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산스님의 벽암록】 제59칙 조주의 지극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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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Опубликовано: 4 фев 2025
- 제59칙 조주의 지극한 도.
누가 조주를 보았을까?
호랑이의 걸음을 하고 용의 거동을 하였다.
세 가지 관문을 뚫고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였음을.
【본칙】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을 꺼린다’라고 하시는데,
잠깐이라도 언어가 있다면 곧 간택입니다.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위하시겠습니까?”
조주스님이 말했다.
“어째서 저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저는 그저 여기까지 외웠을 뿐입니다.”
“다만 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
내용을 보겠습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을 꺼린다’라고 하시는데,
이 구절은 승찬조사 [신심명]의 첫 구절입니다. 조주스님께서는 평소 이 구절을 들며 자주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스님은 그 인연을 빌려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간택을 꺼린다’라고 한 것은 간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푸른색이다. 저것은 붉은 색이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틀리다. 이처럼 분별하고 시비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크게 보면 청탁과 시비에 떨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범부외도 이승의 도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집멸도 사성제를 아는 지혜로 열반에 이르는 것을 ‘택멸’이라고 부릅니다. 번뇌를 부처의 지혜로 가려내어 물리치고서 번뇌가 다한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여기에는 세 겹의 공안이 있다’라고 했을까요? 이 하나의 구절에는 세 겹의 공안이 포개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조주스님이 말하는 이 구절을 제대로 살피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 관문을 지나가야 비로소 인정해줄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세 가지 관문이란 무엇일까요?
저 스님은 말했습니다.
잠깐이라도 언어가 있다면 곧 간택하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은 말하였습니다.
“잠깐이라도 언어가 있다면 곧 간택이고 명백이다.”
바로 여기에는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할 두 겹의 관문이 있습니다.
‘언어가 있다’라고 한 것은 그것이 어떤 깨달음이든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간택과 명백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말을 따라서는 말로 할 수 있는 법을 얻고 말을 떠나서는 말로 할 수 없는 법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위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을 위하시겠습니까’라고 한 것은 말을 떠나서 다시 어떻게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말로 하는 것은 앞에서 간택이고 명백이라고 밝혔으니,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가르침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누군들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과연 조주스님은 달랐습니다.
조주스님이 말했다.
“어째서 저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어째서 저 법문을 다 외워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상대의 말을 따라서 상대를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도적질은 소인이지만 지혜는 군자를 능가하였다. 솜씨 좋은 도적이다. 도적의 말을 타고서 도적을 쫓았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은 소인이지만’이라고 한 것은 평소 조주스님이 저 옛 사람의 구절을 인용하여 법문을 한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군자를 능가하였다’라고 한 것은 조주스님은 말과 구절을 깊이 꿰뚫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솜씨 좋은 도적이다’라고 한 것은 조주스님의 솜씨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흔적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의 살림살이를 훔치는 도적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도적의 말을 타고서 도적을 쫓았다’라고 한 것은 저 스님의 말에 근거하여 그대로 받아쳐서 추궁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여기까지 외웠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 스님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미 몸을 돌리고 기운을 토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원오스님은 말하기를, ‘둘 다 진흙덩어리를 희롱하는 자들이다. 저 도적을 만나 말에 매달려서는 대적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진흙덩어리를 희롱하는 자들이다’라고 한 것은 저 범부외도 이승이 깨달은 바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입니다. ‘저 도적을 만나 말에 매달려서는 대적하기 어렵다’라고 한 것은 말 빨이 하도 좋아서 말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이 그러하고 저 스님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에 대해 장경각출판 [벽암록]에서는 ‘둘 다 진흙덩이를 희롱하는 놈들이다. 도적을 만났군. 꼼짝않고 있으니 대적하기 어렵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조주스님은 말했다.
“다만 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극한 도는 곧 조사의 도를 말합니다. 무심, 불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찌 간택을 둘 것인가? 여기에 머물지 말고 저기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택을 꺼릴 뿐이다’라고 한 뜻인 것입니다.
질문: 무엇이 세 가지 관문일까요?
답변: 어찌 조주스님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오직 간택을 꺼릴 뿐이다. 잠깐이라도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간택이고 명백이다. 노승은 명백 속에도 있지 않는데, 그대들이 오히려 보호하고 아낄 수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노래하였습니다.
【송】
물로 씻어낼 수도 없고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않는다.
호랑이의 걸음을 하고 용의 거동을 하니
귀(鬼)가 울부짖고 신(神)이 흐느낀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로 씻어낼 수도 없고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않는다.
‘물로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은 저 조주스님의 도는 인위적으로 갈고 닦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한 겨울의 찬바람도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노승은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라고 한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호랑이의 걸음을 하고 용의 거동을 하니
귀(鬼)가 울부짖고 신(神)이 흐느낀다.
조주스님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호랑이와 같고 바다와 하늘에서는 용과 같은 거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귀신조차도 전혀 단서를 얻지 못하고 그저 몸을 움츠리고 두려워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세 척이라고 한 것을 누가 아는가?
‘머리가 세 척이다’라고 한 것은 머리의 크기가 무려 1미터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머리는 30센티를 넘지 못합니다. 지금 설두스님이 이렇게 말하는 뜻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 관문을 밟아가야 합니다. 아직 세 가지 관문을 지나지 않았다면, 설령 알았다고 해도 어찌 여기에 딱 부합하는 뜻을 얻겠습니까?
마주해 말없이 외발로 섰구나.
설두스님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저 외발 도깨비를 어떻게 알아야 할까요? 아차! 그저 백지 한 장 차이로 상과 벌이 달라졌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 것인가?
합장
취산스님과 가깝게 지내기: 카카오톡 ID: taoindra
※한 번 들으면 자신이 보이고 열 번 들으면 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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