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라는 특징이, 그리고 외부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 폐쇄성이 일본만의 독특한 지배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난립한 연맹왕국들 중에 대장급 왕국과 그 권위에 도전하는 왕국간의 세력 다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은 섬나라인데도 영국과 일본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관들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00:29 호겐의 난으로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형제간의 내전으로 공경형제 무사(헤이시-숙질, 겐지-부자)의 내전으로 이어져서 천황가는 동생이 공경은 형이 무사는 헤이시는 조카, 겐지는 아들이 이기는 현상이 나타났죠. 거기에 겐지 헤이시가 또다시 무사간의 내전이 터져 헤이지 전투가 일어나고 헤이시가 이기게 되죠. 여기서 겐지의 수장 요시토모와 장남 아쿠겐타 등이 죽고 요리토모, 요시츠네는 어린아이라 살아남죠. 이후로 헤이시는 헤이케로 불려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어 세간에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죠. 00:59 엄밀히따지면 키요모리는 겐페이전쟁 중에 수명이 다해 죽고 키요모리의 후계자 무네모리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리토모의 이복동생 차나왕 요시츠네에 의해 물리쳐진거죠. 단노우라 전투에서 키요모리의 외손자 안토쿠 천황이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의 검'을 안고 바다에 빠져 수장되었고 현재의 검은 모조품이라죠. 여기서 겐페이전쟁에서 전공세운 차나왕을 시기한 요리토모가 차나왕을 몰아세워 차나왕은 오슈 후지와라가문에 의탁하기 위해 황금의 도시 히라이즈미로 도망치고 그 가문과 운명을 다하고요. 여기서 차나왕의 심복 무사시보 벤케이도 차나왕을 지키다 목숨을 잃죠. 그리고 속설에 요시츠네가 오슈에서도 도망쳐 몽골까지 가서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긴합니다. 이를 맹신하는 사람중에 한명이 책사풍후(풍큐 최문석씨)고요.
사무라이의 주무기가 검이란건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그것도 주로 가부키나 노, 군기물 같은 당시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된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검이란건 주무기가 아니라 보조무기이자 평상시의 호신용품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팔랑크스나 팽배수 같이 짧은검+큰방패를 사용하는 경우나 도펠존트너처럼 검의 외형을하고 있지만 사실은 폴암을 쓰는 경우 뿐이죠. 중세 기사들도 창이 주무기였지만 검은 항상 허리에 차고 있었으며, 써야할때가 되면 즉시 꺼내어 쓰지만 창을 쓸 수 있다면 당연히 창을 썼습니다. 하지만 펑상시에 창을 들고다니는건 너무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칼만차고 다녔죠. 사무라이도 비슷했습니다. 에도시대가 되면 사무라이는 혼자 걸어다니는게 아니라 정식 예법에 따르면 시종과 짐꾼 여러명이 각자 투구, 갑옷, 창, 활과 화살통을 들고 지고 따라야 했는데, 모두가 넉넉한건 아니다보니 에도성 출퇴근 길에만 아르바이트를 고용하여 뒤따르게 한 경우가 많았죠. 이것도 후기로 갈수록 점차 간소화 되어서 짐꾼 단 한명이 대충 빈가방(나무로 만든 상자에 어께끈 달린거...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메고 뒤따르는 정도로 흔적만 남게 됩니다. 어이쿠, 이야기가 많이 샜네요. 더 자세한건 "사무라이 로망스"채널의 영상 보시면 아주 재미있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전쟁할때가 아니면 갑옷도 창도 활도 사무라이가 직접 갖고다니지 않았지만 칼은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1. 손에 들고 다니는게 아니라 허리춤에 꽂고다니는거라 그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2.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노예, 농노, 빈민, 기타 피지배신분이 아닌 성인남성이라면 집 밖을 나설땐 언제 어디서나 칼을 차고 다니는게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도시대가 길어지다보니 중기에 가면 사무라이들은 완전히 사무직/공무원화 되는데요, 그 와중에도 익히는데 오랜시간이들고 어려운 고류무술대신 "쉽게배워 실생활에 바로 써먹자"는 정신으로 거합술이 생겨나기도 하고 군기물(서양의 로망스=기사도이야기와 비슷한 장르)이 유행하기도 하는등 남심을 자극하는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고, 그와중에 본인들 실생활에 밀착되어있는 "칼"에대한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에도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칼에대한 대단한 집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도시대 극초기엔 길고 직선형 칼이 유행하게 되면서 "기존의 칼을 두들겨 펴서 곧게 만들어 버리는"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는데요, 이렇게 해버리면 일본도 구조상 내구성은 오히려 떨어져 버리고 마는데도 "길고 직선인 칼이 멋있다"는 이유로 너도나도 그런일을 벌였던거지요. 칼이 주무기였다면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유행이었던겁니다.
여름에 태풍이 분다는 사실은 고려도 알았을 터인데, 연합군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따져보지 않았을까요? 바닷가에 사는 평범한 어부도 아는 사실일테고 고려 조정에서 함구한다 하여 모를 일도 아닐텐데 여러가지 사항을 따져봐서 쳐들어 갔을텐데 , 두번이나 태풍에 당한건 이해하기 힘들군요 아마도 재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게 타당할듯
처음 1차 원정군의 사령관 훈둔은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했던걸 숨겼습니다. 게다가 일본과 이긴 것만 부풀려 보고했으니, 이에 쿠빌라이 성님께선 일본이 충분히 쫄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꿇고 조공하라면서 사신단을 보냅니다. 이때 가마쿠라 막부는 온 사신들을 하카타에서 참해서 모두 담궈버려요 몇차례 계속 이럽니다. 이러니까 쿠빌라이는 그냥 정동행성 만들고 열도로 드갈 생각만 했습니다. 고려는 쿠빌라이에게 전함 만들 여력도 없다면서 가지말자고 졸랐었는데 쿠빌라이는 그냥 쌩깠죠. 그러고 송나라까지 잡수시고 그나라 군대까지 동원해서 열도로 드간겁니다.
결국 힘이 생기면 무엇인가 얻으려 했고,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면 망하든가 흥하든가를 선택하는 패턴이네요. 기존 지배층이 현상 유지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신흥세력 및 지방세력을 규합하지 못하는 듯 한데...참 특이한 시스템이네요. 한정된 토지와 경제권에 대해서 힘있는 주인으로 계속 바뀌는 시간이었네요. 오늘은 새로운 역사를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의 결론 "힘있는 무사만이 토지와 이름을 스스로 얻는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니 특이한듯 재밌네요. 정신줄 놓으면 혼란스러움~ㅋ.ㅋ
@@MarieZorroIndiana 기본적으로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덴노를 두고 뒤에서 조종하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까.... 물론 여러 이유들이 있겠죠~ 나중에 이 부분도 다뤄보고 싶은 주제이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슬프지만, 조선 통신사의 방문 중 한두번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적었습니다. 그마저도 조선 자체의 관심은 없었구요.. 일본은 일찍이 네덜란드를 통해 세계정세를 배웠으며 이는 메이지유신까지 백여차례 방문한 사실이 있습니다. 마지막 조선 통신사 및 수신사 때는 일본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조선 수행 행렬을 구경했답니다. 진짜 신기방기한 구식 행렬을 볼 수 있어서요 무릇 역사란 참 아이러니합니다. 중국과 일본에 왜곡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도 객관적인 자세로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lllk155 2차 침입에서 일본애들 저항때문에 밀려서 상륙도 제대로 못했는데요? 실제로 정예병만 5만을 데려왔습니다 몽골군은 잡병들이 많아서 질적으로도 차이났고요 일본쪽은 제대로 준비했거든요 님이 말씀하신건 1차고요 이건 한국측 기록에도 아주 정확히 나와있습니다. 하카타만서 피해가 속출하자 배에서 상륙을 피했고 태풍맞아 몰살한거임;
@UCGcd7A55v1l0unuECEv8UuQ 고려군 보다는 신라해적 이라는 신라구애들이 확실히 잔인했죠 왜구와 비견될정도로 일본 혼슈 규슈 구마모토 나가사키 남부지역을 초토화시킬정도로 강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 남부지역은 사람이 살수없을정도로 잔혹했다고 하고 오사카까지 침공한 전적이있으며 당시 일본 헤이안에서는 신라구의 존재를 극토록 혐오하며 치를 떨었다고함
@@quarantino1795 애초에 여몽원정 부터가 몽골자체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의지자체도 없었으며 그냥 잡병 포로들 데리고 걍 니들이 일본가서 초토화 시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이런정도지 몽골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목적자체도 없었으며 몽골 원정군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실제로 송나라군과 고려군의 숫자가 압도적이였죠 2차때는 저항때문에 상륙을 못했다고 쳐도 김방경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굳은 의지를 보였으며 태풍때문에 원정군이 초토화 당했는데도 몽골 총사령관한테 왜 이이상 쳐들어가지 않냐고 따지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몽골이 직접적으로 일본원정에 굳은 의지가 없어 걍 철수한겁니다 태풍이 몰아쳐도 여몽연합군이 맘만 먹으면 일본이요? 단 한달도 안되서 교토까지 초토화 됩니다 여몽연합군이 태풍때문에 철수한게 아닌 일본 자체를 쳐들어가려는 의지자체가 없었습니다
50초에 미야모토는 -> 미나모토 입니다. 잘못 읽었습니다.
수정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거없어 글밧자 둘다몰라
유명한 무사인 '미야모토 무사시' 때문에 저도 매번 헷갈리더군요ㅎㅎ
감사합니다~~너무 유익해용ㅎㅎ
감사합니다. 진리님~
섬이라는 특징이, 그리고 외부와 쉽게 연결되지 않는 폐쇄성이 일본만의 독특한 지배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난립한 연맹왕국들 중에 대장급 왕국과 그 권위에 도전하는 왕국간의 세력 다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은 섬나라인데도 영국과 일본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관들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무로마치막부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몰랐는데, 이 영상으로 정리가 된거 같습니다. 감사합디다😊
목소리 좋고 내용은 구성지고,
매너 좋으시고.. 듣는 내내 상쾌하네요~ 겨울내내 건강하시길^^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원희님~
00:29 호겐의 난으로 스토쿠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형제간의 내전으로 공경형제 무사(헤이시-숙질, 겐지-부자)의 내전으로 이어져서 천황가는 동생이 공경은 형이 무사는 헤이시는 조카, 겐지는 아들이 이기는 현상이 나타났죠. 거기에 겐지 헤이시가 또다시 무사간의 내전이 터져 헤이지 전투가 일어나고 헤이시가 이기게 되죠. 여기서 겐지의 수장 요시토모와 장남 아쿠겐타 등이 죽고 요리토모, 요시츠네는 어린아이라 살아남죠.
이후로 헤이시는 헤이케로 불려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어 세간에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죠.
00:59 엄밀히따지면 키요모리는 겐페이전쟁 중에 수명이 다해 죽고 키요모리의 후계자 무네모리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요리토모의 이복동생 차나왕 요시츠네에 의해 물리쳐진거죠. 단노우라 전투에서 키요모리의 외손자 안토쿠 천황이 삼종신기 중 하나인 '쿠사나기의 검'을 안고 바다에 빠져 수장되었고 현재의 검은 모조품이라죠. 여기서 겐페이전쟁에서 전공세운 차나왕을 시기한 요리토모가 차나왕을 몰아세워 차나왕은 오슈 후지와라가문에 의탁하기 위해 황금의 도시 히라이즈미로 도망치고 그 가문과 운명을 다하고요. 여기서 차나왕의 심복 무사시보 벤케이도 차나왕을 지키다 목숨을 잃죠. 그리고 속설에 요시츠네가 오슈에서도 도망쳐 몽골까지 가서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긴합니다. 이를 맹신하는 사람중에 한명이 책사풍후(풍큐 최문석씨)고요.
저스티스님! 추천 누르고 갑니다 ~^^ 알기쉽게 설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이학선님.~^^
세계사 공부 너무 감사하게 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흐름에 대해 알기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교 수업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잘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관심가지던 일본역사 너무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신,배반이 일상인 시대
가마쿠라에 대해 일본어로 찾아보려고 해도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힘들었는데, 이렇게 알기 쉽게 정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시작전에 추천부터.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justice20000 전국시대는 어느정도 알지만 무로마치막부얘기는 잘몰랐는데, 꿀잼이었습니다
도련님 때메 여기까지 왔습니다 일본역사도 꽤 흥미롭네요
오닌의 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교토 시내 전체가 불에 다 탔다고 하더군요.이 후 전국시대를 여는 기점도 되고요.일본에서는 엄청 중요한 사건이고요
검을 주력무기로 쓰는 사무라이가 사실은 기병대 출신이였다는건 참 신기함..
그리고 일본이 전쟁의 역사라는게 느껴지는게 전국시대 이전부터 일본에서 전쟁은 끊임없이 발발했었음.
사무라이의 주무기가 검이란건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 그것도 주로 가부키나 노, 군기물 같은 당시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된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검이란건 주무기가 아니라 보조무기이자 평상시의 호신용품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팔랑크스나 팽배수 같이 짧은검+큰방패를 사용하는 경우나 도펠존트너처럼 검의 외형을하고 있지만 사실은 폴암을 쓰는 경우 뿐이죠.
중세 기사들도 창이 주무기였지만 검은 항상 허리에 차고 있었으며, 써야할때가 되면 즉시 꺼내어 쓰지만 창을 쓸 수 있다면 당연히 창을 썼습니다. 하지만 펑상시에 창을 들고다니는건 너무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칼만차고 다녔죠.
사무라이도 비슷했습니다. 에도시대가 되면 사무라이는 혼자 걸어다니는게 아니라 정식 예법에 따르면 시종과 짐꾼 여러명이 각자 투구, 갑옷, 창, 활과 화살통을 들고 지고 따라야 했는데, 모두가 넉넉한건 아니다보니 에도성 출퇴근 길에만 아르바이트를 고용하여 뒤따르게 한 경우가 많았죠. 이것도 후기로 갈수록 점차 간소화 되어서 짐꾼 단 한명이 대충 빈가방(나무로 만든 상자에 어께끈 달린거...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메고 뒤따르는 정도로 흔적만 남게 됩니다.
어이쿠, 이야기가 많이 샜네요. 더 자세한건 "사무라이 로망스"채널의 영상 보시면 아주 재미있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전쟁할때가 아니면 갑옷도 창도 활도 사무라이가 직접 갖고다니지 않았지만 칼은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1. 손에 들고 다니는게 아니라 허리춤에 꽂고다니는거라 그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2.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노예, 농노, 빈민, 기타 피지배신분이 아닌 성인남성이라면 집 밖을 나설땐 언제 어디서나 칼을 차고 다니는게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도시대가 길어지다보니 중기에 가면 사무라이들은 완전히 사무직/공무원화 되는데요, 그 와중에도 익히는데 오랜시간이들고 어려운 고류무술대신 "쉽게배워 실생활에 바로 써먹자"는 정신으로 거합술이 생겨나기도 하고 군기물(서양의 로망스=기사도이야기와 비슷한 장르)이 유행하기도 하는등 남심을 자극하는 요소는 여전히 존재했고, 그와중에 본인들 실생활에 밀착되어있는 "칼"에대한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에도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이 칼에대한 대단한 집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에도시대 극초기엔 길고 직선형 칼이 유행하게 되면서 "기존의 칼을 두들겨 펴서 곧게 만들어 버리는"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는데요, 이렇게 해버리면 일본도 구조상 내구성은 오히려 떨어져 버리고 마는데도 "길고 직선인 칼이 멋있다"는 이유로 너도나도 그런일을 벌였던거지요. 칼이 주무기였다면 절대로 일어날수 없는 유행이었던겁니다.
오 요즘 일본만화로 핫한 무로마치 막부!
여름에 태풍이 분다는 사실은 고려도 알았을 터인데, 연합군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를 따져보지 않았을까요?
바닷가에 사는 평범한 어부도 아는 사실일테고
고려 조정에서 함구한다 하여 모를 일도 아닐텐데
여러가지 사항을 따져봐서 쳐들어 갔을텐데 , 두번이나 태풍에 당한건 이해하기 힘들군요
아마도 재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게 타당할듯
저도 궁금한데, 이 이상 아는게 없어서요...ㅠ
그 부분에 대해서 더 설명해 주실 분이 나타나길 기대해 봅니다.
처음 1차 원정군의 사령관 훈둔은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했던걸 숨겼습니다. 게다가 일본과 이긴 것만 부풀려 보고했으니, 이에 쿠빌라이 성님께선 일본이 충분히 쫄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꿇고 조공하라면서 사신단을 보냅니다.
이때 가마쿠라 막부는 온 사신들을 하카타에서 참해서 모두 담궈버려요
몇차례 계속 이럽니다.
이러니까 쿠빌라이는 그냥 정동행성 만들고 열도로 드갈 생각만 했습니다.
고려는 쿠빌라이에게 전함 만들 여력도 없다면서 가지말자고 졸랐었는데 쿠빌라이는 그냥 쌩깠죠.
그러고 송나라까지 잡수시고 그나라 군대까지 동원해서 열도로 드간겁니다.
결국 힘이 생기면 무엇인가 얻으려 했고,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면 망하든가 흥하든가를 선택하는 패턴이네요.
기존 지배층이 현상 유지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신흥세력 및 지방세력을 규합하지 못하는 듯 한데...참 특이한 시스템이네요. 한정된 토지와 경제권에 대해서 힘있는 주인으로 계속 바뀌는 시간이었네요.
오늘은 새로운 역사를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의 결론 "힘있는 무사만이 토지와 이름을 스스로 얻는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니 특이한듯 재밌네요. 정신줄 놓으면 혼란스러움~ㅋ.ㅋ
소수의 권력자가 넓은 지역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뛰어난 황제도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역사는 통합과 분열의 반복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초록별님~^^
@@justice20000
그래도 은근 교체기간이 짧네요. 우리나라에 비하면...
덴노는 왜 안바꿨을까요? 신이라 믿었나...
@@MarieZorroIndiana 기본적으로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덴노를 두고 뒤에서 조종하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까....
물론 여러 이유들이 있겠죠~
나중에 이 부분도 다뤄보고 싶은 주제이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justice20000
음~ 그렇군요.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ㅋ.ㅋ
아침저녁엔 이제 겨울입니다.
항상 따뜻하게~행복하게~
@@MarieZorroIndiana 항상 감사드립니다~^^
어릴땐 일본이 우리에게 선진문물이나 전파받는 미개한 섬나라였다가 근대화 한번 성공해서 우리를 앞질렀다고 배웠는데 지금보니 메이지유신 훨씬 이전부터 상업이나 국력이나 격차가 있었네요.. 좋은 영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케케케님.~
물론 상업은 에도시대부터 전국이 초월적으로 성장하긴 합니다.
임진왜란 조선 일본 1대1로 싸웠으면 졌을지도
@@sdt642 무조건졋음
슬프지만, 조선 통신사의 방문 중 한두번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적었습니다. 그마저도 조선 자체의 관심은 없었구요..
일본은 일찍이 네덜란드를 통해 세계정세를 배웠으며 이는 메이지유신까지 백여차례 방문한 사실이 있습니다. 마지막 조선 통신사 및 수신사 때는 일본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조선 수행 행렬을 구경했답니다. 진짜 신기방기한 구식 행렬을 볼 수 있어서요
무릇 역사란 참 아이러니합니다. 중국과 일본에 왜곡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도 객관적인 자세로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1차 때 개털려서 2차 몽골 침입때는 일본도 이갈고 준비했음 오히려 여몽이 판세가 밀리자 배에타고 있다가 태풍불어서 죽음 근데 이 전쟁땜에 큐슈 쪽은 ㄹㅇ 거덜나서 해적들이 창궐하게 되고 고려말에 큐슈 해적들한테 고려는 쑥대밭이 됨 패배 보다 뼈 아픈 훗날의 일....
판세가 밀리긴요 규슈쪽에는 고려원정군 8000명이 쳐들어와서 규슈쪽을 대량 학살하고 강간하기 시작했고 규슈 쓰시마에서는 고쿠리 몽쿠리가 공포의 대상 이었음 김방경은 일본을 아에 복속하기 위해서 마음먹었었고
@@lllk155 2차 침입에서 일본애들 저항때문에 밀려서 상륙도 제대로 못했는데요? 실제로 정예병만 5만을 데려왔습니다 몽골군은 잡병들이 많아서 질적으로도 차이났고요 일본쪽은 제대로 준비했거든요 님이 말씀하신건 1차고요 이건 한국측 기록에도 아주 정확히 나와있습니다. 하카타만서 피해가 속출하자 배에서 상륙을 피했고 태풍맞아 몰살한거임;
@UCGcd7A55v1l0unuECEv8UuQ 고려군 보다는 신라해적 이라는 신라구애들이 확실히 잔인했죠 왜구와 비견될정도로 일본 혼슈 규슈 구마모토 나가사키 남부지역을 초토화시킬정도로 강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 남부지역은 사람이 살수없을정도로 잔혹했다고 하고 오사카까지 침공한 전적이있으며 당시 일본 헤이안에서는 신라구의 존재를 극토록 혐오하며 치를 떨었다고함
@@quarantino1795 애초에 여몽원정 부터가 몽골자체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의지자체도 없었으며 그냥 잡병 포로들 데리고 걍 니들이 일본가서 초토화 시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이런정도지 몽골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목적자체도 없었으며 몽골 원정군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실제로 송나라군과 고려군의 숫자가 압도적이였죠 2차때는 저항때문에 상륙을 못했다고 쳐도 김방경은 일본을 쳐들어갈려는 굳은 의지를 보였으며 태풍때문에 원정군이 초토화 당했는데도 몽골 총사령관한테 왜 이이상 쳐들어가지 않냐고 따지기까지 할 정도였지만 몽골이 직접적으로 일본원정에 굳은 의지가 없어 걍 철수한겁니다 태풍이 몰아쳐도 여몽연합군이 맘만 먹으면 일본이요? 단 한달도 안되서 교토까지 초토화 됩니다 여몽연합군이 태풍때문에 철수한게 아닌 일본 자체를 쳐들어가려는 의지자체가 없었습니다
5:14
고려말 무신정권과 유사한 상황이 일본에서는 막부라는 권력으로 고착화 된거 같네요^^
막말 좀 하자면 가마쿠라 막부 수립 시점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 이전까지는 그냥 무정부시대라고 봐도 할 말 없죠.
특히 무로마치 막부는 가장 강력한 요시미츠 시기만 해도 여러 지방 거대 다이묘들과 전쟁을 치렀던 걸 생각해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덴노(천황)은 그냥 허수아비였네 수천년동안 대를 이어올수 있었던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막부가 군부라는 뜻임.. 그냥 일본은 고대부터 역사적으로 군인들이 통치하고 전쟁하던 국가..
또 겐페이전쟁을 당시 연호를본따서
지쇼쥬에이의 난이라고 읽습니다
내가 바로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 장군이다!
아 전국시대는 못참지 ㅋㅋㅋㅋㅋㅋ
무사 출신이 농민인 게 새롭네요.
더 정확히는 기병대 출신이긴했죠ㅋㅋ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시네요! 와우! 살짝만 덧붙이자면 영상 초반에 겐페이(源平)전쟁 때 나왔던미나모토(源)가문과 타이라 (平)가문 모두 일본 고대 4대 가문으로 다 한반도 도래인가문들이었습니다~^^
渡来人などいません。全て日本人です。
원평등귤이 도래인이라는 근거는요?
그다음 이야기는 일본 드라마 기린이온다 봐보시면 나옵니다 :)
슈능 앞두고 복습 개꿀
네 맞습니다 평씨가 다이라, 원씨가 미나모토. 합쳐서 원평 겐페이죠. 사실 다이라의 승리였는데, 너무 어려서 요리토모만 살려두는데, 얘가 나중에 커서 다이라를 멸망시킵니다. 드라마와 같은 역사입니다.
천황보다 덴노가 듣기 좋네요.
러시아 차르 처럼요 ㅎㅎㅎ
남송과 가마쿠라 막부 간의 관계는 이 영상으로 새로 알고 갑니다. 괜히 몽골이 일본을 공격한 게 아니었군요.
감사합니다.~
진짜 일본원정은 쿠빌라이가 개멍청했음 ㅋㅋㅋ 당시 항해술 한계로 규슈부터 침입하는건 이해하는데 1차 원정때 태풍을 겪어봤으면 가을에좀 가던가 뭐가 급하다고 또 여름에갔다가 두번 연속 수장당하는지 ㅉㅉ
타이라가문은 825년 헤이안시대(794~1185)를 연
칸무천황(737~806)의 손주
타카무네가 첨으로 타이라라는 성을 받아서 시작된 가문...
미나모토가문은
일본 56대 천황 세이와천황(850~881)의
자손들이 미나모토라는 성을 받아서 시작된 일족이었습니다
일본만큼 외세의 침략이 적었던 나라가 있었을까
今年は皇暦2681
우리는 단기4000년 넘는다
저때 몽골이 일본 털었어야,,, 카미카제는 개뿔,, 운빨은 참 기맥히네
겸창 실정
아 광고 개 심하다 ㅠㅠ
저렇게 싸움질만 해대면서도 멸종되지 않은것이 신기하네. 싸움질보다 더 열심히 번식했나?
갓본 찬양합니다 좋은나라다
참 이해가안되는부분은 일본과중국은 싸우면서도 송나라때부터
서로교류하고
해상교역을했는데
문앞에있는 조선과일본은 교류가없었는지 이해가안됩니다ㅡ
왜놈 왜구라고무시해서인가?
양반행세하느라
멀리하고
뭘배울게없는조선과 교역할게없어안했는지 이해가안됩니다
구글링만좀 해도 금방찾는걸 여기와서 찾네
징기스칸4시대구만
고스트오브 쓰시마 하신분들이라면.....대마도가 정복됏다는걸 듣고 어떻게 생각햇을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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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일본역사는 재미없단 말여 한국 중국은 재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