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가 위대한 외교가? 소가 웃을 일입니다. 당장 같은 신라 임금인 지 증조부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과 비교해보아도 이 점은 명확하지요. 얼치기 외교가의 전형입니다. 철저한 집념으로 천하통일을 기획? 천하 통일을 기획한 자가 의자왕을 그렇게 망신 주고 술을 따르게 하는 졸렬한 짓거리를 하는지요? 이는 맏아들 조앙의 원수라도 원소와의 결전을 위해 눈물도 머금고 장수(張繡 ? ~ 207)를 받아들인 위 무제 조조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짓거리입니다. 한민족의 아버지? 대놓고 거짓을 농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군요. 광개토태왕의 관념적인 삼국 통일을 진일보시킨 인물은 김춘추가 아닌 문무대왕입니다. 문무대왕조차도 그 후손들이 그의 화합 정치를 온전하게 계승하지 못해 한민족의 아버지를 논하는데 주저함이 있을 판국인데 김춘추가? 헛웃음만 나오는군요. 정작 추앙을 받아야 할 문무대왕은 뒷전이고 진영 논리 때문에 김춘추가 떠받들어지는 현실이 심히 개탄스럽군요.
『삼국사기』는 1도 안보신 모양이군요. 국력 지표로 보자면 신라의 국력 그 자체는 분명 고구려는 커녕 백제에 비해서조차 손색이 있었습니다. 진흥왕이 애써 역전 시킨 백제와의 국력차를 다시 추월 당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춘추부터가 고구려를 '대국'이라 부른 바가 있지요. 신라가 단결력이 강했다는데 그것은 김춘추의 지도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단결 안하면 '공멸'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세입니다. 정말로 신라의 단결력을 논한다면 기득권인 진골을 과감히 숙청하고 화합 정치를 편 문무대왕 때를 논해야 사리에 맞지요. 신라를 마냥 최후의 승자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국 신라가 경덕왕 이후로는 문무대왕의 화합 정치를 전혀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문무대왕의 화합 정치는 광개토태왕의 관념적 삼국 통일을 진일보 시킨 역사적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삼국 통일 후 2백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중 1백년 넘는 기간에 모두 파기 시켜버렸으니까요. 문무대왕,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은 역사의 승리자라 할 수 있어도 통일 이후 그리고 남국 신라가 최후의 승자인지는 지극히 의문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 누구 마음대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사이며 마한과 임나가 일본사랍디까? 원전은 1도 안보니 이런 무지한 발언이 나오지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사인데 어째서 중국 사서에는 '동이 열전'이나 '이역 열전'으로 구분을 해놓았을까요? 동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역' 열전은 아예 중국과는 영토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마한이 일본사라면 어째서 마한에는 버젓이 있는 동물들이 일본에는 없을까요. 『정사삼국지』 「왜전」을 보면 '그곳(왜국)에는 소나 말, 범과 표범, 양과 닭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후에는 있겠지만 그것은 차후 시대의 교류 때문이지 마한이 무슨 와코쿠 즉 왜국의 식민지라서가 아닙니다. 문화의 보편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아예 고개를 돌리는군요.
뭐가 그리정말 자랑스럽습니까 중국 끌어드려서 고구려의 땅 빼앗긴게 자랑스럽습니까 삼국통일이라 고려가 삼국통일 한건 인정헤도 통일신라 라고하는건좀 웃긴다고 헤야돼나 좀 그런네요 신라의입장에서는 통일이라 할수있겠지만 후손의입장에서 보면 삼국통일 이라 하기 인정 할수가 없네요
다시 고구려땅 되찾고싶음 신라를 배워라... 그 조그마한 신라가 살아남아 통일하고 천년유지된게... 지금 한국도 엄청난 외교력과 내실을 다져야지 다시 고구려땅 되찾을 기회가 온다..당시 신라가 당을 이용했듯..지금 한국은 미국을 이용해서 북한을 몰살시키고 만주일대를 되찾아야한다....
뭐 그런 타이밍도 대략적으로 읽어서 큰 그림을 그린 셈이죠. 김춘추 본인도 장안 갔다왔고 아들들도 장안에 숙위로 심어놨으니 장안 옆에 있는 토번의 동향이야 분명히 정보 수집의 대상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당전쟁을 시작한 것도 문무왕의 요동 선제공격이었으니,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지금 지르면 가능하다는 타이밍을 읽고 지른 셈이죠.
@@jinyoungan4830 645년도는 백제가 당나라에 파병보낸 신라 뒷집털이를 했던 년도인데, 이건 예전부터 백제와 신라가 서로에게 수도없이 많이 해왔던 싸움이기에 특별한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이유는 7세기 초 무왕때 백제가 수나라에게 지속적으로 사절을 보내며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설득을 하였고, 수나라가 결단을 내리고 진짜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백제가 뒷통수치고 원군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기고 수나라가 멸망하는 일까지 일어났죠. 그 뒤 10년 후 건국된게 당나라인데 이름만 바뀌었다 뿐이지 수나라 버젼 2.0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당나라 측에서는 백제가 수나라 뒷통수친거를 똑똑히 기억하니 겉으로는 3국과 교류하며 친한 척 하면서 백제와 신라가 싸울땐 신라 편만 들어주게 되죠. ............... 수서 동이열전 백제 (607년) 대업 3년, 백제 무왕 8년에 장이 사자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해에 또 사자 왕효린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의 토벌을 청하였다. 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통화를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611년) 대업 7년, 무왕 12년에 양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를 보내와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시기를 서로 알게 하였다. 이듬 해에 6군이 요수를 건너니, 장도 군사를 고구려의 국경에 엄중히 배치하고, 수나라 군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신라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하였다. (614년) 대업 10년 무왕 15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다. 그 뒤로는 천하가 어지러워져 마침내 사명이 끊겼다. ...............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612년) 13년에 수나라의 6군(軍)이 요하(遼河)를 건넜다.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히 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썼다. (621년 10월) 22년 겨울 10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신라 업적 폄하하는 인간들은 역사 제대로 공부 안한 바보라고 생각하면 편함. 어차피 삼국이 서로 외세엿는데 뭘 자꾸 외세 끌어들엿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ㅋㅋㅋ 그리고 신라 입장에선 영토 2배 늘린거야 만주를 빼앗긴게 아니라 애초에 만주를 차지한적도 없었고 나중에 발해가 만주 먹었다
삼국통일. 있기는 있었던가. 신라가 고구려를 정복했는가 ?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삼국통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인가. 발해사를 보면 신라의 원산만과 옹진반도를 잇는 선에서 국경을 접했다고 나온다. 이게 삼국통일인가. 조선시대에도 삼국통일이라는 용어가 존재했던가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환단고기 한번이라도 보세요. 삼한은 서로 투쟁하는 관계가 아닌 진한이 종주국이고 마한, 변한은 속국이었습니다. 선덕여왕 시리즈할때 김유신이 삼한통일한다고 떠들어 댄게 사람들 인식을 완전 베려 놓았습니다. 고조선은요, 환단고기 한번이라도 보세요, 고조선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세 나라로 쪼개서 통치를 했어요. 나라가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우니까.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네요, 잘못된 TV 사극 드라마 하나가 전부 베려 놓네요. 삼한은 진한의 통치를 밖는 고조선 치하의 세나라인데, 즉 같은 나라인데 왜 자기들끼리 다툽니까. 그런 상태에서 어떤 또라이가 삼한을 일통하겠다고 합니까, 이미 통일되어 있는데. 책좀 일고 주절거리세요.
다른 인물들은 그렇다 해도 김춘추가요? 김춘추가 한 일이 무엇인지? 김춘추의 그 잘난 외교라는 것도 지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김법민)에 비하면 태부족한 행위였지요. 더구나 김춘추가 죽은 시점에서 그가 이룬 일이라고는 당나라의 힘으로 백제 도성을 점령한 뒤 백제 사람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무대왕과 유신공이 김춘추가 싸지른 X를 처리하느라 생고생을 했을 것이고요. 게다가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한 짓은 저 삼국지의 조조가 맏아들 조앙의 원수였던 장수(張繡 ? ~ 207)에게 한 행동과 비교하면 심히 졸렬한 짓거리였지요.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김춘추에 관한 한 하나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현대 한민족과 고대 한국인이 동일할 리는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 더 이전의 고대 조선 열국들은 최소한의 동질성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고구려가 삼국 통일 한 후 무작정 '줄어들었을 것이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고구려가 삼국 통일 후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했을 것이라 하는 말 이상으로 터무니 없는 가정입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이상 역사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설령 삼국 이전의 고대 조선 열국들이 동질성이 없었다 한들 삼국은 최소한의 동질성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의 '관념적 삼국통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이 시기부터 '동질화'의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훗날 이것을 진일보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대왕이지요. 문무대왕 본인은 그것을 의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무대왕은 그런 역사적 과업을 나름대로 달성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업적을 성취한 문무대왕은 뒷전이고 한 일이 없는 김춘추가 진영 논리에 의해 각광을 받으니 심히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김유신태대각간 / 대놓고 거짓을 농하니 웃음도 안 나옵니다. 고구려나 그 뒤를 이은 발해가 중국사가 아니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온돌'인데요? 하다 못해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백제 시대 온돌 유적지까지 감안하면 백제 역시 중국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중국에는 없는 난방 방식이라 명확히 구별되는데 거짓을 농하는군요. 아울러 마한이나 임나(가야?)가 일본사라는 일방적인 강변도 터무니 없습니다. 마한 지역 특히 영산강 문화권 자체가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 문화가 가장 발달된 곳이었는데요? 청동기 시대 고인돌 2만여 개가 집중 분포되고 있는 고고학적 자취가 그 증거입니다. 원전 안 본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고고학 서적 1도 아니 보았음을 스스로 입증한다 하겠습니다.
[1부] 공공학교 폐교은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 과실 높다 정의. 대한민국 인구 수 줄어드는 것을 감안 하지 않고 너도나도 공공학교 개원? 매번 언급 하는 것이지만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은 조상(선조) 처럼 엄청 열심히 공부한 나머지 머리에 과부하로 제 구실을 상실한지 ' 꾀 됐다 정의. 그렇지 않았으면 중국 유방 세운 한나라때 부터 과거 급제 하기 합격하기 위해 그렇게 엄청 열심히 공부 하면서도 세상과 인간 보는 안목 없어 중국 청나라 말기 까지 나라 하고 특히 황족을 수십번 교체를 반복한 사례. 이것을 옛 한반도 옛 나라 하고 21세기 살고 있는 한반도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 하고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한반도 기득권 싸움은 조선시대 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 곧 후기 신라 이전 이든 이후 부터 존재 했다 정의.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경에 이르도록 죽고 다시태어나기 반복 해도 조상(선조) 대해 어리석고 못난이 ( 비슷한:띨띨이 ) 에다 멍청이 하구 병신 에다 386 CPU 머저리 에다 칠칠히 못 하다. 철회 할 생각 과 판단 전혀 없음 으로 정의 할 따름.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이 글의 관한 저작권은 1973년06월24일 의 정건영 호 변태 곧 정건영기사도 있음을 ...
만주를 차지했는데도 식민사학자들이 쬐그만하게 그려너은거 모르고 방송하는게 어디서 자료받아서 방송하는지 안타깝네요 당나라를 몰아내고 그영토를 알아내야하는데 제대로 알려하지도 않고 왜곡된자료 가지고 방송하니 안타까워요 만주를 잃지않았슴니다 만주 요동 요서 중국 동부 다 차지하옇고 당나라보다 큰 영토입니다
@동해안오징어 식민사관 좋아하는 이 친구 또 나타났네. 고서들 직접 읽어보라고 부탁 했는데도 여전히 안읽고 있나요. 공부를 안하면 대화가 안되는데.... 밑에 기록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시나요? 고구려 "의봉(儀鳳) 2년(A.D.677; 新羅 文武王 17)에 [고]장(藏)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고]장(藏)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僑民)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고]장(藏)이 영순(永淳)(A.D.682; 新羅 神文王 2)초년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여 힐리(頡利)[가간]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백제 "의봉(儀鳳) 연간(A.D.676~678; 新羅 文武王16~18)에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舊國)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측천]무후 때 또 그 손자 [부여]경(敬)으로 왕위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려에 부속(附屬)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과 [접하고 있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동해안오징어 당나라는 보장왕을 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하게 하였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켜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고덕무를 다시 안동도독으로 임명시킨 뒤 고씨 왕들은 대가 끊깁니다. 명확하게 요동지역이 당나라와의 경계선이라고 나오고 나머지 고구려의 옛 성들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나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함은 원래 고구려가 여러 민족을 지배하던 제국이었고 그 구성원이 원래 말갈인들과 돌궐인들이었기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뜻이예요. 대조영도 고구려인인 동시 속말말갈 출신이었죠. 그렇게 옛 고구려 영토 북쪽이던 말갈족 땅이 발해가 되고,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이던 요동성 오른쪽은 신라것이 됩니다. 또한 당시 요하강 서쪽은 당나라 영토였는데 위 기록에서 발해의 서쪽이 거란이라고 나오고 있어요. 중국측 고서에서 거란은 당나라의 북쪽에 있었다고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발해는 압록강에서 더 북쪽에 있었다는 뜻이예요. 최근 조사에 의하면 발해의 첫 수도 동경용원부와 상경 용천부가 블라디보스톡 북쪽 헤이룽장성 어딘가에 있었을 거라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는데,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당나라와 고구려의 경계선이던 요하지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습니다. 동북아역사넷에 고구려성 검색해 보세요, 성 대부분이 북한의 북부와 요하지역, 간도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성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압록강까지 못 먹었다고? 요동지역이 국경이었는데? 저는 근거자료를 가지고 와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헛소리네 뭐네 입으로만 때우지 마시고 제가 가져온 자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직접 한번 출처 찾아서 반박해 보시죠. 힌트 드리자면 중국측 24 정사 고서 중 하나입니다. 모르면 입 다무시구요.
@동해안오징어 오징어님은 자신이 공부를 안해서 스스로가 무식한 상황을 남에게 탓하고 있네요. 간간히 님을 이 채널에서 본지 몇달 넘었지만 수준이 그대로이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님께서 제발 직접 읽어서 공부 좀 하라고 일부러 자료 가져와서 출처를 물어봤습니다. 허나 이번에도 역시 노력해서 찾을 생각은 전혀 안하고 관심도 없으시네요. 그냥 남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그냥 틀렸다틀렸다 붸에에엑 거리는 초등학생 수준이십니다. 제가 가져온 자료들은 거의 천년 가까이 되어가는 중국 정사 고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님만 모를 뿐 역사공부 해보신 분들은 금방 알아요. 출처를 알아보는 분들이 나중에 오징어님이 불쌍해서 댓글 달아 주실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가져욘 자료에 대놓고 고구려 성들을 신라가 흡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님은 여전히 억지로 안보이는 척 '도대체 님 글 어디에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했다는내용이 있나요 ㅋㅋㅋㅋ먼 자신감인지 ㅋ' 이런 헛소리나 하고 계세요.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정하기 싫어서 땡깡이나 부리시는데, 무슨 초등학생입니까? 더군다나 제가 지금껏 주장한 내용은 환단고기에 나오지도 않아요. 오히려 환단고기는 고구려와 부여를 과장하느라 백제와 신라사를 굉장히 폄하하고 축소합니다. 님이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어서 상대방한테 데미지도 못주고 있으세요. 뭔가를 욕하려면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챙겨야지, 그정도 노력도 안해놓고 악만 바락바락 쓰고 계시네. 참 유치합니다. 공부는 안해놓고 남 헐뜯기만 하는, 노력은 안하고 어린애처럼 떼만 쓰는 당신.
@@김유신태대각간 / 한자 표기가 다소 다릅니다. 지역이나 군현을 나타낼 때는 발해군(勃海郡)이라는 명칭을 쓰고 한나라 안의 제후국을 표기할 때는 발해국(渤海國)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북국 대씨 왕조의 발해국(渤海國)과 한자가 같지만 애초에 한국의 국명은 '음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원래 음가가 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했다는 것이지요. 중국 기록에서 '윤색'을 했을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전제 자체가 다릅니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직접 읽어보세요... 나당전쟁 이후 고구려의 성 대부분을 신라가 차지했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 직후 문화권이 달랐던 말갈계 기마민족들이 신라통치를 거부하고 지들 따로 나라를 만든다고 옛 고구려 영토이던 쑹화강 지역에서(속말말갈 옛 영토) 독립을 해버렸고, 여기서 신라는 나당전쟁이 지금 겨우 끝났는데 고구려 옛 유민들과 또 싸움을 하면 당나라만 좋아지는 꼴이니 그냥 내버려 뒀어요. 그 덕분에 당장 신라와는 싸우지 않고 발해랑 당나라가 싸움이 붙어서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당나라가 신라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요청했고, 신라는 원군을 보내주는 척 하다가 겨울이라 병사들이 다 얼어 죽었다며 철수를 해버립니다. 이 전쟁에서 발해가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와 신라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됩니다.
@동해안오징어 축하드립니다. 책 이름의 힌트를 찾으셨군요. 영상에 달린 댓글들이 수십개인데, 다른 댓글에서 했던 대화 내용을 지금 여기서 따지는 님의 고집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보니까 매금이랑 비슷한 성격을 가지신 분인 것 같네요. 그 노력과 시간을 공부에는 쓰지 않고 매금이랑 똑같이 댓글 싸움질하고 트롤링에 집중알 하시는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검색할 생각을 안하고 왜 그냥 말 안해주냐고 저에게 욕설을 퍼부으셨죠. 저 같았으면 님이 지금껏 댓글 찾을 시간에 직접 인터넷 검색해서 책 이름을 찾아내어 스스로 공부를 했으면 자료의 출처를 훨씬 빠르게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그랬으면 원래 우리가 댓글 달던 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더이상 이 댓글에서는 님에게 대응을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던 댓글에 님이 자료 출처를 명확히 밝히면 확인을 해주시면 그때 답변을 하겠습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억설을 주장하시는지? 유신공이 유능한 것은 인정해도 당시의 신라는 유신공의 능력을 충분히 받쳐줄만한 국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연개소문이 굳이 김춘추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래야 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사삼국지』를 예로 들 때 조조가 왜 기회가 되는데도 유비를 제거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무리수와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인재 영입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근본적으로 국력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당장 『삼국사기』만 살펴보아도 이는 명확하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 보장태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저희 영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임금이 대국(大國)의 병마(兵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후략)”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 선덕(여)왕(善德王) 11년」 김춘추가 백제에 대해 말하는 내용인 옳은지 그른지는 제쳐두더라도 이미 고구려에 대해 '대국'이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격차를 인정한 것이지요. 다른 원전도 살펴보겠습니다. (김)춘추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깨달아 (고구려 보장태)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고개〔마목현과 죽령〕는 본래 대국(大國)의 땅이었으니, 신이 귀국(歸國)하면, 저희 왕께 돌려주라고 청하겠습니다. 만일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밝은 해를 두고 〔죽기를〕 맹세하겠습니다.” (보장태)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 김유신(金庾信) 상 / 서기 642년 (음)」 이렇게 신라는 고구려 말기 때에도 국가 간의 격차를 인정했습니다. 유신공이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으로 국가 간의 격차가 없다는 주장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가령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촉한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 않았다는 식의 표현이 가능한지요? 국력은 '명백히' 위나라가 우위였고 결국 천하의 제갈량도 정벌에 실패했습니다.
@@Kim-ig3qq / 일단 외세라는 것의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터인데요? 외세가 좁은 의미의 '외부 세력'을 말하는지 아니면 '외국'이나 '이민족'을 의미하는지 부터 분명히 하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야 어떻든 원소, 조조, 유비, 손책은 자신들과 각 군웅들 사이의 격차가 당나라와 신라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외세와 결탁했다 한들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았지요. 반면 신라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김춘추 정권'은 '의자왕 굴욕 주기'라는 목표 하나로 당나라에 징징대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런 것이 과연 외교인지? '얼치기 외교'의 전형이라 하겠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 문무대왕과 비교해보아도 그 격차는 매우 명확합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한반도 고대사 외교의 신. 👍
고대 최고의 외교가이자 김유신과 더불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삼한 대일통의 영웅 김춘추같은 인물은 오히려 현대에 더 필요하다
동감입니다 😊❤
잘 보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이 사실상 삼국통일을 한것이나 다름없음..
자비를 베풀어 주신거 뿐이지
김춘추의 청년기 시절의 성장 과정중
수련하던 장소는 어디인지 아시는분은 소개 부탁 드립니다.
36:13 선덕여왕의 잦은 불교 사찰 건립 때문이죠.
위대한 외교가, 철저한 집념으로 천하통일을 기획, 이룩하여 한민족의 아버지가 되었구나~~~
김춘추가 위대한 외교가? 소가 웃을 일입니다. 당장 같은 신라 임금인 지 증조부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과 비교해보아도 이 점은 명확하지요. 얼치기 외교가의 전형입니다. 철저한 집념으로 천하통일을 기획? 천하 통일을 기획한 자가 의자왕을 그렇게 망신 주고 술을 따르게 하는 졸렬한 짓거리를 하는지요? 이는 맏아들 조앙의 원수라도 원소와의 결전을 위해 눈물도 머금고 장수(張繡 ? ~ 207)를 받아들인 위 무제 조조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짓거리입니다. 한민족의 아버지? 대놓고 거짓을 농하는 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군요. 광개토태왕의 관념적인 삼국 통일을 진일보시킨 인물은 김춘추가 아닌 문무대왕입니다. 문무대왕조차도 그 후손들이 그의 화합 정치를 온전하게 계승하지 못해 한민족의 아버지를 논하는데 주저함이 있을 판국인데 김춘추가? 헛웃음만 나오는군요. 정작 추앙을 받아야 할 문무대왕은 뒷전이고 진영 논리 때문에 김춘추가 떠받들어지는 현실이 심히 개탄스럽군요.
대왕의꿈
매금이가 김유신 태태각간으로 닉 바꾸고 또 댓글마다 어그로 시전 하네요. 역사저널 그날팀 고소 좀 해주세요. 댓글테러 지치네요
매금이는 1%의 이성과 99% 떵만먹고산다ㅋㅋ ㅋㅋㅋㅋ
김태우
대왕의꿈
엔딩곡이 하늘을 나는 기분이야.
49:30
0:30 서인석 아재의 폐위 선포 ㅎㅎ ㅋㅋ
태종 무열왕의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금이는 목이 쳐져 효수 돼야 한다는건 알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금이 요즘 또 계정차단 당할까봐 불안한지 '김유신 태대각간'이라는 백업 계정 만들어서 활동하고 다니더군요.
고구려 백제 중국사들 김유신 태대각간이 매금이 입니다 ㅋㅋ 😂
정신병자는 빨리병원으로 멘트하는 모질이 ㅋㅋㅋㅋ
아마 조상이 친일파인거 같아요
ㅋㅋㅋㅋ
김태우
매금이 조상이 김춘추라 그럼 조상따라 매국질하는중
요즘 이런 프로그램은 찾아 보기 어렵네....
신라가 고구려보다 강하지는 않아.
하지만 약하지는 않아.
그리고 고구려보다 단결력이 강했어.
결국 신라가 최후의 승자로 역사에 기록이 되었지.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자가 강한거야.
흉노 오랑캐들이 강하긴했지 ㅋㅋ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 멸망시켜 신라 욕심은 채웠을지 몰라도 당나라와는 고구려 땅 반타작도 못한 것은 찝찝한 전쟁이었음
@@sbj1877 고조선도 동이족 오랑캐인데 ㅋㅋ 같은 오랑캐끼리 오랑캐라니 우습구만 ㅋㅋ 중국이 진짜 오랑캐지, 뭔 흉노가 오랑케여.
『삼국사기』는 1도 안보신 모양이군요. 국력 지표로 보자면 신라의 국력 그 자체는 분명 고구려는 커녕 백제에 비해서조차 손색이 있었습니다. 진흥왕이 애써 역전 시킨 백제와의 국력차를 다시 추월 당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춘추부터가 고구려를 '대국'이라 부른 바가 있지요. 신라가 단결력이 강했다는데 그것은 김춘추의 지도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단결 안하면 '공멸'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세입니다. 정말로 신라의 단결력을 논한다면 기득권인 진골을 과감히 숙청하고 화합 정치를 편 문무대왕 때를 논해야 사리에 맞지요. 신라를 마냥 최후의 승자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국 신라가 경덕왕 이후로는 문무대왕의 화합 정치를 전혀 계승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문무대왕의 화합 정치는 광개토태왕의 관념적 삼국 통일을 진일보 시킨 역사적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삼국 통일 후 2백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중 1백년 넘는 기간에 모두 파기 시켜버렸으니까요. 문무대왕,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은 역사의 승리자라 할 수 있어도 통일 이후 그리고 남국 신라가 최후의 승자인지는 지극히 의문입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 누구 마음대로 고구려와 백제는 중국사이며 마한과 임나가 일본사랍디까? 원전은 1도 안보니 이런 무지한 발언이 나오지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사인데 어째서 중국 사서에는 '동이 열전'이나 '이역 열전'으로 구분을 해놓았을까요? 동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역' 열전은 아예 중국과는 영토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마한이 일본사라면 어째서 마한에는 버젓이 있는 동물들이 일본에는 없을까요. 『정사삼국지』 「왜전」을 보면 '그곳(왜국)에는 소나 말, 범과 표범, 양과 닭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후에는 있겠지만 그것은 차후 시대의 교류 때문이지 마한이 무슨 와코쿠 즉 왜국의 식민지라서가 아닙니다. 문화의 보편적인 흐름에 대해서는 아예 고개를 돌리는군요.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안넣어도 되지않을까요
진지왕역할이 배우조우진씨?
김춘추는 외교의 달인이었지만 그당시로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삼국통일의 위업을 세운 태종 무열왕 김 춘추☆
?? 또뭐지? 사람들이 많은곳은 부끄러움이 많아 나가질못했다고? 나도 어릴때는 그랬는데.
단검민족최고의역적단군산천말아먹은만고의역적이세민꼬봉그만미화시켜라
니말대로라면 진짜 역적은 연개소문이지 ㅋㅋㅋ 김춘추는 삼한통일의 과업을 이룬 영웅이고
내용은 중요치않다
난 매금이가 보고싶을뿐
@@김유신태대각간 아이디 왜 바꿨어
저런 역사서가 한국엔 왜 없나
진흥왕의 폐위도 음모가 아니었을까요???
신라의 후예들은 김춘추, 김유신에게 감사해야하는 거 아님? 그 둘 없었으면 신라는 끝장이었다.
김춘추의 야욕으로 통일된 이 땅에 슬픔과 아픔은 반복
사라진 백제사 고구려국토
찾을 수 없는 역사
춘추의 후예들이 지금도 등장함
그럼 백제랑 고구려가 압박주는데, 그대로 당하고 있어야하냐 ㅋㅋㅋ 지들이 밟는 건 괜찮고 신라가 밟으니 지랄 발광하네 ㅋㅋㅋ
김태우
삼국통일은 김춘추의 야욕으로 시작된게 아닙니다~^^ 고구려 백제는 늘 신라는 괴롭혔어요. 김춘추의 가족의 목도 따갔습니다~ 갑자기 땅을 먹어버려야지 해서 이런일이 일어난게 아니랍니다. 역사는 정확히. !
고규려 귝토는 몇십년후 고스란히 발해가 먹었는데??
뭐가 그리정말 자랑스럽습니까 중국 끌어드려서 고구려의 땅 빼앗긴게 자랑스럽습니까 삼국통일이라 고려가 삼국통일 한건 인정헤도 통일신라 라고하는건좀 웃긴다고 헤야돼나 좀 그런네요 신라의입장에서는 통일이라 할수있겠지만 후손의입장에서 보면 삼국통일 이라 하기 인정 할수가 없네요
애초에 고구려란 외세의 땅이 왜 필요하지? 신라는 신라 땅과 그 주변만 먹으면 그만
다시 고구려땅 되찾고싶음 신라를 배워라... 그 조그마한 신라가 살아남아 통일하고 천년유지된게... 지금 한국도 엄청난 외교력과 내실을 다져야지 다시 고구려땅 되찾을 기회가 온다..당시 신라가 당을 이용했듯..지금 한국은 미국을 이용해서 북한을 몰살시키고 만주일대를 되찾아야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불만인 사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남북통일에 나서 보세요 그걸 안할려거던 조상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통일과업을 폠훼하지 마세요
신라는 고구려 땅을 먹어본적이 없는데 뭘 빼앗겨요 ㅋㅋ그리고 그땐 삼국이 서로에개 외세였는데요??
신라가삼국을통일한것은이민족역사의패착이었다
반갑습니다 일체유심조 🌹 🐢
구당서에서는 김춘추가 진덕의 동생이던데 선덕과 진덕 춘추는 남매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 진덕은 진평왕의 남동생의 딸. .
6촌 동생 아닌가요
토번아니었으면 신라도 뭐 무사하지 못 했을수도
뭐 그런 타이밍도 대략적으로 읽어서 큰 그림을 그린 셈이죠. 김춘추 본인도 장안 갔다왔고 아들들도 장안에 숙위로 심어놨으니 장안 옆에 있는 토번의 동향이야 분명히 정보 수집의 대상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당전쟁을 시작한 것도 문무왕의 요동 선제공격이었으니, 단순히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지금 지르면 가능하다는 타이밍을 읽고 지른 셈이죠.
@@jinyoungan4830 음.. 그랬을수 있겠네요
1. 일단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제끼고
2. 872년 황룡사 찰주본기에 용수라고
3. 용수는 다른 말로는 비형인데 사량부 민가 여인 도화녀에게서 났다고
4. 김춘추의 실제 할아버지일 것으로 보이는 도화녀의 이전 남편은 누구냐가 무열계 족보의 핵심일듯
김춘추 최수종
오촌 여동생 ???
고구려가 통일 했으
면 만주도 우리땅
남북으로 분단이 없
어 쓸수 있을 턴데.
저때 신라 말고도 백제는 중국과 일본과 결탁해서 신라를 끌어내리려고 했고 고구려도 가세했으니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건 필연임.
중국은 머고 당나라는 머임
@@강현주-k7g 645년까진 백제도 나름대로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645년 파병 사건을 계기로 점점 당나라가 신라에 기울게 된 거죠.
@@jinyoungan4830 645년도는 백제가 당나라에 파병보낸 신라 뒷집털이를 했던 년도인데, 이건 예전부터 백제와 신라가 서로에게 수도없이 많이 해왔던 싸움이기에 특별한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이유는 7세기 초 무왕때 백제가 수나라에게 지속적으로 사절을 보내며 고구려를 같이 치자고 설득을 하였고, 수나라가 결단을 내리고 진짜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백제가 뒷통수치고 원군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작전에 큰 차질이 생기고 수나라가 멸망하는 일까지 일어났죠.
그 뒤 10년 후 건국된게 당나라인데 이름만 바뀌었다 뿐이지 수나라 버젼 2.0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당나라 측에서는 백제가 수나라 뒷통수친거를 똑똑히 기억하니 겉으로는 3국과 교류하며 친한 척 하면서 백제와 신라가 싸울땐 신라 편만 들어주게 되죠.
...............
수서 동이열전 백제
(607년) 대업 3년, 백제 무왕 8년에 장이 사자 연문진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해에 또 사자 왕효린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의 토벌을 청하였다. 양제는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장은 안으로는 고구려와 통화를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611년) 대업 7년, 무왕 12년에 양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를 보내와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내리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어 시기를 서로 알게 하였다.
이듬 해에 6군이 요수를 건너니, 장도 군사를 고구려의 국경에 엄중히 배치하고, 수나라 군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되어 신라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하였다.
(614년) 대업 10년 무왕 15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다. 그 뒤로는 천하가 어지러워져 마침내 사명이 끊겼다.
...............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612년) 13년에 수나라의 6군(軍)이 요하(遼河)를 건넜다.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히 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썼다.
(621년 10월) 22년 겨울 10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김태우
이순신
신라 업적 폄하하는 인간들은 역사 제대로 공부 안한 바보라고 생각하면 편함. 어차피 삼국이 서로 외세엿는데 뭘 자꾸 외세 끌어들엿다고 난리를 피우는지 ㅋㅋㅋ 그리고 신라 입장에선 영토 2배 늘린거야 만주를 빼앗긴게 아니라 애초에 만주를 차지한적도 없었고 나중에 발해가 만주 먹었다
11:46 폐위 전문 배우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삼국통일. 있기는 있었던가. 신라가 고구려를 정복했는가 ?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삼국통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인가. 발해사를 보면 신라의 원산만과 옹진반도를 잇는 선에서 국경을 접했다고 나온다. 이게 삼국통일인가. 조선시대에도 삼국통일이라는 용어가 존재했던가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환단고기 한번이라도 보세요. 삼한은 서로 투쟁하는 관계가 아닌 진한이 종주국이고 마한, 변한은 속국이었습니다. 선덕여왕 시리즈할때 김유신이 삼한통일한다고 떠들어 댄게 사람들 인식을 완전 베려 놓았습니다. 고조선은요, 환단고기 한번이라도 보세요, 고조선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세 나라로 쪼개서 통치를 했어요. 나라가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우니까. 참으로 더러운 세상이네요, 잘못된 TV 사극 드라마 하나가 전부 베려 놓네요. 삼한은 진한의 통치를 밖는 고조선 치하의 세나라인데, 즉 같은 나라인데 왜 자기들끼리 다툽니까. 그런 상태에서 어떤 또라이가 삼한을 일통하겠다고 합니까, 이미 통일되어 있는데. 책좀 일고 주절거리세요.
진짜 신라는 김유신, 김춘추, 구진천, 그리고 김범민 아니었다면 벌써 백제와 고구려에게 멸망했었음.
오만원권 모델로! 최초의 통일의 기반구축,,,,
다른 인물들은 그렇다 해도 김춘추가요? 김춘추가 한 일이 무엇인지? 김춘추의 그 잘난 외교라는 것도 지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인 문무대왕(김법민)에 비하면 태부족한 행위였지요. 더구나 김춘추가 죽은 시점에서 그가 이룬 일이라고는 당나라의 힘으로 백제 도성을 점령한 뒤 백제 사람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무대왕과 유신공이 김춘추가 싸지른 X를 처리하느라 생고생을 했을 것이고요. 게다가 김춘추가 의자왕에게 한 짓은 저 삼국지의 조조가 맏아들 조앙의 원수였던 장수(張繡 ? ~ 207)에게 한 행동과 비교하면 심히 졸렬한 짓거리였지요.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김춘추에 관한 한 하나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범민??? 똑바로 알자
김법민
김태우
태조왕건
당나라와 신라는 동족입니다! 금나라 청나라 신라 김씨 후손인데...어디서 발견 됬나요? 아마도 양자강 부근이 아니면 산동성에 있었을거 같은데...경상도 신라는?
역사 연화는 정확한 검정후 만드시길...
왜 이렇게 신라를 못죽여서 안달이죠?? 신라가 다른 나라보다 정상이라 살아남은건데
설사 고구려가 삼국통일햇어도 청,러,일본의 대립으로 영토줄어들엇을 가능성이 높음.
엄연히 조선영토엿던 간도도 중국에 뺏겻는데 만주인들 무사햇을까?
당시의 삼국을 지금같이 한민족으로서 보면 안된다.
당연히 현대 한민족과 고대 한국인이 동일할 리는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 더 이전의 고대 조선 열국들은 최소한의 동질성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고구려가 삼국 통일 한 후 무작정 '줄어들었을 것이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고구려가 삼국 통일 후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했을 것이라 하는 말 이상으로 터무니 없는 가정입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이상 역사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설령 삼국 이전의 고대 조선 열국들이 동질성이 없었다 한들 삼국은 최소한의 동질성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의 '관념적 삼국통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이 시기부터 '동질화'의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훗날 이것을 진일보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대왕이지요. 문무대왕 본인은 그것을 의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무대왕은 그런 역사적 과업을 나름대로 달성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업적을 성취한 문무대왕은 뒷전이고 한 일이 없는 김춘추가 진영 논리에 의해 각광을 받으니 심히 개탄스러운 현실입니다.
@@김유신태대각간 중국인임?
김태우
천추태후
그런 새끼를 사위로 삼은 커다란 실책
@@김유신태대각간 / 대놓고 거짓을 농하니 웃음도 안 나옵니다. 고구려나 그 뒤를 이은 발해가 중국사가 아니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온돌'인데요? 하다 못해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백제 시대 온돌 유적지까지 감안하면 백제 역시 중국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중국에는 없는 난방 방식이라 명확히 구별되는데 거짓을 농하는군요. 아울러 마한이나 임나(가야?)가 일본사라는 일방적인 강변도 터무니 없습니다. 마한 지역 특히 영산강 문화권 자체가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 문화가 가장 발달된 곳이었는데요? 청동기 시대 고인돌 2만여 개가 집중 분포되고 있는 고고학적 자취가 그 증거입니다. 원전 안 본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고고학 서적 1도 아니 보았음을 스스로 입증한다 하겠습니다.
김태우
신라의 압도적 승리( 7년 당나라와 전쟁의 비밀), 황금시대를 열다 #ruclips.net/video/shw30dHfgL4/видео.html
[1부] 공공학교 폐교은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 과실 높다 정의.
대한민국 인구 수 줄어드는 것을 감안 하지 않고 너도나도 공공학교 개원?
매번 언급 하는 것이지만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은 조상(선조) 처럼
엄청 열심히 공부한 나머지 머리에 과부하로 제 구실을 상실한지 '
꾀 됐다 정의.
그렇지 않았으면 중국 유방 세운 한나라때 부터 과거 급제 하기 합격하기
위해 그렇게 엄청 열심히 공부 하면서도 세상과 인간 보는 안목 없어 중국
청나라 말기 까지 나라 하고 특히 황족을 수십번 교체를 반복한 사례.
이것을 옛 한반도 옛 나라 하고 21세기 살고 있는 한반도 정치인 지식인 일반인
하고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한반도 기득권 싸움은 조선시대 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 곧 후기 신라 이전 이든 이후 부터 존재 했다 정의.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경에
이르도록 죽고 다시태어나기 반복 해도 조상(선조) 대해
어리석고 못난이 ( 비슷한:띨띨이 ) 에다 멍청이 하구 병신
에다 386 CPU 머저리 에다 칠칠히 못 하다. 철회 할 생각
과 판단 전혀 없음 으로 정의 할 따름.
변태의1973년06월24일의 정건영의생각과판단은
이 글의 관한 저작권은 1973년06월24일 의 정건영 호 변태 곧 정건영기사도 있음을 ...
개족보도 이것만하지는 않겠다
글쎄 요동땅이랑백제땅 한반도반쪽이 당나라땅이였는데 그리고 신라와당나라7년전쟁
뭘잘했다는건지?
요동땅이 왜 백제땅임?? ㅋㅋㅋㅋㅋ
@@스타브루드워 김춘추가당나라와손잡고 백제와고구려를무너뜨렸으니 요동땅을
잃었잖아 누가 요동땅이백제꺼라했냐?
이성계하고 김일성이 저놈한테 배뤘나?
반도사관에 의하면 신라는 동북아를 제패한 적이 없다. 대륙사관으로 하면 신라는 동북아를 제패하였다.
@@김유신태대각간 그건 당신 생각이고
@@김유신태대각간 니 숙제 니가 풀으셔!!
@@김유신태대각간 응 조선족 꺼져
만주를 차지했는데도 식민사학자들이 쬐그만하게 그려너은거 모르고 방송하는게 어디서 자료받아서 방송하는지 안타깝네요 당나라를 몰아내고 그영토를 알아내야하는데 제대로 알려하지도 않고 왜곡된자료 가지고 방송하니 안타까워요 만주를 잃지않았슴니다 만주 요동 요서 중국 동부 다 차지하옇고 당나라보다 큰 영토입니다
최악의매국노
오촌 여동생동 동생인가 ㅋ
형제가 있었어....그런데 서로 싸움이났네?
동생이 형을 이길수 없으니까 옆집 아저씨를 불러서 우리형 죽여줘! 죽여주면 우리집 2/3를 줄게
그리고 옆집 아저씨를 불러서 형을 죽이고 안방/거실까지 내주고 자신은 쪽방하나 건졋다고 하면서 집안을 통일했다네??
으
쓸데없는 하는 업적 없는 넘들이 자기도 이론 내세워야것다 하고 직업이니 말장난하는 넘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고구려가 한반도 통일하지 그랬어 그러면 사대주의 없을까 ? 하여튼 먹사가란 쓰잘데없이 하는 논평거리
태조 왕건하고 비교하면 김춘추는 삼국통일 시킨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어요~
당이없었으면 통일은 커녕 고구려 백제에 맨날 뚜드려맞았겠지만 삼국통일업적에 가장 뺑이친 신라인이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입니다
@@이혜진-s9o1n 왕건 주석먹기랑 비교 하기 힘듬.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 일본, 당나라 다 물리침...
통일 신라시대라고 가르치지말고
남북국 시대라고 가르쳐야 할듯
신라는 나당전쟁 직후까지만 해도 고구려 영토 전체를 확보했었습니다. 대조영이 신라 영토 내부에서 독립을 선언한게 발해예요.
@동해안오징어 식민사관 좋아하는 이 친구 또 나타났네. 고서들 직접 읽어보라고 부탁 했는데도 여전히 안읽고 있나요. 공부를 안하면 대화가 안되는데....
밑에 기록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시나요?
고구려
"의봉(儀鳳) 2년(A.D.677; 新羅 文武王 17)에 [고]장(藏)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고]장(藏)이 말갈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僑民)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로 옮겼다. 노약하고 빈곤한 자는 안동에 머물러 두었다.
[고]장(藏)이 영순(永淳)(A.D.682; 新羅 神文王 2)초년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여 힐리(頡利)[가간]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었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백제
"의봉(儀鳳) 연간(A.D.676~678; 新羅 文武王16~18)에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승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무렵 신라가 강성하자, 융(隆)은 감히 구국(舊國)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측천]무후 때 또 그 손자 [부여]경(敬)으로 왕위를 승습케 하였으나, 이때 그 땅은 이미 신라· 발해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어,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려에 부속(附屬)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씨이다. 고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그곳은 영주(營州)에서 동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과 [접하고 있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동해안오징어 당나라는 보장왕을 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를 견제하게 하였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켜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고덕무를 다시 안동도독으로 임명시킨 뒤 고씨 왕들은 대가 끊깁니다.
명확하게 요동지역이 당나라와의 경계선이라고 나오고 나머지 고구려의 옛 성들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나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흩어져 돌궐과 말갈로 달아났다 함은 원래 고구려가 여러 민족을 지배하던 제국이었고 그 구성원이 원래 말갈인들과 돌궐인들이었기에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뜻이예요. 대조영도 고구려인인 동시 속말말갈 출신이었죠. 그렇게 옛 고구려 영토 북쪽이던 말갈족 땅이 발해가 되고,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이던 요동성 오른쪽은 신라것이 됩니다.
또한 당시 요하강 서쪽은 당나라 영토였는데 위 기록에서 발해의 서쪽이 거란이라고 나오고 있어요. 중국측 고서에서 거란은 당나라의 북쪽에 있었다고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발해는 압록강에서 더 북쪽에 있었다는 뜻이예요.
최근 조사에 의하면 발해의 첫 수도 동경용원부와 상경 용천부가 블라디보스톡 북쪽 헤이룽장성 어딘가에 있었을 거라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는데,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당나라와 고구려의 경계선이던 요하지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습니다.
동북아역사넷에 고구려성 검색해 보세요, 성 대부분이 북한의 북부와 요하지역, 간도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성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압록강까지 못 먹었다고? 요동지역이 국경이었는데?
저는 근거자료를 가지고 와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헛소리네 뭐네 입으로만 때우지 마시고 제가 가져온 자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직접 한번 출처 찾아서 반박해 보시죠. 힌트 드리자면 중국측 24 정사 고서 중 하나입니다.
모르면 입 다무시구요.
@동해안오징어 오징어님은 자신이 공부를 안해서 스스로가 무식한 상황을 남에게 탓하고 있네요. 간간히 님을 이 채널에서 본지 몇달 넘었지만 수준이 그대로이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님께서 제발 직접 읽어서 공부 좀 하라고 일부러 자료 가져와서 출처를 물어봤습니다. 허나 이번에도 역시 노력해서 찾을 생각은 전혀 안하고 관심도 없으시네요. 그냥 남의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그냥 틀렸다틀렸다 붸에에엑 거리는 초등학생 수준이십니다.
제가 가져온 자료들은 거의 천년 가까이 되어가는 중국 정사 고서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님만 모를 뿐 역사공부 해보신 분들은 금방 알아요. 출처를 알아보는 분들이 나중에 오징어님이 불쌍해서 댓글 달아 주실지도 모르겠네요.
또한 가져욘 자료에 대놓고 고구려 성들을 신라가 흡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님은 여전히 억지로 안보이는 척 '도대체 님 글 어디에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했다는내용이 있나요 ㅋㅋㅋㅋ먼 자신감인지 ㅋ' 이런 헛소리나 하고 계세요.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정하기 싫어서 땡깡이나 부리시는데, 무슨 초등학생입니까?
더군다나 제가 지금껏 주장한 내용은 환단고기에 나오지도 않아요. 오히려 환단고기는 고구려와 부여를 과장하느라 백제와 신라사를 굉장히 폄하하고 축소합니다. 님이 제대로 아는게 하나도 없어서 상대방한테 데미지도 못주고 있으세요. 뭔가를 욕하려면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챙겨야지, 그정도 노력도 안해놓고 악만 바락바락 쓰고 계시네.
참 유치합니다. 공부는 안해놓고 남 헐뜯기만 하는, 노력은 안하고 어린애처럼 떼만 쓰는 당신.
@@김유신태대각간 / 한자 표기가 다소 다릅니다. 지역이나 군현을 나타낼 때는 발해군(勃海郡)이라는 명칭을 쓰고 한나라 안의 제후국을 표기할 때는 발해국(渤海國)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북국 대씨 왕조의 발해국(渤海國)과 한자가 같지만 애초에 한국의 국명은 '음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원래 음가가 있는데 이것을 한자로 표기했다는 것이지요. 중국 기록에서 '윤색'을 했을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전제 자체가 다릅니다.
동북아는 커녕 한반도조차도 제대로 통일 못시켰는데 무슨 헛소리
오직 영토로만 따지면 한국사 내내~지금까지 아무도 통일을 못 한 셈이죠.
고구려는 남쪽 못 먹었고
고려나 조선도 만주 못 먹은 건 통일신라와 마찬가지고..
@@행텐-v4b 우리나라도 처음엔 북한보다 약했지만 유엔군의 도움으로 승리했듯 우군을 잘 이끌어내는 능력도 자력갱생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통일된 민족개념이 있지도 않던 시대에 김춘추가 외세를 개입시켰네..고구려가 통일 했어야 하네.. 이딴 소리를 하는거 보면 참 한심함 허세와 무식과 환상의 극치
김춘추,김유신 저 멍청한 듀오때문에 한반도는 고구려영토도 수복 못하고, 반으로 되고, 결국 고려,조선때는 오랑캐한테 수도함락, 굴욕을 당하는데
수복할 필요가 없지 애초에 고구려란 외세의 땅인데
애초에 고구려의 영토는 척박하고 지키기도 힘든영토라 ..
그럼 왜 고려나 조선땐 만주 못먹음??
@@스타브루드워 고려 조선때 만주 먹어봐야 별 이득이 없었기 때문임 인구도 적었고 세종때 강사이로 국경을 정한이유도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함 이었음
김춘추가 삼국을 통일했다? 그럼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부, 중국의 역사네요 ㅋㅋ 이딴 동북공정 집어치우세요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아니고 남북국시대입니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직접 읽어보세요... 나당전쟁 이후 고구려의 성 대부분을 신라가 차지했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 직후 문화권이 달랐던 말갈계 기마민족들이 신라통치를 거부하고 지들 따로 나라를 만든다고 옛 고구려 영토이던 쑹화강 지역에서(속말말갈 옛 영토) 독립을 해버렸고, 여기서 신라는 나당전쟁이 지금 겨우 끝났는데 고구려 옛 유민들과 또 싸움을 하면 당나라만 좋아지는 꼴이니 그냥 내버려 뒀어요. 그 덕분에 당장 신라와는 싸우지 않고 발해랑 당나라가 싸움이 붙어서 전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당나라가 신라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요청했고, 신라는 원군을 보내주는 척 하다가 겨울이라 병사들이 다 얼어 죽었다며 철수를 해버립니다. 이 전쟁에서 발해가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와 신라에게 정식 국가로 인정됩니다.
@동해안오징어 축하드립니다. 책 이름의 힌트를 찾으셨군요.
영상에 달린 댓글들이 수십개인데, 다른 댓글에서 했던 대화 내용을 지금 여기서 따지는 님의 고집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보니까 매금이랑 비슷한 성격을 가지신 분인 것 같네요. 그 노력과 시간을 공부에는 쓰지 않고 매금이랑 똑같이 댓글 싸움질하고 트롤링에 집중알 하시는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검색할 생각을 안하고 왜 그냥 말 안해주냐고 저에게 욕설을 퍼부으셨죠.
저 같았으면 님이 지금껏 댓글 찾을 시간에 직접 인터넷 검색해서 책 이름을 찾아내어 스스로 공부를 했으면 자료의 출처를 훨씬 빠르게 발견하지 않았을까 생각 됩니다. 그랬으면 원래 우리가 댓글 달던 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더이상 이 댓글에서는 님에게 대응을 하지 않겠습니다.
처음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던 댓글에 님이 자료 출처를 명확히 밝히면 확인을 해주시면 그때 답변을 하겠습니다.
@@OYT0724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읽을 시간에 공부나 좀 하세요
@@보리-d8x2m @DBD Borin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읽을 시간에 공부나 좀 하세요" ㅋㅋ 와 정말 감탄하고 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태우
한반도가 최초로 이민족들의 말발굽에 짓밟힌 치욕의 역사, 우리민족 역사상 최악의오점이다! 만주벌판 광활한 고구려 영토와 백제의 일본 지배권이 상실되면서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영토와 영향력은 반의반의반토막!
(2022년 현재 시점에서 말하면) 고구려와 백제와 대가야와 신라 박혁거세와 내물왕의 전욱고양 국통이 그만..ㅡㅡ;
@@김유신태대각간 뉘신지? 혹시 그때 그..
@@김유신태대각간 한국은 한국이고, 일본은 일본인데, 무슨..ㅡㅡ;
아직도 삼국을 지금의 관점으로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데 역사를 제대로 배워요. 그리고 최초의 이민족의 침입에 당한건 고조선이지. 고조선은 한국사 아니라고 할거?
@@김유신태대각간 너한테 말안걸엇는데 오지랖지리고
경상도가 외세를 끌어들이는건 저때부터였네..지금도 경상도보수는 미국외세를 끌어들이고 있고
전라도가 왜랑 손잡고 혈연계통인거나 마찬가지지
@@aaruoosma5055 엉터리 지역감정질 -_-;;; 일본풍 갑옷이 발굴된 지역은 언급 안하시고?
@@OYT0724 장첸이란 자가 지역감정 끌어올리기에 같은논리로 말한거 뿐임. 왜랑 우리가 얼마나 가까운데 교류가 많은건 당연한거임. 신라 금관가야 대가야 백제 마한 변한 진한 할것없이.
가장 많이 외세에 의존한 자는 김대중입니다. 이자는 걸핏하면 미국 일본으로 도망갔죠. 그리고 외세를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비난했습니다.
꼬우면 미국 버리고 자급자족하던지 ㅋㅋ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이지 못한건 김유신이 무서워서 그런거라고 보면 신라가 고구려보다 약하지 않았단 얘기지.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억설을 주장하시는지? 유신공이 유능한 것은 인정해도 당시의 신라는 유신공의 능력을 충분히 받쳐줄만한 국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연개소문이 굳이 김춘추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래야 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사삼국지』를 예로 들 때 조조가 왜 기회가 되는데도 유비를 제거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무리수와 변수를 최대한 줄이고 인재 영입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근본적으로 국력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당장 『삼국사기』만 살펴보아도 이는 명확하지요. 원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 보장태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저희 영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임금이 대국(大國)의 병마(兵馬)를 얻어서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후략)”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 선덕(여)왕(善德王) 11년」
김춘추가 백제에 대해 말하는 내용인 옳은지 그른지는 제쳐두더라도 이미 고구려에 대해 '대국'이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격차를 인정한 것이지요. 다른 원전도 살펴보겠습니다.
(김)춘추가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깨달아 (고구려 보장태)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고개〔마목현과 죽령〕는 본래 대국(大國)의 땅이었으니, 신이 귀국(歸國)하면, 저희 왕께 돌려주라고 청하겠습니다. 만일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밝은 해를 두고 〔죽기를〕 맹세하겠습니다.”
(보장태)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1 「열전 제1 / 김유신(金庾信) 상 / 서기 642년 (음)」
이렇게 신라는 고구려 말기 때에도 국가 간의 격차를 인정했습니다. 유신공이 유능한 인물이라는 것으로 국가 간의 격차가 없다는 주장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가령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있다고 촉한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 않았다는 식의 표현이 가능한지요? 국력은 '명백히' 위나라가 우위였고 결국 천하의 제갈량도 정벌에 실패했습니다.
태조왕건
대왕의꿈
개처량한 세상.. 피 맺히는 음악..ㅣㅣ
김 춘추가 한심한건지 고구려가 한심한건지 백제가 멍청한건지 그냥 중국이 통일 하던지
신라의 고구려없는 삼국통일은 역사왜곡
일련 스님 삼한통일은 진한 변한 마한을 말함이다.
약소국으로서 살아남기 위함이었겠지만 우리민족에게는 천하의 몹쓸사람인데 찬얌사는 것은 좀 ᆢ당나라와 당당히 ᆢ라는 단어도 ᆢ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 오랜전쟁으로 엎드려서라도 신라와 손잡으려 했겠다 곰넝방송이 왜 이러지? 이땅에 신라후손만 사나? 나도 본관이 밀양이지만 ᆢ
유비 조조 원소 손책...모두 외세와 결탁합니다.
@@Kim-ig3qq / 일단 외세라는 것의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터인데요? 외세가 좁은 의미의 '외부 세력'을 말하는지 아니면 '외국'이나 '이민족'을 의미하는지 부터 분명히 하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그야 어떻든 원소, 조조, 유비, 손책은 자신들과 각 군웅들 사이의 격차가 당나라와 신라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외세와 결탁했다 한들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았지요. 반면 신라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김춘추 정권'은 '의자왕 굴욕 주기'라는 목표 하나로 당나라에 징징대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런 것이 과연 외교인지? '얼치기 외교'의 전형이라 하겠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 증조부인 진흥왕이나 아들 문무대왕과 비교해보아도 그 격차는 매우 명확합니다.
거란의 후손답다. 하지만 출발지 요동이였어야지 가능한 일이였고, 결국 1000년 후 세계는 늘 남에게 이용만 당하던 여진족따위에게 넘어가게된다.
@@김유신태대각간 왔는가~~
@@김유신태대각간 그 중국은 인류학사적으로 티벳 다음 역사적으로 강족 흉노 선비 거란 몽골 여진족을 포함 유목민의 역사지.
아쉽네
연개소문이
김춘추와
손을잡았으면 고구려가망하지않았을텐데
@@우한바이러스-p9n 연개소문이 그정도 그릇밖에 안되는 졸장부라는걸 반증
통일이후에도만주는신라땅이었다신라의ㅣ국경은북경까지이다김춘추가고구려땅을그대로넘겨주지않았을것이다광할한고구려땅은우리가배운것보다더넓다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