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깊은 사람은 고인돌 유구와 유물, 규모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권력으로 인식한다. 현대의 사고로 과거의 유적을 해석하는 순간 왜곡이 발생된다. 고인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박사님도 계시는데 이런 분들의 연구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큰 깨우침인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다.
유시민 작가 말에 공감 가는 것. 화순 출신인데 논 한가운데 뜬금없이 큰 돌들이 놓여 있고, 들판 돌아 다니다가도 뜬금없이 큰 돌들이 군데군데 있었더랬습니다. 당시엔 사람들이 힘들면 쉬려고 놔뒀다고 생각 했습니다. 종종 쉴 때, 그런 돌 위에서 쉬었기에.... 고인돌에 대해 알고난 후부턴 어릴 때, 그 돌들이 고인돌이라는걸 알았더랬죠.
한반도에 고인돌이 많은 이유는 한반도에선 거의 1000여년 동안 고인돌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계승된게 원인이죠. 해외에는 신석기 시절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고인돌 만들다가 곧 그보다 고도한 무덤 양식과 건축물들이 생겨나면서 더 이상 고인돌을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발달된 건축물의 등장으로 원시적인 조형물에 불과한 고인돌은 더이상 부족과 권력자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건축 기술의 발달이 늦었던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가 도입될 무렵까지도 고인돌은 세력 과시용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거대한 건축물은 커녕 여전히 움집이 보편적인 주거 형태였으니까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수와 고인돌을 거느렸던 대구,호수에서 신천과 금호강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천변 따라 세계 최다 3천기의 고인돌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그러나 이젠 그장관을 볼 수 없다.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전부 파괴하였다.겨우 30년 만에 호수와 고인돌이 모두 사라진 지금의 대구. 그저 개발이라는 토목적 안목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개발이익 앞에 헌납했다.호수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세계 희귀의 관광 도시가 되었을 텐데 단 30년 만에 그 천혜의 기회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능력자들이 많아서 4년마다 한번씩 월식이 있는 날이 되면 각 마을의 대표들이 모여 염력을 겨루어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염력만으로 돌을 들어올려 고인돌을 만드는데 가장 무겁고 큰 돌을 들어올린 사람이 승자가 됩니다. 시합은 월식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일부 참가자들은 무리해서 큰 돌을 들다가 시합 중 코피를 쏟거나 오줌을 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승자는 전통적으로 한우등심세트를 받았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인돌 밑에 불을 지펴 밤새도록 고기를 구워먹었다고 합니다.
가장 늦게 전파되어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겁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는 유럽과 달리 석조건축물역사가 전무했기에 보존된것도 크고요. 오래된 고인돌들은 전부 유럽과 중동에 몰려있고 동쪽으로 갈수록 연대가 빨라집니다. 그래서 극동인 한반도에는 믿기지 않지만 기원후 3C이후에 지어진 고인돌이 있지요. 동시대 고인돌을 만드는 문명은 한반도외에 없었지요.
고인돌 많은게 자랑이 아니란 말임. 원래 고인돌자체가 서쪽에서 수입되었고, 한국에 많이 남은건 유럽같이 석조건축을 하지 않았기에 넘쳐날 뿐임. 유럽, 중동이 한반도같이 목조건축위주로 했다면 훨씬 많이 남았을거임. 게다가 문명레벨이 낮다보니 남들다 제대로된 건물 만들때, 기원후 3세기까지 계속 고인돌만 만듬. 이게 자랑인것 같음? 오히려 한반도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불쌍한 예임. 아프리카에서 수렵민족들에게 돌창이 지금도 넘쳐난다고 그게 자랑이겠음?
@@2jaemyungE 가장 오래된 볍씨가 나온 곳에서 돌 올리는건 가장 늦게 전파됐겠다 거 참 신기하네 농사는 세계최초로 지었는데 기원후 3세기면 문자에 문명에 배타고 인도에서 공주가 결혼하러 들어와서도 100년이 훌쩍 지난 시기인데 돌덩어리 올리는건 왜 그렇게 끊지를 못했을까? 우리도 그래 지금 시대가 어느시대인데 선진국 아니면 표현할 말이 없다는 책이 베셀인 시국인데 그지? 아직도 조상 무덤에서 차례지내고 제사 지내는거 왜 그렇게 끊지를 못하냐 그지? 왜 그럴까? 제사가 서쪽에서 늦게 전파 되서야? 그래?ㅋ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사안입니다. 현재 연구로는 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거라는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벼도 예전엔 중국의 벼가 우리나라보다 오래되어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파됐을 거라는 것이 당시 정설이었는데, 연구 결과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벼보다 오래된 것이 발견이 되어서 결과가 뒤바뀌었습니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지식으로 단정 짓는 것보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고조선은 토착민인 예족(호랑이부족),맥족(곰부족)과 서방에서 선진문명을 가지고 왔던 지배계층(환웅)이 세운 나라이고, 그 지배계층의 여러가지 문화들 중 하나가 고인돌임 한반도가 동쪽 땅끝이라 생각해서 여기 정착했기 때문에 고인돌이 존나 많은거.. 당시에 이 청동을 다루는 선진문물을 가진 지배계층이 쪼개지면서 세계 각지로 퍼졌는데 그 중에 주류가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고 나머지 분파들이 유럽이나 인도에 많이 정착함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인구수나 경제지표를 편하게 알지만 예전에는 고인돌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고인돌은 한두사람이 들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백명 당길수도 없다. 선별된 힘센 장정들과 지혜있는 리더쉽이 고생을 해야 세울수 있는것이 고인돌일껀데 고인돌이 크면 클수록 그 부족이나 마을에 힘센 장정의 수가 많다는것을 의미하는것으로 그마을의 척도를 알수 있었지 않았을까?
님 말처럼 한두명이 금방 뚝딱 할수 있는게 아니니 장정들을 때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면 농사건 사냥이건 다른 생산활동이건 거기 투입할 인력이 부족해짐 당시 식량생산 수준이 아주 미약 했을거기 때문에 고인돌 만드는데는 아주적인 인원밖에 동원 못했을 거니까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 었을거임 만들면서 인력이 다치거나 죽을수도 있고 만들고 나면 고인돌이 부족이 가진 힘의 척도가 되서 더큰 부족의 타겟이 되기 쉬웠을 거임 한 부족이 만들기엔 오랜시간에 걸리고 만드는 동안 인력이 손상되거나 만들고 나면 침략당할 위협 커질수도 있는 고인돌이 2만개(엎어진거 까지 하면 더 많은)나 있는건 힘을 과시하기 위한거 보다 1. 우호적인 여러 부족들 끼리 특정한 날을 기념 하기 위해서 만들던 것이 퍼짐 2.인력을 빼서 오랜시간 동안 만들어야됨 그만큼 부족의 힘이 줄어들고 일하는 사람을 서로 인질 용도로 사용 할수도 있으니까 서로 배신이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 만듦 일하면 같이 밥도 먹고 같이 목욕도 하면 서로 친해져서 다 만들면 덜 싸우게 되니까 다른 부족과 동맹이나 거래 화해등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듦 그러다보니 계속 만들게 되고 퍼짐 이 아닐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임
@@hankyulko8769 글쎄 너보다 깊이 성찰하기 때문이겠지? 농경문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 곡식은 비축이 가능한 식량이고 한반도 지형상 산맥과 능선을 따라 나눠진 수천개의 부족들이 약탈을 안하는게 이상한것이고 농업 하러 장정들이 집을비운사이 부락을 지켜줄건 고인돌 의 위협 박에 없겠지 우리부족 건드리면 큰부족을 적으로 삼는거고 우리근방에 부족들은 씨를말리겠다는 엄중한경고지 척박한 청동기시대때 쓸대없이 50톤이 넘는 돌을 왜 세우겠니? 청동기인 들이 너처럼 머리나쁘진 안을거야
제생각엔 고인돌을 옮기는 과정자체가 일종의 청소년트레이닝이면서 공동체단합의 구실로 사용되지 않았나싶음. 굳이 누가 죽지 않아도 미래에 쓸 고인돌무덤을 일정거리씩 이동시키면서 협동심과 체력단련 단합 축제 이런종합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음. 단발적인 지배층 무덤이나 종교도구로 사용하고 말기엔 들이는 기회비용이 너무 큰듯.
매스무브먼트(사면에 있는 물질이 중력때문에 흘러내려가는 현상)에 의해 사면을 따라 내려온 암괴 밑을 파서, 돌기둥을 세워 고인돌을 만든 것 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사실 어떤 고인돌들은 그렇게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는 않고 건축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지석묘의 입지특성과 축조방식에 대한 지형학적 고찰 - 효산리·대신리를 중심으로 -, 박철웅 - 김인철 한국지형학회지 제19권 제3호(2012))
인도 타밀과 한국이 공유하는 고인돌 문화이니 그 유래도 공통일 것입니다. 타밀과 한민족이 고인둘 묘제를 쓸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라크 우르나 인더스 강 주변에 살 때, 거대한 화산 폭발의 돌덩어리가 선조의 무덤을 파손하는 것을 보고 다신 그런 돌덩어리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또한 죽은 사람의 혼불이 무덤으로 드나드는 것을 쉽게 하려고 한 것이다.
고인돌=우가우가라고 생각하는건 좀 멍청한거 아님? 수메르 문명 보다 앞서 요하문명이 있었고 그게 우리 지역 문명이랑 띠가 같음 문명은 어디에서 최초로 시작하는지가 젤 중요한데 이유는 문명은 분화했기때문임 아직 문화흐름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선사문명을 절대시기로만 비교하는건 문화의 흐름을 모르는거고 그거는 그냥 무식임 심지어 절대시기를 비교해도 요하문명이 앞서는데ㅋ 무식하면 용감하다 어디 인터넷 찌라시 퍼주는거 읽고 선동 당해가지고ㅋ
[#알쓸신잡] 시즌3 정주행하기😎
👉 ruclips.net/p/PLgbB1gJhmG7C7iwYdNcB4WpRdGjf1Jz8A
타인의 무의미한 수고를 강제할 수 있는 게 권력이다,
와... 무서운 말이다..
거석문화의 원조는 한민족이라네요
ruclips.net/video/fhSKp8c2fGQ/видео.html
@@초코후렌치파이 개독+환단고기가 낳은, 좋게 봐줘서 개인적인 생각인걸 사실이라고 하는 클라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피라미드도 한민족이 만들었다 하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용진-j1l 아 사실 한민족이 이집트까지 정복했던거자너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기에 플러스 종교 ㅇㅇ
사고가 깊은 사람은 고인돌 유구와 유물, 규모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권력으로 인식한다.
현대의 사고로 과거의 유적을 해석하는 순간 왜곡이 발생된다.
고인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박사님도 계시는데 이런 분들의 연구 내용을 알려주는 것도 큰 깨우침인데.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한다.
타인의 무의미한 수고를 강제 할 수 있는게 권력이다. 진짜 공감되는 말이다ㅋㅋㅋ
유시민 작가 말에 공감 가는 것.
화순 출신인데 논 한가운데 뜬금없이 큰 돌들이 놓여 있고,
들판 돌아 다니다가도 뜬금없이 큰 돌들이 군데군데 있었더랬습니다.
당시엔 사람들이 힘들면 쉬려고 놔뒀다고 생각 했습니다.
종종 쉴 때, 그런 돌 위에서 쉬었기에....
고인돌에 대해 알고난 후부턴 어릴 때, 그 돌들이 고인돌이라는걸 알았더랬죠.
고인돌은 과거의 치킨집임이 분명하다. 저렇게 많았다는건 치킨집이라는 증거다.
ㅋㅋㅋㅋㅋㅋㅋ
엌ㅋㅋㅋㅋㄱㄲ
스타벅스였을수도ㅋㅋㅋㅋㅋ
자네 백숙 한마리 뜯을랑가..?
공인중개사죠
0:21 신천을 따라 약 3000천기 정도의 고인돌과 청동기 유적이 있었지만 시절이 시절이라 제대로 된 지표조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죠...내가 살던 아파트도 청동기 환호 유적 위에 세워진 아파트였음.
실제로 아파트 지으려다가 유물이 나오면 아파트 지어야 한다고 그냥 묻고 모르는척 한다고하네요......
2:10 사단장 - 여기 너무 삭막하다 꽃이 하나도 없네~.
한반도에 고인돌이 많은 이유는 한반도에선 거의 1000여년 동안 고인돌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계승된게 원인이죠.
해외에는 신석기 시절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고인돌 만들다가 곧 그보다 고도한 무덤 양식과 건축물들이 생겨나면서 더 이상 고인돌을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발달된 건축물의 등장으로 원시적인 조형물에 불과한 고인돌은 더이상 부족과 권력자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건축 기술의 발달이 늦었던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가 도입될 무렵까지도 고인돌은 세력 과시용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거대한 건축물은 커녕 여전히 움집이 보편적인 주거 형태였으니까요.
근거는?
쇠로 만든건 녹슬어 없어지고 나무로 만든건 썩어 없어지고 결국 돌로 만든거만 남았다.
비싼 쇠를 왜 거다 써요 무기가 1순위인데 부서지거나 재활용되서 없는 게 맞을 듯
우리 민족은 예전부터 유행에 민감했던 듯.
하나가 하니 죄다 따라했네 ㅎㅎㅎㅎ
근데 왜 옆에서 메이지유신하고 양무운동하는데도 그건 안따라한거지 그게 젤 중요한데
@@os592 그야 그 당시 서양에서 온갖 지랄을 떨어대서 조선 내에선 서양에 대한 인식이 개좆박았으니까
삼겹살 불판이 맞음
우리나라는 고인돌도 많고 교회도 많고 치킨집도 많습니다.
진짜 어디를 놀러가도 교회는 꼭있음! 깡촌에 가도 있음!
신천지때문에 교회 보면 진짜 시름
좀비가 살기 힘든 나라 1순위는 북한이고 뱀파이어가 가장 살기 힘든 나라는 우리나라라고...
@@바밤바-e4r ㅋㅋㅋㅋㅋㅋㅋㅋ
1:13 고인돌 하나도 저렇게 힘든데, 이집트 피라미드는 외계 기술 아닌가 몰라~
저정도 크기면 관짝소년단도 이악물고 춤췄음듯
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관짝소년단 오열ㅋㅋㅋㅋㅋㅋㅋ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호수와 고인돌을 거느렸던 대구,호수에서 신천과 금호강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천변 따라 세계 최다 3천기의 고인돌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그러나 이젠 그장관을 볼 수 없다.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전부 파괴하였다.겨우 30년 만에 호수와 고인돌이 모두 사라진 지금의 대구.
그저 개발이라는 토목적 안목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도로 내고 아파트 짓는 눈앞의 개발이익 앞에 헌납했다.호수와 고인돌이 그대로 있었으면 세계 희귀의 관광 도시가 되었을 텐데 단 30년 만에 그 천혜의 기회를 스스로 뭉개버렸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능력자들이 많아서 4년마다 한번씩 월식이 있는 날이 되면 각 마을의 대표들이 모여 염력을 겨루어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염력만으로 돌을 들어올려 고인돌을 만드는데 가장 무겁고 큰 돌을 들어올린 사람이 승자가 됩니다. 시합은 월식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일부 참가자들은 무리해서 큰 돌을 들다가 시합 중 코피를 쏟거나 오줌을 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승자는 전통적으로 한우등심세트를 받았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인돌 밑에 불을 지펴 밤새도록 고기를 구워먹었다고 합니다.
교과서에서 본 이야기 제 것인양 아는척 하지 마시죠
@손승연 저분은 나름 원댓글이 드립인데 교과서에 나온다고 하면서 웃길라고 하신거 같은뎅...
@손승연 드립에 드립으로 받은건데 이걸..
우리나라는 고인돌만큼 고인물도 전세계적으로 60%밀집되어있습니다
ㅇㄱㄹㅇ 서울서버에서 게임하느니 핑높은 유럽이나 북미서버에서 놈 ㅋㅋㅋ
@@eadgbe6215 남자는 큰물에서 놉시다
우리 과수원에도 하나 있어요 ㅋㅋ 거창군 주상면 내오리 지석묘
어릴적부터 방치되다시피 있더니 군대다녀와서 보니 표지판세우고 바리케이트 쳐놨더라구요 ㅋㅋ
고인돌 자리했던곳들은 지금도 도시가 자리잡은 곳들이네
강이 있는곳이라 그렇습니다
가장 늦게 전파되어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겁니다. 게다가 한반도에서는 유럽과 달리 석조건축물역사가 전무했기에 보존된것도 크고요. 오래된 고인돌들은 전부 유럽과 중동에 몰려있고 동쪽으로 갈수록 연대가 빨라집니다. 그래서 극동인 한반도에는 믿기지 않지만 기원후 3C이후에 지어진 고인돌이 있지요. 동시대 고인돌을 만드는 문명은 한반도외에 없었지요.
얘는 다른영상에도 이러더니 뭔 정신병있냐? 화교임?
고인돌 많은게 자랑이 아니란 말임. 원래 고인돌자체가 서쪽에서 수입되었고, 한국에 많이 남은건 유럽같이 석조건축을 하지 않았기에 넘쳐날 뿐임. 유럽, 중동이 한반도같이 목조건축위주로 했다면 훨씬 많이 남았을거임. 게다가 문명레벨이 낮다보니 남들다 제대로된 건물 만들때, 기원후 3세기까지 계속 고인돌만 만듬. 이게 자랑인것 같음? 오히려 한반도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불쌍한 예임. 아프리카에서 수렵민족들에게 돌창이 지금도 넘쳐난다고 그게 자랑이겠음?
@@2jaemyungE 가장 오래된 볍씨가 나온 곳에서 돌 올리는건 가장 늦게 전파됐겠다 거 참 신기하네 농사는 세계최초로 지었는데 기원후 3세기면 문자에 문명에 배타고 인도에서 공주가 결혼하러 들어와서도 100년이 훌쩍 지난 시기인데 돌덩어리 올리는건 왜 그렇게 끊지를 못했을까? 우리도 그래 지금 시대가 어느시대인데 선진국 아니면 표현할 말이 없다는 책이 베셀인 시국인데 그지? 아직도 조상 무덤에서 차례지내고 제사 지내는거 왜 그렇게 끊지를 못하냐 그지? 왜 그럴까? 제사가 서쪽에서 늦게 전파 되서야? 그래?ㅋ
@@user-rq8rh3si3m 멍청한 소리하네. 그럼 가장오래된 볍씨가 나온 곳에서 밀은 한참뒤에 전파된건 말이되고? 이미 학계에서 고인돌은 유럽중동쪽에서 발원한걸로 결정났는데. 감히 네따위가 뭔데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거야??? 죄송하지만 하시는 일이 뭐세요? 너가 감히 학계를 뒤집을 만큼의 관련분야의 학식과 인지도를 지니셨어요??? 아니잖아? 주제와 분수좀 알아 빈수레야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인 사안입니다.
현재 연구로는 유럽의 고인돌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거라는 결과도 나와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는 벼도 예전엔 중국의 벼가 우리나라보다 오래되어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전파됐을 거라는 것이 당시 정설이었는데, 연구 결과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벼보다 오래된 것이 발견이 되어서 결과가 뒤바뀌었습니다.
즉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지식으로 단정 짓는 것보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1:15 피지컬 100이네...
절 근처 계곡에 가보면 돌탑 엄청 많이 쌓아놨는데 그걸 쌓는 심리와 비슷한 게 아닐까요?
돌탑 세울 생각 전혀 없었는데 막상 다른 사람들 다 쌓아놓고 가니까 저도 그냥 가기 뭐해서 쌓고 왔거든요.
그러기엔 너무 큰 수고라... 그 큰 돌을 조금씩 조금씩 다 자르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줄로 묶던 뭘 했던지간에 옮겨서... 마음먹고 하려고 한게 아니면 불가능한 스케일
고조선은 토착민인 예족(호랑이부족),맥족(곰부족)과 서방에서 선진문명을 가지고 왔던 지배계층(환웅)이 세운 나라이고, 그 지배계층의 여러가지 문화들 중 하나가 고인돌임 한반도가 동쪽 땅끝이라 생각해서 여기 정착했기 때문에 고인돌이 존나 많은거.. 당시에 이 청동을 다루는 선진문물을 가진 지배계층이 쪼개지면서 세계 각지로 퍼졌는데 그 중에 주류가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고 나머지 분파들이 유럽이나 인도에 많이 정착함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인구수나 경제지표를 편하게 알지만 예전에는 고인돌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고인돌은 한두사람이 들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백명 당길수도 없다. 선별된 힘센 장정들과 지혜있는 리더쉽이 고생을 해야 세울수 있는것이 고인돌일껀데 고인돌이 크면 클수록 그 부족이나 마을에 힘센 장정의 수가 많다는것을 의미하는것으로 그마을의 척도를 알수 있었지 않았을까?
님 말처럼 한두명이 금방 뚝딱 할수 있는게 아니니 장정들을 때려 박아야 하는데
그러면 농사건 사냥이건 다른 생산활동이건
거기 투입할 인력이 부족해짐
당시 식량생산 수준이 아주 미약 했을거기 때문에 고인돌 만드는데는 아주적인 인원밖에 동원 못했을 거니까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들 었을거임
만들면서 인력이 다치거나 죽을수도 있고 만들고 나면 고인돌이 부족이 가진 힘의 척도가 되서
더큰 부족의 타겟이 되기 쉬웠을 거임
한 부족이 만들기엔 오랜시간에 걸리고 만드는 동안 인력이 손상되거나 만들고 나면 침략당할 위협 커질수도 있는 고인돌이
2만개(엎어진거 까지 하면 더 많은)나 있는건 힘을 과시하기 위한거 보다
1. 우호적인 여러 부족들 끼리 특정한 날을 기념 하기 위해서 만들던 것이 퍼짐
2.인력을 빼서 오랜시간 동안 만들어야됨
그만큼 부족의 힘이 줄어들고 일하는 사람을 서로 인질 용도로 사용 할수도 있으니까
서로 배신이나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걸 보여주기 위해서 만듦
일하면 같이 밥도 먹고 같이 목욕도 하면 서로 친해져서 다 만들면 덜 싸우게 되니까 다른 부족과 동맹이나 거래 화해등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듦
그러다보니 계속 만들게 되고 퍼짐
이 아닐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임
지금으로 치면 약간 교회같은 느낌 아니었을까 싶음.
호모사피엔스 가 어떤 존재인지 사람인지 알수 있나요
알쓸신잡 재미있는데 4나오면 역사패널 무조건 한분 있어야 하고 논란이 없어야 할듯
한반도의 고인돌은 지배계층 뿐 아니라 여자,어린아이등 일반인들의 무덤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하네요
프로젝트로 지금 다시 옛날 방식으로 복원해 보면 어떨까?
캬..말잘하내
고인돌 의 목적은 경고판 역활임 다른 부족
에서 약탈하러 왔을때 우리부족은
이렇게 큰 고인돌 세울만큼 힘쎈 장정이
많다 다른데로 가는게 좋을걸 이런의미
역할요
역활(力活) : 특정한 대상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을 의미
역할(役割) : 자신의 계급이나 직책에 따라서 해야 하는 일
용도 라고 쓰는게 맞음
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
@@hankyulko8769 글쎄 너보다 깊이 성찰하기 때문이겠지? 농경문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
곡식은 비축이 가능한 식량이고 한반도 지형상 산맥과 능선을 따라 나눠진 수천개의
부족들이 약탈을 안하는게 이상한것이고
농업 하러 장정들이 집을비운사이 부락을 지켜줄건 고인돌 의 위협 박에 없겠지
우리부족 건드리면 큰부족을 적으로 삼는거고
우리근방에 부족들은 씨를말리겠다는 엄중한경고지 척박한 청동기시대때
쓸대없이 50톤이 넘는 돌을 왜 세우겠니?
청동기인 들이 너처럼 머리나쁘진 안을거야
제생각엔 고인돌을 옮기는 과정자체가 일종의 청소년트레이닝이면서 공동체단합의 구실로 사용되지 않았나싶음. 굳이 누가 죽지 않아도 미래에 쓸 고인돌무덤을 일정거리씩 이동시키면서 협동심과 체력단련 단합 축제 이런종합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음. 단발적인 지배층 무덤이나 종교도구로 사용하고 말기엔 들이는 기회비용이 너무 큰듯.
내 고향집 뒷산에 고인돌 있었는데 아버지랑 삼촌이 어리실때 거기다 이름 새김ㅋㅋㅋ 그래서 나중에 고인돌 찾아온 교수랑 대판 싸웠다고 함ㅋㅋㅋ
그런식으로 파손된 문화유산이 참 많겠지.
교수는 그걸 님 가족한테 화낼게 아니라 수천기를 아파트짓는다고 밀어버린 정부와 싸웠어야 함. 정말 단번에 수천기, 수백기가 밀려나간 곳 많음.
매스무브먼트(사면에 있는 물질이 중력때문에 흘러내려가는 현상)에 의해 사면을 따라 내려온 암괴 밑을 파서, 돌기둥을 세워 고인돌을 만든 것 이라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사실 어떤 고인돌들은 그렇게 인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는 않고 건축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죠.(지석묘의 입지특성과 축조방식에 대한 지형학적 고찰 - 효산리·대신리를 중심으로 -, 박철웅 - 김인철 한국지형학회지 제19권 제3호(2012))
우리 민족이 이렇게 종교적인 민족이야
고인돌=구석기=인류의 시작
고인돌 기술=피라미드 기술
한국 고인돌-중국 피라미드-이집트 피라미드---무덤
한국 순장- 이집트 미라- 그리스 화장---수목장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개중에 인신제사를 드린 부족(?)들이 있으면 주변에 뼈가 발견되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종교성이 높기도 하고..
제사 지내고 다음 해 제사까지 계속 불 피워놓고 유의미한 때에 고기 구워먹던 집단 회식용 불판?
인도 타밀과 한국이 공유하는 고인돌 문화이니 그 유래도 공통일 것입니다. 타밀과 한민족이 고인둘 묘제를 쓸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라크 우르나 인더스 강 주변에 살 때, 거대한 화산 폭발의 돌덩어리가 선조의 무덤을 파손하는 것을 보고 다신 그런 돌덩어리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또한 죽은 사람의 혼불이 무덤으로 드나드는 것을 쉽게 하려고 한 것이다.
고창 ... 어렸을때 멱감고 고인돌 위에서 몸을 말렸음~
이웃 동네랑 경쟁한 결과임.
어디가보니 집채만한 돌을 괴어놨다 라고하니 우리는 그보다 큰걸해보자~~
이런 마음에 하다보니 전국이 고인돌
어디서 들었는데 군대만 다녀와도 피라미드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하던데 고인돌쯤은 뭐...
육지에 세워진 고인돌들은 대부분이 돌을 가져다 사용하였고
그나마 강화도같이 육지와 떨어져서 폐쇄적이고 발전이 더딘탓에 많이 남아있는건 아닐까요?
몇십년전 울타리가없었을때 저 위에서 라면 끓여먹었다고 아빠가 말했었는데 진짜 어이없었음ㅋㅋㅋㅋㅋㄱ딱 올라갈때 발짚을곳이 있었다고했닼ㅋㄲㅋ
예로부터 유행에 민감한 한반도인들 이었나봄... 그러니 유독 많지ㅋ
옆마을에 고인돌 만들었다는데요?? 그래? 우리도 질 수 없지 하나 만들어!!
방구석 여포들이 많더라니 예전부터 저렇게 과시충이 많았네
깊게 갈것도 없이 글자도 지도도 변변찮은 시대에 마을의 규모를 알리는 안내판이었음
오 과학교수님 말이 참 신빙성 있네요
우연히 돌로 만든 이 동네가 많이 남아 있다
과학자가 우연이란 소릴 하길래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옴ㅋ 과학자란건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우연이라고 치부하는 작은 우연조차 증명하는게 직업인데?
2:10 별...
우리 조상님들 고여버리셨네..
솔직히말해 고인돌 정도에 놀라면 피라미드 보면 정말 기절할거임.. 이걸 인간이 만들었다고?ㅋㅋㅋ
외계인이 만들었을수도..
@@용용-i2i 피라미드 만들러 나오던 사람 40의 명부가 발견 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쿠푸왕 대 피라미드가 만들어 지기 까지 발전과정 도 있어서
피라미드에 외계인 엮는거 이집트 고고학 박사들이 극혐함
@@신용진-j1l 공감 입니다
무책임한 학자들이죠
@@카이사르-c2s 엄연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데 외계인이니 뭐니 어쩌니 하는 학자는 학자가 아니죠 장사꾼이지
그거 앎? 피라미드시대가 지나가고 로마시대에도 한반도는 고인돌만 만듬. 무려 기원후 3C까지. 자랑인가 싶음.
오우 미친... 0:30 우리 아파트에 있는 고인돌인데...?
구라
사월보성사세요?
근데 우리 고인돌 쌓을 기간에 수메르문명은 학교도 있고 사사시도 남기고..
ㅇㅇ 그러니까 저거 자랑이 아님. 한반도만 저러고 있었음. 유럽이나 중동은 고인돌이 훨씬 오래됨. 그런데 한반도는 기원후 3C고인돌이 있음? 무슨 뜻이겠음? 한반토가 동시대 대비 문화레벨이 낮았단 의미임.
고인돌=우가우가라고 생각하는건 좀 멍청한거 아님? 수메르 문명 보다 앞서 요하문명이 있었고 그게 우리 지역 문명이랑 띠가 같음 문명은 어디에서 최초로 시작하는지가 젤 중요한데 이유는 문명은 분화했기때문임 아직 문화흐름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선사문명을 절대시기로만 비교하는건 문화의 흐름을 모르는거고 그거는 그냥 무식임 심지어 절대시기를 비교해도 요하문명이 앞서는데ㅋ 무식하면 용감하다 어디 인터넷 찌라시 퍼주는거 읽고 선동 당해가지고ㅋ
@@2jaemyungE 근데 또 전세계적으로 보면 한국문명은 느린 편은 아님
실제로 그리큽니까?화면은 별로안커보이는데
뭘 어떻게 만들어 까라고 하니까 만들었지
실제로는 고인돌이 더 많았을거야 공사하면서 치웠을거고 이게 고인돌인지 모르고 방치된 것도 많겠지
고인돌은 돌제단임. 고인돌의 최초 기원은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에게서 비롯됨. 그들은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음. 그 후손들이 전세계로 흩어지며 고인돌도 전세계로 흩어지게 됨.
고인돌 세우기 과열 경쟁이 저 당시에...?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는 경쟁 과열이로고! 하지만 고인돌마다 부족장들의 스왝이 느껴진다~
산악 지대가 많아서, 우연히, 호남 지역 산악지대가 많아서 고인돌이 가장 분포가 돼 있나요. 우연히, 세계 고인돌 40%가 한반도에 밀집이 돼 있다는데, 인구가 우연히 많아 지나요.
우리 마을 침범하지말아라는 메세지.
ㄱㅓ대한 것 만드는 사람 많다.
여기에 와서 묻히고 싶었을 거 같은데. 마치 고향 아니면 집안의 선산 같은 그 느낌?
저도 생각보다작아서
...ㅋ
유희열 보고 싶다
고인돌은 강화도 보다 고창에 더많습니다.
실제로는 남한에 2만 7천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 중 전라남도에만 1만9천기가 있습니다(전라북도는 1600여기-고창포함)
통나무가 몇백톤짜리 돌의 무게도 버티네요ㅋㅋㅋㅋㅋ 강철로 되어있나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나무의 장점이죠
둥근 나무는 힘이 분산되기에 ~
나르다가 당연히 파손도 되었겠죠!~대체 나무로 다시 놓고~~
53톤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돌의 종류를 파악한 다음에 부피를 측정해서 구한 값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kimsungho4114 오 그럴듯 한데요?
아마 제사를 위한 제단이 아닐까요?
클수록 강한 부족이라는 생각에 만든걸까?
환상의 조합
쌍유
조용히 살아라
그런데 조선시대나 그 이전 사람들은 저런 고인돌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치워버리고 농사 지을 땅 더 확보하자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한데...
치우는것도 일인거니까 한두개는 몰라도 한 30개 몰려있으면 에이 됐다 그냥 저 옆에 물대자 했을거같은데요
원시 교회야.. 지금도 십자가 봐봐
사실 저기는 똥간이였다
김진애씨의 논리는 뭐지?
원시인들이 바보들 고인돌 무덤아닌데 ㅋㅋ
그러면 웃길듯
불판인데
고인돌 만들었때 당시 서양쪽 문화유산봐라 그냥 돌덩이 세워놓은거같은데
?그때 유럽얘들은 농사도 시작 못하고 유량하고 다녔는데
서양은 무슨 ㅋㅋㅋ 차라리 중동이랑 아프리카타령을 해라
우리대학교에도 잔디에 저런 고인돌있는데
밤만되면 거기 올라가서 삽겹살 구워먹고 술처먹고 논다.
그런거 보면 고인돌은 고대 삼겹살집아니었을까?
밑에서 불피우고 위에 돌에 멧돼지한마리 올려서
꾸어먹고...
고인돌이 무덤이라는 증거 있나??? 내가볼땐 무속신앙의 의식 장소라고 본다!!!
증거는
지석묘.. 고인돌 아래 목관묘. 북방식 고인돌은 저렇게 기둥이 있고.
남방식은 지석묘 형태.
수천년을 거치면서 드러난 고인돌은 도굴되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최대 350톤에 이르는 김해 고인돌은 그 아래 목관묘에서 토기와 함께 발굴되다.
고인돌은 가야고분군에서 보듯이 돌날 덧무덤 형태로 변형. 후대 백제에서는 석곽묘, 그 형식은 동일. 묘제 문화의 변천사를 통해 피장자의 세력과 문화 의식을 파악할 수 있다.
과학자가 우연히라니...떽...
환국 거석문화의 증거
ruclips.net/video/eAtF7F4EdR8/видео.html
저기서 삼겹살 구워 먹으면
맛 나겠다
언젠가 꼭 몰래 구워 먹어 보고 싶다.
노예가 풍부한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