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의 책을 보면 실전에 가까운 무인이라 여겼는데 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 한편으로 납득이 되는게 무사시는 6척(180cm) 장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신(1600년도 사람으로 알고있는데) 일본인들 보다 체격이 좋았다고 그런 이점으로 이도류를 사용 했고 이도류를 사용 하면서 유리한 부분이 많죠 당시 검 내구성이 형편 없었어 2~3개씩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하는데 , 한 칼로 막고 다른 칼로 공격 하거나 상대 칼을 뿌려뜨리는 전술 , 현재 검도 시합에서 이도류를 사용하기가 까다로운 이유는 점수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겠지만 진검으로 이도류를 사용 한다면 스쳐도 짤리니 훨씬 유리 하죠,다수 와 상대해서 이겼다는 점은 무사시가 주력과 스피드가 좋다는 점 ,,제가 책을 읽으면서 무사시는 검술 자체는 당대 최고로 인정 받지 못 하지만( 강백호 같은 스타일 인거죠) , 신체능력으로 이도류를 사용 하므로써 단점을 보완했다 그래서 당대 최고 검객이 되었다. 제자가 없는 이유는 이도류 자체가 신체능력이 받쳐 줘야 할 것 같은데 6척이나 되는 무사시 만큼 이도류를 소화 할 수 있는 일본 사람이 드물다. 진검을 실제 들어 보면 무겁다 말이죠, 무사시가 기본 일도를 가르치기도 뭐 하고 ,** 높은 사람들이 검류가 전혀 다른 무사시를 공직에 채용 해서 검술선생으로 채용 하기는 안 맞죠 이도류쪽으로 연마한 사람인데 ** 일본 검사들이 인정을 안 하는 이유는 이타적인 검술과 피지컬로 상대를 압도 하기 때문에, 당신에는 순수 검술로 지는 패턴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서를 보더라도 무사시는 뛰어난 검술 무사였다면 병법서를 자기가 만들 정도로 고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도류 자체가 병법 이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 자체가 병법이라는 판단이,,,
무사시는 스물한 살 떄 교토로 상경합니다. 그 당시 검객이라면 누구나 대도시에서 이름을 펼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 교토는 소문의 발상지로 이곳에서 소문이 나면 자연히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 곳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사시가 상경하던 교토는 그전 같지 않았습니다. 오다 정권과 도요토미 정권은 전국 통일을 꾀하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새로이 정권을 잡은 도쿠카와는 에도를 천하의 중심지로 삼았으니까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뛰어난 무사들은 대부분 에도로 향했습니다. 교토에는 무로마치 라는 검도장이 있었습니다. 교토에서 유일무이한 권위를 지닌 검도장이였었습니다. 요시오카 집안은 대대로 아시카가 가문의 검술 사범을 맡고 있었으며 아시카가 가문의 15대 후손인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뒤로부터 요시오카 집안도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오다와 도요토미 양정권의 군주들은 검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검술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영상에서 무술을 좋아하는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뒤로는 많은 검객들이 녹봉 1만 석 이상을 받는 다이묘로 고용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요시오카 집안은 유서 깊은 가문으로, 집안의 주인들은 대대로 겐포라는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요시오카는 별도의 염색업을 통해 수입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검정 염색에 각별한 비법을 지니고 있어서 검술보다도 염색업 쪽이 크게 번창했다고 합니다. 무사시는 이런 집안에 도전장을 던진것이죠. 요시오카 집안의 검법 닉네임은 교류라는 이름로써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교토의 검법 중 하나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술인 만큼 몸놀림 또한 화려했던 검법이였습니다. 요시오카 집안은 교토에서 정직한 겐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대로 정직을 가훈으로 삼아온 이 집안의 당대 주인은 요시오카 세이주로 였습니다. 이치조 사 결투에서 소총수와 궁수를 포함 100명의 문하생들을 이치조 사 삼거리 정문쪽에 진을 쳐 배치시켰는 데 무사시는 후방에서 요시오카의 뒤를 공격하여 요시오카측 대장을 포함 15명이 죽는 참상이 벌어진 결투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명 로닌 신분의 무사시는 당시 엄청난 유명세를 가진 검호가 되었습니다. 그 뒤론 요시오카는 검술 도장의 간판을 내리게 되었고 염색업을 자신들의 주업으로 바꾸게 됩니다. 무사시는 쌍수검법을 창시하였지만 이후 닌텐이라는 호를 갖게 되는 데 그 무렵에는 완성시키지 못했던 검술이였습니다. 늘 병법 개발에 고심을 하였던 인물이죠 18세 이후 몇 년 동안 치러온 시합에서는 모두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운 전적으로 이도류를 거의 사용한적이 없습니다. 야규 가문은 특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가문은 단지 검술 때문에 고용된 것이 아닙니다. 소에카미의 야규 지방에서 십몇 대를 살아온 명문 집안이였습니다. 두뇌가 명석한 집안이였죠.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이에야스 편에 가담하여 줄곧 교토의 정세를 보고하는 일을 했는 데 그 공으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무네노리를 고용한 것입니다. 그 뒤로 무네노리는 정치적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이에야스의 측근이 되었고 곧이어 오사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마침내 1만 2천5백 석의 녹봉을 받는 다이묘가 됩니다. 이에야스는 무네노리에게 단 한번도 검술을 배운적이 없습니다. 검술 때문에 고용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왜곡인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에선 야규 쥬베이 , 야규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한 검술 가문으로 부각이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오노 타다야키는 검술 때문에 고용된 사람입니다. 타다아키는 가즈사 지방에 정착한 무사였고 이토 잇토사이에게 검술 인가장을 받은 인물입니다. 오노 타다야키가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게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던 무렵이었으므로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오노의 녹봉은 본디 2백 석이였습니다. 그 당시 검객으로서는 후하게 받은 편이였는 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이 되면서 녹봉이 올랐습니다. 무사시는 당시 로닌 신분으로써 말하자면 떠돌이 낭인이였습니다. (가타기누: 천한 신분이 입는 옷) 당시 천한 신분이 입는 옷을 입고 다녔고 무사시의 신분은 그 옷에서 부터 계급이 결정 났지요. 어느 전쟁에 참전해도 졸개의 신분으로 싸우게 되고 공적이나 감장은 결국 병사를 진두 지휘하는 장수에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일본에서 훌륭한 검호로 인정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입니다. 냉혹한 사무라이 계급 사회에서 특정 조건이 충당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정진 했던 사람이였으니까요 천번의 연습 만번의 단련 오가시와라 가문 , 호소카와 가문에선 천민 신분인 무사시의 병법을 인정 해주죠. 인정받는 것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사시는 시마바라난 때 58세 나이로써 오가시와라 가문 편에 서서 선봉장으로 양자 이오리와 함께 전투에 참전 합니다. 이 시마바라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양자 이오리는 2200석의 큰 무사가 됩니다. 무사시가 비록 호소카와 가문에 들어가 손님 신분으로 대접을 받게 되지만 무사시가 손님 대접을 받길 원하던 바였습니다. 무사시는 호소카와 가문에게 넓은 생가를 하사 받으며 군신급의 매사냥 할수 있게 해주었고 구율미 고리마카이라 하여서 주 마다 , 당시 귀한 쌀인 현미와 금을 급여로 받았습니다. 고리마카이는 이것으로 참아 달라는 말입니다. 호소카와 가문에선 12명의 가신을 붙여주려 했었습니다만 정치는 본인이 스스로 거부를 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쭉 병법서를 쓰고 호소카와의 검술 사범도 하며 문화생활도 즐기게 되죠.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무사시가 구마모토에 올적에 2번이나 서안을 보냅니다. 참으로 귀하게 모시고 싶어했었죠. 그 이유인즉 특별히 신경을 써서 타다토시 영주 또한 직접 서안을 보낼정도로 무사시를 존중했습니다. 로닌 신분치고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당대 신분이 높았던 야규 가문이나 이토 잇토사이의 인가장을 받은 오노 타다아키와 무사시를 동급 신분으로 보는 것은 옳치 않습니다. 그들의 직위나 신분의 위치가 무사시와는 아예 달랐으니까요. 오노 타다야키는 향사 출신이며 야규 무네노리는 호족 출신 이였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력서로 호소카와 가문에게 오륜서를 낸거라는 사람들도 있는 데 오륜서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에 있으면서 쭉 써오던 병법서 이며 말년에 죽기 일주일 전 레이간도에 있는 운간겐지 동굴에서 완성 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병법가로써 지지해주며 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호소카와 가문에게 감사하여 자필로 쓴 병법 35개조와 독행도를 함께 바친 것입니다. dvd나 영화, 만화 게임, 무공전 ,니텐기와 같은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취득할 수 있는 역사관을 가지고 무수히 많은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 데 특히 나무위키에서는 극을 달하더군요..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자문을 얻거나 직접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 자료를 찾아서 정보를 얻는 게 훨씬 내용적인 면에서도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될 수 있구요 무사시가 인간적인 면보다 단순히 과대 포장되어 과소평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참 아쉽고 답답합니다..
전 영상의 비겁함도 실력이다랑 이 영상 보니깐 왠지 무사시가 관직에 못오르고 검술 유파도 없다는게 조금 이해가 가는게 무사시는 느낌이 좀 검술이라기 보단 생존술 같고 진검승부에서 타다아키가 상대 제압했는데도 머리 날렸다고 페문당할 정도면 진검승부 자체에도 예의나 룰 같은게 있던 모양인데 비겁함을 위시한 검술이 딱히 각광받을 여지가 없다고 봄
@@upperculture7 아하...목검도 진검승부로... 페문 당할만 했네요;; 타다아키 설명해 주실 때 명성을 위해 많은 검호들이 진검승부로 도전했다 하시기에 애초에 죽을 수도 있는 승부를 건 건데 제압만 해야한다는게 룰이 엄청 빡빡했나? 싶었어요. 재밌고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ㅎㅎ
그래도 무사시의 저서인 오륜서는 괜찮습니다. 칼 잘쓰는 방법만 다룬거 같지만 이게 의외로 손자병법처럼 다른데서도-경영이나 자기수양 등에서 써먹을만하거든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무라이들이 무식쟁이들이 많아서 그 와중에 붓을 휘날려 저서를 남긴 무사시가 돋보이는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은 검술을 전수하고 그걸로 밥벌어먹을 동안 전혀 색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남긴 무사시를 본받아야 하는게 아닐지 모르겠네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죠. 무사시가 실제 실력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둘째치고 도쿠가와 막부에서 무사시를 등용할 이유가 1도 없습니다. 안할 이유만 가득이죠. 따라서 그를 검술 스승으로 삼을 일도 없고 봉록을 줄 일도 없으며, 막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의 제자를 자처하며 거대한 검술도장을 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도쿠가와 편에 서지 않았던 쪽을 단지 봉록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로는 괜찮으나 유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오히려 막부의 세상이 끝나고 평가받는것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일본 역사를 본다면, 무인시대는 가마쿠라 막부~도쿠가와 막부로 짧은 편인데. 검술보다는 1900년대 이르러서 오륜서로써 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실전성향으로 인기가 생겼죠. 무엇보다 지금 한국인이나 세계인이 무사시를 아는건 1900년대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 픽션으로 일본 내에서도 일제강점기 뒤로 일본이 패망한 뒤에 뜬 인물입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머 모르겠으나. 그 뒤에 일본 소설,만화,애니 사업으로 뜬 인물인건 사실 입니다. 삼국지도 나관중, 정사가 나뉘듯이 얘기가 많지만, 확실히 정사적으로 무사시가 지금의 한국의 척준경처럼 아예 얘기가 없었다는점은 사실이죠,
실전성은 단순히 검술 하나만으로 국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적을 기만 해도 됩니다. 심리던 , 무기이던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 되겠죠. 내가 힘이 좋아도 무기는 거짓을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피지컬이 남들보다 강해보여도 육체는 무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륜서에 실제 싸움에서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말고 공격을 신중히 해야되며 설령 키가 작고 약해보일지라도 내 간합에 들어올 수 있는 칼은 또한 내 몸에 직접 칼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상대방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했던 미흡한 상대는 검술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싸움에 대처나 준비성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격검이 일어나면 부러질 수도 있는 검 하나를 달랑 들고 나오는 서 싸우는 자체가 상대방은 이미 무사시에게 몇수는 져 있던 것이죠. 예를 들어 오륜서엔 비겁한 것도 강한 것이다. 라고 나옵니다. 몸에 지닌 무기가 많으면 많을 수록 유리하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싸우라고 장검을 선호하는 간류의 고지로 검이 일본 카타나 기준을 넘는 3척이나 되는 검이였습니다. 하지만 무사시는 4척이나 되는 목도를 만들어 간몬해협으로 나갔습니다. 그 길이가 무려 126.8cm 하지만 그 목도의 두께가 어마무시합니다.. 무사시는 싸움을 오로지 검술로만 국한 짓는 것이 아닌 다양한 무기를 그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무사시는 투검 즉 직타법의 상당한 고수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무사시가 잇토사이나 , 오노와 진검시합을 했다면 투검을 넉넉히 챙겨가고 검보단 긴 창이나 니기타를 이용해 싸웠을 테지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떨어지는 낙엽을 볼께 아니라 시야를 전체의 숲으로 보라고 했던 것 처럼 실전은 단지 검술 싸움으로 볼께 아니라 더 넓게 풀어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겠지요. 실전성으로 놓고 보면 무사시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무사시가 관직에 오르지못하 이유는 세끼하가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반대세력편에 섰던것이 문제가 되어서였고, 그가이름을 날리지 못하건, 사무라이들이 그를 낭인취급 하며 견제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업적의 과장됨과 그의 비겁함도 사실이지만, 그가 실력이 있었던건 사실입니다.
영상 주제와 직접 연관이 없지만 영상 잘보다가 우리 근현대사와 연관되는 부분이 문득 눈에 띄어 상념에 잠기게 되네요. 일도류의 후대 분파 중 하나로 영상에 언급되는 북진일도류를 대표하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인데 검술도 뛰어났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이른바 지사들 중 리더격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죠. 가쓰라 고고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 대표적 유신 지사들과 교류하며 출신 번국의 과거 역사로 인해 도저히 협력이 불가능해보였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출신 지사들이 유신을 목표로 협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결국 이 양대 번 출신 지사들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이 이뤄졌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유신의 가장 중대한 변수를 만든 인물이었고 사카모토 료마란 인물의 존재가 없었다면 메이지유신이 없었을거란 평가도 있죠. 본인은 유신 이전 암살되어 메이지유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요. 후일 아시아 전체 역사에 영향을 미칠 메이지유신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 한 인물의 존재로 인해 좌우됐다는 평가는 조금 과장이긴 하겠지만, 조슈와 사쓰마 출신 지사들의 협력에 다리를 놓은 사카모토 료마란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 시기나 형태가 우리가 아는 메이지유신과는 조금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허가없이 출신 번을 떠나기만 해도 반역 행위로 간주하던 당시 일본에서 도사 번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 번 출신 가쓰라 고고로, 사쓰마 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 등 타 번국 무사들과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던건, 이들이 각 자 속한 번국의 번주(영주) 승인 하에 에도의 명문 검술 도장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당시 명문 검술 유파는 대부분 에도에 도장이 있었고, 그중 사카모토 료마가 유학했던 도장이 바로 여기 일도류의 후대 분파 중 하나로 언급되는 북진일도류 도장이었던거죠. 말하자면 전국에서 중앙으로 유학 온 엘리트 유학생들이 혁명의 씨앗이 되고 전파한 셈인데, 이 메이지유신 전후 일화들이 한반도 근현대사와 연결되는 이유가 사쓰마 번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끈 조슈 번이 임진왜란 당시의 정한론과는 구분되는 근대 정한론의 출처이기 때문입니다. 메이지유신이라는 혁명적 사회 변혁을 이끌면서 '막부라는 중앙정부와 지방 번국이 지배하던 당시 봉건영주제 국가 일본을 천황 중심의 근대 민족 국가로 변모시키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일대, 특히 첫 타겟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혁명 이념을 조슈 번 출신 지사들이 만들고 유포한거죠. 메이지유신 이후 이들 유신 세력은 군과 정계로 진출해 일본을 제국주의로 이끌었고 그 결과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러일전쟁, 중일전쟁,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 등 숱한 전쟁을 일으키는거죠. 메이지유신 세력의 중심인 조슈, 사쓰마 이 양대 지역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제국주의 시대는 물론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도 일본 정치의 파워 엘리트로 자리잡는데, 을사늑약 체결할 당시 일본 수상 카츠라 다로(카츠라 테프트 밀약의 그 카츠라) 등 근현대 일본 수상들 다수가 조슈와 사쓰마 출신이고, 지금 일본 수상 아베도 조슈 번(현재의 야마구치 현) 출신입니다. 단순히 출생지가 그 지역인 정도가 아니라 일본 우파의 거물이었던 외조부 등 혈연 관계로 인해 해당 지역 정치엘리트들의 정치 기반과 사상을 직접 이어받아 수상 자리까지 오른거고 지금 아베의 지역구도 야마구치 현이죠. 미야모토 무사시 영상 보다가 너무 뜬금없이 한일 근현대사에 까지 생각이 미치긴 했습니다만, 북진일도류란 유파 이름을 보는 순간 이런 얘기들이 문득 떠올랐네요.
사료만으로 평가한다면 맞는 말입니다. 다만 알려진 무사시라는 인물 자체가 기득권에 들어갈 수도 들어간적도 없고 강함을 보여주는 사건들도 기득권에 맞서는 형태라 좋은 사료가 남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점이 매력적이라 여전히 인기를 끌고있는 캐릭터지만요. 사료없이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님의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만 한때 무사시라는 캐릭터의 팬으로서 아쉬움을 토로해보았습니다.
어느정도 수준있던 검객이라고는 들지만 당대최강반열은 아닌걸로 생각듭니다. 다른분은 명성이 꼭 실력에 비례하는거 아니고 인맥도 있다고 하는데..일리있는 말이지만..무사시가 소문만큼의 실력이면 쇼군가는 아니더라도 그외 다이묘세력중 어느 한곳이라도 높은 녹봉으로 충분히 데려갈수있었는데 무사시는 그외에서도 큰 녹봉으로 데려간 기록이 없습니다. 이정도면 무사시가 상당히 거품이던가 아니면 딱히 먹고사는거에 연연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도의 결론밖에 안나오죠. 무사시 최대의 위명중 하나인 요시오카 일문과의 결전도 요시오카가 당시 일본검계에서 엄청 높은위치로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그정도로 명성잇는 도장은 아니었다는게 중론이고 제자들이 유명한 이도 없다는 이후까지 생각하면 무사시는 어느정도 강한 검객은 맞지만 그 러시아의 레슬링영웅 카렐린처럼 본인이 신체조건이 좋다거나 센스가 좋아서 강해진 사람이지 가르치는 거에는 영재주가 없던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이렇게 하면 되던데 니들은 안되???이런느낌이죠
무사시는 돈, 권력에 욕심이 없고 그저 최강타이틀만 얻는 것에 만족하는 진정한 검객이었을 겁니다. 목검과 진검으로 60여 차례 이기고 살아남아 64세 까지 살다 늙어서 죽었으면 증명이 된거지요. 우리나라 최강 싸움꾼인 시라소니도 돈, 권력에는 전현 관심이 없고 맨날 싸우러 다니다 늙어서 죽었어요. 돈, 권력 = 최강
진짜 강자는 아무데나 검을 뽑는 오노 타다아키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만 검을 뽑는 야규 무네노리가 아닌가 합니다. 타다아키가 진짜 강자였으면(그의 성격만 봐도) 무네노리한테 덤볐을 텐데, 못 덤빈것만 봐도...... 무네노리야 자기가 최강인걸 아니까, 궂이 타다아키를 상대 할 필요가 없었을 듯.
근데 잇토사이가 일도류를 만들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베가본드에 나오는데 무사시의 마지막 대결 상대였던 사사키 고지로와 대결에서 손가락이 잘렸기 때문이더군요 일도류는 장검술이 아닌 단검술인데 장검에서 단검으로 바꿀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손으로 밖에 검을 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한 무사시가 출세를 못한 이유는 아마도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한 패잔병 출신 이라서 그런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야규세키슈샤이를 찾아가서 그의 추천을 받아 검술사범 자리 라도 얻어 보려고 했는데 세키카하라전 때 서군 이었던것이 걸려서 출세길이 막히게 된걸로 나오더군요
배가본드는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 기반한 거고 그마저도 만화로 그리면서 각색한게 많아서 그 일화는 거르셔야합니다. 실제로 잇토사이는 사사키 코지로랑 싸웠다는 기록도 없고 그런식의 부상장애를 가지고잇엇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무사시나 코지로 이상으로 기록이 전무한 사람이 잇토사이에요
나는 이분의견과 다름. 명성을 남기는 것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명성을 얻으려면 인맥을 잘 쌓고 권력자들과 교류가 많아야죠. 제자글을 먹여 살릴정도의.재력이 있어야 좋은 제자들도 많이 들어옵니다. 무사시가 실력이 있어도 권세가들과의 교류ㅊ 가문이 받쳐주지 않으면 비주류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럼 당연히 제자나 명성을 남길 수 없죠.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명성과 실력이 꼭 비례하지는 않아요
어느정도 일리는 있지만 쇼군가야 야규쪽에서 맞는다 쳐도 쇼군외에도 다이묘라 불리는 다른 높은 영주들은 몇명이나 더잇습니다. 그 아래 일반영주급에서도 있고 적어도 십수명은 될만한 영주세력들중 어느곳에서도 무사시가 큰 녹봉으로 가지못했다는거는 조금은 의심의 여지가 필요합니다.
@@m880912 야구가는 전국시대에 이미 영지가 있는 다이묘 였습니다.일본 검성으로 유명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역시 다이묘였죠. 명성이라는게 한순간에 생기기 힘들죠. 기본적으로 일본은 사무라이와 그 이하 계급으로 계급의 차이가 심하며 무사시처럼 평민이 이름을 날리기 굉장히 힘든 구조이죠.도요도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가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높죠.
그 당시 평민의 검술이 어떤 대단한 인물이 공인해주지 않는한 굳이 그를 검술 선생으로 초빙할 필요가 없죠.일본의 정서상. 격이라는게 있는데 다른 많은 검술선생 사무라이 출신으로 이름높은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평민 출신의 검술스승을 초빙할 필요성이 없죠.이건 정치적인 겁니다. 검술에 국한된게 아니라.에도 막부가 검술에 많은 투자를 한것도 정치적인 영역이죠. 사무라이들이 넘쳐나고 낭인들이 되며 각지에 도적들로 들끊는 상황에서 평화시대에 더이상 이런 검을 숭상하는 사무라이는 애물단지에 불과하죠.그렇다고 사무라이 사회에서 이걸 부정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스포츠화 하며 제도안에 넣으려고 한게 에도 시대의 검술유파들이죠.검술을 제도안에 넣으려고 한게 에도시대 검술스승을 만든 이유죠.
니찌렌 이야기는 한번도 안나오네 무사시가 모든 결투를 끝내고 초야에 묻혀 검신소리를 들을때 니찌렌을 만나서 결투를 하게되는데 무사시가 칼집에서 칼을 꺼내기도전에 니찌렌의 칼이 무사시의 칼집 끈을 잘라버려서 무사시가 본인보다 어린무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길을 열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니찌렌을 쾌검이라했는데 무사시는 니찌렌과의 대결후 그와의 약속으로 니찌렌의 이름을 말하지않았고 다시는 칼을 잡지않았다 함 설에는 니찌렌이 조선도공의 후손이였다는 설도 전해짐
일본 사무라이들 죄다 150도 안 되는 애들 그게 현실인데 죄다 미화된 키 크고 잘생긴 사진만 갖다 쓰는 거는 거의 일본인들 네이티브나 하는 짓 아녀? 이 시국에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사실 관계를 컨텐츠로 하려면 일관성 있게 당시 사무라이의 사실적 사진으로 쓰소 돈벌이 하려고 일본 미화 하지 말고
@@잉어-e6z 일본이 한국보다 더 선진국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이제 좀 양국의 정치와 언론등을 보고 말합시다. 한국보다 더심각하게 언론통제하고 보도지침 내리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한국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데 한국은 조금이나마 발전하고 있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건 시민의식과 언론도 마찬가지임. 정치야 일본 정치 썩은거야 오래전부터 유명했고 왜 일본 정치가 썩었냐면 메이지유신이후 새로운 귀족들이 등장했는데 그게 화족입니다. 이들이 메이지시대이후 일본을 지배하고 2차대전 전쟁까지 한 주범들이죠.2차대전 패망이후 이들 전부가 모인 정당이 자민당입니다. 역사를 똑바로 알고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착각하지 마세요.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언론도 정치인들도 나름 2차대전에 대해서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취하는척 했죠.언론에서도 나름 객관적으로 다큐멘터리 만든 영상들 많습니다.지금 어떤가요? 협한소설이 일본 도서관에 하나의 코너로 등장한 나라는 일본이라는 나라뿐입니다. 세계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협오하는 소설들이 인기를 끈다고 그걸 따로 판메부스를 만들지도 않고 일본처럼 광범위한 협오를 조장하지도 않습니다.
배가본드 라는 만화를 너무 재밋게 봤었는데, 만화라는게 작가의 픽션이 많이 들어가 있겠지만, 단순히 만화에 등장하는 무사시의 성격과 행동으로 보자면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이유의 해명도 가능해 보입니다. 만화에서의 무사시는 명예와 돈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직, 유파창설, 제자양성 등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싸우고 다니는 자가 아니었죠. 오로지 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찾아 방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화제목도 배가본드 겠죠. 신빙성 문제도 방랑을 하다보니 그의 일대기가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것 같네요. 글이 길어졌는데, 작가의 개인적인 일로 배가본드 연재가 멈춰있다는데, 좋은 쪽으로 빨리 해결 되어 다시 연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바람의 검 신선조에 나오는 신센구미 대장들과 부장들의 검술의 유래와
도쿠가와 막부시대 검호들과 메이지유신 직전 신센구미 대장부장들과의 토너먼트 컨텐츠는 어떨까요?
고민해보겠습니다.ㅋ
걔들 검술은 사이토 오기타 나가쿠라가 호각. 근데 사이토가 약간 더 평가를 받음. 다만 신센구미는 총들고 다니는놈들임..
무사시의 책을 보면 실전에 가까운 무인이라 여겼는데 좀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 한편으로 납득이 되는게 무사시는 6척(180cm) 장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당신(1600년도 사람으로 알고있는데) 일본인들 보다 체격이 좋았다고 그런 이점으로 이도류를 사용 했고 이도류를 사용 하면서 유리한 부분이 많죠 당시 검 내구성이 형편 없었어 2~3개씩 허리에 차고 다녔다고 하는데 , 한 칼로 막고 다른 칼로 공격 하거나 상대 칼을 뿌려뜨리는 전술 , 현재 검도 시합에서 이도류를 사용하기가 까다로운 이유는 점수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겠지만 진검으로 이도류를 사용 한다면 스쳐도 짤리니 훨씬 유리 하죠,다수 와 상대해서 이겼다는 점은 무사시가 주력과 스피드가 좋다는 점 ,,제가 책을 읽으면서 무사시는 검술 자체는 당대 최고로 인정 받지 못 하지만( 강백호 같은 스타일 인거죠) , 신체능력으로 이도류를 사용 하므로써 단점을 보완했다 그래서 당대 최고 검객이 되었다.
제자가 없는 이유는 이도류 자체가 신체능력이 받쳐 줘야 할 것 같은데 6척이나 되는 무사시 만큼 이도류를 소화 할 수 있는 일본 사람이 드물다.
진검을 실제 들어 보면 무겁다 말이죠, 무사시가 기본 일도를 가르치기도 뭐 하고 ,** 높은 사람들이 검류가 전혀 다른 무사시를 공직에 채용 해서 검술선생으로 채용 하기는 안 맞죠 이도류쪽으로 연마한 사람인데 **
일본 검사들이 인정을 안 하는 이유는 이타적인 검술과 피지컬로 상대를 압도 하기 때문에, 당신에는 순수 검술로 지는 패턴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서를 보더라도 무사시는 뛰어난 검술 무사였다면 병법서를 자기가 만들 정도로 고심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도류 자체가 병법 이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 자체가 병법이라는 판단이,,,
무사시는 스물한 살 떄 교토로 상경합니다.
그 당시 검객이라면 누구나 대도시에서 이름을 펼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
교토는 소문의 발상지로 이곳에서 소문이 나면 자연히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 곳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사시가 상경하던 교토는 그전 같지 않았습니다.
오다 정권과 도요토미 정권은 전국 통일을 꾀하며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새로이 정권을 잡은 도쿠카와는 에도를 천하의 중심지로 삼았으니까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뛰어난 무사들은 대부분 에도로 향했습니다.
교토에는 무로마치 라는 검도장이 있었습니다.
교토에서 유일무이한 권위를 지닌 검도장이였었습니다.
요시오카 집안은 대대로 아시카가 가문의 검술 사범을
맡고 있었으며 아시카가 가문의 15대 후손인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한 뒤로부터 요시오카 집안도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오다와 도요토미 양정권의 군주들은 검술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검술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영상에서 무술을 좋아하는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뒤로는
많은 검객들이 녹봉 1만 석 이상을 받는 다이묘로 고용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요시오카 집안은 유서 깊은 가문으로, 집안의 주인들은
대대로 겐포라는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 요시오카는 별도의
염색업을 통해 수입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검정 염색에 각별한 비법을 지니고 있어서
검술보다도 염색업 쪽이 크게 번창했다고 합니다.
무사시는 이런 집안에 도전장을 던진것이죠.
요시오카 집안의 검법 닉네임은 교류라는 이름로써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교토의
검법 중 하나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술인 만큼 몸놀림 또한
화려했던 검법이였습니다.
요시오카 집안은 교토에서 정직한 겐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대로 정직을 가훈으로 삼아온 이 집안의 당대 주인은
요시오카 세이주로 였습니다.
이치조 사 결투에서 소총수와 궁수를 포함
100명의 문하생들을 이치조 사 삼거리
정문쪽에 진을 쳐 배치시켰는 데
무사시는 후방에서 요시오카의 뒤를 공격하여
요시오카측 대장을 포함 15명이 죽는
참상이 벌어진 결투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명 로닌 신분의 무사시는 당시 엄청난
유명세를 가진 검호가 되었습니다.
그 뒤론 요시오카는 검술 도장의 간판을 내리게 되었고
염색업을 자신들의 주업으로 바꾸게 됩니다.
무사시는 쌍수검법을 창시하였지만 이후
닌텐이라는 호를 갖게 되는 데 그 무렵에는 완성시키지 못했던
검술이였습니다. 늘 병법 개발에 고심을 하였던 인물이죠
18세 이후 몇 년 동안 치러온 시합에서는
모두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운 전적으로
이도류를 거의 사용한적이 없습니다.
야규 가문은 특별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가문은 단지 검술 때문에
고용된 것이 아닙니다. 소에카미의 야규 지방에서
십몇 대를 살아온 명문 집안이였습니다.
두뇌가 명석한 집안이였죠.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이에야스 편에
가담하여 줄곧 교토의 정세를 보고하는 일을 했는 데
그 공으로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무네노리를 고용한 것입니다.
그 뒤로 무네노리는 정치적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이에야스의 측근이 되었고 곧이어 오사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마침내 1만 2천5백 석의 녹봉을 받는 다이묘가 됩니다.
이에야스는 무네노리에게
단 한번도 검술을 배운적이 없습니다.
검술 때문에 고용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왜곡인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에선 야규 쥬베이 , 야규에 대해서
엄청나게 강한 검술 가문으로 부각이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오노 타다야키는 검술 때문에 고용된 사람입니다.
타다아키는 가즈사 지방에 정착한 무사였고
이토 잇토사이에게 검술 인가장을 받은 인물입니다.
오노 타다야키가 도쿠가와 가문을 섬기게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던 무렵이었으므로 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오노의 녹봉은 본디 2백 석이였습니다.
그 당시 검객으로서는 후하게 받은 편이였는 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이 되면서
녹봉이 올랐습니다.
무사시는 당시
로닌 신분으로써 말하자면
떠돌이 낭인이였습니다.
(가타기누: 천한 신분이 입는 옷)
당시 천한 신분이 입는 옷을 입고 다녔고
무사시의 신분은 그 옷에서 부터
계급이 결정 났지요.
어느 전쟁에 참전해도
졸개의 신분으로 싸우게 되고
공적이나 감장은 결국 병사를 진두 지휘하는
장수에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일본에서
훌륭한 검호로 인정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입니다.
냉혹한 사무라이 계급 사회에서
특정 조건이 충당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며
정진 했던 사람이였으니까요
천번의 연습 만번의 단련
오가시와라 가문 , 호소카와 가문에선
천민 신분인 무사시의 병법을 인정 해주죠.
인정받는 것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사시는
시마바라난 때 58세 나이로써
오가시와라 가문 편에 서서
선봉장으로 양자 이오리와 함께
전투에 참전 합니다.
이 시마바라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양자 이오리는 2200석의 큰 무사가 됩니다.
무사시가 비록 호소카와 가문에 들어가
손님 신분으로 대접을 받게 되지만
무사시가 손님 대접을
받길 원하던 바였습니다.
무사시는 호소카와 가문에게
넓은 생가를 하사 받으며
군신급의 매사냥 할수 있게 해주었고
구율미 고리마카이라 하여서
주 마다 , 당시 귀한 쌀인 현미와 금을
급여로 받았습니다.
고리마카이는 이것으로 참아 달라는 말입니다.
호소카와 가문에선 12명의 가신을
붙여주려 했었습니다만
정치는 본인이 스스로 거부를 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쭉 병법서를 쓰고
호소카와의 검술 사범도 하며
문화생활도 즐기게 되죠.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무사시가
구마모토에 올적에 2번이나 서안을 보냅니다.
참으로 귀하게 모시고 싶어했었죠.
그 이유인즉 특별히 신경을 써서 타다토시 영주 또한
직접 서안을 보낼정도로 무사시를 존중했습니다.
로닌 신분치고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당대 신분이 높았던 야규 가문이나
이토 잇토사이의 인가장을 받은
오노 타다아키와 무사시를 동급 신분으로
보는 것은 옳치 않습니다.
그들의 직위나 신분의 위치가
무사시와는 아예 달랐으니까요.
오노 타다야키는 향사 출신이며
야규 무네노리는 호족 출신 이였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력서로 호소카와 가문에게
오륜서를 낸거라는 사람들도 있는 데
오륜서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문에 있으면서 쭉 써오던 병법서 이며
말년에 죽기 일주일 전 레이간도에 있는
운간겐지 동굴에서 완성 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병법가로써 지지해주며
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호소카와 가문에게 감사하여
자필로 쓴 병법 35개조와 독행도를 함께
바친 것입니다.
dvd나 영화, 만화 게임,
무공전 ,니텐기와 같은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취득할 수 있는 역사관을 가지고
무수히 많은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 데
특히 나무위키에서는 극을 달하더군요..
역사는 역사학자에게 자문을 얻거나
직접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 자료를 찾아서
정보를 얻는 게 훨씬
내용적인 면에서도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될 수 있구요
무사시가 인간적인 면보다 단순히
과대 포장되어 과소평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참 아쉽고 답답합니다..
댓글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upperculture7 감사합니다.
와 엄청나게 많이 잘 아시네요. 구독하고 좋아요 누릅니다.
무네노리가 쓴 책도 무사시가 쓴 오륜서도 거의 20년 전에 읽어 봤는데 그때 당시에도 무네노리가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 뭐랄까 더 군더더기 없다고 해야하나?
@남학생 병법가전서 입니다.
소녀검객 아즈미가 제일 쎄다
ㅋ 동의 안 할 수가 없네😂
어우 이 채널 재밌네;;; 딴 것도 봐볼까
전 영상의 비겁함도 실력이다랑 이 영상 보니깐 왠지 무사시가 관직에 못오르고 검술 유파도 없다는게 조금 이해가 가는게
무사시는 느낌이 좀 검술이라기 보단 생존술 같고 진검승부에서 타다아키가 상대 제압했는데도 머리 날렸다고 페문당할 정도면
진검승부 자체에도 예의나 룰 같은게 있던 모양인데 비겁함을 위시한 검술이 딱히 각광받을 여지가 없다고 봄
@@upperculture7 아하...목검도 진검승부로... 페문 당할만 했네요;; 타다아키 설명해 주실 때 명성을 위해 많은 검호들이 진검승부로 도전했다 하시기에 애초에 죽을 수도 있는 승부를 건 건데 제압만 해야한다는게 룰이 엄청 빡빡했나? 싶었어요. 재밌고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ㅎㅎ
야규우 신까께류 (新陰流) 뭐 무사시는 시대를 놓친 인물이겠죠 세끼까하라 전투가 마지막이었으니...바람의 신센조도 있나요?^^ 재밌습니다.
무네노리는 검증이 된 인물. 비유하자면 프로게이머 1등, 반면 무사시는 아마추어 게이머중 네임드정도라고 봐도 되겠네요.
ㅋ 와닿는 비유네요
@남학생 도파가 검증되지 않았나요?ㅋㅋ
무네노리는 실력적, 역사적, 문학적으로도 전부 검증 받은 일본 최고의 검술가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무사시의 저서인 오륜서는 괜찮습니다. 칼 잘쓰는 방법만 다룬거 같지만 이게 의외로 손자병법처럼 다른데서도-경영이나 자기수양 등에서 써먹을만하거든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무라이들이 무식쟁이들이 많아서 그 와중에 붓을 휘날려 저서를 남긴 무사시가 돋보이는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들은 검술을 전수하고 그걸로 밥벌어먹을 동안 전혀 색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남긴 무사시를 본받아야 하는게 아닐지 모르겠네요.
재밌당 구독이용
제갈량도 이런 비슷한 의문이 존재하죠ㅎ 오늘도 좋은 영상 잘 봤습니다 제 취향의 영상들이라 항상 좋네요ㅋㅋ
제갈량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엄연히 사료가 존재하고 촉이 제갈량이 없었다면 북벌같은건 꿈도 못꿨을겁니다. 중국내에서도 역사상 재상중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 받는 인물입니다.
근래 채널중에 제일 재밌음
@@upperculture7 뇌피셜없이 자료조사 잘하셔서 팩트로 대조 하는게 이채널 매력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죠. 무사시가 실제 실력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둘째치고 도쿠가와 막부에서 무사시를 등용할 이유가 1도 없습니다. 안할 이유만 가득이죠. 따라서 그를 검술 스승으로 삼을 일도 없고 봉록을 줄 일도 없으며, 막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의 제자를 자처하며 거대한 검술도장을 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도쿠가와 편에 서지 않았던 쪽을 단지 봉록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로는 괜찮으나 유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오히려 막부의 세상이 끝나고 평가받는것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일본 역사를 본다면, 무인시대는 가마쿠라 막부~도쿠가와 막부로 짧은 편인데. 검술보다는 1900년대 이르러서 오륜서로써 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실전성향으로 인기가 생겼죠.
무엇보다 지금 한국인이나 세계인이 무사시를 아는건 1900년대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 픽션으로 일본 내에서도 일제강점기 뒤로 일본이 패망한 뒤에 뜬 인물입니다. 어쩌면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들에게...머 모르겠으나. 그 뒤에 일본 소설,만화,애니 사업으로 뜬 인물인건 사실 입니다.
삼국지도 나관중, 정사가 나뉘듯이 얘기가 많지만, 확실히 정사적으로 무사시가 지금의 한국의 척준경처럼 아예 얘기가 없었다는점은 사실이죠,
의문는 의문 실제로는 누가 더 많이 알고 누가 더 많이 파밍했냐에 따라 다르지요
그 비겁해보이는 그의 전술이 그 당시 검객들한테 안좋게 보였던거 아닐까
넵 맞습니다. 진검대결이라해도 나름의 룰이 있었져.
실전성은 이토잇토사이를 이은 오노쪽이 당연히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시합 및 실제결투를 자주한 무술가 혹은 격투가가 더 강한건 맞고 강함이 증명되니. 다만 강함과 인성은 별개인듯. 오노는 강하지만 성격이 흉폭한듯
실전성은 단순히 검술 하나만으로 국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적을 기만 해도 됩니다. 심리던 , 무기이던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 되겠죠.
내가 힘이 좋아도 무기는 거짓을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피지컬이 남들보다 강해보여도 육체는 무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륜서에 실제 싸움에서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말고
공격을 신중히 해야되며 설령 키가 작고 약해보일지라도
내 간합에 들어올 수 있는 칼은 또한 내 몸에 직접 칼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상대방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했던 미흡한 상대는 검술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싸움에 대처나 준비성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격검이 일어나면 부러질 수도 있는
검 하나를 달랑 들고 나오는 서 싸우는 자체가
상대방은 이미 무사시에게 몇수는 져 있던 것이죠.
예를 들어 오륜서엔 비겁한 것도 강한 것이다. 라고 나옵니다.
몸에 지닌 무기가 많으면 많을 수록 유리하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싸우라고
장검을 선호하는 간류의 고지로 검이 일본 카타나 기준을 넘는
3척이나 되는 검이였습니다. 하지만 무사시는 4척이나 되는
목도를 만들어 간몬해협으로 나갔습니다.
그 길이가 무려 126.8cm 하지만 그 목도의 두께가 어마무시합니다..
무사시는 싸움을 오로지 검술로만 국한 짓는 것이 아닌
다양한 무기를 그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무사시는 투검 즉 직타법의 상당한 고수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무사시가
잇토사이나 , 오노와 진검시합을 했다면
투검을 넉넉히 챙겨가고
검보단 긴 창이나 니기타를 이용해 싸웠을 테지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떨어지는 낙엽을 볼께 아니라
시야를 전체의 숲으로 보라고 했던 것 처럼
실전은 단지 검술 싸움으로 볼께 아니라 더 넓게 풀어서
그 의미를 해석해야겠지요.
실전성으로 놓고 보면 무사시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무사시의 기록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이 남긴것이라서 그의 강함이 과장되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무사시의 제자중에 성공한 검호가 나오지 않은것도........
무사시가 관직에 오르지못하 이유는 세끼하가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반대세력편에 섰던것이 문제가 되어서였고, 그가이름을 날리지 못하건, 사무라이들이 그를 낭인취급 하며 견제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업적의 과장됨과 그의 비겁함도 사실이지만, 그가 실력이 있었던건 사실입니다.
3:50 무슨 만화인가요? 실제역사를 각색한 팩션같은데...
이노우에가 쓴 베가본드라는 만화책입니다.
오프닝브금제목이 뭐에요??
어우.. 사용됨 브금 알고싶당 웅장하고 좋네
유튭 프리 적당한거 써서 먼지 기억이 안나에여
@@upperculture7 넹 감사함당
애초에 압도적으로 강하고 유명가의 강자들과 대결해서 이겼으면 싫어도 데려가려고 난리가 났지.. 노부츠나나 잇토나 저런 거창한거 없어도 그 당시 검성으로 인정받고 유명한데는 이유가있음
일본도 거의 김용 무협 수준이죠...
영상 주제와 직접 연관이 없지만
영상 잘보다가 우리 근현대사와 연관되는 부분이 문득 눈에 띄어 상념에 잠기게 되네요.
일도류의 후대 분파 중 하나로 영상에 언급되는 북진일도류를 대표하는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인데
검술도 뛰어났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이른바 지사들 중 리더격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죠.
가쓰라 고고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 대표적 유신 지사들과 교류하며
출신 번국의 과거 역사로 인해 도저히 협력이 불가능해보였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 출신 지사들이
유신을 목표로 협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결국 이 양대 번 출신 지사들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이 이뤄졌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유신의 가장 중대한 변수를 만든 인물이었고
사카모토 료마란 인물의 존재가 없었다면 메이지유신이 없었을거란 평가도 있죠.
본인은 유신 이전 암살되어 메이지유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요.
후일 아시아 전체 역사에 영향을 미칠 메이지유신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
한 인물의 존재로 인해 좌우됐다는 평가는 조금 과장이긴 하겠지만,
조슈와 사쓰마 출신 지사들의 협력에 다리를 놓은 사카모토 료마란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 시기나 형태가 우리가 아는 메이지유신과는 조금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허가없이 출신 번을 떠나기만 해도 반역 행위로 간주하던 당시 일본에서
도사 번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 번 출신 가쓰라 고고로, 사쓰마 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 등
타 번국 무사들과 만나고 교류할 수 있었던건, 이들이 각 자 속한 번국의 번주(영주) 승인 하에
에도의 명문 검술 도장에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당시 명문 검술 유파는 대부분 에도에 도장이 있었고, 그중 사카모토 료마가 유학했던 도장이
바로 여기 일도류의 후대 분파 중 하나로 언급되는 북진일도류 도장이었던거죠.
말하자면 전국에서 중앙으로 유학 온 엘리트 유학생들이 혁명의 씨앗이 되고 전파한 셈인데,
이 메이지유신 전후 일화들이 한반도 근현대사와 연결되는 이유가
사쓰마 번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이끈 조슈 번이 임진왜란 당시의 정한론과는 구분되는
근대 정한론의 출처이기 때문입니다.
메이지유신이라는 혁명적 사회 변혁을 이끌면서
'막부라는 중앙정부와 지방 번국이 지배하던 당시 봉건영주제 국가 일본을
천황 중심의 근대 민족 국가로 변모시키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일대, 특히 첫 타겟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혁명 이념을
조슈 번 출신 지사들이 만들고 유포한거죠.
메이지유신 이후 이들 유신 세력은 군과 정계로 진출해 일본을 제국주의로 이끌었고
그 결과 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러일전쟁, 중일전쟁,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 등 숱한 전쟁을 일으키는거죠.
메이지유신 세력의 중심인 조슈, 사쓰마 이 양대 지역 출신들과 그 후손들은
제국주의 시대는 물론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도 일본 정치의 파워 엘리트로 자리잡는데,
을사늑약 체결할 당시 일본 수상 카츠라 다로(카츠라 테프트 밀약의 그 카츠라) 등
근현대 일본 수상들 다수가 조슈와 사쓰마 출신이고,
지금 일본 수상 아베도 조슈 번(현재의 야마구치 현) 출신입니다.
단순히 출생지가 그 지역인 정도가 아니라 일본 우파의 거물이었던 외조부 등 혈연 관계로 인해
해당 지역 정치엘리트들의 정치 기반과 사상을 직접 이어받아 수상 자리까지 오른거고
지금 아베의 지역구도 야마구치 현이죠.
미야모토 무사시 영상 보다가 너무 뜬금없이 한일 근현대사에 까지 생각이 미치긴 했습니다만,
북진일도류란 유파 이름을 보는 순간 이런 얘기들이 문득 떠올랐네요.
정보댓글 감사합니다
사료만으로 평가한다면 맞는 말입니다.
다만 알려진 무사시라는 인물 자체가 기득권에 들어갈 수도 들어간적도 없고 강함을 보여주는 사건들도 기득권에 맞서는 형태라 좋은 사료가 남을 수는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점이 매력적이라 여전히 인기를 끌고있는 캐릭터지만요. 사료없이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님의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만 한때 무사시라는 캐릭터의 팬으로서 아쉬움을 토로해보았습니다.
넵 이해합니다. 기득권에 밀려 사료가 안남거나 조작됐다면 정말 당사자는 억울 할 것도 같습니다.
지금에야 누가 쌔니 약하니 하지만, 그때당시엔 진검승부는 정말 살벌 했을것 같네요. 여차하면 팔 잘릴수도 있고, 여차하면 불구되고 죽기도 하고... 아무리 무도에 미쳤어도, 진검승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수가 없슴니다.
서양엔 콜로세움도 있었고 과거엔 확실히 인권에 대한 개념이 약해선지 엽기적인 일이 많았죠
어느정도 수준있던 검객이라고는 들지만 당대최강반열은 아닌걸로 생각듭니다. 다른분은 명성이 꼭 실력에 비례하는거 아니고 인맥도 있다고 하는데..일리있는 말이지만..무사시가 소문만큼의 실력이면 쇼군가는 아니더라도 그외 다이묘세력중 어느 한곳이라도 높은 녹봉으로 충분히 데려갈수있었는데 무사시는 그외에서도 큰 녹봉으로 데려간 기록이 없습니다. 이정도면 무사시가 상당히 거품이던가 아니면 딱히 먹고사는거에 연연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도의 결론밖에 안나오죠.
무사시 최대의 위명중 하나인 요시오카 일문과의 결전도 요시오카가 당시 일본검계에서 엄청 높은위치로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그정도로 명성잇는 도장은 아니었다는게 중론이고
제자들이 유명한 이도 없다는 이후까지 생각하면 무사시는 어느정도 강한 검객은 맞지만 그 러시아의 레슬링영웅 카렐린처럼 본인이 신체조건이 좋다거나 센스가 좋아서 강해진 사람이지 가르치는 거에는 영재주가 없던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이렇게 하면 되던데 니들은 안되???이런느낌이죠
비전 전수에 인색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다 어느 순간 무사시가 객사해서 껍데기만 남은 유파가 되었을지도...
무사시는 돈, 권력에 욕심이 없고 그저 최강타이틀만 얻는 것에 만족하는 진정한 검객이었을 겁니다.
목검과 진검으로 60여 차례 이기고 살아남아 64세 까지 살다 늙어서 죽었으면 증명이 된거지요.
우리나라 최강 싸움꾼인 시라소니도 돈, 권력에는 전현 관심이 없고 맨날 싸우러 다니다 늙어서 죽었어요.
돈, 권력 = 최강
어렵다 어려워
무사시 시대 최강 검객은 카아이즈미 노부츠나지..ㅡ,.ㅡ
영상에 내용있어요. 무사시 태어나기전 인물로 동시대가 아니라 윗세대요😀
카아이즈미가 아니라 카미이즈미입니다. 그리고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무네노리의 아버지 세키슈사이의 스승입니다. 윗세대 인물입니다.
무사시 시대에도 최고의 검객들이 여럿 있었지만 가장 유명하면서도 영향력 있던 자들은 야규 무네노리와 오노 타다아키입니다....
어떤분야에서의 천재가 ...남밑에서 고분고분 할수 있을거라 생각합니까..미친놈인데.. 미쳤어 ? 자유롭게 살고 말지
무사시 오륜서는 그래도 읽어 볼만함. 본인의 실력 논란은 있겠지만 틀린말 써놓은것이 아니니까.
무사시의 생애를 보면 김삿갓이나 황희정승처럼 권세에 얽매이는거 싫어했음
진짜 강자는 아무데나 검을 뽑는 오노 타다아키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만 검을 뽑는 야규 무네노리가 아닌가 합니다.
타다아키가 진짜 강자였으면(그의 성격만 봐도) 무네노리한테 덤볐을 텐데, 못 덤빈것만 봐도...... 무네노리야 자기가 최강인걸 아니까, 궂이 타다아키를 상대 할 필요가 없었을 듯.
우리나라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있지
근데 잇토사이가 일도류를 만들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베가본드에 나오는데
무사시의 마지막 대결 상대였던
사사키 고지로와 대결에서 손가락이 잘렸기 때문이더군요
일도류는 장검술이 아닌 단검술인데
장검에서 단검으로 바꿀수밖에 없었던 것이 한손으로 밖에 검을 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한 무사시가 출세를 못한 이유는
아마도 세키카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한 패잔병 출신 이라서 그런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야규세키슈샤이를 찾아가서 그의 추천을 받아 검술사범 자리 라도 얻어 보려고 했는데
세키카하라전 때 서군 이었던것이 걸려서 출세길이 막히게 된걸로 나오더군요
배가본드는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 기반한 거고 그마저도 만화로 그리면서 각색한게 많아서 그 일화는 거르셔야합니다. 실제로 잇토사이는 사사키 코지로랑 싸웠다는 기록도 없고 그런식의 부상장애를 가지고잇엇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무사시나 코지로 이상으로 기록이 전무한 사람이 잇토사이에요
나는 이분의견과 다름. 명성을 남기는 것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명성을 얻으려면 인맥을 잘 쌓고 권력자들과 교류가 많아야죠. 제자글을 먹여 살릴정도의.재력이 있어야 좋은 제자들도 많이 들어옵니다. 무사시가 실력이 있어도 권세가들과의 교류ㅊ 가문이 받쳐주지 않으면 비주류가 될 수 밖에 없고. 그럼 당연히 제자나 명성을 남길 수 없죠.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명성과 실력이 꼭 비례하지는 않아요
다른의견임에도 이렇게 근거를 가지고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명성이 있다고 실력과 비례하지 않죠. 다만 무사시가 실력이 있었다는 근거들이 자신과 제자를 통해서만이라는 부분이 좀 아쉽다는 점 입니다.
어느정도 일리는 있지만 쇼군가야 야규쪽에서 맞는다 쳐도 쇼군외에도 다이묘라 불리는 다른 높은 영주들은 몇명이나 더잇습니다. 그 아래 일반영주급에서도 있고 적어도 십수명은 될만한 영주세력들중 어느곳에서도 무사시가 큰 녹봉으로 가지못했다는거는 조금은 의심의 여지가 필요합니다.
@@m880912 야구가는 전국시대에 이미 영지가 있는 다이묘 였습니다.일본 검성으로 유명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역시 다이묘였죠. 명성이라는게 한순간에 생기기 힘들죠. 기본적으로 일본은 사무라이와 그 이하 계급으로 계급의 차이가 심하며 무사시처럼 평민이 이름을 날리기 굉장히 힘든 구조이죠.도요도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가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높죠.
그 당시 평민의 검술이 어떤 대단한 인물이 공인해주지 않는한 굳이 그를 검술 선생으로 초빙할 필요가 없죠.일본의 정서상. 격이라는게 있는데 다른 많은 검술선생 사무라이 출신으로 이름높은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평민 출신의 검술스승을 초빙할 필요성이 없죠.이건 정치적인 겁니다. 검술에 국한된게 아니라.에도 막부가 검술에 많은 투자를 한것도 정치적인 영역이죠. 사무라이들이 넘쳐나고 낭인들이 되며 각지에 도적들로 들끊는 상황에서 평화시대에 더이상 이런 검을 숭상하는 사무라이는 애물단지에 불과하죠.그렇다고 사무라이 사회에서 이걸 부정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스포츠화 하며 제도안에 넣으려고 한게 에도 시대의 검술유파들이죠.검술을 제도안에 넣으려고 한게 에도시대 검술스승을 만든 이유죠.
무명역류에 썰림
무사시가 본인이 승리하는 목적에 충실했다면
다이묘나 쇼군들은 본인들 입장에서 무사시의 효용성을 못느꼈다는 얘기겠죠.
전쟁을 하는데 심리전으로 약속깨가면서 한명씩 죽일것도 아니고
정치적 카드로 쓸것도 아니고
교육을 시켜서 군사사범으로 쓸것도 아니고
등등.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
활인검은 궤변 켄신은 미소년
무사시가 멋있어요 저렇게 출세하지 않아서... 진짜 주인공감인 성격 인생이였는듯 무술도 생존본능에서 나온거아닌가요? 생존이짱인듯 싶내요
무사시랑 붙음 다죽으니 그런거 아니가
응~ 바키에서는 최강자야~ ㅋㅋ
니찌렌 이야기는 한번도 안나오네 무사시가 모든 결투를 끝내고 초야에 묻혀 검신소리를 들을때 니찌렌을 만나서 결투를 하게되는데 무사시가 칼집에서 칼을 꺼내기도전에 니찌렌의 칼이 무사시의 칼집 끈을 잘라버려서 무사시가 본인보다 어린무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길을 열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니찌렌을 쾌검이라했는데 무사시는 니찌렌과의 대결후 그와의 약속으로 니찌렌의 이름을 말하지않았고 다시는 칼을 잡지않았다 함 설에는 니찌렌이 조선도공의 후손이였다는 설도 전해짐
일본 사무라이들 죄다 150도 안 되는 애들 그게 현실인데 죄다 미화된 키 크고 잘생긴 사진만 갖다 쓰는 거는 거의 일본인들 네이티브나 하는 짓 아녀? 이 시국에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사실 관계를 컨텐츠로 하려면 일관성 있게 당시 사무라이의 사실적 사진으로 쓰소 돈벌이 하려고 일본 미화 하지 말고
@@sjl5964 외교 뉴스를 보면 이런말도 못한다
뭐 틀린말씀은 아니지만 재미로 보는거죠뭐... 중국 삼국지에 열광하는거랑 비슷하다고 봐주세요~ 중국싫어하는사람들도 삼국지만큼은 열광하잖습니까
뭐...어차피 과장된 섬나라 소꿉장난인데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선진국임.그렇게 남 잘되는꼴 못보는 너같은 놈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을 못하는 거임
@@잉어-e6z 일본이 한국보다 더 선진국이라는 단순한 생각은 이제 좀 양국의 정치와 언론등을 보고 말합시다. 한국보다 더심각하게 언론통제하고 보도지침 내리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한국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데 한국은 조금이나마 발전하고 있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건 시민의식과 언론도 마찬가지임. 정치야 일본 정치 썩은거야 오래전부터 유명했고 왜 일본 정치가 썩었냐면 메이지유신이후 새로운 귀족들이 등장했는데 그게 화족입니다. 이들이 메이지시대이후 일본을 지배하고 2차대전 전쟁까지 한 주범들이죠.2차대전 패망이후 이들 전부가 모인 정당이 자민당입니다.
역사를 똑바로 알고 과거의 일본과 현재의 일본을 착각하지 마세요.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언론도 정치인들도 나름 2차대전에 대해서 사과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취하는척 했죠.언론에서도 나름 객관적으로 다큐멘터리 만든 영상들 많습니다.지금 어떤가요? 협한소설이 일본 도서관에 하나의 코너로 등장한 나라는 일본이라는 나라뿐입니다.
세계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협오하는 소설들이 인기를 끈다고 그걸 따로 판메부스를 만들지도 않고 일본처럼 광범위한 협오를 조장하지도 않습니다.
배가본드 라는 만화를 너무 재밋게 봤었는데, 만화라는게 작가의 픽션이 많이 들어가 있겠지만, 단순히 만화에 등장하는 무사시의 성격과 행동으로 보자면 과대평가를 받는다는 이유의 해명도 가능해 보입니다.
만화에서의 무사시는 명예와 돈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관직, 유파창설, 제자양성 등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싸우고 다니는 자가 아니었죠.
오로지 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찾아 방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화제목도 배가본드 겠죠.
신빙성 문제도 방랑을 하다보니 그의 일대기가 소문으로만 남아 있을 것 같네요.
글이 길어졌는데, 작가의 개인적인 일로 배가본드 연재가 멈춰있다는데, 좋은 쪽으로 빨리 해결 되어 다시 연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강하다는걸 추구했다면 그시대 최고로 거론되는 위에 두 사람과 싸웠어야 되는게 맞죠. 무사시는 그냥 중국 무협에 나오는 고수 정도로 보는게 맞을듯 합니다.
이만큼 우리나라의 역사를 생각해라
돈이 중요한게 아니고 ㅠㅠ 본성은 일본인 이어도 최소한 태어난 곳은 한국이니 ㅠㅠ
맞는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