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맛있어 저 당시는 노론이 조정을 장악을 했었고 영조도 노론이 왕위에 올려준 왕 입니다 원래 영조는 어머니가 양반가문이 아니고 천한 노비인 무수리 였습니다 따라서 영조는 정통 왕자인 대군이 아닌 일개 군 이였죠 왕위와는 거리가 먼 왕족이였는데 경종이 죽고 노론의 힘으로 왕에 올랐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조정을 장악한 노론을 무시할수없었고 사도세자의 경우 영조와 사이가 극으로 나빠져서 죄인 신분으로 뒤주에 갇혔기 때문에 구선복이 사도세자를 조롱한거죠 사실 사도세자가 저렇게 된것도 노론 때문이죠 사도세자가 노론을 극도로 싫어하고 경계를 했었거든요 따라서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노론은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게 될수도 있기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 한겁니다ㅋ 이후 정조도 죽이려고 했으나 못 죽인거죠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것이라 생각을 해서 수차례 암살을 시도 했는데 정조는 끝까지 살아남아 기어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도 힘이 커지기 전까지는 숙청을 하지 않았고 힘이 커진후 정말 죽일 신하들만 죽이고 노론 전체를 숙청하지 않고 노론 소론 모두 다 어우르는 탕평정책을 펼쳤습니다 복수 보다는 진정한 군주 다운 옳은 정치를 한거죠ㅎ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미친 개짖는 소리작작해라 정조야말로 조선제일의 수구꼴통으로 또라이 정신병자 과대망상 환자라고 할수 있는데 이 인간이 미쳐도 아주 더럽게 미친 게 뭔가 하면 이미 전쟁의 양상이 변한 시점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고대석성 수원성을 지은 것이다 18세기말에 자그마치 11세기 고대성을 지은거야 무려7백년이나 뒤떨어지는 괴물단지를 짓느라 온나라안의 자원을 싹쓸이해서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만약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군이 전투함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또라이집단인가 거기다가 이 인간이 또 어떤 짓을 했느냐 하면 그나마 박지원같은 인물이 있어서 북경을 다녀온 후 조선과 청국의 너무나 벌어진 격차에 쇼크를 받아 조선이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열하일기를 썼는데 이 똥오줌 못가리는 또라이 왕은 뚱딴지같이 문체반정이니 뭐니 하면서 생트집을 잡아 이책을 금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조선의 변화를 촉구하는 유일한 소스인데 그 최소한의 변화의 요구마저도 완전히 싹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 미련곰탱이같은 왕은 그럼에도 욕심이 차고 넘쳐서 이미 국가권력의 추가 노론에게 넘어갔는데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정약용같은 수구꼴통과 손잡고 함께 자나깨나 노론벽파를 타도하고 왕권을 되찾을 궁리만 하다가 결국 노론의 타도는 고사하고 노론의 타도를 기도한 두 인간이 함께 나란히 골로 가시고 말았지요
정조와 세종 둘다 또라이 정신병자 사이코패스에다가 전형적인 독재자입니다 조선을 노비지옥 연쇄강간범의 천국으로 만든 세종과 서구의 국가들이 공화정과 입헌군주제가 출몰하는 시기에 자나깨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을 때려잡고 시대착오적인 고대왕권을 꿈꾸며 이미 전쟁의 양상이 변한 18세기 말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대석성을 짓는답시고 엄청난 자원을 싹쓸이해서 결국 망국의 기초를 닦은 정조가 최고의 왕이라고요? 제 정신인가요
정조가 왕권 뒤흔들 정적들이 많아 독살설이 많이 돌았지만 이는 거의 가능성이 적다고함.야사와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으니 몸에 열이 많을 것이며 술과 월령초(담배)를 매일 즐겼으니 종기가 안나는 것도 이상할 정도라고 했음.실제로 체질에 따라 피부병인 종기를 유발하는 가장 해로운 것이 열을 유발하는 스트레스와 술.담배임.
능지처참은 살점을 회떠서 자르는형벌입니다.최대한 오래동안 고통을 주기위해 지혈을 하기도 합니다.형벌은 약2박3일 정도구요.살점을 씹어먹는다고 했던 정조가 딱 알맞은 형벌을 내린거죠.그리고 저렇게 사지를찢는 형벌은 거열형입니다.능지처참과 거열형 잘못알고 계시는 분 들이 많네요.참고로 능지처참은 거열형은 쩁도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럽고 대신들이 가장 두려워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능성구씨 손입니다 아버지께 조상시조가 중국에서. 한국으로와서. 전쟁을 하였고 전쟁이끝나 중국으로 돌아가니. 본인. 집안이 멸하여 홀홀단신으로 다시 제주도로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종대왕후손이십니다 원수가 만난거였군요 이런영상의 내용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장군출신의 피가 어디가지 않았나봅니다 조상님들이. 많은. 죄를 지으셨습니다 많은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정조는 욕쟁이 왕이었음 ㅋㅋ 성격이 아마 성장배경때문인지 많이 영향을 받아서 경계심도 많고 좀 호기롭기도했음...자신을 일컬어 온세상을 비추는 군주라고도 하고 ㅋㅋ 머리도 똑똑한데 노력도 많이함. 경연에서 밀리지않기위해 항상 공부했고...항상 저런 암덩어리들을 족치고싶었고 암살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싶었던 정조였는데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게 좀 안타까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않다 라는 속담을 실제로 해버린 정조 폼 미쳤다
이게 한국 토종 특징이라는건가?
복수는 죽어서도 갚으라는 말인가? ㅋㅋㅋㅋㅋㅋ
@@tanso2624 냄비근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무뇌 행동, 냄비근성 ㅋㅋㅋㅋㅋ 개웃기넼ㅋㅋㅋ
@@apiee6241 외국 어디에서 인정하는데 ㅋㅋㅋㅋㅋ 미디어에서만 살지말고 현실에 나와 살아봐
@@joji361 ㄹㅇ ㅋㅋㅋㅋㅋㅋㅋ
@@tanso26248090년대 언론 가스라이팅 ㅋㅋㅋ
정조는 진짜 힘들게 왕위를 지켰습니다. 암살 시도도 여러번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왕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게해서 좋은 기록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뭔 개잡소리를 써놧어 그래서 니가 일본놈 앞잡이냐?
어릴적 큰 트라우마와 왕이 되고서도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할 만큼 생명의 큰 위협을 늘 지니며 살면서도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본인의 강단을 지켜내며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도 안타깝구요
@@mrsc5601 한국 철학 조금만 공부해 보시면 압니다. 정조는 거의 유이하게 경연에서 말빨로 신하들의 아가리를 닫은 걸로 유명합니다.
@@mrsc5601 본인 의견을 말하셔야죠. 남의 말을 순진한 소리로 치부하실거면 ㅋㅋ. 그렇게 별로라고 말하고 가실게 아니라.
군자의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않는다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외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분풀이 하는 모습이 통쾌합니다
싸이코냐?
@@myongdong뭐래
10년뒤 없는디?
@@myongdong 니가 싸이코지 정신나간인간아 이런걸 낳고 먹은 미역이 아깝다
왕이 되고도 10년을 기다렸다니...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만주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은 이들을 마적단이라고 부름)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세력인 동북항일연군이었다.
한국 독립군과 중국 호로군의 연합체로서 이들중 상당수 한국인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 중국공산당과 연합한 광복군은 339명 이었다.
반면에 2차대전 말기 조선인 일본군 지원자는 80만 명이 넘었고, 입대 경쟁률이 62:1을 넘었다.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알수있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검사가없었으니
군자복수 십년불만
그래서 기존의 5군영을 무력화시키고 독자적인 친위대인 장용영을 둔거죠
@@seromekim7798 💌💟💌💟💌💟💌💟💌💟💟💌💌👍👍👍👍👍👍👍👍👍👍👍👍👍👏👏👏👏👏👏👏👏👏👏👏👏👏
구성복도 미련하지 않으면 알았겠지. 왕을 바꾸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다는걸.
잣같은 말 졸라 아름다게 처주끼네
니애비애미무덤이침뱉고 시작하자
그래서 구성복은 유교를 싫어했다는 것이 알바의 정설
정조 구성복 모두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자기가 죽는다는 마음으로 외줄타기하는 맘이었겠죠. 그 스트레스..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미츤늠이에요
사도세자 뒤주에 침을왜????
죽을짓을 했네요
은혜는 못갚아도 원수는 갚는다
나야 나 천지호~~~ 히이이이힣힣힣헿헤헤헤
"원수는 잊어도 은혜는 잊지마라" 아니던가요?
문빠 빨갱이들의 반동 선동 구호 닮았네
@@bansyoungman 세상이 말씀데로 돌아가면 얼마나좋겠어요~~
@@michingay447 맞아요 추노에서 듣던 대사지요~~
아무리 뒤주에 갇혔어도 왕족인데 침을 뱉고 조롱했으면 죽어야지
왕따위가 뭐라고?
소변도 누고 조롱했음ㅋ
@맛있어 저 당시는 노론이 조정을 장악을 했었고 영조도 노론이 왕위에 올려준 왕 입니다
원래 영조는 어머니가 양반가문이 아니고 천한 노비인 무수리 였습니다
따라서 영조는 정통 왕자인 대군이 아닌 일개 군 이였죠
왕위와는 거리가 먼 왕족이였는데 경종이 죽고 노론의 힘으로 왕에 올랐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조정을 장악한 노론을 무시할수없었고 사도세자의 경우 영조와 사이가 극으로 나빠져서 죄인 신분으로 뒤주에 갇혔기 때문에 구선복이 사도세자를 조롱한거죠
사실 사도세자가 저렇게 된것도 노론 때문이죠
사도세자가 노론을 극도로 싫어하고 경계를 했었거든요
따라서 사도세자가 왕이 되면 노론은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게 될수도 있기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 한겁니다ㅋ
이후 정조도 죽이려고 했으나 못 죽인거죠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할것이라 생각을 해서 수차례 암살을 시도 했는데 정조는 끝까지 살아남아 기어코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도 힘이 커지기 전까지는 숙청을 하지 않았고 힘이 커진후 정말 죽일 신하들만 죽이고 노론 전체를 숙청하지 않고 노론 소론 모두 다 어우르는 탕평정책을 펼쳤습니다
복수 보다는 진정한 군주 다운 옳은 정치를 한거죠ㅎ
카더라 말고
편파적인 사기 말고
팩트는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의 왕권은 꽤나 관료들에게 분산되어있었다고 하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예
부모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서 더불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같은 나라에서 살 수 없고, 구족(고조에서 현손까지의 일가)의 원수는 같은 무리로 살 수 없고, 친구의 원수는 같은 시정과 조정에서 살 수 없다.
[.翰軠]
우~~와~~
어디에 나오는 글귀인가요?? 궁금해서^^
결론은..다 살수없다란 얘기네
@@julialim5740 한량
@@그녀의웃음소리뿐-v2z 원수하고는..
진짜 사이다복수네 ㅋㅋㅋ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 一賤則賤 )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서구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노비를 노예로 취급하는 근거는 ?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조선시대 노비가 매매, 증여, 상속 됐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노비가 물건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조선은 동족을 노예로 부린 유례를 찾기힘든 국가였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과 백성들이 오히려 왜군을 환영하니 근심이다라는 기록이있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400년을 더 노예로 고통받았다.
조선은 19세기 즉 건국후 600년이 지나서야 겨우 13세기 고려의 경제력 및 생산량을 따라잡게 될정도로 노예착취로만 연명하던 극빈국이었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조선]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고려]에는 매우 부유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선조실록 38년 9월 28일 기해 』
고조선 부터 일본까지 다 한민족역사.
『한국에서 들어온 일본의 청동기』를 발표한 「스기하라」교수는 " 한국 청동기 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BC 1백년∼AD50년께에 일본에 청동기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철기와 청동기가 동시에 전해졌으며, 청동기는 제사용으로만 이용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철기 시대로 직행한 것으로 보인다. "
BC100년경 ~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일본에 한국인들이 철기 무기를 들고 상륙하면서 일본에 고대문명이 시작됐다. 일본역사는 곧 가야백제의 역사고 한민족의 역사다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중국인은 사람의 모양을 한 바퀴벌레다"
- 도조히데키(내각총리대신) -
중국인을 조선처럼 황국신민으로 편입할 계획은 없는가 ? 라는 기자 질문에.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조선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니이가타산 쌀을 조선으로 수탈해가기도해서 이에대해 당시 일본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조선600년간 인구증가없이 천만명 수준을 유지하던 인구가 일제시대때 2배로 증가할정도로 조선인들의 삶은 풍족해졌다.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인구는 1,260만 여명이 증가하였는데 그 중 약 69%인 870 만여 명이 한반도 안에 있고 31%가 만주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위안부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위안부는 신문에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릴정도로 합법적인 직업이었다. 페이도 일본인 조선인은 동등하게 중국인보다는 많이 지급됐다.강제징용도 일본인이 훨씬 많았으며 의사보다 페이가 높은 고임금 직업이었다.
“조선인 탄광 노동자 임금은 일본 순사보다 3.7배 많았다”
만약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 한국인들은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되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
대만과 동남아국가들은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매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것이다.이후 중국은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金)나라와 몽골에 정복당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300년간 통치한것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역시 금나라 시조의 출원지를 신라로 밝히고, 금나라라는 국호도 그의 시조 성씨가 신라 왕의 성 김씨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
중국사관학자들이 고조선문명을 부정하는 이유는 고조선문명이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뿌리부터 흔들기때문이다
@@seromekim7798 어쩌라고 그래서
그래서조국의원도
그렇게 풀어줄수있다는거지
@@seromekim7798 그렇다면 이런 븅신은 현재 얼마나 있을까요?
@@PunchCat-i5j사람이 뭐이리 꼬였냐. 그냥 그렇구나하며 넘기년 될 것을 ㅉ.
정조가 제일무서워ㅜㅜ 10년을기다려ㄷㄷㄷ
배워 이놈아
@@Malaniesafka 배운다고 된놈은 아닌듯 세종다음으로 존경받는 정조인데 이것도 모를정도면 그냥 등신임
무서워서가아니라 때를보고 지혜롭게. 인내한거지요
@@김덕중-c5o못배운티좀 내지 말어라.
@@dakakimasao 야이 ㅂㅅ아 10년을 참고 때를기다린 정조가무섭다고 ㄷㅅ아 정조가성군인거 모르는사람있어? 별시덥잖은 좁내 배웠는갑네
아주 시원해겠네요 .그런 인간성이 더러운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 참수시켜야됨 .
그런놈이 ㅁㅈㅇ과 ㅇㅈㅁ이다.
어휴 그럼 정치권은 몰살해야 하는데 검찰도 남는자가 몇 없어서 노가하나 걱정이네
뭐든 정치로 보이는 니네가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단다 틀니 땅땅땅
본ㆍ부 ㆍ장
못듵었어요? 해외까지 소문났는데
@@이종석-x9uㅁㅊㄴ 뭐라고 씨부리노
조선사 500년동안 능지처참을 당하는 형은 손에 꼽을 정도죠.
대략 성삼문 허균 김자점 등인데 구선복 이라는 분은 처음 들어 본 인물이라 많이 의아스럽네요.
능지처참은 최고의 극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왕중 하나. 정치도 잘하고 군사력 좋고 효심도 지극함
미친 개짖는 소리작작해라 정조야말로 조선제일의 수구꼴통으로 또라이 정신병자 과대망상 환자라고 할수 있는데 이 인간이 미쳐도 아주 더럽게 미친 게 뭔가 하면 이미 전쟁의 양상이 변한 시점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고대석성 수원성을 지은 것이다 18세기말에 자그마치 11세기 고대성을 지은거야 무려7백년이나 뒤떨어지는 괴물단지를 짓느라 온나라안의 자원을 싹쓸이해서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만약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군이 전투함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또라이집단인가 거기다가 이 인간이 또 어떤 짓을 했느냐 하면 그나마 박지원같은 인물이 있어서 북경을 다녀온 후 조선과 청국의 너무나 벌어진 격차에 쇼크를 받아 조선이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열하일기를 썼는데 이 똥오줌 못가리는 또라이 왕은 뚱딴지같이 문체반정이니 뭐니 하면서 생트집을 잡아 이책을 금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조선의 변화를 촉구하는 유일한 소스인데 그 최소한의 변화의 요구마저도 완전히 싹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 미련곰탱이같은 왕은 그럼에도 욕심이 차고 넘쳐서 이미 국가권력의 추가 노론에게 넘어갔는데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정약용같은 수구꼴통과 손잡고 함께 자나깨나 노론벽파를 타도하고 왕권을 되찾을 궁리만 하다가 결국 노론의 타도는 고사하고 노론의 타도를 기도한 두 인간이 함께 나란히 골로 가시고 말았지요
별로 후계자 보소
무슨소리 ㅎㅎ
라기엔 정조덕에 세도정치 시작됨
천재군주 정조가 일찍 죽은건 이런 연속된 스트레스속에서 살았기 때문.정말 불우한 생을 살면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역사상 몇 안되는 위대한 군주.
과거가 미래다..
현재를 바로잡아야 미래에 발전이 있다
과거가 왜 미래임?
고구려 사람들이 천년 후에 살아남??ㅋㅋㅋ
@@초영-y7xㅇㅇ
@@초영-y7x
역사는 기록이잖아요.
정치판이라는게 과거나 지금이나 돌아가는 것이 매한가지라고 말하죠.
과거의 잘잘못을 보고 지금잘하면 미래가 밝아진다는 뜻으로 생각되네요.
하지만 지금의 정치권이 과연 제대로 돌아갈지 그게 걱정입니다.
@@초영-y7x 너 초딩이지?
이런데 일본에 굴복하고 위안부 할머니 피눈물 나게하는 현정부는 ᆢ
정조가 무예 학식이 뛰어나고 똑똑함
👍
정조덕에 안동김씨 김조순의 세도정치시작
그냥 만능임.
정조대신 추대하려던 왕자도 지가 침을 뱉었던 사도의 아들이란게 코미디ㅋㅋㅋ 뒤질만했음
더러븐것들은 기본도 없습니다 , 쯧쯧 한심하다
치욕을 견딘사람을 적으로 두면 안되는 이유..
영상은 치욕을 준 사람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뭘 얘기하는건지 ㅋㅋㅋ
그럼 벼슬아치가 왕을 죽일수가 있냐?
맞는말인데 이해못하는댓글들뭐지. 실제로 고려시대때도 김돈중이 정중부한테 모욕을줬다가 정중부가 참아서 넘어간적이있엇는데 후일 무신정변이 일어난후 김돈중을 잡아다가 그떄의 치욕을 갚는다며 목을처버렷죠
@@넋22튜브 무식해서 이해를 못하는건가 ㅋ
왕권의 지엄함을 제대로 보여주셨네요.정조대왕님 만세~!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무서운 이유...ㄷㄷ
ㅎㅎ 좋습니다
능지처참이라고 나온 건 거열형,또는 오우분시입니다. 능지처참은 살을 얇게 포를 뜨고 사지를 잘라 죽이는 형벌입니다.
오호 그래요 나도 능지처참을 잘못 알고 있었네요 잘 배웠습니다 ❤❤
이미 죽은채로 실행하였다 해요.
산사람이 아니라..
@@JHY-hh6gu그건 부관참시라고
따로 있는 형입니다.
@@ArthiumJosyp 부관참시는 관에서 꺼내 목을 자르는거구요.
다시 찾아보니 능지처참은 죽인뒤 사지를 절단해서 전국각지로 흩어놓는거라 하네요. 말이나 소에 묶어 사지를 찢는건 거열형 또는 오우분시가 맞네요.
오우분시 또는 오마분시... 엄청 잔인해보이지만 죽음의 고통은 순간이라 더 고통스러운 형보다 이 처분을 원한 죄인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정조가 그런 강단이 있었구나ㆍ
복수 제대로 했네!
대단한 왕이었지요.
그 한이 오죽했을까요.
아씨 ㅋ
제가 구씨라서 그런지 ..
정조님 말씀 공감합니다.
저의 아버님 집구석 인물들 꼬라지들만 봐도
정조처럼 상욕이 나옵니다. 으흑흑 ...
정조가 독살설로 죽지 않았다면 아마 세종이후 최고의 조선의 왕이 되었을것!!
정조와 세종 둘다 또라이 정신병자 사이코패스에다가 전형적인 독재자입니다 조선을 노비지옥 연쇄강간범의 천국으로 만든 세종과 서구의 국가들이 공화정과 입헌군주제가 출몰하는 시기에 자나깨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을 때려잡고 시대착오적인 고대왕권을 꿈꾸며 이미 전쟁의 양상이 변한 18세기 말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대석성을 짓는답시고 엄청난 자원을 싹쓸이해서 결국 망국의 기초를 닦은 정조가 최고의 왕이라고요? 제 정신인가요
그래봤자 성리학에선 나라망함.
@@전미영-m7v 노론을 모두 처 냈을거에요
정조독살설ㅋㅋ 아주 ㅈㄹ을 해라ㅋㅋ
지금도 세종이후 최고로 침
전기 세종, 후기 정조
이산의 절치부심, 와신상담. 참고 또 참으며 기다린 오랜 복수의 시간.
임금이기 이전이 한인간의 멋진 복수네유 백번천번 추카할만하네유
정조 진짜 멋지다.
사진은 거열형이지 능지처참의 사진이 아닙니다. 능지처참은 살아있는채로 사람을 회뜨다가 마지막에 죽인 벌이에요. 정조는 아마 그걸 보며 씹어먹은듯 시원해 하지 않았을까합니다.
그건 중국의 능지처참임
조선엔 회뜨는 사형법 없었음
@@jye0421우리 사법부가 사형을 구형해도 집행을 안 하듯, 조선에도 구형은 이루어지나 다른 방식으로 집행되던 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ArthiumJosyp 판결로는 삶아 죽이셈 해놓고도 실제로는 솥에 넣는 시늉만 하고 대신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 취급하는 식으로 집행했다고 들음
군자보구 십년불만 ㄷㄷ 진짜 10년만에 개사이다복수 완료
얼마나 속앓이하셨을까
당해본 분들만이 아십니다!
인내심,,,,,,,ㅎㅎ 좋습니다
요즘 정치 or 판결부정에 따른 불신으로 목마름에 시원한 사이다~~~ 캬
정조가 왕권 뒤흔들 정적들이 많아 독살설이 많이 돌았지만 이는 거의 가능성이 적다고함.야사와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으니 몸에 열이 많을 것이며 술과 월령초(담배)를 매일 즐겼으니 종기가 안나는 것도 이상할 정도라고 했음.실제로 체질에 따라 피부병인 종기를 유발하는 가장 해로운 것이 열을 유발하는 스트레스와 술.담배임.
군자의 복수 10년을 기다린 복수는 어떤맛일까 정말 달콤할듯
능성은 과거 지명이고 현재는 능주임. 전남 화순군 능주면. LG가문이 대표적인 능성 구씨집안.
전남 능주면이엇군요
개미주주들한테 악명이 자자하든데
@@Ds-qn8tx 네 가던길 쭈욱 가세요... 능성 구씨 가문이라는데 출신은 왜 나오는지..
능지처참은 서서히 살을 베어 내는 것이고 화면의 형벌은 거열형
우리나라에서는 능지처참을 선고하고 거열형으로 처형했습니다
애초에 능지란 처벌이 실제로 처형하기도 힘들고 주변 눈치도 좀 봐야해서 실제로 시행된 적은 많지않을겁니다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 개끔찍하다! 고통때문에 소리소리를 질러댈테고 죽기직전까지 극한의 공포와고통을 느끼다 죽음! 지금 사형수들한테 시행하면 좋겠음! 사형수들 다모아놓고 보는데서 직접시행! 트라우마로 자살시도하는놈들 많을거임 자살못하게 하고 극한의공포에 시달리게해서 서서히 말려죽여야함 정신적고통극대화!
@@광주오-d6r 할거면 능지가 좀 더..거열은 그냥 사지를 찌찌만 능지는 살아있는 강태에서 살점을 포 뜨는거라
@@user-yw8uf3qg5s 백번동감입니다!만 능지가 처벌하는 사람이 곤욕이라서 기계식으로 만들수있음 좋겠는데 그건또좀 힘들것같고요. 발골하시는분들이 최적이긴한데 누가 할려고하겠습니까! 거열은 기계식으로 장력조절해가면서 자동화로 만들수가있어서 형집행자가 트라우마가 덜할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나마 거열로 하는게 최적이아닐까 생각합니다
속이 시원하다 요즘 야
당의 다수의 정치인들이 구상복 처럼 형편이 무인지경인
자들이 많다
정조대왕의 착한 성품이 얼마나 구상복이 몹쓸짓을 했으면 정조대왕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능지처참 요즘 정치인도 많아 화병 날지경 평화로운 정의로운 시대가 오길 기원합니다 🙏
능지처참은 살점을 회떠서 자르는형벌입니다.최대한 오래동안 고통을 주기위해 지혈을 하기도 합니다.형벌은 약2박3일 정도구요.살점을 씹어먹는다고 했던 정조가 딱 알맞은 형벌을 내린거죠.그리고 저렇게 사지를찢는 형벌은 거열형입니다.능지처참과 거열형 잘못알고 계시는 분 들이 많네요.참고로 능지처참은 거열형은 쩁도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럽고 대신들이 가장 두려워한 형벌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인내심이 대단하네요
나도 그럴 사람이 있는데
한 6년 지나니깐 잊어버리더라구요
이제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네요
왜 역사는 되풀이될까? 난 영원할꺼야 라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방자함이 매번 끝에가서 상대에게 복수를 맞이한다 꼭 작금의 현실과 일치해서 글을 올려본다.
능성구씨.... 저희지역 성씨네요
구선복 일가만 참수했겠지. 씨족이 한 일가로만 이어지는게 아닌데 당연히 다른 후손들이 있지
구선복의 일가만 참수.노비가 된겁니다 구씨 전체를 다 쳐버리기엔 인원수도 글코 고려때부터 벼슬하던 집이라 나머지까지 쳐버림 반대로 정조가 위험해져요ㅎㅎ
나도 능성구씨인데 ㅋ
@@NaDa_315 스스로에게 얘기할땐 능성구씨가 아니라 능성구가라고 해야죠^^
전남 화순군 능주면 ᆢ능주(능성) 제가 맞는가요?
정조대왕님! 잘하셨나이다.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지나 행해도 늦지않다.
궁금한게 구씨는 능선구씨 말고도 가문이 있나요?????@.@
정조대왕께서 치밀하셨구만 ^ ^
오늘 풍요롭다 해도 내일도 꼭 그렇다는 보장없을 준 교훈...
침 만 뱉은게 아니라 소변도 보지 않았나요??
정조가 즉위 했을때도 정조를 무시했었죠
왕이 되고 나서도 참고 10년동안 힘을 기른 후 구선복을 처지했죠ㅎ
아버지를 능멸 했는데 뿌린데로 거두는법 정조 같은 성군도 원수는 벌하는구만 구씨 가 역적 집안이란것도 지금 알았네
그렇게 따지면 역적이 아닌 집안이 있을까? 역사속 어느 한 인물의 성씨만을 따져서 그성씨가 역적이니 아니니 하는게 참 웃기지
그케치면 조선왕실도 고려왕실서 보면 반역자집안입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지나도 늦지 않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이산 정조
능성 구씨의 후손으로써 제가 대신 정조 대왕께 사죄드리겟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미 제대로 복수당했는데 사과하고 말게 뭐가있음ㅋㅋㅋ
현재 힘이 있다고 까불면 안돼,.세월은 흘러가는 거고 힘을 가진놈은 점차 쇄퇴하는 것이고 복수를 하려고 하려는 사람은 기회를 엿보는 것이지.
지금도 이런 형벌을 가할 인간들이 있는데
다들 알지요
주관식 문제 좋아하지요 문 죄인 이죄명 그앞에 한강보고 누워있는 자 부관참시.
정조가 그래도 착했어 ... 씨를 말려버린것도 아니고 너무 많이 봐줬어 😊
우리나라는 유사이래 악하고 서악한 것둘을 봐주다 번번이 호되게 당함 ㅋ 아이러니😅
나쁜짓 하면 오래 걸려도 꼭 그대가는 치룬다
아이고 속시원하다!
사이다 한사발!
10년을 기다리는게 말로는 쉬워도
툭하면 얼굴 마주쳐야하는 병판을
10년동안 신하로 곁에 두다 복수의 기회를 잡는다는게..
정신 나가버릴거같은데..
꽃송이버섯과 아쿠아덤은 꼭 구매해봐야 겠아요!!!! 소개해주신 양을 보니 건강에 진심이 아닐수가 없네요 ㅎ
능성구씨 고려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인구수에 너무나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인데 이런 경우도 있었군요
능치처참은 사람을 회치는 징벌이고 저렇게 사지를
묶고 땡기는 것은 거열형입니다..
잘못 아는분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능지처참은
실제로 집행된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허균이 능지처참형 인것 같은데 이것도 실제는 거열형으로 쳐해진걸까요?
지금이 꼭필요한것같아!
복수의 성공만큼 달콤한것은 없지
욕심이 과하고 남의 입살에 오르내리면 급살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쌓은 업의 구덩이에 엎어지게 됩니다
원수를 날마다 대해야 하다 보니 정조가 건강이 나빠질수 밖에 없었겠네.
멋지다 일제때 앞잡이들도 저렇게 만들었어야 나라가 이꼴 안났을터인데 ...
나라가 이꼴 ?
대한민국 말하는가 ?
북조선은 ?
@@kimjames3526 북조선을 왜 나한테물어 일본새끼가 멀 알겠니
지금 나쁜 검사
판사들에게도
능지처참이
있음 어떨까 ㅎ
니가 해라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는 말이 진짜였네;;
뼈속까지 무인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가 가만 있을리 없지 ᆢ 무술을 좋아하는 정조가 그냥 있을리 없지 ㆍ자기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답답하고 목마르고 아픔에 죽었는데 그걸 밖에서 부하들과 술먹고 약올리고 침뱉고 그런것을 가만둘리 없지 ~ 정조가 뼈를 피가 타는 세월을 참고 버티다가 기회를 기다린것이다 ᆢ 멋찐 무인이자 문인이다 !
지금도 권력을 누리려고
나라와 국민은 아랑곳 업고 아부아첩에 입에 침이 마루도록 거진말에
설량한 국민 혈세로 목구멍에 썩윽 몸둥아리에 좋다는 것을 삼키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양심의 소리로 만 들을수 있어요
살아있는 상태로 이라,...
말이 된다고 생각되나?!
이겠죠?!
과 과 를 밧줄로 묶어 각 방향에서 소로 당기는 형벌을 이라 한다!
"능지처참=능지처사"는거열형과 완전히 다름.
"능지"는 원래 완만한 언덕을 뜻하나, 사람을 조금씩 포를 떠서 아주 오랫동안 고통을 주며 죽이는 형벌을 뜻하는 말로 변화.
사지를 찢어죽이는 거열형과는 완전히 다른 형벌임.
조선시대때 능지처참으로 판결 내리고 너무 잔인해서 실질적으론 거열형으로 처형내렸음 그러다보니 능지처참이라고 한...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눈에 피눈물 난다
사지를 찢는 것은 거열형으로,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엄연히 다릅니다. 드라마에선 대부분 이를 동일시하는데 아니에요. 능지처참은 사람을 기둥에 묶어놓고 죽지 않을 정도로 얇게, 가능한 많이 살을 도려내는 형벌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 포 뜨는 거에요.
아직도 능지처참에 거열 사진을 쓰는거 보면 헷갈리는 분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재가 죄송한데 제가 능성 구씨입니다 성격파탄, 안좋은 말 하지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재발요 😢😢
이를 부득부득 갈수록 냉정해야 된다..
작품은 대단히 고마운데 화면에 나온, 말에 팔.다리, 그리고 머리를 밧줄로 묶어 당기게 하는 형벌은 능지처참형이 아니라 거열형입니다.
정권이 뒤바낄줄은 아예 생각도 안했구나.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자기눈엔 피눈물 난다."
진나라 범저는 작은 원한이라도 살아생전 반드시 갚는다고 했습니다 ~ 사람이 살면서 원한맺히게 하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구선복은 일반 백성들한테도 말도못할정도의 악행을 저질렀다고 함
속이 시원합니다. 훌륭한 리더 정조❤
누가 봐도 정의놉게 행동햇다면
누가 역사의 죄인이 될까
그이아길 민주당 에게하고싶다
뒤주에 갇혔어도 왕족이라 조롱해선 안된다기 보다 사도세자는 너무나 처참하고 비참하게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아들인 정조는 그것을 목격했구요
찢어죽이고 싶었을 겁니다
실제 찢겨 죽임당했네요 구선복
효성이 지극히 많으신
정조임금을 좋아 합니다
수원가는 지지대 고개를 공부해 보면
아버지의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읍니다.
알게 됩니다.
구씨가 생명력과 능력이 대단한게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lg를 만들었네;
ㅇㄴ 시작짤이 맛깔나게 스테이크 굽는짤이라 너무 웃겨...ㅋㅋㄱㅋㅋㅋㅠ웃기면안돼는데
왕이 복수를 위해 십년을 참고 기다렸다니...
군자의 복수는 십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던 옛말이 진짜였구나.
구선복도 첨엔 경계 하다가 정조가 십년이나 가만히 있자 방심한것 같은데....대단한 정조.
역모를 꾸몄다잖소.
말 없는 증오는 천리를 가는 법이다.
기억에 남는 당신의 행동을 뒤돌아 보아라!
반드시 돌려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게 하늘에서 이루어지든 땅에서 이루어지든---.
쌤통이다 핵사이다 굿굿굿 인과응보
꼬시다 ㅋㅋㅋ
구씨는 역적이였군 ㅡ.ㅡㅋ
ㅋㅋ
내가 아는 보은구씨 그러하오
고려왕씨가 보면 전주이씨가 역적이죠.
@@폴볼커-b5m 경주김씨가 보면 또 왕씨도 쿠데타 세력이고
정적이죠
구씨: 너 납치된거야
곧 이넘들 능지처참 하는 시간이 온다 ...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짧다..
능성구씨 손입니다
아버지께 조상시조가 중국에서. 한국으로와서. 전쟁을 하였고 전쟁이끝나 중국으로 돌아가니. 본인. 집안이 멸하여 홀홀단신으로 다시 제주도로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종대왕후손이십니다
원수가 만난거였군요
이런영상의 내용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장군출신의 피가 어디가지 않았나봅니다
조상님들이. 많은. 죄를 지으셨습니다
많은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아버지의원수
정조는 욕쟁이 왕이었음 ㅋㅋ 성격이 아마 성장배경때문인지 많이 영향을 받아서 경계심도 많고 좀 호기롭기도했음...자신을 일컬어 온세상을 비추는 군주라고도 하고 ㅋㅋ
머리도 똑똑한데 노력도 많이함. 경연에서 밀리지않기위해 항상 공부했고...항상 저런 암덩어리들을 족치고싶었고 암살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싶었던 정조였는데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게 좀 안타까움
내가 그래
구선복 친척 중 이주국은 미리 왕한테 구선복이랑 의절할테니 나중에 구선복이 사고 쳐도 연좌 면하게 해달라고 해서 화를 피할 수 있었음
아이고
우리 신랑이. 능선 구씨인데 이걸
몰랐네
돌아가신 시모 왈 천날만날 양반이라고
때마다 한복 입어라
큰절 하라하더니 이제 이일을
어찌할꼬
조상이 후손 사고에 누가 되는구나
참으로 탄식 할 일이로다
70세 할머니가
할머니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영감님 수염을 끌고 관할 의금부에 찾아가서 신고를 하십시오. 또 잘못하면 삼족이 멸할 수가 있읍니다요. 빠를수록 좋아요.ㅎㅎ
이보세요 구선복의 삼족을 멸해도 모든 구씨가 몰락하는게 아니에요
나머지는 양반맞습니다.
구씨는 조선 건국에서부터 영조때까지 무과급제자를 363명 배출한무인가문이었으며 주요요직에있었던 집안이었습니다.조선500년중 약400년정도의 무권을장악한 소리없는 실세집안이었으나,정조의 무권장악을위한 희생양으로 정조때부터 구씨집안들이 조선정사에서 자취를 감추게됩니다.역사의 기록은 승자, 정조의 기록이지만 구씨집안에게는 고난의 시기였지요
능선이 아니고 능성 입니다 구가집안 며느리가 그것도 여태 모르셨는지요 시어머니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꼬
고종대신 😅그시대에 정조와 세종대왕이 있었더라면 조선은 어땠을까
아무리 인성이 개차반이라도 그렇지 죽어가는 사람앞에 침을 뱉었으면 곱게 못죽지
“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 ㄷ ㄷㄷ 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