했다고 어필하려고 썰푸는 거고. 개씹하남자 김억추... 그리고 철쇄를 걸 정도면 엄청난 양의 철이 필요했을 텐데 칠천량 패전하고 물자도 없는데 철을 철쇄 만드는데 쓴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전략을 이순신 장군님이 난중일기에 적지 않는다?
세계역사상우리나라역사상세계해군역사상우리나라해군역사상조선역사상조선해군역사상임진왜란승리의일등공신백전노장조선과백성을구한진짜장군세기의명장해군제독임진왜란이십년저부터전쟁준비대를해왔고판옥선거북선을직접설계건조해서함포를장착해서수백척을건조만들어서세계최강전함을전국해군기지에배치운영토록한장군조선해군을수만명과특수해병대수천명을교육훈련후세계최강해군을양성해서전국해군기지에배치운영토록하고전쟁준비대비한장군이바로경장정걸장군이시다바로알고전해야할것이다계속병력무기식량화살화포화약전쟁물자확보와전쟁물자확보와진지구축을하고있었고대비해온장군이바로경자정걸장군이시다참고하시길바랍니다
바다 밑에다 철쇄 설치 했다 는데~ 역사적 사실 인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철쇄설에 따르면 그렇다고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은 그 현장에 있었던 선조들만 알지 않을까요~^^;
사실 아닙다.
황현필 선생님 강의 들어보세요
@@이계절-g9r 맞아요. 일본 군함들이 작은배가 아닙니다.
사람이 200명 정도 타고 있었고 무기와 식량도 실려 있었구요.
그런 배가 돌진을 해오면 쇠사슬로 막아봐야 금방 끊어져 버리죠.
더군다나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를 하고 2개월 뒤에 명랑해전이 벌어지는데
2개월만에 무슨수로 철쇄를 ?
철쇄 설치하는것도 말이 안되지만 설치가 안된상황도 말이 안됨 그많은 일본배들이 다가갈수 없다는게 더이상함
그냥 재미를 주기위한 허구요소에요..
철이 부족했을텐데...신빙성이 떨어짐...차라리 화살촉 하나를 더 만드는게...
굵은 밧줄이면 가능 할 것 같음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명량해전 조선수군 단13척으로 일본 함대를 궤멸시킨 철쇄설... ruclips.net/video/CPSMyeg0CFA/видео.html
불멸의 이순신에 나왔엇긴하죠 철쇄설ㅋㅋ 그거재구성한건가
영화 '명량'도 철쇄장면만 안나왔지 아마도 염두해두고 전투장면을 묘사한거같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war_simulation 사실 철쇄설이 설이라서 정사에는기록이없어서 명확하지 않죠
네. 맞습니다. 다만 전투중 맨뒤에서 지켜보던 김억추장군의 기록에는 "철쇄?같은걸로 전투를 치른듯하다..."
라는 기록이 있는걸로 알아요~
@@war_simulation 김억추장군은 야사의기록이라 잘인정은해주진않죠 사실 난중일기에 안나와있는걸로봐선 아마 아닐껍니다
@@이순신박사 그렇군요~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명량때 어떻게 싸웠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아쉽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철쇄설은 않하는게 나을뻔 했습니다.
동의합니다
일단 배를 막을 만큼 굵은 쇠사슬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400여년 전에 가졌다는게 말이 안됨....
근데 말안되는 유적이 있음. 그걸 고대외계인이 했다구함.
오리지날 숭례문은 500년이 지났어도 멀쩡했고. 불타서 새로 현대판 숭례문은 페인트 까지고 나무갈라지고 심각함 ㅅㄱ
1300년 전에 18톤 짜리 선덕대왕신종을 매달아 놓은건 말이되고?ㅋㅋ 지금도 종 떨궈 질까봐 밑에 나무로 받혀놨는데ㅋㅋ
금r각만 800m를 막은 쇠사슬이 3톤이었다함 명량은 280m
이순신 장군 대장선 혼자 무쌍찍네... 저런게 가능한가?
쇠사슬은 아닌듯 그당시 쇠가 귀했다고 하던데
내 생각은 그냥 대장선 닻을 육지에 밖은게 아닐까 안 떠내려가게 고정시킬라고
후손들의 증언으로 철쇄설이 가능한것으로 보입니다
제작자님~ 황현필 선생님 유튜브강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황현필씨 말이 전부 맞는건 아니죠. 실제 철쇄가 없다면 왜선이 대장선 1척에 막혀 전진하지 못했던게 더 말이 않돼죠.. 싸우지 않고 우회해서 충분히 전진이 가능합니다
철쇄로 쇄사슬을 만들었다?
그 귀한 철을 대포, 포탄을 만들면 몇 개를 만드는데..
그리고 김억추의 후대가 쓴 행록은 신빙성이 낮습니다.
난 이 영상을 봤을 때 느끼는 게 있는데.. 철쇄설을 사용안하면 도저히 영상 설명이 불가능할 거 같다.
1척이 333척을 혼자 다 막는다고...???
철쇠설은 말이 안댐 --웬만한 두께로는 그 엄청난 무게를 견딜수 없음
대포만들 쇠도 부족한데
그 엄청난쇠를 길막하는데 쓰것으?
일본배가 물살에 부딫히며 쇠사슬따위는 작살나고 또 사람이 그걸 버티는게 말이돼냐구
진도대교 폭이 적어도 280미터야
scv 말씀이 맞습니다
저정도의 철 만들기 위해서 포항제철소 필요하다는데 . 확실한 역사 왜곡.
오..
일단 유튜버님이 "철쇄설"이란 가설로 영상을 제작하셨는데,
실제로도 철쇄는 허구 입니다..
명량해전에서 철쇄를 사용했다는 내용은 영상에도 잠깐 등장하는 김억추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인데, 명량해전 당시 김억추는 이순신장군의 기함이 선두에서 왜적을 맞아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때, 조선함대 13척 중에 이순신장군의 기함에서 약 300~400미터 떨어진 맨~~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졸장중에 졸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철쇄의 유.무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혹 철쇄가 있었다면 맨 뒤에서 꽁무니나 빼고 있지도 않았을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철쇄설은 김억추가 지어낸 허구 입니다..
겁이 많다고 거짓을 썼다고 하는건 억측인듯하네요. 용감하면 진실하다는걸까요?? 허황된 예수 얘기는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
역사를 자기에 맞게 해석하고 그 근거를 찾는게 자연스러운거 같은데....부정적인 댓글이 좀 찜찜하네요.
화포. 나중에 만든 화승총인가. 화살촉. 각종무기들 다 왜란때 군 대장간에서 만들었을건데. 점령당하지 않은 전라도에서 쇠가 없거나 못만들었을지가 의문이네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정확히는 김억추의 자서전이 아니라 후손들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그래서 철쇄는 어따 거는데요? 지지할 곳이 있어야 되잖아요?
지금 포스코제철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급물살에 떠내려오는 왜선을 견디는 사슬이라니..
게다가 언제 그걸 준비한다는건지
이건 1000번 양보해도 말이 안되는
우수영 가보셨나요?? 폭이 생각보다 좁아요. 그래서 물살이 센것일테고. 아래댓글처럼 3백미터도 안된줄은 기억안나지만.
급류에서 떠내려오는 나무배밑에 살짝만 걸어도 전복되는건 쉬울건데요. 나무배도 닻이 쇠였을거같고 화포등도 제작했고 항구근처에 대장간은 있었을테니. 아예 없었다고 보긴 어려운거 아닌가싶은데.
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봐요. 설일지라도.
@@JjJj-ik1pd 다른 사료는 철쇄얘기 1도 없는데 김억추 사료는 왤케 철석같이 밑는거요?
@@홍성호-q3j 사료가 한정적이니. 비겁한장수이건 용감하건 회고한 글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역사적 근거로 삼는게 타당한거 같은데요.
철이 귀해도 전라도는 점령당하지 않았고 나주쪽 철생산지가 있는데 불가하다 하는건 스스로 자기역사를 깎아내리는거 아닌가. 드는 생각이네요.
화포생산하는 대장간도 있을테고 닻들도 있을테고. 구선도 만들었으니 타당성이 있어보이는데.
@@parkmi8573 철쇄만들어서 막았다는세 더 역사를 깎아내리는 거고요.. 역사에는 교차검증이란게 있어요. 사료라고 해서 다 믿는것도 아니고. 현무공실기는 난중일기처럼 당시에 쓴 책도 아니고 임진왜란 당시 쓴 글에는 철쇄얘기는 1도 없는데 김억추 후손이 쓴 글하나만보고 철쇄썼구나 믿는게 더 이상한거죠.. 그렇게 치면 검풍날려서 적선 침몰시킨것도 믿으셔야죠
사료가 한정적이지 않고요..징비록,조선왕조실록,난중잡록, 난중일기 등등 정황분석할만한 사료는 차고 넘칩니다.
난중일기 안읽어보셨죠?
@@parkmi8573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철쇄설은 사실이다 우리가 초등학교때 수학여행가게되면 꼭울둘목으로갔다 지금은진도대교가 건설되었지만 진도대교 건설 되기전에 철쇄설을 뒤받침하는 동그란쇠고리가 울둘목에 있었다 그고리에 철쇄를 걸어서 해남우수영쪽에서 잡아당겨을거다 동그란고리가 진도쪽에 있었기때문이다 그리고 해남우수영에 전라우수영군인들이 쓰던 샘이 지금도 있다 명량영화로 인해서 충파로 적을 무찌른걸로 나오는데 충파로 싸웠다면 어찌전사자가11명에 불과했겠는가 더많은수가 희생되어야된다 우리나라역사왜곡이 명량전투는 밤에 끝난다 낮에 끝난것이아니다그리고 진도 에 명량에서 전사한 왜군묘지가 있다 일본사람들이 여길 참배하면 정유재란때 죽은 일본군들이 꿈에 보인다고한다 진도사람들이 왜군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왜덕산이 분명히 존재한다 명량은 철쇄설이 맞는것같다
철쇄설은 당시에 존재 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기술이 되질 않습니다 지금도 사슬을 굻은걸 만드려면 한정된 곳 이외엔 만들수가 없구요 게다가 만약 그게 있었다 한들 일본의 배가 130척이나 되는데 선봉부대로 나오는 배만 수십척이 될텐데 그 무게는 어찌 감당낼지 생각은 해보셧습니까?사람의 힘으로 그걸 지탱한다는게 정말 가능할까요?지금 남아있는 흔적의 이유는 알수 없으나 현실적으로 쇠사슬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섬진강쪽 곡성에 우리나라 철생산지가 존재하고 심청이마을도 있다 중국상인들이 거기서 철을 사갔다한다 사람힘으로 못댕기니 마개비에 감아서 돌렸다 분명철쇄 고리는 존재했읍니다 마개비터 도있었고요 명량바다 바닷물 빠지면 우수영쪽은 넓은갯벌이 나옵니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우리나라 수군을 다 말아 먹고 2개월 뒤에 명랑해전이 벌어졌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우수영에 도착 한것이 명랑해전 몇일 전인지는 아냐 ?
그 짧은 기간에 무슨 수로 ?
또 왜군이 울둘목으로 안오고 진도를 돌아서 서해로 간다면 ?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멍청 하다고 생각 ?
@@dhlee7628 명량대첩에 관하여 난중일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순신은 "활과 포를 어지럽게 쏴 대니 적들이 덤비지 못하고 가까이 오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싸여 있으니 어찌 될 지 한 치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철쇄를 설치했다면 왜선들이 이순신이 탄 기함에 가까이 오다 멀어졌다를 반복할 수도 없고 몇겹으로 이순신의 기함을 포위할 수도 없습니다.
철쇄에 왜선들이 죄다 걸려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머지 11척도 물살이 바뀔 때의 몇시간동안 겁먹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슬슬 가서 철쇄에 걸리는대로 함포사격으로 침몰시켜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니까요.
11척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난중일기의 기록대로 대장선이 홀로 포위당해 위태위태하게 싸우는 전황을 보고 겁을 먹은것입니다.
철쇄를 건다고 하여 왜선 전부를 몽땅 감당하는 것으로 상상하네.....ㅋㅋㅋ
절대 안되고 그 정도 무게나 속력을 견디는 건 지금도 안되지...왜선을 명량 앞바다로 유인한 건 우리측 배가 절대 부족했고 사기도 바닥을 친 때에 수많은 왜선을 너른 바다에서 감당이 안되고 그걸 잡아칠려면 절대 그냥 맞서서 싸워도 이길수 없기에 자연의 힘....곧 거센 물살과 좁은 수로를 이용, 격퇴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지리를 모르는 왜선을 일부러 유인, 시간을 끌다 물살이 반대로 거세게 급변하고 몰아칠때를 기다려 이용한 전장이다....
철쇄를 썼는지는 모르나 사실 그거에 대해선 설만 난무하지 아직 어떤 증거도 없어 확답은 못하나....해볼만하잖은가...
거센 물살에 떼로 몰려오는 배를 철쇄로 몇척만 거꾸러뜨린다면 그바람에 우르르 병목현상에 걸려 절로 부딪히고 깨져 손안대도 코푸는 격이지.....
철쇄설을 정말 믿으시는지요...헐..
그럼 어떻게 이겼는지 다른 가설을 가져와보세요. 1척으로 70척을 어떻게 깨부숨?
철쇄설의 근거는 무엇인지?
기껏해야 후대에 쓰여진 현무공실기나 택리지 뿐이며,
정작 전투를 치루고 기록까지 하신 장군의 일기에도 없는 것을...
뒤로 4마장이나 뒤떨어져 겁에 질린 김억추의 후대가 쓴 행록 현무공실기에 어벤져스급으로 포장,미화한 기록의 철쇄설..!
근거와 사적 기록을 제시하시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쇄설의 기록들을 나름 취합하여
'전투장면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만든 영상입니다~
@@war_simulation 진정으로 장군을 존경하신다면
이런 낭설은 없애야합니다.
사용하더라도 철쇄설은 사장되어야할 주장으로 사용해야됩니다.
철쇄설을 주장하며 장군을 존경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장군 중에서 와키자카 아스하루가 비교적 객관적으로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는데 와키자카가 명랑해전에 참전 했어요.
그 사람의 기록에도 철쇄 얘기는 없어요,
@@war_simulation 철쇄설의 기록 중 뭘 보셨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대의 자료중에는 철쇄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징비록 심지어는 이순신의 승전 장계에서도 철쇄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철쇄에 대한 언급은 임진왜란에서 수백년 지난 1700년대 그리고 근대인 1900년대가 되서야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영상제작에 참고하셨다는 현무공실기는 거의 판타지 소설에 가깝습니다. 김억추가 스스로 철쇄 쇠사슬을 들어 옮겼다는 언급이나 관운장의 꿈을 꾸고 전투시에 활로 왜 장수 마다시를 쏴죽였다는 언급은 보시고 영상 제작때 참고하신건지 의문입니다.
실제 명량대첩에서 김억추는 끝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겁을 먹고 맨 뒤에 있었다는 걸 잘 알고계실텐데요. 결국 그는 전후 보직변경으로 해군에서 육군으로 이동합니다.
그저 김억추를 미화하고 충무공의 공적을 깍아내리려는 김억추의 후손이 쓴 거짓글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이런 기록은 신빙성이 1도 없습니다.
1751년의 택리지에는 충무공이 철쇄를 걸어 기다리니 왜선 500척이 알아서 도미노처럼 좌초해 침몰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도 거의 소설에 가깝죠. 충무공이 전투 한번 안하고 오로지 철쇄의 힘에 의지해 무려 500척의 왜선을 침몰시켰으니까요
철쇄설은 가설이 아니라 그냥 낭설입니다. 겁쟁이 김억추의 후손들이 만든 판타지소설에 무슨 가설입니까.
고생하셔서 영상을 만드신 건 좋은데 좀 더 정확한 고증을 하셨다면 어땠을 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철쇄 야사에는 나오는 내용 그냥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ㅎㅎ
철쇄설이 과학적으로 불가능 하다고 하는데, 사실 철쇄도 없이 대장선 혼자 버틴게 더 믿기힘든 스토리....ㅋㅋ
울돌목 회오리를 통해 일본 함선들 끼리 엉킨상황에서 포격으로 막아낸거겠지만.. 수적 열세가 엄청났을텐데.. 역시 이순'신'
철쇄로 막고 일부배랑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게 차라리 더 믿을만하지...... 133척이 그냥 밀고 들어오는 데 그걸 혼자서 4시간 이상 버틴게 더 믿기 힘듬
@@정새로이-i1u 아니 ㅋㅋ 애초에 철쇄라는 히든카드가 있었으면 왜 나머지 11척이 쫄아서 뒤에서 관망만 했겠냐 ㅋㅋㅋ 나머지 11척도 이번 전투는 절레절레 라고 생각하다가 이순신 혼자 말도 안되게 무쌍 찍으니까 그제야 도우러 온건데 ㅋㅋ 철쇄의 존재를 이순신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있지않고서야 철쇄설은 상황 자체가 안맞음
밀려드는 함선의 무게를 쇠사슬로 막는다고? 개구라다.
저희 할머니 살아계실때
이순신 장군이 머리카락을 잘라갓다고
그걸 밧줄을 만들엇다고 전해짐
할머니 고향이 해남입니다
ㅋㅋㅋㅋ🤣🤣🤣
머리카락은 물에 썩지 않아요.
그당시에 머리를 잘랐다는 것도 좀 의아하네요 😂😂
@@Nei_11 머리카락을 잘라 밧줄을 만들엇다고 전해들엇네요
할머니가 임진왜란때 사람이셔요?
산이 민둥이면 몰라도 사람 안보임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다시 명량을 보면 됩니다.
후에 인류에 과학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볼수 있다고 봅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500년전 과거를 보려면 지구로부터 500광년 거리로 가서 지구에서 오는 빛을 관찰하면 됩니다.
지구는 항성이 아니라 500광년이라는 먼 거리까지 빛이 전해지지 않겠지만, 혹여 전해진다면 또 그걸 볼수 있는 기술이 고안된다면 우린 500년전 명량해전을 볼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빛는 역사박물관이나 마찬가지죠
500광년에서 오는 빛으로 어떻게 봄;;;
500광년 거리면 이미 빛이 다 산란되어서 이렇게 자세한 과정은 물론 한반도의 형체조차 못 볼거임
@@SSS-gg3rz 맞습니다. 500광년 아니라 1광년 거리에서도 지구의 빛은 볼수 없습니다.
빛이 존재한다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그 안에 있던 사람들과 배가 보일 정도로 빛이 잘 보존되어서 오지 않는다고요
일단 지구 대기에 의해 산란이 되잖아요
쇠사슬... ㅋㅋㅋ 판타지 소설은 내다버리소.
유사과학이져... 강을 소가죽으로 막아 수공했다는거하고 별반 다를 바가 없져
@@Ricky-wy4yd 쇠 가죽은 가능 할겁니다. 강물이 발목에서 무릎까지만 차게할 정도만 하면, 이정도만 되어도 강물에 있는 군사들은 기동성이 엄청 떨어지게 되어있고, 양쪽에서 기습 공격하면 상대편에서는 아비귀한 공포 그 자체가 될겁니다. 아직까지 실험을 한번도 하지않고 일부 역사 학자들이 당시 기술을 논하면서 말이 많은데요. 충분히 가능 합니다. 그러나 쇠사슬은 좀......,
원래 이기면 뻥이 심하잖아... 어쨋든 이겼음
야사중 하나가 인정된 케이스로 보여집니다. 아타케 실물 모형 봤으면 이건 정말 그냥 하나의 썰이구나 하고 인정할겁니다. 나고야 박물관에 가면 실물크기로 복원해뒀는데, 그 크기가 판옥선 버금갑니다. 그런배가 기록상 133척, 330여척이라는데 좁은 해협임을 감안해도 1대도 못막을거같은 얇은 철쇄로 틀어막았다?? 차라리 이순신 장군이 칼한번 휘둘러 왜구가 다 터져죽었다 하는걸 믿겠습니다
언제 한번 나고야 박물관에 가보고 싶습니다!
아마 왜군이 선봉으로 공격한것들은 고바야나 세기부네일것으로 추측됨, 아다케도 참여했겠지만 많지는않았을것이고. 좊은 해협에서 대형선이 기동하는데 위헙하므로. 침몰된 대부분은 고바야나 세기부네일것이고.
@@yckim4901 고바야는 조선쪽에서 보면 협선류로 승조원 5명인 최소형선으로서 명량의 물결을 견딜 수 없습니다.
왜적의 주력은 세키부네로 필옥선의 절반의 높이를 가진 배지요.
가끔 좀 큰 것도 있겠지요?
아다께는 판옥선과 같은 크기의 선박입니다. 하지만 동력은 노저는배입니다. 50명 200명이 노를 젓는다고 해도. 20명이 저어도 젓는 힘이 센거지 속도가 빠른게 아닙니다. 노젓는 배는 5노트 8노트 정도일듯,,, 명량은 10-12노트이므로 노군이 노를 젓어도 속도를 이길수 이ㅓㅄ어요 즉 조류에 배가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조류에 흐르는 배의 선체 아래에 저항이 걸리면 배는 전복됩니다.
옛날에 다큐 좀 보느라(ㄹㅇ 임진왜란 관심이 많았어서) 기억이 잘 안나지만 아다케선은 전선은 아니라 대장선이라 뒤에서 진두지휘하는 배라고 기억하고 있음.
출정에서 싸웠던 배는 세키부네이고, 세키부네를 가지고 추측을 해야하는 거임. 그런 배가 좁다란 해엽에 들어가는 것과 해류가 세키부네쪽으로 밀고가는 거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가 않음.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의 가능성이고...
이걸 진짜로 사용했느냐 안했느냐인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쇄를 구하냐 싶지만서도 가설은 가설이니 진짜이다 가짜다 확신하긴 어려움.
그 만한 근거로 주장 해왔을 테고, 야사로 내려왔다지만 야사라고 꼭 다 거짓은 아니니까.
나는 명량해전이 매우 계산적이었다라고 생각함.
그 당시에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작은 것도 있지만 판옥선처럼 배에다 포구 만들어놓고 포를 쏠 수 없었나 봄.
배도 첨조선이라 한번 물살에 휘말리면.. 거기다 못이 쇠못이라.. 판옥선에 비해 약함
조선시대 포항제철이 있었냐?
철쇄는 없었다.
당시 철이 얼마나 귀했는데
철쇄를 만들고
그걸로 수십톤수백톤은 될 일본 함선들을 막았다고?
이순신장군을 음해하는 자들이 끈민 모략
네 그당시 조선은 철이 부족했다고 하더라고요..ㅜㅜ
거북선위에 철못이 있는거도 허구죠....그냥 판옥선위를 나무로 덮은거
@@양군사마 지붕은철로덮었어 불화살에부나까봐 못은나무못
없던게 아니라 제작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면 일리가 있을거 같고.
화포나 화살촉 칼 창등 이런건 뭘로 만들었을까? 부족하니 낫들고 했다해도 다 철인데. 그럼 대장간에서 못만들고 수입해왔나 하는 의문이...
미친 철쇠만 찾나??? 사나꾸로도 충분히 막을수있다.. 돈많은 유투버가 실험좀 해줬으면하네요.. 사나꾸는 새끼줄 전라도 사투리.. 이거 두껍게 말면 진짜 튼튼함
영상에 나오는 쇠사슬과 철쇄는 다른것입니다. 쇠사슬은 약하죠. 하지만 철쇄는 철사를 새끼줄처럼 꼬아서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밝혀진것도 없어요.
정상적인 해상전 이었을까요. 사상자도 11명밖에 없이 판옥선 12척으로 수백척을 무찔러요. 뭔가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것 아닌가요.
그럼 그전에는 왜 일본에 궤멸됐을까요. 그때는 배도 더 많았는데요.
그리고 처음에 많은 배들이 왜 전투에 참가않고 있었을 까요?
유인한것 아닌가요.
사실상 쇠사슬이던 철쇄던 저 울돌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1980년대에 현대건설에서 저 곳에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 바닥에 고정시켜 놓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떠내려 갈 정도로 물살이 강한 곳이죠.
안위ㅋㅋㅋ
솔직히 강강술래랑 쇠사늘 저거 너무 오바다
이건 좀 아닌데
철쇄설이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순신의 대장선 하나가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쏟어져 들어오는 수많은 왜선들을 막는 다는 것은 철쇄로 막아 멈춰서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철쇄설은 그 당시 제작할 기술도 능력도 인력으로 버틸수도 없습니다..전쟁통이라는걸 생각하셔야죠..
진도대교 가보고나 말을해
거길 전함대가 다 들어갈수있는지
전투신이 역사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어요. 안골포 해전도 그렇고..... 역사서를 제대로 확인하고 재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터무니 없이 부족한거 같습니다.
더욱더 공부하고 조사하고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과 도움 부탁드립니다
니가해 그럼
공짜로 보는 주제에 바라는 건 많아요
@@쇼두나테 공짜로? 무슨 보는 것만으로도 유튜브 올린 사람이 돈 버는 구조인데? 무슨 공짜? 봐주는 것만으로도 유튜버가 고맙다고 해야지. 유튜버들이 구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뭔데? 별 참. 이 영상을 보고 잘못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 생각은 안해봤니? 고증 잘못한 역사는 아예 올리지 말던가 아님 공상 소설로 올리던지. 제목은 역사 프로그램으로 올리면서 고증이 덜 된 내용이니 업로드 되니까 바로 잡아줄려고 그나마 댓글 달아주는거다. 알고 댓글이나 다쇼.
@@blueskykee4 제목에 철쇄'설'이라고 떡하니 적어놨는데? 사람들이 너같이 모지리가 아니야.
충무공 영정 친일이 지은거입니다
아..그렇군요...
뇌절한죄 구독취소 차단! ㅅㄱ
구독자수 상승 가즈아!!!
명량해전 전과에 관한 한중일 3개국 차이점
1,일본: 관방기록 없음. 민간잡서에 명량인근에서 식량운송 도중 조선수군의 기습으로 27명 전사.
2.명나라: 조선수군이 매복기습 하여 적지휘선외 1척 격파. 주격전을 벌여 16명을 추가사살.
3.한국: 3백척 (임진왜란 일본수군 총병력 9400명)
명나라 기록이 흥미롭네요..
@@war_simulation 저는 한국 기록이 가장 흥미롭 습니다.
진도군 고군면에 가면 왜덕산이 있읍니다 명량해전때 죽은 왜군묘지입니다 왜군에게 덕을베풀었다고해서 왜덕산인데 거기에 일본군묘지들이 엄청나다 일본놈들은 끝까지 역사왜곡하는 민족이네요 일본사람들이 거기와서 참배하면 일본군들이 꿈에 나타난다고합니다
@@sgkm5141 일뽕쉐키 또 나타났냐 ㅋㅋㅋㅋㅋ 니가 사랑하는 도고 헤이하치로 한테도 명량 해전이 없었다고 말해봐
이 뭔 헛소리인지.. 일본측 정사로 인정받는 고산공실록(도도 다카도라 문집), 모리고동문서(모리 다카마사의 보고서) 등에도 세세한 차이는 있으나 큰 틀에서는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근대(즉 일제 강점기) 일본측 연구에서도 팩트로 결론나서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부분입니다. 명측 기록은 존재하지도 않고요. 원문 링크 좀 가져와보시죠?
밧줄일꺼라고 왜 생각 안하지?
예전에 차전놀이도 짚으로 길게 만든거 같은데요
철쇄는 말도 안되는 개소리고
걍 이순신 장군 혼자서 이긴거 임
무슨 철쇄야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와 판옥선 체급이 차이가 컸고 무장화포의 수준 또한 차이가 컸다.
판옥선의 장선 수준이면 체급이 더 높았을터이니 버틸수 있었다고 본다.
저 당시 대포로 재 맞추는 것도 힘들었고 한두대 맞춘다고 배가 침몰하는 것도 아님.
수준차이가 컸는데 칠천량은 그냥 개 씹털렸잖음.ㅋㅋㅋㅋ
판옥선의 수준이 훨씬 높았다면 칠천량도 그리 대패했으면 안됨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