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소고지 영화속 몇몇 설정은 실제와 다른 것들이 있지만 도스가 행했던 것들은 영화보다 더 위대했음 미국 영웅 만들기가 아니라 실제 공훈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감독이 의도적으로 뺀 것도 많음 영화속에서는 언급이 안되지만 절벽을 기어오르는데 사용한 그물은 해군에서 함선용으로 쓰던걸 길게 이어서 만든건데 이걸 쓰기 위해서는 누군가 첫 빠따로 절벽에 기어올라가 밧줄을 먼저 걸어야 했는데 당시 3명이 자원 그중 하나가 데스몬드 도스 상병이었음; 도스가 핵소고지에서만 활약한게 아니라 다른 전장에서도 많은 인명을 구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위에 적은대로 감독이 의도적으로 뺀 에피소드들이 있음
멜 깁슨의 영화는 군대를 다룰 경우 대부분이 영웅서사를 가집니다. 직접 감독한 브레이브 하트부터가 스코틀랜드의 영웅이야기죠. 출연한 영화중에 군인으로 분한 작품에서도 비슷해요. 위 워 솔져스나 패트리어트나 다 영웅서사가 중심축에 있죠. 출세작인 매드맥스 시리즈부터가 사실 세기말의 새로운 전설같은 내용이기도 하구요. 박원장님께서 멜깁슨의 영화세계를 이단아 또는 복합성을 가지는 다층적인 고찰로 보시는 것 같은데, 사실 멜깁슨의 영화는 중심축에 조금 다른 시선을 살짝 얹는 정도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네요.
@@남뉴 애초에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전통적 관념에 의하면 장수의 해고나 치욕은 자신만의 사망이 아닌 가족과 일족의 멸종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대가로 윗사람이 보기에 가장 화려한 최후로 용서를 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자주 그랬겠죠 근데 자살돌격의 모티브가 프랑스 엘랑비탈인건 안비밀 러일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살돌격은 끽해야 장수들이나 쓰던 거였지 병졸들은 안썼는데 워낙 손해본건 많은데 배상금 하나 못받고 항구 몃개랑 조선의 점령을 인정받은것도 아닌 보호권 하나 얻은걸로 끝이어서 총알과 포탄을 적게쓰면서 전쟁할법을 연구하다 눈에 들어온게 프랑스의 엘랑비탈 이걸 수입해와서 일본식으로 개조해 도입한게 자살돌격이죠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1차대전 미군 참전, 훈련 거치고 대서양 건너 유럽에 파병된 관계로, 실질적 병력 투입은 종전 몇 개월 전인 1918년 5월 이후.) (1차대전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즉 미 지상군은 종전 직전 투입된.)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정도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2월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ruclips.net/video/34oR2D1GVU4/видео.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박태균 박사님은 확실히 뭔가 다른 근본적 이유와 디테일을 잘 알려주시네요.
어설프게 덜떨어진 사람들이 꼭 작은거에 태클걸면서 똑똑한척 잘난척 멋있는척 하는데
이분이야 말로 진정한 멋진 사람이자 학자같습니다.
원장님 이제 하시다하시다 사자까지 하시네 ㅋ ㅋ ㅋㅋ귀여우셔
사실 이 프로를 우리 샤를님이 나오셔서 보게 됐는데 이젠 매주마다 꼭 기다려지는 최애 프로가 됐습니다. 지금은 다섯분 케미가 더 좋아서 팬이 되어버렸지 뭡니까 ㅋㅋㅋㅋㅋ
쭉 잘부탁합니다. 다섯분 다~♡♡♡♡♡
제가 요즘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데 이 방송 볼때는 우울한 기분을 잊게 되어서...그래서 더 챙겨봅니다. 오늘도 아무리 피곤해도 꼭 보고 자야됩니다. 프로그램 만들어주신 분들께 고맙습니다.
수요일 밤엔 역시 역전다방을 맥주 한캔과 함께 보는 맛이 최고.
일이 힘들어 역전다방도 깜빡 잊어버렸네요.
퇴근후에야 확인했습니다. 영상 감사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볼수 없는 전문가들의 해설인 것 같습니다. 전문 과학자, 군사전문가, 인문학자 분들의 해설 정말 재미있네요.
09:04 현역일때 작전병이어서 작전지도랑 단대호를 항상 챙겨 다녔는데~ 다시보니 반갑네요^^
수요일을 기다려지게 하는 유일한 채널...항상 즐겨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화이팅~~
'다음 이야기'라는 글이 뜬 순간, 너무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나오네요
참 보면서, 머라고 말씀드릴수 없이 감사합니다. 너무 배우는게 많고 모든 참여자 분들의 열정과 정성에 박수 드립니다
오키나와전투가 힘들었다는건 누구나 아는 팩트이지만 그 과정을 계속 밟아나가니 진짜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전투였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역전다방 앞으로 10년은 더 방송했으면 합니다.
맞아요...토전사처럼 되게 해선 안됩니다!
예전에 "베를린 함락 소식을 라디오로 듣는 오키나와의 미군" 이라는 사진을 봤습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에서 고무우의판초 쓰고 아주 인생무상허무함과 X같음이 가득한 표정들... 일부는 해탈한듯한 쓴웃음... 당시 분위기가 잘 느껴지더군요
7:46 "아닙니다" 급발진 귀여우십니다 ㅋㅋㅋ
좋아요^^
기다리다현기증나요
청일전쟁 러일전쟁도 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
정말 시간가는줄 모르고 봤습니다. 훌륭한 설명과 예시등이 적절했던거 같습니다.
2차재던 후반에 강력한 미군만 들어봐서 그런지,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해왔는지도 몰랐네요.
월요일날 입대하게되서 이것이 마지막 에피소드겠네요.. 몇달동안 못 볼 생각하니 슬픕니다...
근 1여년 동안 역전다방을 여기까지 본 결과 . 일본은 자신의 본토에 핵이 떨어질만한 명분과 이유를 미국에게 100가지도 넘게 줬다.
그러고도
핵폭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미국에게
비인도적인 핵폭탄 사용을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최근 얼마전에도 요구를 했었죠
200배
그랬겠죠
@@digduck9463 젠장
1000개
제가 할수 있는건 좋아요' 뿐입니다.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진짜이방송 저죽을때까지 해주세여..ㅠㅠ 저30인데 90까지산댔거든여 점집에서 ㅋㅋㅋ 60년해주셔야해여ㅜㅜㅜ끝나면 삶의낙이없음 ㅜㅜ아니근데허준님 진짜중간중간뻘하게떠트려주시는데웃겨쥬금 ㅋㅋㅋㅋ너무유익하고좋습니다 굳굳 ㅠㅠㅠ4분전문가들의 입담도 정말최고에여 다들오래오래 건강하게 오래오래 방송해주세여ㅠㅠㅠㅠ
도슨좌는 진짜...영화를 봐도 믿지 못하고
현실이라 더욱 놀랍고
만들려해도 거짓말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거 같아서 놀랍다
다음주 월요일날 오키나와 격전지 위주로 여행다닐예정인데 큰 도움되네요😊
역전다빙 최애빙송인데 오키나와 전투 상세히 다뤄주셔서 감사해요
이 프로는 공짜로 본다는거 자체가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넘나 마니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드라마 퍼시픽 후반 부에 나오는 오키나와 전투 스토리가 떠오르네요.
끝없는 장맛비로 병사들의 정신이 망가져가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비전투손실도 상당했겠구나 싶네요.
내용이 조금 헷갈리시는거같은데 퍼시픽에서ㅠ장맛비로 병사들이 정신나가는 장면은 과달카날이고 오키나와전투때는 일본군들의 비인간적인 전투와 민간인 피해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죠
@@RX---ec5rv 정확히 짚자면 호주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간 뉴 브리튼 섬 글로세스터 곶 전투에서입니다..로버트 레키가 장맛비를 맞으면서 제발 누가 자길 쏴달라고 절규하는 장면...
아기 넘겨주려는 여성 민간인 몸에 폭탄 둘러서 생체 부비트랩+고기방패로 쓴 후 뒤에서 기관총쏘는 일본군
결국 아기랑 여성 같이 터짐
아무리 전쟁이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 듬
인간이라는 생각조차 안들듯
퍼시픽으로 보는게 너무 리얼했음 전쟁 공포가 ㅎㄷㄷ함
핵소고지 영화속 몇몇 설정은 실제와 다른 것들이 있지만 도스가 행했던 것들은 영화보다 더 위대했음
미국 영웅 만들기가 아니라 실제 공훈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감독이 의도적으로 뺀 것도 많음
영화속에서는 언급이 안되지만 절벽을 기어오르는데 사용한 그물은 해군에서 함선용으로 쓰던걸 길게 이어서 만든건데 이걸 쓰기 위해서는 누군가 첫 빠따로 절벽에 기어올라가 밧줄을 먼저 걸어야 했는데 당시 3명이 자원 그중 하나가 데스몬드 도스 상병이었음;
도스가 핵소고지에서만 활약한게 아니라 다른 전장에서도 많은 인명을 구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위에 적은대로 감독이 의도적으로 뺀 에피소드들이 있음
시간늘려주세요 막 올라오는데 다음이라는 ㅎㅎ 기다리기 힘들어요
역시 역전다방 오끼나와 전쟁 내용 좋습니다.
와,, 이렇게 방송을 기다리다니, 드라마 허준 이후로 처음인듯
허강조류 못지 않은 이새로운 조합. 켠왕때 허준형 진짜 장난아니였는데. 그립기도 하네요 그모습이 ㅎㅎㅎ
다음주부터 슬슬 원장님 주분야가 나오는군요. 정치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전쟁이 나오고 그 전쟁이 끝나면 다시 정치가 시작되니까요
심소령님 심소장 될 때까지만 방송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정좌하고 보게 만드는 방송! 감사합니다.
내사랑 역전다방❤️
오이오이 오래기다렸다구우 ~~
처음으로 댓글 남기네요~ 저같은 숨은 질척쟁이들 많을듯~
드라마 퍼시픽에서 오키나와전투가 정말 잔인했죠....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내몰고 자살폭탄을 강요한 장면도 나오죠.... 일본군의 잔혹한 전쟁범죄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일주일에 1번은 너무 적소 4번은 합시다
역전다방 보는 재미로 삽니다~~
데스몬드 도스 의무병은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교인이라서 집총거부하고 부상병을 살리는데 주력했습니다.
허준님 코디 바뀌었나요? 이전 몆화전 복고 안경쓸때가 더 잘 어울리는듯
멜 깁슨의 영화는 군대를 다룰 경우 대부분이 영웅서사를 가집니다.
직접 감독한 브레이브 하트부터가 스코틀랜드의 영웅이야기죠.
출연한 영화중에 군인으로 분한 작품에서도 비슷해요. 위 워 솔져스나 패트리어트나 다 영웅서사가 중심축에 있죠.
출세작인 매드맥스 시리즈부터가 사실 세기말의 새로운 전설같은 내용이기도 하구요.
박원장님께서 멜깁슨의 영화세계를 이단아 또는 복합성을 가지는 다층적인 고찰로 보시는 것 같은데, 사실 멜깁슨의 영화는 중심축에 조금 다른 시선을 살짝 얹는 정도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네요.
아! 참고로 멜깁스가나온시리즈에서 기독교의예수 그리스도 역할을했지만요
미국 드라마 퍼시픽을 보면 비오는데 시체썩고 저격수에 당하고 미치더군요
으헝헝 또 언제 기다리나...ㅠㅠ
닥터제이와 더불어 유일하게보는 2차대전사 채널
야너두??나두!!
나두나두~~~
@@emmajin401 ㅋㅋㅋㅋ
진정한 전쟁 실시간 중계임. 아직 2년은 아니 3년은 더 연재해야 태평앙전쟁 끝낼듯
캬 오키나와 지상전을 이렇게 디테일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풀어주다니 역시 역전다방이다
영화 드라마 버크너 슈리성 일본군의 집요한 저항에 미군내에 벌어지는 알력다툼까지...
담주로 오키나와가 마무리가 되는데 앞으로 더 기대된다
이게 나한테 개콘이야
7:49 채박사님 웃음 졸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조아요
13:52 의성醫聖나리의 드립본능!
진짜 멤버 조합 레전드다 ㅋㅋ 존나재밌네
샤를 최고!!!
오키나와에서 화염방사기로 동굴을 지졌다가 여성과 아이들을 태워죽이고 맛이 간 주인공이 등장하는 L.A Noire가 생각나네요.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대전차 지뢰 와 박격포가 위협적 이라고 했습니다. 대전차 지뢰에 걸린 셔먼 탱크는 공중 5m 이상 떴다 떨어졌습니다.
'라이징스톰' 게임에 '슈가로프' 맵이 있는데 미군의 무장이 훨씬 좋은데도 불리해요
각 전쟁이 해당 지역에 대해 불러온 국제정치적 함의들좀 알려주시지.. 과거와 전쟁직후, 현재의 국제정치적 관계 등
이건 이미 전 영상에서 설명이 되었음
태평양 전쟁은 역전다방 하나로 조지는걸로 충분하다...
와 셔먼 크로커다일
일본이 미국,한국,홋카이도,오키나와,이오지마,중국,대만,독일,영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다 등등등에서 한행동은 도저히 용서받을수가 없을듯합니다. 반성없이 용서가 있을수가없죠. 어쩌면 핵이 정당화가 용서를 오히려 반대하는것이 그들인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인듯합니다.
항복도 못하고 부상을 입었다고 무조건 자살하라니 진짜 광기에 물든 시대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4:35 120m 라니.... 12m 겠지.
북베트남의 테트공세는 전술적으로는 대실패였지만 전략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둔 작전이었다는게 참 아이러니 하져, 미디어가 발달되면서 미국 대사관에서 실시간으로 총격전이 벌어지는걸 본 미국국민들에게 반전여론을 삽시간에 일으킨걸 보면
헥소고지에서 그나마 비고증인것… 화염방사기 연료탱크피격되서 터지는거
이건 어디서 하는 방송일까요?
합동성? 협동 협력 이겠죠?
고개를 돌리며 이히잉은 진행자의 명전투다.
박교수님 씨네박’S 환영합니다!!!!!!!
일본군 지휘관 들 야라하 히로미치 분 인기역사강사 설민석 선생님이랑 닮았네요 설민석 선생님 전생인가?
생각해보면 일본도 대단한 겄들임.
일제시대에 미국의 승리가 없었다면 저독한겄들하고 싸워서 해방을 맞이 할수 있었을려나?
헥소 고지 === 정말 위대한 의무병 의지,,,
오천명의 집단자살? 오대양이야? ㅎㄷㄷ 일본군들 미쳤구나~!
심 교수님 이야기가 전쟁의 어려움과 참혹함을 잘 설명하지만 어떤 전투나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모든 전투가 그 만큼 어려웠고 참혹했을 겁니다. 오히려 오끼나와 전투는 평균적으로 보자면 인류 역사상 전쟁중에서는 덜 참혹했을지도 모름.
킹제독 열받아도 무사한 버크너 그는 육군이니까.
오키나와 전투
크으으으으
모험과 안정 사이에서 판단하는건 너무 어렵죠. 근데 절망적인 순간에서 모험을 하는건 대개 나락으로 갑니다. 냉정하게 상황 판단 못하고 '한방으로 만회하겠다' '더이상 버티기 힘들어' 이런 마인드라 주변을 못보죠.
오늘날에도 오키나와의 일본군마냥 손절에 손절하다 결국 영혼까지 끌어모아 급등 단타 승부 치다가 그게 안돼서 한강에 뛰어든(비유입니다) 주식꾼이나 코인러 한둘이 아닙니다. 샤를공 말씀마냥 항복(손떼고 손절로 현금 마련해서 쉬면서 지켜보기)이란 방법도 있는데 사실 본전생각나서 귀에 안들어오긴 합니다.
이사무 조 총력전
연구소 전 소장 그룹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기에는 대본영과 군령부의 관료제와 국가보다 조직의 이익을 더 앞서 생각했던 병폐가 이런 비극을 만든것 같습니다. 뭐 덕분에 결과적으로 독립했으니 잘된거 같습니다.
역전다방 총괄 PD님에게... 일본 몰락작전
(X-데이)를 3부작로 만들고 일본 본토 진주작전
(블랙리스트 작전) 7부작으로 제작을 해주실
건가요?
요즘 공병은 그냥 단순 공병이 아닌 전투공병이라고 부른다...
ㅋㅋㅋㅋㅋㅋㅋ 버크너 아버지생각 드립ㅋㅋㅋㅋㅋㅋ 미쳤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끔찍한 건 다음화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집단자살의 탈을 쓴 학살에 애꿎은 오키나와 사람들도 있었으며 일본군이 세뇌에 가까운 선동을 하여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저러한 역사가 있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있고??
미국이 오키나와는 반환하지 말고
독립시키던가 아니면 괌같이 자치령로 만들었야 했는데....
슈리성은 삼별초의 유적임.
화염방사기가 전쟁에서 쓰이지 않도록 규제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패전의 기억을 가진 일본이 화염방사기를 없애자고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15:55 개웃기네 진짜ㅋㅋㅋㅋㅋㅋㅋ
데스몬드 도스 상병은 미군 부상병뿐 아니라 일본군 부상병까지 챙겨줬다고 하죠 물론 부상당한 일본군을 미군진지까지 데려온건 아니지만 다수의 미군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 부상병이 미군 붕대를 감고 있었다고 아마 데스몬드 도스 상병이 감아준거 아닐까 추측뿐만....
소형 무인 전투차량의 주목적이 전선보급
미국의 실전 데이타!!!
독립군은 저 방식의 저항 20년을 했는데 겨우 3개월을 못 버텨서 자살 특공을 하네 ㄷㄷ
독립군은 규모가 작으니까 그런거임 많아봐야 8천명도 안되었으니까...
@@maus4033 전 다르게 봐요.. 그냥 공세만 해왔기에 수성을 경험하는게 너무 고통스러웠을거라고 봐요. 재들은 전국시대로 수성하다 좀 걸린다 싶으면 자살 특공대였으니까요
어디서 독립군주제에 대일본제국과 비벼??
@@남뉴 애초에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전통적 관념에 의하면 장수의 해고나 치욕은 자신만의 사망이 아닌 가족과 일족의 멸종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대가로 윗사람이 보기에 가장 화려한 최후로 용서를 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에 자주 그랬겠죠 근데 자살돌격의 모티브가 프랑스 엘랑비탈인건 안비밀 러일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살돌격은 끽해야 장수들이나 쓰던 거였지 병졸들은 안썼는데 워낙 손해본건 많은데 배상금 하나 못받고 항구 몃개랑 조선의 점령을 인정받은것도 아닌 보호권 하나 얻은걸로 끝이어서 총알과 포탄을 적게쓰면서 전쟁할법을 연구하다 눈에 들어온게 프랑스의 엘랑비탈 이걸 수입해와서 일본식으로 개조해 도입한게 자살돌격이죠
핵소고지가 영웅 만들기다 사실과 다르다 하는데 일부분 맞는 말입니다
왜냐면 실제 있었던 일은 너무 말이 안되서 각색해서 현실적으로 만들었거든요
탄약나르는데 우리나라 지게가 생각나네
16:00 아이러브뉴욕 ㅋㅋㅋㅋㅋㅋ
이분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1,2,3 하면 완전 매니악하게 되겠네... 나 컴오히 1700시간 유저 ㅋ
버크너가 아니라 패튼 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궁금하네 ㅋㅋㅋㅋ
패튼은 과연 실전 경험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림셈으로 간단히 추정하면 정말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치에 도달합니다.
패튼의 1차대전 + 2차대전 모든 실제 전투 기간 다 합산해도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치가 되는
인심 팍팍 써보죠.
1차대전 참전 실전 기간 ------------------> 후하게 1년 (실제론 불과 몇 개월 정도.)
2차대전 북아프리카 -----------------------> 3개월 (제대로 된 실전 경험 사실상 0 수준)
2차대전 시칠리 상륙 관련 --------------> 3개월 (시칠리 상륙 준비 빼고 실제 상륙 후 전투 길어도 1개월???)
(1차대전 미군 참전, 훈련 거치고 대서양 건너 유럽에 파병된 관계로, 실질적 병력 투입은 종전 몇 개월 전인 1918년 5월 이후.)
(1차대전 독일 항복은 1918년 11월, 즉 미 지상군은 종전 직전 투입된.)
저 1년 6개월이 패튼이 노르망디에서 미3군 지휘하기 전의 모든 실전 기간입니다.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만 따진다면 아마 몇 분의 일로 대폭 대폭 대폭 줄어서 솔직히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군요.
노르망디 이후 독일 항복 까지 ---------> 9개월 (패튼 투입 시점인 44년8월~독일 항복 45년5월)
즉 패튼의 실전 경험 기간, 후하게 평가할 때 이렇게 됩니다.
1차대전 + 2차대전 전체 ----------------------------------------------------------------------> 고작 27개월?, 2년 3개월.
냉정하게 실제 전투 경험한 수치로 줄이면 ------------------------------------------> 어쩌면 1년 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군요.
즉 패튼은 2차대전 참전하고 살아남은 어지간한 미 신병 소총수와 비교해도 실전 경험 많다고 보기 힘듭니다.
미국은 전쟁 늦게 참전했으니, 처음 부터 끝까지 전투한 영국이나 독일의
생존한 참전 용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정도의 실제 전투 경험이라고 보아야.
장교들 실전 경험으로 비교해보면,
1차대전 발발 때 영국해군 초급장교 참전했던, 2차대전 때 제독급 장교와 비교하면 패튼은 새발의 피 수준.
저런 케이스의 영국 해군 장교 실전 경력은 1차대전 4년 + 2차대전 6년 = 10년입니다. 미국의 전쟁은 너무 짧았습니다.
패튼 저 정도 실전 경험 상태에서 겁장이 사병 뺨싸대기 날릴만한 역전의 용사인지 사실 의문.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까지의 날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북아프리카 전역 미 기갑부대 최초 데뷰전, 캐서린 협곡 전투 ------------------------------------------> 1943년 2월
2. 캐서린 전투 패배 후 패튼이 교체되어 신임 지휘관으로 부임 -------------------------------------------> 1943년 2월
3.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 1943년 5월
4. 시칠리 상륙 시작은 -----------------------------------------------------------------------------------------------------------> 1943년 7월
5. 시칠리에서 패튼의 사병 뺨싸대기 사건 ----------------------------------------------------------------------------> 1943년 8월
튀니지에서 추축국 최종 항복할 때, 이집트에서 부터 진격한 영8군이 결정적 역활했습니다.
횃불(토치) 상륙했던 미영 연합군은 사실 보조 역활. 튀니지의 독일군 주방어선은 영8군에게 돌파당해 최종 항복.
냉정히 바라본다면, 사실 패튼은 북아프리카-지중해 전역에서 제대로 된 전투 경험 없습니다.
독일이 패튼을 특별히 두려워 할만한 그런 독일군과의 교전 경험 자체가 없었습니다. ---------------> 미국측 자가발전 성격.
롬멜 전사록에 미군에 대한 높은 평가 부분도 자세히 살펴보면 롬멜의 착각도 포함.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롬멜의 생각에는 완전한 오류들 포함되어 있고, 그 오류는 노르망디 전역 부분 감수를
맡았던 롬멜 부관 출신이자 노르망디 전역에서 싸웠던 바이얼라인 장군이 각주를 통해 직접 수정 언급하기도.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된 영국의 기발한 상륙 장비 및 지뢰 제거 전차 등에 대해, 롬멜은
신대륙 미국의 창조성이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는데 사실은 모조리 영국의 창의력에서 나온 결과물들.)
(전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배우지 못하는 영국군을 냉정하게 비판한 롬멜은,
영국과 달리 편견 없는 백지장 상태의 미군이 오히려 더 빨리 실제 전투에 적응했다고 대단히 미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실상 롬멜은 미군 특히 패튼과는 단 1번도 교전해본 적 없었고 롬멜의 신대륙에 대한 편견 환상도 큰 역활.)
(인구 5천만 정도에 최대 징집된 상태의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지극히 우려해 소극적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영국 인구를 압도했었고, 참전이 늦어 그 때 까지 인명 손실 자체도 미미 그 자체라 여유가 있었던.)
(영국이 아무리 졸전을 벌이거나 대패해도, 영국군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했습니다. 즉 기본은 철저했던.
당시 독일군 장병들의 평가에서도 미군은 자신들이나 영국군 보다 스킬-숙련은 없지만 단위 부대에 투입되는 화력 압도적
이어서 그 화력에 바탕한 전투 수행을 한다는 기록도 많은.)
(영국이 당시 만일 소련이나 미국 정도의 거대한 인구를 가졌다면, 독일군이 대전 초 그렇게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전 ----------------------------------------> 패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 주력군, 패튼은 사실 구경도 해본 적 없다가 정확할 겁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 주력을 고착 소모시킬 때, 브리들리 미1군이 코브라 돌파했을 때도 패튼은 대기 중.
코브라 돌파 후 패튼이 신규 재편성된 쌩쌩한 미3군 이끌고 쾌속 진군해서 독일군이 패했겠습니까?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군은 깡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 및 브래들리 미1군에게 돌파당해 붕괴된 겁니다.
실제 코브라 돌파를 해낸 브래들리의 겸손함과 지극 대비되는 패튼이었음은 부인하기는 불가능.
노르망디 전역 깡에서 그렇게 고전했던 영국군 역시 코브라 돌파 후 노르망디 전역 붕괴되자,
해안선을 따라 베네룩스 3국 거치면서 쾌쾌쾌속 진군, 아주 단기간에 수 백km 전진해서 마켓-가든 직전 까지 도달.
롬멜과 단 1번도 교전하지 못한 패튼이 어떻게 롬멜의 최대 맞수 라이벌이 될 수 있습니까? --------------------> 할리웃 선전!
독일 지상군과 본격적 교전, 노르망디 이후 1년도 안되는 짧았던 미국이 과연 독일의 주적? ---------------------> 어불성설.
저 짧았던 1년도 안되는 북서유럽 전투를 배경으로,
1970년대 부터 전투(컴뱃) 시리즈 및 2000년대 이후 제목 조차 표절 성격인 밴드 오브 브러더스 시리즈로 전세계에 선전.
패튼이 미3군 지휘 맡기 직전 까지의 실전 경험 기간 따져본다면, 최대로 산정해도 6개월.
그 6개월 중 43년2월~43년5월 기간은 사실상 실질적 전투 경험 없었던. 즉 냉정하게 패튼의 실제 전투 경험 산정한다면
시칠리 상륙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 조차도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 산악 지대에서 격렬한 전투 수행했었고, 미군은 상대적
으로 낮은 강도의 전투를 평지에서 치르며 더 빨리 진군했던. 몇 시간 빨리 도시 진입하면 독일군 쳐부순 것이 되는 겁니까?
저럼에도 패튼이 이렇게 널리 알려진 이유.
벌지전투가 아마도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지상군 최대 단독 승리였기에 그랬을 것.
하지만 벌지전투 역시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당시 패튼의 위치에 다른 미군 지휘관 누가 있었더라도 독일군은 돌파할 수 없었던.
날씨만 잠시 개이면 그 즉시 독일군은 무력화되는 상태. 저 때 패튼이 서부연합군 전선 붕괴와 패전을 막았던 것 아닙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냉정하게 벌지전투를 바라본다면,
왜 독일군이 하필 그 지역을 공격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부터 냉정하게 고려한다면,
--------------------------------------------> 거기가 당시 서방 연합군 최전선 중에서 가장 약했던 곳이었기에 그랬을 것.
--------------------------------------------> 설마 독일이 국가와 군의 명예-자부심을 걸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을 선택해 공격했겠습니까?
--------------------------------------------> 독일 최후의 공세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선 미군에 대한 푸대접일 수도 있는 겁니다.
------------------------> 하지만 독일의 그 푸대접 선택이, 미 역사상 당시 까지 미 단독의 최대 지상전 승리가 되었던.
저런 성격들 있음을 고려하면서 패튼 냉정하게 바라봐야.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2월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ruclips.net/video/34oR2D1GVU4/видео.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ruclips.net/video/p-9w2J5s0xU/видео.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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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미군 전력이 그렇게 세다는걸 모르다는것
저 당시에 바이락타르 드론과 M777 곡사포가 있었다면 일본군 순삭이었을텐데
독일의 아하트 아하트는 세계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