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이 아닌 반정공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왕이었기에 재위 초기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중종은 조회가 끝나면 반정공신들이 나갈 때까지 서 있어야 할 정도로 그들의 권세에 눌려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513년 정도가 되자 나이든 반정공신들은 모두 사망하게 되고, 이제 중종은 자신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을 모으게 됩니다. 이들을 사림파라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조정에 나아간 직후부터 기존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펼쳤고, 중종은 이를 적극 후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주장과 발언이 도를 넘어섰고, 결국 자신이 초라해진다고 느끼자,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훈구파 대신들에게 밀서를 내려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기묘사화입니다. 이로서 의금부에 투옥된 조광조는 이후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중종이 보낸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훗날 퇴계 이황은 조광조의 개혁이 중도에 하차한 데 대하여 ① 뜻은 높았으나 정세 전반을 파악하지 않고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한 점과 ②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실패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 끝으로 조광조에 대해 예전에 정리해 놓은 글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광조, 그의 개혁은 실패했나 : blog.naver.com/jungyoupkim/220944947446 )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요런 인간이라 이거 보고는 조광조 인식이 뚝 떨어짐. 진~짜 답도 없는데 고집은 억척같이 쎈데다... 하아... 이런 것 좀 드라마에서 그려줘야하는데 안 하니까 중종만 못 된 인간이 됨.
조광조가 살던 시대는 계유정난(수양대군과 그 일파가 일으킨 변란)으로 출세한 공신들과 그 후손인 훈구파(보수세력)가 대토지를 겸병하고 백성들을 무척이나 괴롭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가 중종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중종 역시, 훈구세력의 도움으로 왕 노릇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실은 뭐냐면... 글자 한 자 못 읽는 군인 출신 공신들이 정승, 판서 자리에 올라 국정을 논의 했다는 거예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건 당연하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지식인인 유생들은 열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식한 군인과 공신들이 부패한 정치를 계속하며 나라를 망쳐놓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때 등장한 조광조는 젊은 유생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시 부패해져가던 시대를 혁신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치면, 급진개혁파였던 셈이죠. 불과 서른살 남짓한 나이에 대사헌(검찰총장)이 되어 훈구파를 몰아내고 국정을 혁신하려고 했지만, 정치 경험과 인생 공부가 너무 부족했어요. 현실 정치를 도모해야 하는 데 이상 정치만 구현하려고 했지요. 결국, 중종의 눈밖에 나면서 개혁은 실패하고 목숨을 잃는 최악의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조광조의 처신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피가 끓는 나이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건,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올바른 행동인 것이죠. 다만, 개혁을 위한 자기 세력이 너무 없었고 정치 경험 부족으로 노련한 보수세력(훈구파)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johnathanha9340 참 나원... [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 참~으로 나라 생각한다. 중종 선택이 올바른 것이지. 이순신장군이 그 당시 인물이었으면 조광조가 이순신장군 가만 뒀겠음?
조광조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이지만 "무언지는 모르나 이상정치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선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역사스페셜을 통해 조금은 실체에 가까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조광조 위배지인 화순 쌍봉사 옆 동네 '증리'에 조광조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터의 표지석을 답사했던 적이 있었고, 능주 장터엔 이 영상에도 등장하는 사약받았던 집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기에 몇 차례 돌아본 바 있어 감회가 새롭군요~ 조광조의 사상은, 고려말 성리학자들 중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불사이군이란 명분에 초야에 묻혔던 '고려파'의 후예로 성리학 근본주의를 따른 듯 보입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외골수파라 할까요? 요순 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들이 할 수 있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 조광조의 추종자들이 그뒤에도 조선을 이끌었는데 율곡이 대표라 하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임금도 선비이고 선비의 우두머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율곡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은 조광조의 이 말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꿨을 뿐이라 보입니다. 퇴계는 '왕은 선비가 아니고' 하늘을 대역하는 것이고 선비들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한다는 왕권강화 입장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듯한 느낌이고요. "왕도 선비다"와 "왕은 선비의 보좌를 받아 하늘을 대역한다"는 견해 차이는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과 땅만큼 다른 듯 여겨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다는 입장은 313년 로마 기독교 공인 이래 지금까지 이단 시비로 화형에 처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으나, 로마 시대 정통으로 인정한 "예수는 신이다"는 아타나시우스파? 이론은, "황제도 신이다"와도 부합하기에 황제도 좋아했고, 동시에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되고 신부들은 교황 즉 신의 대리인의 대리인이라 성직자인 신부들의 말이나 설교는 신의 말씀과 동일시되어 절대권력이 되기에 '예수는 사람'이란 이론을 펴는 영지주의자 등은 추방되고 18세기까지도 화형을 당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종교 이론을 두고 언어의 유희에 빠져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마나 마빡이나 같은 뜻 아니냐? " 싶겠지만, 그 언어의 유희 뒤에 '절대권력'이냐 '상대권력'이냐는 권력관계가 깔려 있거든요^^ 예를 들어, 교황이 하는 일엔 공적인 일 사사로운 일도 있을 텐데 사사로이 하는 일은 개인 일이니 아래 성직자들이 거부해도 제재할 '종교적 권위'가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난 2천년 그리 피비린내 나는 화형 등 비인간적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예수는 신이다"는 신학이론을 고수해 온 건 아닐까요??? 조광조는, "왕도 선비다"는 말을 은연중 내뱉음으로써 고래로 전해오는 즉 딱히 말로 안 해도 '왕권신수설적인 신화의 상징인 소격서' 혁파를 죽기로 밀어부침으로써 왕 뒤에 가려진 종친ㆍ대비 등 실세?들과의 '종교전쟁'을 촉발시켰고, 왕의 신성한 절대 권위를 능멸한 꼴이 되었지 않았을까요? 짐작컨대, 소격서 폐지 문제가 나오자 당시 대비나 종친들이 중종에게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이 능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중국 역사 드라마에 보면, 황제의 명을 내릴 땐 '하늘의 뜻을 받들어 : 봉천)란 문구가 반드시 처음에 들어가는데, 조선에선 중국과의 관계상 이 표현을 쓸 수 없기에 대신 소격서에서 제사를 올림으로써 '고조선부터의 천자국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또 왕권의 권위를 나름 지켜온 셈인데, 조광조는 소격서 문제가 성리학적 관점에선 미신적 요소란 생각만 했지, 왕이 전제 왕권을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지탱하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란 '종교적 기능'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광조는 유학자로서는 뛰어났을 지 모르나, 소격서가 왕권의 신성을 담보하고 그게 종교적 기능을 한다는 걸 간과한 실패한 정치인이거나 정치역량이 부족했던 듯 보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 등에선 조광조는 반대파들이 음해하여 '주초위왕'이란 잎사귀를 만들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역사스페셜은 이게 중종이 직접 밀지를 내려 만든 책략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즉 중종이 직접 기획, 감독, 연출하여 조광조 일파를 척결한 종중의 친위 쿠데타이었던 게죠^^ 소격서 폐지 이후 현량과가 시행되었는데 서경덕 화담 선생은 수석으로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식이 수석으로 천거되어 대사성에 올랐다가 죽임을 당했군요. 서화담 선생이 그 때 출사했더라면 사약을 받을 뻔했네요 ^^ 암튼 조광조의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율곡을 거쳐 송시열로 ~ 노론 300년 일당독재를 거쳐 그 후손들이 지금도 학계(서울대)ㆍ정계ㆍ경제계. 법조계(김&장)를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고 있다고들 합니다(배기성 역사 강사 유튜브 등 다수). 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편가르기, 흑백논리, 진영논리에 쉽게 휩쓸리는 문화풍토에서 자유롭지 못 한 데는, 이런 조광조 류의 성리학 근본주의 사상의 영향이 그가 죽은지 거의 5~600년이 지나감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영상을 보고서 소름이 느껴졌습니다 ~😢~
여기서 조광조는 임금을 찍어누르려는 권신도 아니였고 임금 비위 맟추기만 신경써서 사리사욕을 추구하려는 간신도 아니였습니다. 솔까말 그럴 인물이 아닌건 중종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너무 유학 근본주의를 이루려는 목적이 너무 강해서 속된 표현으로 임금을 갈구고 심기를 어지럽게 한게 잘못인거죠. 즉 상사는 A를 보고 있는데 부하직원을 B를 보고 얘기만 한다면 그 부하직원을 좋게 볼 상사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는 조광조는 선왕이 정한것도 잘못된 것이면 선왕도 비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선왕들 중에서 세종대왕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대로 찍힌것이죠. 그리고 나중에 사약을 받을때도 여기에 중종 임금의 마음도 있었던 것을 죽는 순간까지도 몰랐던 것이죠.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임금은 만나주지 않았죠. 조광조는 죽는 순간까지도 임금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을 몰랐을겁니다. 자기가 옳다는 자기의가 강했던 것이죠.
현량과 ㅋㅋㅋ 50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음, 간판이나 재주를 개인 탐욕이나 샅된 무리 탐욕에나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나라 공동체나 민족 나아가 인류을 위해 쓰는 이들은 극히 드물음, 오히려 나라 공동체 세금이나 도둑질 안하면 잘했다 할 정도이니 참 시대를 초월하여 같찮네,
조광조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이지만 "무언지는 모르나 이상정치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선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역사스페셜을 통해 조금은 실체에 가까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조광조 위배지인 화순 쌍봉사 옆 동네 '증리'에 조광조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터의 표지석을 답사했던 적이 있었고, 능주 장터엔 이 영상에도 등장하는 사약받았던 집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기에 몇 차례 돌아본 바 있어 감회가 새롭군요~ 조광조의 사상은, 고려말 성리학자들 중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불사이군이란 명분에 초야에 묻혔던 '고려파'의 후예로 성리학 근본주의를 따른 듯 보입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외골수파라 할까요? 요순 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들이 할 수 있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 조광조의 추종자들이 그뒤에도 조선을 이끌었는데 율곡이 대표라 하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임금도 선비이고 선비의 우두머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율곡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은 조광조의 이 말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꿨을 뿐이라 보입니다. 퇴계는 '왕은 선비가 아니고' 하늘을 대역하는 것이고 선비들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한다는 왕권강화 입장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듯한 느낌이고요. "왕도 선비다"와 "왕은 선비의 보좌를 받아 하늘을 대역한다"는 견해 차이는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과 땅만큼 다른 듯 여겨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다는 입장은 313년 로마 기독교 공인 이래 지금까지 이단 시비로 화형에 처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으나, 로마 시대 정통으로 인정한 "예수는 신이다"는 아타나시우스파? 이론은, "황제도 신이다"와도 부합하기에 황제도 좋아했고, 동시에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되고 신부들은 교황 즉 신의 대리인의 대리인이라 성직자인 신부들의 말이나 설교는 신의 말씀과 동일시되어 절대권력이 되기에 '예수는 사람'이란 이론을 펴는 영지주의자 등은 추방되고 18세기까지도 화형을 당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종교 이론을 두고 언어의 유희에 빠져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마나 마빡이나 같은 뜻 아니냐? " 싶겠지만, 그 언어의 유희 뒤에 '절대권력'이냐 '상대권력'이냐는 권력관계가 깔려 있거든요^^ 예를 들어, 교황이 하는 일엔 공적인 일 사사로운 일도 있을 텐데 사사로이 하는 일은 개인 일이니 아래 성직자들이 거부해도 제재할 '종교적 권위'가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난 2천년 그리 피비린내 나는 화형 등 비인간적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예수는 신이다"는 신학이론을 고수해 온 건 아닐까요??? 조광조는, "왕도 선비다"는 말을 은연중 내뱉음으로써 고래로 전해오는 즉 딱히 말로 안 해도 '왕권신수설적인 신화의 상징인 소격서' 혁파를 죽기로 밀어부침으로써 왕 뒤에 가려진 종친ㆍ대비 등 실세?들과의 '종교전쟁'을 촉발시켰고, 왕의 신성한 절대 권위를 능멸한 꼴이 되었지 않았을까요? 짐작컨대, 소격서 폐지 문제가 나오자 당시 대비나 종친들이 중종에게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이 능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중국 역사 드라마에 보면, 황제의 명을 내릴 땐 '하늘의 뜻을 받들어 : 봉천)란 문구가 반드시 처음에 들어가는데, 조선에선 중국과의 관계상 이 표현을 쓸 수 없기에 대신 소격서에서 제사를 올림으로써 '고조선부터의 천자국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또 왕권의 권위를 나름 지켜온 셈인데, 조광조는 소격서 문제가 성리학적 관점에선 미신적 요소란 생각만 했지, 왕이 전제 왕권을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지탱하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란 '종교적 기능'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광조는 유학자로서는 뛰어났을 지 모르나, 소격서가 왕권의 신성을 담보하고 그게 종교적 기능을 한다는 걸 간과한 실패한 정치인이거나 정치역량이 부족했던 듯 보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 등에선 조광조는 반대파들이 음해하여 '주초위왕'이란 잎사귀를 만들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역사스페셜은 이게 중종이 직접 밀지를 내려 만든 책략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즉 중종이 직접 기획, 감독, 연출하여 조광조 일파를 척결한 종중의 친위 쿠데타이었던 게죠^^ 소격서 폐지 이후 현량과가 시행되었는데 서경덕 화담 선생은 수석으로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식이 수석으로 천거되어 대사성에 올랐다가 죽임을 당했군요. 서화담 선생이 그 때 출사했더라면 사약을 받을 뻔했네요 ^^ 암튼 조광조의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율곡을 거쳐 송시열로 ~ 노론 300년 일당독재를 거쳐 그 후손들이 지금도 학계(서울대)ㆍ정계ㆍ경제계. 법조계(김&장)를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고 있다고들 합니다(배기성 역사 강사 유튜브 등 다수). 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편가르기, 흑백논리, 진영논리에 쉽게 휩쓸리는 문화풍토에서 자유롭지 못 한 데는, 이런 조광조 류의 성리학 근본주의 사상의 영향이 그가 죽은지 거의 5~600년이 지나감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영상을 보고서 소름이 느껴졌습니다 ~😢~
조광조 역 맏으신분 정말 연기 잘하시네요..요즘은 왜 저런 훌륭한 연기자가 없을까요?
그립습니다♡♡♡
너무재밌당ㅋㅋㅋ 요새는 사극이 없는데 예전꺼 되돌려보니 재밌어요ㅋ 많이올려주세요ㅋ
글쵸.
진심 대하극 꿀잼..
@@tv.2745 )
극좌 민노총소속 언론귀족노조의 공중파장악 단순 가십거리와 선동프로그램만 제작
싫거든
이번편은 특히 사극연기에 뛰어난 배우분들이 많으시네요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좋은자료 덕분에 재미있게 보구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계속 자료 올려주세요. ~~
역사의 라이벌 안올려주신거 아직 많이 있읍니다
@@zhugelianglove 네. 알고있습니다.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이 아닌 반정공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왕이었기에 재위 초기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중종은 조회가 끝나면 반정공신들이 나갈 때까지 서 있어야 할 정도로 그들의 권세에 눌려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513년 정도가 되자 나이든 반정공신들은 모두 사망하게 되고, 이제 중종은 자신의 정치를 펼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을 모으게 됩니다. 이들을 사림파라고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광조입니다. 조광조는 조정에 나아간 직후부터 기존 훈구파를 몰아내기 위한 과감한 정책을 펼쳤고, 중종은 이를 적극 후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주장과 발언이 도를 넘어섰고, 결국 자신이 초라해진다고 느끼자,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훈구파 대신들에게 밀서를 내려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를 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기묘사화입니다. 이로서 의금부에 투옥된 조광조는 이후 유배를 갔다가 그곳에서 중종이 보낸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훗날 퇴계 이황은 조광조의 개혁이 중도에 하차한 데 대하여 ① 뜻은 높았으나 정세 전반을 파악하지 않고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한 점과 ②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실패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 끝으로 조광조에 대해 예전에 정리해 놓은 글을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광조, 그의 개혁은 실패했나 : blog.naver.com/jungyoupkim/220944947446 )
영상 잘봤습니다 ~~
잘보겠읍니다.
역사의 라이벌 계속 올려주세여.
혹시 영조대 사도세자나 인수대비 대 연산군 있으면 올려주세요
그러고 보니 역사의 라이벌이 거의 조선시대 역사네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생각된다 , 무리가 생기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부패한다는 말이 맞는거 같다
조광조
기묘사화를 확실하고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명작
조광조같은 부하있으면 그누구도 못버티지 과유불급이라고 왕권국가에서 왕 머리꼭대기에서 놀려했으니 토사구팽당하는거지 머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요런 인간이라 이거 보고는 조광조 인식이 뚝 떨어짐. 진~짜 답도 없는데 고집은 억척같이 쎈데다... 하아...
이런 것 좀 드라마에서 그려줘야하는데 안 하니까 중종만 못 된 인간이 됨.
지금 이 중종의 입장과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신하들을 사랑하지만 원칙주의와 권력에 대한 무능한 집착과 그들이 언젠가 자신을 향해 칼날을 들이켜세울 것 같은 두려움이 잘못된 선택을 이끌었네요.
Please say the name of dramas about jungjeong king.I have watched queen for 7 days.if there are other series about this king please say their name.
이런 다큐 좀 다시 만들어라 KBS!!!!!!!!
돈도 시청률도 안되니 절대 그럴리없을듯요 .... ㅜ
그많은 수신료는
수두룩빽빽 월급루펑들이 꿀꺽꿀꺽
조광조가 살던 시대는 계유정난(수양대군과 그 일파가 일으킨 변란)으로 출세한 공신들과 그 후손인 훈구파(보수세력)가 대토지를 겸병하고 백성들을 무척이나 괴롭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가 중종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중종 역시, 훈구세력의 도움으로 왕 노릇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실은 뭐냐면... 글자 한 자 못 읽는 군인 출신 공신들이 정승, 판서 자리에 올라 국정을 논의 했다는 거예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건 당연하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지식인인 유생들은 열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식한 군인과 공신들이 부패한 정치를 계속하며 나라를 망쳐놓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때 등장한 조광조는 젊은 유생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당시 부패해져가던 시대를 혁신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치면, 급진개혁파였던 셈이죠. 불과 서른살 남짓한 나이에 대사헌(검찰총장)이 되어 훈구파를 몰아내고 국정을 혁신하려고 했지만, 정치 경험과 인생 공부가 너무 부족했어요. 현실 정치를 도모해야 하는 데 이상 정치만 구현하려고 했지요. 결국, 중종의 눈밖에 나면서 개혁은 실패하고 목숨을 잃는 최악의 결과를 낳아버렸습니다.
조광조의 처신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피가 끓는 나이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건,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올바른 행동인 것이죠. 다만, 개혁을 위한 자기 세력이 너무 없었고 정치 경험 부족으로 노련한 보수세력(훈구파)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습니다.
잘봤습니다.글모르는 정승 판서가 누구인가요.
몰라 묻습니다.
누구인가요?
@@tv.2745 민발과 최적 같은 군인출신 공신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1824226&memberNo=17094144
박진성씨 에서는 성종역을 하셨었는데.....
성종이 중종 으로 환생 ㅎㅎ
왕과비선 성삼문이죠.
무리가 생기면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1비ㅔㄱㅈ삐빕
그렇게 결국 훈구파를 몰아냈지만 사대부들은 또다시 권력을 탐하고 별것도ㅠ아닌걸로 파를 나눠 싸우고 퇴보시키고...
개혁도 천천히 하는거지..상대방과 타협점도 찾고 절충점도 찾으면서 저런식으로 무대포로 개혁을 시도하면 어느 한쪽이든 피 보는건 당연한거지..
ㅇㅇㅇㄹㅇ 정치는 패기로만 하는게 아닌거같음 어느정도 노련함도 필요한거 같습니다 조광조가 저당시 조언하고 훈수해줄 능력잇는 선배들이 있었음 어땠을까 생각되네요
그러나 중종의 판단은 잘한것이다 조광조는 너무 강하엿고 그 속내가 어떤것인지는 사실 아무도모른다 천천히해도되는걸 왜 그리 무섭게그리고왕을 제멋대로해가며해야할것인가 조는 어리석고 무섭돋ㄱㆍ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종은 나라를 진심으로 위하고 왕을 위해 헌신한 신하들을 잘못된 선택으로 희생시켰습니다. 중종은 잘못된 왕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렸어야 했지요.
@@johnathanha9340 참 나원...
[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
참~으로 나라 생각한다.
중종 선택이 올바른 것이지. 이순신장군이 그 당시 인물이었으면 조광조가 이순신장군 가만 뒀겠음?
@@johnathanha9340 중종이 제대로한거... 잘못한건 애초에 저 조광조를 등용한거부터가 문젠거죠
사실을 아는자가 살아지거나 감추고 외곡하는자가 후일 나타나 누구는역적으로 또 누구는 공신으로 평가되는구나?
진실은 사실에 근거해서 후일역사학자가
바로잡는구나.
나라를위해 국민을위해 일 한자는 추앙받고
사욕을 채우는자는 벌을받아야
외곡X 왜곡O
외곡?🤣
살아지는건 머냐ㅋㅋ
📰구독 👍좋아요 ⏰알람 ...... 👌오케이. 💕 (^^) (__)(^^) 영상 잘보고 가요
옳고그름을 떠나 반정공신의 압박을 부담스러워하던중종이 더심한 압박을가하는 정암 의세력에 지쳤다고 보는것이 맞다
김형일씨와 임혁씨가 실제로는 11살 차이이신데.... 김형일 60년생,임혁 49년생...
너무 지나치면 대부분 화가 미친다는 교훈을..
역사는 반복되고, 현재와 이어져 있다.
하륜 vs 황희(용의 눈물), 또는 임사홍 vs 성삼문(왕과 비)
조광조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이지만 "무언지는 모르나 이상정치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선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역사스페셜을 통해 조금은 실체에 가까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조광조 위배지인 화순 쌍봉사 옆 동네 '증리'에 조광조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터의 표지석을 답사했던 적이 있었고, 능주 장터엔 이 영상에도 등장하는 사약받았던 집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기에 몇 차례 돌아본 바 있어 감회가 새롭군요~
조광조의 사상은, 고려말 성리학자들 중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불사이군이란 명분에 초야에 묻혔던 '고려파'의 후예로 성리학 근본주의를 따른 듯 보입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외골수파라 할까요? 요순 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들이 할 수 있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 조광조의 추종자들이 그뒤에도 조선을 이끌었는데 율곡이 대표라 하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임금도 선비이고 선비의 우두머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율곡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은 조광조의 이 말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꿨을 뿐이라 보입니다.
퇴계는 '왕은 선비가 아니고' 하늘을 대역하는 것이고 선비들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한다는 왕권강화 입장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듯한 느낌이고요.
"왕도 선비다"와 "왕은 선비의 보좌를 받아 하늘을 대역한다"는 견해 차이는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과 땅만큼 다른 듯 여겨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다는 입장은 313년 로마 기독교 공인 이래 지금까지 이단 시비로 화형에 처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으나, 로마 시대 정통으로 인정한 "예수는 신이다"는 아타나시우스파? 이론은, "황제도 신이다"와도 부합하기에 황제도 좋아했고, 동시에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되고 신부들은 교황 즉 신의 대리인의 대리인이라 성직자인 신부들의 말이나 설교는 신의 말씀과 동일시되어 절대권력이 되기에 '예수는 사람'이란 이론을 펴는 영지주의자 등은 추방되고 18세기까지도 화형을 당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종교 이론을 두고 언어의 유희에 빠져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마나 마빡이나 같은 뜻 아니냐? " 싶겠지만, 그 언어의 유희 뒤에 '절대권력'이냐 '상대권력'이냐는 권력관계가 깔려 있거든요^^
예를 들어, 교황이 하는 일엔 공적인 일 사사로운 일도 있을 텐데 사사로이 하는 일은 개인 일이니 아래 성직자들이 거부해도 제재할 '종교적 권위'가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난 2천년 그리 피비린내 나는 화형 등 비인간적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예수는 신이다"는 신학이론을 고수해 온 건 아닐까요???
조광조는, "왕도 선비다"는 말을 은연중 내뱉음으로써 고래로 전해오는 즉 딱히 말로 안 해도 '왕권신수설적인 신화의 상징인 소격서' 혁파를 죽기로 밀어부침으로써 왕 뒤에 가려진 종친ㆍ대비 등 실세?들과의 '종교전쟁'을 촉발시켰고, 왕의 신성한 절대 권위를 능멸한 꼴이 되었지 않았을까요?
짐작컨대, 소격서 폐지 문제가 나오자 당시 대비나 종친들이 중종에게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이 능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중국 역사 드라마에 보면, 황제의 명을 내릴 땐 '하늘의 뜻을 받들어 : 봉천)란 문구가 반드시 처음에 들어가는데, 조선에선 중국과의 관계상 이 표현을 쓸 수 없기에 대신 소격서에서 제사를 올림으로써 '고조선부터의 천자국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또 왕권의 권위를 나름 지켜온 셈인데, 조광조는 소격서 문제가 성리학적 관점에선 미신적 요소란 생각만 했지, 왕이 전제 왕권을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지탱하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란 '종교적 기능'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광조는 유학자로서는 뛰어났을 지 모르나, 소격서가 왕권의 신성을 담보하고 그게 종교적 기능을 한다는 걸 간과한 실패한 정치인이거나 정치역량이 부족했던 듯 보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 등에선 조광조는 반대파들이 음해하여 '주초위왕'이란 잎사귀를 만들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역사스페셜은 이게 중종이 직접 밀지를 내려 만든 책략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즉 중종이 직접 기획, 감독, 연출하여 조광조 일파를 척결한 종중의 친위 쿠데타이었던 게죠^^
소격서 폐지 이후 현량과가 시행되었는데 서경덕 화담 선생은 수석으로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식이 수석으로 천거되어 대사성에 올랐다가 죽임을 당했군요. 서화담 선생이 그 때 출사했더라면 사약을 받을 뻔했네요 ^^
암튼 조광조의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율곡을 거쳐 송시열로 ~ 노론 300년 일당독재를 거쳐 그 후손들이 지금도 학계(서울대)ㆍ정계ㆍ경제계. 법조계(김&장)를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고 있다고들 합니다(배기성 역사 강사 유튜브 등 다수).
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편가르기, 흑백논리, 진영논리에 쉽게 휩쓸리는 문화풍토에서 자유롭지 못 한 데는, 이런 조광조 류의 성리학 근본주의 사상의 영향이 그가 죽은지 거의 5~600년이 지나감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영상을 보고서 소름이 느껴졌습니다 ~😢~
27:26 강이식 장군 & 박헌영
조광조가 정말 잘난인물인가 사람 심리 하나 읽지 못하는 멍텅한 작자로다
저자는 성리학이라는 다소 망상적인 학문에 심취하여 막스베버가 말한 이념형을 현실과 혼돈한 바보다
국민의암당이구만
하루 1~2시간 운동해서 군살좀 빼고 근육 키워보려던 헬린이 중종
새벽부터 하루종일 운동 조지려는 헬창 트레이너 조광조
점점 지쳐가는데 식단까지 관리하면서 닭가슴살만 쳐먹으라고 하니 삔또가 상해버린 헬린이 중종
중종 임금 역 맡으신 박진성 배우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시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역사를 반추하노라니 사는 게 아련해 집니다...
박진성 배우님 정말 반가워요. 응원합니다.
저땐 도학의 나라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짖지!
이 영상을 보고 조광조의 진정한 나라사랑을 보았네요. 안타까운 신하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에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런가요?
조광조역 배우는 한명회역이 잘어울리던데
남곤 ㅡ 임진일 / 이장곤 ㅡ 박건식 / 중종 ㅡ 박진성 / 조광조 ㅡ 임혁 / 심정 ㅡ 김시원 / 김정 ㅡ 손효균 / 정굉필 ㅡ 박순역 배우 / 횽경주 ㅡ ? /이행 ㅡ 박용식 / 김식 ㅡ 김형일 / 성운 ㅡ 양길사위역 배우 / 이한위 배우 / 내관 ㅡ 하대경 / 김성찬 배우 / 금부도사 ㅡ 이계영
정치란 결국 균형이 중요하다 어느정도 반대파의 비위도 맞춰줘야 더 평탄하게가지 지 혼자만 잘났다고 나대면 탈나기마련임 조광조도 그것까지 내다볼 능력은 없었던거지
중종은 명군도 암군도 아닌 범군(혹은 용군, 평범한 군주)
평군이나 노력한 군주라고 생각함.
여기서 조광조는 임금을 찍어누르려는 권신도 아니였고 임금 비위 맟추기만 신경써서 사리사욕을 추구하려는 간신도 아니였습니다.
솔까말 그럴 인물이 아닌건 중종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너무 유학 근본주의를 이루려는 목적이 너무 강해서 속된 표현으로 임금을 갈구고 심기를 어지럽게 한게 잘못인거죠.
즉 상사는 A를 보고 있는데 부하직원을 B를 보고 얘기만 한다면 그 부하직원을 좋게 볼 상사는 없을 겁니다.
심지어는 조광조는 선왕이 정한것도 잘못된 것이면 선왕도 비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선왕들 중에서 세종대왕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대로 찍힌것이죠.
그리고 나중에 사약을 받을때도 여기에 중종 임금의 마음도 있었던 것을 죽는 순간까지도 몰랐던 것이죠. 임금을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임금은 만나주지 않았죠.
조광조는 죽는 순간까지도 임금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을 몰랐을겁니다. 자기가 옳다는 자기의가 강했던 것이죠.
조선실록에 광인이라 기록 된 이는 초기에 정암과 중기에 교산 두 분 뿐이다,😢😢
이는 시대를 넘 앞서 간 선지식들의 애환이다,😢
백성을 위하는 자유의 화신 둘이 시대는 참수하고 백성은 여전히 지금까지 애달아 있다,,😢😢
100년 뒤에나 그런 날이 올까나~~
타협없이 순수하게 밀어부친 것은 매우 좋았다 봄, 그리고 개혁하고자 함에 타협이 끼게 되면 이미 반은 글어먹었다 생각함, 타협=굴욕이 많고 다수 약자들 피와 고통을 요구한 경우가 많기에,
중종도 자기 살기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함
숙종도 중종을 닮았음을.
중종과 숙종은 전혀다른 개임금들이다.
두경승이 조광조로 환생하다니!!!
바로 전생이 하륜!
말이안통하는애들만큼 짜증나는인간들이없지 근데 진짜연기자분들 잘하시네요 역할에따라 이렇게 다르게잘하시네 지금은 못보는게 아쉬을뿐
26:23 정작 저들이 대국으로 섬기는 명나라는 황제가 스스로 도교에 심취하여 스스로 도사라고 칭했는데 왜 명나라에 대해서는 침묵을 할까? ㅋㅋㅋ
현량과 ㅋㅋㅋ 50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음, 간판이나 재주를 개인 탐욕이나 샅된 무리 탐욕에나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고 나라 공동체나 민족 나아가 인류을 위해 쓰는 이들은 극히 드물음, 오히려 나라 공동체 세금이나 도둑질 안하면 잘했다 할 정도이니 참 시대를 초월하여 같찮네,
홍윤식이 김식으로하시니 또다르게보이시네
수달 아우야 ~~~
인조가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했듯이 역린을 건드릴때는 비참한 역사 !! 슬퍼요
중종 (11대왕) ~ 정암 조광조
과유불급 역린을 건드리니 빡이 칠 수 밖에....
드라마 한명회에 나왓던 사람들이 더 많네 성종 임금 노사신 유수 유자광 이세좌 강맹경 윤필상 홍윤성 인혜대비가 여기 다 모여잇네
청소년기에 정암선생 을 존경했는데 말은물에 고기가 못살듯 정치에있기엔 맑은사람이었지요 지금보면 중종한테이용당한 꼴 이고버림받은것 같지요 옳은뜻 만큼융통성과 유연함 이있었다면 싶지만 그의이상정치는 현실에 맞지않지요
사람을 너무 몰아세우면 안되지. 조광조는 학무는 뛰어났지만 지혜는 부족했네.
희빈이 중전당의를....
조광조는 라스푸틴 같은 인물이고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 훈구+사림 모두 정리한 것...
95년이면 김영삼 정권 시절?
딱 그시절 느낌 드라마와 다큐네요
대사헌 조광조 대감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대사헌은 종2품 상계입니다. 즉 영감이지 대감이 아닙니다.
대감은 정2품 상계부터가 대감입니다.
왕 중종한테 넘까불다가
정도껏해야지 누굴갈킬라고.
왕을 정도껏 들들볶아야지ㅋㅋㅋ
22:00
예나 지금이나 군자와 소인을 오직 글로서 배운 유생들이라 내면의 수양없이 지식으로 편가르고 싸우는 짓거리는 지금도 마찬가지.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결국 일본에 먹히고
지금도 끝없이 삼국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니 오호 통재로다.
하륜이 여기선 조광조군 🙄
개혁자 조광조. 이마도 조광조를 제대로 사용했다면
나라는 큰 일들을 했을것인데,
중종은 바보... 조광조를 버린
미련의 증종...
죠광죠의 기묘한 사화
조산시대는백성들이지옥였다
최용간 고려, 삼국시대도 백성들의 고통은 똑같다.
지금 문씨 집권도 생지옥 그 자체다
S Ilove ㅆㅇㅈ
조광조에 관한 평가는 여러 갈래이지만 "무언지는 모르나 이상정치를 추구했다는 측면에선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역사스페셜을 통해 조금은 실체에 가까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몇 번 조광조 위배지인 화순 쌍봉사 옆 동네 '증리'에 조광조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터의 표지석을 답사했던 적이 있었고, 능주 장터엔 이 영상에도 등장하는 사약받았던 집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기에 몇 차례 돌아본 바 있어 감회가 새롭군요~
조광조의 사상은, 고려말 성리학자들 중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불사이군이란 명분에 초야에 묻혔던 '고려파'의 후예로 성리학 근본주의를 따른 듯 보입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외골수파라 할까요? 요순 시대를 재현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들이 할 수 있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 조광조의 추종자들이 그뒤에도 조선을 이끌었는데 율곡이 대표라 하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임금도 선비이고 선비의 우두머리"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데, 율곡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은 조광조의 이 말을 철학적인 표현으로 바꿨을 뿐이라 보입니다.
퇴계는 '왕은 선비가 아니고' 하늘을 대역하는 것이고 선비들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한다는 왕권강화 입장으로 약간 차이가 나는 듯한 느낌이고요.
"왕도 선비다"와 "왕은 선비의 보좌를 받아 하늘을 대역한다"는 견해 차이는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과 땅만큼 다른 듯 여겨집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다는 입장은 313년 로마 기독교 공인 이래 지금까지 이단 시비로 화형에 처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실 수 있으나, 로마 시대 정통으로 인정한 "예수는 신이다"는 아타나시우스파? 이론은, "황제도 신이다"와도 부합하기에 황제도 좋아했고, 동시에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되고 신부들은 교황 즉 신의 대리인의 대리인이라 성직자인 신부들의 말이나 설교는 신의 말씀과 동일시되어 절대권력이 되기에 '예수는 사람'이란 이론을 펴는 영지주의자 등은 추방되고 18세기까지도 화형을 당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꾸 종교 이론을 두고 언어의 유희에 빠져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마나 마빡이나 같은 뜻 아니냐? " 싶겠지만, 그 언어의 유희 뒤에 '절대권력'이냐 '상대권력'이냐는 권력관계가 깔려 있거든요^^
예를 들어, 교황이 하는 일엔 공적인 일 사사로운 일도 있을 텐데 사사로이 하는 일은 개인 일이니 아래 성직자들이 거부해도 제재할 '종교적 권위'가 없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난 2천년 그리 피비린내 나는 화형 등 비인간적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예수는 신이다"는 신학이론을 고수해 온 건 아닐까요???
조광조는, "왕도 선비다"는 말을 은연중 내뱉음으로써 고래로 전해오는 즉 딱히 말로 안 해도 '왕권신수설적인 신화의 상징인 소격서' 혁파를 죽기로 밀어부침으로써 왕 뒤에 가려진 종친ㆍ대비 등 실세?들과의 '종교전쟁'을 촉발시켰고, 왕의 신성한 절대 권위를 능멸한 꼴이 되었지 않았을까요?
짐작컨대, 소격서 폐지 문제가 나오자 당시 대비나 종친들이 중종에게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왕권이 능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중국 역사 드라마에 보면, 황제의 명을 내릴 땐 '하늘의 뜻을 받들어 : 봉천)란 문구가 반드시 처음에 들어가는데, 조선에선 중국과의 관계상 이 표현을 쓸 수 없기에 대신 소격서에서 제사를 올림으로써 '고조선부터의 천자국이란 자긍심을 가지고 또 왕권의 권위를 나름 지켜온 셈인데, 조광조는 소격서 문제가 성리학적 관점에선 미신적 요소란 생각만 했지, 왕이 전제 왕권을 휘두르는 절대권력을 지탱하는 종교적 권위의 상징이란 '종교적 기능'을 간과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광조는 유학자로서는 뛰어났을 지 모르나, 소격서가 왕권의 신성을 담보하고 그게 종교적 기능을 한다는 걸 간과한 실패한 정치인이거나 정치역량이 부족했던 듯 보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 등에선 조광조는 반대파들이 음해하여 '주초위왕'이란 잎사귀를 만들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 역사스페셜은 이게 중종이 직접 밀지를 내려 만든 책략이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즉 중종이 직접 기획, 감독, 연출하여 조광조 일파를 척결한 종중의 친위 쿠데타이었던 게죠^^
소격서 폐지 이후 현량과가 시행되었는데 서경덕 화담 선생은 수석으로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신 김식이 수석으로 천거되어 대사성에 올랐다가 죽임을 당했군요. 서화담 선생이 그 때 출사했더라면 사약을 받을 뻔했네요 ^^
암튼 조광조의 근본주의적 성리학은 율곡을 거쳐 송시열로 ~ 노론 300년 일당독재를 거쳐 그 후손들이 지금도 학계(서울대)ㆍ정계ㆍ경제계. 법조계(김&장)를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고 있다고들 합니다(배기성 역사 강사 유튜브 등 다수).
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편가르기, 흑백논리, 진영논리에 쉽게 휩쓸리는 문화풍토에서 자유롭지 못 한 데는, 이런 조광조 류의 성리학 근본주의 사상의 영향이 그가 죽은지 거의 5~600년이 지나감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영상을 보고서 소름이 느껴졌습니다 ~😢~
@@강대봉-e9d 좋은면뭐하노제도을고치지모싸는데
중종이 그릇이 작은게아니라 조광조가 너무 큰 인물임
조광조가 큰 그릇이 아니라 정치하고는 맞지 않는 그릇임.
세종이었어도 조광조는 버림. 이 인간이 큰 그릇이면 나라는 그냥 거덜먹음. 어느 나라 정치가가 와도 공산당 아닌 이상 딱 보면 실질적인 생각이 전혀 없는 이상주의자라 상대할 필요성도 못 느낌.
어떤 성군이라도 조광조는 날려버림... 큰게 아니라 이상하게 휘어진 그릇인거지
적당히좀하지
헬적화가 가장 큰 원인
조광조송한준입니다임혁아저씨만나요놉시다이수창메타남아라지켜라헤이아무도없다
급했어
너무 강하면 부러지지
남곤!
저 도적놈!
이 당시에도 기레기 언로가 있서든가 보다.
조광조도 지분수를 모른건 사실임다.
왕과 신하일진데 간뎅이가 분거 맞습니다.
중종 허수아비 무슨 힘이 있나
조광조 때론 한발 물러설줄도 알아야지....... 이게 사약 받은 이유입니다.
조광조 선 ㅈㄴ 넘네
95년엔...돌들고 국민 팔아먹으며 민주민주 하던 사람들이
나라 살림 거덜내기 바빴는데 이상은 무슨...ㅉ
중종도 쪼자한 왕이였다.
왕까지됀자가 그렇게 배포가 없어서 어따 쓰겠어?
배포가 없어서 연산군이 살려 뒀겠죠
중종은 왕권을 지키기위해 조광조를 벌하였다.
그전에 조광조가 너무 막 나갔음.
인간의 역사는 ~~
급진적인 혁명의 역사가 아니라
점진적인 개량의 역사다,
조광조는 그 이치를 깨닫치 못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개혁을 할려다가
반동을 맞은 것이다,
ㅋㅋㅋ
도가 지나치면 욕심이되지
성리학탈레반의 자폭일대기
자기편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조광조가 어지간히 꼰대였을듯
조광조가 급발진 햇지! 적당히 해야지
드라마 조광조 보다 여기나온 중종이랑 조광조가 더 실제랑 가까울듯
위 극에서 정암은 사람을 참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소격서랑~~
지 목숨을 맞바꾼 어리석은 자,
반정공신 삭훈도 생물학적으로 해결하고
자자손손 세습만 손을 봤어야지,ㅋㅋㅋ
조광조가선택을 못 받은 것은
앞으로 읽어도 조광조, 이효리
뒤로 읽어도 조광조, 이효리
여기선 조광조 맡았는데 왜 대중상만 생각날까
과유불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