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945년 이후 약 80년 동안 거짓말 했던 일본에 사과 요구는 커녕 "한일 관계 개선 결과" 자평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이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 그간 탑승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해온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정보공개청구에 의해 결국 명단을 공개했는데, 외교부가 이 명단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5일 외교부는 "그간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입수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교섭을 거친 결과 일측으로부터 승선자 명부 일부를 제공 받았다"며 "일측은 내부조사를 마친 자료 19건을 우리측에 우선 제공하였으며, 여타 자료에 대해서도 내부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당 명부를 피해자 구제 및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파악을 위해 활용하겠다면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심사과정에서 근거자료 부재 등으로 위로금 지급 신청을 기각‧각하 당한 희생자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재심의 등에 동 명부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명부에는 희생자분들의 개인정보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바, 국내법령에 따라 정보를 열람 또는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조선인 노동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이다. 이 선박은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시켰고 승선자 7000여 명 가운데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가면 신분증도 사실 필요 없고 이쪽에서 신분증을 제출을 하고 여기서 한국 안에서 다 일본 입국 심사가 통과되는 곳이기 때문에 이건 아주 좋은 거죠.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되면 한일 간의 경제적인 교류라든가 이런 부분도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냐, 이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할 수가 있어요.
일본의 패망(1945년)항복과 히로히토 천황 그때 세계는1945년 : 맥아더, 조선분할점령책 발표 1945년 : 김일성, 소련군과 함께 입북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도 무조건 항복하여 유럽의 전화는 종결되었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로는 일본만 남았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전후 처리와 일본에 대한 대책이 토의되면서, 일본의 지배층 내부에서 전쟁 종결을 꾀하는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육군 측은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가 마침내 미군의 손에 들어가자 명예로운 평화를 주장하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총리가 되었다. 전쟁의 종결에 임한 일본 지배층은 강화파건 강경파건 간에 핵심은 '천황제(국체)를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일본 지배층은 천황제가 승전국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패전 후 '천황의 권위를 이용한 국민 통합'이 아닌 다른 방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이 참여한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전면적인 멸망에 직면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또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하여 세계 정복에 종사케 한 사람들의 권위와 영향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겨우 두 발에 불과하지만 원자탄을 손에 쥐고 있었고, 이 가공할 신무기는 일본을 항복시킬 결정적인 힘이라 생각했다.
'우키시마호' 조선인 승선자 명부 없다던 일본, 정보공개에 한국에 일부 넘겨 입력2024.09.05. 오후 5:32 수정2024.09.05. 오후 5:34 기사원문  이재호 기자 TALK 15 18 본문 요약봇 텍스트 음성 변환 서비스 사용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SNS 보내기 정부, 1945년 이후 약 80년 동안 거짓말 했던 일본에 사과 요구는 커녕 "한일 관계 개선 결과" 자평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이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 그간 탑승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해온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정보공개청구에 의해 결국 명단을 공개했는데, 외교부가 이 명단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5일 외교부는 "그간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입수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교섭을 거친 결과 일측으로부터 승선자 명부 일부를 제공 받았다"며 "일측은 내부조사를 마친 자료 19건을 우리측에 우선 제공하였으며, 여타 자료에 대해서도 내부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당 명부를 피해자 구제 및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파악을 위해 활용하겠다면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심사과정에서 근거자료 부재 등으로 위로금 지급 신청을 기각‧각하 당한 희생자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재심의 등에 동 명부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명부에는 희생자분들의 개인정보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바, 국내법령에 따라 정보를 열람 또는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조선인 노동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이다. 이 선박은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시켰고 승선자 7000여 명 가운데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사고 후 일본은 수 년 간 선체를 인양하거나 유해를 회수하지 않아 의혹을 키워왔다. 또 탑승자 명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탑승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언론인이 후생노동성에 명부를 공개하라는 공개청구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존재하지 않는다던 명부가 세상에 나왔다. 지난 5월 23일 일본 은 일본 후생노동성이 정보공개 청구에 응해 3가지 종류의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해군과 기업이 각각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명부에는 오미나토(大湊) 해군시설부의 '승선명부' 표지에 '총원 2492명'이, 또 다른 문서인 일본통운의 '조선인 명부'에는 144명이 각각 기록돼 있었다. 또 오미나토 지방 복원국 장관의 1946년 4월 19일 문서에는 조선인 승객이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2838명, 해군시설협의회·일본통운 897명 등 합계 3735명으로 기재됐다고 전해졌다. 이에 지난 5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역사정의특별위원회는 "일본 정부는 그동안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수진 공동위원장은 "일본 정부는 1990년대에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우키시마마루의 폭발·침몰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으로,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은 없다', '승선자 명부는 없다'고 주장한 이래 줄곧 명부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거나 유감을 표명하기는커녕, 이번 명부 입수를 현재 한일 관계가 긍정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명부가 없다는 일본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일본 측이 한국에 명부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도, 이를 일본과 과거사 현안에 대해 긴밀한 협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포장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측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사도광산에서 노역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명부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우키시마호 탑승자 명부 전달이 개선된 한일관계에 따른 결과라기 보다는 일본 내 정보공개청구 결과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오히려 정부가 그동안 거짓말로 일관한 일본 정부에 대해 항의나 사과 요구 등을 하지 않은 것이 일본에 대한 또 한 번의 저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해 보인다. 일본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명부 전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다. 이미 명부의 존재가 확인됐는데도 이번에는 19건만 받고 이후에 추가로 계속 전달받는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인데, 실제 일본 정부가 이를 이행할지 미지수다.
8월 10일 금요일 새벽 2시, 천황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소. ······ 분명히 국민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할 시간이 닥쳐왔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상이 약술한 기초 위에서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히로히토 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공호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천황이 퇴장한 후 침묵 속에서 참석자들은 각자 흰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과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스즈키 수상이 말문을 열었다. "폐하의 결정은 또한 이번 회의의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황의 결단에 의해 외무대신 안, 즉 천황 지위의 보장만을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한 항복 안을 연합국 측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8월 14일 다시 방공호에서 최고 회의가 열렸다. 군인들은 항복에 끝까지 반대하며 조국을 지키다가 죽기를 원했다. 모든 의견이 제시된 후, 히로히토는 "전쟁의 계속은 파괴만을 지속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소"라는 말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다음 날 8월 15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항복 결정이 번복될 수 없음을 안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할복으로써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수많은 일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중에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조직한 오니시(大西) 해군 중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같은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서 할복자살을 했던 것이다. 천황은 10명의 어린 군인들이 자신의 왕실에서 할복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 日本軍慰安婦 여성은 취업사기·유괴·공권력 등에 의한 협박·인신매매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일로서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서둘러 봉합하려고만 하는 일본의 자세 때문에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성노예. 용어 일본군이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 등을 목적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여 설치한 시설물을 ‘위안소’라고 부른 것은 상해(上海)사변이 있었던 1932년 전후였다. 당시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을 ‘예기(藝妓) · 작부(酌婦)’라고 하였는데, 이외에도 매음부, 접객부, 종업부, 영업자, 기녀 등 갖가지 명칭으로 부르다가 상당히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대체로 ‘위안부’라는 말로 수렴되었다. 현재 발굴된 문서상으로는 1939년 6월 중국에 있던 독립 산포병(山砲兵) 제3연대의 『진중일지(陣中日誌)』에서 위안부라고 부른 것이 처음이다. 한편 일본군이나 일본정부에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한 것과 달리 일제시기 조선에서 위안부란 용어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가 위안부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시기부터 1990년경 위안부 문제 제기 이전까지, 식민지적 특성과 가부장성 등에 의해 위안부 동원 과정이나 실상이 왜곡 은폐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여성운동단체에서도 1990년대 전반까지는 정신대와 (종군/군)위안부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최근에는 일본군이 취하려 한 ‘위안’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용어로서의 위안부에 ‘위안부’라고 표시하여 사용하거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용어로서 ‘성노예’ 즉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의 동원 동원 규정 미국에게 개항을 당한 이후 일본의 근대화는 주변 국가의 침략을 통해 이루어졌다. 19세기~20세기 초 대규모 참전시 성병에 의한 병력 손실을 경험한 일본군은 전쟁 중 군인의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의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대량의 일본군이 중국에 투입되자 일본군은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의 개정(1937.9.29)을 거쳐 군의 위안시설로서 위안소 설치를 중요한 일로 삼았다. 일본군은 일본 내무성 · 외무성 등 일본중앙정부와 조선총독부 · 대만총독부 등 식민지 권력기관을 통해 군'위안부' 동원을 요구하였고 이후 관련기관의 협조로 군‘위안부’ 동원시스템이 작동되었다. 일본인 여성 동원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통첩[지나도항부녀(支那渡航婦女)의 취급에 관한 건]으로 정해졌다. 이것은 일본에서조차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 불법적 동원방식이 난무한 것에 대해 내무성이 동원 대상 여성에 대해 기준을 정하여 제한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불법적인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황군’을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 지방정부 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직후인 3월 4일에는 육군성에서 북지방면군(北支方面軍) 및 중지파견군(中支派遣軍)의 참모장 앞으로 보낸 통첩[군위안소 종업원 등 모집에 관한 건]으로 군에서도 위 방침을 수용하여 자체 내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이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으나 척무성(拓務省)이나 육해군성 등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름이나 규정이 없이도 연행되어 단기간 성폭력을 당한 사례들이 식민지 점령지에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일본 등지 후방에는 기업 및 산업장에도 기업 '위안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전쟁수행을 위해 여성의 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은 군‘위안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군'위안부'제 운영에는 일본군과 정부만이 아니라 일본기업도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배상 요구 시위 이칭별칭이칭 군위안부(軍慰安婦), 이칭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이칭 성노예유형개념 요약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이다.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라고도 한다. 일본군이 있었던 거의 전 공간에 배치되었던 조선인 여성은 취업사기·유괴·공권력 등에 의한 협박·인신매매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일로서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서둘러 봉합하려고만 하는 일본의 자세 때문에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성노예.
포츠담회의에서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강화파들도 '무조건 항복'이란 항목이 국체 유지를 분명히 하지 않아 위축되었다. 여전히 육군 측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에 스즈키 수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고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고 일본 국민에게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은 가공할 미지의 신무기 원자폭탄을 전폭기에 싣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한 발, 9일 나가사키(長崎)에 한 발을 투하했다. 여태까지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가공할 무기에 의해 두 도시는 한 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히로시마의 원폭돔.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건물. 폐허가 된 상태로 철거와 보존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보존하기로 결정되어, 원폭의 피해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1996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9일 새벽 소련 대군은 만주로 물밀듯이 진격했다. 그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8월 9일 한밤중, 도쿄의 작은 방공호 안에서 최고전쟁지도자회의가 열렸다. 방공호 속 회의실은 무덥고 습한 8월의 열기로 숨이 막혔다. 천황이 회의실로 들어와 상석의 등받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스즈키 수상은 참석자들에게 포츠담 선언을 낭독하도록 내각 간사장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토고 외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토고는 천황의 신분과 왕위가 존중된다는 보장을 얻으려면 더 이상 지체 없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육군상 아나미 장군은 펄쩍 뛰면서 국민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메즈 장군은 아나미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일본은 아직 적보다 우월한 상태이며 지금 만약 무조건 항복을 한다면 장렬하게 전사한 일본인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라고 말했다. 해군 참모총장 토야다 대장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명의 참석자 전원에게 의견 개진의 기회가 주어졌다.
호사카 유지 "기시다 방한 이익, '일본 NO 비자'? 순진한 생각?"
'우키시마호' 조선인 승선자 명부 없다던 일본, 정보공개에 한국에 일부 넘겨
정부, 1945년 이후 약 80년 동안 거짓말 했던 일본에 사과 요구는 커녕 "한일 관계 개선 결과" 자평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이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 그간 탑승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해온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정보공개청구에 의해 결국 명단을 공개했는데, 외교부가 이 명단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5일 외교부는 "그간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입수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교섭을 거친 결과 일측으로부터 승선자 명부 일부를 제공 받았다"며 "일측은 내부조사를 마친 자료 19건을 우리측에 우선 제공하였으며, 여타 자료에 대해서도 내부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당 명부를 피해자 구제 및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파악을 위해 활용하겠다면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심사과정에서 근거자료 부재 등으로 위로금 지급 신청을 기각‧각하 당한 희생자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재심의 등에 동 명부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명부에는 희생자분들의 개인정보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바, 국내법령에 따라 정보를 열람 또는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조선인 노동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이다. 이 선박은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시켰고 승선자 7000여 명 가운데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가면 신분증도 사실 필요 없고 이쪽에서 신분증을 제출을 하고 여기서 한국 안에서 다 일본 입국 심사가 통과되는 곳이기 때문에 이건 아주 좋은 거죠.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되면 한일 간의 경제적인 교류라든가 이런 부분도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냐, 이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할 수가 있어요.
사전 입국 심사 제도라고 해서 이를테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여행 갈 때 원래 일본에서 입국 심사를 하게 되잖아요. 그거를 일본 가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입국 심사를 좀 먼저 해서 좀 쉽게 간소하게 할 수 있게 일본도 마찬가지고 이런 방안을 지금 추진한다라고
일본의 패망(1945년)항복과 히로히토 천황
그때 세계는1945년 : 맥아더, 조선분할점령책 발표
1945년 : 김일성, 소련군과 함께 입북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도 무조건 항복하여 유럽의 전화는 종결되었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로는 일본만 남았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전후 처리와 일본에 대한 대책이 토의되면서, 일본의 지배층 내부에서 전쟁 종결을 꾀하는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육군 측은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가 마침내 미군의 손에 들어가자 명예로운 평화를 주장하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총리가 되었다. 전쟁의 종결에 임한 일본 지배층은 강화파건 강경파건 간에 핵심은 '천황제(국체)를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일본 지배층은 천황제가 승전국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패전 후 '천황의 권위를 이용한 국민 통합'이 아닌 다른 방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이 참여한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전면적인 멸망에 직면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또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하여 세계 정복에 종사케 한 사람들의 권위와 영향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겨우 두 발에 불과하지만 원자탄을 손에 쥐고 있었고, 이 가공할 신무기는 일본을 항복시킬 결정적인 힘이라 생각했다.
'우키시마호' 조선인 승선자 명부 없다던 일본, 정보공개에 한국에 일부 넘겨
입력2024.09.05. 오후 5:32
수정2024.09.05. 오후 5:34
기사원문

이재호 기자 TALK
15
18
본문 요약봇
텍스트 음성 변환 서비스 사용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SNS 보내기
정부, 1945년 이후 약 80년 동안 거짓말 했던 일본에 사과 요구는 커녕 "한일 관계 개선 결과" 자평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이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면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 그간 탑승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해온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정보공개청구에 의해 결국 명단을 공개했는데, 외교부가 이 명단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5일 외교부는 "그간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입수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교섭을 거친 결과 일측으로부터 승선자 명부 일부를 제공 받았다"며 "일측은 내부조사를 마친 자료 19건을 우리측에 우선 제공하였으며, 여타 자료에 대해서도 내부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해당 명부를 피해자 구제 및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파악을 위해 활용하겠다면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심사과정에서 근거자료 부재 등으로 위로금 지급 신청을 기각‧각하 당한 희생자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재심의 등에 동 명부를 활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외교부는 "명부에는 희생자분들의 개인정보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바, 국내법령에 따라 정보를 열람 또는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자에게 제공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우키시마호는 1945년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조선인 노동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일본 해군 수송선이다. 이 선박은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이틀 뒤인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
당시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기뢰를 건드려 폭발했고 승선자 3700여 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시켰고 승선자 7000여 명 가운데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사고 후 일본은 수 년 간 선체를 인양하거나 유해를 회수하지 않아 의혹을 키워왔다. 또 탑승자 명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탑승자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언론인이 후생노동성에 명부를 공개하라는 공개청구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존재하지 않는다던 명부가 세상에 나왔다. 지난 5월 23일 일본 은 일본 후생노동성이 정보공개 청구에 응해 3가지 종류의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를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해군과 기업이 각각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명부에는 오미나토(大湊) 해군시설부의 '승선명부' 표지에 '총원 2492명'이, 또 다른 문서인 일본통운의 '조선인 명부'에는 144명이 각각 기록돼 있었다.
또 오미나토 지방 복원국 장관의 1946년 4월 19일 문서에는 조선인 승객이 오미나토 해군시설부 2838명, 해군시설협의회·일본통운 897명 등 합계 3735명으로 기재됐다고 전해졌다.
이에 지난 5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역사정의특별위원회는 "일본 정부는 그동안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가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해명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수진 공동위원장은 "일본 정부는 1990년대에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우키시마마루의 폭발·침몰은 불가항력에 의한 것으로,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은 없다', '승선자 명부는 없다'고 주장한 이래 줄곧 명부의 존재를 부인해 왔다"고 꼬집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거나 유감을 표명하기는커녕, 이번 명부 입수를 현재 한일 관계가 긍정적인 흐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명부가 없다는 일본의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일본 측이 한국에 명부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도, 이를 일본과 과거사 현안에 대해 긴밀한 협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포장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측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사도광산에서 노역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명부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우키시마호 탑승자 명부 전달이 개선된 한일관계에 따른 결과라기 보다는 일본 내 정보공개청구 결과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오히려 정부가 그동안 거짓말로 일관한 일본 정부에 대해 항의나 사과 요구 등을 하지 않은 것이 일본에 대한 또 한 번의 저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해 보인다.
일본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명부 전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다. 이미 명부의 존재가 확인됐는데도 이번에는 19건만 받고 이후에 추가로 계속 전달받는다는 것이 정부의 발표인데, 실제 일본 정부가 이를 이행할지 미지수다.
8월 10일 금요일 새벽 2시, 천황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소. ······ 분명히 국민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할 시간이 닥쳐왔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상이 약술한 기초 위에서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히로히토 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공호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천황이 퇴장한 후 침묵 속에서 참석자들은 각자 흰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과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스즈키 수상이 말문을 열었다. "폐하의 결정은 또한 이번 회의의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황의 결단에 의해 외무대신 안, 즉 천황 지위의 보장만을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한 항복 안을 연합국 측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8월 14일 다시 방공호에서 최고 회의가 열렸다. 군인들은 항복에 끝까지 반대하며 조국을 지키다가 죽기를 원했다. 모든 의견이 제시된 후, 히로히토는 "전쟁의 계속은 파괴만을 지속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소"라는 말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다음 날 8월 15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항복 결정이 번복될 수 없음을 안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할복으로써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수많은 일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중에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조직한 오니시(大西) 해군 중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같은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서 할복자살을 했던 것이다. 천황은 10명의 어린 군인들이 자신의 왕실에서 할복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일본군 '위안부' 日本軍慰安婦 여성은 취업사기·유괴·공권력 등에 의한 협박·인신매매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일로서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서둘러 봉합하려고만 하는 일본의 자세 때문에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성노예.
용어 일본군이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 등을 목적으로 여성들을 동원하여 설치한 시설물을 ‘위안소’라고 부른 것은 상해(上海)사변이 있었던 1932년 전후였다. 당시 위안소에 수용된 여성을 ‘예기(藝妓) · 작부(酌婦)’라고 하였는데, 이외에도 매음부, 접객부, 종업부, 영업자, 기녀 등 갖가지 명칭으로 부르다가 상당히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대체로 ‘위안부’라는 말로 수렴되었다. 현재 발굴된 문서상으로는 1939년 6월 중국에 있던 독립 산포병(山砲兵) 제3연대의 『진중일지(陣中日誌)』에서 위안부라고 부른 것이 처음이다.
한편 일본군이나 일본정부에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한 것과 달리 일제시기 조선에서 위안부란 용어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가 위안부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시기부터 1990년경 위안부 문제 제기 이전까지, 식민지적 특성과 가부장성 등에 의해 위안부 동원 과정이나 실상이 왜곡 은폐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여성운동단체에서도 1990년대 전반까지는 정신대와 (종군/군)위안부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였다. 최근에는 일본군이 취하려 한 ‘위안’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용어로서의 위안부에 ‘위안부’라고 표시하여 사용하거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용어로서 ‘성노예’ 즉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의 동원
동원 규정
미국에게 개항을 당한 이후 일본의 근대화는 주변 국가의 침략을 통해 이루어졌다. 19세기~20세기 초 대규모 참전시 성병에 의한 병력 손실을 경험한 일본군은 전쟁 중 군인의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의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게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대량의 일본군이 중국에 투입되자 일본군은 「야전주보규정(野戰酒保規程)」의 개정(1937.9.29)을 거쳐 군의 위안시설로서 위안소 설치를 중요한 일로 삼았다. 일본군은 일본 내무성 · 외무성 등 일본중앙정부와 조선총독부 · 대만총독부 등 식민지 권력기관을 통해 군'위안부' 동원을 요구하였고 이후 관련기관의 협조로 군‘위안부’ 동원시스템이 작동되었다.
일본인 여성 동원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통첩[지나도항부녀(支那渡航婦女)의 취급에 관한 건]으로 정해졌다. 이것은 일본에서조차 취업사기, 인신매매 등 불법적 동원방식이 난무한 것에 대해 내무성이 동원 대상 여성에 대해 기준을 정하여 제한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불법적인 일본군 '위안부' 동원이 ‘황군’을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 지방정부 등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직후인 3월 4일에는 육군성에서 북지방면군(北支方面軍) 및 중지파견군(中支派遣軍)의 참모장 앞으로 보낸 통첩[군위안소 종업원 등 모집에 관한 건]으로 군에서도 위 방침을 수용하여 자체 내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방침이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으나 척무성(拓務省)이나 육해군성 등을 통해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름이나 규정이 없이도 연행되어 단기간 성폭력을 당한 사례들이 식민지 점령지에 다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일본 등지 후방에는 기업 및 산업장에도 기업 '위안부'가 배치되어 있었다. 전쟁수행을 위해 여성의 성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은 군‘위안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군'위안부'제 운영에는 일본군과 정부만이 아니라 일본기업도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배상 요구 시위
이칭별칭이칭 군위안부(軍慰安婦), 이칭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 이칭 성노예유형개념
요약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이다.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라고도 한다. 일본군이 있었던 거의 전 공간에 배치되었던 조선인 여성은 취업사기·유괴·공권력 등에 의한 협박·인신매매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되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된 일로서 수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서둘러 봉합하려고만 하는 일본의 자세 때문에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의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하여 일본군과 일본정부가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나 주둔지 등의 위안소에 배치한 여성. 정신대·군위안부·종군위안부·성노예.
포츠담회의에서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강화파들도 '무조건 항복'이란 항목이 국체 유지를 분명히 하지 않아 위축되었다. 여전히 육군 측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에 스즈키 수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고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고 일본 국민에게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은 가공할 미지의 신무기 원자폭탄을 전폭기에 싣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한 발, 9일 나가사키(長崎)에 한 발을 투하했다. 여태까지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가공할 무기에 의해 두 도시는 한 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히로시마의 원폭돔.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건물. 폐허가 된 상태로 철거와 보존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보존하기로 결정되어, 원폭의 피해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1996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9일 새벽 소련 대군은 만주로 물밀듯이 진격했다. 그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8월 9일 한밤중, 도쿄의 작은 방공호 안에서 최고전쟁지도자회의가 열렸다. 방공호 속 회의실은 무덥고 습한 8월의 열기로 숨이 막혔다. 천황이 회의실로 들어와 상석의 등받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스즈키 수상은 참석자들에게 포츠담 선언을 낭독하도록 내각 간사장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토고 외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토고는 천황의 신분과 왕위가 존중된다는 보장을 얻으려면 더 이상 지체 없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육군상 아나미 장군은 펄쩍 뛰면서 국민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메즈 장군은 아나미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일본은 아직 적보다 우월한 상태이며 지금 만약 무조건 항복을 한다면 장렬하게 전사한 일본인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라고 말했다. 해군 참모총장 토야다 대장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명의 참석자 전원에게 의견 개진의 기회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