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경기에, 두사람의 인생이 바뀐 한국 최고의 라이벌, 역사적인 명승부 (유명우 VS 손오공). 악발이 근성으로 일본 선수들을 휩쓸고, 롱런한 세계챔피언 유명우의 감동적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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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10 сен 2024
  • 세계 챔피언 도전을 위한 언더독과 최강자의 숙명적인 대결. 그 경기에서 승리한 언더독은 한국 복싱 역사에 기념비적 기록을 남긴 레전드가 되고, 패배한 선수는 몰락하게된 운명적인 승부.
    유명우와 라이벌 손오공 선수 명승부 하이라이트.
    세계 복싱 역사에서 잔인한 승자 독식을 보여준 사례는 많습니다.
    단, 한차례의 대결에서, 승리한 선수는 세계챔피언의 영광을 얻고, 패배한 선수는 절망에 빠져 몰락한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요.,
    한국 복싱에서도 이처럼 잔인하고 운명적인 승부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한국 복싱의 플라이급에는 두명의 기대주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19승 1패 9KO 의 손오공과 17승 3KO의 유명우였는데요,.
    두 라이벌 선수의 인생이 갈리게 된 운명적 대결이 1985년 9월 8일 서울 문화 체육관에서 벌어집니다.
    1962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한 손오공 (본명 손정주) 선수는 가난했던 헝그리 복서였습니다.
    세계챔피언이 유일한 희망이자 인생 목표였던 그는 20세때 프로복싱에 데뷔해 연승을 기록했고, 당시 신인 복서들의 등용문이었던 MBC 신인왕전에서 최우수 선수 타이틀을 거머쥐며, 한국 복싱 최고의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데뷔 이후 3년동안, 19승 1패 9KO 전적을 거두고, WBA,WBC 세계랭킹에 진입하며, 세계챔피언으로의 꿈을 키워가던 손오공에게 드디어 세계타이틀 도전 기회가 주어집니다.
    유명우와의 세계챔피언 도전자 결정전. 그는 이 경기만 이기면 세계타이틀 매치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죠.
    프로 복싱 선수들에게 세계타이틀 도전의 기회를 잡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적을 올려도, 단지 운이 없어서, 세계타이틀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도 수두룩하죠.
    그래서 손오공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 않으려 밤늦게까지 피땀을 쏟아가며 엄청난 연습을 했죠.
    손오공보다 2살 어린 맞상대 유명우는 가난했던 손오공과는 달리,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가정형편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한강중학교 1학년때부터, 복싱이라는 운동이 좋아서, 스스로 복싱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체육관을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그는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았습니다. 곱상한 얼굴에, 복싱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갸날픈 체구였죠.
    본격적인 복싱 선수가 되기 위해 인천 체고로 진학한 그는, 아마추어 경기에 참가해 1승 3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는데요,.
    유명우는 가장 경량급이었던 주니어 플라이급의 체중 한계, 48kg에도 도달하지 못해, 많은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명우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해나갔다고 하는데요,. 그는 고교 3학년 시절, 19세의 나이에, 자신의 의지대로 프로복싱에 데뷔합니다.
    데뷔 후, 차근차근 승리를 쌓아나갔고, 어느덧 13연승을 거두며 복싱 기대주로 성장합니다.
    다만, 그가 거둔 13연승이 모두 판정승이었기 때문에, 복싱계에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1985년, 손오공과 세계타이틀매치 도전자 결정전이 결정되기 전까지, 유명우 선수는 17승 무패 2KO 의 준수한 전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 신인왕 출신의 손오공은 이 대결 직전, 10경기에서 9 KO승이라는 강력한 펀치력을 보여주어 복싱계에 큰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당시 언론은 손오공을 탑독으로, 그리고 유명우를 언더독으로 평가했죠.
    국제경기 경험도 손오공이 훨씬 많았고, 세계 랭킹에서도 손오공이 4위, 유명우는 7위로 손오공이 국내 언론에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포스트 김태식으로 불리울 정도로 시원한 양훅 공격이 일품인 강주먹의 손오공, 반면 풀라운드를 버티는 맷집을 보유하고 안정된 경기 운영 능력을 갖춘 유명우. 과연 그들의 사생결단 승부는 어땠을까요?
    손오공은 경기를 빨리 끝장내려는 듯, 양훅을 크게 휘두르며 공격해서, 유명우를 쉽게 제압할 것처럼 보였죠.
    그러나 유명우는 디펜스가 강한 선수였습니다. 더불어 경기를 읽고 이끌어가는 경기 운영 능력도 좋은 선수였는데요,.
    그는 손오공의 강력한 인파이팅 공격력을, 두터운 커버링으로 막어내며 상대를 조금씩 지치게 하고 있었습니다.
    공격형 선수들은 대체로 초반에 강하고 후반이 약한 면모를 보이는데요,. 그런 스타일의 선수를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던 유명우는, 상대적으로 뛰어난 수비능력으로 손오공의 펀치를 피해나가는 대신, 자신은 작은 훅을 사용하며 임팩트를 누적시켜 나갔습니다.
    손오공이 크게 휘두르는 주먹은 마치 선풍기처럼 슝슝~ 스치기만 하는 미스 블로우가 많았기에, 유명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죠.
    유명우와의 경기에서는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초반에 밀어부치는 패스트 스타터의 모습을 보이던 손오공은 체력 소모가 많았는지, 시간이 갈수록 지쳐보였습니다.
    반면 유명우는 강력한 디펜스로 상대의 기운을 빼앗으며, 포인트에서 조금씩 앞서갔는데요.
    손오공은 유명우의 침착한 경기 스타일에 말려 고전하다가, 포인트에 크게 불리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7회에 무방비로 성급한 공격을 감행하다, 유명우 특유의 소나기 펀치와 노련한 바디공격을 받고는 그대로 쓰러집니다.
    손오공은 그렇게 세계타이틀 도전의 꿈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유명우는 대망의 세계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하죠.
    당시, 국내에서 이 체급의 최강자로 불리웠던 손오공은 이 경기에서 패배한 이후, 실망감으로 비탄에 빠져 폭음을 거듭했다고 하는데요,.
    그는 그 이후 벌어진 6 경기에서 2패를 더 당합니다. 그사이 유명우는 강력한 세계챔피언으로서 한국복싱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죠.
    유명우의 성공가도는 어이러니하게도, 손오공에게 더 이상의 세계타이틀 도전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WBC에서는 장정구가 롱런을 하고 있었기에, 같은 국내선수들끼리 세계타이틀 매치를 갖지 않았던 특성상, 손오공에게는 절망이었죠.
    손오공은 1988년 2월 일본 마쓰시마에게 판정패를 당한 후, 국내 복싱의 최강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세계타이틀전도 갖지 못한 채, 비운의 스타로 남으며, 복싱계를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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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오공의 큰 벽을 뛰어넘은 유명우는 곧바로, 장신의 아웃복서 챔피언 조이 올리버(미국)에게 타이틀을 도전하는데요,.
    그는 발빠른 조이 올리버를 악착같이 따라붙어 연타를 퍼붓고, 판정승을 거두며, 세계타이틀을 쟁취해내고야 맙니다.
    유명우 선수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타이틀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죠.
    유명우가 펼친 18차 방어전까지, 그가 펼친 방어전들의 하이라이트입니다 (5분 영상)
    1991년 12월까지, 거의 6년동안 17차 방어전 성공이라는, 한국 복싱사상 초유의 대기록을 세워나가던 유명우는 무패의 성적으로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타이틀전들은 국내에서만 치뤄졌죠. 당신 세계챔피언 리이벌 장정구는 1988년 6월 일본 적지로 가 오하시를 상대로 통쾌한 ko승을 거두며 15차 방어전을 성공해냈는데요.,
    국내용 챔피언이라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해외 원정 승리가 필요했던 유명우는, 1991년 12월 일본으로 첫 원정길에 오릅니다.
    상대는 히로키 이오카...당시 전적 18승 2패를 기록하고 있던 그를 일본 언론에서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귀재 선수라며 떠벌였었죠.
    사실 그당시 일본에는 천재 복서라고 칭하는 선수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천재 리스트에 오른 선수 대부분은 장정구에게 KO 당하며 쓰러져 갔죠...
    그리고, 장정구가 은퇴한 후, 마지막 남은 일본 천재 선수가 유명우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경기 내용은 막상막하, 전문가들은 유명우가 조금 앞선 경기라고 했죠... 하지만, 장소가 일본 적지인 것을 감안하면, 유명우에게 불리했습니다. 그렇게 2:1 로 판정패를 당했는데요...
    유명우측은 판정결과에 항의하였지만, WBA 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재경기를 허락했죠.
    첫원정 경기에서 패했고,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은퇴하는 것은 유명우에게 치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이오카 선수와의 리벤치 매치를 준비했죠.
    다시 한번 성사된 일본 원정 세계타이틀 매치....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유명우는, 2차방어전까지 지켜낸 이오카에게,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복수에 성공하며 타이틀을 되찾아옵니다. 스포츠맨으로서의 각오와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또 다른 일본 선수를 불러들여 방어전을 치뤄낸 유명우는 그해 1993년, 화려했던 세계 프로복싱의 무대에서 명예롭게 내려오게 됩니다.
    그로부터 20년후, 유명우는 장정구와 함께, 세계 복싱사를 빛낸 선수로 명예에 전당에 헌액되죠.
    유명우는 화끈한 KO승이 많치 않았지만, 기술적 측면과 경기운영 능력이 뛰어났고, 더불어 지칠줄 모르는 지구력을 갖추, 한국 복싱 선수가 갖추어야 할 자세의 표본이 되었는데요...
    유명우 선수는 끈질긴 근성으로 세계타이틀을 쟁취하고, 또 그 성공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관리하였으며, 실수로 타이틀을 빼앗겼어도 실망하지 않고, 기어코 되찾아오는 저력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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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y Around - THBD
    Soundcloud : / thbdsultan
    Music Playlist by reurl.kr/1992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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