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쓰클럽에서 벤치하다가 옆에 노인분이랑 눈 마주쳐서 인사드리고는 통성명하게 되었음. 그분은 어느대학 철학과 교수라고 소개하시더니 갑자기 포스트모더니즘에대해 한 시간 넘게 강의를 시작하심. 누가 헬쓰하다 들뢰즈 가타리 라캉을 들을거라 상상이나 했을까요.오래전 일인데도 지금도 생각나네요.
이렇게 한 분야에 미쳐있는 분들이 대학교수를 하고 연구직에 있어야 하는것 같아요ㅋㅋㅋ 어차피 그분들 하는일이 가르치는것도 있지만 핵심은 연구하고 논문쓰는일이니. 그분은 인생의 모든 관심이 철학 그 자체여서 대화중에도 자신의 관심사가 과감하게 표출된것 같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분들이 괴짜같지만 재밌더라구요.
해석이 조금 의아해 댓글을 남깁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독특하고 다른 순간과 다르기 때문에 반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장미꽃과 저 장미꽃은 분명 다른데 인간이 가진 인식체계의 한계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할 뿐이죠. 그렇지만 인간의 편의를 위해 그 꽃들은 같은 꽃으로 불려져야만 합니다. 그건 인간의 편의 이상의 의미는 세상에 없는거고요.더 나아가, 어제 본 그 장미 꽃 한송이를 오늘 다시 보게 되면 어제 봤던 그 장미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물리학에서도 증명된 사실이죠.) 인간은 세포가 몇개월마다 리셋되어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간이라고 규정할만한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단지 분류를 위해서지, 모든게 같아서는 아닙니다. 들뢰즈의 차이는 불교의 무상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 “차이”는 매 순간순간 그 시시각각의 새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어떻게든 법과 규칙을 만듭니다. 불안하기 때문이죠. 그 불안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습관과 일과를 만들어 부여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법을 스스로 부과하고, 반복의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반복은 항상 근본적으로 다르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인위적으로 동일성을 부과하는 과정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태생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들을 하나의 의미에 가둬 넣어 "강제 반복화" 시킨다는 뜻이죠. 이 과정을 들뢰즈는 "차이(동일자)의 반복"이라고 불렀던 거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하죠. 사실은 반복이 있는 게 아니라 반복이라는 의미에 자연을 끼워 넣어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거죠. 어떤 것의 본질을 우리의 불안 때문에, 우리만의 의미로 묶어두고 제한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의 편의 때문에 이름을 붙여 분류해 부르는 것들이 그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편의로 나눠놓은 분류법이 우주의 본질로써 귀결되는것은 아니니까요. "차이" 라는 말 자체가 본질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는 거고요.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고착화,패턴화 시켜 삶을 반복화 시킵니다.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모두 똑같은 동일성을 부여하게 된다는 거죠. 자본주의의 단점이 딱 그거잖아요? 결론에 말씀하신 "불안함 때문에 항상 질서를 찾고 패턴을 찾는 인간이 그렇게 사고하는 게 가능할까?" 는 오히려 들뢰즈의 주장을 도와주는 게 되는거죠. 들뢰즈는 인간이 (어떤 이유에서든) 질서와 패턴을 추구한다고 주장했고, 인간이 임의로 정해 놓은 반복의 개념을 정답처럼 세계에 들이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고 있구요. 애초부터 '차이' 그 자체인 모든 존재들에게 '동일성'이라는 강제적 반복에 굴복하는 삶이 아닌, 매일 매일 다른 삶을 살아내는 그 "차이"를 "반복"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차이를 만들며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뜻이죠.) 그것을 통해 인간이 창의적인 존재로 살기를 바랐던 멋진 사람이구요. 들뢰즈는 인간중심의 관점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정확히 말하면 인간중심의 관점을 벗어났기 때문에 가장 인간을 위할 수 있었던 거죠.
제 생각에 원형/이상에 대한 추구로 인해 생겨난 온갖 부작용(서열에 따른 차별 등)은 결과값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들뢰즈의 말처럼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 될 텐데('옳다'의 기준이 상대적이기에 개별적 존재를 하나하나 인정해야 하므로)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그렇기에 절대적 진리라 할 수 있는 이상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범하는 실수와 오해에서 비롯된 부작용 등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이런 극복 노력에서 들뢰즈의 관점이 무척이나 귀중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의 사상을 이렇게 접할 수 있어 무척 유익했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헐, 며칠 전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다루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남겼는데, 제 댓글을 보고 만드신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제 바람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다니, 기분이 좋네요. 4분 경까지 시청했는데 제 생각이 훤히 간파당한 느낌이네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개요를 듣고 너무나도 비합리적이라 생각돼서 이게 실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단순한 말장난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곧바로 정의로운 사람을 물을 때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의 이데아를 상정하고 그것과 닮아있는 면을 찾으면서 정의로움을 평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흐 말씀하신대로 플라톤은 그저 역사 속의 뒷방 늙은이가 아니네요,,
마지막 들뢰즈적 사고에 대한 충코님의 생각은 상대주의의 모순과 닮은 구조를 가진 것 같네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 상대주의 그 자체도 상대주의의 범위에 포함 -> 상대적이지 않은 것도 가능해짐 여담으로 최근 우리 사회엔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 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죠.. 이데아적 사고를 하시는 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나만의 제 1 공리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낸게 "모든 구분되는 것들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였단 말이죠... 내 외부에 실존하는 물체이든, 전능한 누군가의 농간이든, 오로지 내 뇌속의 망상이든 일단 A와 B가 구분된다는건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이 둘을 구분하는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 ... 뭐 아직까지는 이거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못만나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받아들인 명제인데요... 물론 다른 측면에서 주목한 '차이'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들뢰즈의 철학이 참 친숙하게 다가오네요
I have been fascinated what Deleuz and postmodernism discussing in East region and it is really cool. I don’t understand Korean but visually it’s also cool. Wish you good luck and thank you for your work!
Je suis très heureux de voir que certains de nos philosophes vous intéresse. Je ne comprends rien au coréen (je ne suis même pas sûr que je ne me trompes pas de pays, excusez-moi) mais je suis très honoré de voir une vidéo comme celle ci.
설명을 쉽게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런 사고방식을 절대화시킨다는 말도 웃기지만, 약사인 제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반과학 담론같다고 하더라고요. 서로 다른 개별성을 존중하며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그 가치를 절대화시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원형과 같은 보편성도 실제 우리의 경험과 현상을 많이 설명해주거든요. 강아지가 강아지로 묶이기에 많은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고 강형욱님같은 탁월한 조련사들이 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죠. 조화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데아(형상)' 라 일컫는 단어를 명명하는 행위자는 전체집합으로 '사람' 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나 그 고유명사 '사람(이데아를 닮은 형상이라고 자칭함)'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만큼 시뮬라크르로 존재하는 사람들인거죠 실제로 '닮음'이란 단어야말로 의미없는 단어에 불과합니다 사실 한 뱃속에서 난 형제지간 정도나 닮았지 사람은 다 다른게 맞죠 그러므로 '이데아'의 존재와 '시뮬라크르' 의 존재는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각각의 시뮬라크르(별의별 인간군상)중 누가 더 이데아에 관심이 있냐와 누가 더 사랑(자유자제로 감사한 사유) 할 줄 아느냐와 누가 더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전체집합 사람이 되어볼까? 가 중요할 뿐이죠 그래서 이렇게 연기중인거죠 현재 우리가...
제가 보고 들은 들뢰즈 설명 중에 가장 쉽게 와 닿아요. 역시 탁월한 눈높이 설명입니다. 앞 부분에 특히 그렇고 전반적으로 오늘 들뢰즈 설명 처럼 자크 데리다가 가까이 또 자주 떠 오르기는 처음입니다. 원본을 상정하는 것은 차별과 폭력의 출발점입니다. 당연히 유일신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언어 생활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자유와 평등의 확대를 위해서는 시뮬라크르적이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chungco_phil 받아들인다는 걸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따라 다를 듯요. 완전히 시뮬라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언어 생활 자체와 당장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사물을 분절하고 구분하여 개념화 시킨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차이를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볼 줄 아는 것은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좀 더 근원적인 사유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 극단으로 내닫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하나의 기준점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C.S.LEWIS의 책의 논의와 정반대되는 주장이기도 한데, 영상의 마지막 의문제기, 곧 기준점이 없을 경우 멀리 가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충코님도 루이스의 책을 읽어봤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저도 들뢰즈 식 사고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 살면 한국 사회에서 제가 너무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 대학교 때 들뢰즈를 접했을 때 너무나 놀라웠고 빠져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늘 살던 모습처럼 서열, 차별 같은 것들은 필연적이며, 이를 잘 다루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느껴져요. 그것들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달까요.😅 그래도 이렇게 "차이"를 중요한 관점으로 사고할 수도 있구나 .. 하고 무릎을 탁 쳤던 사상이에요. 무튼.. 그렇습니닷 ㅎㅎ 좋은 영상과 정리감사합니다.
아쿠, 댓글 208개 읽느라 눈알빠짐. 그러느라 충코님 들뢰즈 설명이 희미해져버림. ㅋㅋ 암튼, 플라톤의 이데아는 강렬하다는 것. 들뢰즈의 차이가 잠시 계란바위치기를 했다는 것, 그럼에도 인식의 확장에 기여했다는 것..철학의 소임이 인식, 깨달음의 확장임에야..뭐 비전공자로서 그 정도 알먼 되지..개인적으로 차이, 해체, 이런 좋아함. 기존질서를 깨부수는 무엇, 넘 통쾌하지. 뭔가가 계속되고 고정되고 매몰돼 있음 답답하지, 깨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 매력적임. 질서는 무지한 그대들에게 맡기고 말이지. ㅎㅎ
말미에 '제대로'라는 단어로 시뮬라크르의 모순을 짚는 건 들뢰즈 사유에 대한 패착이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영상 전반 설명하신 직선적 사유와 본질의 부정은 곧 개념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포함되니까요. 때문에, 응당 언어로서 충코님의 표현으로 '혼돈'이라는 들뢰즈의 방식을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나 싶습니다. 혼돈이라는 것 조차 질서를 상정 했을 때 성립 가능한 단어이고 그 혼돈의 이미지는 통념화되어 대다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미지' 자체를 일종의 이데아적 허구로 보는 들뢰즈와 들뢰즈의 사상에선 보편적 의미에서 혼돈은 더 이상 혼돈이 아니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과연 그 경지가 가능한 건지에 대한 의구심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세상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는가? 모든 것은 에너지의 이동과 충돌. 인간은 누구나 이상향을 가지고 있고 이상향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왜 항상 무언가를 원하는가? 죽지않기 위해서? 아닐 것이다. 최종의 목적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충돌을 통해서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것은 구분을 통해서 의미가 생긴다. 그 구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차이이다. 그리고 차이는 현재진행된다. 인간은 구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구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면 상상할 수 있는 존재라면 한차원 두차원 세차원 모든 차원의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권력과 권위 사회질서 생존적욕구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모든 변화는 어디서 왔고..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인간은 무엇이고 생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시뮬라크르는 관련 전공 수업을 두 번 들은 입장으로서(재수강은 아니고 다른 포인트로써 대중문화에 대한 저변을 이해하기 위해 들은 것임) 이 강의는 오해의 소지가 좀 있어 보입니다😅 시뮬라크르는 말씀하신 것처럼 다름을 통해 특징지어지지만 대부분은 이 포인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담배 그 잡채를 보는 것과 그 담배를 다각도로 사진을 찍음으로써 실제 담배와 그걸 찍은 담배 사진은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니까요 일단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시뮬라크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과도 닮지 않은 것입니다.‘ - A 닮았어도 시뮬라크르 아닌가요. 시뮬라크르가 인식론적인 것인지, 실재론적인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실재론적이라면 그것은 물자체와 유사한 개념인 것 같거든요. 인식론적이라면 상대성을 논할 필요가 있는 것 같고요. ‘시뮬라크르는 닮음의 기준 자체를 부정하니까요.‘ - B 기준이 없는데(B) 어떻게 부정문(A)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A는 인식론적이요, B는 실재론적이라 생각이 들어서 개념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네요. ’닮았는지 아닌지 모른다‘라거나 ‘닮았는지는 관심없다. 무시한다.’라거나 해야 ‘닮음의 기준 자체를 부정’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1 : 위키백과 실재론 칸트의 실재론 칸트는 경험적 대상인 "제1성질"을 포함한 경험적 인식의 대상을 모두 "현상"이라 정의하고, 인식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를 상정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데 여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며, 사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본다. 칸트에게 실재는 물자체이지만, 그것을 인식가능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대신 현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문제 삼음으로써 진리의 문제설정을 바꾼다. 즉, 진리를 대상에서 찾는다면 인식 불가능한 실재인 "물자체"에 대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므로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현상"을 우리의 감각 기관은 끊임없는 왜곡으로 받아들이므로 마찬가지로 진리를 얻을 수 없지만, 진리를 주관(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현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을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칸트는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지칭한다. 칸트의 물자체는 이후 다양한 실재론의 입장들을 야기한다.
참고 2 : 쇼펜하우어 철학 강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철학적 구분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이를 나의 입장에서 고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철학의 대상은 경험이다. 그러나 다른 학문처럼 특정한 경험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철학의 대상은 일반적인 경험이다. 즉 경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가능성, 영역, 본질적 특성,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 형식과 자료를 통해 의의와 기능을 구분한다. 따라서 철학의 기초명제는 경험이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추상적 개념으로 직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권 17장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철학이 고찰해야 할 번째 명제는 일반적인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개체 및 그 매개체의 외부적 형식과 내부적 성격이다. 여기서 매개체는 겉모습과 인식이다. 인식은 지정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모든 철학은 인식능력과 인식능력의 형식, 그리고 그 형식의 법칙을 검토하고, 그 타당성과 한계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된다. 즉 검토가 제1철학이다. 제1철학은 1차적 표상, 즉 직관적 표상의 고찰과 2차적 표상, 즉 추상적 표상 및 그 과정이 합법적인가를 고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가 지성론이며, 후자는 논리학, 즉 이성론이다. 이 같은 총론적인 부문은 존재론과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이론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소위 '물자체'로 규정하는 사물의 핵심적 주체는 우리의 인식능력에 대한 형식 및 본성에 의거, 어떤 주관적인 논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파악되는 모든 현상은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 의해 현실화되므로 인식능력을 통해 파악된 사실들은 이 같은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성격과 매우 유사한 경향을 띠게 된다. 이를 비유하자면, 선글라스를 쓰고 사물을 볼 때와 일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볼 때의 차이점과 같다. 안경이라는 형식과 안경의 색상이라는 본성에 따라 사물의 크기 및 색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개인이 보유한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 의해 동일한 현상이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검토가 끝나면 이를 더욱 확대시켜 정의하는 형이상학이 시작된다. 철학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 즉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질서를 발견하고, 다시 질서에서 자연을 분리시키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들어내고, 만들어진 조건에 새로운 현상을 대입하여 현상에 구애받지 않는 사물의 본질을 추출해낸다. 이렇게 일상적인 현상에서 모든 현상에 공통적으로 대입이 가능한 사물의 본질을 추출하는 것이 일반철학이라면,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더욱 자세히 깨달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방법으로는 외적인 경험을 내적인 경험과 합치시키는 것과, 물자체와 대립되는 현상들의 의미와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전체 현상의 이해에 도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실 형이상학은 난생 처음 보는 글자를 해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학문이다. 지금까지 형이상학은 이 같은 방법을 통해 현상에서 현상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어떤 현상의 배후에 가려진 진실을 발견해냈고, 이렇게 발견한 진실을 또 다른 현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의 배후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 같은 형이상학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의 형이상학, 아름다움의 형이상학, 도덕의 형이상학이 그것인데,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구분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가능해지려면 형이상학이라는 일종의 방법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형이상학은 우리의 의지 속에서 물자체, 즉 현상에 내재된 궁극적인 본질을 밝혀내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인간의 외부세계에서 관찰된 의지를 먼저 고찰한 후 이 같은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도덕적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외부의지가 관찰되는 자연현상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순수한 파악이 실행되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의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다. 합리적 심리학, 다시 말해 정신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칸트가 증명한 것처럼 정신이라는 일종의 현상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가설이며, 따라서 입증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도 '정신과 자연'의 대립을 주장하는 속물적인 헤겔파들은 구시대가 남긴 철학의 침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모든 사물의 본질과 연관 지어 관찰할 때 비로소 이해된다. 이미 플라톤도 파이드로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그대는 정신의 본질과 세계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감히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머리말. 1. 영상을 시청하니 몇가지 생각이 듭니다. 몸말. 가. 이데아. 1. 이데아는, ⑴ 플라톤이 모르는 것. ① 이유: 현실에 없는 가상 사회. 1.1. 현실과 이데아. ⑴ 현실 사회와 이데아 사회를 연결해서 설명. ① 현실 사회=있는 것. ② 이데아 사회=없는 것. 1-1. 의미. ⑴ '이데아'는, ①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이유: 있는 사회에, 없는(모르는) 사회를 연결했으니, ⑴.1. 이 연결을 만족하는 경우는, ① 이데아=현실을 가리키는 기능. ㉠ 이유: 가리키는 기능은, 그 자체에 의미가 없으니. 2. 1번 이유로, ⑴ 이데아 의미는(이데아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①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현실 사회 긍정을, 정착·유지·확장...등 시키는 방법. ㉡ 현실 사회 부정을, 멈춤·퇴출·예방...등 시키는 방법. 이겠고, 나. 시뮬라크르. 1. 시뮬은, ⑴ 들뢰즈가 모르는 것. ① 이유: 인구 80억명 차이를 아는 건 불가능. 1.1. 현실과 시뮬. ⑴ 현실 사회와 시뮬 사회를 연결해서 설명. ① 현실 사회=있는 것. ② 시뮬 사회=모르는 것. 1-1. 의미. ⑴ '시뮬'은, ①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이유: 있는 사회에, 없는(모르는) 사회를 연결했으니, ⑴.1. 이 연결을 만족하는 경우는, ① 시뮬= 현실을 가리키는 기능. ㉠ 이유: 가리키는 기능은, 그 자체에 의미가 없으니. 2. 1번 이유로, ⑴ 시뮬 의미는, ①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현실 사회 긍정을, 정착·유지·확장...등 시키는 방법. ㉡ 현실 사회 부정을, 멈춤·퇴출·예방...등 시키는 방법. 이겠고, 2.1. 예를 들면, ⑴ 히잡(머리에 쓰는 두건)에, 시뮬을 연결하면, ① 히잡류 착용 강제(법) 사회에서, ㉠ 히잡류 착용 선택 사회는=시뮬 사회(차이). ② 히잡류 착용 자유(선택) 사회에서, ㉠ 히잡류 착용 강제(법) 사회는=시뮬 사회(차이). 2.1.1. 의미. ⑴ 히잡(시뮬)류가, 강제(법)일때, ㉠ 히잡류=히잡류 착용법을 만든, 사회를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① 사회에, 히잡류 착용법 필요 이유. ② 사회에, 히잡류 착용법 폐지 이유. ⑵ 히잡(시뮬)류가, 자유(선택)일때, ㉠ 히잡=히잡류 착용 선택을 만든, 사회를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① 사회에, 이 자유(선택) 유지가 필요한 이유. 맺음말. 가. 종합. 1. 이데아 의미가 이러하고, 2. 시뮬라크르 의미가 이러하니, 3. 위 2개 연결. ⑴ 이데아·시뮬 의미는, ① 현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4. 3번 확인·적용. ⑴ 들뢰즈 시대는, ① 평등이 사회 전반에 퍼지는 시기. 4.1. 평등 영역에, ⑴ 자유가 있고, ① 자유 영역에, ㉠ 혼돈(80억명 자유)이 있으니,
4-1. 의미. ⑴ 소비평등은, ① 사회가 나아갈 방향('시뮬' 이 가리키는).
5. 3번 확인·적용. ⑴ 플라톤 시대는, ① 4번 방식으로 확인·적용. ==================== 덧붙이는 글. 1. 지혜자는, ⑴ 아는 것을 말하고, ⑵ 모른 것을 말하지 않고,
2. 사회 영역에, ⑴ 지혜가 있고, 2.1. 이유. ⑴ 지혜(지식)=두 사람 이상일때만 가능.
3. 모르는 것에, ⑴ 플라톤 '이데아'와 ⑵ 들뢰즈 '시뮬'이 있고, 3.1. 지혜자는, ⑴ 모른 것을 말하지 않을테니, ① 모르는 것 기능=의미없음. 3.1.1. 의미없음 영역에, 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니, ① 달=의미있음. ② 손가락=의미없음(단지 달을 가리키는 기능).
4. 위 3개를 연결하면, ⑴ 플라톤 '이데아' 와 ⑴ 들뢰즈 '시뮬' 의미는, ① 현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4.1. 소비 평등은, ⑴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시뮬-무의미-'을 사용한 목적). 4.2. OOOO은, ⑴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데아-무의미-'를 사용한 목적). 이겠군요. ==================== 가. 기타. 1.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면, ⑴ 시뮬: (80억명 혼돈=80억명 규칙). ⑵ 이데아: '시뮬' 처럼 설명. 1.1. 이유. ⑴ 모르는(혼돈)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면, 1.1.1. 모르는 것 의미는, ⑴ 귀에 걸면, 귀걸이 의미. ⑵ 코에 걸면, 코걸이 의미(알레고리). 2. 예). ⑴ 외계인(모르는 것)을 생각. ① 달 토끼, ET, 에어리언, 마블 외계인...등 2.1. 외계인 의미. ⑴ 귀에 걸면, 귀걸이 외계인. ⑵ 코에 걸면, 코걸이 외계인. 이 되니깐요.
'뭘 담는 것' (이데아)= 그릇(이데아를 닮은 그 무엇) 그러나 그릇은 별의별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넘쳐나죠 깊이와 넓이와 색상의 다름과 차이만큼... 그런데 코렐이라는 그릇 회사에서 만든 그릇이 있는데 이거 카피한 그릇이 시중에 돌아다니죠 어떻게 하면 저 뭘 담는 역할로서 제대로 사용되어볼까 하고 유통망을 넓히고 제품가격을 진짜코렐보다 낮추고 품질도 개선하려 노력하고 이래저래 드디어 소비자에게 팔려가 그 집의 식탁위로 자리하게 되죠 즉 뭔가 되어갈려면 되어가고자 하는 이정표는 있기 마련인거죠 철학에서 플라톤은 이미 좋은 자리 먼저 선점한 즉 기선제압에 성공한 자라 봐 줘야될겁니다
저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고 예전에 이런 식의 책들을 좋아하기도 했죠. 문학을 읽고 복잡한 수사로 그것을 비평하는 것도 좋아했고요. 이런 식의 인문학은 나름대로의 유희적인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마치 소수만 즐기는 취미생활 같은거죠.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부합하느냐, 우리의 삶을 바람직하게 반영하고 비춰주느냐. 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사실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회의적일 뿐더러 들뢰즈류의 말장난은 이제 지치네요. 봅시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이 세상 자체가 이분법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디에든 관측이 생긴다면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항상 있잖아요. 이게 둘이죠. 맞죠? 관계의 측면을 살펴볼까요. 당신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럼 이미 부모와 자식 이렇게 둘이죠? 둘이라는 대립항이 생겨버립니다. 그럼 사건이 생긴다면? 당신이 공에 헤딩을 했습니다. 그러면 머리의 작용과 공의 반작용이 있고 여기에서 둘이 또 생겨나 버립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도 책과 책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죠.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둘이 아닌 것을 데려와보라고 하세요. 이 우주에 둘을 만들지 않고 생겨나는 사건은 없습니다. 이렇듯 우주가 영원히 텅 빈 것이 아닌 이상 이미 그 안에 둘이라는 관념이 자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분법적인 관점과 룰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고, 이런 플라톤적 사고관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한 것이죠. 들뢰즈 아저씨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이 우주는 플라톤의 해석이 꽤 들어맞는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해석에 따른 부작용이 있죠.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집안에서 형이라고 해봅시다. 그럼 저절로 나머지는 동생이 되겠죠. 이거 확실히 이분법이죠? 형은 동생들을 잘 이끌어야 합니다. 형이 아무런 생각없이 동생들이 도박을 하든 마약을 하든 관심 없고 방치한다면 집안이 망할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분법적으로) 형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시도때도 없이 갈구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맨날 때리고 빵 사오라고만 하고 핍박하기만 하면 그게 좋은 집안일까요? 그게 잘 돌아갈까요? 아니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형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즉 이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이분법적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 자체가 이 세계 자체에 내재되어있는 숙명이라고 봐야 합니다. 숙명이라고 하니깐 너무 진부한 표현 같은데, 그냥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구조라고 해두죠. 중국도 살육의 시대인 춘추 전국시대가 마무리되며 절대적인 단일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방향으로 갔죠. 이는 카오스와 다양성의 시대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하나의 왕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행한 시기로 봐도 그다지 억지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평안하게 했을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종교와 중앙집권적 국가관은 플라톤적 이데올로기의 현실화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념의 보호 아래에서 많은 보통 사람들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죠. 이게 다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유익한 점입니다. 종교와 중앙 집권적 국가관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류에게 가해진 폭력과 살인을 파격적으로 경감시켰고 많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답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무분별한 야생에 던져진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죠. 이는 많은 사회학적 논의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 주제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죠. (사회과학 서적. 종교 서적 아님.) 하지만 우리 인류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서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고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심한 이분법적 사고관에 경도되어 함부로 매도하고 적으로 여기기보다는, 현실적인 여건 하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존중하고 포용하여 다같이 인간답게 살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잘 들어맞는 해석이 아닐까요? 오히려 쓸모없는 개념들을 남발하며 둘, 대립항, 본질, 이분법이라는 것이(당연히 존재한다고 보는게 적절해보이는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그저 모든 것이 차이를 가지며 반복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좀 괴상한 해석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요약하자면 이데아라는 개념, 이분법적 사고관, 플라톤적 해석, 본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관념 체계는 여전히 꽤 잘 작동하고 있고 우주의 원리와 물리적으로도 명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런 세계관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들어맞지 않는 부분과 현실적인 폐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또한 이조차도 이데아와 그 외라는 개념으로 어느정도 설명 가능하죠.) 우주는 크고 인간은 작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제대로 된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이를 해석도 어려운 복잡한 언어 속에서 융해하여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고요. 잘 들어맞는 플라톤적 원리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플라톤이 맞다 들뢰즈가 틀리다가 아니라 그냥 우주가 생겨먹은게 그렇다는 거예요. 축구 시합에서 축구공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축구공이 사라지냔 말이죠. 하지만 들뢰즈는 그렇지 않고, 그냥 마치 나라를 빼앗기 위한 권력투쟁처럼 그저 전복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철학이 사기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주창하는 것 자체가 아주 거대한 모순이에요. 본인의 철학과 그 외의 철학으로 이 세상을 둘로 나눠버리기 때문이죠. 애초에 둘로 나누지 않고 무슨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는 이런 점에서 틀렸고 본인은 그런 점에서 맞다고 해야 하는데요. 이는 아주 전형적인 플라톤적 사고의 답습 아닐까요?
정리를 알기 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듣다보니 인류가 지난 3-40년간 얼마나 멀리 와버린 것인가 새삼 감회가 드네요. 20세기와 현재를 구분하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적하신대로 이게 끝은 아니겠죠. 상대주의에 대항해 절대적 세계관으로의 회귀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은 정해진 답은 따로 없고 모든 사건은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있을 뿐이군요 모든 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어떤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각자의 생존본능 즉 진화의 결과이겠군요. 참! 진화라고하면 안되겠군요, 진화는 마치 더 좋아진다는 의미인데, 진화가 아니라 적응 또는 변화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들뢰즈의 글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주의를 뒤집다(Renverser le platonisme)"라는 제목으로 1966년에 처음 발표. 플라톤이 모든 존재(자)의 바탕에 이데아를 두고 현실세계의 차이와 생성을 이데아의 모방과 타락으로 설명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이를 뒤집어 존재의 바탕에 시뮬라크르를 두고 이로부터(차이생성과 반복으로부터) 존재자들, 개체들, 동일성들, 이데아들의 발생을 설명하려 함. -> 여기서 나온 책이 (1968). 따라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와 [들뢰즈에 의해]전복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함.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차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차이로 어떤 A와 B 사이의 차이를 말함. [들뢰즈에 의해]전복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는 시뮬라크르이자 어찌보면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차이생성적 힘을 가리킴. 보드리야르의 저서 [국내번역:시뮬라시옹]은 1981년에 처음 출간. 1. 보드리야르는 일정부분 들뢰즈의 영향 하에서 시뮬라크르 문제를 다룸. 2. 그러나 들뢰즈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시뮬라크르를 얘기했던 반면(플라톤주의 안에서 플라톤의 존재론 전복을 시도), 보드리야르는 어디까지나 인식론적 맥락에서 현대사회에서의 인식조작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함. 3. 사실 들뢰즈는 보드리야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며 형이상학자이자 실재론자임.
결국 기준이 있어야 차이에 대한 개념도 생기는게 아닌가요? 뭔가가 다르다, 라는 식의 차이는 어떤 기준을 대상으로 비교하여야 나오는게 아닌가요? 다름을 통해 특정지어지는 무언가도 상위의 어떤 기준에 의해, 그것과 유사한가 아닌가에 의해 정리되고 판단되지 않나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차이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 유사성의 기준이 없으면 모든 각각의 사물들은 을 박탈당하지 않나요? 근본적으로 질서 이전에 카오스가 있다(혹은 )는 주장에는 공감하나, 시뮬라크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닮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는 공감을 못하겠네요. 결국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 자체도 이데아에서 파생되었으니, 차이를 상정한다 해도 이데아에서 벗어나지 못할걸로 보이는데요..... 세상은 혼돈이었으나, 우리는 이미 언어의 세계에 진입했으니 무엇과도 닮지않은 카오스적 차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건 적어도 제 머리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결국 사고라는 것도, 질서에 의해 분류되고 이름붙여진 사물과 현상을 도구로 하여 가능한것이라서요.......
@@RockRock-zm4pq 오... 하긴 그럴수도 있네요. 언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게 아니고 자의적이고 개인사적인 것이라서 따지고보면 이것도 차이로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언어는 번역되기도 하고, 단어는 다양하게 쪼개지고, 의사소통엔 균열이 생겨나잖아요. 언어는 질서를 부여하지만 파편적인 것이기도 한데, 그 부서진 조각 하나를 쥐고서 내 것이 너의 조각보다 더 우월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러한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수도 있군요.
말씀하신 의문은 들뢰즈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설명됩니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개체'나 '동일성'이 세계의 변화하는 여러 상태 중 몇 개를 골라 차이나는 부분들을 무시함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세계는 카오스 그 자체 유일하게 존재하며 무한하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세계의 일부분을 잘라내어 '개체' 니 '속성'이니 말한다는 것이죠
결국 존재론입니다. 들뢰즈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존재의 근본 원리에 위치시키기 위해 원자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존재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라며 전체론적인 세계관을 가져가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가 실제로는 무한히 변화하는 하나의 단일체이며, 우리의 인식활동과 세계의 작동이 왜 '개체' 라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지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논증합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나오는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실의 총체다'와 비슷한 인식입니다. 세계는 사건/사실/현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의 언어활동은 이런 세계에 격자틀을 씌워넣는 활동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들뢰즈 역시 세계는 하나의 존재로써 존재하고 그것에 적용되는 격자틀이 '동일성의 원리'(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로는 '논리적 언어'겠네요) 라고 주장한 것이죠.
@@JunyoungPark-x7f 아주 상세하고 정성스러운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 제 글에 처음 댓글 달아주신 분 글을 읽고서 제 의문이 쉽게 논파될 수 있음을, 그에 대한 답이 쉽게 도출될 수 있음을 아차! 하며 깨달았는데 준영님의 댓글을 보니 피상적으로만 알았기에 가졌던 의문이 완전 해소된거 같아요! 원래 들뢰즈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는데 준영님 댓글보고 그의 저서를 탐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다시 한번 댓글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영상이네요. p.s. 이 번 책은 첫 책이라는 걸 차치하면... 님의 영상들에 비해서는 아쉬웠습니다. 사유의 단단함은 느낄 수 있었지만 너무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이랄까.. 제가 자극적인 정보들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논쟁적인 주장을 펼쳐줬더라면 하는 마음였습니다.
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설명이 나오지 않는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 영상으로는 해당 철학을 이해하기는 어려울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익숙한 무엇을 말한 후, 그 반대의 것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고는 그 이유나 예시는 말해주지 않네요. 들뢰르는 차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것이 어떤 이유로 더 근본적인지를 설명하지 않은 철학자인건가요? 주장뿐인 주장을 한 철학자인가요...? 카피와 시뮬라르크가 무엇인지는 잘 설명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익숙한 카피중심의 사고 이외의 시뮬라르크 중심의 사고가 무엇때문에 추구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가 않네요. 혼란스러워요
아 단어의 개념만을 다룬 영상이네요 제가 너무 성격이 급했어요ㅋㅋㅋ 그래서 도대체 시뮬라르크를 중심으로 한 사고가 무엇때문에 중요한건지 근거를 알고싶었는데 그냥 뚝 끊겨서 당황스러웠나봐요. 댓글을 읽어보니 pc적인 사고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철학인것 같긴 합니다. 근데 그게 왜 중요한지는 알수가 없네요 정말 궁금한데ㅋㅋㅋ
마지막에 던진 충코님 문장에 동의합니다. 시뮬라크라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제대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모순인듯해요. "카테고리"라는 사고의 도구를 사용해서 살아가는것이 인간본성이고 사회생활을 영유하는데 필수조건인듯. ex) 남자, 여자. 등등의 카테고리를 인식하는것은 인간의본성이죠. 그걸 무시하면 카오스 됩니다. 설마 들뢰즈가 그런소릴한것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충코님의 설명이 불충분한걸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충코님 팬이니 제 글 섭하게 듣지는 마세요.
라캉 철학을 가져와보자면… 상상계는 혼돈 카오스가 맞죠 아무런 카테고리도 기준도 없죠. 그 후에 상징계, 즉 카테고리 기준 정의 규범 등도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징계를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정의나 규범 등을 아예 없애자고 하는 것은 혼돈이고 반지성주의지만, 그것을 알고나서 부수는 것은 그 지식을 넘어서기 위해서 기존의 지식을 ‘깨부수는’ 과정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에서 분열되어 이분법이 나옴 처음 하나가 없다면 이분법도 없음 이분법이 나쁜것이 아니라 이분법에 사로잡혀 그 이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계 하나, 이것은 다양한것들이 모여서 다만 잠시 하나라고 규정지었을뿐 진짜 절대의 원형이라는 하나는 없음 하나라는게 있는것 처럼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도 없음 꿈,그림자,물거품,이슬,번개와 같다
세상을 체계화하고 서열을 나누는건 혼돈스런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량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생물학적인 본능이고 이건 개인이 거부한다고 켜고 끄고 할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우리가 그런 생물이에요. 들뢰즈라는 사람은 자기는 그런다고 주장 하지만 믿기 힘드네요. 마치 누군가가 음식을 안먹어도 살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뭔 개소리야... 싶죠 제 생각엔 이성적인 영역으로 너무 파고 들어서 현실에서 적용할 필요도 없고, 할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그닥 도움 되지도 않는 탁상공론류의 철학 같습니다.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지는 제쳐두고, 체계화되지 않은 정보는 무한한 혼돈일 뿐이죠
헬쓰클럽에서 벤치하다가 옆에 노인분이랑 눈 마주쳐서 인사드리고는 통성명하게 되었음. 그분은 어느대학 철학과 교수라고 소개하시더니 갑자기 포스트모더니즘에대해 한 시간 넘게 강의를 시작하심. 누가 헬쓰하다 들뢰즈 가타리 라캉을 들을거라 상상이나 했을까요.오래전 일인데도 지금도 생각나네요.
헬스장에서 그걸 1시간 다 들으신게 대단하세요. 인간미 뿜뿜하셨네요ㅋㅋㅋ
그 분도 당신이 지금까지도 기억할 걸 은연중 느꼈기에 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렇게 한 분야에 미쳐있는 분들이 대학교수를 하고 연구직에 있어야 하는것 같아요ㅋㅋㅋ 어차피 그분들 하는일이 가르치는것도 있지만 핵심은 연구하고 논문쓰는일이니. 그분은 인생의 모든 관심이 철학 그 자체여서 대화중에도 자신의 관심사가 과감하게 표출된것 같은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분들이 괴짜같지만 재밌더라구요.
ㅋㅋㅋ 저도 뵙고 싶네요 ㅋㅋㅋ 그 분🎉
너무 머싯는데
해석이 조금 의아해 댓글을 남깁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시간의 모든 순간이 독특하고 다른 순간과 다르기 때문에 반복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장미꽃과 저 장미꽃은 분명 다른데 인간이 가진 인식체계의 한계가 그것을 담아내지 못할 뿐이죠. 그렇지만 인간의 편의를 위해 그 꽃들은 같은 꽃으로 불려져야만 합니다. 그건 인간의 편의 이상의 의미는 세상에 없는거고요.더 나아가, 어제 본 그 장미 꽃 한송이를 오늘 다시 보게 되면 어제 봤던 그 장미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물리학에서도 증명된 사실이죠.) 인간은 세포가 몇개월마다 리셋되어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간이라고 규정할만한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단지 분류를 위해서지, 모든게 같아서는 아닙니다. 들뢰즈의 차이는 불교의 무상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 “차이”는 매 순간순간 그 시시각각의 새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어떻게든 법과 규칙을 만듭니다. 불안하기 때문이죠. 그 불안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습관과 일과를 만들어 부여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법을 스스로 부과하고, 반복의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반복은 항상 근본적으로 다르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인위적으로 동일성을 부과하는 과정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태생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들을 하나의 의미에 가둬 넣어 "강제 반복화" 시킨다는 뜻이죠. 이 과정을 들뢰즈는 "차이(동일자)의 반복"이라고 불렀던 거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하죠. 사실은 반복이 있는 게 아니라 반복이라는 의미에 자연을 끼워 넣어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거죠. 어떤 것의 본질을 우리의 불안 때문에, 우리만의 의미로 묶어두고 제한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하고 있다는 거죠. 우리의 편의 때문에 이름을 붙여 분류해 부르는 것들이 그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편의로 나눠놓은 분류법이 우주의 본질로써 귀결되는것은 아니니까요. "차이" 라는 말 자체가 본질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는 거고요.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고착화,패턴화 시켜 삶을 반복화 시킵니다. 모두 다른 인간들에게 모두 똑같은 동일성을 부여하게 된다는 거죠. 자본주의의 단점이 딱 그거잖아요? 결론에 말씀하신 "불안함 때문에 항상 질서를 찾고 패턴을 찾는 인간이 그렇게 사고하는 게 가능할까?" 는 오히려 들뢰즈의 주장을 도와주는 게 되는거죠. 들뢰즈는 인간이 (어떤 이유에서든) 질서와 패턴을 추구한다고 주장했고, 인간이 임의로 정해 놓은 반복의 개념을 정답처럼 세계에 들이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고 있구요. 애초부터 '차이' 그 자체인 모든 존재들에게 '동일성'이라는 강제적 반복에 굴복하는 삶이 아닌, 매일 매일 다른 삶을 살아내는 그 "차이"를 "반복"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차이를 만들며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뜻이죠.) 그것을 통해 인간이 창의적인 존재로 살기를 바랐던 멋진 사람이구요. 들뢰즈는 인간중심의 관점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정확히 말하면 인간중심의 관점을 벗어났기 때문에 가장 인간을 위할 수 있었던 거죠.
중관과 유식을 서구권에 소개한 들뢰즈
자세한 설명 도움이 많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동양사상의 서구화 ㅡ
개념 개작 ㅠ 들뢰즈 데리다 ㅡ 불교 도교의. 현대버전. ㅋ
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차이의 반복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차이가 어떻게 동일자가 되는지 궁금합니다.
@@SteveJobs_ 우리가 동일자라고 칭하는것들이 사실은 차이의 산물이라는 뜻으로 적었습니다.
제 생각에 원형/이상에 대한 추구로 인해 생겨난 온갖 부작용(서열에 따른 차별 등)은 결과값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들뢰즈의 말처럼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 될 텐데('옳다'의 기준이 상대적이기에 개별적 존재를 하나하나 인정해야 하므로)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네요. 그렇기에 절대적 진리라 할 수 있는 이상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범하는 실수와 오해에서 비롯된 부작용 등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이런 극복 노력에서 들뢰즈의 관점이 무척이나 귀중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들어본 철학자의 사상을 이렇게 접할 수 있어 무척 유익했습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헐, 며칠 전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다루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남겼는데, 제 댓글을 보고 만드신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제 바람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다니, 기분이 좋네요.
4분 경까지 시청했는데 제 생각이 훤히 간파당한 느낌이네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개요를 듣고 너무나도 비합리적이라 생각돼서 이게 실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단순한 말장난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곧바로 정의로운 사람을 물을 때 본인이 생각하는 정의의 이데아를 상정하고 그것과 닮아있는 면을 찾으면서 정의로움을 평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흐
말씀하신대로 플라톤은 그저 역사 속의 뒷방 늙은이가 아니네요,,
18년 전 천개의 고원을 읽을 때에 명확하게 정리를 못했었는데..이렇게 정리를 깔끔하게 해주셨네요.
마지막 들뢰즈적 사고에 대한 충코님의 생각은 상대주의의 모순과 닮은 구조를 가진 것 같네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 상대주의 그 자체도 상대주의의 범위에 포함 -> 상대적이지 않은 것도 가능해짐
여담으로 최근 우리 사회엔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 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죠.. 이데아적 사고를 하시는 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나만의 제 1 공리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낸게
"모든 구분되는 것들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였단 말이죠...
내 외부에 실존하는 물체이든, 전능한 누군가의 농간이든, 오로지 내 뇌속의 망상이든
일단 A와 B가 구분된다는건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이 둘을 구분하는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
... 뭐 아직까지는 이거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못만나서 그럭저럭 만족하고 받아들인 명제인데요...
물론 다른 측면에서 주목한 '차이'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들뢰즈의 철학이 참 친숙하게 다가오네요
a는 a이다와 같은 동어 반복문은 반박의 여지가 없죠!😂
와... 이것 저것 입문서 꼭지도 읽어 보고, 강의도 듣고, 영상도 찾아보았는데 들뢰즈의 '차이'가 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책도 구입하겠습니다!
I have been fascinated what Deleuz and postmodernism discussing in East region and it is really cool. I don’t understand Korean but visually it’s also cool. Wish you good luck and thank you for your work!
동일성에 반한 차이와 그 차이의 반복 시뮬라크르 사건과 생성 리좀 노마디즘 경계성 탈영토화 등 들뇌즈의 엄청난철학적 사유를 이렇게 쉽게(무성의하게) 알려주다니 대단합니다
사물의 근원은 혼돈에 있다는게 들뢰즈의 철학이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Je suis très heureux de voir que certains de nos philosophes vous intéresse. Je ne comprends rien au coréen (je ne suis même pas sûr que je ne me trompes pas de pays, excusez-moi) mais je suis très honoré de voir une vidéo comme celle ci.
merci
Deleuze is unpopular philosopher in France
@@SteveJobs_ je suis pas d’accord avec votre avis . mes professures à paris qui sont beaucoup encore inspirés par deleuz
설명을 쉽게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런 사고방식을 절대화시킨다는 말도 웃기지만, 약사인 제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반과학 담론같다고 하더라고요. 서로 다른 개별성을 존중하며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그 가치를 절대화시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원형과 같은 보편성도 실제 우리의 경험과 현상을 많이 설명해주거든요. 강아지가 강아지로 묶이기에 많은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고 강형욱님같은 탁월한 조련사들이 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죠. 조화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들뢰즈를 읽지 못했고, 몇번 시도하다 실패했지만 말씀대로 여러 전반에 펼쳐져 있는 익숙한 논리네요. 의미와 패턴보단 카오스, 서열과 계급보단 차이.
제 인생 근 10년간중 가장 충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영상입니다…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라톤, 헤겔, 지젝 vs 도가사상, 니체, 들뢰즈 대결구도인거 같아서 꿀잼경기를 보는거 같네요 ㅎㅎ
ㅋㅋㅋ재밌네요
'이데아(형상)' 라 일컫는 단어를 명명하는 행위자는 전체집합으로 '사람' 이라 이름합니다
그러나 그 고유명사 '사람(이데아를 닮은 형상이라고 자칭함)'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만큼 시뮬라크르로 존재하는 사람들인거죠
실제로 '닮음'이란 단어야말로 의미없는 단어에 불과합니다 사실 한 뱃속에서 난 형제지간 정도나 닮았지 사람은 다 다른게 맞죠
그러므로 '이데아'의 존재와 '시뮬라크르' 의 존재는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각각의 시뮬라크르(별의별 인간군상)중 누가 더 이데아에 관심이 있냐와 누가 더 사랑(자유자제로 감사한 사유) 할 줄 아느냐와 누가 더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고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전체집합 사람이 되어볼까? 가 중요할 뿐이죠 그래서 이렇게 연기중인거죠 현재 우리가...
정말 들뢰즈를 가장 쉽게 설명해 주네요. 정답을 몰라 정확성은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도 와 닿지 않던 내용들이 확 들어오네요..
I'm a Chinese. Now I'm watching a Korean video talking about Delueze( and leave a comment in English)
와 평소에 내가 하던 생각이 이미 철학개념으로 있다는게 너무 신기함
제가 보고 들은 들뢰즈 설명 중에 가장 쉽게 와 닿아요.
역시 탁월한 눈높이 설명입니다.
앞 부분에 특히 그렇고 전반적으로 오늘 들뢰즈 설명 처럼 자크 데리다가 가까이 또 자주 떠 오르기는 처음입니다.
원본을 상정하는 것은 차별과 폭력의 출발점입니다.
당연히 유일신교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언어 생활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자유와 평등의 확대를 위해서는 시뮬라크르적이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런데 시뮬라크르를 중시하는 철학을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는 게 과연 정말로 가능할지, 과연 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이게 요즘 제 큰 고민 중 하나입니다...
@@chungco_phil 받아들인다는 걸 어떻게 규정하는 가에 따라 다를 듯요.
완전히 시뮬라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언어 생활 자체와 당장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사물을 분절하고 구분하여 개념화 시킨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차이를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볼 줄 아는 것은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좀 더 근원적인 사유방식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쉽고 간결하게 정리해 주셔서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 극단으로 내닫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하나의 기준점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C.S.LEWIS의 책의 논의와 정반대되는 주장이기도 한데, 영상의 마지막 의문제기, 곧 기준점이 없을 경우 멀리 가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충코님도 루이스의 책을 읽어봤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와 예전에 읽고 너무 어려웠던 책이라 짧은 영상으로 정리가 되나 싶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 영상이 정말 잘 정리해주셔서 평소에 고민하던 것에 대한 크게 아하 모먼트를 경험했네요! 정말 감사해요 :)
이번 고2 11월 모의고사 국어 지문이었네요..
저도 들뢰즈 식 사고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방식으로 살면
한국 사회에서 제가 너무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 대학교 때 들뢰즈를 접했을 때 너무나 놀라웠고 빠져들었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늘 살던 모습처럼 서열, 차별 같은 것들은 필연적이며, 이를 잘 다루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느껴져요.
그것들은 없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달까요.😅
그래도 이렇게 "차이"를 중요한 관점으로 사고할 수도 있구나 .. 하고 무릎을 탁 쳤던 사상이에요.
무튼.. 그렇습니닷 ㅎㅎ 좋은 영상과 정리감사합니다.
들뢰즈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쿠, 댓글 208개 읽느라 눈알빠짐. 그러느라 충코님 들뢰즈 설명이 희미해져버림. ㅋㅋ 암튼, 플라톤의 이데아는 강렬하다는 것. 들뢰즈의 차이가 잠시 계란바위치기를 했다는 것, 그럼에도 인식의 확장에 기여했다는 것..철학의 소임이 인식, 깨달음의 확장임에야..뭐 비전공자로서 그 정도 알먼 되지..개인적으로 차이, 해체, 이런 좋아함. 기존질서를 깨부수는 무엇, 넘 통쾌하지. 뭔가가 계속되고 고정되고 매몰돼 있음 답답하지, 깨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 매력적임. 질서는 무지한 그대들에게 맡기고 말이지. ㅎㅎ
항상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미술이론을 전공했습니다. 전공과는 동 떨어져 살다보니 인문학도 자연스레 멀어졌는데요. 옛생각도 나도 역시 재밌다는 생각도 드네요ㅎㅎ 현상학 이해가 너무나도 어려워 고통스러웠는데, 충코님의 쉬운 해석이면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ㅎㅎ
들뢰즈의 핵심사상은 '존재의 일의성'이지 않나요. 이렇게 보면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보이는 거라 철학자들의 사상은 희론일 뿐이죠.
이것보다 쉽게 들뢰즈를 설명할 사람이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이해 쉬운 설명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철학을 배우는거 참 어려운게 원서를 읽으면 한페이지 넘어가기도 참 힘든데 이렇게 남의 해설을 듣거나 2차 해석서를 읽으면 뻔해진다는거죠
10 만 축하드려요. 제가 처음 구독했을때가 2천인가였는데 ㅎㅎ 축하축해🎉
사람 골 아프게 하는 들뢰즈... 이 영상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ㅎㅎ
말미에 '제대로'라는 단어로 시뮬라크르의 모순을 짚는 건 들뢰즈 사유에 대한 패착이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영상 전반 설명하신 직선적 사유와 본질의 부정은 곧 개념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포함되니까요. 때문에, 응당 언어로서 충코님의 표현으로 '혼돈'이라는 들뢰즈의 방식을 해석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나 싶습니다. 혼돈이라는 것 조차 질서를 상정 했을 때 성립 가능한 단어이고 그 혼돈의 이미지는 통념화되어 대다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미지' 자체를 일종의 이데아적 허구로 보는 들뢰즈와 들뢰즈의 사상에선 보편적 의미에서 혼돈은 더 이상 혼돈이 아니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과연 그 경지가 가능한 건지에 대한 의구심에는 동의하는 편입니다.
유사성보다는 특별함에 주목하는 철학이군요
세상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하게 만든 무언가가 있는가?
모든 것은 에너지의 이동과 충돌. 인간은 누구나 이상향을 가지고 있고 이상향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간은 왜 항상 무언가를 원하는가?
죽지않기 위해서?
아닐 것이다. 최종의 목적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충돌을 통해서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것은 구분을 통해서 의미가 생긴다.
그 구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차이이다.
그리고 차이는 현재진행된다.
인간은 구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구분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면 상상할 수 있는 존재라면 한차원 두차원 세차원 모든 차원의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권력과 권위 사회질서 생존적욕구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모든 변화는 어디서 왔고..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인간은 무엇이고 생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생존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리스크다.
혹시 8:20 즘 음악 비유가 어딘가에서 인용된걸까요? 영상에 참고된 문헌을 읽어보고싶어서요. 너무 와닿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만큼 들뢰즈가 저에게 의미가있나봐요
들뢰즈 철학자는 쉬운말도 어렵게 하네 정확한 전달이나 들뢰즈의 글쓰기법이지만, 들뢰즈의 생각을 동의할수도 동의 하지 않을수도 없네요 하지만 그의 철학이 다양성이나 생각의 제안에는 도움과 영감을 주네요.프랑스적인 철학자 현대적인 철학자
간단하고 재밌네여~
이 선생님 유투브 잘 보고 있습니다. 책들도 구매해 읽어 보아야겠네요
이데아, 시뮬라크르에 대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던 스뮬라크르와 다르네요.
혼한스럽습니다. 제가 좀 더 배워야 겠네요.
보드리아르와 들뢰즈의 차이일까요?
우연히 들었는데 확 깨네요... 롱런하시고 흥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좋은내용 잘 부탁드려요
예시가 적절해서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되용
좋은영상감사합니다
차이를 규정 짓기 위해 닮음으로 묶는거 아닌ㄱㅏ요 ㄷ;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계속 행하는 건 이용해야죠. 어떻게 이용하던 개인 선택인거고 다만 지나친 독단은 닮음과 차이로 인해 심판 받겠죠 그리고 집단이 흔들릴만한 변화는 개인이란 단위가 쉽게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시뮬라크르는 관련 전공 수업을 두 번 들은 입장으로서(재수강은 아니고 다른 포인트로써 대중문화에 대한 저변을 이해하기 위해 들은 것임) 이 강의는 오해의 소지가 좀 있어 보입니다😅 시뮬라크르는 말씀하신 것처럼 다름을 통해 특징지어지지만 대부분은 이 포인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담배 그 잡채를 보는 것과 그 담배를 다각도로 사진을 찍음으로써 실제 담배와 그걸 찍은 담배 사진은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니까요
일단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 유튜브는 ㅠㅜ 뭐랄까 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시뮬라크르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거 같네요 베플이 더 정확한 부분을 짚네요
개인적으로 현대철학을 받아들이지만 근본적인 철학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시뮬라크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과도 닮지 않은 것입니다.‘ - A
닮았어도 시뮬라크르 아닌가요. 시뮬라크르가 인식론적인 것인지, 실재론적인 것인지가 궁금합니다. 실재론적이라면 그것은 물자체와 유사한 개념인 것 같거든요. 인식론적이라면 상대성을 논할 필요가 있는 것 같고요.
‘시뮬라크르는 닮음의 기준 자체를 부정하니까요.‘ - B
기준이 없는데(B) 어떻게 부정문(A)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A는 인식론적이요, B는 실재론적이라 생각이 들어서 개념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네요. ’닮았는지 아닌지 모른다‘라거나 ‘닮았는지는 관심없다. 무시한다.’라거나 해야 ‘닮음의 기준 자체를 부정’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1 : 위키백과 실재론
칸트의 실재론
칸트는 경험적 대상인 "제1성질"을 포함한 경험적 인식의 대상을 모두 "현상"이라 정의하고, 인식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Ding an sich)를 상정한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데 여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며, 사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본다. 칸트에게 실재는 물자체이지만, 그것을 인식가능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대신 현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문제 삼음으로써 진리의 문제설정을 바꾼다. 즉, 진리를 대상에서 찾는다면 인식 불가능한 실재인 "물자체"에 대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므로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현상"을 우리의 감각 기관은 끊임없는 왜곡으로 받아들이므로 마찬가지로 진리를 얻을 수 없지만, 진리를 주관(주체)의 판단형식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현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인식을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칸트는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지칭한다. 칸트의 물자체는 이후 다양한 실재론의 입장들을 야기한다.
참고 2 : 쇼펜하우어
철학 강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철학적 구분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이를 나의 입장에서 고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철학의 대상은 경험이다. 그러나 다른 학문처럼 특정한 경험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철학의 대상은 일반적인 경험이다. 즉 경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가능성, 영역, 본질적 특성, 내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소, 형식과 자료를 통해 의의와 기능을 구분한다. 따라서 철학의 기초명제는 경험이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추상적 개념으로 직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권 17장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철학이 고찰해야 할 번째 명제는 일반적인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개체 및 그 매개체의 외부적 형식과 내부적 성격이다. 여기서 매개체는 겉모습과 인식이다. 인식은 지정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 때문에 모든 철학은 인식능력과 인식능력의 형식, 그리고 그 형식의 법칙을 검토하고, 그 타당성과 한계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된다. 즉 검토가 제1철학이다. 제1철학은 1차적 표상, 즉 직관적 표상의 고찰과 2차적 표상, 즉 추상적 표상 및 그 과정이 합법적인가를 고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가 지성론이며, 후자는 논리학, 즉 이성론이다.
이 같은 총론적인 부문은 존재론과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이론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소위 '물자체'로 규정하는 사물의 핵심적 주체는 우리의 인식능력에 대한 형식 및 본성에 의거, 어떤 주관적인 논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 파악되는 모든 현상은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 의해 현실화되므로 인식능력을 통해 파악된 사실들은 이 같은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성격과 매우 유사한 경향을 띠게 된다.
이를 비유하자면, 선글라스를 쓰고 사물을 볼 때와 일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볼 때의 차이점과 같다. 안경이라는 형식과 안경의 색상이라는 본성에 따라 사물의 크기 및 색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개인이 보유한 인식능력의 형식과 본성에 의해 동일한 현상이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검토가 끝나면 이를 더욱 확대시켜 정의하는 형이상학이 시작된다.
철학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 즉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질서를 발견하고, 다시 질서에서 자연을 분리시키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들어내고, 만들어진 조건에 새로운 현상을 대입하여 현상에 구애받지 않는 사물의 본질을 추출해낸다.
이렇게 일상적인 현상에서 모든 현상에 공통적으로 대입이 가능한 사물의 본질을 추출하는 것이 일반철학이라면,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을 더욱 자세히 깨달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방법으로는 외적인 경험을 내적인 경험과 합치시키는 것과, 물자체와 대립되는 현상들의 의미와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전체 현상의 이해에 도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실 형이상학은 난생 처음 보는 글자를 해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학문이다. 지금까지 형이상학은 이 같은 방법을 통해 현상에서 현상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어떤 현상의 배후에 가려진 진실을 발견해냈고, 이렇게 발견한 진실을 또 다른 현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의 배후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이 같은 형이상학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의 형이상학, 아름다움의 형이상학, 도덕의 형이상학이 그것인데,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방식의 구분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가능해지려면 형이상학이라는 일종의 방법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형이상학은 우리의 의지 속에서 물자체, 즉 현상에 내재된 궁극적인 본질을 밝혀내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인간의 외부세계에서 관찰된 의지를 먼저 고찰한 후 이 같은 의지가 인간의 내부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도덕적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외부의지가 관찰되는 자연현상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순수한 파악이 실행되는데, 이것이 아름다움의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다. 합리적 심리학, 다시 말해 정신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칸트가 증명한 것처럼 정신이라는 일종의 현상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가설이며, 따라서 입증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도 '정신과 자연'의 대립을 주장하는 속물적인 헤겔파들은 구시대가 남긴 철학의 침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모든 사물의 본질과 연관 지어 관찰할 때 비로소 이해된다. 이미 플라톤도 파이드로스를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그대는 정신의 본질과 세계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감히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마지막에 충코님 책 소개 화면이 있는데,
아차 하면 놓칠 뻔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메일로 충코님 책 쓰면 꼭 구독하기로 했죠.
방금 교보문고에서 구매했습니다.
정독하고 제 능력이 허락된다면 피드백 드리겠습니다.
책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ㅎㅎㅎ
다 좋아
근데 결론이 자살이란 건
본인의 철학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말.
그래서 높게 평가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쫌 어려웠을 뿐.
들뢰즈는 왜 저런 생각을 했을까요? 어쩐지 그의 자살이 이해가 되네요.
명불허전입니다 ㅋㅋ
유익한영상 잘보고갑니다
으아~~~~
어렵다.....
아는척 하려고 들었는데 그냥 모른체로 살련다.
머리말.
1. 영상을 시청하니 몇가지 생각이 듭니다.
몸말.
가. 이데아.
1. 이데아는,
⑴ 플라톤이 모르는 것.
① 이유: 현실에 없는 가상 사회.
1.1. 현실과 이데아.
⑴ 현실 사회와 이데아 사회를 연결해서 설명.
① 현실 사회=있는 것.
② 이데아 사회=없는 것.
1-1. 의미.
⑴ '이데아'는,
①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이유: 있는 사회에, 없는(모르는) 사회를 연결했으니,
⑴.1. 이 연결을 만족하는 경우는,
① 이데아=현실을 가리키는 기능.
㉠ 이유: 가리키는 기능은, 그 자체에 의미가 없으니.
2. 1번 이유로,
⑴ 이데아 의미는(이데아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①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현실 사회 긍정을, 정착·유지·확장...등 시키는 방법.
㉡ 현실 사회 부정을, 멈춤·퇴출·예방...등 시키는 방법. 이겠고,
나. 시뮬라크르.
1. 시뮬은,
⑴ 들뢰즈가 모르는 것.
① 이유: 인구 80억명 차이를 아는 건 불가능.
1.1. 현실과 시뮬.
⑴ 현실 사회와 시뮬 사회를 연결해서 설명.
① 현실 사회=있는 것.
② 시뮬 사회=모르는 것.
1-1. 의미.
⑴ '시뮬'은,
①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이유: 있는 사회에, 없는(모르는) 사회를 연결했으니,
⑴.1. 이 연결을 만족하는 경우는,
① 시뮬= 현실을 가리키는 기능.
㉠ 이유: 가리키는 기능은, 그 자체에 의미가 없으니.
2. 1번 이유로,
⑴ 시뮬 의미는,
①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 현실 사회 긍정을, 정착·유지·확장...등 시키는 방법.
㉡ 현실 사회 부정을, 멈춤·퇴출·예방...등 시키는 방법. 이겠고,
2.1. 예를 들면,
⑴ 히잡(머리에 쓰는 두건)에, 시뮬을 연결하면,
① 히잡류 착용 강제(법) 사회에서,
㉠ 히잡류 착용 선택 사회는=시뮬 사회(차이).
② 히잡류 착용 자유(선택) 사회에서,
㉠ 히잡류 착용 강제(법) 사회는=시뮬 사회(차이).
2.1.1. 의미.
⑴ 히잡(시뮬)류가, 강제(법)일때,
㉠ 히잡류=히잡류 착용법을 만든, 사회를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① 사회에, 히잡류 착용법 필요 이유.
② 사회에, 히잡류 착용법 폐지 이유.
⑵ 히잡(시뮬)류가, 자유(선택)일때,
㉠ 히잡=히잡류 착용 선택을 만든, 사회를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① 사회에, 이 자유(선택) 유지가 필요한 이유.
맺음말.
가. 종합.
1. 이데아 의미가 이러하고,
2. 시뮬라크르 의미가 이러하니,
3. 위 2개 연결.
⑴ 이데아·시뮬 의미는,
① 현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4. 3번 확인·적용.
⑴ 들뢰즈 시대는,
① 평등이 사회 전반에 퍼지는 시기.
4.1. 평등 영역에,
⑴ 자유가 있고,
① 자유 영역에,
㉠ 혼돈(80억명 자유)이 있으니,
4-1. 의미.
⑴ 소비평등은,
① 사회가 나아갈 방향('시뮬' 이 가리키는).
5. 3번 확인·적용.
⑴ 플라톤 시대는,
① 4번 방식으로 확인·적용.
====================
덧붙이는 글.
1. 지혜자는,
⑴ 아는 것을 말하고,
⑵ 모른 것을 말하지 않고,
2. 사회 영역에,
⑴ 지혜가 있고,
2.1. 이유.
⑴ 지혜(지식)=두 사람 이상일때만 가능.
3. 모르는 것에,
⑴ 플라톤 '이데아'와
⑵ 들뢰즈 '시뮬'이 있고,
3.1. 지혜자는,
⑴ 모른 것을 말하지 않을테니,
① 모르는 것 기능=의미없음.
3.1.1. 의미없음 영역에,
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니,
① 달=의미있음.
② 손가락=의미없음(단지 달을 가리키는 기능).
4. 위 3개를 연결하면,
⑴ 플라톤 '이데아' 와
⑴ 들뢰즈 '시뮬' 의미는,
① 현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기능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는).
4.1. 소비 평등은,
⑴ 들뢰즈 사회가 나아갈 방향('시뮬-무의미-'을 사용한 목적).
4.2. OOOO은,
⑴ 플라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데아-무의미-'를 사용한 목적). 이겠군요.
====================
가. 기타.
1. 이데아·시뮬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면,
⑴ 시뮬: (80억명 혼돈=80억명 규칙).
⑵ 이데아: '시뮬' 처럼 설명.
1.1. 이유.
⑴ 모르는(혼돈)는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면,
1.1.1. 모르는 것 의미는,
⑴ 귀에 걸면, 귀걸이 의미.
⑵ 코에 걸면, 코걸이 의미(알레고리).
2. 예).
⑴ 외계인(모르는 것)을 생각.
① 달 토끼, ET, 에어리언, 마블 외계인...등
2.1. 외계인 의미.
⑴ 귀에 걸면, 귀걸이 외계인.
⑵ 코에 걸면, 코걸이 외계인. 이 되니깐요.
뭔 예긴지 봤더니 요지는 간단한데 장황하기만 하네요. 살도 없는데 쓸데없이 번호 나누는걸 남발하니 읽기가 아주 힘듭니다.
컴퓨테이셔널 씽킹처럼 느껴져서 재미는 있습니다.
학습할 때 연관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람 관계에서 있어서만큼은
피해야할 습관이군요
그러면 장자같은 철학자라고 보면 딱 맞겠네요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개념은 푸코의 상사성 개념과 유사한가요 ?? 푸코의 닮음과 상사성 개념에서의 비유와 유사한 듯 하여 질문해봅니다 !
원형을 추구하는게 더 이득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중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차별화의 가치를 추구한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음. 나 한테 있어서는 별로 득이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극단적인 시뮬라크르 개념은 인간의 인지 또는 사고 바깥을 지시하는것 같네요. 인간은 무언가 전제하지 않으면 인식조차 할수 없는것 같습니다.
들뢰즈의 사상을 공부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할까요?
제 경험상, 위의 글 "플라톤과 시뮬라크르"와 의 서문으로 실린 "리좀"이요:)
@@무명-j1w 물리교양서 추천해 주세요~ 둘 다 읽어 보겠습니다ㅎ
'뭘 담는 것' (이데아)= 그릇(이데아를 닮은 그 무엇)
그러나 그릇은 별의별 다양한 모양의 그릇이 넘쳐나죠 깊이와 넓이와 색상의 다름과 차이만큼...
그런데 코렐이라는 그릇 회사에서 만든 그릇이 있는데 이거 카피한 그릇이 시중에 돌아다니죠
어떻게 하면 저 뭘 담는 역할로서 제대로 사용되어볼까 하고
유통망을 넓히고 제품가격을 진짜코렐보다 낮추고 품질도 개선하려 노력하고 이래저래 드디어 소비자에게 팔려가 그 집의 식탁위로 자리하게 되죠
즉 뭔가 되어갈려면 되어가고자 하는 이정표는 있기 마련인거죠
철학에서 플라톤은 이미 좋은 자리 먼저 선점한 즉 기선제압에 성공한 자라 봐 줘야될겁니다
확실히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예시드는게 너무 어려움.
기본적으로 사족이 많이 붙게 되면서 본질이 흐려질 수 있음.
누군가한테는 1도 와닿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너무 쉽게 느껴질 수도 있음.
무엇은 무엇도 아닌거였군요...
저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고 예전에 이런 식의 책들을 좋아하기도 했죠.
문학을 읽고 복잡한 수사로 그것을 비평하는 것도 좋아했고요.
이런 식의 인문학은 나름대로의 유희적인 가치가 있기는 합니다.
마치 소수만 즐기는 취미생활 같은거죠.
하지만 그것이 현실과 부합하느냐, 우리의 삶을 바람직하게 반영하고 비춰주느냐.
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사실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회의적일 뿐더러 들뢰즈류의 말장난은 이제 지치네요.
봅시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이 세상 자체가 이분법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디에든 관측이 생긴다면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항상 있잖아요. 이게 둘이죠.
맞죠?
관계의 측면을 살펴볼까요.
당신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럼 이미 부모와 자식 이렇게 둘이죠? 둘이라는 대립항이 생겨버립니다.
그럼 사건이 생긴다면? 당신이 공에 헤딩을 했습니다.
그러면 머리의 작용과 공의 반작용이 있고 여기에서 둘이 또 생겨나 버립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도 책과 책을 읽는 사람이 존재하죠.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둘이 아닌 것을 데려와보라고 하세요. 이 우주에 둘을 만들지 않고 생겨나는 사건은 없습니다.
이렇듯 우주가 영원히 텅 빈 것이 아닌 이상 이미 그 안에 둘이라는 관념이 자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분법적인 관점과 룰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고, 이런 플라톤적 사고관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한 것이죠.
들뢰즈 아저씨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이 우주는 플라톤의 해석이 꽤 들어맞는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해석에 따른 부작용이 있죠. 인정합니다.
여러분이 집안에서 형이라고 해봅시다. 그럼 저절로 나머지는 동생이 되겠죠. 이거 확실히 이분법이죠?
형은 동생들을 잘 이끌어야 합니다.
형이 아무런 생각없이 동생들이 도박을 하든 마약을 하든 관심 없고 방치한다면 집안이 망할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분법적으로) 형이라는 이유로 동생들을 시도때도 없이 갈구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맨날 때리고 빵 사오라고만 하고 핍박하기만 하면 그게 좋은 집안일까요? 그게 잘 돌아갈까요?
아니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형인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즉 이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이분법적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 자체가 이 세계 자체에 내재되어있는 숙명이라고 봐야 합니다.
숙명이라고 하니깐 너무 진부한 표현 같은데, 그냥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구조라고 해두죠.
중국도 살육의 시대인 춘추 전국시대가 마무리되며 절대적인 단일한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방향으로 갔죠.
이는 카오스와 다양성의 시대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하나의 왕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이행한 시기로 봐도 그다지 억지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백성을 평안하게 했을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종교와 중앙집권적 국가관은 플라톤적 이데올로기의 현실화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관념의 보호 아래에서 많은 보통 사람들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죠.
이게 다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유익한 점입니다.
종교와 중앙 집권적 국가관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인류에게 가해진 폭력과 살인을 파격적으로 경감시켰고
많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답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무분별한 야생에 던져진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죠.
이는 많은 사회학적 논의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유명한 책에서 이 주제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죠. (사회과학 서적. 종교 서적 아님.)
하지만 우리 인류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그 안에서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고요.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심한 이분법적 사고관에 경도되어 함부로 매도하고 적으로 여기기보다는,
현실적인 여건 하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존중하고 포용하여 다같이 인간답게 살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이는 매우 현실적이고 잘 들어맞는 해석이 아닐까요?
오히려 쓸모없는 개념들을 남발하며 둘, 대립항, 본질, 이분법이라는 것이(당연히 존재한다고 보는게 적절해보이는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그저 모든 것이 차이를 가지며 반복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좀 괴상한 해석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나요?
요약하자면 이데아라는 개념, 이분법적 사고관, 플라톤적 해석, 본질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관념 체계는
여전히 꽤 잘 작동하고 있고 우주의 원리와 물리적으로도 명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런 세계관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들어맞지 않는 부분과 현실적인 폐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또한 이조차도 이데아와 그 외라는 개념으로 어느정도 설명 가능하죠.)
우주는 크고 인간은 작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제대로 된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말이죠. 이를 해석도 어려운 복잡한 언어 속에서 융해하여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고요.
잘 들어맞는 플라톤적 원리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플라톤이 맞다 들뢰즈가 틀리다가 아니라 그냥 우주가 생겨먹은게 그렇다는 거예요.
축구 시합에서 축구공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축구공이 사라지냔 말이죠.
하지만 들뢰즈는 그렇지 않고, 그냥 마치 나라를 빼앗기 위한 권력투쟁처럼
그저 전복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철학이 사기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주창하는 것 자체가 아주 거대한 모순이에요.
본인의 철학과 그 외의 철학으로 이 세상을 둘로 나눠버리기 때문이죠.
애초에 둘로 나누지 않고 무슨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는 이런 점에서 틀렸고 본인은 그런 점에서 맞다고 해야 하는데요.
이는 아주 전형적인 플라톤적 사고의 답습 아닐까요?
삶을 제대로 보지 않고 전형적으로 삶에 치여서 gs25편의점 앞에서 장수막걸리 마시는 아저씨의 이야기
@@한동훈대통령만들기 나는 다 터둑함ㅋ 네가 애송이인거야.
@@한동훈대통령만들기 한동훈 좋아하는 스윗 영포티님, 저는 막걸리 먹고 있을테니깐 본인 의견 내보세요ㅋ 들뢰즈의 개같은 문장들이 도대체 우리 삶에 뭔 의미가 있죠?ㅋ 정답 : 전혀 의미 없음.
@@rainnovember2331 사고 방식이 선과 악, 이분법적이네 ㅋㅋ 세상 살다보면 그게 아닌 거라는걸 직감적으로 알텐데~ 아쉽구나^^ 그렇게 살아라
오늘은 제대로 살아야지!
정리를 알기 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듣다보니 인류가 지난 3-40년간 얼마나 멀리 와버린 것인가 새삼 감회가 드네요. 20세기와 현재를 구분하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적하신대로 이게 끝은 아니겠죠. 상대주의에 대항해 절대적 세계관으로의 회귀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세상은 정해진 답은 따로 없고 모든 사건은 불확정성원리에 따라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있을 뿐이군요
모든 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어떤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각자의 생존본능 즉 진화의 결과이겠군요.
참! 진화라고하면 안되겠군요,
진화는 마치 더 좋아진다는 의미인데,
진화가 아니라 적응 또는 변화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이데아는 뇌안에 있습니다.
신의 본처이고 뇌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만일 우주의 어디와 개개인의 뇌가 맵핑이 되어있다는 주장이 모든 종교의 핵심 논지죠.
아직 관측되지 않아 양자역학 관점으로는 없는 것이죠.
시뮬라크르 개념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주로 다루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들뢰즈도 시뮬라크르 철학을 전개하는 군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란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는데 들뢰즈 책도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들뢰즈의 글 "플라톤과 시뮬라크르"는 "플라톤주의를 뒤집다(Renverser le platonisme)"라는 제목으로 1966년에 처음 발표.
플라톤이 모든 존재(자)의 바탕에 이데아를 두고 현실세계의 차이와 생성을 이데아의 모방과 타락으로 설명하려 했다면, 들뢰즈는 이를 뒤집어 존재의 바탕에 시뮬라크르를 두고 이로부터(차이생성과 반복으로부터) 존재자들, 개체들, 동일성들, 이데아들의 발생을 설명하려 함. -> 여기서 나온 책이 (1968).
따라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와 [들뢰즈에 의해]전복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것을 지칭함.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차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차이로 어떤 A와 B 사이의 차이를 말함. [들뢰즈에 의해]전복된 플라톤주의에서의 '차이'는 시뮬라크르이자 어찌보면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차이생성적 힘을 가리킴.
보드리야르의 저서 [국내번역:시뮬라시옹]은 1981년에 처음 출간.
1. 보드리야르는 일정부분 들뢰즈의 영향 하에서 시뮬라크르 문제를 다룸.
2. 그러나 들뢰즈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시뮬라크르를 얘기했던 반면(플라톤주의 안에서 플라톤의 존재론 전복을 시도), 보드리야르는 어디까지나 인식론적 맥락에서 현대사회에서의 인식조작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함.
3. 사실 들뢰즈는 보드리야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며 형이상학자이자 실재론자임.
오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혼돈에 발을 담가보아야 질서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더라구요.
정의와 신은 인간의 마이너한 마음을 채울려고 존재하고 그 채움으로써 오만과 편견을 가능케 해준다
과대평가 과소평가 가 일상인 인간들!
내가 보는것은 내가 보는것이다
내가 보는것은 신도 정의도 아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수도 있겠군. 그리고 비도덕적 비윤리적 비인간적 행위의 정상적이지 않는 것에 대한 면제부 소지
요즘 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플라톤부터 보고 있는데 국가론 보고 대화체인데 이해도 어렵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개념을 봤는데
약간 박은식의 혼과 비슷한게 아닌가 싶었는데 겉이 아니라 내면의 무언가를 꿰뚫는 그런거.. 제가 이해를 잘못했나봄
어떤 인간은 카피고 다른 인간은 카피가 아니라는 판단이 문제라면 모든 인간이 카피라고 믿으면 되는 것 아닌가?
들뢰즈철학이 불교사상과 통한다는 점..불교에서 상을 짓지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라라는 내용과 유사성이 드러나네여
결국 기준이 있어야 차이에 대한 개념도 생기는게 아닌가요? 뭔가가 다르다, 라는 식의 차이는 어떤 기준을 대상으로 비교하여야 나오는게 아닌가요? 다름을 통해 특정지어지는 무언가도 상위의 어떤 기준에 의해, 그것과 유사한가 아닌가에 의해 정리되고 판단되지 않나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차이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 유사성의 기준이 없으면 모든 각각의 사물들은 을 박탈당하지 않나요? 근본적으로 질서 이전에 카오스가 있다(혹은 )는 주장에는 공감하나, 시뮬라크르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닮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는 공감을 못하겠네요. 결국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 자체도 이데아에서 파생되었으니, 차이를 상정한다 해도 이데아에서 벗어나지 못할걸로 보이는데요..... 세상은 혼돈이었으나, 우리는 이미 언어의 세계에 진입했으니 무엇과도 닮지않은 카오스적 차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건 적어도 제 머리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결국 사고라는 것도, 질서에 의해 분류되고 이름붙여진 사물과 현상을 도구로 하여 가능한것이라서요.......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질서나 기준이라는것 조차도
다 절대적인게 아니라
전부 차이로서 있을수있다고
생각할수도있지않을까요 ?
결국 근데
영상에서 나오듯이
관점에 따라 다른듯하네요
@@RockRock-zm4pq 오... 하긴 그럴수도 있네요. 언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게 아니고 자의적이고 개인사적인 것이라서 따지고보면 이것도 차이로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언어는 번역되기도 하고, 단어는 다양하게 쪼개지고, 의사소통엔 균열이 생겨나잖아요. 언어는 질서를 부여하지만 파편적인 것이기도 한데, 그 부서진 조각 하나를 쥐고서 내 것이 너의 조각보다 더 우월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러한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수도 있군요.
말씀하신 의문은 들뢰즈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설명됩니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개체'나 '동일성'이 세계의 변화하는 여러 상태 중 몇 개를 골라 차이나는 부분들을 무시함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세계는 카오스 그 자체 유일하게 존재하며 무한하게 변화하고, 우리는 그 세계의 일부분을 잘라내어 '개체' 니 '속성'이니 말한다는 것이죠
결국 존재론입니다. 들뢰즈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존재의 근본 원리에 위치시키기 위해 원자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존재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라며 전체론적인 세계관을 가져가는 겁니다. 이렇게 세계가 실제로는 무한히 변화하는 하나의 단일체이며, 우리의 인식활동과 세계의 작동이 왜 '개체' 라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지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논증합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나오는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실의 총체다'와 비슷한 인식입니다. 세계는 사건/사실/현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의 언어활동은 이런 세계에 격자틀을 씌워넣는 활동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들뢰즈 역시 세계는 하나의 존재로써 존재하고 그것에 적용되는 격자틀이 '동일성의 원리'(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로는 '논리적 언어'겠네요) 라고 주장한 것이죠.
@@JunyoungPark-x7f 아주 상세하고 정성스러운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 제 글에 처음 댓글 달아주신 분 글을 읽고서 제 의문이 쉽게 논파될 수 있음을, 그에 대한 답이 쉽게 도출될 수 있음을 아차! 하며 깨달았는데 준영님의 댓글을 보니 피상적으로만 알았기에 가졌던 의문이 완전 해소된거 같아요! 원래 들뢰즈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는데 준영님 댓글보고 그의 저서를 탐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다시 한번 댓글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영상이네요.
p.s. 이 번 책은 첫 책이라는 걸 차치하면... 님의 영상들에 비해서는 아쉬웠습니다.
사유의 단단함은 느낄 수 있었지만 너무 도덕교과서 같은 느낌이랄까.. 제가 자극적인 정보들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논쟁적인 주장을 펼쳐줬더라면 하는 마음였습니다.
샘플링으로 음악을 만드는 힙합이 시뮬라크르네요
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설명이 나오지 않는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 영상으로는 해당 철학을 이해하기는 어려울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익숙한 무엇을 말한 후, 그 반대의 것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하고는 그 이유나 예시는 말해주지 않네요. 들뢰르는 차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것이 어떤 이유로 더 근본적인지를 설명하지 않은 철학자인건가요? 주장뿐인 주장을 한 철학자인가요...? 카피와 시뮬라르크가 무엇인지는 잘 설명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익숙한 카피중심의 사고 이외의 시뮬라르크 중심의 사고가 무엇때문에 추구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가 않네요. 혼란스러워요
아 단어의 개념만을 다룬 영상이네요 제가 너무 성격이 급했어요ㅋㅋㅋ 그래서 도대체 시뮬라르크를 중심으로 한 사고가 무엇때문에 중요한건지 근거를 알고싶었는데 그냥 뚝 끊겨서 당황스러웠나봐요. 댓글을 읽어보니 pc적인 사고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철학인것 같긴 합니다. 근데 그게 왜 중요한지는 알수가 없네요 정말 궁금한데ㅋㅋㅋ
제대로에 연연해 하지말고 나만의 차이를 만들어가자...
얼마나 시뮬라크르적인가라는 말은 이미 시뮬라크르가 아니군요.
그래서 시뮬라크르적인 사고가 어렵군요.
독일 학생들이 가장 즐겨 읽는 철헉사가 뭔가요
정말 카오스 그 자체군요…절대적이건 절대 없다라…
알고리즘에 이것이 뜬게 다행이네요.
들뢰즈를 이야기 할때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를 언급한 이들이 없었는데
하지만 뒷부분의 질문에 답은 충분히
다른 저서들에서 답해 주고 있지요.
모든 모더니즘은 늘 포스트하지요....
인간에게 평화의 시대가 너무도 과분하고 길게 주어졌다. 편안하고 안락한 현생에 취해 저런 사춘기 애송이같은 사상을 "힙"해보인다며 띄어주는 세태를 보니, 곧 3차세계대전이 오겠구나-
마지막에 던진 충코님 문장에 동의합니다. 시뮬라크라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제대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자체가 모순인듯해요. "카테고리"라는 사고의 도구를 사용해서 살아가는것이 인간본성이고 사회생활을 영유하는데 필수조건인듯. ex) 남자, 여자. 등등의 카테고리를 인식하는것은 인간의본성이죠. 그걸 무시하면 카오스 됩니다. 설마 들뢰즈가 그런소릴한것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충코님의 설명이 불충분한걸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충코님 팬이니 제 글 섭하게 듣지는 마세요.
라캉 철학을 가져와보자면… 상상계는 혼돈 카오스가 맞죠 아무런 카테고리도 기준도 없죠. 그 후에 상징계, 즉 카테고리 기준 정의 규범 등도 분명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징계를 부수는 과정이 필요하죠. 그러니까, 처음부터 정의나 규범 등을 아예 없애자고 하는 것은 혼돈이고 반지성주의지만, 그것을 알고나서 부수는 것은 그 지식을 넘어서기 위해서 기존의 지식을 ‘깨부수는’ 과정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보면 진화와 비슷한면을 지니고 있는듯하네요
당신은 내가 당신이 설명하는 것(원형)을 이해(카피)하길 바랍니까? 아니라면 당신이 설명하는 행위의 목적은 무엇입니끼?
이데아를 모르는데 뭐가 카피고 뭐가 시뮬라크르인가?또한 구분할수 있으려면 그건 이데아를 능가해야 한다.
뇌피셜로 장난치지 마라...
노래 카피 설명은 쫌.... 그래도 잘 들었습니다.
비 정치적인 면에서의 보수와 진보와도 비슷하네요.
하나에서
분열되어
이분법이 나옴
처음
하나가 없다면
이분법도 없음
이분법이 나쁜것이 아니라
이분법에 사로잡혀
그 이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계
하나,
이것은
다양한것들이 모여서
다만 잠시 하나라고 규정지었을뿐
진짜 절대의 원형이라는 하나는 없음
하나라는게 있는것 처럼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도 없음
꿈,그림자,물거품,이슬,번개와 같다
들뢰즈 책 한 6권은 봤지 싶은데 솔직히 반도 이해가 안갑디다... 특히 차이와 반복이 진짜 심했는데요. 지금 다시 읽으라카면 읽으란 놈 하이킥 날릴듯
잘봤습니다. 한가지 건의사항이 있어요. 초심자를 위한 철학 영상들은 너무 많아요. 충코는 철학좀 하는 사람들도 유익하게 볼 수 있는 영상도 많이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원문 강독 머그런 전공자급 수준말하는거 아니고요. 입문보다는 좀 심도가 있는.. 그런수준이요.
세상을 체계화하고 서열을 나누는건 혼돈스런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량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선의 선택을 하려는 생물학적인 본능이고
이건 개인이 거부한다고 켜고 끄고 할수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냥 우리가 그런 생물이에요.
들뢰즈라는 사람은 자기는 그런다고 주장 하지만 믿기 힘드네요. 마치 누군가가 음식을 안먹어도 살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뭔 개소리야... 싶죠
제 생각엔 이성적인 영역으로 너무 파고 들어서 현실에서 적용할 필요도 없고, 할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그닥 도움 되지도 않는 탁상공론류의 철학 같습니다.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하는지는 제쳐두고, 체계화되지 않은 정보는 무한한 혼돈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