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서 게스트중...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찬성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면 그사람은 평생 연예게 퇴출 및 멀쩡한 조부모님까지 친일했다고 욕먹음..(물론 식민지수탈론을 주장한다면 아무 문제 없음.) 식민지 수탈론도 근대화론도, 둘다 일리있는 얘기이지만 한 쪽 얘기는 절대 할 수 없음. 이건 뭐 거의 팩트수준임.
식민지 수혜론이라고 공격하면서 팩트인 식민지 근대회론을 부정하고 입도 벙긋 못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현실임. 일제 시대의 근대화는 팩트이며, 결국 이 근대화는 거시적 관점에서 수탈을 위한 것이었지만, 입에 거품을 무는 측은 근대화론 자체를 부정하고 있음. 예를 들어, 새로 지어진 철도와 학교를 조선인이 이용하는 이익을 누렸다고 해서 이것을 수혜론이라 부른다면, 이는 근대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됨. 따라서 이 정도는 근대화론 자체이고, 이것이 수혜론(미화론)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에 더 나가서 정치색을 칠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음. 이영훈 교수도 어디까지나 근대화론 범주 안에서 논의를 전개하지, 정치색을 입혀 진지하게 수혜론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음.
@@유레카-b2l된 것의 목적은 빼고 과정만 집중하면 당연히 그런 얘기가 나오겠죠. 근데 목적이란게 빤히 있는데 과정이 아름다워보인다해서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긴 어렵죠. 솔직히 말하면 과정은 근대화가 맞으나 목적은 수탈이였기에 마냥 근대화로 부르기에는 타당치 않다는 의견으로 주로 얘기하는 편인데 이렇게 얘기하면 수혜를 입은 것이다 말하는 입장인 분들은 국뽕이라며 치부하던데…. 민족주의적인 얘기가 아니라 과정이 괜찮아 보인다해서 결론이 안좋아도 인정해야하는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만?
세계사가 필수과목이 아니라서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니까 게스트들 대본인지는 몰라도 리액션이 되게 한심스러워 보인다 해양국가가 가장 유리한 시기였던 제국주의시대에 한국만은 다르다는 담론의 민족주의사관이 얼마나 자존심을 채워주는지는 모르겠지만 팩트에 기반한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손바닥의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가 가장 역사에 죄를 짓는 행동이란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본이 조선 개발에 가장 많이 공을 들이고 돈을 엄청 많이 퍼부은게 바로 '철도 건설'인데, 35년동안 약 20억 5,000만엔을 투자해서 약 5,000km 이상의 철도를 한반도에 건설했습니다.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경전선, 전라선, 동해선, 경경선, 황해선, 평원선, 만포선, 혜산선, 백무선, 충북선, 경동선, 장항선, 경춘선, 평북선, 금강선전철, 신흥철도, 삼척철도, 남만철도 등 수많은 철도를 건설해서 한반도 각지를 연결했죠.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chulsookim6332 실질적 노비제 폐지는 6.25 전쟁이 끝나고 무상교육의 보편화로 국민의식이 높아지고, 경제개발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 시작된 후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정착하면서 부터임 그 이전 일제강점기까지도 머슴과 지주-소작농 관계등 사회 각층에 노비제도가 만연하고 있었음
일제 이전의 조선왕조 시절에는 인구 절대다수가 초등교육도 받지못했습니다. 1912년에 조선에 보통학교는 187개뿐이였고 추정학령인구중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였습니다. 조선병합 이후에 일제가 학교를 보급하려고 하는데 교사가 부족합니다. 조선 인구의 절대다수가 초등교육도 받지못했기에 남을 가르칠 조선인 교사도 턱없이 부족했던겁니다. 그래서 일제초기에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으로 넘어와서 조선인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당시 일본인 교사입장에서 조선은 말도 안통하는 시골이였기에 일제는 가봉, 사택료, 벽지수당, 조선어 장려수당을 따로 챙겨주면서 일본인 교사들을 조선으로 넘어오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일제는 조선 전국에 사범학교들을 보급하면서 조선인 교사들을 양성합니다. 1942년에 조선에 12개 사범학교가 있었고 6,233명의 조선인 재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배출된 조선인 교사들 덕분에 일제말기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전체 43%였고 남자의 경우는 60%에 육박했습니다. 1943년에 조선에 공립 보통학교만 3,717개였습니다. 해방이후 이승만의 의무교육이 가능했던것도 일제가 양성한 조선인 교사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산업화의 엔진을 만들었다는 박정희도 일제가 만든 대구사범학교 출신입니다.
@@박정현-w1b 1943년 일본어 문맹률 78% (제86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1945년 한글 문맹률 78% (해방 직후 미군의 간이조사)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1932년 15.8%에서 1943년 47.0%까지 급하게 상승하였다. 그 가운데 남자의 취학률이 훨씬 높아 1943년에는 무려 61.1%에 달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교육열에 자극되어 1946년부터 보통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216페이지, 일조각, 2016년.
@@삐용삐용-s8p일본이외 다른 선진국으로의 유학을 억제하였다. 그 결과 1931년 현재 한국인의 일본 유학생은 3,639명 이었는데 비해 미국 유학생은 493명에 불과하였다.註 035 1940년대의 ‘전시체제’하에서 일제는 한국인 학생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또 근로동원에 끌어들였다. 태평양전쟁 발발후 전시체제가 강화되자 일제는 ‘전시학도훈련실시요강’(1943.4), ‘학도전시동원체제확립요강’(1943.6). ‘학도군사교육요강 및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1943.3), ‘학도군사교육강화요강’(1945.2), ‘전시교육령 ’(1945.5) 등 일련의 법규를 만들었고 이를 근거로 ‘학도보국단’을 창설하여 학교에서의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동시에 학생의 ‘근로동원’을 강행하였다. 이것은 해방후 학도호국단의 창설(1949)과 이를 중심으로 한 학생군사교육의 전철로서 주목된다. 이상과 같은 악랄한 일제의 식민교육은 높은 문화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한국인의 저항에 부딪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인의 반일민족의식만을 고조시켜 역효과를 낸 면이 없지 않다.註 036 그러나 일제의 식민교육이 한국의 장기적 교육 ‘근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맞다고 본다. 좋은의도는 아니였지만 우리도 이익을 본거라서…인구증가 경제성장 한국인 사장도 존재 어쨌든 이익은 본거임. 나도 처음에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친일파라고 매도했지만 통계 데이터로 보니깐 내가 배운거하고 안마더러~서양식민지 지역하고 비교하면 알수가 있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은 자기들 영토확장 때문에 한반도 근대화 시킨거 맞음 그런데 일제 패망후 한반도는 득본게 없느냐? 일단 일본이 징병을 하기위해 실시한 주민등록법이 근대화가 되는데 큰도움이 됨 남한은 일본이 해놓은 도로정비,철도건설 정도의 해택만 봤지만 북한은 일본이 만들어놓은 발전소,무기공장들을 그대로 놔둠 그리고 진짜 일본덕분에 쉽게 해결된 골치아픈 문제가 해결됨 신분문제
득보긴 무슨 득을봐. 독립이후에 이렇다할 생산물이 없어서 한동안 gdp 집계도 못했음. 일본은 한반도를 군수창고로 이용하고 싶어했고, 1차산업말곤 산업이라 할만한게 없었음. 거기다 얼마안되는 공업시설도 거의 북쪽에 있었고 전부 625로 싹 밀렸음. 신분제는 이미 해체수순 밟고 있었고, 일본과 관계없이 근대화는 시간문제였음. 설마 일본 식민시절 없었음 아직도 갓쓰고 다녔을거라 믿는거임??
@@칼라브리아6.25로 싹 밀린 적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그건 아닌데....제대로 근대화 된건 6.25이후 부터라고 보면 됨. 일본 식민지로 근대화 됐다는건 수탈을 위해 살찌운거잖아. 그리고 잉여생산량은 결국 다 수탈해갔는데ㅋㅋ그 때 공장 만들고 한건 한국전쟁으로 다 박살났다고 보면 된다. 그 이후 제로부터(다들 그지니까 양반이니 상놈이니 그런게 없지.) 시작해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계급사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보면 돼.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 만을 목적으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은 전체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았지만 군비확장 비용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빠른 산업화로 인한 여러 문제로 인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주와 중국으로 심지어 동남아로 진출해서 시장과 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커다란 전쟁 시나리오에서 조선은 일종의 병참기지였다. 근대화 논리는 정말 단편에 불과한 것이며 조선의 근대화란 병참기지로서의 근대화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은 산업과 기술은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국민들의 전체적인 의식은 여전히 중세 봉건주의 수준이었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던 근대 계몽사상의 좋은 점은 놓치고 그것이 갖고 있던 맹점인 위계와 차별의식같은 도구적인 이성만 받아들였다. 그 일본에서 배운 근대화란 것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었던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과 다른 아시아인들에 대한 지독한 차별의식도 그대로 수입되고 내재화 되어서 지금도 일본을 부모처럼 숭상하고 스스로는 비하하는 인간들이 아직도 정치권과 역사계에서 설치고 있다.
@@로한강-o1s 그런 비교가 더 중요한 것을 못보게 하려는 속셈인겁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일본의 기술력은 분명히 굉장한 수준이었습니다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정신적인 가치라고 해봐야 낮은 수준입니다. 힘을 다하고 망해가는 나라와 이제 막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급격히 군국화되던 나라를 비교해가며 민족의 잠재력까지 애써 무시하면서 그들의 산업화가 뛰어났다는 이유로 그들의 침략마저 대단한 선의라고 갖고 있다는듯이 미화하고 식민지시대에 친일에 발벗고 나섰던 이들마저 굳이 옹호할 필요는 없는거지요. 당시 가장 친일을 했던 자들이 이전엔 중국에 가장 사대했던 기회주의자들이며 현대엔 미국에 가장 사대하는 자들이니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것은 애써 비하하고 힘이 쎄어 보이는 자들의 것은 비판정신 없이 숭상하는 자들인겁니다. 그러면서 다른 약해 보이는 민족에겐 가혹할 수 있는 이중성마저 가진 자들.
@@종달새-d7g철학과 법학의 나라 독일은 정신적 가치가 대단해서 2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 학살을 했습니까? ㅋㅋㅋㅋㅋㅋ 영국과 프랑스는 정신적 가치가 대단해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ㅋㅋㅋㅋㅋㅋ 일본과 비견되는 선진국의 정신 가치는 도대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겁니까?ㅋㅋㅋㅋㅋ 반일은 정신병입니다.
식민지 수혜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구분되어야 하는데요. 일본이 조선을 위해 근대화 시켜줘서 조선이 이득을 보았다가 수혜론, 조선이 이익을 봤건 손해를 봤건 어찌되었건 근대화 요소가 한반도에 발생되었다가 식민지 근대화론 인데요. 근대화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긍정적인것도 없이 그냥 현상만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너는 세계 대공황이후 전세계에서 조선만 타격입었다고 생각함...? 그리고 일본이 공출을 한거는 만주사변 이후가 아니라 국가총동원령이 나온 38년 부터임 그 이전까지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하고 일본에 수출하면서 농민들이 생활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하고 저축도 가능했으며 gdp gni 평균수명 인구수 신장 등등 막 증가하던 시기였음 ㅇㅇ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역시 조선만 마치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미국말고는 다 실업률 폭등하던 시절이다... 마지막 말은 구한말은 김일성 시대만도 그 한참 떨어진 수준이라는 걸 니 스스로 말하는 거고 ㅋㅋㅋ 그리고 근대화의 가치는 꼭 돈에 관련한 것만은 아니야 소유권, 근대 교육 의료 사법 건물, 상하수도, 통신망, 철도, 우체국 등등 종합적인 가치임. 현재 대한민국이 잘 사는 것은 일제시대의 수혜가 절대 팩트는 아니지만 구한말보다 일제시대때 생활수준, 근대화의 수준 등등이 올라간 것은 팩트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기업가가 기업하는 동기는 자신의 이익이다. 그 과정에서 근로자도 고생하지만 돈을 벌고 복지가 향상된다. 그걸 두고 기업가가 자신이 배불리 먹고 살려고 일으킨 사업이므로 악덕기업이고 착취다? 어떤 마을에 기업이 들어가면 마을전체의 복지가 향상된다. 행동의 의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세상일이 다 착취고 수탈이냐? 식민지 근대화는 그냥 팩트다. 그 과정에서 조선민중이 과거 임금 양반 나부랑이들 지배받을때보다 잘 살게 된것은 그냥 팩트!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soohyunkim4574 서양 의료체계로 인해 수명늘어난겁니다. 그예가 인구조사입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인구조사인 1885년 고종 22년 인구조사에서 대한민국 인구가 671만명으로 집계되고 조선총독부 첫 인구조사인 1911년 인구조사는 1380만명으로 인구가 집계됩니다. 6년만에 인구수 두배
도덕적문제를 두고 얘기를한다면 토론이된다,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는 명백한 팩트이고, 당시 조선은 한국성인남성 평균연령이 34세, 위생,사법절차라는게 전혀 없었고 식량도 너무나도 모자랐지만 해결해준건 조선총독부가 맞음... 조선인들 백신도맞춰주고 쌀생산도 폭발적증가를 시켰고 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줌, 뿐만아니라 한국의 통신도 이때부터 시작이다
쌀생산량이 늘어난거 보다 더 많이 착취를 해서.... 사실상 쌀소비량이 감소를 했는데..이걸 근대화를 해주었다고 보기에는 힘들죠 ㅋㅋ 그리고 그때당시 그어떤 나라도 위생관념이 지금처럼 없었음..서구권국가들도 마찬가지....그리고 조선이 사법이 왜없음? 에초에 조선ㄴ 법치주의국가를 목표로 500년을 운영을 했는데?? 하나도 맞는게 없잖아요 ㅋㅋ
@@김도엽-u5n 제로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user-rc4kq3wr8y [무역협회 우량장수회원] ㈜두산 - 120년 역사를 넘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도약 1946년 말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전 두산그룹 회장)이 두산상회(현, 두산글로넷)를 설립하고 운수업을 시작했다. 박두병은 미 군정청이 귀속재산으로 관리하던 쇼와기린(昭和麒麟)맥주의 관리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1947년 6월에 회사 상호를 동양맥주(주)로, 상표는 OB(Oriental Brewery)로 변경했다. 1952년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사들였다. 동양맥주는 1973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였고 1996년 2월 오비맥주(주)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이듬해 두산음료(주)를 흡수합병하였다.
당시 대만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기 보다는 거의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보장을 받았음. 산업, 교육 등 투자가 막대한 것은 사실임. 이것은 식민지에선 있을 수 없어요. 동남아나 인도에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원개발과 세금으로 무진장 수탈하였음 한국과 대만에서는 돈을 받고 일본에 수출하였음. 그래서 한국과 대만이 빠른 경제성장 가능했다고 봅니다. 불편해도 인정한 것은 인정해야합니다.
1. 일제강점기때 북한은 중공업 산업지구, 한국은 농업, 경공업지구로 이용 2. 6.25전쟁으로 전국적으로 다 뒤집어짐 (공장들도 마찬가지) 3. 경공업과 농업국가였던 한국이 중공업 산업지구였던 북한보다 더 잘살게 됨 그 이유는 제지, 피혁 등 님이 말하는 일제가 투자한 경공업때문이 아님을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음 즉,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건 그 누구도 아닌 한국 국민 덕분임.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Jerry Kim 식민지 근대화론은 말 그대로 식민지였던 조선을 일본이 근대화 시켰다는거지 뭔 산미증식계획이랑 위안부가 나오냐 ㅋㅋ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를 실패했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근대화 시켰다 이게 팩트라고;; 위안부,수탈 이런 문제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랑 관계가 없어요;;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5억 피해보상금 선물같은 소리
@@박정현-w1b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근데.. 저 당시에 한반도는 일본 땅 아님? 그리고 일부 상인들만 쌀 수출(저 사람은 이출이라 했던데)로 이득을 봤다고 하는데 지금 그쪽 세력들이 주장하는 거랑 똑같음ㅋㅋㅋ 맨날 대기업만 뭐라뭐라ㅋㅋ 일제가 조선인을 위해 개발했다는 건 당연히 말이 안되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는데 다 일본인이구만 비판해야할 건 1등 신민으로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했으면서 실상은 차별했다는 거 정도?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정현-w1b그건 자본유입으로 농지면적 확대에 따른 단순 지주비율이 상승한건지 절대면적이 상승한건지 봐야함. 비료를 사용하면 수확량이 4배 증가함. 그럼 생산성증가 없이 인구가 늘었다는건데 말이 안됨.일제가 비료공장 세우고 세계적인 농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데 조선만 그 혜택을 피해갔다는건가요?? 그냥 통계 짜집기에 의한 왜곡일 가능성이 있음.
@@박정현-w1b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에 대한 기여1 1. 산림 파괴로 인해 19세기동안 황폐화된 제언과 보를 수리하고 개축함. 1918년까지 1,937개의 제언과 보가 수축되어 5만 1,800정보에 달하는 토지에 물을 댈 수 있었다. 2. 수리조합 제도를 만들어 1918년까지 18개의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4만 2,300정보 크기의 토지에 물을 대었다. 3. 일본에서 조신력(早神力), 곡량도(穀良都), 다마금(多摩錦)이라는 3가지 우량 쌀품종을 도입하여 조선에 보급했음. 이들 품종은 비료를 적게 줘도 수확량을 많이 거둘 수 있던게 특징이었는데, 가난해서 비료를 많이 줄 수 없었던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도입한 것임. 조선의 재래품종이 토지 1정보당 8석 전후를 산출한데 반해, 이 3가지 품종은 토지 1정보당 12석 전후를 산출했음. 1912년 전체 토지 면적의 3%에 불과했던 신품종 농지를 1920년 전체 면적의 53%까지 보급시킴. 이후에도 우량품종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보급시켜 1935년에는 전체 농지 면적의 80%, 1940년에는 89%까지 보급시킴. 이로서 조선의 쌀 생산량이 일정한 증가를 보임. 4. 1927년 이후로 화학비료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1936년까지 농민들의 비료사용에서 화학비료의 비율을 40%까지 늘림.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31~139페이지. 2016년. 일조각
@@박정현-w1b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에 대한 기여 2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ㅋㅋㅋ ㅈㄴ어이없네 기술있고 자본있는사람이 더 이득보는게 자본주의고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ㅋㅋㅋㅋ 조선인도 능력 배짱있으면 충분히 자수성가할수 있었다. 삼성이 언제생겼냐 ㅋㅋ 소수의 일본인이 나라를 개발했으면 거기에 대한 이득은 사업주에게 돌아가는게 당연한거 아님? 더구나 20세기 전반인데? 같은 잣대로 지금 한국은 수탈국가가 아니라고 할수 있음? ㅋㅋㅋㅋㅋㅋ
정재정 교수님께..... 박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경남 창녕에 사는 촌노로 최종 학벌은 고졸입니다.. 학벌도 못난자가 감히 부탁 한 말씀 올리고자 하니 염치는 없지만 박사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라면 무시하셔도 불이익은 전혀 없다란 점 먼저 밝혀 드립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우리나라 역사가 일본에 의해 잘못 전해 지고 있다란 사실을 잘아고 있지만... 정작 알면 경천 동지 할수 있는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 역시도 잘못 전해지긴 했습니다만 그나마 신라 건국과 가야 건국설화에 얼추 맞추어져 있지만.... 김해김씨 밀양 박씨를 제외한 모든 성씨와의 차이가 1000년 이상씩이나 잘못되었다란 것을 아시는 분들은 별로 안계신 것 같습니다 본 내용을 접하시는 박사님의 성씨 역시 예외는 아니실 듯 합니다만... 그 이유로는 족보를 가지고 가문을 논하시는 집안 어른 마져도 1세가 30년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는 1200년 남짓하게 잘못 되었다란 것을 이씨조선을 통치한 전주이씨 조차 피해 가실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부분은 정보가 종이와 구전으로 전해지고 “역사란 강한자의 서사시”라는 옛 사학에 의한 모순으로 현재 인공지능이 직면 하고 있는 팁페이스를 몰아 낼려는 거대 LLM의 인공지능 역시도 현재의 역사학처럼 실증 사학 이나 유물론으로만 역사를 그대로 평가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때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좋은예로... 현재 중국은 거대 LLM의 학습 방식인 데이터 개수로 응답하는 인공지능의 팁페이크를 이용하여 수많은 데이터를 집어넣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고구려 건국 년도를 팁페이크 하여 신라 건국이 먼저라는 설로써 동북공정을 합리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실제 질문 참조) 잘 아시다싶이 현재는 인공지능이 AGI도 안된 상태라.... 데이터로만 학습을 하고 있지만 팁페이크를 없애고 공정한 대답을 하기 위해 “멀티모달” 이라는.... 텍스터는 물론 음성 그림 심지어는 영상 까지 한꺼번에 학습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이라는 것을 박사님께서는 더 잘 아실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욱 발달하여 AGI를 넘어 ASI시대가 되어.... 실증사학과 유물론은 물론 당시 서민들의 풍습과 식생활에 거주 형태등 역사학계의 멀티 모달의 혁명은 어쩌면 애견된 일 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고인돌 등 옛조상들의 신앙 형태로 남아 있는 무덤과 종교 의례에 준하는 삼신오제사상의 역사성 등등을 합친 역사관이 인공지능에 의해 실현 된다면 100여년전 일본인들이 기록한 현재의 역사가 살아남을수가 있는지를 박사님의 명철하신 생각으로 짐작해 보셔야 할때가 아니신가? 저 ...촌노는 이렇게 한 말씀을 올리게 된것입니다... 옛말에 국초 국말이라는,,, “영웅은 시대가 지어내는것이지 아무리 똑똑하자라도 천운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란 용어가 있잖습니까?? 해서 저는 지금 이때가 박사님께서 우리나라 역사 바로 찾기의 양심선언으로 국민의 영웅으로 등극하실때인데 혹...놓치시고는 있지 않으신가 의심해 봅니다... 어느나라든 그 나라 바른 역사의 회복은 국민 모두의 환호로써 영웅의 반열에 들것이라는 점 믿어 의심치 마시옵소서... 물론 저의 이런 말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박사님께서 적어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서를 마음대로 열람 하실수 있는 권한을 갇추셔야 천운을 받으실수 있다란점...확실히 주장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마침내 저는 일제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 했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해방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푸대접을 받았다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의 학자중에서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나라는 올바른 역사를 찾을것이라고 주장하신분도 계신 것으로 압니다... 일본인들은 태어날때부터 열악한 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전혀 반대인...강한자에게는 약하고 약한자에게는 강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의 흐름은 우리나라 국력이 일본을 압도 한다란 설이 파다 한 것으로 압니다... 한마디로 강한자에게 순종하는 일본인의 특성상.... 박사님의 명철하시고 뛰어난 처세술로 우리나라 역사서 열람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찾겠다는데 반대의 명분을 충분히 상쇄 시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 주는 것이 중국의 대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이권에도 불편하게 작용 하는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 공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저는 박사님께...잃어버린 우리나라 역사를 찾아 주십사 하고 이렇게 졸필이나마 부탁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우리의 조상들께서 피땀으로 지키고 사우디등 외국 노동으로 국력을 키워 도시 마다 아름다운 공원을 세워 참 살기 좋은 나라를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주하는 유체꽃이 아름다운 창녕남지의 낙동강 주변길 곳곳에 설치된 편의 시설은 저녁 8시만 되면 외국인들의 데이터 장소로 변모해 우리후손들의 웃음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본인의 호강보다는 후손의 앞날을 위해 목숨을 마다 하지 않으시는 전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고 숭고한 정신을 가진 민족 아닙니까??? 박사님의 노고로 우리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전할수 있는 사실보다 더 영광스럽고 훌륭한 일이 또 있을까 생각 합니다... 그리고 회손이 쉬웠든 종이와 구전 과는 달리 한번 기록되면 지우기가 기록보다 더 힘든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에 의해 밝혀지는 우리나라 역사보다는 박사님께서 커가는 아드님이나 손자를 위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았다 란 한가지 만으로 자손만대의 영광이라고 저는 생각하며 하늘서는... 왜? 저에게는 이런 절호의 찬스를 주시지 않았음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건강 하시옵고 가정의 행복을 소원드리며 긴글 마치겠습니다 안 녕 히
우리가 어디 동남아국가 하나 식민지 삼았다고 상상해보자. 물자 수탈하려는데 도로가 너무 불편해서 우리가 도로깔고 신나게 빼먹었는데 나중에보니까 그것때메 근대화됐다고 지들끼리 고마워하고있으면 우리가볼때 얼마나 웃기고 한심할까ㅋㅋㅋㅋㅋㅋ "에휴 저 정도 능지수준이니까 식민지통치 당했지 우리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겐 먹혔겠네, 죄책감가질필요 없겠다"하지않겠음? 일본이 볼때 딱 그런꼴이겠다
@@service7755 조선은 성리학중심의 중농주의 정책을 펴며 상공업을 철저히 억제하는 정책을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혁에 성공하는등 마르크스 유물론적사관에 비춰봤을때 조선과 일본의 발전의 차이때문에 빚어진게 아닌 그냥 능지때문이라구요?? 혹시 뛰어난인종이 있고 열등한인종이 있다는 우생학같은거 믿으시나요? 꼭2차대전 히틀러랑 똑같은생각을하고계신거같네요
@@박정현-w1b 갑오개혁은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을 조선 조정이 거부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강제로 친일개화파 내각을 세워 실시한 개혁입니다. 신분 철폐·조세 개혁… 동학농민혁명,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다 갑오개혁 정권은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정권이었고 동학농민군은 이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자는 충돌했고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동학혁명과 박성빈-박정희-박근혜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갑오개혁은 우리 스스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무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기철의 아웃룩] '125년 한국철도사', 自主콤플렉스가 빚은 코미디 철도국이 설치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청일전쟁 와중에 경복궁을 점령한 뒤 조선에 강요한 내정 개혁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자주(自主)' 운운하기엔 부적절하다.
@@chulsookim6332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으로,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의 경우에는 2,198명 중 양반이 겨우 57명(2.7%)인데 비하여 평민이 2,141명(97.3%)라는 것이다
@@jwlee7752 총동원령은 일본에도 실시됐고 오히려 본토가 더 심했죠. 당시 내선일체론에 의하면 조선은 일본이고 당연히 조선도 총동원령의 대상입니다. 정작 조선 말기에는 군인들조차 배를 곯았는데 일제 패망 직전에 와서야 서민들이 배를 곯았으니 어느 쪽이 나았는지는...
상식적으로 소련이 먹음 그럼 미국은? 일본이 식민안했으니깐 위치상 미군이 일본에 강제로 주둔할수가 없음 영국은? 이미 더이상 식민화는 못했을 시기 식민지가 넘처 흘러 관리도 못함 소련이 통치 하다가 김일성같은놈 생기면 그놈한테 정권주고 부려 먹었겠지 그럼 조선은 네오 북한 됐을듯
일본이 없었어도 조선후기에는 점차 자본주의로 가고 있었습니다. 현재 ceo의 역할을 하는 덕대라던지 생산품을 직접 공장처럼 수공업하여 판매하는 선대제와 같은 자본주의 성격을 띄는 역할이 등장합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과 같은 서구열강들의 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와중에 일본의 강화도조약 을사늑약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점령을 당하면서 일본만을 위한 나라가 되어 모든 좋은 것들은 강제 수탈이 되었습니다
팩트:조선후기까지도 조선인의70%는 이름도 없는 노비였음 자본주의?ㅋㅋ 그 30%에 상인들과 윗분들만 자본주의였겠지 ㅎㅎ 어디 유럽 상인처럼 상상하나본데 나라의 차이가 있지.. 조선인의 대다수는 그 흔한 교육조차 못받고 살았고 차별과 수탈은 일본이 아니라 자국에서 시행했다 참고로 개도국도 자본주의 많음 ㅎㅎ 일본이 끌어올려준건 명확한 사실임
@@평화주의자-k4h 70%가 노비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망언에 불과. 가장 높은 것도 17세기 왜란 호란 전쟁으로 혼란스럽고 살기 힘들어 양반조차도 자진해서 노비가 된 경우가 많은 43%가 한계 오히러 후기때는 영조이후 한자릿수 %. 근대화를 했음에도 자국민을 자폭 폭탄으로 써먹으며 미국에 개기다가 핵 맞고 바베큐 마냥 구워진 것들 빨기는 ㅉㅉ
@@평화주의자-k4h 팩트 : 조선인들 교육 수준은 꽤 높았음. 좀 잘사는 집안은 과거 시험 안봐도 서당에 다닐정도, 임진왜란 때 순왜자들 조차 일본인들이 무식하고 글도 못읽는다며 일본한테 손절친 이유도 조선에서 굉장히 글을 읽는 사람이 많으며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임, 또 노비 비율은 대략 30% 정도로 추산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분제가 동요하여 수많은 노비들이 해방됨. 심지어 순조 때 공노비 해방 갑오개혁 노비 해방과 같이 애초에 노비는 조선이 자체적으로 없앰. 일제와 1도 관련없음. 심지어 동양에서도 수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이었고 전통적으로 화약무기 강국이었음. 솔까 위 상층부만 괜찮았어도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음.
학자가 아니라 무당이네요. 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인데, 객관적인 진실을 부인하다니요. 평가는 달리 달리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왜곡하는 건 실험데이터를 조작하는 범죄행위와 다르지 않죠.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의 자세는 아니죠. 저런 사람이 교수를 하다니요.
역사는 fact로 기술되어야 지 감정이 개입되면 안된다. 마치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줬다. 는 말처럼 감정이 들어가면 안된다. 근대화는 또한 도와주는 도움받는게 아니라, 일어나고 발생될 뿐이다. 일제시대에 근대화가 있었다. 사실이다. 일제시대때 근대화된 시설과 도량, 과학기술, 자본주의 여러 이념들이 도입되었던건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신분제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일본을 위하든 한국을 위하든 개발됐다는 게 중요한거 아닌가? 아이폰이 개발되며 스마트 시대가 열린거잖아. 애플을 위해 스마트 폰을 만들어 기술을 발전시킨거다 vs 소비지를 위해 스마트폰을 만들어 기술을 발전시킨거다. 뭔 상관이야. 기술이 발달했으니 지금처럼 스마트 시대에 사는 거지. 대기업이 자기들 돈 벌려고 물건 만들지만 한국 gdp는 올라가는 거잖아. 그때의 조선인들도 그 덕에 잘먹고 잘산거잖아.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박정현-w1b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논리도 없고 팩트도 없지 말고 현실을 보세요 조선은 뭐 하나 잘한 게 있습니까? 일본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조선이 못한 거죠 얼마나 못했으면 일반 대다수의 민중들이 독립운동을 안하고 40년 내내 은행에 저축하면서 자기 직장생활하고 공장 다니고 미래를 설계를 했겠습니까 조선애서는 불가능했던 서민경제가 들어섰던 겁니다
조선 노비-> 사유재산 있음. 노비 수-> 뻥튀기 아떤 기록엔 조선 군사 100만이란기록 있습니다 노비가 국과장급 인사간 사례있음. 총노비수 사례->거짓 조선 총인구수 부터 찾아보세요. 기록된게 있습니까? 고통받는삶? 구한말한정 일제 근대화론->거짓 문맹 80% 신분제해방-> 1984 갑오개혁 폐지, 20세기 부라쿠민은 뭐지 철도,병원-> 영국도 한다. 인구수증가-> 전쟁 후 베이비붐 잘살았더.->키가 줄어둠 독립운동가 양반->지배층 싫다면 친일파싫다타령해야함 착취하단 지배층 다 *친일파됨* 경제 지원-> 티바트가서 경제지원한 중국만세하면 장상일까? 고종이 너라 팔음->국새가 무슨 서람 이름넣냐? 이토히로부미 독립 원함->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가 그 중 하나로 사실상 식민지로 간주된다. 가령 영국의 번국이었던 마이소르 왕국 또한 결론적으로는 식민지로 간주되며,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응우옌 왕조 또한 마찬가지다
일진이 쉬는시간마다 때리고 매점 심부름시켜서 뛰어다니느라 심폐지구력이 올라갔다면 심폐지구력의 상승은 일진때문이다 이게 일진이 의도한게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시킨일이며 그로인해 대인기피증등 다른 악영향도 믾았지만 심폐지구력 면에서는 상승을 하였다. 이게 어디가 일진을 미화하고 편을드는 내용인가 이에 대한 반박은 일진이 얼마나 나쁜녀석이고 어떤 의도로 시켰는지, 또 당하는 당사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가 아니라 심부름과 심폐지구력 상승의 연관성이 없다는 근거지료나 일진이 없었어도 그 시간에 운동을 하여 심폐지구력이 상승했을거라는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_inmm 일본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부풀려서 수탈해 갔다는거 자체가 거짓말인데 뭔ㅋㅋㅋㅋ 일본이 신기술 들여와가지고 생산량이 늘어나서 수출량이 천만석 가까이 늘어난건 알음?? 당장 신문기사만 봐도 동아일보 1931년 6월 16일자 "조선米이입제 절대反대"만 봐도 상대적으로 품질은 떨어지나 값이 싼 조선쌀이 유입되면서 일본쌀의 가격이 떨어져서 일본 여론에서 조선쌀 유입 중단하라고 한건 알음??
@@uzujytalk2023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uzujytalk2023 뉴라이트식 경제가 아니고, '과학'의 원리입니다. 살기가 힘들어지면 인구는 늘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고 나면 살기가 힘들어지죠. 기본적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인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1600만명에 더해 늘어난 900만명을 먹여살릴 식량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2500만명이 먹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사고하시길 바랍니다. 식량이 없는데 인구가 어떻게 늘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유지가 되나요? ㅋㅋㅋㅋㅋ 그리고 일제가 수탈만 했다면 식량이 줄어들어거나 최소 정체되었어야죠 ㅋㅋㅋㅋ 그럼 인구가 증가할 수가 없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학적 사고를 못하게 만드는 반일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이해가 됩니다. 저도 고딩 때는 그랬습니다.
@@Lala_song 당시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필요한가요?? 사실상 중국의 속국에 백성들 삶은 개판이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혁명을 성공시킬 힘마저 없었던게 현실인데요 그러니 전쟁한번 못치르고 일본한테 나라를 홀랑 뺏기죠 나라뺏기는 상황에서도 전쟁한번 못치루는 국가가 무슨 자주국입니까
세상에 어떤 제국주의 나라가 자기 식민지들을 위해서 자기 돈 써가면서 근대화에 도움이 되겠냐 아이고... 징검다리로 쓰게 하려고 자기네들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거지... 이거말고 다른 영상에 보니까 조선어도 가르쳤다는데 반발을 막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어르는 면이 있어야지 의심 안하고 계속 노예로 있을 거 아니냐?? 한국에 어떤 이상한 놈들이 근대화로 발전했다 이딴 소리 하고 있어 아직도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들어왔는데요? ㅋㅋㅋㅋㅋ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SHK-pr3eb 압력이 들어와도 본인이 싫으면 저항해야죠.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을 가진 황제가 동의를 하여 병합이 되었습니다. 님이 운영하는 회사가 여러 방면에서 경쟁 기업의 심한 압박을 받고 있고, 경쟁 기업이 님의 회사를 넘기라는 압박을 받는다면 님은 어쩌시겠습니까? 신라는 왜 가야와 백제와 고구려의 주권을 빼앗았나요? ㅋㅋㅋㅋ
@@삐용삐용-s8p 이름뿐인 황젠데 저항을 어떻게 함? 국가로서의 모든 권한은 이미 다 뺏겼고 실권 하나도 없는데 순종 자기가 버틴다 한들 뭐 어떻게 할수나 있었을거 같음? 별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종~순종은 일제가 주도해서 남긴거라 진위성이 의심되서 유네스코도 등재 못됐는데 조칙을 아예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SHK-pr3eb 이름뿐인 황제? ㅋㅋㅋㅋ 대한제국의 황제를 논하면서 '대한국국제'도 공부 안 하셨어요? ㅋㅋㅋㅋ 이거 보고 반성 좀 하세요 ㅋㅋㅋㅋㅋ 대한국국제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온바 자주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신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이미 행한 것과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할지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시나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치행리(自治行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의 수여 혹은 체탈을 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유약국(有約國)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이상과 같이 국제는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알리고, 정체가 전제정치임과 황제가 막강한 제권(帝權)을 가진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제정, 선포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북한하고 평화통일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회가 안정화되어야 하니 법체계 완비, 도로건설, 종자개량, 토지측량, 상하수도 건설, 위생사업, 댐, 항만, 수력발전(전기공급), 산림사업, 학교건립, 문화재 발굴조사, 병원개설 등등을 해야 되겠지요... 6.25 끝나고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70년대 후반에야 겨우 역전됩니다. 아시다시피 농업국가라고 하는데 북한이 훨씬 척박한 동네 아닌가요. 근데 왜 북한이 잘 살았을까요... 흔이들 얘기하는 통일비용은 누가 내야 하나요... 북한에 돈이 있을까요.... 남한사람 세금으로 해야합니다. 일본도 그 당시 일본사람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은 고무신도 못 만드는 나라이구요. 외국인 견문기를 보면 정말 처참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국대학의 조센징" 이라는 책에 그 당시 멸시 받으면서 일본에서 공부한 인재들에 대한 책도 나와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식민지 사람들 다루기 쉬울텐데 왜 유학가게 했을까요... 친일사람 앞잡이 만들려고.... 무조건 친일이다. 이렇게 접근하시면 더 이상 할 말 없네요.
@@user-zn7nq998 일제 덕분? 문맹률 80% 일제유산 많이 있다고 우리나라는 뭡니까?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이거나 쳐 보세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서울대학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박정현-w1b 구한말처럼 되는게 정상이란다. 국뽕의 합리화는 정말 오진다. ㅋㅋㅋㅋ 세계사를 배워도 이런 ㅂ ㅅ같은 나라는 없는데 어느 나라가 자기 국민 죽여달라고 다른나라를 쳐부르는 나라가 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은 조선을 수탈한 적이 없습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에 투자하여 베트남 GDP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제품을 베트남에서 생산해서 엄청난 이득을 누리고 있죠. 삼성전자가 베트남을 수탈하고 있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혜택을 삼성전자만 보고 있는 건가요? ㅋㅋㅋㅋ 오히려 개발도상국들이 기를 쓰고 글로벌 대기업을 유치하려고 하지 않나요? ㅋㅋㅋㅋㅋ
@Sad Frog 전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수탈을 위한 경제성장과 근대화는 없었으며, 그에 따른 수탈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일제시대에 일제가 행한 근대화 정책과 사회 인프라 건설, 일본 기업 및 일본 자본의 투자로 인한 경제성장의 혜택은 일본인과 조선인 둘 다 누렸습니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의 운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이 삼성과 베트남인 둘 다인 것과 마찬가지의 경제원리입니다.
@Sad Frog 일본은 조선인들이 원치 않는데 강압적으로 일본 자본과 일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자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조선인들이 환영할만한 일이지요. 그리고 기업의 이익에 따라 투자를 하고 말고가 결정되는 것이지, 조선총독부가 기업에게 투자를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체제였다면 진작에 기업이 망했겠지요 ㅋㅋㅋㅋㅋ 태평양전쟁 국가총동원체제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노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인 노동자가 원하는 직장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하면 일을 하는 것이지, 조선총독부가 특정 기업에 특정 기간 동안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6년 간의 전시국가총동원체제와 그 외 29년의 일제 통치 기간을 헷깔리신 것 아닌가요? ㅎㅎㅎ 그리고 국가가 유사시에 국민을 징용하고 국민의 재산을 징발하는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선진강대국들도 해온 것이며, 오히려 일본은 선진 열강의 체제를 모방한 후발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70여년이 넘게 자국 국민을 징용해오고 있고, 대한민국 동원법에서는 유사시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징발할 수 있다고 하는 법적 근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반일종족주의의 공교육과 반일종족주의의 가정교육, 사회교육 때문이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님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인구가 2배 늘어난건 사실 아닙니다 통계의 오류죠 1919년 최초 인구조사 한것은 조선식으로 인구조사 한것이고 1926년 인구 조사 한것은 서구식으로 한것입니다 이거 가지고 논쟁 많이 했는데 알고 보면 1919년 인구조사는 일본 경찰이 한것인데, 조선식으로 한것입니다 최진사댁 앞집 옆집 뒷집 이런식으로 당시 조선은 주소가 없었습니다 후자쪽은 주소를 만들고 인구조사를 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늘어난겁니다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청나라 같은 경우 인구가 2배가 증가했습니다
@@umdarkssa6001 일제 직전에 하려고 했던 광무개혁 조차 황제권을 인정하는 왕권강화하는 개혁인데,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근대화 못합니다. 결국 서구식 입헌군주국 체재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조선정부가 무너지는 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걸 실현한 게 일본 정부이고요
일본제국을 위한거라고 게속 그러는데... 당시 조선은 일본으로 합병된 상태였음... 오끼나와랑 비슷한 경우로 그냥 일본국 그 자체였던거임. 제주도의 탐라국이 조선에 흡수되었듯이 조선도 일본에 흡수되었던 상태랑 걍 같은거임. 심지어 한국이랑 핏줄이 가장 가까운 민족이 일본인임 세상 어느 나라가 식민지 출신 민족이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고 장교가되어 일본 본토인 부하를 거느릴수가 있음? 이건 일제시대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걸 증명함
@@ap6924 일본은 원래 죠몬 야요이 아이누 류큐 등 다민족 국가이고 거기에 조선이 추가된것뿐, 더해서 일본 왕실부터가 백제 핏줄임 님이 말하는 차별은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한테는 있었을지도 모르나 상놈은 신분제가 존재하던 양반들과의 차별보다 나았고, 합병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걍 일본인이라 봐야함
@@yojo2726 일제시대동안 인구가 1300만->2600만 으로 급증했고 평균수명 또한 24->45로 올랐다 1%도 안되던 등교율은 정확히는 기억안나지만 50%가 넘었다. 옛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다 이렇게 말했다. ''조선엔 오물이 넘쳐났고 백성에 절반이 노예며 세금을 값지 않으면 매맞았고 못값고 죽으면 이웃에게 물려받았다'' 이것만 해도 답나온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한것은 맞아도 조선보다 몇배는 낫다
일제시대 식민지 근대화의 비판도 공과가 있듯이 사실을 근거로 설명 잘해야 합니다. 거짓을 살짝 넣어서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경제성장 무지하게 했고. 쌀도 일본에 돈을 받고 수출한겁니다. 그러면 수탈이 아니죠. 일단 굶어 죽는 사람이 사라졌고 노예가 해방된 것과 교육, 도로. 공장 건설에 일본 보다 더 투자를 했습니다. 물론 일본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는 무조건 지옥이고 모든것을 뺏앗긴 암흑의 시대라고 하면 요즘은 안먹힙니다. 합리적으로 사실에 근거해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user-tm8jh5vp5r[김영민 연재]한국학의 신은 숨어 있지 않다 어느덧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라났다. 영어권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꾸준히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해외 한국학 연구의 주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 카터 에커트, 존 던컨은 모두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이영훈과 미야지마 히로시가 소농사회론을 제기했다. 그들에 따르면, 경영형 부농이 아니라 소농이 조선 후기 사회를 특징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학계의 비주류가 된 것은 아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후속 세대를 비슷하게 재생산하는 한, 신은 여전히 신으로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내재적 발전론이 문제가 있다는 풍문이 퍼져나가면서, 한국학의 신은 더 이상 숨은 신이 아니게끔 됐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럼 해방이 안됐음??? 일제 시대 보다 좋았냐??? 이씨조선의 수탈을 수백년 동안 받아오지 않았냐? 조선의 왕에 충성하나 일본 천황에 충성하나... 일반 백성의 삶은 뭐가 크게 달라졌겠나! 그리고 교육 의식... 당연히 일본 정신을 가르쳤겠지만...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보통 교육이 이뤄진건 일제 시대 아니냐? 머 수탈 더 잘하려고... 수탈할 인력 뽑으려고 교육 했다고 치자... 근데... 그때 교육받고... 잘 배운사람들은 중산층 상류층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고... 해방이 되고 난후... 동족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으르로 수십 수백만이 죽거나 다쳤는데... 지금도 북에 동포는 조선시대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데... 차라리 일본에 합병되어 지금 일본 사람으로 이땅에 살았으면... 북에 2천만은 지금 우리만큼 혹은 그이상 잘먹고 잘살텐데... 그리고...박정희때... 일본 돈받아가지고... 포항제철 만들고 경부고속도로 만들고 잘썻잖아... 그게 산업기반 되고... 일본 총리도 몇명이 몇번에 걸쳐 식민지 통치에 사과했음 됐지... 툭함 사과해라 또 사과해라.... 보상해라... 돈 내놔라.... 참나 어의가 없네... 위안후 할매들 살아있을때 한국정부에서라도 톨비나ㅏ 포철 배당금으로 돈이라도 주던가.... 다 죽어가는데... 일본한테 또 보상해라.. 어쩌라.... 쯔쯔 니들이 일본 일반 국민이면 개 빡치지 않겠니??? 무슨 깡패니???? 도데체 맘에 드는 나라가 어디야?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다 싫타고.. 쌈닭이야? 한주먹 거리도 안됨서.... 쯔쯔... 자중한자... 겸손하자...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편향되고 외곡된 역사 가르친다. 좀 생각 좀 하자
수백년? 말기 뿐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미루-r2e 머리가 있음 자기생각이라는걸 해야지... 일본이나 중국이나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교육 자체가 쇠뇌다. 너 북한 우상화 봄 답답하지? 너도 똑같이 쇠뇌된거야! 역사교육이란게 연도외우는게 아니고 자기 생각 가지고 비판하는거란다. 중국 북한 일본은 역사왜곡이고? 우리만 참교육이겠냐? 생각을 좀 해 뇌가있음.
@@오리쭌-p6t80퍼 사라진 적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오리쭌-p6t일제는 35년동안 약 20억 5,000만엔을 투자해서 약 5,000km 이상의 철도를 한반도에 건설했습니다.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경전선, 전라선, 동해선, 경경선, 황해선, 평원선, 만포선, 혜산선, 백무선, 충북선, 경동선, 장항선, 경춘선, 평북선, 금강선전철, 신흥철도, 삼척철도, 남만철도 등 수많은 철도를 건설해서 한반도 각지를 연결했습니다. 이거 다 6.25전쟁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90년대에 시골 철도만 봐도 일제가 만든 간이역들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외에 도로, 교량, 저수지, 항만, 발전소, 공장 등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
@@오리쭌-p6t식목일 특징 => 조선총독부가 제정함.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매년 4월 3일을 식목일로 제정함. 그리고 1907년~1942년의 35년 동안 236만 정보의 산야에 약 82억 1,500만 그루의 나무를 식재함. 그리고 미군정 때 식목일이 4월 5일로 변경된 후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온 거임. .
무슨 말장난을 하고 있음? 식민지 근대화론은 말그대로 식민지배를 통해 우리나라가 근대화했다는 건데 그게 조선을 위해서인가 일본을 위해서인가는 중요하지 않음. 식민지 근대화론은 그냥 식민지 근대화론임. 식민지로 근대화되었다. 딱 이 것 뿐임.
맞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건 식민지 수혜론임.
이게 맞죠
625때 다박살난거아님?
말장난은 무식한 니가 하고 있는거지.근대화론의 핵심은 그래서 일본의 지배가 조선에 이로웠는지, 결국 일제의 지배가 정당했는지 여부인데?멍청하니까 본말을 전도해서 헛소리하네.
@@유주나-i2c 사람들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퉁쳐서 말해서 싸우는 거 같은데 잘 보면 식민지수탈론, 식민지수혜론, 식민지근대성론 등등 조금씩 다른 개념을 쓰고 있음
한국에 있던 일본인 자산들 전부 한국정부가 흡수했음
한국이 북한한테 통일할 때도 똑같이 할거다
북한도 차별한다고 욕 하겠지 🤬
값싼 노동력이라고 하는데 한국인하고 똑같은 급여 안줬다고 또 북한에서 똑같이 폭동 일어나겠지
역잘알 통찰력 굳
저기서 게스트중...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찬성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면 그사람은 평생 연예게 퇴출 및 멀쩡한 조부모님까지 친일했다고 욕먹음..(물론 식민지수탈론을 주장한다면 아무 문제 없음.) 식민지 수탈론도 근대화론도, 둘다 일리있는 얘기이지만 한 쪽 얘기는 절대 할 수 없음. 이건 뭐 거의 팩트수준임.
@밀탄후리도만 한국거주 일본인 생각?
@l 서두부터 학문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일본이 싫고 식민지배는 부당하다 생각하지만,, 식민지시대때 우리가 경제성장이 되었다는 것에는 입도 뻥긋하면 안되는 안타까운 풍토를 말하고 있는겁니다..
식민지 수혜론이라고 공격하면서 팩트인 식민지 근대회론을 부정하고 입도 벙긋 못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현실임.
일제 시대의 근대화는 팩트이며, 결국 이 근대화는 거시적 관점에서 수탈을 위한 것이었지만, 입에 거품을 무는 측은 근대화론 자체를 부정하고 있음.
예를 들어, 새로 지어진 철도와 학교를 조선인이 이용하는 이익을 누렸다고 해서 이것을 수혜론이라 부른다면, 이는 근대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됨.
따라서 이 정도는 근대화론 자체이고, 이것이 수혜론(미화론)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에 더 나가서 정치색을 칠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음.
이영훈 교수도 어디까지나 근대화론 범주 안에서 논의를 전개하지, 정치색을 입혀 진지하게 수혜론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음.
@@유레카-b2l된 것의 목적은 빼고 과정만 집중하면 당연히 그런 얘기가 나오겠죠. 근데 목적이란게 빤히 있는데 과정이 아름다워보인다해서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하긴 어렵죠.
솔직히 말하면 과정은 근대화가 맞으나 목적은 수탈이였기에 마냥 근대화로 부르기에는 타당치 않다는 의견으로 주로 얘기하는 편인데 이렇게 얘기하면 수혜를 입은 것이다 말하는 입장인 분들은 국뽕이라며 치부하던데….
민족주의적인 얘기가 아니라 과정이 괜찮아 보인다해서 결론이 안좋아도 인정해야하는건 좀 아니라고 봅니다만?
@@HongBlues 결과가 수탈이였는데 어떻게 조선인들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법에 보호를 받게 되었을까요?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려고 한것입니다. 수탈해서 뽑아 먹으려고 한게 아니죠.
근대 라는 말이 일본이 만든 일본어에요..........modern을 번역했던 일본인이 만들어낸 단어에요...
세계사가 필수과목이 아니라서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니까 게스트들 대본인지는 몰라도 리액션이 되게 한심스러워 보인다 해양국가가 가장 유리한 시기였던 제국주의시대에 한국만은 다르다는 담론의 민족주의사관이 얼마나 자존심을 채워주는지는 모르겠지만 팩트에 기반한 사실을 전달하지 않고 손바닥의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가 가장 역사에 죄를 짓는 행동이란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령 미국의 노예 해방을 예를들면
흙인들을 노예로 부려 먹는것보다 그들을 일정한 교육을 시켜서 산업근로자로 쓰는게 더효율적이다고 판단해서 노예해방을 햇다면
노예 해방도 결국은 자본가들의 탐욕에서 비롯된것이니까 노예해방을통해산업이 발전햇다는것도 받아들일수
없다는 논리네요
흑인도 아니고 흙인은 도대체 뭐야 흙 속성이야?
바보 같은 소리하네
노예 해방은 인도주의적 성취가 주목적이지 경제만으로 설명되는게 아니다
@@유주나-i2c 링컨도 실제로 노예해방을 한게 다른목적을 위해서죠 남북전쟁에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팩트가 아닌걸 팩트인거 처럼 호도하지 말긔
@@유주나-i2c 순진한 소리 하시네. 미국이 중국이나 북한의 인권을 말하는 것이 인권 자체를 위한 거로 보이지?
그렇다고 해서 허구헌날 부정부패에 구시대적인 사회환경에만 찌들었던 그당시 삼류국가 조선이 할말할 자격은 없지 ㅋ 피지배 국가의 어줍짢은 자기합리화일뿐..
일본이 조선 개발에 가장 많이 공을 들이고 돈을 엄청 많이 퍼부은게 바로 '철도 건설'인데,
35년동안 약 20억 5,000만엔을 투자해서 약 5,000km 이상의 철도를 한반도에 건설했습니다.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경전선, 전라선, 동해선, 경경선, 황해선, 평원선, 만포선, 혜산선, 백무선, 충북선, 경동선, 장항선, 경춘선, 평북선, 금강선전철, 신흥철도, 삼척철도, 남만철도 등 수많은 철도를 건설해서 한반도 각지를 연결했죠.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팩트는 일제시대 때 괴로웠던 조선인들은?
조선 귀족층이 었다는 사실
백성 입장에선 일본인에게 착취당하나 조선 귀족층에 착취당하나 별반 차이 없다는것
오히려 노비들은 조선시대보다 일제시대가 더 좋았을수도 있다는점
노비제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그리고 친일파에서 양반이라면 누구겠는데
실제 1인당 예금이 100배나늘었어요.
예금이란 일정한 계약에 의하여 은행이나 우체국 따위에 돈을 맡기는 일. *은행,우체국*
갑오개혁으로 노비제 폐지했습니다
@@chulsookim6332 실질적 노비제 폐지는 6.25 전쟁이 끝나고 무상교육의 보편화로 국민의식이 높아지고, 경제개발을 통해 본격적인 산업화 시작된 후 자본주의와 능력주의가 정착하면서 부터임
그 이전 일제강점기까지도 머슴과 지주-소작농 관계등 사회 각층에 노비제도가 만연하고 있었음
애초에 자원만 빼먹고 그대로 버리던 유럽의 식민지와는 다르게, 조선을 일본에 흡수하려고 했으니까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것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영국-아일랜드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음
맞말인듯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종국에는 동화정책이었죠.
근거는?
근거는?
@@박정현-w1b 한국의 현 역사 교과서가 근거임. 저거다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임.
나는 역사책에 왜 조선이 주체적으로 근대화실패했는지 반성하는 문구한문장 필요하다 생각한다.
그거 아니더라도 일본은 한국먹엇을거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서 자체적으로 못 한거임 고종은 신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했음
@@박정민-c6y 동의 상당히 어렵네요 문물 몇개 받는다고 그게 개혁인가요?
@@현재를잘살아가자 고종때 시작을 한건데 일본이 더 번창하기전에 홀라당 조선을 먹어서 스스로 못 한거임 고종때 이미 전기 사용해고 전화기도 있었음
@@박정민-c6y 조선후기만해도 이름없는 조선인이70%이상 전화를 사용? ㅋㅋ 오케이..그렇다 하자
일제 이전의 조선왕조 시절에는 인구 절대다수가 초등교육도 받지못했습니다. 1912년에 조선에 보통학교는 187개뿐이였고 추정학령인구중에 보통학교 취학률은 1.8%였습니다.
조선병합 이후에 일제가 학교를 보급하려고 하는데 교사가 부족합니다. 조선 인구의 절대다수가 초등교육도 받지못했기에 남을 가르칠 조선인 교사도 턱없이 부족했던겁니다.
그래서 일제초기에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으로 넘어와서 조선인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당시 일본인 교사입장에서 조선은 말도 안통하는 시골이였기에 일제는 가봉, 사택료, 벽지수당, 조선어 장려수당을 따로 챙겨주면서 일본인 교사들을 조선으로 넘어오게 합니다.
그와 동시에 일제는 조선 전국에 사범학교들을 보급하면서 조선인 교사들을 양성합니다. 1942년에 조선에 12개 사범학교가 있었고 6,233명의 조선인 재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배출된 조선인 교사들 덕분에 일제말기의 국민학교 취학률은 전체 43%였고 남자의 경우는 60%에 육박했습니다. 1943년에 조선에 공립 보통학교만 3,717개였습니다.
해방이후 이승만의 의무교육이 가능했던것도 일제가 양성한 조선인 교사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산업화의 엔진을 만들었다는 박정희도 일제가 만든 대구사범학교 출신입니다.
문맹률 80%입니다. 문맹퇴치 실패부터 근대화는 무슨 이공학 12명이고
1940년에는 391개교가 되어 30년 동안 82%나 되는 사립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
@@박정현-w1b 1943년 일본어 문맹률 78% (제86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1945년 한글 문맹률 78% (해방 직후 미군의 간이조사)
조선인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1932년 15.8%에서 1943년 47.0%까지 급하게 상승하였다. 그 가운데 남자의 취학률이 훨씬 높아 1943년에는 무려 61.1%에 달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교육열에 자극되어 1946년부터 보통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216페이지, 일조각, 2016년.
@@삐용삐용-s8p일본이외 다른 선진국으로의 유학을 억제하였다. 그 결과 1931년 현재 한국인의 일본 유학생은 3,639명 이었는데 비해 미국 유학생은 493명에 불과하였다.註 035
1940년대의 ‘전시체제’하에서 일제는 한국인 학생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또 근로동원에 끌어들였다. 태평양전쟁 발발후 전시체제가 강화되자 일제는 ‘전시학도훈련실시요강’(1943.4), ‘학도전시동원체제확립요강’(1943.6). ‘학도군사교육요강 및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1943.3), ‘학도군사교육강화요강’(1945.2), ‘전시교육령 ’(1945.5) 등 일련의 법규를 만들었고 이를 근거로 ‘학도보국단’을 창설하여 학교에서의 군사훈련을 실시함과 동시에 학생의 ‘근로동원’을 강행하였다. 이것은 해방후 학도호국단의 창설(1949)과 이를 중심으로 한 학생군사교육의 전철로서 주목된다.
이상과 같은 악랄한 일제의 식민교육은 높은 문화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을 가진 한국인의 저항에 부딪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인의 반일민족의식만을 고조시켜 역효과를 낸 면이 없지 않다.註 036 그러나 일제의 식민교육이 한국의 장기적 교육 ‘근대화’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맞다고 본다. 좋은의도는 아니였지만 우리도 이익을 본거라서…인구증가 경제성장 한국인 사장도 존재 어쨌든 이익은 본거임. 나도 처음에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친일파라고 매도했지만 통계 데이터로 보니깐 내가 배운거하고 안마더러~서양식민지 지역하고 비교하면 알수가 있음
정확히 말하면 식민지 착취를 위한 제도 발전에 의해 간접 영향을 받았던거지 그게 식근론에서 주장하는 식민지배가 근본적이고 필연적이며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건 아니란 의미.
그래서 감사한가요?
@@kiev._Russian_Federation 그래서 감사한가? 그건 아니지 그래도 속이지는 말자이지…그래야 똑같은 실수 안하지
@@kiev._Russian_Federation 요…
근대화는 사실이긴 한데 지금 우리나라가 잘사는 이유가 일제의 근대화 덕분이라는건 개소리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은 자기들 영토확장 때문에 한반도 근대화 시킨거 맞음
그런데 일제 패망후 한반도는 득본게 없느냐?
일단 일본이 징병을 하기위해 실시한 주민등록법이 근대화가 되는데 큰도움이 됨
남한은 일본이 해놓은 도로정비,철도건설 정도의 해택만 봤지만
북한은 일본이 만들어놓은 발전소,무기공장들을 그대로 놔둠
그리고 진짜 일본덕분에 쉽게 해결된 골치아픈 문제가 해결됨
신분문제
득보긴 무슨 득을봐. 독립이후에 이렇다할 생산물이 없어서 한동안 gdp 집계도 못했음. 일본은 한반도를 군수창고로 이용하고 싶어했고, 1차산업말곤 산업이라 할만한게 없었음. 거기다 얼마안되는 공업시설도 거의 북쪽에 있었고 전부 625로 싹 밀렸음. 신분제는 이미 해체수순 밟고 있었고, 일본과 관계없이 근대화는 시간문제였음. 설마 일본 식민시절 없었음 아직도 갓쓰고 다녔을거라 믿는거임??
@@칼라브리아 신분제 없에는거 일본의 강압으로 없어진거임
신분제랑 과거시험 두가지 없에라고 압박당해서 같이없어진거 딱히 공부안해도 드라마에서도 나오는데 자존심 상한다고 사실을 부정하는건 역사를 왜곡임
@@칼라브리아 일제시대 없었어도 신분제는 없어졌을거다 라는말은 그럴수도있음 근데 자연스럽게 없어졌을거라는말은 긍정못함
양반들이 신분제 유지시키려고 북한처럼 쇄국정책같은 걸로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신분제 유지시키려 했을것임
그리고 어떻게든 세상 정보는 들어갔을거고 거기서 시민투쟁 같은게 일어나고 그걸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분제가 사라진다면 사라지겠는데 일제시대 때문에 그과정이 건너뛴건 불행중 다행인게 사실임
@@이명준-r4b 어차피 반상경계도 흐릿해져서 유명무실해져가던 신분제였음. 족보 사고팔고 개판이던거 기억안남?? 이미 돈많은 놈이 장땡인 시절로 돌입했었음. 거기다 공화국도 아니고 대한제국이나 일본제국이나 별반 차이있음??
@@칼라브리아6.25로 싹 밀린 적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조선이 망하는 과정에서 눈이 넓어지고, 개혁이라도 해보려고 한 것 아닌가?
그 전까지 오직 중국! 만 보다가 국제 정세, 기술 다 뒤쳐지고, 경제도 다 박살나잖아.
지금 북한이랑 조선말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함.
아니 이게 중요한가? ㅋㅋ
일단 식민지로 인해서 근대화 된건 사실이잖아.
그건 아닌데....제대로 근대화 된건 6.25이후 부터라고 보면 됨. 일본 식민지로 근대화 됐다는건 수탈을 위해 살찌운거잖아. 그리고 잉여생산량은 결국 다 수탈해갔는데ㅋㅋ그 때 공장 만들고 한건 한국전쟁으로 다 박살났다고 보면 된다. 그 이후 제로부터(다들 그지니까 양반이니 상놈이니 그런게 없지.) 시작해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계급사회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보면 돼.
@@chj125 식민지로서 근대화출발하고 사회기반은 한국전쟁으로 다쳐날라갔어도 근대화한 지식인들은 그대로였죠 그들로부터 출발한게 대한민국입니다
졸라 결과론 적이네 ㅋㅋ 식민지 안되었으면 분단도 안되고 근대화 되었을 수도 있는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ㅋ
@@ANGEL-st9xr 식민지 안되었으면, 아마 지금쯤 중국소수민족이였을껄, 아니면 소비에트연방 ㅎㅎ
@@ANGEL-st9xr 하지만 그 당시 조선에 국력으로 결국 식민지가 될수밖에 없는 운명이죠
미국도 네덜란드 이탈리아 아프리카 극소수 국가
식민지 삼았고 영국도 인도나 베트남을 식민지로
잠았죠 일본이 아니였어도 중국이나 소련한테 먹힐운명임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 만을 목적으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다. 당시 일본은 전체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았지만 군비확장 비용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빠른 산업화로 인한 여러 문제로 인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만주와 중국으로 심지어 동남아로 진출해서 시장과 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커다란 전쟁 시나리오에서 조선은 일종의 병참기지였다. 근대화 논리는 정말 단편에 불과한 것이며 조선의 근대화란 병참기지로서의 근대화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은 산업과 기술은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국민들의 전체적인 의식은 여전히 중세 봉건주의 수준이었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던 근대 계몽사상의 좋은 점은 놓치고 그것이 갖고 있던 맹점인 위계와 차별의식같은 도구적인 이성만 받아들였다. 그 일본에서 배운 근대화란 것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었던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과 다른 아시아인들에 대한 지독한 차별의식도 그대로 수입되고 내재화 되어서 지금도 일본을 부모처럼 숭상하고 스스로는 비하하는 인간들이 아직도 정치권과 역사계에서 설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국민들 수준이 중세 봉건주의 수준이면 그당시 조선인들은 신석기 수준 이겠네요 잘보고갑니다 파이팅!
@@로한강-o1s 그런 비교가 더 중요한 것을 못보게 하려는 속셈인겁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일본의 기술력은 분명히 굉장한 수준이었습니다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정신적인 가치라고 해봐야 낮은 수준입니다. 힘을 다하고 망해가는 나라와 이제 막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급격히 군국화되던 나라를 비교해가며 민족의 잠재력까지 애써 무시하면서 그들의 산업화가 뛰어났다는 이유로 그들의 침략마저 대단한 선의라고 갖고 있다는듯이 미화하고 식민지시대에 친일에 발벗고 나섰던 이들마저 굳이 옹호할 필요는 없는거지요. 당시 가장 친일을 했던 자들이 이전엔 중국에 가장 사대했던 기회주의자들이며 현대엔 미국에 가장 사대하는 자들이니 모두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것은 애써 비하하고 힘이 쎄어 보이는 자들의 것은 비판정신 없이 숭상하는 자들인겁니다. 그러면서 다른 약해 보이는 민족에겐 가혹할 수 있는 이중성마저 가진 자들.
@@종달새-d7g철학과 법학의 나라 독일은 정신적 가치가 대단해서 2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 학살을 했습니까? ㅋㅋㅋㅋㅋㅋ
영국과 프랑스는 정신적 가치가 대단해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ㅋㅋㅋㅋㅋㅋ
일본과 비견되는 선진국의 정신 가치는 도대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겁니까?ㅋㅋㅋㅋㅋ
반일은 정신병입니다.
그러니까 광개토도 침략하지말고 가만히있지 ㅉㅉㅉ
@@김성진-w8s 국뽕의 예를 들어서 당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할 순 없지요. 근대 왜 굳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그리 옹호하려 하는지 참 모를일입니다. 대체 얻는게 무엇인지.
식민지 수혜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구분되어야 하는데요.
일본이 조선을 위해 근대화 시켜줘서 조선이 이득을 보았다가 수혜론,
조선이 이익을 봤건 손해를 봤건 어찌되었건 근대화 요소가 한반도에 발생되었다가 식민지 근대화론 인데요. 근대화라는 단어에는 부정적 긍정적인것도 없이 그냥 현상만 있습니다.
이걸 구분 못하는 순간 논쟁에 참여시켜서도 안됨.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이태헌-i7n투표권도 박탈 ㄱㄱ
@@박정현-w1b 너는 세계 대공황이후 전세계에서 조선만 타격입었다고 생각함...? 그리고 일본이 공출을 한거는 만주사변 이후가 아니라 국가총동원령이 나온 38년 부터임 그 이전까지는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하고 일본에 수출하면서 농민들이 생활수준이 향상되기 시작하고 저축도 가능했으며 gdp gni 평균수명 인구수 신장 등등 막 증가하던 시기였음 ㅇㅇ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역시 조선만 마치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미국말고는 다 실업률 폭등하던 시절이다... 마지막 말은 구한말은 김일성 시대만도 그 한참 떨어진 수준이라는 걸 니 스스로 말하는 거고 ㅋㅋㅋ 그리고 근대화의 가치는 꼭 돈에 관련한 것만은 아니야 소유권, 근대 교육 의료 사법 건물, 상하수도, 통신망, 철도, 우체국 등등 종합적인 가치임. 현재 대한민국이 잘 사는 것은 일제시대의 수혜가 절대 팩트는 아니지만 구한말보다 일제시대때 생활수준, 근대화의 수준 등등이 올라간 것은 팩트
당연히 일본을 위해서 식민지화 했겠지 그래서 근대화가 된것도 사실인데 근대화론이 맞는거지 그럼 말장난하는것도 아니고
그 근대화론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나왔으니까 하는 소리겠지.역시 멍청하면 맥락을 모르고 헛소리한다.
누가 한국을 위해서 근대화시켜줬다고 생각함? ㅋㅋ 븨응신임?ㅋㅋㅋ 결과를 놓고 봐야지 멍청한새갸 ㅋㅋ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기업가가 기업하는 동기는 자신의 이익이다. 그 과정에서 근로자도 고생하지만 돈을 벌고 복지가 향상된다. 그걸 두고 기업가가 자신이 배불리 먹고 살려고 일으킨 사업이므로 악덕기업이고 착취다? 어떤 마을에 기업이 들어가면 마을전체의 복지가 향상된다. 행동의 의도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세상일이 다 착취고 수탈이냐?
식민지 근대화는 그냥 팩트다. 그 과정에서 조선민중이 과거 임금 양반 나부랑이들 지배받을때보다 잘 살게 된것은 그냥 팩트!
그런데 그 직원을 강제로 끌어와 노동을 착취하는 경우라면? 그것도 근로자를 위한 것이라고 해야할까요?
@@SoliDeoGloria-ec6zx
세계2차대전 때 강제동원 말고는 강제는 없었습니다.
독일인이 유대인 잡아족치는거마냥
조선인도 일본인 잡아족칠려고하는데
누가누구보고 괴벨스라는건지
무논리는 딱봐도보이는데 ㅋㅋ
그 당시 세계 최빈국 조선을 수탈할게있다고 생각함? 일본 본토에서도 조선에 시설 설치해주고 해봐야 국가 예산의 엄청난부분을 부어야되는거라 반대가 엄청심했다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뜩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 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
근대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근대화는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박정현-w1b 공부를 좀 똑바로하세요. 노예? 노예에 수탈당해서 평균수명이 그렇게 많이 올라가요? 그 당시 평균신장과 체중이 올라간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조작한건가요? 공부를 할거면 제대로 똑바로 하고 오세요.
@@soohyunkim4574 서양 의료체계로 인해 수명늘어난겁니다.
그예가 인구조사입니다.
조선시대 마지막 인구조사인 1885년 고종 22년 인구조사에서 대한민국 인구가 671만명으로 집계되고 조선총독부 첫 인구조사인 1911년 인구조사는 1380만명으로 인구가 집계됩니다. 6년만에 인구수 두배
@@박정현-w1b 노예한테 서양의료체계 수혜가 돌아가나요? 그게 노예인가요? 앞뒤가 맞는말을 좀 하시길. 수탈당하는데 평균 수명은 늘고 평균신장이 느는 노예가 있나요?
@@soohyunkim4574 알고보니 의료와 상하수도. 하지만 진짜 노예있었습니다.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연좌제 없애주고 신분제 없애준 것만해도 500년간 아무 진보 없던 한국에서는 커다란 진보였는데 ㅋㅋ
신분제는 식민지 되기 전에 없어짐.
갑오 개혁과 대한제국 성립사를 봐주세요..
신분제는 1차동학농민 운동이후 전주화약체결로 없어질 예정이었음 텐진조약 빌미로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하고 군국기무처 설치로 그 공을 뺏어간거일뿐
결국 교정청->군국기무처로 바뀌면서 여러 근대적 조항 추가됬다지만 결국 자강개혁은 아예 좌절되면서 최후로 관민공동회에서 고종깽판으로 정점을 찍으며 나라 좆망
김옥균 전봉준 윤치호 3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똥볼 3번찬 고종이 개 레전드긴하지
러시아 중국 일본 셋 중 하나한텐 무조건 먹히는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일본한테 먹힌게 우리로썬 제일 낫긴 했음
이유는 굳이 설명안해도 다들 알듯
우리나라는 당시에 청나라의 조공국이었고, 청나라 상황도 막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쪽에 붙었을 거 같아요.
왜냐하면, 고종이 권력 유지를 원했 때문에요.
도덕적문제를 두고 얘기를한다면 토론이된다,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는 명백한 팩트이고, 당시 조선은 한국성인남성 평균연령이 34세, 위생,사법절차라는게 전혀 없었고 식량도 너무나도 모자랐지만 해결해준건 조선총독부가 맞음... 조선인들 백신도맞춰주고 쌀생산도 폭발적증가를 시켰고 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줌, 뿐만아니라 한국의 통신도 이때부터 시작이다
쌀생산량이 늘어난거 보다 더 많이 착취를 해서.... 사실상 쌀소비량이 감소를 했는데..이걸 근대화를 해주었다고 보기에는 힘들죠 ㅋㅋ 그리고 그때당시 그어떤 나라도 위생관념이 지금처럼 없었음..서구권국가들도 마찬가지....그리고 조선이 사법이 왜없음? 에초에 조선ㄴ 법치주의국가를 목표로 500년을 운영을 했는데?? 하나도 맞는게 없잖아요 ㅋㅋ
@@imnoww ? 조선도 나름 법치주의 국가로 운영이 되었다고 했는데..왠 판사..변호사가 나옴...그건 근현대에 인권개념이 나오면서 나온 직업 임...
@@송밀리터리 조선이 나름 어떻게 어떤식으로 법치주의로 운영이 된 나라죠?
@@찢렌예거 뭐 나름 유교의 법도를 따르는 법치주의 국가를 추구했죠... 물론 조선후기에는 변질되고 부패되긴하지만..
@@찢렌예거 정도전이 세운 국가체계 보면 조선은 굉장히 법치적으로 운영된 국가임
후기에 변질되어서 그렇지
법치가 없었으면 당파싸움 하지도 못했어
한반도를 500년간 중세시대 수준으로 멈춰놓은 국가주제 ㅋㅋ
무슨 일본탓을하고있냐 ㅋㅋ
지금같이 국제사회로 침략전쟁이 범죄가 되는시절도아니고
그냥 강대국이 약소국 합병하면서 힘을 키웠던 시기인데 ㅋㅋ
열강들이 잘했다는것도 아니지만 그당시는 그게 당연한거ㅋ
일본제국의 이득을 위한 조선의 근대화는 인정해도,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아니다...
맞음 6.25 끝나고는 경제가 다시 거의 제로에서 시작했다고 보면 됨
@@김도엽-u5n 제로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삐용삐용-s8p 크.... 이거 출저는 어케되요? 혼자 찾으신건가요 ㄷㄷ
@@user-rc4kq3wr8y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돌던 거를 뉴스로 검색해서 팩트 체킹하면서 수정했습니다.
@@user-rc4kq3wr8y [무역협회 우량장수회원] ㈜두산 - 120년 역사를 넘어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도약
1946년 말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전 두산그룹 회장)이 두산상회(현, 두산글로넷)를 설립하고 운수업을 시작했다. 박두병은 미 군정청이 귀속재산으로 관리하던 쇼와기린(昭和麒麟)맥주의 관리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1947년 6월에 회사 상호를 동양맥주(주)로, 상표는 OB(Oriental Brewery)로 변경했다. 1952년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사들였다. 동양맥주는 1973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였고 1996년 2월 오비맥주(주)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이듬해 두산음료(주)를 흡수합병하였다.
당시 대만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기 보다는 거의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보장을 받았음. 산업, 교육 등 투자가 막대한 것은 사실임. 이것은 식민지에선 있을 수 없어요.
동남아나 인도에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원개발과 세금으로 무진장 수탈하였음
한국과 대만에서는 돈을 받고 일본에 수출하였음.
그래서 한국과 대만이 빠른 경제성장 가능했다고 봅니다.
불편해도 인정한 것은 인정해야합니다.
@@과학이야기-d3o 대등한데 탄광 위안부 전쟁터 끌려가노 . 도망가다 잡히면 ㄱ쳐.맏듯쳐.맏고 아직도 급여 못받아서 소송중이노
1. 일제강점기때 북한은 중공업 산업지구, 한국은 농업, 경공업지구로 이용
2. 6.25전쟁으로 전국적으로 다 뒤집어짐 (공장들도 마찬가지)
3. 경공업과 농업국가였던 한국이 중공업 산업지구였던 북한보다 더 잘살게 됨
그 이유는 제지, 피혁 등 님이 말하는 일제가 투자한 경공업때문이 아님을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음
즉,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건 그 누구도 아닌 한국 국민 덕분임.
식민지가 아니라 신영토였으니까. 그 변화를 이끌어낸게 바로 3.1운동의 결과이고.
3.1운동의 역사적 핵심 포인트임. 문제는 역사시간에 그런건 안갈켜줌 ㅋ
정치적인 의도를 제하고 봐야함..
차별이 있었고 목적이 뭐였든 그지역이 지배이전보다 근대화가 되었냐가 쟁점이라서
일본이 총동원령 내리기 이전 한반도인의 경제 의료 교육 모든면에서 구한말보다 좋아진게 팩트라서..
물론 최소 조선시대보다는 살기좋았겠지 일제시대가 좋은분도 있을수도 있고 그런데 또 반대로 어느나라나 자국의 이익이 우선인데 수탈론측면이 아예 없었고 무조건 축복된 시대라는것도 문제고 근대화론+수탈론 둘다 믿고있음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역사에서 도덕성을 따지는 머저리들이 있네.. 도덕적으로 옳지않으면 있는 역사가없게 되나?
니 눈에는 나치같은 놈들도 도덕적으로 따지는게 머저리 짓이냐?
@@ANGEL-st9xr 바보냐?역사학하고 도덕윤리하고는 다른영역이야 ㅋㅋ 그리고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옹호론도 아니고. 역사적사실을 말하는건데 왜 이걸 부정하는지 모르겠네
@@ANGEL-st9xr 이기면 승자고 지면 패배임 만약 나치가 전쟁에서 이겼으면 미국도 함부로 못함 패배했으니까 나치가 망한거지
@@Lemon-rh6tn 이게 정답임 식근론은 사실을 말하는것 뿐임 우린 수탈지배를 당했는데 나라가 발전했다
@Jerry Kim 식민지 근대화론은 말 그대로 식민지였던 조선을 일본이 근대화 시켰다는거지 뭔 산미증식계획이랑 위안부가 나오냐 ㅋㅋ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를 실패했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면서 근대화 시켰다 이게 팩트라고;;
위안부,수탈 이런 문제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랑 관계가 없어요;;
두들겨도 맞았지만 사람구실도 못하던 짐승국가를 일본이 개몽 시켜준건 맞지
계몽입니다 님이나 계몽하시길;
무식하네 ㅋㅋ계몽을 개몽이라하네 ㅋㅋㅋ초등학교 안 나왔어??ㅋㅋㅋ저건 무식을 넘어 뇌가 없는 수준인데??ㅋㅋ
@@jjdouble1595 ㄹㅇㅋㅋ
구한말과 비교햇을때
어느쪽이 더많이 개인에 자유를 허용햇는가를 생각해보세요
@@이제임스딘 일제요
분단까지 됐는데, 당장 분단비 등이 더 나가겠다 ㅋ
근대화론이 맞는거지요 어쩔수없습니다. 사실을 받아들여야지 보고싶은대로만 보면안되지요 그시대의 상황을 이해해야지
당시 일제시절 북쪽지역에 철강 산업시설이 많이 들어있었음. 남쪽지역은 농업, 단순 1차적 산업시설 밖에 없었고, 그래서 6.25 전쟁 이후 일제 시대때 남겨진 저런 시설이 있어서 70년대까지는 북한이 좀 더 잘살았다는 주장이 있음.
기껏 강의 듣고 한다는 소리가 이런 멍청한 소리 ㅉㅉ
@@유주나-i2c 자기 자신에게 따끔한 일침도 남길줄 아는 인간.... 이 사람 멋있다!!
북한이 실패한게 뭐가 됩니까?
식민지 수탈론은 있을 수가 없다. 구한말 조선시대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을 수탈 한다는 말인가
@whynoja 1965년에 일본의 5억달러 선물..
@@imnoww돈 주고 고용하는데 뭔 인적자원 획득 ㅋㅋㅋ 토지도 빼앗은 적이 없는데 ㅋㅋㅋㅋ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5억 피해보상금 선물같은 소리
@@박정현-w1b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박정현-w1b 신일철, 포스코에 특허소송 '어제의 동지가...'
지난 1970년대초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지휘 아래 포스코가 포항제철소 1·2기 고로(용광로)를 지을 당시 신일본제철은 기술을 이전하고 제철소 건설과 설비 구매 등을 적극 도왔다.
허술하기 그지없는 강의 수준.ㅋㅋ
저런 논리가 지금도 이어져서 "경제개발 과실은 기득권이 가져간다" 요따구..
아프리카 미개 원시인급으로 살았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근대문명을 전수해주었습니다.
참고로 近代 modern time 文明 civilization 근대 문명이란 단어 자체가 일본이 만들어낸 와세칸고 즉 일본어입니다.
한일 학자들 함께 쓴 논문집 보니 정교수와 일본인 교수와의 토론 반토론이 있는데.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곳에서 같은 말 되풀이하기 보다, 일본 학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을 좀 갖추었으면 합니다. 정말 우물안에 있다는 느낌이....
뭔 논문임?
주장바꾸면 이랬다저랬다한다고 욕할거면서
논문 제목좀 얘기해주세요
맞설수없으니깐 한국이 날조한느거죠
당당하면 갖고 와바
근데.. 저 당시에 한반도는 일본 땅 아님? 그리고 일부 상인들만 쌀 수출(저 사람은 이출이라 했던데)로 이득을 봤다고 하는데 지금 그쪽 세력들이 주장하는 거랑 똑같음ㅋㅋㅋ 맨날 대기업만 뭐라뭐라ㅋㅋ 일제가 조선인을 위해 개발했다는 건 당연히 말이 안되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는데 다 일본인이구만 비판해야할 건 1등 신민으로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했으면서 실상은 차별했다는 거 정도?
조선 산업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농업 분야는 전근대적인 지주제가 해소되기보다는 더 강화되었다. 조선 농가의 소작지 면적은 1918년 50.4%, 1926년 50.7%였다. 소작지 면적은 이후 급상승해서 1932년에는 56%로 높아졌으며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자작농은 20년대 이후로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농업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 생산량의 증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박정현-w1b그건 자본유입으로 농지면적 확대에 따른 단순 지주비율이 상승한건지 절대면적이 상승한건지 봐야함. 비료를 사용하면 수확량이 4배 증가함. 그럼 생산성증가 없이 인구가 늘었다는건데 말이 안됨.일제가 비료공장 세우고 세계적인 농업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인데 조선만 그 혜택을 피해갔다는건가요?? 그냥 통계 짜집기에 의한 왜곡일 가능성이 있음.
@@화성가즈아-x3k그럼 베이비붐은 뭡니까? 심지어 조선에서 전쟁일어났던데.
@@박정현-w1b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에 대한 기여1
1. 산림 파괴로 인해 19세기동안 황폐화된 제언과 보를 수리하고 개축함.
1918년까지 1,937개의 제언과 보가 수축되어 5만 1,800정보에 달하는 토지에 물을 댈 수 있었다.
2. 수리조합 제도를 만들어 1918년까지 18개의 수리조합을 설립하여, 4만 2,300정보 크기의 토지에 물을 대었다.
3. 일본에서 조신력(早神力), 곡량도(穀良都), 다마금(多摩錦)이라는 3가지 우량 쌀품종을 도입하여 조선에 보급했음.
이들 품종은 비료를 적게 줘도 수확량을 많이 거둘 수 있던게 특징이었는데, 가난해서 비료를 많이 줄 수 없었던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여 도입한 것임. 조선의 재래품종이 토지 1정보당 8석 전후를 산출한데 반해, 이 3가지 품종은 토지 1정보당 12석 전후를 산출했음.
1912년 전체 토지 면적의 3%에 불과했던 신품종 농지를 1920년 전체 면적의 53%까지 보급시킴. 이후에도 우량품종을 지속적으로 도입하고 보급시켜 1935년에는 전체 농지 면적의 80%, 1940년에는 89%까지 보급시킴. 이로서 조선의 쌀 생산량이 일정한 증가를 보임.
4. 1927년 이후로 화학비료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1936년까지 농민들의 비료사용에서 화학비료의 비율을 40%까지 늘림.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31~139페이지. 2016년. 일조각
@@박정현-w1b 조선총독부의 조선 농업에 대한 기여 2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ㅋㅋㅋ ㅈㄴ어이없네
기술있고 자본있는사람이 더 이득보는게 자본주의고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ㅋㅋㅋㅋ 조선인도 능력 배짱있으면 충분히 자수성가할수 있었다. 삼성이 언제생겼냐 ㅋㅋ
소수의 일본인이 나라를 개발했으면 거기에 대한 이득은 사업주에게 돌아가는게 당연한거 아님? 더구나 20세기 전반인데? 같은 잣대로 지금 한국은 수탈국가가 아니라고 할수 있음? ㅋㅋㅋㅋㅋㅋ
저가 하고싶은 얘기를 똑같이 하셨네요.
저 따위로 생각하면 지금의 삼성, 현대도 우리를 수탈하는 겁니다.
정재정 교수님께.....
박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경남 창녕에 사는 촌노로 최종 학벌은 고졸입니다..
학벌도 못난자가 감히 부탁 한 말씀 올리고자 하니 염치는 없지만
박사님께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라면 무시하셔도 불이익은 전혀 없다란 점 먼저 밝혀 드립니다..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우리나라 역사가 일본에 의해 잘못 전해 지고 있다란 사실을 잘아고 있지만...
정작 알면 경천 동지 할수 있는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 역시도 잘못 전해지긴 했습니다만 그나마 신라 건국과 가야 건국설화에 얼추 맞추어져 있지만....
김해김씨 밀양 박씨를 제외한 모든 성씨와의 차이가 1000년 이상씩이나 잘못되었다란 것을 아시는 분들은 별로 안계신 것 같습니다
본 내용을 접하시는 박사님의 성씨 역시 예외는 아니실 듯 합니다만...
그 이유로는 족보를 가지고 가문을 논하시는 집안 어른 마져도 1세가 30년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는 1200년 남짓하게 잘못 되었다란 것을 이씨조선을 통치한 전주이씨 조차 피해 가실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부분은 정보가 종이와 구전으로 전해지고 “역사란 강한자의 서사시”라는 옛 사학에 의한 모순으로
현재 인공지능이 직면 하고 있는 팁페이스를 몰아 낼려는 거대 LLM의 인공지능 역시도 현재의 역사학처럼 실증 사학 이나 유물론으로만 역사를 그대로 평가 할지를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때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좋은예로...
현재 중국은 거대 LLM의 학습 방식인 데이터 개수로 응답하는 인공지능의
팁페이크를 이용하여 수많은 데이터를 집어넣어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고구려 건국 년도를 팁페이크 하여 신라 건국이 먼저라는 설로써
동북공정을 합리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실제 질문 참조)
잘 아시다싶이 현재는 인공지능이 AGI도 안된 상태라....
데이터로만 학습을 하고 있지만 팁페이크를 없애고 공정한 대답을 하기 위해 “멀티모달” 이라는.... 텍스터는 물론 음성 그림 심지어는 영상 까지 한꺼번에 학습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이라는 것을 박사님께서는 더 잘 아실것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더욱 발달하여 AGI를 넘어 ASI시대가 되어....
실증사학과 유물론은 물론 당시 서민들의 풍습과 식생활에 거주 형태등 역사학계의 멀티 모달의 혁명은 어쩌면 애견된 일 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고인돌 등 옛조상들의 신앙 형태로 남아 있는 무덤과 종교 의례에 준하는 삼신오제사상의 역사성 등등을 합친 역사관이 인공지능에 의해 실현 된다면
100여년전 일본인들이 기록한 현재의 역사가 살아남을수가 있는지를 박사님의 명철하신 생각으로 짐작해 보셔야 할때가 아니신가?
저 ...촌노는 이렇게 한 말씀을 올리게 된것입니다...
옛말에 국초 국말이라는,,, “영웅은 시대가 지어내는것이지 아무리 똑똑하자라도 천운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란 용어가 있잖습니까??
해서 저는 지금 이때가 박사님께서 우리나라 역사 바로 찾기의 양심선언으로 국민의 영웅으로 등극하실때인데 혹...놓치시고는 있지 않으신가 의심해 봅니다...
어느나라든 그 나라 바른 역사의 회복은 국민 모두의 환호로써 영웅의 반열에 들것이라는 점 믿어 의심치 마시옵소서...
물론 저의 이런 말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박사님께서 적어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역사서를 마음대로 열람 하실수 있는 권한을 갇추셔야 천운을 받으실수 있다란점...확실히 주장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마침내 저는 일제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 했든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해방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푸대접을 받았다란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의 학자중에서는 그들이 우리나라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나라는 올바른 역사를 찾을것이라고 주장하신분도 계신 것으로 압니다...
일본인들은 태어날때부터 열악한 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전혀 반대인...강한자에게는 약하고 약한자에게는 강한 민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의 흐름은 우리나라 국력이 일본을 압도 한다란 설이 파다 한 것으로 압니다...
한마디로 강한자에게 순종하는 일본인의 특성상....
박사님의 명철하시고 뛰어난 처세술로 우리나라 역사서 열람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찾겠다는데 반대의 명분을 충분히 상쇄 시킬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도와 주는 것이 중국의 대국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이권에도 불편하게 작용 하는것이 바로 중국의 동북 공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저는 박사님께...잃어버린 우리나라 역사를 찾아 주십사 하고 이렇게 졸필이나마 부탁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으로 우리의 조상들께서 피땀으로 지키고 사우디등 외국 노동으로 국력을 키워 도시 마다 아름다운 공원을 세워 참 살기 좋은 나라를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거주하는 유체꽃이 아름다운 창녕남지의 낙동강 주변길 곳곳에 설치된 편의 시설은 저녁 8시만 되면 외국인들의 데이터 장소로 변모해 우리후손들의 웃음 소리는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본인의 호강보다는 후손의 앞날을 위해 목숨을 마다 하지 않으시는 전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고 숭고한 정신을 가진 민족 아닙니까???
박사님의 노고로 우리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온전하게 후손들에게 전할수 있는 사실보다 더 영광스럽고 훌륭한 일이 또 있을까 생각 합니다...
그리고 회손이 쉬웠든 종이와 구전 과는 달리 한번 기록되면 지우기가 기록보다 더 힘든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에 의해 밝혀지는 우리나라 역사보다는
박사님께서 커가는 아드님이나 손자를 위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았다 란 한가지 만으로 자손만대의 영광이라고 저는 생각하며
하늘서는... 왜? 저에게는 이런 절호의 찬스를 주시지 않았음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건강 하시옵고 가정의 행복을 소원드리며 긴글 마치겠습니다
안 녕 히
근대화에 도움이 됬던건 맞고 중요한건 그게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인듯... 사람 잘먹고 잘살려고 근대화하는건데 근대화과정에 사람이 착취당하면 무슨 의미가있나
역사에 도덕이라는게 어딨냐?
그 훌륭한 세종대왕도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들 부리면서 살았는데, 그것도 부도덕한거 아님? 같은 논리면 세종대왕도 파묘해버려야지
역사는 힘의 논리임
무슨 착취요?
조선시대보다 서민들 삶이 수백배 나아졌는데
@@뎃데로게-w4i 원시대보다 조선시대가 훨씬 낫지? 쯧쯧쯧 그보다 너희들을 보면 기괴하게 느끼는건 왜 아직도 일본의 개로 사냐는거야 마치 일본이 너희들을 낳은 부모마냥 ㅋ
이런늠들이 대만은 엄청 싫어하더라 ㅋ ㅋ 이율배반적인거 아닌가?ㅋ ㅋ ㅋ 아닌가 대만인을 가장많이 이해하려나?ㅋ
우리가 어디 동남아국가 하나 식민지 삼았다고 상상해보자. 물자 수탈하려는데 도로가 너무 불편해서 우리가 도로깔고 신나게 빼먹었는데 나중에보니까 그것때메 근대화됐다고 지들끼리 고마워하고있으면 우리가볼때 얼마나 웃기고 한심할까ㅋㅋㅋㅋㅋㅋ "에휴 저 정도 능지수준이니까 식민지통치 당했지 우리 아니었어도 누군가에겐 먹혔겠네, 죄책감가질필요 없겠다"하지않겠음? 일본이 볼때 딱 그런꼴이겠다
능지 수준 낮아서 정복당한거 맞는데요? 그 당시 조선이랑 일본제국때랑 비교가안되는데
그리고 논지가 이상함. 결국 득본건 사실이지만 지배국으로부터 깔봐지는게 싫으니 근대화론을 부정해야한다는거임?
@@service7755 조선은 성리학중심의 중농주의 정책을 펴며 상공업을 철저히 억제하는 정책을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개혁에 성공하는등 마르크스 유물론적사관에 비춰봤을때 조선과 일본의 발전의 차이때문에 빚어진게 아닌 그냥 능지때문이라구요?? 혹시 뛰어난인종이 있고 열등한인종이 있다는 우생학같은거 믿으시나요? 꼭2차대전 히틀러랑 똑같은생각을하고계신거같네요
@@치코리타-q4y 이미 님이 말했네. 그 차이가 능지의 차이인데요? 그 당시의 수준을 논하는데 갑자기 우생학이니 뭐니 가져오시는게 이상한걸요.
@@service7755 그 당시 흥선대원군같은 지도층이 국제정세를 못읽고 쇄국정책을 펼친건 맞지만 이걸 지도층의 과실, 즉 아쉬운 역사의 단편으로 봐야지 이걸 지능으로 연결지어서 민족간의 우열을 따진다구요?
모든 식민지였던 나라가 지금 잘 살고 있냐?
대만 홍콩 인도 이탈리아
@@user-qk5oi9mg5k 그러니까 하는소리 그 많은 식민지 아프리카 중동은 멋사는데 왜 우리나라 대만은
일본 식민지 인데 잘사는 걸까? 홍콩이랑 인도도 영국 식민지 인데
@@tva6445 이탈리아는 솔직히 애매..
한국이랑 대만 경제성장 하는데 일본이 도움준거 거의 없는데?차라리 미국도움이 컸음 컸지 일본은 우리 경제 쪽쪽 빨아먹기만 하지 가마우지 경제가 뭔지나 알고 좀 와라
@@tva6445 그러고 보니 북한도 일본 식민지
한가지 질문 있어요 ~~~!!!조선시대가 일제에 의해 망하지 않았어야 하고 여전이 조선시대 노비로 사는게 더 낫다는게 핵심 인가요? 양반들에게 종속되어 거래 당하고 그게 나은거죠??와...답없네 ㅎ
노비는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박정현-w1b 갑오개혁은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을 조선 조정이 거부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강제로 친일개화파 내각을 세워 실시한 개혁입니다.
신분 철폐·조세 개혁… 동학농민혁명, 근대 민주주의를 실천하다
갑오개혁 정권은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정권이었고 동학농민군은 이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자는 충돌했고 막대한 희생이 뒤따랐다.
동학혁명과 박성빈-박정희-박근혜
충북대 신영우 교수는 "갑오개혁은 우리 스스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무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기철의 아웃룩] '125년 한국철도사', 自主콤플렉스가 빚은 코미디
철도국이 설치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청일전쟁 와중에 경복궁을 점령한 뒤 조선에 강요한 내정 개혁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자주(自主)' 운운하기엔 부적절하다.
@@삐용삐용-s8p동학농민운동 주장과 일제 백정과 부라쿠민 대우보고 와라
@@박정현-w1b 독립운동가들이 평민과는 겸상도 안 했다는데?
@@chulsookim6332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으로,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의 경우에는 2,198명 중 양반이 겨우 57명(2.7%)인데 비하여 평민이 2,141명(97.3%)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한데요.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해갈게 뭐 있었나요? 지금이나 그때나 천연자원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석유도 없고 고무도 없고 근대 산업시설 하나도 없는 조선인데 일제가 수탈을 해갈래야 해갈게....기껏해야 쌀?
기껏해야 쌀? 모른다고 하시면서 말 함부로 하시는듯 학교에서 잠만잔게 자랑은 아니죠..ㅡㅡ 지금이야 쌀없으면 라면먹지 국가총동원령때는 곡식 다가져가고 굶어 뒤질만큼 배급받았어요 농기구 솥뚜껑 쇠붙이 다들고가는데 농사는 어떻게해요 그리고 남한에도 강제징용 광산이 있지만 북한에는 더많아요 그리고 가져갈게 물적자워만 있나요 노동력도 인적자원이죠 강제징용 위안부 끝에는 징용제까지 했는데
인력이랑 쌀만 빼가도 크죠
@@jwlee7752 대한민국 정부도 동원법에서 '징발'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0여년 넘게 자국 남성들을 강제징용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인이 징발, 징용하면 착한 징발, 징용이고
외국인이 징발, 징용하면 수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jwlee7752 총동원령은 일본에도 실시됐고 오히려 본토가 더 심했죠. 당시 내선일체론에 의하면 조선은 일본이고 당연히 조선도 총동원령의 대상입니다. 정작 조선 말기에는 군인들조차 배를 곯았는데 일제 패망 직전에 와서야 서민들이 배를 곯았으니 어느 쪽이 나았는지는...
우리나라는 탄광이 유명합니다 남쪽지역은 지하자원이 없는데 북쪽에서는 풍부한 광물자원이 풍푸합니다 당시에는 연료자원이 석탄이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이 가지고 있는 광물자원을 놓치기 힘든 자원이죠
일본이 조선을 먹지 않았으면 현재 우리나라는 어떤상태로 있을까요? 지금도 조선의 왕이 통치하고 있을까요?
북한
상식적으로 소련이 먹음 그럼 미국은? 일본이 식민안했으니깐 위치상 미군이 일본에 강제로 주둔할수가 없음 영국은? 이미 더이상 식민화는 못했을 시기 식민지가 넘처 흘러 관리도 못함 소련이 통치 하다가 김일성같은놈 생기면 그놈한테 정권주고 부려 먹었겠지 그럼 조선은 네오 북한 됐을듯
북한 중국 혹은 러시아
잠시 감정을 놓고 보면 조선은 이미 망한 국가였고 강대국 일본한테 먹힌 것은 당연한 것
근대화론과 수혜론은 다름. 근대화론은 가치판단이 제외된 사실관계(일제시대가 현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만을 따져보자는 담론이고 수혜론은 여기에 정치적 도덕성을 추가로 따지는 담론임.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식민지 수탈론 들이 학계에서 논파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저런 말씀을 하시네..학자란 분이..80년대 이미 처참하게 박살난 이론인데..
그 80년대 대학교에서 빨간띠 둘러매고 공산화 투쟁 하시던분이 더이상 업데이트 안하고 학원으로 학교로 가서 학생들 선동하고 계십니다.
어떤 이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정신승리
역갤에서 역사 공부한 일베충이나 이런 소리하지
말이 식민지지 그때는 그냥 조선이 일본이였지
만약 미국이랑 일본의 전쟁이 없었거나 일본이 미국한테 이겼으면 한국이란 나라는 역사속에서 없어졌음.
일본이 없었어도 조선후기에는 점차 자본주의로 가고 있었습니다.
현재 ceo의 역할을 하는 덕대라던지 생산품을 직접 공장처럼 수공업하여 판매하는 선대제와 같은 자본주의 성격을 띄는 역할이 등장합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과 같은 서구열강들의 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와중에 일본의 강화도조약 을사늑약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점령을 당하면서 일본만을 위한 나라가 되어 모든 좋은 것들은 강제 수탈이 되었습니다
팩트:조선후기까지도 조선인의70%는 이름도 없는 노비였음 자본주의?ㅋㅋ 그 30%에 상인들과 윗분들만 자본주의였겠지 ㅎㅎ 어디 유럽 상인처럼 상상하나본데 나라의 차이가 있지..
조선인의 대다수는 그 흔한 교육조차 못받고
살았고 차별과 수탈은 일본이 아니라 자국에서 시행했다 참고로 개도국도 자본주의 많음 ㅎㅎ
일본이 끌어올려준건 명확한 사실임
@@평화주의자-k4h 70%가 노비라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망언에 불과.
가장 높은 것도 17세기 왜란 호란 전쟁으로 혼란스럽고 살기 힘들어 양반조차도 자진해서 노비가 된 경우가 많은 43%가 한계
오히러 후기때는 영조이후 한자릿수 %.
근대화를 했음에도 자국민을 자폭 폭탄으로 써먹으며 미국에 개기다가 핵 맞고 바베큐 마냥 구워진 것들 빨기는 ㅉㅉ
@@평화주의자-k4h 팩트 선조때 이미 신분제가 붕괴돼서 양반의 수가 절반이 넘음
팩트2 1800년 공노비 해방 1880년 사노비 해방 노비 해방과 일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
팩트3 일본의 도움없이 1950년에서 198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햇음
@@평화주의자-k4h 팩트 : 조선인들 교육 수준은 꽤 높았음. 좀 잘사는 집안은 과거 시험 안봐도 서당에 다닐정도, 임진왜란 때 순왜자들 조차 일본인들이 무식하고 글도 못읽는다며 일본한테 손절친 이유도 조선에서 굉장히 글을 읽는 사람이 많으며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임, 또 노비 비율은 대략 30% 정도로 추산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신분제가 동요하여 수많은 노비들이 해방됨. 심지어 순조 때 공노비 해방 갑오개혁 노비 해방과 같이 애초에 노비는 조선이 자체적으로 없앰. 일제와 1도 관련없음. 심지어 동양에서도 수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이었고 전통적으로 화약무기 강국이었음. 솔까 위 상층부만 괜찮았어도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국가였음.
음..전혀요? 조선 왕조가 유지되고 있었으면 조선은 절대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말을 저딴식으로 하냐? 외국 회사가 한국에 공장 세우면 한국사람 공짜로 부려먹냐?
학자가 아니라 무당이네요. 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인데, 객관적인 진실을 부인하다니요. 평가는 달리 달리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왜곡하는 건 실험데이터를 조작하는 범죄행위와 다르지 않죠. 그리고, 무엇보다 학자의 자세는 아니죠. 저런 사람이 교수를 하다니요.
어떤 사실을 외곡하셨나요 ?
@@64hdksks2 공부를 어설프게 햇으니 문제지... 식근론 학자들이 토론 붙자고 하면 왜 그렇게 우리나라 교수들은 도망가냐 파이트머니도 걸어줄 수 잇는데 ㅋㅋㅋ
담론을 제대로 펼칠려면 우선 주제가 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정확한' 정의, 즉 정확한 범위부터 정해야 할 듯.
역사는 fact로 기술되어야 지 감정이 개입되면 안된다. 마치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줬다. 는 말처럼 감정이 들어가면 안된다. 근대화는 또한 도와주는 도움받는게 아니라, 일어나고 발생될 뿐이다. 일제시대에 근대화가 있었다. 사실이다. 일제시대때 근대화된 시설과 도량, 과학기술, 자본주의 여러 이념들이 도입되었던건 사실이다.
일본이 조선을 위해서 근대화를 왜 해줌 ㅋㅋㅋ
일본을 위해서 조선을 근대화시킨 걸 ㅋㅋㅋ
당연한 소리하노 ㅋㅋ 일본이 자선사업가임? ㅋㅋㅋ
일본을 위해서 한건데. 조선도 좋은거고. ㅋ 윈윈 이라는 단어 모름?
저런자가 국사학 교수라는건가? 진솔한 역사를 칼처럼 이야가기 해야하는 자라면 조선왕조 애들이 나라를 판 이야기부터해야. 화폐개혁, 토지측량, 노비제도 폐기, 의무교육, 식량정책, 의료정책, 도로개혁, 교통망개혁, 사법체계, 경제정책 등등 다 일본이한 나쁜짓.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신분제 갑오개혁 폐지 했습니다
@@박정현-w1b그러게요, 중국님이나 소련님들이 통치를 하셨어야 했는데.
그게 가능할 거 같습니까?
일본이 조선 식민지화를 위해 유럽에서 차관까지 들여온 건 알고있나?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일본을 위하든 한국을 위하든 개발됐다는 게 중요한거 아닌가? 아이폰이 개발되며 스마트 시대가 열린거잖아. 애플을 위해 스마트 폰을 만들어 기술을 발전시킨거다 vs 소비지를 위해 스마트폰을 만들어 기술을 발전시킨거다. 뭔 상관이야. 기술이 발달했으니 지금처럼 스마트 시대에 사는 거지. 대기업이 자기들 돈 벌려고 물건 만들지만 한국 gdp는 올라가는 거잖아. 그때의 조선인들도 그 덕에 잘먹고 잘산거잖아.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 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근대화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박정현-w1b [현대이야기] 아산의 정신 깃든 현대차… 세계 5위 자동차회사로 ‘우뚝’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서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0년 3월 합자회사 형태의 자동차 수리회사인 아도서비스를 설립해 성실함과 근면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박정현-w1b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삐용삐용-s8p 아 썼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사령 철폐 이전이나 이후나 조선인 상업자본은 규모가 미미했기 때문에 회사령이 철폐된다고 해서 조선인 회사가 우후죽순 창립되는 일은 없었고, 그 이득은 주로 일본인 상업자본에게 배분되었다.
댓글들 보니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구만
한국이 미쳐돌아가네
논리도 없고 팩트도 없지 말고 현실을 보세요
조선은 뭐 하나 잘한 게 있습니까? 일본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조선이 못한 거죠 얼마나 못했으면 일반 대다수의 민중들이 독립운동을 안하고 40년 내내 은행에 저축하면서 자기 직장생활하고 공장 다니고 미래를 설계를 했겠습니까 조선애서는 불가능했던 서민경제가 들어섰던 겁니다
귀가 막히니 미처 돌아가니 이딴 감정적인 말만 하지 말고 팩트에 대한 반박을 하세요.
역시 일본 덕분에 조선이 참 살기 좋아졌구나
조선
노비-> 사유재산 있음.
노비 수-> 뻥튀기 아떤 기록엔 조선 군사 100만이란기록 있습니다
노비가 국과장급 인사간 사례있음.
총노비수 사례->거짓 조선 총인구수
부터 찾아보세요. 기록된게 있습니까?
고통받는삶? 구한말한정
일제 근대화론->거짓 문맹 80%
신분제해방-> 1984 갑오개혁 폐지, 20세기 부라쿠민은 뭐지
철도,병원-> 영국도 한다.
인구수증가-> 전쟁 후 베이비붐
잘살았더.->키가 줄어둠
독립운동가 양반->지배층 싫다면 친일파싫다타령해야함 착취하단 지배층 다 *친일파됨*
경제 지원-> 티바트가서 경제지원한 중국만세하면 장상일까?
고종이 너라 팔음->국새가 무슨 서람 이름넣냐?
이토히로부미 독립 원함->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가 그 중 하나로 사실상 식민지로 간주된다. 가령 영국의 번국이었던 마이소르 왕국 또한 결론적으로는 식민지로 간주되며,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던 응우옌 왕조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에 의해 착취당했다는데, 구한말에 노비로 살면서 양반한테 착취당하는게 더 썩은 시대 아니었나?
빵셔틀이 일진들 먹고 남은거 먹었다고 일진 덕 본게 아니잖아
일진이 쉬는시간마다 때리고 매점 심부름시켜서 뛰어다니느라 심폐지구력이 올라갔다면 심폐지구력의 상승은 일진때문이다 이게 일진이 의도한게 아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시킨일이며 그로인해 대인기피증등 다른 악영향도 믾았지만 심폐지구력 면에서는 상승을 하였다.
이게 어디가 일진을 미화하고 편을드는 내용인가
이에 대한 반박은 일진이 얼마나 나쁜녀석이고 어떤 의도로 시켰는지, 또 당하는 당사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가 아니라 심부름과 심폐지구력 상승의 연관성이 없다는 근거지료나 일진이 없었어도 그 시간에 운동을 하여 심폐지구력이 상승했을거라는 근거를 제시해야한다.
빵셔틀을 한 적이 없는데 뭔 빵셔틀 ㅋㅋㅋㅋㅋㅋ
일제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은 사실 근거가 대부분 없는 게 사실인 현실
긍정적은 그냥 거짓이었죠.
?? 그렇게 말씀하시면 일제 전쟁범죄 경제적 착취등은 다 거짓이라는 소리가 되는데 독립운동이 괜히 일어난줄 아시나요
@@uzujytalk2023 경제적으로 뭘 착취했음?
@@attamohammed5625동양척식주식회사 세워서 땅을 가져가고 토지조사를 기반으로 증식시킨 쌀의 40%를 일본으로 공출해서 조선의 쌀값이 3배 오르는 동안 일본에선 쌀값이 폭락해서 농민들이 시위했다고 함. 태평양전쟁 때는 쌀 뿐만이 아니라 노동력까지 착취함.
@@_inmm 일본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부풀려서 수탈해 갔다는거 자체가 거짓말인데 뭔ㅋㅋㅋㅋ
일본이 신기술 들여와가지고 생산량이 늘어나서 수출량이 천만석 가까이 늘어난건 알음??
당장 신문기사만 봐도 동아일보 1931년 6월 16일자 "조선米이입제 절대反대"만 봐도 상대적으로 품질은 떨어지나 값이 싼 조선쌀이 유입되면서 일본쌀의 가격이 떨어져서 일본 여론에서 조선쌀 유입 중단하라고 한건 알음??
이런자가 교수랍시고 티비에 나와서 선동하니 문제가 되는거..
근대화로 우리나라가 발전한건 다 빼네
역사좀 배우고 오세요 실제 사학과학도가
수치만발전했지 민들의 삶이 발전했나요 숫자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uzujytalk2023 국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으면 인구는 증가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소하죠.
그러나 일제시대 35년동안 인구는 무려 1600만에서 2500만으로 900만명이나 증가했습니다.
@@uzujytalk2023 조선총독부는 1927년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는데, 소작기간은 최소 3년 이하는 될 수 없고,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계약은 승계되어야 하며, 새로 지주가 된 자는 소작료를 올릴 수 없고, 소작권은 상속된다는 15개 항의 행정명령이었음.
또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서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가 담당하도록 함.
1934년에 소작지에 대한 지주의 재산권 그 자체에 실체법적인 제약을 가하기 위해서 '조선농지령'을 공포함.
이건 1927년에 발동한 '소작관행개선에 관한 건'이라는 행정명령을 성문법화한 것으로, '소작권'이라는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여, 이에 따라 지주들은 소작료의 체납을 이유로 소작농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음.
조선총독부는 '자작농지설정사업'을 실시했는데, 이건 소작농이 경작하는 소작지를 자작지로 만들기 위해서 소작농에게 토지를 구입할 자금을 융자하는 사업이었음. 지주의 재산인 소작지의 소유권을 변동시키는 것으로서 대단히 지주억압적인 정책이었음. 아예 소작지를 자작지로 돌리기 위해 지주들보고 소작지를 팔라고 하는 반지주적 사회정책이었음. 군수와 경찰서장 등이 참여하는 농촌진흥위원회 또는 소작위원회의 소작지를 매도하라는 권고에 지주들은 순응할 수 밖에 없었음.
'자작농지설정사업'은 조선총독부, 조선농회, 금융조합이라는 세 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금융조합이 자금을 대부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음. 금융조합의 자금원은 일본 대장성 예금부와 식산은행으로부터의 차입으로 충당되었음.
금융조합은 1940년까지 조선의 총 농가의 36%인 109만호에 호당 2.9단보의 자작지를 설정하고 이를 매입할 수 있도록 총 2억 240여만원의 자금을 대출해주었음.
출처 - 이영훈 저 '한국경제사' 2권, 158~160페이지. 2016년. 일조각.
@@삐용삐용-s8p 인구 많은나라중에서 살기 힘든나라도 있는데 너무 좁은범위의 증거인거 같습니다 뉴라이트식 경제로 역사의 모든걸 해결하려는 논리는 좀 아닌것 같네요
@@uzujytalk2023 뉴라이트식 경제가 아니고, '과학'의 원리입니다.
살기가 힘들어지면 인구는 늘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고 나면 살기가 힘들어지죠.
기본적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식량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인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1600만명에 더해 늘어난 900만명을 먹여살릴 식량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에, 2500만명이 먹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사고하시길 바랍니다.
식량이 없는데 인구가 어떻게 늘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유지가 되나요? ㅋㅋㅋㅋㅋ
그리고 일제가 수탈만 했다면 식량이 줄어들어거나 최소 정체되었어야죠 ㅋㅋㅋㅋ
그럼 인구가 증가할 수가 없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과학적 사고를 못하게 만드는 반일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이해가 됩니다. 저도 고딩 때는 그랬습니다.
납치범이 아이를 납치해서 밥도주고 공부도 시켜주고 병원치료도 해줬다고 무죄인가요? 납치범에게 고마워 해야 할까요?
아이 몸값을 더 받기위한 행동이죠.
근데 부모가 밥도 안주고 공부안시켜주고 병원치료도 안해주는 아동학대범이었다면?? 그 아이는 과연 누구에게 고마워할까?
@@mastermumei 남의집 가정사에 간섭하는거 아닙니다.집안이 아무리 개판이라도 그 집안일은 그집이 해결해야지 왜 남이 간섭합니까?
@@Lala_song 원론적으론 당연히 남 가정사에 간섭하면 안되지만 배곯고 아픈 아이한테 밥주고 치료받게 해주는 납치범이 아이한텐 더 구세주같겠지요 하물며 힘의논리가 작용하는 국가는 어떻겠습니까 ㅎㅎ
@@mastermumei 정신차리세요 국가가 개판이 나고 군주가 독재를 하고 나라를 말아먹으려 해도 자국민이 들고일어나서 싸우고 피를 흘려서 쟁취하는것이 자주국의 개념입니다. 다른나라는 간섭할 자격이 없어요.
@@Lala_song 당시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거창한 칭호가 필요한가요?? 사실상 중국의 속국에 백성들 삶은 개판이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혁명을 성공시킬 힘마저 없었던게 현실인데요 그러니 전쟁한번 못치르고 일본한테 나라를 홀랑 뺏기죠 나라뺏기는 상황에서도 전쟁한번 못치루는 국가가 무슨 자주국입니까
세상에 어떤 제국주의 나라가 자기 식민지들을 위해서 자기 돈 써가면서 근대화에 도움이 되겠냐 아이고... 징검다리로 쓰게 하려고 자기네들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거지... 이거말고 다른 영상에 보니까 조선어도 가르쳤다는데 반발을 막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어르는 면이 있어야지 의심 안하고 계속 노예로 있을 거 아니냐?? 한국에 어떤 이상한 놈들이 근대화로 발전했다 이딴 소리 하고 있어 아직도
근대화된건 맞는데 아니면 초가집짓고 살았어야 아저씨~
@@exdoll 막상 625때도 초갓집이 반 넘게있지않았음?
일본네티즌들에게 식근론 펼치는 수준을 보여줘서 조롱좀 당해봐야 하는데
@@exdoll 초가집은 박정희 새마을운동 이후로 사라진건데 뭔 ㅋㅋ
일본의 중공업 투자로 해방 이후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 이후 못 살았더는 기록은 제외하고
돈많고 힘있는 조폭이 남의집에 맘대로 들어와서 냉장고바꾸고 티비바꾸고 차바꿔서 쓰고있다가 경찰한테 잡혀갔는데 그 남은거 썼다고 조폭이 그집을 발전시켰다고 할수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ㄱ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들어왔는데요? ㅋㅋㅋㅋㅋ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짐(朕)이 동양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 피차 통합하여 한 집으로 만드는 것은 상호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까닭임을 생각하였다. 이에 한국 통치를 들어서 이를 짐이 극히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고 이어서 필요한 조장(條章)을 규정하여 장래 우리 황실의 영구 안녕과 생민의 복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에게 전권위원(全權委員)을 임명하고 대일본제국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회동하여 상의해서 협정하게 하는 것이니 제신(諸臣) 또한 짐의 결단을 체득하여 봉행하라.”
조선왕조실록 순종 3년 8월 22일
@@삐용삐용-s8p 이게 원한거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기네 그전부터 경찰권 사법권 외교권 다 뺏고 군대까지 해산시킨 상황에서 계속 압력 들어오는데 이게 자발적으로 넘인거야? 누가봐도 협박으로 억지로 넘긴거 아님?
@@SHK-pr3eb 압력이 들어와도 본인이 싫으면 저항해야죠.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을 가진 황제가 동의를 하여 병합이 되었습니다.
님이 운영하는 회사가 여러 방면에서 경쟁 기업의 심한 압박을 받고 있고, 경쟁 기업이 님의 회사를 넘기라는 압박을 받는다면 님은 어쩌시겠습니까?
신라는 왜 가야와 백제와 고구려의 주권을 빼앗았나요? ㅋㅋㅋㅋ
@@삐용삐용-s8p 이름뿐인 황젠데 저항을 어떻게 함? 국가로서의 모든 권한은 이미 다 뺏겼고 실권 하나도 없는데 순종 자기가 버틴다 한들 뭐 어떻게 할수나 있었을거 같음? 별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종~순종은 일제가 주도해서 남긴거라 진위성이 의심되서 유네스코도 등재 못됐는데 조칙을 아예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SHK-pr3eb 이름뿐인 황제? ㅋㅋㅋㅋ 대한제국의 황제를 논하면서 '대한국국제'도 공부 안 하셨어요? ㅋㅋㅋㅋ 이거 보고 반성 좀 하세요 ㅋㅋㅋㅋㅋ
대한국국제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온바 자주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제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립정체이니라.
제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신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이미 행한 것과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할지라.
제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 편제를 정하옵시고 계엄·해엄을 명하시나니라.
제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치행리(自治行理)이니라.
제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의 수여 혹은 체탈을 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유약국(有約國)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이상과 같이 국제는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알리고, 정체가 전제정치임과 황제가 막강한 제권(帝權)을 가진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제정, 선포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우파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얘기할때 조선인을 위해가 아니라
일본인을 위해 조선의 경제를 개발했지만, 그 속에서 조선인들의 삶이 나아졌다는게 자명한 사실이다 란 것임.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북한하고 평화통일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회가 안정화되어야 하니 법체계 완비, 도로건설, 종자개량, 토지측량, 상하수도 건설, 위생사업, 댐, 항만, 수력발전(전기공급), 산림사업, 학교건립, 문화재 발굴조사, 병원개설 등등을 해야 되겠지요...
6.25 끝나고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70년대 후반에야 겨우 역전됩니다.
아시다시피 농업국가라고 하는데 북한이 훨씬 척박한 동네 아닌가요. 근데 왜 북한이 잘 살았을까요...
흔이들 얘기하는 통일비용은 누가 내야 하나요... 북한에 돈이 있을까요.... 남한사람 세금으로 해야합니다.
일본도 그 당시 일본사람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은 고무신도 못 만드는 나라이구요. 외국인 견문기를 보면 정말 처참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국대학의 조센징" 이라는 책에 그 당시 멸시 받으면서 일본에서 공부한 인재들에 대한 책도 나와 있습니다.
지식이 없으면 식민지 사람들 다루기 쉬울텐데 왜 유학가게 했을까요... 친일사람 앞잡이 만들려고....
무조건 친일이다. 이렇게 접근하시면 더 이상 할 말 없네요.
@@user-zn7nq998 일제 덕분? 문맹률 80% 일제유산 많이 있다고 우리나라는 뭡니까?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박정현-w1b
이거나 쳐 보세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
"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서울대학이 되었다
ㅋㅋ 연예인들 불쌍타 저 구라를 듣고 호응하려니 얼마나 힘들겠냐
니가 더 불쌍, 엣지있고 싶어하는 2찍 2-30대 남성
@@오늘도빚내는너에-h9z 정치병자야 ㅈㅂ 뭐만하면 2찍 2찍 거리냐. 우파를 화나게 하려면 거짓을 말하면 되지만 좌파를 화나게 하려면 진실을 말해야한다.
@@오늘도빚내는너에-h9z 그러던가 ㅋ ㅋ
에초에 조선경제가 크게 성장하니 일본입장에서는 수출할 시장을 얻은거니 개꿀임 조선인입장에선 생활이 좋아졌지 적어도 구한말에비하면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있었나요?
자동차한대 만드는데 해방되고도 몇십년이
걸렸습니다.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이거는 팩트 아닌가? 조선은 근대화 못한다 절대 그리고 결과를 따먹건 뭐건 인프라 설치가 된건데 감정적으로 인정안하는거는 말이안되지
사회자, 참가자 바보밖에 없는 거야?
당시,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의 남침이 여기저기 있고, 일본은 열도를 지키는 방파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그것을 위한 조선 근대화였어.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그냥 소달구지 타고 다녀야 하는데 건방은
ㅋㅋㅋ 아야.
팩트만 이야기하자면, 해방 직전과 직후의 상황은 식민지가 시작하기 보다 마이너스 상황이었음. 한마디로 망한거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패전 직후의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패전한지 23년만인 1968년에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됩니다.
어떻게 기적이 가능했나요? ㅎㅎ
@@삐용삐용-s8p 내 예기는 조선. 일본은 알빠 아니고.
식민지가 아니고 일본+한국 한국이 일본이 되가는 과정이었다면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게 있음
수탈론도 일리는 있음 그런대 우린 수탈론으로만 배움
그런데 결과론적으로는 조선왕실을 폐지한 것도 일본이니까 조선한테는 일본이 은인이지.
구한말한정이란다. 나라말년이 되면 구한말처럼 변하는게 정상입니다.
@@박정현-w1b 구한말처럼 되는게 정상이란다. 국뽕의 합리화는 정말 오진다. ㅋㅋㅋㅋ
세계사를 배워도 이런 ㅂ ㅅ같은 나라는 없는데
어느 나라가 자기 국민 죽여달라고 다른나라를 쳐부르는 나라가 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크라시아로출근 이제 다는데 나라 말년이면 혼란이 오는건 정해진 운명입니다. 당장 기록에 언급되는 우리 역사에선 고려,신라에 세계사언급하면 끝이 없습니가.
서로 그냥 말장난
수탈을 위한 근대화는 진정한의 의미의 근대화는 아니죠.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민족적 차별이 존재 했고 그 혜택은 식민지배 하는 일본인이 누렸고 피식민지배를 당하는 한국인은 누리지 못했죠.
일본은 조선을 수탈한 적이 없습니다.
삼성전자는 베트남에 투자하여 베트남 GDP의 약 2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제품을 베트남에서 생산해서 엄청난 이득을 누리고 있죠.
삼성전자가 베트남을 수탈하고 있는 건가요? ㅋㅋㅋㅋㅋ 혜택을 삼성전자만 보고 있는 건가요? ㅋㅋㅋㅋ 오히려 개발도상국들이 기를 쓰고 글로벌 대기업을 유치하려고 하지 않나요? ㅋㅋㅋㅋㅋ
@Sad Frog 전 고마워해야 한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수탈을 위한 경제성장과 근대화는 없었으며, 그에 따른 수탈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일제시대에 일제가 행한 근대화 정책과 사회 인프라 건설, 일본 기업 및 일본 자본의 투자로 인한 경제성장의 혜택은 일본인과 조선인 둘 다 누렸습니다.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의 운영으로 혜택을 보는 것이 삼성과 베트남인 둘 다인 것과 마찬가지의 경제원리입니다.
@Sad Frog 일본은 조선인들이 원치 않는데 강압적으로 일본 자본과 일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자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조선인들이 환영할만한 일이지요.
그리고 기업의 이익에 따라 투자를 하고 말고가 결정되는 것이지, 조선총독부가 기업에게 투자를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체제였다면 진작에 기업이 망했겠지요 ㅋㅋㅋㅋㅋ
태평양전쟁 국가총동원체제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노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인 노동자가 원하는 직장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하면 일을 하는 것이지, 조선총독부가 특정 기업에 특정 기간 동안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6년 간의 전시국가총동원체제와 그 외 29년의 일제 통치 기간을 헷깔리신 것 아닌가요? ㅎㅎㅎ
그리고 국가가 유사시에 국민을 징용하고 국민의 재산을 징발하는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선진강대국들도 해온 것이며, 오히려 일본은 선진 열강의 체제를 모방한 후발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70여년이 넘게 자국 국민을 징용해오고 있고, 대한민국 동원법에서는 유사시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징발할 수 있다고 하는 법적 근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반일종족주의의 공교육과 반일종족주의의 가정교육, 사회교육 때문이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님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삐용삐용-s8p 쌀 수탈 개많이 해갔는데..
@@SHK-pr3eb 그런 적 없습니다. 있다면 근거를 제시하세요.
조선에 먹을 게 뭐 있었냐?
일본 경제를 위했다한들 10분의 1이라도 이득이 돌아갔으니
국가급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발전이지.
수탈같은 소리하네. 민주당인가? 왜 펙트를 두고 뇌피셜 쓰면서 선동하지?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누가 보면 한 300년 지배한줄 알겠어 35년도 못채우고 좋은건 죄다 지들이 했대 ㅋㅋㅋㅋㅋ
근데 35년정도에 전근대에서 병원 사법 의학 교육 상하수도 교통망 통신망 건물 철도 소유권 화폐개혁 스포츠 패션 등등 근대화 된 거는 맞잖아
근대화? 문맹률 78%에 통계 기록있습니다. 그것도 1945년에.
철도? 전기? 1899년 5월엔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돈의문~흥화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유럽식
붉은 전차가 매일 10분 간격으로 운행됐다. 교토와
방콕을제외하고 동경(1901년 개통), 홍콩(1904년
개통), 상해(상하이.1908년 개통), 북경(베이징.1924년
개통) 등동아시아 대도시 어디에서도 전차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다. 1881년 독일 지멘스사가 베를린
교외선에서 처음 전차를 상용화한 이래 서울의 전차
개통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빠른 편에 속했다.
1899년 9월엔 인천~노량진 간 철도가 개통됐다
1900년 7월엔 이촌동~동작구 사이 한강철교가
완공됐다. 거의 동시에 노량진~남대문 간 철도가
완공돼 경인선 전부가 개통됨으로써서 하루 4회 경인선
기차가 운행됐다. 전기.전선.전차.철도 등의 근대화
속도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은 중국을 앞지르고 일본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901년 독일 기자 지크프리트 겐테 박사가 본 서울은
광무개혁 7년 만에 서양인이 감탄할 정도의 '근대적
대도시'로 달라졌다. 겐테는 서울이 유일하게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다 가짐으로써
북경.동경.방콕 등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하면서 당시 서울의 풍광을 이렇게 교사한다.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휠씬 더 매력적이다. 서울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휠씬 순수하다."(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 227쪽)
당시 조선왕조가 남아있으면 잘 살았을까? 싶으면 아니지
그게 북조선임.
뭐가 됐든 일본을 통해서 경제발전을 하고 35년동안 인구가 2배로 늘 정도로 근디화를 성공했으면 고마워 해야되는 거 아니냐?
미국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남한을 수호했어도 결과적으로 미국 덕분에 대한민국을 지켰으니 미국에게 고마워 해야되는 것과 같은 논리다
만약에 미국이 한국전쟁 때 군사적 도움을 주는데 북한군이랑 싸우지 않고 그냥 하는 척만 하고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면 그게 고마워 해야 할 일이냐???
친일 정신병자가 개소리하네 ㅉㅉ 강제 징용 피해자들을 생각해봐라 ㅉㅉ
인구가 2배 늘어난건 사실 아닙니다
통계의 오류죠
1919년 최초 인구조사 한것은 조선식으로 인구조사 한것이고
1926년 인구 조사 한것은 서구식으로 한것입니다
이거 가지고 논쟁 많이 했는데 알고 보면
1919년 인구조사는 일본 경찰이 한것인데, 조선식으로 한것입니다
최진사댁 앞집 옆집 뒷집 이런식으로 당시 조선은 주소가 없었습니다
후자쪽은 주소를 만들고 인구조사를 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늘어난겁니다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청나라 같은 경우 인구가 2배가 증가했습니다
@H123 일본을 통하지 않고 성장했을수도 있는데요
우리나라 지금 성장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데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 비해 경제성장률이 높았던건
교육열과 월남전이죠 이런걸 일본 덕분이라고 할수는 없잖아요
@@umdarkssa6001 일제 직전에 하려고 했던 광무개혁 조차 황제권을 인정하는 왕권강화하는 개혁인데,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근대화 못합니다.
결국 서구식 입헌군주국 체재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조선정부가 무너지는 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이걸 실현한 게 일본 정부이고요
근데 지금 한국에서도 상위3%정도가 대부분의 과실을 다 따갈것만 같은데..ㅋ ㅜ
그리고 그 상위 3%의 조상들이 모든 것을 만들었지. 이제와서 그 권위에 도전하는건 너무 내로남불이지 않냐?
그 상위 3%가 세금의 50%를 낸단다 니가 의료보험 상수도 철도 도시 인프라 국방 등등을 거진 공짜로 이용하는것도 걔네 때문임
일본제국을 위한거라고 게속 그러는데... 당시 조선은 일본으로 합병된 상태였음... 오끼나와랑 비슷한 경우로 그냥 일본국 그 자체였던거임. 제주도의 탐라국이 조선에 흡수되었듯이 조선도 일본에 흡수되었던 상태랑 걍 같은거임. 심지어 한국이랑 핏줄이 가장 가까운 민족이 일본인임 세상 어느 나라가 식민지 출신 민족이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가고 장교가되어 일본 본토인 부하를 거느릴수가 있음? 이건 일제시대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걸 증명함
@@ap6924 제정 러시아에도 시베리아 총독은 따로 있엇는디? 합병하고 안중근 이후 후반쯤 되면 내선일체로 민족말살정책 까지 펼치고 일본인 그 자체가 되어 가는중이엇는데 뭔...
@@ap6924 일본은 원래 죠몬 야요이 아이누 류큐 등 다민족 국가이고 거기에 조선이 추가된것뿐, 더해서 일본 왕실부터가 백제 핏줄임 님이 말하는 차별은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한테는 있었을지도 모르나 상놈은 신분제가 존재하던 양반들과의 차별보다 나았고, 합병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걍 일본인이라 봐야함
좋은 의견들 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
조선인 차별...은 있었죠. 없을 수가 없음. 차별이 없었다는 사람은 그냥 일본인이었던거임. 조선 사람이라는 자의식 없는 일본인. 그러니깐 차별이 없었지. 일본인이니깐. 조선 사람이 아니였으니깐
@@mkm4419 지금도 지역혐오 지역차별 있는데 저시대라고 다 평등했겠나...
고종이 계속 왕을 했어야 함. 조선 꼴 어땠을까?
ㅋㅋ 애초에 식민지배를 받지 말던가 ㅋㅋㅋ 나라가 약한데 어쩌라고
우리도 강했으면 여러나라 넘봤을거다
@user-xx1vo8io2e ㅂ ㅅ인가 폭력이랑 지금시대를 보니까 그렇지.
님 내일 지구가 망하면 폭력도 허용되는게 이세상입니다
그래도 많이 성숙해졌네!!...예전엔 마치 뺏어가고 괴롭히고 그런 교육이었는데 근대화가 중세시대보대 생산성자체가 다름.
근데 펙트는 조선때보다 식민지가 더 좋았다는 거임
근거는?
@@yojo2726 적어도 일제시대때 자국민이 자국민을 노예로 부리진 않음
대체 어디서 무슨 책으로 역사를 배운지 모르겠네ㅋㅋ 딱봐도 이영훈처럼 위안부 부인하는 사람들 이겠네 ㅉㅉ
@@yojo2726 일제시대동안
인구가 1300만->2600만 으로 급증했고
평균수명 또한 24->45로 올랐다
1%도 안되던 등교율은
정확히는 기억안나지만 50%가 넘었다.
옛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다 이렇게 말했다.
''조선엔 오물이 넘쳐났고
백성에 절반이 노예며 세금을 값지 않으면 매맞았고
못값고 죽으면 이웃에게 물려받았다'' 이것만 해도 답나온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한것은 맞아도
조선보다 몇배는 낫다
@@yojo2726 말 없는거 보니 튀었누
일제시대 식민지 근대화의 비판도 공과가 있듯이 사실을 근거로 설명 잘해야 합니다.
거짓을 살짝 넣어서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경제성장 무지하게 했고. 쌀도 일본에 돈을 받고 수출한겁니다. 그러면 수탈이 아니죠.
일단 굶어 죽는 사람이 사라졌고 노예가 해방된 것과
교육, 도로. 공장 건설에 일본 보다 더 투자를 했습니다. 물론 일본을 위해서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는 무조건 지옥이고 모든것을 뺏앗긴 암흑의 시대라고 하면 요즘은 안먹힙니다.
합리적으로 사실에 근거해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 교수는 야바위 꾼도 아니고 숫자의 근거가 없어 참.
그럼 예능나와서 연예인들 상대로 가르치는데 논문이랑 참고문헌 펴가면서 가르칠까?
@@치코리타-q4y 그러니 맨 거짓말 강의 상상 강의만 하는 거임
@@치코리타-q4y당연히 수치로 얘기를 해야지 ㅋㅋㅋㅋㅋ
설마 전문적인 교수가 말한 수치인데 근거가 없겠음?
@@송밀리터리 저 교수가 어떤 수치를 얘기했는데요?
한일 역사학자로서의 논쟁은 개쳐발리듯이 하면서 국내 예능에서 그래도 자기말이 맞다고 우기는 걸 보면 좀 추하네요. 당신 말이 맞다면 깔끔하게 학자들끼리 토론해서 이기시면 다 인정해줄텐데 말입니다.
@@user-tm8jh5vp5r[김영민 연재]한국학의 신은 숨어 있지 않다
어느덧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라났다. 영어권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꾸준히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해외 한국학 연구의 주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에드워드 와그너, 제임스 팔레, 카터 에커트, 존 던컨은 모두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이영훈과 미야지마 히로시가 소농사회론을 제기했다. 그들에 따르면, 경영형 부농이 아니라 소농이 조선 후기 사회를 특징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재적 발전론이 한국학계의 비주류가 된 것은 아니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후속 세대를 비슷하게 재생산하는 한, 신은 여전히 신으로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내재적 발전론이 문제가 있다는 풍문이 퍼져나가면서, 한국학의 신은 더 이상 숨은 신이 아니게끔 됐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수업자료로 사용하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아니 그래서 그 성장된 경제를 기반으로 발전했잖아. 왜 조선인들은 이야기를 항상 왜곡하는거지?
아이들 선동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화이팅!! 할 수 있다!
그래도 명과 암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조선인은 계산이 안되나? 명+암 해서 플러스마이너스 플러스라는거지.
@@병신보면짖는개-r2n뭔 개소리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개소리 짓거리지 말고 근대가 뭐냐?? 근대를 정의를 아무도 내리지않고 발전한게 근대성이냐? 정의를 내리고 시작좀하세요.
그럼 해방이 안됐음??? 일제 시대 보다 좋았냐???
이씨조선의 수탈을 수백년 동안 받아오지 않았냐?
조선의 왕에 충성하나 일본 천황에 충성하나... 일반 백성의 삶은 뭐가 크게 달라졌겠나!
그리고 교육 의식... 당연히 일본 정신을 가르쳤겠지만...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보통 교육이 이뤄진건 일제 시대 아니냐?
머 수탈 더 잘하려고... 수탈할 인력 뽑으려고 교육 했다고 치자... 근데... 그때 교육받고... 잘 배운사람들은 중산층 상류층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고...
해방이 되고 난후...
동족간에 죽고 죽이는 전쟁으르로 수십 수백만이 죽거나 다쳤는데...
지금도 북에 동포는 조선시대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데...
차라리 일본에 합병되어 지금 일본 사람으로 이땅에 살았으면... 북에 2천만은
지금 우리만큼 혹은 그이상 잘먹고 잘살텐데...
그리고...박정희때... 일본 돈받아가지고... 포항제철 만들고 경부고속도로 만들고 잘썻잖아...
그게 산업기반 되고... 일본 총리도 몇명이 몇번에 걸쳐 식민지 통치에 사과했음 됐지...
툭함 사과해라 또 사과해라.... 보상해라... 돈 내놔라....
참나 어의가 없네... 위안후 할매들 살아있을때 한국정부에서라도 톨비나ㅏ 포철 배당금으로 돈이라도 주던가.... 다 죽어가는데...
일본한테 또 보상해라.. 어쩌라.... 쯔쯔 니들이 일본 일반 국민이면 개 빡치지 않겠니???
무슨 깡패니????
도데체 맘에 드는 나라가 어디야?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다 싫타고.. 쌈닭이야?
한주먹 거리도 안됨서.... 쯔쯔...
자중한자... 겸손하자...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편향되고 외곡된 역사 가르친다.
좀 생각 좀 하자
불만투성만 많아 꼬인 댓글이네
수백년? 말기 뿐
일제강점기 문제
경제문제
:무역적자 중일본에 대한 비중이 75%였습니다. 자본주의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변한 국내경제는 가득이나 열악한 산업기반 속에서 파탄지경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늘었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늘어난 쌀은 조선인들이 아닌 일본에 팔아야 했습니다. 낮은 가격으로 일본에 쌀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식량, 입을 옷은 다시 일본에서 비싼 가격으로 수입해야 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에게 잉여가치를 증대하고 풍부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제공해줄 노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역의존도는 82.6%였습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려해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우리나라의 주권 중 가장 먼저 빼앗은 주권이
외교주권입니다.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를 고립하는 것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교류할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 주민들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다고 하셨는데, 1920년 이후로 지주(자소작농)의 수는 급감한 반면 소작농 수는 급증했습니다. 토지나 자본과 같은 생산수단은 일본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는 곧 민족별생산수단의 불평등이 확대되고 지속되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였습니다.
또한 길거리에 버려진 기아 발견수는 1910년에 5명, 1939년에 303명, 1943년에 235명이었습니다. 자살자도 증가했습니다. 1910년 474, 1937년 2,816명, 1943년 2,027명이었습니다. 자살의 요인은 형고 22%, 생활곤란 16.2%, 정신착란 15.7%, 가정불화
11.8%, 기타는 13.1%였습니다. 일제로 인해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다면 기아와 병고, 생활곤란으로 인한 자살이 증가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교육 문제 학교 수가증가한 자료를 근거로 사용하셨네요. 그 교육기관에서 교육 받을 수 있던 한국인이 얼마나 됐는지 따져봐야합니다. 1930년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 학생은 인구 10만명당 고작 9명이었습니다. 43년에는 18명 정도였습니다. 한국인의 입학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됐고, 학력이
아닌 경찰의 신분조사가 수험자격이 됐습니다. 또한 당시 국민학교를 다닌 아동 비율은 약
30%정도였습니다. 이 수치는 일본 아동이
포함되어있고, 일본 아동들의 국민학교 진학률이 99.9%였던걸 감안하면 우리나라 아동 대부분이 국민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등교육은 그 수치가 더욱 낮습니다. 전체 국민의
0.3%만 중등교육을 받았다는 자료도 있습니다.실업학교와 사범학교의 경우에는 입학자격제한이 덜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런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인 학생수가 일본인 학생수의 2배도 되지 않았고, 또한 선발 시험에 일본어가 필수 응시 과목이었습니다근대 교육기관에 입학하더라도 출업한 한국인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의 시험은
학력보다 사상 입학 고사이다'라고 비판하며 만세 운동 관련 학생 대부분이 불합격된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한반도내 고등교육기관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의료 문제
당대의우리나라의 현실을 외국인들이본 시각을 근거로 설명하셨네요. 가지고 오신 서양인들의 책을 다 찾아봤습니다.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조선에 방문한 이들이 남긴 기록에서 한국의 위생이 더럽다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상류층은 깨끗하고 탄정하다고 묘사됩니다. 이건 서양이라고 달랐을까요?
조선인이 서양에 갔었도 똑같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조선이나 서양이나 위생은 상류층, 귀족층에 급속하게 수용된 것이지 빈민이나 노동자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져오신 서양인들의 여행기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 언론인 메리 크라웃이 런던시민들이 더러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미국을 여행하고 "미국인들은 야만인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스러운 예의가 없고 다른 사람을 역겹게 해서는 안된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조차 없는
족속이다"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러시아국립해군성문서'에서는 제물포의 위생
조건이 다른나라에 비해 양호하다는 평가를 내린 기록도 있고 'The Boston Medical and Surgical Journal'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양호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병원과 의사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사립의원은
물론 진료비가 비싸지않은 도립의원에 마저 한국인 이용자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적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인의 경우는 매년 병원 이용자가 늘었고요. 이렇게 병원을 이용하는 한국인들이 계속 줄어들었던 이유는
한국인들이 아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병원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 비싸고, 의사들이 대부분 일본인이어서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받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번 진료를 받고,약을 받는데 드는 비용이 쌀 18kg 가격과 비숫했습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 한 달 월급과 비숫했고요,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는데, 전염병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크게 창궐했습니다. 1920년에는 말라리아,
1930년부터 1940년 까지 장티푸스와 같은
급성전염병에 한해 2만명 정도가 감염됐습니다 1인당 영양 공급량도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증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1945년
독립 직전까지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중 8년이라는 기간에 발생한 일을 근거로 그 기간 전체를 옹호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해방 뒤에 급속한 증가를 보었습니다.
인권 문제
인간으로서 태어났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인식이요?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요? 사회가 단순히 신분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게됐다고요? 고문,
인체실험, 한국어와 문화 탄압, 강제동원, 성노예,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태형, 일본경찰의 즉결 처분권. 일제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당해야 했던 부당한 것들입니다. 사법제도로 인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나요. 강제수사가 빈번했고 예심에서 미결 상태로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나 되고, 2개월마다 연장이 가능했습니다. 이로인해 예심이 미결임에도 1년~2년
이상 장기 구금이 가능했습니다. 피의자 신문서가 재판에서 절대적 증거로 수용되었고, 이로인해 고문을 통해 그들 입맛에 맞춘 진술을 받아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분들께서 고문때문에 고통받고 돌아가신걸 다들 잘 아시지않나요? 또한 즉결 처분권을
통해 재판소에 가지도 못하고 태형에 처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이 한국이 발전하기위한
근대화를 준거다 라는 그 설 말이죠?
그럼 전후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되잖습니까? 1945년에서 한국전쟁이 벌어진
50년까지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라구요
태평양 전쟁때 일본은 전투기와 항공모함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기술력의 백분의 일이라도
한국이 갖고 있었습니까
그 말은 기술력 0 상태에서
배우면서 시작했다는겁니다. 일본의 유산같은게
아니라는거에요.
근대화설을 주장하시려면 밑거름이 될만한게
뭐가 있었는지를 말하셔야죠?
산업인프라도 없고 기술자도 없고 뭐가
근대화이죠?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와 관련하여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지 않았나?"인데 일제강점기는 36년 전체로 봤을 때 안정적인 기간은 문화통치 시기의 10년 뿐 오히려 1인당 GDP가 하락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로 가면 대공황의 여파와 만주사변 이후 공출이 시작되면서 도시마다 수백~수천 단위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그 막장이었다는 구한말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냐면 1939년 경성의 실업률은 70%에 육박했는데 1941년에는 아예 1910년 이전으로 폭락했다. 그나마 좋아진(?) 경제적 지표라면 인구 수나 평균 수명 같은 게 끝인데 이마저도 북한의 김일성 시대만도 못한 수준에 그친다.
어디부터 반박해야할지 모르겠음ㅋㅋㅋㅋ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신지?😂
@@미루-r2e 머리가 있음 자기생각이라는걸 해야지... 일본이나 중국이나 북한이나 대한민국이나 교육 자체가 쇠뇌다. 너 북한 우상화 봄 답답하지? 너도 똑같이 쇠뇌된거야! 역사교육이란게 연도외우는게 아니고 자기 생각 가지고 비판하는거란다. 중국 북한 일본은 역사왜곡이고? 우리만 참교육이겠냐? 생각을 좀 해 뇌가있음.
그 갑오개혁도 일본이 도왔죠 ㅋㅋㅋ 그냥 조선이었으면 끔찍하내욬ㅋㅋㅋ
뭔소리입니까 동학농민운동 주장보면 전혀 아닙니다
동학농민운동 ㅇㅈㄹ
김구가 뭐라디?
@@박정현-w1b
근대화론에찬성입니다
참으로
근데 팩트로 보면 2차 세계대전 징집이전에는 조선보다 살기 좋았음 ㅋ
오죽하면 의무교육까지 시켜주고 어느지배국가가 군 장교를 식민지인을 시켜 주냐
2차대전때 한국인은 징집대상이 아님
끌려간 한국인들은 극소수
@@김종필-j3t 징집대상이 아니라면서 끌려간 한국인이 있다는건 뭔소리야ㅋㅋㅋㅋㅋㅋㅋ 말장난하냐?
@@치코리타-q4y 법적으로 조선인은 징집대상아니엇음
몰래 끌고간 조선인이 극소수라는거
@@김종필-j3t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령, 1943년 학도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 공식적으로 차출해갔음; 교과서에도 실려있음
그 장교가 겨우 한명대 ㅋㅋ
식민지로 결국 한국인은 저학력에 78%의 문맹률.
조선이 미개했기에 일본이 아니라 어느 누가와도 식민지될 운명이였다.
위안부 강제징용? 일본이 아닌 중국이였다면 그런일이 없었을까?
더 심하면 더 심했지 ㅋㅋ
식민지 근대화론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맞는말이다. 조선이 얼마나 미개했는지 공부하면 나오니깐...
기분과 별개로 사실인데 뭐…. 그럼 조선으로 돌아가면 좋은거냐…
응 어차피 625와서 80퍼는 다 사라졌기에 근대화는 무슨 ㅋㅋ 조선보다 이전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뭔 사실이야 ㅋㅋ
@@오리쭌-p6t 80퍼는 니 뇌의 망상이고 실제로 북쪽에 일본이 패망하고 건설해둔 공장으로 초반에 북한이 이득 많이 봤구만
80퍼 근거좀 가져와주쇼
@@오리쭌-p6t80퍼 사라진 적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을 적이 남기고 간 물산이라 하여
해방후에 전부 국영화하여 "적산물자"라고 하였는데,
정부가 이것을 한국인 기업가들에게 싼값에 불하하여,
한국의 산업을 키우는데 밑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대표적인 기업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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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선만주단(鮮滿紬緞,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기업)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鮮京"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ㆍ삼국석탄ㆍ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제과와 모리나가식품"이 해방후에 동립식품으로 상호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ㆍ남선전기ㆍ조선전업"이 해방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립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음.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다.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됨.
"조선화재해상보험"이 "동양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화재해방보험"이 되었다.
@@오리쭌-p6t일제는 35년동안 약 20억 5,000만엔을 투자해서 약 5,000km 이상의 철도를 한반도에 건설했습니다.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 경전선, 전라선, 동해선, 경경선, 황해선, 평원선, 만포선, 혜산선, 백무선, 충북선, 경동선, 장항선, 경춘선, 평북선, 금강선전철, 신흥철도, 삼척철도, 남만철도 등 수많은 철도를 건설해서 한반도 각지를 연결했습니다.
이거 다 6.25전쟁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90년대에 시골 철도만 봐도 일제가 만든 간이역들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외에 도로, 교량, 저수지, 항만, 발전소, 공장 등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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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쭌-p6t식목일 특징
=> 조선총독부가 제정함.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선총독부가 1911년에 매년 4월 3일을 식목일로 제정함.
그리고 1907년~1942년의 35년 동안
236만 정보의 산야에 약 82억 1,500만 그루의 나무를 식재함.
그리고 미군정 때 식목일이 4월 5일로 변경된 후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온 거임.
.
식민지 근대화는 팩트인데 감사할 필요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