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식교수 아침칼럼] 합천해인사 산내암자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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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5 фев 2025
- ■ 대구BBS 라디오아침세상 아침칼럼
■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
■ 방송: BBS대구불교방송 ‘라디오 아침세상’ 08:30∼09:00
(대구 FM 94.5Mhz, 안동 FM 97.7Mhz, 포항 105.5Mhz)
안녕하십니까.
문화재위원 대구한의대학교 한문화건축연구소 최영식 교수입니다.
오늘은 합천 해인사 산내암자 중 백련암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련암은 해인사 산내 암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특히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예부터 백련암터를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로 일컬어 왔습니다.
백련암을 처음 창건한 연대는 잘 알 수 없고, 경암관식(鏡岩慣拭·1743∼1804)스님이 쓴 ‘해인사 백련암 중수기’에 의하면, 백련암은 1605년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昭岩)대사에 의해 창건돼 송운, 일헌, 인수, 여찬, 쌍휘 스님과 해명당, 보광, 도봉, 월파 등 여러 대덕 스님들의 노력으로 인해 현재의 가람으로 발전돼 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환적, 풍계, 성봉, 인파, 활해, 신해 스님 등 고승들이 주석했고, 근세에는 포산 윤혜천, 이제산 스님 등이 정진했습니다. 불교정화 이후 1964년부터 조계종 종정으로 국민적 종교지도자로 추앙받았던 퇴옹당 성철(性徹)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련암은 해인사 큰절에서 동쪽으로 약 2km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주위에는 서남쪽으로 용각대(龍角臺), 서쪽으로 봉황대(鳳凰臺), 뒤쪽으로 절상대(絶相臺), 동쪽으로 환적대(幻寂臺)와 신선대(神仙臺) 등이 자리하고 있어 전망이 아주 빼어납니다. 이러한 연유때문인지 옛부터 도인(道人)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경내 뜰에 있는 불면석(佛面石)과 쌍두꺼비 바위, 백호 바위도 이곳이 예삿 도량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들입니다.
전설에 임진왜란 당시 소암 스님이 해인사를 수호하였는데, 왜병들이 소암의 명성을 듣고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겨보았을 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왜병들이 엿보았다는 산마루를 ‘왜규치(倭窺峙)’라 부릅니다. 그 뒤 환적(幻寂) 스님이 이 절에서 수도하였는데, 환적 스님은 암자의 동쪽에 토굴을 파서 환적대(幻寂臺)라 이름 짓고, 그 곳에서 오래 좌선하다가 입적하였습니다. 스님은 늘 한 마리의 호랑이와 벗하였는데 그 호랑이가 제자를 해치자 산신에게 명하여 다시는 가야산 안으로는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 뒤 가야산 일대에서는 호랑이의 피해를 받은 사람이 없었다고 전합니다. 문하에는 풍계(楓溪)스님과 명등(明登) 스님이 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유완록(遊翫錄)과 문집(文集) 등을 남겼는데 그 각판의 일부가 백련암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전(圓通殿)과 영자당(影子堂)과 요사(寮舍)가 있는데, 영자당에는 환적·통엽(通嘩)·활해(濶海)·인파(仁坡)·신해(信海)·춘계(春溪)·대송(對松)·월파(月波)·침운(枕雲)·나은(懶隱) 스님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또한 원통전은 1687년(숙종 13) 환적 스님이 신축하였고 뒤에 응해(應海) 스님이 중건하였습니다.
백련암은 예로부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유명한 수도처로서, 해인총림의 방장 성철(性澈) 스님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아비라 기도회’가 1년에 네 차례 백련암에서 열립니다. 아비라 기도는 성철스님이 고안해낸 독특한 기도수행법으로, ‘L’자 형태로 손을 모은 장궤합장의 자세로 청정법신 비로자나 법신진언인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를 30분간 외우는 기도방법입니다.
오늘은 해인사 산내 암자 중 백련암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