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폭탄 도 충격이고 B 29 가 초반에는 성과가 안나왔군요 드뎌 담주에 이오지마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좀 보다보면 한 10분 지난거 같은데 벌써 끝납니다 태평양전쟁 담에 해주실전쟁은 (중일전쟁이나 독소전) 주2회나 시간을 좀 더 늘려주시는걸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
2차대전 적 폭격기 1기 격추 위한 독일의 방공포 및 최초 방공미슬 발사 수 : 88mm 대공포 약 1만발 및 최초 대공미슬 약 20발. ruclips.net/video/Cx_lsh0BJGs/видео.html : German Anti-Air Missiles of World War 2 (동영상 6분1초 이후 참조) 독일 대공포 및 사상 최초 대공 미슬의 적기 1기 격추 필요한 평균 포탄수 및 폭약 사용량 (추진체 및 탄두에 들어간 폭약만, 강철 빼고) 88mm flak36 : 16,000발 - 62.4톤 88mm flak41 : 8,500발 - 51톤 105mm flak38 : 6,000발 - 45톤 독일이 도입한 최초 대공 미슬 : 약 20발 - 1발당 폭약 2.1톤 = 총 폭약 사용량 42톤 -----> 근접신관 경우는 2~3톤 내외 폭약 사용. (독일이 일단 제공권 잃고 영국 미국에 융단폭격 당할 때, 방공포로 영국 미국 폭격기 1대 격추시키기 위해선 대공포탄 1만발 합 50톤 정도 폭약을 터트려야. 만일 제공권을 장악했다면 저 폭약은 독소전의 소련 지상군으로 향했을 것. 독일 방공포 병력 약 90만.) 영미의 근접신관 방공포에 비해 효율 비교할 수 없이 뒤쳐진 독일. -------------------->근접신관은 기존 대공포탄 사용량 약 1/20로 줄임. 근접신관 장착 대공포탄으로 V-1 요격 장면 : 10초~23초 ruclips.net/video/mIzCBY8xeyI/видео.html
2차대전 유럽전선 각 전선별 병력 변화 그래픽 ruclips.net/video/1CqGeAmVu1I/видео.html 이렇게 크게 크게 전체를 스캔하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개별 무기나 특정인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투입되는 전개는 2차대전 전체 상황 파악을 어렵게 합니다. 영상 시청했다면 알겠지만 노든 조준기는 사실 실전에서의 성능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렇게 시간 투입할만한 가치 없는. 전 영상에서 사상 최대라는 레이테 해전. 미일 양측 합산 총 투입 배수량 약 200만톤에, 양측 합산 격침량 약 35만톤 ------------------> 사실 대서양해전에 비하면 한 줌 정도. 독일 유보트 함대가 대서양 해전에서 기록한 총 격침 전과는 약 1,500만톤으로 레이테 투입 양측 총배수량의 약 7배 정도. 이 대댓글에서 첨부한 유럽전선 병력 변화 그래픽의 소련군 변화 보기를. 독소전에 투입된 소련군은 최대 720만 까지 팽창했더군요. 태평양전쟁의 미 지상군은 한 줌이나 한 톨 수준. 노르망디 상륙 후 지속 증강된 북서유럽 전선의 미-영-캐 서부 연합국 병력 역시 종전 직전 400만 조금 넘을 정도로 팽창. 즉 독일은 항복 직전에 약 1,100만의 적 지상군과 투쟁, 그것도 이태리 전선의 미영 연합군 약 60만 제외한 것. 태평양전쟁은 병력 측면에서 유럽 전선에 새발의 새발의 새발의 피. 태평양의 해전이 아무리 거대했다고 해도, 대서양 해전에 투입된 총배수량에 비한다면 역시 새발의 피. 태평양전쟁에 투입된 미 전략폭격부대 규모 역시 유럽의 영미 전략폭격대에 비한다면 사실 한 줌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전 영상에서 꽤나 자세히 다루어진 아이오와급 전함 및 야마토. 2차대전 참전한 모든 교전국 모든 전함의 총 격침 전과, 구닥다리 복엽기 소드피시 단일 기종 격침전과 보다 적습니다. 소드피시는 주로 지중해에서 영국공군의 제공권 확보 아래서 작전하면서 약 50만톤 격침 기록으로, 2차대전 참전국의 모든 항공기 중에서 단일 기종 최고 격침 기록 세웠습니다. 아마도 조사해보면 태평양의 미 항모전단 함재기의 모든 격침 전과 합산과 비교해도 그렇게 꿀리지 않을 수도. 2차대전 모든 미국 전함의 총 격침 기록, 적 상선 포함해 불과 17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상선이 6척이고 태평양의 전과 보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북아프리카 항구 기습한 전과가 더 클 정도. 아이오와급 전함은 사실상 실전 전과 0 이며, 미 모든 항모의 총 격침전과 역시 한 줌 미 잠수함대에 압도에 압도당하는 수준. 여기 전 영상에서 야마토의 협차사격 정밀도 및 야마토나 아이오와급 전함의 최대 약 40km 사거리도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2차대전 당시 사상 최장거리 명중탄은 약 25km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함이 해전에 참여한 대부분의 거리는 20km 이내라고 봐야. 사상 최장거리 명중 기록 역시 태평양 아닌 북해와 지중해에서 독일과 영국이 각각 1회 기록. 즉 설계상 스펙 그런 것 실전과 비교한다면 다 지엽말단 성격. 현재 진행중인 태평양전쟁은 보기에 따라선 디테일의 함정에 빠진 느낌도 듭니다. 특정 전역-국가-개인-무기에 대한 너무나 지나친 디테일은 여러 전역에 대한 고른 시간 배분을 저해하게 됩니다. 만일 현재의 이 디테일을 모든 전역에 고르게 적용한다면 끝없이 늘어지는 진행이 되겠지만, 방송 제작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을 것. 여기서 각각 1회씩 다루어진 사이판-타라와는 사실 스탈린그라드의 도시 한 블럭 인명피해 될지도 의문이라 같은 디테일로 제작하면 스탈린그라드만 몇 년 될 것. 전체적 스캔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전체 전역의 균형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디테일이 되어야.
드디어 이오지마까지 진출했네요. 긴 여정의 대미가 다가오는듯 합니다. 그래봐야 최소 몇 달은 더 걸리겠지만 ㅋㅋ 미국에 밴드오브 브러더스 같은 극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전쟁소재 작품이 있다면 한국에는 역전다방이 있다고 당당하게 외치셔도 되겠습니다. 시청자 누구라도 모두 인정할테니 ㅎㅎ
밴드 오브 브러더스, 제목이 왜 저렇지 그런 생각 해본적 없습니까?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 연극 대사 중 일부,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 100년 전쟁 아쟁꾸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로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을 격려했던 헨리5세의 연설 대사라고 합니다. " 우리 수는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 ------------------->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흘리며 싸운 이들은 국왕-귀족-평민 신분 차이를 넘어 모두 한 형제. ------------------->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후회하리라.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그 직후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미국이 준비를 갖추어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에 지상군을 파병한 것은 대략 43년 초. 미 지상군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43년 2월 튀니지의 캐서린 패스 전투, 롬멜에게 사실상 전멸급 패배당했습니다. 당시 롬멜의 핵심 방어선 마렛 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당하면서 독일군이 철수해 미군은 재정비 기회를 얻었고, 패튼은 그 때 신임 지휘관으로 교체 투입되었던. 43년 5월 독-이 추축국 지상군 25만 병력이 최종 항복하며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그 시점 까지 미군은 보조 역활. 미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북서유럽에서 독일군과 교전한 것은 44년 6월 노르망디 이후. 즉 미 지상군은 45년 5월 독일 항복 까지 북서유럽에서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전투했던 겁니다. 저 짧은 교전을 배경으로 70년대 tv 시리즈 컴뱃, 2000년 이후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가 등장했던 것. 노르망디 전역에서도 독일 기갑부대 80%와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영-캐군이 담당했습니다.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전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코브라 돌파 역시 브래들리의 미1군이 돌파했던 겁니다. 영연방군이 독일 주력을 깡 전투에서 고착 소모시키는 동안, 미군 전방의 독일 방어선이 사실상 알보병 지대로 지극 취약해져 그 약해진 곳을 브레들리의 미1군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 상륙 실행 전 작전 계획에서 이미 그렇게 짜여진. 캐서린 패스 전투로 사실상 신병 수준의 미군에게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기대가 불가능했기에. 패튼은 코브라 돌파 무렵 노르망디에 부임해 재편성되는 쌩쌩한 미3군 지휘를 맡았던 것. 미 지상군이 단독으로 독일 주력 상대한 것은 종전 몇 개월 전인 벌지 전투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너덜너덜해진 독일군 상대. 밴드 오브 브러더스, 컴뱃 시리즈 시청한 사람들은 미 지상군이 독일군 괴멸시킨 주력으로 오해할 여지가 상당합니다. 냉정하게 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 지상군과 제대로 교전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전투 기간 역시 지극히 짧았던. 가장 오래 교전한 영국, 가장 대규모에 엄청난 피를 흘린 소련이 드라마로 다룰만한 에피소드 훨씬 더 넘쳐날 것. 특히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그 제목 부터 표절 성격.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멍청에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ruclips.net/video/c844En8XvC4/видео.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 상륙 병력. 1. 미군 : 공수부대 포함 약 7만3천 (공수부대 약 1만5천). 상륙지는 2곳으로 유타, 오마하. 2. 영국 : 공수부대 포함 약 8만3천 (영국군 약 6만1천, 나머진 캐나다군). 상륙지는 3곳 골드, 주노, 소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해군함정 총합 약 7천. 그 중 전투함 약 1천2백, 상륙주정 약 4천2백, 나머진 수송을 맡은 상선 포함 각종 지원함들. 상륙에 동원된 전투함 중 영국측이 약 9백, 영국측 상륙주정 약 3천3백, 상선 및 각종 지원함 대부분은 영국측 제공. 인공부두 멀버리 미군과 영국군 상륙지점에 건설되었는데 2곳 모두 영국이 건설했습니다. 멀버리 건설 얼마 후 폭풍우 몰아쳐 미군 상륙지에 건설된 멀버리는 파괴되었지만, 영국군 지역 멀버리는 건재. 영국군 지역 인공부두를 통해 상륙한 병력이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대략 120만 정도로 기억하는데 수치 좀 다를수도. 전차와 차량등도 수 만대가 상륙했습니다. 영불해협 해저로는 상륙군에 대한 연료 공급을 위한 해저 파이프도 영국이 설치. 상륙지 배분에서도 영국측이 칼레-독일쪽 방향으로 3곳,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쪽 셀부르 방향 2곳. 상륙지 배분할 때 이미 독일 주력 부대를 영국군이 맡는 식으로 정해짐. 실제로도 독일 기갑부대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상대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 영국공군은 제2전술공군을 별로도 조직해 노르망디 하늘을 휘젓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이 공습당해 부상으로 전선에서 영구히 이탈된 것, 미군 공습이 아닌 영국공군 공습.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기갑군 사령부가 공습당해 지휘관 참모 상당수 사망, 부상으로 독일 기갑부대 반격 3주늦춘 것도 영공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측의 모르탱 역습 에니그마 해독으로 함정파고 팔레즈 포켓으로 몰아넣고 미군에게 돌파 시점 지정도 영국. 독일 주력 기갑부대 상대한 영국측 전차 손실과, 독일 알보병 주로 상대했던 미국측 전차 손실이 거의 대등한 것 ---------------------> 실전 경험 전무했던 생초짜 미군 그리고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영국군 역시 2/3는 신병들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정예병은 일부만 섞인 상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영국 최정예 지상군 제8군은 이미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빼는 순간 노르망디 상륙 노출되니까. 영국에서 출발해 좁아 터진 해협 건너 침공하는데 어떻게 상륙일 당일 미군이 거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육상세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상륙전에 미해군이 다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상 상륙전 자체 최종 투입 병력은 약 100만으로, 미군 22개 사단, 영군군 12개 사단, 캐나다군 3개 사단, 폴란드 1개사단, 프랑스 1개사단 총 39개 사단. 하지만 상륙 당일 투입에선 영국군측이 오히려 약간 더 많았음. 이유는 생초짜 미군 보다는 조금은 더 안전하니까. 노르망디 전역 돌파 전까지 투입 병력에서 미군이 더 많았지만 압도한 것 아닌 미군 22개 사단, 영국캐나다 연방군 15개 사단. (자유 폴란드군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영국측이 무장시킨 군대입니다. 자유 폴란드군은 북아프리카, 이태리에서도 열심히 싸웠죠. 마켓가든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선 영국과 아주 밀접한 동맹 협조관계. 자유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산정권이 자유노조 바웬사 정부에 무너진 이후 바웬사 정부에 자유 폴란드 깃발과 군의 정통성 이전하고 해체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는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브렉시트로 그들 입지가 좁아진 것 안타깝군요. 21세기 현재도 영국군은 폴란드에서 대러시아 공동 방어 훈련 자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고 수준의 동맹 관계.) 노르망디 전역 돌파 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서부 연합군 총병력에선 미군이 약 300만, 영국캐나다군 약 100만으로 미군이 3배. 저 최종 투입 병력만으로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영국군은 북서유럽에 투입하지 않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그리스에서 이미 44년 부터 공산 빨치산 토벌 후 그리스 왕정 복고시켰죠. 영국측 판단이 세월 지나고 보니 미국 보다 더 현명. 영국이 총병력에서 미국에 훨씬 적었던 이유는 인구 자체가 적어서.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영국은 5천만 정도. 독일 제외하곤 단위 인구당 가장 많은 병력 투입했을 겁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몸사림의 가장 큰 원인은 병력 부족 때문, 전차등 장비는 얼마든지 보충 가능했지만 병력은 거의 한계치 징집한 상태라 여유 없었음.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직후 엔빌 상륙작전이라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상륙전 벌였습니다. 미친 비효율의 극치. 영국은 지극 당연히 엔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프랑스 남부에 상륙합니까? 어짜피 노르망디 돌파되면 프랑스 해방인데. 이태리에서도 미군은 프랑스쪽인 이태리 서부, 영국군은 그리스 발칸쪽 아드리아해쪽 동부에 상륙 전진. 영국은 사실 프랑스 상륙 보다는 그리스나 발칸반도에서 중부유럽으로의 침공도 고려했었죠, 스탈린 철의 장막 줄이기 위해. 영국이 힘이 부족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서유럽 침공 합의했지만, 혹시나 하는 측면에서 이태리 동부 해안 침공로 선택. 유고의 티토를 지원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노선 걷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입니다. 미국은 덩치만 큰 어리숙한 최강대국으로 등장했던. 2차대전 서부연합군의 전쟁 밑그림 설계는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다 짠겁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평정, 그 뒤 시칠리 상륙, 이태리 침공 그 다음에 미루고 미룬 북서유럽 침공. 북서유럽 상륙 시기는 영국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미국은 시칠리 침공 생략하고 바로 프랑스 상륙 원했지만 논쟁에서 밀린 것. 영국은 북서유럽 상륙 최대한 미뤄, 독일과 소련 양측 희생이 최대화되기를 의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미국측 고위 인사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이 영국에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을 이렇게. -----------> "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및 미국, 전세계 각지 영국군과 통신할 전용 통신함정 까지 갖추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튀니지 점령 후 프랑스 침공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영국측에 논쟁에서 완전 압도당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카사블랑카 이후 미국도 정신 차리고 전용 통신함정등 갖추고 영국과의 이후 협상에 나섰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상세 세부계획도 영국이 수 년간 세워온 기본 설계에 미군 참전 후 미국이 숟가락 얹은 것. 영국은 지중해 전역 부터 미군을 총사령관 내세우면서, 그 휘하 실질적 작전 수행은 영국군 장군들로 도배하며 꼬드겼고. 노르망디 상륙전에서도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연합 해군 사령관은 영국, 연합공군은 영미 함께. 그렇게 작전 계획이 세워졌기에 영국이 3곳, 미국이 2곳 그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 2곳 배정된 겁니다.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생초짜 미군이 독일 주력군 상대할 수도 없었으니 수용한 것. 물론 상륙 후 실전 경험 쌓은 뒤엔 물주 영향력이 말빨이나 작전계획통을 압도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도 중동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타로 미군이 기어들어가 개고생중이죠. 현재도 영국군은 아주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영국 국익에 유리한 쪽으로 중동에서 활용중. 겉보기엔 영국 수상이 미국의 푸들로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영국측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영국 국익에 활용하는 노련함. 미국은 아직도 과거 영국이 짜놓았던 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미군이 수렁에 빠지고 헤메는 중동은 영국이 떠넘기고 선물한 것. 영국은 베트남전에는 참전 안했습니다. 대신 호주군 대타로 극히 극히 극히 소규모로 살짝 투입시켜 살살 달랬죠.
22:13 나카지마 항공기 제작소는 최 박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일본 육군항공대의 기체를 주로 제작했습니다만, 회사 규모 자체가 미쯔비시 항공기 제작소보다 커서 미쯔비시에서 설계/제작한 제로 전투기도 정작 미쯔비시 항공기 제작소(약 3,800대)보다 나카지마 항공기 제작소(약 6,500대)가 더 많이 제작했습니다. 참고로 적었습니다.
@@꿀단지-b7j 나카지마는 육군 항공기 하야부사, 하야테나 히엔 등을 만들었습니다. 제로센이 미츠비시고요. 미군이 주로 일본 해군 제로센과 싸우는 바람에 하야테등이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국적 라운델 바탕색이 흰건 제로, 하야부사 등등 다 볼 수 있어서 이걸로 구별하는건 어렵습니다. 녹색으로 칠해진 기체에서 흰바탕에 붉은 원이 칠해진 라운델이 많이 보입니다. 흰 기체면 흰바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트기류 ㅎ 설명을 너무잘해주셔서 이해가 쏙쏙~~ 기상청 설명보니 동쪽끝인 우리쪽이 바람이장난아니라고하네요 극한의일기예보나라 대한민국 ㅠ 이러니 사람들이 순할수가없어요 여름겨울온도 날씨차이도심하고 산많고 자원없고 먹을것도 없고 ㅠ
어떻게 단 한편도 재미 없는 편이 없는가!
국방tv 최고!!!
레이테 다룰때는
5회정도 였는데
죰 지루했어요.
빙글빙글 도는기분 😢
크 채 박사님 언제나 멋지십니다, 심 소령님의 전사와 리액션도 너무 좋아요!
기대됩니다. 수요일이 항상!!
언어학과 관련된 교양과목을 듣는데 이 방송에서 본 에르페란토어가 떠오르더군요ㅋㅋ 에스페란토어를 소재로 과제 제출했는데 만점받았습니다 감사함다
제트기류 들어만 봤지 정확히 뭔지 몰랐는데 형성 원리도 알고 얽힌 이야기도 듣고 진짜 50분이 이렇게 짧았나 싶네요
심형이 너무 좋아 ㅎㅎ
이과가 강해야 국가가 강해지는 이유를 국방TV에서 접할 줄은 몰랐어요 ㅎㅎ 이과 안망해라!
다음편까지 또 어떻게 기다리지...ㅜㅜ
아...이전화 다시보기..ㅎㅎㅎ
허준 아나운서님 정리해주시는 스킬이 달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너무 훌륭합니다.
이 분들 참 잼나네요 전문가라고 목에 힘주는 채널이 많은데 공중파 보다 편안하게 진행 잘하네요
심소령님 점점 편안해지고 친해져서 그런가 리액션 가끔 되게 귀엽게 하시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도 최고였어요. 예상 밖의 이야기로 아주 쏙 빠져 보게됩니다.
역시 역전다방 과학도 알게되고 제트기류 형성과정도 알고 최고입니다
😊 0:47 😊😊😮😅😢🎉😮😅듵ㅡ😅😊😊
어떻게 매주 재미있을수가 있는거죠~
정말 너무 좋아요~~!!!!
기상 수업도 배우는 최고의 방송
국방tv 프로그램 중 최고의 프로그램! 😀👍
감사합니다 태평양 전쟁의 유일한 동계전투인 알류샨 전역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역전다방 너무 재밌어요.
아진짜.국방티비 사랑합니다.원장님.교수님들,기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재밌습니다 채박사님같은분이 친구라면 세상 모든현상을 쉽게 말해줄텐데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말 유익한 방송!!!
즐감합니다 ~^^
물리학자들을 존경하기로 다짐했다
크으~ 역사+밀리터리+과학, 게다가 재미까지 이런 프로그램 어디있을까
퇴근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전다방 👍👍🥰
오늘도 너무 재미있네요.
심교수님 설명하신 햅의 고민, 육군 항공대 내부의 여러가지 의견들 등에 대해
앞으로 더 심도있게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와 같은 공군 창설의 역사가 이제는 무인항공기, 우주전 등으로 연결되는군요.
진짜 너어어어어어무 재밌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나넘나 잼나
최고입니다👍👍👍👍👍
선좋아요 후시청
피의 혈전 이오지마가 다가오네요~
오래오래 해주세요, 최애 프로그램입니다.
중 고딩 시절 과학 동아나 보며 알게되었던 코리올리 효과가 이렇게 사용되었군요.....
퇴근 후 맥주 한잔과 함께 보고 있으면
강제로 나도 모르게 유식해져 있음...
태평양전쟁에 대해 정말 다방면으로 분석해주는게 너무 좋네요. 책한권 내도 될듯 👍
편집없이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길수록 좋아요
매화 최소 열댓번 이상씩 보고 또 봅니다
방송 재미가 쏠쏠 일일 방송해라!!
28:39 역전다방 최고의 비유!
이런 수준 높은 전사강의를 들을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다음회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역시 개잼있습니다! 밀싸쿨 완전 좋아요!
심교수님 리액션이 좋아지십니다.. 와 ㅋㅋ
오늘도 잘 봤습니다~!! 제발 주 2회 편성해주세요~~^^
1912년생 할머님이 일제시대 오사카에 사셨다던데 가장 무서운게 비29라며 오들오들 떠시든게 기억나네요.. 떴다하면 곳곳이 불바다 였다고..
역전다방보려고 일주일 기다립니다.
오늘은 교양프로 같은 느낌으로 너무 재밌었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역전다방!!
패널 분들의 다양한 전문성이 최고의 시너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프로그램입니다.^^
한 사람의 전문성은 전혀 안느껴짐. 일반인 꼰대 한명 앉혀 놓은 것과 다름 없음.
수요일을 기다리다니,,,,,왜,,,,,일주일에 한번인가!,,,,,,,아껴보기 너무 힘듭니다,,,,,
허준씨 이야기를 따라갈만큼 머리가 좋으시네요.
토전사 짬밥과 전문 mc 짬밥.
역시 넘나 재밌고 유익한 역전다방! 감사합니다!!
지구과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었다니 ㅜㅜ......
20년전 이해못했던 제트기류를 지금 이해했습니다 ㅠ
국방TV일 잘한다!! 마흔 다되서 지구과학을 배운다!! 너무 좋아🤙
30년전 듣고 이해 못했던 코리올리 가속도를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멋진표현… 적절합니다. 쇼당!!!
아 진짜 너무 재밌어요.... 정주행 하면서 수요일만 기다립니다ㅠㅠㅠ
채박사님은 본게임에 잠시 발려드려도 될듯 하네요;;; 근데 숨가쁘게 가다가 폭격 이야기에 급 분량조절 실패각인가 했더만 이게 또 이오지마로 연결시키는군요. 좋습니다요.
수요일 밤은 역전다방
최애 유튭!
채박사님 오늘도 천재 인증 스스로하심
왜 모르는게 없는걸까ㅜㅜ
시간 너무짧아요~~~~
무편집본도 올려주세요
역전다방 전회를 통틀어 "쇼당"은 허준의 최고의 드립이었음 ㅋㅋㅋㅋ
사쿠라여?ㅎㅎㅎ
@@mmanhb552 예림이 그 패 봐봐
대한민국 MC중 준 형님만 가능한 드립 ㅋㅋ
병장샷이지~
정말 진심 영화보다 더 재밌네요.
흥미진진.. 얘기를 듣는 게 상상이 돼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재밌습니다.
역전다방~~!!!
정말 최고~~👍👏👏👏
정말 유익한 영상입니다. 매 회마다 감탄하면서 보고 있어요. 응원합니다!
과학이렇게 재미다는걸처음 느꺼봄
성공적인 폭격의 이해를 위해 기상학을 배우는 채널 😆
나중에 항속거리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다음주에 이오지마 전투가 나오는군요. 점점더 재미있어지는 역전다방
아뇨
이오지마는 너무 빨라요...
도꼬 공습 한창이 먼저 아닐런지요?
이 프로그램 빨리 끝나면 서운하잖아요
최대한 느릿 느릿~~
토전사 처럼 어느날 갑자기 없어지면 안됩니다... ㅠ.ㅠ
45:25 여기 이부분 보다가 갑자기 생각 났는데 이거 전에 러셀 크로우 나오는 영화 가 생각 났어요 프랑스 함선이랑 싸우는 선장 과 군의관 그 군의관이 찰스 다윈을 모델로 한건가?
그렇죠. 마스터앤커멘더는 오브리마투린 시리즈의 일부를 영화화했는데 오브리가 함장이고 마투린이 군의관이었죠. 마투린은 박물학자,의사,스파이로 소설에 쓰여졌고 그 중 몇몇 장면이 영화에도 나왔는데 찰스다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영화 자체는 영국-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군의관은 찰스 다윈이 모델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랬군요 영상보다가 딱 그장면이 떠올랐어요 그 군의관 여러가지 동물 식물 채집 하는게 인상적 이었는데 다윈이 모델이었구나
케미가 어찌 저렇게 잘 맞을까요?
밀덕도 아니고 야간근무할때 시간때울겸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습니다.
네분의 전문적인 지식설명과 더불어 MC허준님의 간결한 정리 과정까지 정말 재밌습니다.
오이오이 오래기다렸다구우 ~~♡
밀사스 👍👍👍
풍선폭탄 도 충격이고 B 29 가 초반에는 성과가 안나왔군요 드뎌 담주에 이오지마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좀 보다보면 한 10분 지난거 같은데 벌써 끝납니다 태평양전쟁 담에 해주실전쟁은 (중일전쟁이나 독소전) 주2회나 시간을 좀 더 늘려주시는걸 검토해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
Jet stream ------------------------> jet 엔진할 때 그 제트입니다. 영어 알파벳 맨 끝 Z 아닌.
@@scz8333 감사합니다 수정 할게요
2차대전 적 폭격기 1기 격추 위한 독일의 방공포 및 최초 방공미슬 발사 수 : 88mm 대공포 약 1만발 및 최초 대공미슬 약 20발.
ruclips.net/video/Cx_lsh0BJGs/видео.html : German Anti-Air Missiles of World War 2 (동영상 6분1초 이후 참조)
독일 대공포 및 사상 최초 대공 미슬의 적기 1기 격추 필요한 평균 포탄수 및 폭약 사용량 (추진체 및 탄두에 들어간 폭약만, 강철 빼고)
88mm flak36 : 16,000발 - 62.4톤
88mm flak41 : 8,500발 - 51톤
105mm flak38 : 6,000발 - 45톤
독일이 도입한 최초 대공 미슬 : 약 20발 - 1발당 폭약 2.1톤 = 총 폭약 사용량 42톤
-----> 근접신관 경우는 2~3톤 내외 폭약 사용.
(독일이 일단 제공권 잃고 영국 미국에 융단폭격 당할 때,
방공포로 영국 미국 폭격기 1대 격추시키기 위해선 대공포탄 1만발 합 50톤 정도 폭약을 터트려야.
만일 제공권을 장악했다면 저 폭약은 독소전의 소련 지상군으로 향했을 것. 독일 방공포 병력 약 90만.)
영미의 근접신관 방공포에 비해 효율 비교할 수 없이 뒤쳐진 독일. -------------------->근접신관은 기존 대공포탄 사용량 약 1/20로 줄임.
근접신관 장착 대공포탄으로 V-1 요격 장면 : 10초~23초
ruclips.net/video/mIzCBY8xeyI/видео.html
2차대전 유럽전선 각 전선별 병력 변화 그래픽
ruclips.net/video/1CqGeAmVu1I/видео.html
이렇게 크게 크게 전체를 스캔하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개별 무기나 특정인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투입되는 전개는 2차대전 전체 상황 파악을 어렵게 합니다.
영상 시청했다면 알겠지만 노든 조준기는 사실 실전에서의 성능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이렇게 시간 투입할만한 가치 없는.
전 영상에서 사상 최대라는 레이테 해전.
미일 양측 합산 총 투입 배수량 약 200만톤에, 양측 합산 격침량 약 35만톤 ------------------> 사실 대서양해전에 비하면 한 줌 정도.
독일 유보트 함대가 대서양 해전에서 기록한 총 격침 전과는 약 1,500만톤으로 레이테 투입 양측 총배수량의 약 7배 정도.
이 대댓글에서 첨부한 유럽전선 병력 변화 그래픽의 소련군 변화 보기를.
독소전에 투입된 소련군은 최대 720만 까지 팽창했더군요. 태평양전쟁의 미 지상군은 한 줌이나 한 톨 수준.
노르망디 상륙 후 지속 증강된 북서유럽 전선의 미-영-캐 서부 연합국 병력 역시 종전 직전 400만 조금 넘을 정도로 팽창.
즉 독일은 항복 직전에 약 1,100만의 적 지상군과 투쟁, 그것도 이태리 전선의 미영 연합군 약 60만 제외한 것.
태평양전쟁은 병력 측면에서 유럽 전선에 새발의 새발의 새발의 피.
태평양의 해전이 아무리 거대했다고 해도, 대서양 해전에 투입된 총배수량에 비한다면 역시 새발의 피.
태평양전쟁에 투입된 미 전략폭격부대 규모 역시 유럽의 영미 전략폭격대에 비한다면 사실 한 줌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전 영상에서 꽤나 자세히 다루어진 아이오와급 전함 및 야마토.
2차대전 참전한 모든 교전국 모든 전함의 총 격침 전과, 구닥다리 복엽기 소드피시 단일 기종 격침전과 보다 적습니다.
소드피시는 주로 지중해에서 영국공군의 제공권 확보 아래서 작전하면서 약 50만톤 격침 기록으로, 2차대전 참전국의 모든 항공기
중에서 단일 기종 최고 격침 기록 세웠습니다. 아마도 조사해보면 태평양의 미 항모전단 함재기의 모든 격침 전과 합산과 비교해도
그렇게 꿀리지 않을 수도.
2차대전 모든 미국 전함의 총 격침 기록, 적 상선 포함해 불과 17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상선이 6척이고 태평양의 전과 보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북아프리카 항구 기습한 전과가 더 클 정도.
아이오와급 전함은 사실상 실전 전과 0 이며, 미 모든 항모의 총 격침전과 역시 한 줌 미 잠수함대에 압도에 압도당하는 수준.
여기 전 영상에서 야마토의 협차사격 정밀도 및 야마토나 아이오와급 전함의 최대 약 40km 사거리도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2차대전 당시 사상 최장거리 명중탄은 약 25km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함이 해전에 참여한 대부분의 거리는 20km 이내라고 봐야.
사상 최장거리 명중 기록 역시 태평양 아닌 북해와 지중해에서 독일과 영국이 각각 1회 기록.
즉 설계상 스펙 그런 것 실전과 비교한다면 다 지엽말단 성격.
현재 진행중인 태평양전쟁은 보기에 따라선 디테일의 함정에 빠진 느낌도 듭니다.
특정 전역-국가-개인-무기에 대한 너무나 지나친 디테일은 여러 전역에 대한 고른 시간 배분을 저해하게 됩니다.
만일 현재의 이 디테일을 모든 전역에 고르게 적용한다면 끝없이 늘어지는 진행이 되겠지만, 방송 제작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을 것.
여기서 각각 1회씩 다루어진 사이판-타라와는 사실 스탈린그라드의 도시 한 블럭 인명피해 될지도 의문이라 같은 디테일로 제작하면
스탈린그라드만 몇 년 될 것.
전체적 스캔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차대전 전체 전역의 균형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디테일이 되어야.
지난 번에 정했는데 다음 전쟁은 샤를 세환이 메인이 되는 유고 슬라비아 전쟁입니다. 다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물리학을 보다 쉽게 배울수 있는 채널,,,ㅎ
B29 폭격기 프로젝트는 원폭 제조 예산 20억달러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 30억달러짜리 대형계획이었고 이와 비슷했던 건 페니실린 대량생산 프로젝트뿐이었습니다.
일화부터 정주행해도 지루하지 않음..진짜 막말로 존나 재밌네...교수님 횽아들 나중에 야간 폭격하면 빠질수 없는 요격용 기관포 슈레게무지크도 얘기해줄꺼죵??
드디어 이오지마까지 진출했네요. 긴 여정의 대미가 다가오는듯 합니다.
그래봐야 최소 몇 달은 더 걸리겠지만 ㅋㅋ
미국에 밴드오브 브러더스 같은 극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전쟁소재 작품이 있다면
한국에는 역전다방이 있다고 당당하게 외치셔도 되겠습니다. 시청자 누구라도 모두 인정할테니 ㅎㅎ
밴드 오브 브러더스, 제목이 왜 저렇지 그런 생각 해본적 없습니까?
세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 연극 대사 중 일부,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
100년 전쟁 아쟁꾸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로 두려움에 떨던 병사들을 격려했던 헨리5세의 연설 대사라고 합니다.
" 우리 수는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
------------------->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흘리며 싸운 이들은 국왕-귀족-평민 신분 차이를 넘어 모두 한 형제.
------------------->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후회하리라.
미국은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미 할리웃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대사, 아마도 스타워즈 및 터미네이터 대사 아닐까 합니다.
스타워즈의 명대사 우리 말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 " 내가 니 애비다. "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역시 우리 말로 옮기면 ------------------------> " 내 돌아올끼다. "
41년 12월 진주만 기습, 그 직후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
미국이 준비를 갖추어 지중해-북아프리카 전역에 지상군을 파병한 것은 대략 43년 초.
미 지상군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43년 2월 튀니지의 캐서린 패스 전투, 롬멜에게 사실상 전멸급 패배당했습니다.
당시 롬멜의 핵심 방어선 마렛 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당하면서 독일군이 철수해 미군은 재정비 기회를 얻었고,
패튼은 그 때 신임 지휘관으로 교체 투입되었던.
43년 5월 독-이 추축국 지상군 25만 병력이 최종 항복하며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그 시점 까지 미군은 보조 역활.
미 지상군이 본격적으로 북서유럽에서 독일군과 교전한 것은 44년 6월 노르망디 이후.
즉 미 지상군은 45년 5월 독일 항복 까지 북서유럽에서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전투했던 겁니다.
저 짧은 교전을 배경으로 70년대 tv 시리즈 컴뱃, 2000년 이후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가 등장했던 것.
노르망디 전역에서도 독일 기갑부대 80%와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는 영-캐군이 담당했습니다.
패튼은 노르망디 상륙전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코브라 돌파 역시 브래들리의 미1군이 돌파했던 겁니다.
영연방군이 독일 주력을 깡 전투에서 고착 소모시키는 동안, 미군 전방의 독일 방어선이 사실상 알보병 지대로
지극 취약해져 그 약해진 곳을 브레들리의 미1군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 상륙 실행 전 작전 계획에서 이미 그렇게 짜여진.
캐서린 패스 전투로 사실상 신병 수준의 미군에게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기대가 불가능했기에.
패튼은 코브라 돌파 무렵 노르망디에 부임해 재편성되는 쌩쌩한 미3군 지휘를 맡았던 것.
미 지상군이 단독으로 독일 주력 상대한 것은 종전 몇 개월 전인 벌지 전투가 처음이었고, 그것도 너덜너덜해진 독일군 상대.
밴드 오브 브러더스, 컴뱃 시리즈 시청한 사람들은 미 지상군이 독일군 괴멸시킨 주력으로 오해할 여지가 상당합니다.
냉정하게 본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일 지상군과 제대로 교전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전투 기간 역시 지극히 짧았던.
가장 오래 교전한 영국, 가장 대규모에 엄청난 피를 흘린 소련이
드라마로 다룰만한 에피소드 훨씬 더 넘쳐날 것. 특히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그 제목 부터 표절 성격.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멍청에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ruclips.net/video/c844En8XvC4/видео.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노르망디 상륙 당일 연합군 상륙 병력.
1. 미군 : 공수부대 포함 약 7만3천 (공수부대 약 1만5천). 상륙지는 2곳으로 유타, 오마하.
2. 영국 : 공수부대 포함 약 8만3천 (영국군 약 6만1천, 나머진 캐나다군). 상륙지는 3곳 골드, 주노, 소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해군함정 총합 약 7천.
그 중 전투함 약 1천2백, 상륙주정 약 4천2백, 나머진 수송을 맡은 상선 포함 각종 지원함들.
상륙에 동원된 전투함 중 영국측이 약 9백, 영국측 상륙주정 약 3천3백, 상선 및 각종 지원함 대부분은 영국측 제공.
인공부두 멀버리 미군과 영국군 상륙지점에 건설되었는데 2곳 모두 영국이 건설했습니다.
멀버리 건설 얼마 후 폭풍우 몰아쳐 미군 상륙지에 건설된 멀버리는 파괴되었지만, 영국군 지역 멀버리는 건재.
영국군 지역 인공부두를 통해 상륙한 병력이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대략 120만 정도로 기억하는데 수치 좀 다를수도.
전차와 차량등도 수 만대가 상륙했습니다. 영불해협 해저로는 상륙군에 대한 연료 공급을 위한 해저 파이프도 영국이 설치.
상륙지 배분에서도 영국측이 칼레-독일쪽 방향으로 3곳,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쪽 셀부르 방향 2곳.
상륙지 배분할 때 이미 독일 주력 부대를 영국군이 맡는 식으로 정해짐. 실제로도 독일 기갑부대의 대부분은 영국군이 상대했고.
노르망디 전역에서의 지상군 지원을 위해 영국공군은 제2전술공군을 별로도 조직해 노르망디 하늘을 휘젓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롬멜이 공습당해 부상으로 전선에서 영구히 이탈된 것, 미군 공습이 아닌 영국공군 공습.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기갑군 사령부가 공습당해 지휘관 참모 상당수 사망, 부상으로 독일 기갑부대 반격 3주늦춘 것도 영공군.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측의 모르탱 역습 에니그마 해독으로 함정파고 팔레즈 포켓으로 몰아넣고 미군에게 돌파 시점 지정도 영국.
독일 주력 기갑부대 상대한 영국측 전차 손실과,
독일 알보병 주로 상대했던 미국측 전차 손실이 거의 대등한 것 ---------------------> 실전 경험 전무했던 생초짜 미군
그리고 노르망디 전역에 투입된 영국군 역시 2/3는 신병들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정예병은 일부만 섞인 상태.
북아프리카 지중해 전선의 영국 최정예 지상군 제8군은 이미 이태리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빼는 순간 노르망디 상륙 노출되니까.
영국에서 출발해 좁아 터진 해협 건너 침공하는데 어떻게 상륙일 당일 미군이 거의 대부분을 점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육상세력도 아니고 오랜 기간 세계 최고의 해양국가였는데, 영국에서 출발한 상륙전에 미해군이 다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상 상륙전 자체 최종 투입 병력은 약 100만으로,
미군 22개 사단, 영군군 12개 사단, 캐나다군 3개 사단, 폴란드 1개사단, 프랑스 1개사단 총 39개 사단.
하지만 상륙 당일 투입에선 영국군측이 오히려 약간 더 많았음. 이유는 생초짜 미군 보다는 조금은 더 안전하니까.
노르망디 전역 돌파 전까지 투입 병력에서 미군이 더 많았지만 압도한 것 아닌 미군 22개 사단, 영국캐나다 연방군 15개 사단.
(자유 폴란드군은 2차대전 개전 이후 영국측이 무장시킨 군대입니다. 자유 폴란드군은 북아프리카, 이태리에서도 열심히 싸웠죠.
마켓가든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 크게 보아선 영국과 아주 밀접한 동맹 협조관계. 자유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종전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산정권이 자유노조 바웬사 정부에 무너진 이후 바웬사 정부에 자유 폴란드 깃발과
군의 정통성 이전하고 해체됩니다. 그런 이유로 영국에는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습니다. 브렉시트로 그들 입지가 좁아진 것
안타깝군요. 21세기 현재도 영국군은 폴란드에서 대러시아 공동 방어 훈련 자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최고 수준의 동맹 관계.)
노르망디 전역 돌파 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서부 연합군 총병력에선 미군이 약 300만, 영국캐나다군 약 100만으로 미군이 3배.
저 최종 투입 병력만으로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영국군은 북서유럽에 투입하지 않은 상당 규모의 병력이
지중해에 남아 있었고, 그리스에서 이미 44년 부터 공산 빨치산 토벌 후 그리스 왕정 복고시켰죠. 영국측 판단이 세월 지나고
보니 미국 보다 더 현명. 영국이 총병력에서 미국에 훨씬 적었던 이유는 인구 자체가 적어서.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영국은 5천만 정도. 독일 제외하곤 단위 인구당 가장 많은 병력 투입했을 겁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
몸사림의 가장 큰 원인은 병력 부족 때문, 전차등 장비는 얼마든지 보충 가능했지만 병력은 거의 한계치 징집한 상태라 여유 없었음.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직후 엔빌 상륙작전이라고 프랑스 남부 지중해 상륙전 벌였습니다. 미친 비효율의 극치.
영국은 지극 당연히 엔빌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프랑스 남부에 상륙합니까? 어짜피 노르망디 돌파되면 프랑스 해방인데.
이태리에서도 미군은 프랑스쪽인 이태리 서부, 영국군은 그리스 발칸쪽 아드리아해쪽 동부에 상륙 전진.
영국은 사실 프랑스 상륙 보다는 그리스나 발칸반도에서 중부유럽으로의 침공도 고려했었죠, 스탈린 철의 장막 줄이기 위해.
영국이 힘이 부족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서유럽 침공 합의했지만, 혹시나 하는 측면에서 이태리 동부 해안 침공로 선택.
유고의 티토를 지원하면서 소련의 위성국이 아닌 독자노선 걷도록 부추긴 것도 미국이 아닌 영국입니다.
미국은 덩치만 큰 어리숙한 최강대국으로 등장했던.
2차대전 서부연합군의 전쟁 밑그림 설계는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다 짠겁니다.
북아프리카 지중해 평정, 그 뒤 시칠리 상륙, 이태리 침공 그 다음에 미루고 미룬 북서유럽 침공.
북서유럽 상륙 시기는 영국은 최대한 미루려 했고, 미국은 시칠리 침공 생략하고 바로 프랑스 상륙 원했지만 논쟁에서 밀린 것.
영국은 북서유럽 상륙 최대한 미뤄, 독일과 소련 양측 희생이 최대화되기를 의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미국측 고위 인사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이 영국에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을 이렇게. -----------> "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
카사블랑카 회담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 및 미국, 전세계 각지 영국군과 통신할 전용 통신함정 까지 갖추고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미국은 튀니지 점령 후 프랑스 침공하자고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영국측에 논쟁에서 완전 압도당해 저렇게 되어버린 것.
카사블랑카 이후 미국도 정신 차리고 전용 통신함정등 갖추고 영국과의 이후 협상에 나섰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상세 세부계획도 영국이 수 년간 세워온 기본 설계에 미군 참전 후 미국이 숟가락 얹은 것.
영국은 지중해 전역 부터 미군을 총사령관 내세우면서, 그 휘하 실질적 작전 수행은 영국군 장군들로 도배하며 꼬드겼고.
노르망디 상륙전에서도 총사령관은 아이젠하워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연합 해군 사령관은 영국, 연합공군은 영미 함께.
그렇게 작전 계획이 세워졌기에 영국이 3곳, 미국이 2곳 그것도 상대적으로 후방지역 2곳 배정된 겁니다.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생초짜 미군이 독일 주력군 상대할 수도 없었으니 수용한 것.
물론 상륙 후 실전 경험 쌓은 뒤엔 물주 영향력이 말빨이나 작전계획통을 압도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도 중동에서 철수하는 영국군 대타로 미군이 기어들어가 개고생중이죠.
현재도 영국군은 아주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영국 국익에 유리한 쪽으로 중동에서 활용중.
겉보기엔 영국 수상이 미국의 푸들로 모욕당하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영국측이 미국의 힘을 최대한 영국 국익에 활용하는 노련함.
미국은 아직도 과거 영국이 짜놓았던 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미군이 수렁에 빠지고 헤메는 중동은 영국이 떠넘기고 선물한 것.
영국은 베트남전에는 참전 안했습니다. 대신 호주군 대타로 극히 극히 극히 소규모로 살짝 투입시켜 살살 달랬죠.
아 못알아 들었는데도~~
ㅈㄴ 재밌어~~ㅎㅎ
B 29 디자인이 정말 잘빠졌네요 ㅎㅂㅎ
토전사이후로 국방TV에서 또 이렇게 재밌는 컨텐츠가 나올줄 몰랐는데... 미국엘에이서 너무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WOW
아 너무너무 조ㅠ아
22:13 나카지마 항공기 제작소는 최 박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일본 육군항공대의 기체를 주로 제작했습니다만, 회사 규모 자체가 미쯔비시 항공기 제작소보다 커서 미쯔비시에서 설계/제작한 제로 전투기도 정작 미쯔비시 항공기 제작소(약 3,800대)보다 나카지마 항공기 제작소(약 6,500대)가 더 많이 제작했습니다. 참고로 적었습니다.
채승병 박사님입니다.
국적라운델 하얀테두리가 나카지마 생산 제로기 아닌가요??
@@꿀단지-b7j 나카지마는 육군 항공기 하야부사, 하야테나 히엔 등을 만들었습니다.
제로센이 미츠비시고요.
미군이 주로 일본 해군 제로센과 싸우는 바람에 하야테등이 상대적으로 묻혔습니다.
국적 라운델 바탕색이 흰건 제로, 하야부사 등등 다 볼 수 있어서 이걸로 구별하는건 어렵습니다.
녹색으로 칠해진 기체에서 흰바탕에 붉은 원이 칠해진 라운델이 많이 보입니다. 흰 기체면 흰바탕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런분들 때문에 전사와 무기체계를 그렇게나 공부했지만...20년이 지나도 어디서 이런 분들이 솟아나는겁니까!
최박사는 누구냐
넘오좋아 >_
역전다방 태평양전쟁이 점점 진행될수록 너무너무 아쉬워요
태평양전쟁이 끝난다면 제발제발 유럽전선 동부든 서부든 아프리카든 꼭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 좋아.
조기 퇴근했다.
수요일이니까 ㅎㅎ
아니다. 그래도 7시네 ㅜㅜ
채승병 ..이분은. 전문가네....
혀 짧지만 지식은 결코 짧지 않다~~와~우!제트기류 설명을 매우 이해하기 쉽게 해주시네요~😊😊😊
밀사쿨 나올때 다같이 박수치는거 왤케 귀엽나요 ㅋㅋㅋㅋㅋㅋ
전략폭격 역사를 알아보는게 마치 B-29의 일본본토폭격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대신 보여주네요 ㅋㅋ 다음주까지 언제 기다려 ㅠㅠ
헉헉 오늘은 7분만 보고 끊어 ㅡㅜ 일주일 간 아껴 봐야돼 !
그런데 잘 안돼요....ㅎㅎㅎㅎㅎ
역 쒸 . . . 물리 학 박 사 님 ! ! !
샤를 형 유퀴즈 나와주세요 형은 이제 만인이 기다리는 세계로 나와야 됨 ㅋ
예전 다큐멘터리에서 후고폭탄에 소이탄을 넣어서 보냈으면 록키산맥의 산림지대에 화재를 일으켜 군수물자인 목재생산에 심각한 손상을 줄수 있었다고 하던것이 생각나내요.
아아아 아껴봐야지ㅜㅜ
풍선폭탄 충격적이네요 일본 미국거리를 사나흘이면 도착하는것도 쇼킹..
바람이 미국으로만 부는것도 아니여서 괜찮음
다음호는 언제 올라오나요?
관계자 여러분 너무 감사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미래에 새로운 프로그램 하시면 이름을 붙일 때, '역전다방ep00'를 앞에 써주시면 안될까요? 유튜브에 제목이 전부 안나와서 순서대로 보기 조금 헷갈려요 ^^ 감사합니다.
우리집에 있는 로봇청소기랑 너무 닮았는데 ㅋㅋ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다뤄주시길 바랍니다
쇼당 드립에서 뿜었습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