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탄생신화가 없는 백제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역사돋보기 인물사 비류와 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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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11 янв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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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돋보기 인물사.
백제의 시조 온조. 비류와 온조는 형제가 아니었다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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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백제의 건국에 대해 많은도움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소서노가 좋아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ㅎㅎ
소서노온조비류는 육상을 통해 한사군을 뚫고 지나간게 아니라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남하해 한강을 거슬러 올라 위례성에 정착했을 겁니다. 한사군이 고구려에서 남하하는 유민들이 자기 땅 안에서 돌아다니게 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죠. 비류가 미추홀에 셋업 한 것도 인천이 한강 하구이기 때문에 비류는 거기 머무르고 온조는 더 거슬러 올라간 것이 아닌가 싶네요. 국가 이전에도 교역은 활발했기에 어느 쪽 땅이 사람도 없고 살만하다더라 하는 정보도 이미 알고 있었겠죠.
그당시 5000명이상이 배로 남하할수 있었을까요? 100명식 탈수 있는 큰배도 50척 이상 있어야 돼는데,
고구려 관직에 우태가 있던데요.
그 점은 어찌 설명 될까요?
아니 나라를 세울 정도의 무리가 낙랑을 그냥 통과할 수 있었다고라? 수십명 수백명도 아니고…특수부대가 적들을 피해 야간 행군한 것도 아닐터이고.
낙랑이 거기 없었거나 낙랑과 무슨 협력관계가 있거나 그랬겠죠.
잘봤습니다
부여족은 부리야트의 정통이라고 볼 수 있고, 주몽의 혈통은 고구려로 이어지고 부여의 정통은 온조로 이어져서 분리되어 내려옴. 아마 비류도 부리야트의 차음인듯. 한사군을 반도에서 제거해야 정상적으로 해석됨.
제가 학교 다닐 떄 학습할 때까지만해도 비류, 온조 둘 다 주몽의 아들로 알고 있었는데 우태의 아들이였나보군요.
부여도 궁금합니다
한사군이 왜평양이냐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거 그대로 처박아쓰네
후계경쟁에서 밀린 소서너가 만든게 백제인데
고구려의 시작과 멸망과 거의 일치하지.
연개소문이 쳐발리니 의자왕도 쳐발리고
견훤도 후계문제 실패로 허망하게 왕건에 투항하고 후계문제로 시작해서 후계문제로 끝났지.
여기서 애기하는 한반도 북부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이며 (그딸이 낙랑공주
이루 고구려 3대 대무신왕과 결혼)
낙랑군(낙랑국과는 구분)은 하북성 일대로 보는게 맞구요
백제의 건국세력이 남하는 하남위례성은 황하강 하류 부근이 맞습니다
하남위례성의 하는 황하의 하입니다
백제사 너무 좋아
소서노하면 한혜진만생각나네요
백제는 제나라 유민들이 들어와서 그런거임.
제나라가 멸망한후, 그곳에 설립된 군현 이름이 제북 濟北 임.
와 님이 말씀하신 제나라 땅이 옛날 백제땅 일부에요 ( 책보고 ) 채널에 다나와요
동명왕, 해모수, 주몽 신화의 연장선이라...
낙랑군 이야기는 좀아닌거같아요. 최소한위치도 여러설이있는데 굳이 일본애들이 주장한 내용을......
님 삼국사기말곤 일본서기 중국역사서 보고 판단할수밖에없는현실이에요
황해도 일대에 낙랑군 무덤이 발견되고 있지요.
환빠보단 그게 나아
역사돋보기 중국인임? 낙랑군위치 식민사학자료 고대로가져다쓰는거보고 눈을의심했네
남의글만 보지말고 스스로 고서를 보고 연구좀 하세요.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처첩들을 모두 물려받는 관습에 의해
유리는 소서노를 처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당연히 유리의 아들이 되었다.
나중에 주몽이 개척한 땅 중에 일부를 떼어 비류와 온조를 독립시켰다.
100여가구를 이끌고 독립했기 때문에 100제, 백제라고 이름을 지었다.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를 보면 동예의 서쪽이 낙랑군이고 낙랑군 서쪽이 요동군으로 부여 동옥저 고구려 삼한등의 위치는 모두 상대적인 위치입니다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나라는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한 동예인데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라고 했으니♥ 하북성 중부 동부지역인 창주시입니다
따라서 동예인 창주시 서쪽인 ♥하북성 중부 형수시 무강현이 낙랑군이고요♥ 낙랑군 남쪽의 대방군은 하북성 형수시 부근이 되겠지요 낙랑군 서쪽의 요동군은 형수시 안평현이 되고요 현도군은 요동군의 고구려현 북서쪽이니 호타하 넘어 안평현 마점진 부근으로 보입니다
후한서 동의열전 예(동예) 한무제 원삭 원년(B.C.128)에 예(濊)의 임금(君) 남여(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군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한서 무제기 원삭元朔 원년(BC 128) 동이(東夷) 예(薉)의 임금(君) 남려(南閭) 등 구(口) 28만 명이 항복하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했다.
사마천사기 평준서 팽오가(彭吳賈) (위만)조선을 멸하고자 하여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니, 연제지간(燕齊之間,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가 쓰러질듯 소란스러웠다.
다 좋은데 백제역사는 대륙에서부터 시작했는데 한반도에만 국한시킬려니까 좀 그렇네요.. 전성기 백제는국제적으로 22담로를 지배했어요.. 왜 백제를 한반도 이남에만 가두어둘려고 하네요.. 참 답답합니다
같은 형제
백제조상 부여 어디사기침
유리왕자
무슨 낙랑군을 통과하면서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뭔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디
삼국이 ㅡ다아 같은혈통
한혜진 진짜 이쁘네 ㅋ
배우.가수.모델 한혜진 3역 3인.
부아아악
온조가 자리잡은 곳은 충청도 직산이라는 설도 있더군요. 그때 한수는 지금의 한강이 아니라 그냥 '큰 물줄기'라는 보통 명사라는 설도 있더군요.
삼국사기의 일설인 비류와 온조 아버지 우태가 고주몽입니다 ♥고주몽이 우발수에서 잉태하여 태어났으니 우태라고 했습니다♥ 고구려 사략에 소서노가 유리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내용이 삼국사기에서 완전되어 기록된 것입니다
고주몽이 소서노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고 고주몽인 우태가 죽자 소서노가 유리왕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
유리왕는 북부여족(오한족=말갈) 세력이고 졸본부여왕 의 둘째공주인 소서노는 졸본부여족(선비족) 세력이니 소서노가 졸본부여족(선비세력)을 이끌고 독립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입니다
북부여 해모수 후손이 해부루고요 동명왕(다른 해모수)이 북부여를 차지하자 해부루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고 동명왕은 졸본부여를 세웠다 고주몽의 아버지(해우루)는 해부루의 형제로 북부여 해모수의 후손이다 고주몽이 비류수 근처의 졸본부여로 이동하여 졸본부여왕 둘째딸과 결혼하여 졸본부여 왕이 되고 고구려로 나라이름을 바뀠습니다
고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해모수 후손으로 북부여왕((해우루))인데, 북부여왕 해우루는 BC79년 흉노를 공격하려 갔다가 한나라의 계략에 빠져서 한나라에게 붙잡힌 3명의 오환왕 중의 한명이었으니 유화부인에게 돌아 갈수가 없었습니다(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연대를 BC 58년으로 본다 고구려 사략 기준)
한서 흉노열전 BC 79년 [원문] 烏桓嘗發先單于冢, 匈奴怨之, 方發二萬騎擊烏桓. 烏桓時新中匈奴兵, 明友旣後匈奴, 因乘烏桓敝, 擊之, 斬首六千餘級, 獲三王首, 還, 封爲平陵侯.(중국 사서에는 북부여를 동호라 했고 한나라 초에는 오환이라고 했습니다)
매금이가. 거품물만한 주제인데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