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쥭수서원(전라남도 뮴화재 자료 제130호), 정암선생 서원유지추모비(이양면 증리 서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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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5 сен 2024
  • #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정암 조광조 선생이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인해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던 곳이다.
    1667년(현종 8)에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능주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
    1979년 9월 30일 도문화재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번역문
    아, 이곳은 정암 조선생이 귀양와서 별세하신 곳이다.
    아, 이제 정암선생께서 돌아가신지 149년이 되었는데도 기묘 학사와 대부들은 그 학문을 사모하고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은 그 은혜를 생각함이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아니하고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로 하여금 삼강오륜의 윤리를 알게 하여 이적(되놈)과 금수(짐승)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은 오직 정암선생의 덕택이라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엄숙하게 머리 숙여 공경치 아니한 이 없으니라.
    이는 그 누군가 그렇게 하셔서 하는 것일까.
    그 사람은 누구나 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아! 저 남곤 심정 홍경주의 무리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고 우리나라는 기자가 성인의 학문을 밝히고 어진 정치를 한 뒤로 수 천년 동안 학문과 정치가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포은 정몽주 한당 김굉필 선생 등이 나시어 성인의 학문을 밝혔으나 송나라 성리학자 명도 정호 이천 정이 회담 주희 선생 등의 학통을 이어받아 요순의 왕도정치에 뜻을 두어 뛰어나게 명덕과 신민으로써 이 학문의 표준을 삼는 자는 정암 선생으로부터 비롯 되었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휘(이름)는 광조요, 자는 효직이니 한양인이다.
    성화 임인(성종 13년, 1482년)에 출생하여 정덕 경오(중종 5년, 1510년)에 진사장원하고 을해(1515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기묘년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밀의하여 주초위왕이 왕이 된다는 무근지설을 조작하여 변을 일으켜 변고가 일어나 즉시 이곳 능주에 유배되니 옥주는 관노 문후종이다.
    다음달 12월 20일에 사약이 내려 돌아가시었다.
    그로부터 149년 뒤 정미년(현종 8년, 1667)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월이 오래되면 그 유허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그곳에 비를 세워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고자 하니 옛날 정부자께서 영락정에 대한 글을 지으시면서 물은 차마 이를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이를 버리지 못한다고 하니
    아! 이 글을 이 비에 새김이 합당할지로다.
    정미년(현종 8년, 1667) 4월 병진에 후학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성균관 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은 비문을 짓고 정헌대부원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제주세자시강원찬선 송준길은 비문을 쓰고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은 전서를 쓰다.
    #죽수서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0호)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
    이 서원은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을 배향하고 있다.
    1570년(선조 3)에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짓고, 죽수라는 사액을 받았다.
    조광조는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조광조와 사가독서를 함께 했던 양팽손도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성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자연히 만나 서로 의리를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유배된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고 죽자, 양팽손은 몰래 시신을 거두어 화순군 이양면 증리 서원동에 장사를 지내고 마을에 초가집을 지어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그러다가 1568년(선조 1)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이듬해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함께 조정에서는 조광조를 향사할 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지은 것이다.
    1613년에 중수하였고, 1630년 유림들과 조정의 김장생등이 뜻을 모아 양팽손도 추배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겨우 단을 마련하여 제향하여 왔다.
    1971년 제주 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 을 복원하였다.
    1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를 중심으로한 후손들이 본래의 위치인 모산리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전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9년에 동재를, 1994년에 관리사를 신축하였다.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이 있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 를 기록해 두고 있다.
    #정암선생 서원유지추모비
    위치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서원동
    정암 조광조선생이 돌아가시자 학포 양팽손에 의해 그의 시신이 묻힌 곳으로 그를 기념하여 1905년에 면암 최익현 글로 세운 비.
    #초장지(처움 시신을 묻은 장소 : 증리 189번지 근방)
    #증리 서원동 당산제
    화순군 이양면 증리 서원동에서는
    '당산제'라 하여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당산 할머니 앞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제관은 마을회의를 통해 선정하며 제비는 마을 기금으로 충당한다.
    제의 절차는 당신 할머니에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유교식 제차에 따라 엄숙하게 진행된다. [연원 및 변천] 당산제를 언제부터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조상대대 로 한 해도 거른적 없이 매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산제는 마을 입구에 위치한 '당산 할머니'에서 지내며, 신체는 느티나무이다.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여년 되며,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인생유정-주현미
    #인생유정-색소폰 연주
    #인생유정-벅성은
    #인생유정-김용임
    #인생유정-노래방 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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