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나아지길 바라는 것은 그 안에 장애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는 글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부활 후의 예수님 육신은 이땅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 같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애는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니기에 고쳐져야 한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분명한 회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인지능력이 40이하로 무발화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장애아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표현언어 자체가 굉장히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오리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활 후에는 천국어로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를 가진 이의 아픔과 괴로움은 주님께서 더욱 헤아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땅에서도 단순한 복지차원의 지원으로 장애인이라는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인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길 바랍니다. 내가 노력없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 힘든 이웃을 돌아보고 먼저 나서고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 제도적인 차원에서 개선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내 상처는 상처없는 수백명의 위로보다 나보다 더 큰 상처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내가 돌아볼때 그 상처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이 나의 상처에 대한 감사가 되길 기도합니다.
장애가 나아지길 바라는 것은 그 안에 장애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는 글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부활 후의 예수님 육신은 이땅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 같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애는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니기에 고쳐져야 한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분명한 회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인지능력이 40이하로 무발화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장애아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표현언어 자체가 굉장히 힘든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오리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활 후에는 천국어로 통일된 언어를 사용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애를 가진 이의 아픔과 괴로움은 주님께서 더욱 헤아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땅에서도 단순한 복지차원의 지원으로 장애인이라는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인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길 바랍니다.
내가 노력없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 힘든 이웃을 돌아보고 먼저 나서고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 제도적인 차원에서 개선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내 상처는 상처없는 수백명의 위로보다 나보다 더 큰 상처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내가 돌아볼때 그 상처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이 나의 상처에 대한 감사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