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막내 삼촌 손에 끌려 신촌 엄청 작은 골방에 신혼 살림 사시던 작은 아버지집에 들렸다 아직 갓난 아기였던 사촌 여동생의 뭐가 그리 슬픈지 악에 바친 울음소리와 내려가며 기차속에서 보이던 눈 내려 새하얀 하늘과 연기로 가득 찼던 서울의 회색빛 하늘 풍경이 지금까지 남아있네요(아마도 서울역에서 용산 사이 쯤)
66년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쌤마다 인성이 달랐던지...3학년 주안순 쌤 진짜 배고프고 월사금 못내서 맨날 쫒아내서 집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학교로 다시 보내고 화난 쌤은 추운 겨울에 유리창도 변변치 않은 복도에 내몰아 복도를 윤내기하라고 걸레와 초를 주었고 하염없이 닦아야했다. 축복받은 젊은이들이여! 너무 불평하지 말라. 지난 날 생각하면 눈물 밖에 없다.
뭐땜시 울아부진 휑~하니 저때 서울에서 지도에도 없는 깡촌으로 이사를 가서리 자식들을 그리 촌닭을 맹글어 노셨을까?! ㅎㅎ 정확히 말하면 조부님께서 불러 귀농했다고, 특히 농사일이 힘들 때라든지 무튼 가끔 푸념하시던 모습 생각난다~~^ 내가 아장아장 걸었을 두세 살.. 저때 난 영등포 어디에서 면기저귀 차고 있었을까? 아님, 막 귀향하여 엄마 등에 따뜻이 업혀 새 둥지를 틀 때였을까.. ( 유독 엄마는 자라면서 보니 동생들을 늘 포대기로 업고 살림하신 기억이 난다. 참 그리운 풍경이다 ) 그 후 참, 희한하게도 현재 영등포 언저리에서 몇십 년째 살고있다 ㅋㅋ
70년대에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수립되면서 강남의 역사는 시작되죠.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아예 강남이라는 말조차 없었을 시절이었습니다. 영동지구 개발엔 미국의 넓은 도로에 대한 로망을 담아 바둑판식 설계로 진행하였고 인구 유치를 위해 명문고등학교들의 이전, 고급주택건설로 이어졌죠. 이게 강남의 집값을 무너지지 않게하는 구심점에서도 중핵이 되죠.
우리 부모님들. 우리조부모님들. 그리고 그시대의 대통령 박정희대통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고생고생고생하던 기억 밖에 안난다던 우리 어머님. 육영수여사 돌아가실 때. 박정희대통령서거하셨을때 땅을 치며 통곡하셨어요. 늘 그러셨어요. 우리나라 이만큼 살게 해준 분이시다. 잊지 말아라. 인간의 탈을 쓰고 잊어 버리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다 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런 사진은 대한민국언론이 찍은것 같지 않고 남파간첩,고정간첩이 찍어서 북송하려고 한것 같네요. 또 1972년에는 처음 남북회담을 서울에서 했는데 그때 북한기자들이 우리나라의 후진 곳만 찍어서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이용해 먹었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놀라서 그 이후 청계천 ,중량교 뚝방판잣집을 다 철거 했지요. 여하튼 덕분에 잘 봅니다.
저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을듯하네요. 나라 발전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60년대 서울도 생각보다는 매우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리고 03:35 배경음악이 영상과 너무 조화롭고 인상적입니다. 혹시 배경음악 제목이 무엇입니까?
9:35
저희 동네가 이쪽이지요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곳은 현재 노량진1동(본동)에 있는 공원입니다 당시에는 수도시설을 위한 배수지가 있었으며 아직도 지역주민들은 배수지공원이라고 합니다
귀한자료 잘보고 갑니다~
눈물나는 대한민국 역사를 보는것 같네요, 눈물나요
저는 65년생, 그시절 아버지는 서울 평화시장에서 고추장사로
돈을 벌어 시골 마을에서 첫번째로 양문형 티비를 놓아 동네 애들 다 모여 타잔을 시청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셨죠 고생하신 울 아버지 그립고 고맙습니다
1966년에 서울시내 버스표의 가격은 5원이 아니고 2원 50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고 1때로 왕십리 무학고녀(여고를 이렇게 불렀지요) 뒤에서 시청앞 배재고를 통학했었습니다. 저의 고교시절을 회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어린이들은 58년생이신 제 어머니 세대같네요
감사합니다💕
귀한영상 감사합니다 저장해야겠어요 청계천 물가에서 놀던아이들중 저도있네요~^^66년 동대문 출생
이 채널 자체가 문화산업 자료실이다.
잘봤습니다~👍
그야말로 검정고무신배경때네요ㅎㅎ
50년이란세월이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매우 귀중한 서울의 역사자료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 개성여고는 계성여고.
6살 촌놈이 처음 서울에 와 서울역 광장에서 드레스미싱 네온싸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죠!!
난 막내 삼촌 손에 끌려 신촌 엄청 작은 골방에 신혼 살림 사시던 작은 아버지집에 들렸다 아직 갓난 아기였던 사촌 여동생의 뭐가 그리 슬픈지 악에 바친 울음소리와 내려가며 기차속에서 보이던 눈 내려 새하얀 하늘과 연기로 가득 찼던 서울의 회색빛 하늘 풍경이 지금까지 남아있네요(아마도 서울역에서 용산 사이 쯤)
@@紅魚歿殺 그때 죽지 그랬냐 !!!!!!
@@sdrjcssrt 아따~!심기불편한∼◆홍슨상!
머시라고??
∼◆홍어삼합은
∼◆슨상 홍어삼합이 최고라고???
아~따~ 그라쥐라잉~ 그것도 신안산이믄 말할 필요도 읍쥐라잉~
우와! 이 사진속에 우리 아버지도 계시것네. 미도파백화점앞 명동에서 장사하다가 쫄딱 망하고 부산 내려가심. 그해 크리스마스에 장관이 바뀌어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 내가 제왕절개로 수술해서 세상에 나올수 있었다고 했었음
당시 일반과 급행버스가 있었는데, 급행5원이고 일반2원50전? 전철1원50전 이었을 겁니다 저 역시 어릴 때라서 기억이 가물가물.. 당시 어른에게 물어보니 맞는다고 합니다
저때 음악감상실 만남 서울역시계텁 ㅋㅋ 와이엠씨 신신백화점 화신백화점 정말좋았죠
헉~ 저 시절에 사셨던 분이 지금 직접 댓글쓰시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지? 자원도 ㅈ도 없는 나라가... 대단해요 한민족.
서울엔 화신 백화점 근처에 르네상스 뮤직 홀, 아폴로, 돌체, 등등, 부산엔 남포동, 광복동지역의 오아시스, 등등... 서울 출신인데 부산에서 ROTC 군복무하던 시절이라 그 당시의 상황을 좀 압니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눈물이 나네요. ㅠ
1970 년대 서울 동영상 다시 올려주세요!
은평구의 옛모습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습니다!
그당시 은평구는 없고
그냥 다 서대문구 이지요.
무학재 고개만 넘어가면 그냥 시골~
지금 홍은동 인가요?
문화촌에 화장터가 있었지요~
한석환 그렇군요! 지금 역촌동 동사무소 앞쪽 길이 옛날엔 논밭에 개천이었다던데 사진을 찾을래도 못 찾겠더라구요ㅠㅠ
@@회오리-u9m 홍은동 홍제동
@@회오리-u9m 무악재 넘으면 홍제동과 홍은동이 있습니다...
화장터는 문화촌이 아니고 홍제동 지금 고은초등학교가 있는 자리입니다...^^
66년생 홍제동이 고향입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그랫지만 상당히 낙후되있던 기억이 있네요..,.
제가 중학생 시절이지요. 최희준 가수의 하숙생 와 무지 많이 노래했지요.
인생은~ 나이롱 뽕의 길~
돈~따러 왔~다~가~ 돈~잃~고 가는~ 길~
화투장은 왔다 갔다 인정일~랑 주~지말자~
깨평일랑 주~지말자~
인생은~ 나이롱 뽕의 길~
돈~따러 왔~다~가~ 돈~잃~고 가는~ 길~
당시에 우리나라 전자제품 회사 는 저런 에어컨을 만들지도 못했을 시기였는데 지금의 가전제품은 한국브랜드 가 압도적으로 선점하고 있으니 참 자랑스럽습니다.
쪼그말때 어렴풋이 추억에 남은 엄마랑 다닌 도시의 큰 길 풍경들 요기있네요
귀한자료이네요 우리 아부지 서울에 땅 좀 사 놓으시지...ㅋ
님자손위해 지금이라도 서울에땅좀사놓으세요
저 당시에 강서와 강남이 서울에 편입될지
누가알았을까요? 그 당시에는 그냥 완전
깡촌이었는데....
전철타고 학교다녀는데 그때가 그리웁습니다^^
66년은 초등학교 1학년 때이다. 쌤마다 인성이 달랐던지...3학년 주안순 쌤 진짜 배고프고 월사금 못내서 맨날 쫒아내서 집으로 보내고 집에서는 학교로 다시 보내고 화난 쌤은 추운 겨울에 유리창도 변변치 않은 복도에 내몰아 복도를 윤내기하라고 걸레와 초를 주었고 하염없이 닦아야했다. 축복받은 젊은이들이여! 너무 불평하지 말라. 지난 날 생각하면 눈물 밖에 없다.
ㅎ ㅎ ㅎ 3:35 저 구름다리 아직도 있죠. 옆으론 계단이 있고. 현 퇴계로 34
한국은행 분수대가 원래 저랬군요 ㅋㅋ 지금의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네요.
저 전차가 경희궁 서울박물관앞에 있는 그 전차인가보다. 근데, 구파발 쪽이나 이문동가면 아직도 저 때의 거리모습과 비슷한 풍경들이 남아있는데~ 이 영상중에서 청계천이 가장 이국적이다
우와 신기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우리나라 모습을 보다니
사진속 개성여고가 아니고 계성여고입니다.
뭐땜시 울아부진 휑~하니 저때 서울에서 지도에도 없는 깡촌으로 이사를 가서리 자식들을 그리 촌닭을 맹글어 노셨을까?! ㅎㅎ
정확히 말하면 조부님께서 불러 귀농했다고,
특히 농사일이 힘들 때라든지 무튼 가끔 푸념하시던 모습 생각난다~~^
내가 아장아장 걸었을 두세 살..
저때 난 영등포 어디에서 면기저귀 차고 있었을까?
아님, 막 귀향하여 엄마 등에 따뜻이 업혀 새 둥지를 틀 때였을까..
( 유독 엄마는 자라면서 보니 동생들을 늘 포대기로 업고 살림하신 기억이 난다. 참 그리운 풍경이다 )
그 후
참, 희한하게도 현재 영등포 언저리에서 몇십 년째 살고있다 ㅋㅋ
내가 국민핵교 입학하기 1년전~
그 당시 내가 살던 서대문 근처에도
초가집이 제법 있었지요~
1966년도면 우마차.말마차 수례일력거 는 있는데 동영상에는 없네요
그러게요 우마차나 말마차 에다
모래 나무 시엔트 등을 실어나르던 기억이나네요
이거 하나만요.압구정동 가로수길 청담동은 도데체 어디에 있는지? 주한미군이 멍청해서 서울을 잘모르는건지? 신기하네요.
당시 압구정 청담동은 인적이 없는 농사짖는 시골입니다 따라서 사진이 없을 겁니다 근80년은 되어야 개발됩니다 참고로 81년 한강을 건너는데, 4명이 모이면 각1000원씩 총4000원을 주고 한남대교를 건너다녔습니다 이때 영동대교 성수대교는 없었지요
ㅋㅋㅋ 아직 나이가..
강남은 이때 논밭이었지 뭐 제대로 된 건물이 없었음 오히려 강북 상계동이나 문화촌에 사람이 살았었지요
@@OS-wh9le 70년대만 해도 평당 200원 했어요 그렇다고 농사꾼이 부자된 건 아닙니다 보통 농사꾼은 300원이면 팔고 떠나죠 결국 정보와 운이 따르는 사람이 요지를 차지합니다
70년대에 영동지구 개발 계획이 수립되면서 강남의 역사는 시작되죠.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아예 강남이라는 말조차 없었을 시절이었습니다. 영동지구 개발엔 미국의 넓은 도로에 대한 로망을 담아 바둑판식 설계로 진행하였고 인구 유치를 위해 명문고등학교들의 이전, 고급주택건설로 이어졌죠. 이게 강남의 집값을 무너지지 않게하는 구심점에서도 중핵이 되죠.
그당시 잠실은 뽕밭 사당동은 배나무 강남은 산과 들녁
그당시 말죽거리 에서 개울에서
고기잡고 산에올라가서 칡뿌리캐먹고 사당동와서 배따서
홈쳐먹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영상 속 위치가 서울 어디 인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주로 사대문 안이네요. 종로구, 동대문구 등
남대문시장 워커힐호텔
내가 태어난 그 해
부모님의 시대네.
66년생ㅋ
서울 판자촌을 보니
동남아에서 본 판자촌집이 생각나넹
80년대초
울산 전하동에서 성남동 극장가려고 버스타면 말타고 갓쓰고 한복입고 도로 다니던 할아버님도봤었는데...
미니버스..전차...평양시인줄 착각하게 함 ㅋㅋㅋ
일제때 태어났지만 청계 판자촌은 쇼킹.66년 모슬포에서 군복무 했었을 시절 그리워요.
지금 미얀마나 캄보디아보는것 같네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적화통일 되었다면
미얀마.캄보디아 수준으로 살면서 중공에게 피빨리며 살았겠죠.
아~! 우리나라에 전차라니 신기하다
우리 부모님들.
우리조부모님들.
그리고 그시대의 대통령 박정희대통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고생고생고생하던 기억 밖에 안난다던 우리 어머님.
육영수여사 돌아가실 때.
박정희대통령서거하셨을때
땅을 치며 통곡하셨어요.
늘 그러셨어요.
우리나라 이만큼 살게 해준 분이시다.
잊지 말아라.
인간의 탈을 쓰고 잊어 버리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다 라고 하셨죠.
그런데 이런 사진은 대한민국언론이 찍은것 같지 않고 남파간첩,고정간첩이 찍어서 북송하려고 한것 같네요.
또
1972년에는 처음 남북회담을 서울에서 했는데 그때 북한기자들이 우리나라의 후진 곳만 찍어서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이용해 먹었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놀라서 그 이후 청계천 ,중량교 뚝방판잣집을 다 철거 했지요.
여하튼 덕분에 잘 봅니다.
그 다음 ㅐ 청계천 덥고 있었지요.
한강의 넓은 모래사장을 보니, 80년대 한강 개발하면서 모래사장을 보존했다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지나가시다 우연히 절 만나신분들
늘즐거우시고 요즘 이 코로나시기때 건강 조심하세요
옷따스히 든든히 입으세요~
댓글달아주시는 한분한분께 기도드립니다
남산에서 흑석동 국립묘지.
지금의 북한모습였네 우리나라도
@김천사 빨갱이냐?
그리운 버스 안내양 누나와 똥찌개..,
이런 뻐스. 와 사람 짐짝이지요. 그래도 정이 있었지요. 서울역 아직 그대로 있지요.
상업은행 보이네요.
남영동 남산 같은데.
워커힐.
Kpopみたいな現代的な韓国よりもこういう韓国が好きだ。
@Apple mint ひねくれてんな
@@ああ-b5n8t
@Apple mint
<-------あいつ
根が曲がった7時方向出身の反日だけ叫ぶ、
脳髄がないエイ(全羅道出身)だからです。
ごめんなさい。理解してください。
남대문.
못살때지만 자살율 가장 낮고 조선족이 없던 시대!
한강변.
이때 삼성주식을 사놨으면..ㅋ
주식보다, 말죽거리에 쓸모없는
코너쪽 땅 백 평을 마련햇다면
든든한 부자 쯤으로 대우 받앗을 거.
ほぼ日本
日本は1950年代中半頃でしょう。
명동성당과 개성여고(X) ===> 계성여고(O)
저때가 그립다는 인간들 대가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훠얼씬 좋다
배만 부르면 사장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먹고 살기힘든 시기 였는데
미국에서 원조해주는 우유, 강냉이죽, 강냉이빵을 학교에서 나누어 주던 시절인데
절대로 저때가 그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