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부처는 경주 남산 산행길 마지막에 늘 들르는 곳입니다. 해질녘에 LED 촛불 하나 켜놓고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인자한 할머니께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지친 다리 좀 달래고 가거라." 하시는 것 같아요. 그때부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올려다보게 되는 부처님입니다. 일상에 치여 살다보니 할매부처 못 뵌지도 5-6년이나 지났네요. 덕분에 잊고 살던 할매부처님을 랜선으로 다시 뵈었습니다. 감사해요ㅎㅎㅎ
우와 경주 3월 1일에 갔었는데. 날씨까지 춥고 많이 걸어다니고 이동해서 다리 아파서 대표적인 곳만 우선 보고 왔어요. 여기저기 왕릉. 절터, 고분 등등 널린게 유적지이더라고요. 볼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릉원 첨성대 동궁월지 랑 시내중심가 에만 모여있거나, 보문단지 주변 불국사. 석굴암에만 몰려있더라고요 (특히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차가 엄청 밀려있더라고요) 나머지 구역들도 더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선덕여왕은 아마 엄청난 동안이 아니었을까요...? 40대? 50대? 쯤 됐는데도 한 남자가 여왕을 잊지 못해 상사병으로 죽게 만들 정도의 미모라면... -_-a 영상을 보고 생각해 봤는데, 제 생각에 선덕여왕 치세 전반의 혼란은 진평왕이 씨를 뿌린 것 같습니다. 치세 50여년을 성공적으로 통치해내면서 자신감이 붙은 나머지 결국 자신의 직계 쪽으로만 무리하게 권력을 강화하려다 그게 유력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나 봐요. 그래서 귀족들이 처음으로 실력 행사(칠숙의 난)에 나섰다가 왕에게 제대로 밟히고 한동안 아무 말 못하다가 선덕여왕 즉위 후 국정 혼란을 빌미로 다시 한번 쿠데타 시도... 이때를 보면 꼭 고려 말 공민왕(-> 선덕여왕)과 이성계(-> 김유신)를 보는 것 같기도 하네요. ^^;
성골이 없어서 문제인데 성골 남자가 있었다면 성골이 끊어질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요 선덕여왕은 여자인데다, 왕권약화로 여러문제가 있었기때문에 오히려 더 행동을 조심했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음 왕도 동생에게 갔는데 자매간 아들이 하나도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되지요🤔 그래서 법흥왕이나 진평왕이 성골을 만들었다는 의견의 바탕이 되기도하지요😮
신라의 미소가 당시 선덕여왕의 외모를 닮은 것이라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ㅎㅎ 1988~9년사이에 경주를 거쳐가는 고속철 공사로 문화재 사전발굴 작업이 있었는데, 이때 대량의 미발굴 왕릉(또는 귀족능)을 대규모로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상황이 나타났지요. 당시능의 조성연대는 대개 5~6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많은 능에서 무덤의 주인공과 생전시의 시종들로 추정되는 토용(土俑)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다시피 신라는 지증왕때인 502년에서야 순장을 금지시켰고, 이후 순장의 대용으로 생전의 모습을 닮은 토용을 만들어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능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토용은 대개가 완전한 백인종(콧날, 구렛나루, 쌍거풀진 눈)의 모습을 하고 있고, 수행자(시녀, 시종)로 추정되는 하층계급인들은 한국인의 얼굴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도 선비, 돌궐족으로 추정되는 백인들이 등장하는 무용총, 각저총의 인물화역시 한민족얼굴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 발굴결과는 세계 고고학회에도 보고되었고, 학계에선 고대 아리안계(특히 스키타이 포함)가 BC 7세기경부터 페르시아제국에 밀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몽골지역에 정착하고 일부가 계속 동진하여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신라였다는 논문도 발표되었지요. 논문에 의하면,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들이 기존의 몽골계를 정복하고 신라를 건국했다는 논리였는데, 1992년 빨래터에서 발견된 '문무왕비문'에도 자기들(김씨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흉노계라고 버젓이 써놨지요. 1960년 이후 서구 고고학계에선 중국 북방의 기마민족들인, 흉노, 선비, 돌궐, 거란등을 서쪽에서 이주해온 백인계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실제 터어키 교과과정에도 자기들 조상이 카프카스 일대에서 나와 동방으로 이주하여 흉노, 돌궐을 세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진짜 선덕여왕의 외모는 마릴린 몬로나 쥴리아 로버츠같은 쌍거풀진 큰눈에, 오똑한 콧날을 가진 백인 미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신라의 미소라는 기왓장에 표현된 모습은 아마도 선덕여왕의 궁녀를 닮지 않았을까요? ㅎㅎ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 진평왕사후 화백회의 에서 덕만을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바로 선덕여왕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첫번째는 당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냈는데 이때 선덕여왕은 이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거라 말했는데 실제 씨앗을 심어보니 향기가 없다는걸 알게된 신하들이 물어보니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라면서 결혼을 안한 나를 희롱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고 적혀있지요 두번째는 백제군을 물리친 사건인데 영묘사라는 절에 옥문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어느 겨울에 갑자기 개구리가 나타나 사나흘을 울었는데 왕은 각간 둘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북쪽에 있는 여근곡을 습격하게 했는데 여기에 백제 장군 우소가 매복해 있다가 알천과 필탄에게 죽었다 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때 신하들이 이일에 대하여 물어보니 개구리가 심히 우는것은 병사들의 모습이요 옥문이라는 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법 이니 쉽게 잡을수 있었다 라고 설명이 되어있죠 그리고 마지막은 유언으로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했는데 이는 낭산 남쪽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문무왕대인 679년에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을 실현시킨것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첨성대 건립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이때 김유신과 김춘추의 등장으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되지요
영상의 마지막 부분
선덕여왕을 닮지 않았나 하신
마애불을 볼때마다
그시절 장인들의 정신과
재주와 노력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벌써 벚꽃이 피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경주의 여러 유적지에도 역사를 감싸는 아름다운 꽃들이 함께 할 듯 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경주의 봄은 벚꽃으로 가득하지요, 다 되었습니다😄
훌륭한 영상이였습니다 ,고고학자 사적돌님👏🏼👏🏼👏🏼👏🏼👏🏼
오 고고학자분들의 연구를 열심히 가져오는 사적돌입니다😌
2주전 다녀온 장소 그대로 다시 한번 익혀봅니다. 감사합니다. 할매불상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항상 안전한 탐방하시면 좋겠습니다.
염려 감사드립니다😌, 할매불상은 강추합니다, 할매불상 보시고 도당산성 쪽으로 산길넘어가면 경주박물관 나오는데 꽤 괜찮은 하이킹 코스입니다😄
오늘도 좋은 영상감사합니다 😊 날이 서서히 풀리는데 좋은 날씨와 함께 훌륭한 풍광의 영상들이 기대되네요!
드디어 봄입니다, 해가 길어지니 현장에 더 오래 머무를수 있음이 좋네요😄
지난 드라마를 생각해보면서 역사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오 후원 감사드립니다😄 이름에 걸맞는 영상 제작해가겠습니다😌
저도 경주로 가서여행
하고 왔습니다
오 가을의 경주가 참좋지요😄
오늘도 멋집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시청 감사드립니다😌
할매부처는 경주 남산 산행길 마지막에 늘 들르는 곳입니다. 해질녘에 LED 촛불 하나 켜놓고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인자한 할머니께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지친 다리 좀 달래고 가거라." 하시는 것 같아요.
그때부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올려다보게 되는 부처님입니다.
일상에 치여 살다보니 할매부처 못 뵌지도 5-6년이나 지났네요. 덕분에 잊고 살던 할매부처님을 랜선으로 다시 뵈었습니다. 감사해요ㅎㅎㅎ
할매부처는 경주에서 가장 추천하는 곳입니다, 경주의 모든것을 느낄수 있는곳😌
좋은 영상과 자료 감사합니다. 여행갈때 참고 하겠습니다.
오 시청 감사드립니다😄
덕만하면 이요원이 자꾸 떠울라 난감합니다ㅎㅎ 선덕여왕릉은 왕릉중에서 제일 맘에 듭니다 다다르는중에 뭔가 시간을 거슬러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TMI이지만 저는 김씨이구요 ㅎㅎ
옛 신라인들이 괜히 신성한 숲이라 생각한건 아닌가 봅니다😄
선덕여왕릉도 그 너머 능지탑도
처음 갔을 때 궁금하고 신비롭다(?)는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탑골 마애불도 좋아요.
낭산이 구석구석 신비로운 감이 있지요😄
흐흐.... 어릴때 선덕여왕 사극을 봤는데 오랫만이네요
내용 기억이 안나네요😄;
우와 경주 3월 1일에 갔었는데. 날씨까지 춥고 많이 걸어다니고 이동해서 다리 아파서 대표적인 곳만 우선 보고 왔어요.
여기저기 왕릉. 절터, 고분 등등 널린게 유적지이더라고요. 볼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릉원 첨성대 동궁월지 랑 시내중심가 에만 모여있거나,
보문단지 주변 불국사. 석굴암에만 몰려있더라고요 (특히 석굴암 올라가는 길은 차가 엄청 밀려있더라고요)
나머지 구역들도 더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아이고 한참 추워졌을때 다녀오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재작년 여름에 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나저나 사천왕사지는 정비가 많이 됐나보네요 재작년에 갔을때는 펜스가 있어서 못가봤거든요
이제 철길도 걷혔으니 금당지발굴도 이어지겠네요, 정비는 계속 될것 같습니다😄;
앗! 어제 사천왕사지 갔었는데... 반갑네요.
오 때가 잘 맞앗네요😄
경주는 진짜 도시 전체가 유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군요.. 몽골 침략으로 불타버린 유물, 아직 땅 깊은 곳에 감춰져 있을 유물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왠만하면 신축은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
보문동 방리제구획은 발굴 시작도 안했지요, 월성도 다 발굴하려면 멀었고, 왕릉들은 손도 안대고 있는데다가..
100년도 더 걸릴것 같습니다😱
30년 전에 윤경렬 선생님 뵙고 감실부처님 보러 갔던 기억이 있네요. 툇마루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할머니 같았던 인상을 아직 기억합니다.
오 존함을 접해본적 있습니다😌
유명한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는 ... 그나저나 사천왕사지는 많이 정비했네요. 저 갔을땐 아무것도 없었는데 ...
남서쪽기단부를 복원해놓았습니다. 철길이 사라진덕에 관람로도 새로 생겼네요😄
할매불상.. 찾아가시 조금 힘들었지만 정말 푸근한... 불상이셨어요...
할매불상은 항상 추천하는 곳입니다, 가보면 바로 알수 있지요😄
선덕여왕은 아마 엄청난 동안이 아니었을까요...? 40대? 50대? 쯤 됐는데도 한 남자가 여왕을 잊지 못해 상사병으로 죽게 만들 정도의 미모라면... -_-a
영상을 보고 생각해 봤는데, 제 생각에 선덕여왕 치세 전반의 혼란은 진평왕이 씨를 뿌린 것 같습니다.
치세 50여년을 성공적으로 통치해내면서 자신감이 붙은 나머지 결국 자신의 직계 쪽으로만 무리하게 권력을 강화하려다 그게 유력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나 봐요.
그래서 귀족들이 처음으로 실력 행사(칠숙의 난)에 나섰다가 왕에게 제대로 밟히고 한동안 아무 말 못하다가 선덕여왕 즉위 후 국정 혼란을 빌미로 다시 한번 쿠데타 시도...
이때를 보면 꼭 고려 말 공민왕(-> 선덕여왕)과 이성계(-> 김유신)를 보는 것 같기도 하네요. ^^;
왕권과 귀족의 대립은 우리역사의 큰 뼈대인듯합니다. 권력에의 끝없는 도전이 미래에는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불안했던 정세를 생각하면...신라삼국통일은 기적 같은 일이었네요 ㅎㅎ
정말 천우신조였지요, 국제정세가 딱 맞아 떨어졌지요😮
7세기야 말로 삼국의 소용돌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참 복잡하던시기였죠
이때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영상 한편 한편마다 모두 작품입니다.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월명이라는 전고고학자 및 유투버님은 왜 갑자기 선덕여왕릉 주인이 선덕여왕이 아니라는 주장과 명활산 보문동고분군 주위에 선덕여왕릉이 있다고 무슨 근거로 그러는걸까요???
보문동고분군과 명활산의 위치를 다르게 해석하시나봅니다🤔
역시 역사의 승자 신라... 아직도 그시절 묘가 있다니
엄청나게 많이 있지요, 경주 주위가 모두 고분군일 정도😮
선덕여왕 재위 무렵 성골은 근친결혼으로 인해 유전자병이 생겨서 왕에 오를 정상적인 남자가 없었다는 것으로 봅니다.
근친혼이 꽤 심했다고하지요, 가계도보면 엄청나지요😌
50대에 왕위에 올랐네 와...
당시로서는 많이 늦은 나이지요😮
불상 머리 위에 개구리 인가요~~
개구리 맞습니다 ㅎㅎㅎ
개구리가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네요! 늘 잘보고있습니다!~~
@@ssul-uncle 시청감사드립니다😌
즐겨보고 있습니다
저만 알고싶기도 하지만
님이 그 가치를
더 알려주시리라 믿고
부산 북구 금곡대로 66-19
구룡사입구의
미소석불을 찾아주시길
말씀전합니다
ㅡ 불자라 여러 사찰의 부처님미소를 보지만
으뜸이 아닌가 합니다
고려시대조성추정
오 부산 촬영 잡히면 꼭 들려오겠습니다😌
선덕여왕이 4~50대에 여왕이었더라면,
삼국유사에 나온것처럼 성골 왕자를 출산키위해
수많은 왕족남자들을 동침시켜 임신을 시키려 했을까요?
성골이 없어서 문제인데
성골 남자가 있었다면 성골이 끊어질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요
선덕여왕은 여자인데다, 왕권약화로 여러문제가 있었기때문에 오히려 더 행동을 조심했을 여지가 있습니다.
다음 왕도 동생에게 갔는데 자매간 아들이 하나도 없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되지요🤔
그래서 법흥왕이나 진평왕이 성골을 만들었다는 의견의 바탕이 되기도하지요😮
@@사적돌 제 얘기는 선덕여왕이 50내외라면,
가임기를 지났을텐데 하는 뜻입니다.ㅎㅎ
신라시대에는 40대가 할머니?? ㄷㄷ
현대에도 결혼일찍하면 가능하지요😄
어려서 국사시간에
현명하고 능력있는
여왕이라고 배웠는데
전혀 그렇지를 못했군요
총명했을지언정, 최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는 자국에게나 타국에게서 좋은 빌미가 되었겠지요. 어려운 치세를 보냈습니다,
본인이 할수 있는 일, 황룡사를 올리거나 백성들을 구휼한것 까지는 좋았으나, 시기가 너무 위중했지요🤔
@@사적돌 전혀 몰랐네요~~답변 감사합니다^^♡♡
신라의 미소가 당시 선덕여왕의 외모를 닮은 것이라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ㅎㅎ
1988~9년사이에 경주를 거쳐가는 고속철 공사로 문화재 사전발굴 작업이 있었는데,
이때 대량의 미발굴 왕릉(또는 귀족능)을 대규모로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상황이 나타났지요.
당시능의 조성연대는 대개 5~6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많은 능에서 무덤의 주인공과 생전시의 시종들로 추정되는 토용(土俑)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다시피 신라는 지증왕때인 502년에서야 순장을 금지시켰고,
이후 순장의 대용으로 생전의 모습을 닮은 토용을 만들어 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데 능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토용은 대개가 완전한 백인종(콧날, 구렛나루, 쌍거풀진 눈)의 모습을 하고 있고,
수행자(시녀, 시종)로 추정되는 하층계급인들은 한국인의 얼굴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도 선비, 돌궐족으로 추정되는 백인들이 등장하는 무용총, 각저총의 인물화역시 한민족얼굴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 발굴결과는 세계 고고학회에도 보고되었고,
학계에선 고대 아리안계(특히 스키타이 포함)가 BC 7세기경부터 페르시아제국에 밀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몽골지역에 정착하고 일부가 계속 동진하여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신라였다는 논문도 발표되었지요.
논문에 의하면,
북방에서 내려온 기마민족들이 기존의 몽골계를 정복하고 신라를 건국했다는 논리였는데,
1992년 빨래터에서 발견된 '문무왕비문'에도 자기들(김씨들)이 북방에서 내려온 흉노계라고 버젓이 써놨지요.
1960년 이후 서구 고고학계에선 중국 북방의 기마민족들인,
흉노, 선비, 돌궐, 거란등을 서쪽에서 이주해온 백인계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실제 터어키 교과과정에도 자기들 조상이 카프카스 일대에서 나와 동방으로 이주하여 흉노, 돌궐을 세웠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진짜 선덕여왕의 외모는 마릴린 몬로나 쥴리아 로버츠같은 쌍거풀진 큰눈에, 오똑한 콧날을 가진
백인 미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신라의 미소라는 기왓장에 표현된 모습은 아마도 선덕여왕의 궁녀를 닮지 않았을까요? ㅎㅎ
오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 진평왕사후 화백회의 에서 덕만을 왕위에 올리게 되는데 바로 선덕여왕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첫번째는 당태종이 모란꽃 그림과
씨앗을 보냈는데 이때 선덕여왕은 이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거라 말했는데 실제 씨앗을 심어보니 향기가 없다는걸 알게된 신하들이 물어보니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라면서 결혼을 안한 나를 희롱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고 적혀있지요 두번째는 백제군을 물리친 사건인데
영묘사라는 절에 옥문지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어느 겨울에 갑자기 개구리가 나타나 사나흘을 울었는데 왕은 각간 둘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북쪽에 있는 여근곡을 습격하게 했는데 여기에 백제 장군 우소가 매복해 있다가 알천과 필탄에게 죽었다 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때 신하들이 이일에 대하여 물어보니 개구리가 심히 우는것은 병사들의 모습이요 옥문이라는 것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법 이니 쉽게 잡을수 있었다 라고 설명이 되어있죠 그리고 마지막은 유언으로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했는데 이는 낭산 남쪽에 있다라고 말했는데 문무왕대인 679년에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을 실현시킨것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첨성대 건립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이때 김유신과 김춘추의 등장으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게 되지요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우왁~ 영상의 봉분이 움푹 꺼진 구덩이로 보이네요; 이런 착시효과 저만 느낀건가요? ㅎㅎ; 영상시작하자마자 '저 구덩이는 뭐지?'했어요
오 그런가요😮
Kyeongju is a museum without a roof......
저도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