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이것이다20. 데카르트 R. Descartes, '성찰' : 신은 존재한다. 신은 진리의 보증자로서 전지, 전능, 전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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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2 сен 2024
  • 철학은이것이다20. 데카르트의 대표 저서 ‘성찰’은 신의 현존과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찰’의 ‘두 번째 글’ ‘제2성찰’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심지어는 악마나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이 나를 기만하려는 온갖 노력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생각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논리로 생각하는 나, 사유 실체로서의 정신(영혼)의 존재를 증명했습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소멸하는 신체의 속성과 달리 사유 실체인 영혼은 비물질성, 비가분성, 파괴불가능성, 비연장성, 비공간성, 단순성의 속성을 갖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록 내가 생각하는 정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명석판명하게 참이라는 것, 즉 직관적 명증성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더라도 정신으로서의 내가 지각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직관적 명증성의 인식은 수학적 진리와 같이 이성적 인식으로서 명석판명한 인식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직관적 명증성의 인식이더라도 유능한 기만자에 의한 속임의 가능성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코기토의 명증성을 확신하듯이 내가 명증하게 즉 명석판명하다고 인식한 것이 악마의 기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직관적 명증성의 인식 자체가 진리의 최후의 준거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참인 지식이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그와 같은 진리 인식의 보증자로서 신의 존재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 또한 성공적이려면 두 가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하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신이 선한 존재로서 진리의 보증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다음과 같은 문제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신 존재를 증명하고 또 신이 ‘명석판명하게 직관되는 인식은 참이다’라는 것을 보증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명석판명한 것이 진리 인식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 참인 명석판명한 인식은 전선한 신에 의해 부여받은 능력을 올바로 사용했을 때 가능한 인식인데, 그러한 능력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객관적 척도는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입니다. 이러 문제들은 뒤로 미루고 이제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 집중해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나는 의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자인 신의 관념이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갖고 있는 신의 관념은 완전한 존재자, 즉 신 그 자체에서 온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신의 관념, 즉 내가 영원하고 무한하며, 전지전능하고, 자신 이외의 만물의 창조자인 최고의 신을 인식하게 되는 관념은 유한한 실체를 나타내고 있는 관념보다 확실히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말하는 표상적 실재성은 형상적 실재성과 대비됩니다. 전자는 관념이 갖는 실재성 즉 관념적 실재성을, 후자는 실체가 갖는 실재성 즉 실체적 실재성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비교하면, 전자는 관념 즉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과, 후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이를 인과 원칙에 기초해서 이해하면, 원인의 형상적 실재성은 결과의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거나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과가 관념이라면 원인의 형상적 실재성은 결과의 표상적 실재성보다 크거나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신의 관념뿐이므로 신의 관념은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습니다. 그런데 인과의 원칙에 따르면,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은 원인으로서의 형상적 실재성을 전제합니다. 이는 곧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에 대응하는 무한한 형상적 실재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한한 형상적 실재성은 감각세계에서 관측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형상적 실재성이 무원인적이라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신 관념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은 실제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신의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가 논증됩니다. 데카르트는 ‘제3성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의 빛에 의해 분명한 것은, 전체 작용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원인의 결과에 있는 것만큼의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과는 그 원인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 그 실재성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 원인이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실재성을 결과에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로부터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완전한 것, 즉 더 많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그 실재성이 현실적 즉 형상적인 결과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표상적 실재성만이 고려되는 관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이 증명은 문제가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에 이미 완전성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내가 이런 개념을 갖게 되었는지가 먼저 해명되어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불완전한 인간은 완전성 개념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해서 그것은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완전성은 불완전성의 상대적 개념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그런 관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타당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언어적 문제일 뿐입니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데카르트가 강조하는 신 존재 증명의 요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 없는 성질들, 예를 들어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한 성질을 지닌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신이라는 관념은 극히 명석판명하며 세상의 그 어떤 물질보다도 표상적 실재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 신이 지닌 완전성이란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분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신은 스스로 현존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인간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고 보존하는 원인이 된다.” 계속해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증명을 이어갑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신의 관념뿐이며, 이 관념이 나 자신에서 나올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자.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다. 실로 이런 것은 내가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했던 것으로부터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고 결론짓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실체인 한 나는 실체의 관념을 갖고 있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 관념은 무한 실체의 관념일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 실체의 관념은 실제로 무한한 실체로부터 유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 즉 이 관념을 갖고 있는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부터 신은 현존하고, 내 현존 전체는 매순간 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나는 분명하게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보다 더 명증적으로, 이보다 더 확실하게 인간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증명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신은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명증적 인식에 대한 진리의 보증자라는 추론은 타당할까요? 아마 완전성 개념 만큼이나 ‘선한 신’ 또는 ‘신의 선함’도 문제적 개념입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은 결코 기만자일 수 없으며, 모든 사기와 기만은 다른 이유로부터 근거한 것이다.” “모든 사기와 기만이 어떤 결함에 의거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다”고 주장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첫째, 나는 신이 나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속임이나 기만 속에는 어떤 불완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일 수 있다는 것이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인 듯하지만, 속이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 악의나 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는 내 안에 어떤 판단 능력이 있음을 경험하는데, 이 능력은 내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신은 나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능력을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나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증명과 관련해서 앞서 완전성이 상대적 개념이며, 내가 완전성의 관념을 갖고 있는 것도 상대적 크기로부터 추론을 통해서 갖게 된 언어적 문제라고 했듯이 선의 개념도 악의 개념과 짝을 이루는 상대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무한수를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절대선의 실재성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 이외에도 신의 완전성에 대비되는 인간의 불완전성은 신이 진리의 보증자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능력의 올바른 사용을 언제나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의 신 존재 증명이 완전하지 않거나 오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은 한계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능력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서 세계에 대해서 참인 지식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거나 신이 진리의 보증자라거나 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됩니다. 신 존재는 인간의 무한자에 대한 경험이나 체험과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감정적 체험 혹은 직관적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한자에 대한 감정적 인식을 통해 완전성 개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개념적 인식을 통한 논리적 증명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한자에 대한 체험적 감정적 직관적 이해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우리는 그에 준해서 무한자의 완전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그와 같은 차원을 선취한 것이며,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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