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춘희 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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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5 ноя 2024

Комментарии • 10

  • @황미숙-w2g
    @황미숙-w2g 6 дней назад +1

    송춘희 가수님 노래 한구절 한구절 눈물납니다 💕 💜

  • @이문자-r1s
    @이문자-r1s 4 месяца назад +3

    송춘희가수님사랑합니다

  • @제이-j5n
    @제이-j5n Год назад +8

    송춘희님 수덕사의 여승 감정표현 절대되고 깔끔하게 잘 부르네요

  • @Tae___Sung---2584
    @Tae___Sung---2584 6 месяцев назад +4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 @박순자-w3v
    @박순자-w3v Год назад +3

    수덕사 좋아하는 노래라
    좋아어요😂

  • @은빛청년
    @은빛청년 4 месяца назад +1

    즐감하고 구독 좋아요 남깁니다 👍

  • @이재덕-s3j
    @이재덕-s3j Год назад +6

    송춘희 =수덕사의 여승

  • @joseongwan4670
    @joseongwan4670 6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수덕사의 이야기.
    가수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인 " 노래가사.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을 잊을길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수덕사는 인적없는 절이었는데
    왜 인파가 많아졌을까?
    1966년 가수 송춘희가 부른 노래 "수덕사의 여인"이 뜨면서 수덕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덕사를 비구니 절로 알려졌는데
    사실 비구니는 오늘날에 없고 비구승만 있답니다. 진실일까?
    (비구니ㅡ출가하여 불교의 승려가 지켜야할 기본적인 계율(250계,348계)을 받은 여자로 보통 2년의 수행을 걸쳐 얻은 자격입니다).
    덕숭산이 한국 명산 100에 들어간 이유는
    아래와 같다.
    수덕사는 덕숭산아래 있는데
    덕숭산은 한국 명산 100에 낀 산입니다.
    한반도에는 13개의 정맥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금강의 북쪽에 있다해서 붙혀진 금북정맥에 속합니다.
    금북정맥의 시작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해서 안면도앞바다에서 사라집니다.
    그 금북정맥에서 우뚝선 기세강한 산으로 사방을 호령하는 자세를 가진 명산이 수덕사를 품었으니 한국이 선정한 명산 100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수덕사안에는 이응로화백의 미술관이 있는데 이응로화백이 1944년에 수덕여관을 매입하여 한국전쟁시기에 피난처로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1958년 프랑스로 이사갔습니다.
    그후 수덕여관은 수덕사 자산이 아닌 예산군에서 관리를 합니다.
    수덕여관은 현존하는 여관중 유일하게 남은 한옥여관입니다.
    이응로화백은 미술관도 있어 수덕사를 찾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졌고, 그의 스승은 나혜석입니다.
    나혜석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20세기 한국최초의 여성화가로서
    이혼의 아픔을 달래기위해 1934년에 수덕사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갔고 수덕사의 대승인 만공스님앞에서 출가를 요청했습니다.
    만공스님은 나혜석을 출가를 받아들었을까?
    "임자는 중 노릇할 사람이 아니다"하면서 거절했다.
    당시 나혜석씨는 외도해 이혼당한 여자라 낙인찍혔고 작품전시회 강연등도 할수가 없어 훗날 영양실조 실어증 정신이상으로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했다.
    만약 만공스님이 출가를 받아줬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것이다.
    나혜석 화가의 절친은 바로 한국 비구니계의 거목 김일엽이다.
    사실 김일엽은 한국최초의 일본유학파이며,
    일본 유학시절 일본은행총재의 아들인 세이조랑 사랑에 빠지고 결혼은 실패했으며 숨겨진 아들은 친정아버지의 친구가 양자로 키웠다. 아픔을 가진 김일엽은 한국으로 들어와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다.
    어린 아들이 친모인 김일엽 어머니를 찾아왔으나 김일엽은 아들에게 "속세에서 맺어진 너와 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니 더이상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라"하였으며 이억만리에서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으로 쫒았다. 이때 나혜석화가는 친구의 어린아이를 수덕여관에서 재웠으며, 엄니처럼 자신의 젖가슴을 만져보게하고 그림도 가르쳐 줬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는 커서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동양화가인 일당스님이며 이름은 김태신이다.
    해방직후 김태신 일당스님이 그린 김일성초상화는 아직도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때문에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태신은 66세에 어머니의 길을따라 출가해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중이다 법랍한지 27년되는 해2019년에 돌아가셨다.
    이런 김일엽스님의 이야기를 소재로 1966년 송춘희씨가 노래로 불렸다고 그로 인해 수덕사는 더 유명해졌다.
    그 당시 수덕사 여승들이 방송사에 항의전화를 많이 했답니다. 송춘희씨는 김일엽스님의 사연과 나의 노래는 무관하다고 했고요.
    송춘희 기념비를 절앞 주차장에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김일엽 스님와 수덕사의 이미지를 노래가사로 훼손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비구니는 오늘날 수덕사에는 없다고 합니다.
    진실인지 확인해보세요?
    수덕사에 쇠북도 있는지도
    수덕사 여행 ㄱㅏ보시면 어떠신지요.

  • @임구석-j9g
    @임구석-j9g 4 месяца назад +2

    최고네요!

  • @maruhantv7942
    @maruhantv7942 3 месяца наза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