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대를 건설한 한반도 이주민 하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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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0 сен 2024
  • #하타씨 #일본고대 #일본역사
    일본서기 긴메이 천황 540년 기록을 보면 하타 씨의 인구 수는 7053호라고 한다. 고대의 1호당 인구 수에 대해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702년 하타 씨의 호적을 보면 평균 1호당 인구 수는 25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현대 하타 씨 연구의 최고봉 중의 한 사람인 가토 겐키치 선생에 의하면 1호당 10명 이라 한다.
    대략 1호당 10명으로 계산하면 하타 씨 인구는 7만 명, 25명으로 계산하면 17만 명으로, 당시 일본 인구 200만명의 4%에서 8%에 이르게 된다. 6세기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하타 씨의 인구 규모가 4-8%라는 것은 대단한 규모였다고 생각된다.
    하타 씨는 7세기에 이르러 일본 열도 어디에서나 거주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거주지가 북큐슈, 교토, 시가현 지역이었다. 북큐슈는 남해안 지방 사람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는 지역이고, 교토 또한 남해안에서 대마도를 거쳐 관문해협- 세토나이 카이- 오사카- 교토(나라)의 해로를 따라 이주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시가현은 동해안 지역, 신라인들이 리만해류와 대마도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집단 주거지역에는 하치만 신, 가모 신, 신라명신이 진좌하였고, 이 신들의 앞에서 일본 최강의 무사인 겐지 무사가 성인식을 올렸던 것이다.
    고대 지명을 보면 하타라고 발음되는 지명이 상당히 존재한다. 이 뿐만 아니라 하타 씨가 가츠라기 지방에서 교토로 이주했을 때, 도중인 나라현 시키군 다와라 모토쵸라는 곳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한다.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간 하타 씨는 역시 이 지역의 이름을 마을이름에 붙여 현재도 일본 전국에 이 다와라 모토쵸라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하타 씨는 적절한 인구 규모를 가지고 집단을 이루어 목소리를 내었음이 틀림이 없다.
    이주 초기에 일본의 강가, 광산 등에서 제방을 쌓거나, 철을 만들었는데, 이는 고대 일본의 사회 기반시설을 하타 씨들이 만들어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고난의 시간을 보낸 하타 씨는 점차 부를 형성, 교토를 건설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쿠니교, 나가오카 궁성을 건설할 떄, 하타 씨는 큰 공헌을 하였고, 오랜 세월동안 천황의 거주지였던 헤이안쿄의 정전 태극전의 원 소유자는 하타 씨의 선조인 하타 가와카츠의 집터 였다고 메이지 시대의 사학자 기다 세이키치는 지적하고 있다.
    부를 축적한 하타 씨는 이나리 신사, 하치만 신사를 창건하는데 , 이 신사는 현재까지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사 수를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하타 씨는 일본의 문화, 예술, 종교,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하타 씨로 부터 분파해간 성씨가 43개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고대를 건설한 명문 씨족 하타 씨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좀 더 하타 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매몰되어 있는 역사를 밖으로 끄집어 내어야 할 것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하타 씨의 한국 내 출신지 규명이다. 대개 백제, 신라, 가야가 혼합되어 있는데, 관심을 가지고 규명해야 할 문제이다

Комментарии • 2

  • @ashton01011
    @ashton01011 Год назад

    늘 지식의 깊이를 깊게 해주시는 kj 님 감사합니다.

  • @Hyuchan1002
    @Hyuchan1002 Год назад

    하타씨가 일본에 건축기술을 전파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608년 일본을 방문한 배세청도 큐슈 동북부의 하타씨 왕국을 보고는 중국 지방에 온 것 같다며 깜짝 놀랐을 정도니까요 ㅋ
    어떤 글에서는 이 진왕국과 하타씨의 관계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당대에 진시황제의 후예를 자처하는 건축 기술자가 또 있다고는 상정하기 어렵겠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