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에피소드는 독일의 미완의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이로군요. 그라프 체펠린은 월드 오브 워쉽에서 독일의 8티어 프리미엄 항공모함으로써 만나볼 수 있는데요. 건조와 중단을 반복했던 탓에, 군함으로서의 함생은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후세 사가들에게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끔 하는거 같네요. 대전기 수많은 군함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져 있지만, 그라프 체펠린만큼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군함들은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차기 에피소드는 미국의 무훈함 중 원탑으로 꼽을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로군요. 차기 회차가 기대됩니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이후 일본군은 항공전력을 매우기 위해 어느 정도 건조된 그라프를 구매할까 고민했으나 결국 거래가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사실 이 거래에 가장 긍정적인 국가는 특이하게도 미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일본으로 운송해올 그라프를 근처 항공기군이 조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래가 불발 되면서 미국의 꿈은 결국...)
댓글에 그라프체펠린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하나 짚어드립니다. -그라프체펠린은 괴링 때문에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닙니다. 42년 뒤에 괴링의 견제로 그라프체펠린이 제때 태어나지 못한건 사실이긴 하고, 괴링이 말도 안되는 쌉소리를 해대면서 방해한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 이유는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영상에서도 말했듯 독일은 42년 이후, 자원난에 허덕이기 시작헀고, 당장 독소전에서 소련군을 막기 바빴습니다. 거기에 대서양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로열네이비와 미 해군이 제해권을 놓친적이 없었고요. 크릭스마리네의 역할은 대서양에서 통상파괴로 영국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는것이며, 제대로 된 해군 전력으로는 영국해군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라프체펠린을 건조하는건 운용효율이 떨어지는 방침입니다. 스타로 비유하자면 상대는 멀티 먹었는데, 견제를 하는게 아니라 배틀쿠르저 뽑으려고 테크올리는거랑 비슷한 상황이죠(수지타산에 안 맞는 행동을 의미하는겁니다) 결국 그라프체펠린이 건조되지 못한 이유를 짚자면 괴링보다는 크릭스마리네가 건조하지 않았다가 더 크고, 전황이 급박해진 탓입니다. 카를되니츠가 수상함 보다는 잠수함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춘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죠. NAVY Crew(도와주신분들) -iafpjh2003(썸네일) -래리(촬영)
덕후게임중에 지금 네이비필드라는 게임이 있어요~2차세계대전 배경으로 독 프 영 미 일 이 소 이렇게 국가 선택하고 수병육성해서 전함트리 타거나 항모트리 잠수함트리 타는데 독일 항모트리중에 저 그라프체펠린이라는 항모가 있습니다...함재기는 3종류로 나눠지는데 급강하폭격기/뇌격기/정찰 날려서 적함을 격침 시키는 게임입니다...고인물게임이긴해도 직접 항모를 몰수있고 함재기를 조종해야되서 어느정도 손피지컬이 요구되는 게임인데 밀덕들이 좋아할만할꺼에요....무료게임입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섬들에서나 필요한게 당시의 항공모함이죠. 육지 기까이 다가가면 육지 공국기지에서 출격하는 수많은 항공기의 공격에 견디지 멋함. 왜국이 과달카날에서 진것도.. 과딜카닐섬에 있는 비행장에서 출격하는 항공긱가 두려워 섬 근처엔 항모 자체가 접근하지 못하고.. 그래서 수송도 제대로 못해..결국은 소총만들고 돌격하는 덜떨어진 전술만 반복하다..다 죽은것이죠. 그래서.. 당시 유럽에선 항모라는게 쓸데없는 물건이었죠.
과달카날 전투 중, 동부 솔로몬해전과 산타쿠르즈 해전은 과달카날 섬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미국의 함대항공전입니다. 이때 양측간 큰 피해로 인해, 남게 된건 과달카날 항공기지였고요. 유럽전장에서 항공모함이 쓸모없었다뇨? 나치독일의 무제한 잠수작전을 막아낸건 항공모함의 역할이 가장 컸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은 육상 기지와 달리 이동하며, 바다에 몸을 숨길 수 있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아무리 육상에서 이륙한 항공기가 강력하다고 한들 기습의 효과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1942년 8월 operation pedestal 최대 몰타 호송선단 : 상선14, 전함2, 항모5, 순양함7, 구축함32, 잠수함7등 ruclips.net/video/0inR2jRW_P8/видео.html Operation Pedestal: The Convoy That Saved Malta (2분25초 이후 지중해 진입할 때의 페데스탈 선단 배치 그래픽으로 나옴.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선단 배치 모습.) ruclips.net/video/11173sD3kgc/видео.html Battle Of The Convoys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Xf3vzsT40aI/видео.html Malta Convoy Battle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qjUmRzKZH-E/видео.html Malta Convoy - Further Pictures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it3pOYM0JkA/видео.html HMS Nelson Hit in Convoy Attack 실제 전투 영상blog.daum.net/mybrokenwing/387 몰타를 살리기 위한 발악들(5) 국내 블로거 봉달이님 글. 독일 이태리 추축국의 공격을 뚫고 보급을 성공시켰지만,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거의 모든 함정이 손상당했고 격침된 함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선9, 항모1, 순양함2, 구축함1. 격침된 항모는 장갑항모 이전의 함대항모 이글, 독 유보트에게 격침당했습니다. 장갑항모 인도미터블은 대파. 상선은 14척이 출발해서 몰타엔 겨우 5척만 도착했죠.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이었던 오하이오는 겨우 도착. 오하이오는 원래 미국 유조선이었지만 영국해군이 임대해서 승무원은 모두 영국인. 거의 1만톤급 유조선 오하이오 역시 피해가 커 전승무원이 퇴함하기도 했으나 구축함3척이 양 옆과 앞에서 지탱하며 끌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로 몰타 입항. 몰타 도착후에 기름 거의 다 퍼낸 상태에서 결국 침몰했습니다. 4척의 일반 상선과 1척의 유조선 도착으로 보급받은 물자는 약 5만5천톤, 그 중 석유는 약 9000톤, 식량과 탄약 4만5천톤. 페데스탈 작전 피해가 너무 커 다시는 이런 작전을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5만5천톤의 보급은 몰타를 살려냈고, 역으로 살아난 몰타로 인해 롬멜의 보급이 끊기고 몇 달 후 엘알라메인. 동원된 전함중 1척은 어뢰에 피격되었지만 천운으로 별 타격 입지 않았고, 동원된 항모 5척은 장갑항모2척, 구형의 함대항모였던 이글과 퓨어리어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전갑판 항모 아거스. 아거스는 세계최로로 상부구조물이 제거된 전갑판 항모였지만 함대항모가 아닌 소형 호위항모. 퓨어리어스는 항대방공 임무가 아닌, 몰타에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영공군 스핏파이어를 탑재, 몰타 약 1000km 전방에서 항공기를 몰타로 출격시키고 지브롤터로 바로 귀환했습니다. 즉 장갑항모 2척이 몰타 인근 해상까지 함대방공 임무를 수행 하다, 몰타의 영공군이 엄호하기 시작한 직후 역시 잽싸게 지브롤타로 후퇴. 아거스는 대잠 항공작전 위주. 피데스탈 작전 이외 여러 호송작전에서도 영국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그러나 영국 장갑항모는 여러번 직격탄에 피격되었어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리어스 경우 피격된 상태에서 몰타 입항, 항구에서 다시 공습에 노출되자 밤에 탈출해 미국까지 도피, 수리 때문에. 영국 본토도 폭격에서 자유롭지 않아 병신된 몸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수리받음. 인도미터블은 슈투카에게 대형 폭탄 2발 직격당하고도 꾸역 꾸역 후퇴했죠. 장갑갑판이 찢어졌지만 갑판 아래 핵심 선체는 손상당하지 않아서 탈출에 성공했죠. 미국과 일본의 나무갑판 항모였다면 지중해 진입하면 다시는 못빠져나갑니다. 타격당하는 순간 끝이나 다름 없습니다. 몰타 가는 중에 피격되면 살려면 지브롤타까지 도망가야 하죠. 문제는 적 공군이 계속 추격할 수 있는 추축국 점령지대가 튀니지 알제리등 지브롤타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호송선단은 대략 3일 정도 항해합니다. 그 3일 밤낮으로 항공기, 잠수함, 수상함의 공격을 당했고, 심할 경우엔 한 번의 공습에 대략 300기 정도의 추축 공군기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대가 생존한 이유는 하늘엔 몰타의 영국 공군도 출격해서 추축국 공군도 대함공격만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몰타의 영공군 엄호가 없는 구간에서는 항모 함재기와 함대의 대공포 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미드웨이나 태평양에서의 항모전투는 몇 시간 이내에 일단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죠. 항모가 격침되거나 대파되면 전장에서 이탈되어서 쉬는 거고, 항모 피해 별로 없더라도 무장 떨어지면 보급 때문에 후퇴. 지중해의 호송선단 전투는 약 3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고, 적 항공기들은 육상기지에서 재급유 재무장받고 다시 출격. 즉 공격하는 측의 공군기지는 격침될 위험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방어하는 함대의 항모는 격침되거나 대파될 위험. 태평양에서 항모 대 항모 전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항모와 공군력의 대결이었습니다. 항모 단독은 아니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타에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호위 아래 영국 항모들이 생존했던 것. 미국 일본의 항모전단이 만일 그 당시 지중해에 진입했다면, 항모전단 자체 세력만으로 살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무 갑판이라 피격되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적 공군과 잠수함이 끊임없이 추격 반드시 격침시킵니다. 태평양의 항공모함전 때는 잠수함들 활약 어렵죠. 잠수함이 항모 따라다닐 속도가 못되니. 잠수함을 전장에 항상 미리 배치 매복시킬 수도 없고. 하지만 지중해에선 잠수함들은 상시 매복 상태. 강력한 대잠세력을 가지지 못한 항모전단 자체 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태평양과 달리 대서양에선 독일 상대로 항모 대 항모 전투는 불필요, 북해에선 적 공군력 위협이 너무나 커 무르만스크 호송과 같은 임무 이외엔 항모가 진입도 꺼렸고, 지중해에선 몰타 보급 때문에 정말 목숨걸고 들어가 죽다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영국공군 엄호 아래서 겨우 생존했죠. 그러한 지형적 작전 제한 조건 때문에 영국은 장갑갑판을 채택하면서, 함재기 탑재수를 희생했고, 여러 곳에 산재한 영국 공군기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쟁 전 함재기 개발 필요성 덜 느겼던 것. 전쟁 터진 이후엔 독일 상대하기 바빠 2차대전 중엔 대부분 미 함재기 의존, 45년 종전 후에야 고성능 씨퓨리와 제트기.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 보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독일 이태리 추축국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수백km 해상교통로, 영국은 최단거리 직항로라고 해도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수천km, 전황이 악화되어 지중해 직항로를 택할 수 없을 경우엔 대서양-희망봉-인도양-홍해-이집트로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짧디 짧은 해상교통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보급이 말라버린 것, 그 자체로 추축국은 승리할 기본 자격이 없었던 것.
최초의 제트기 항모 이착륙:1945년 12월3일, 놀라운 2차대전 전시 기술발전 속도 ruclips.net/video/PNoUBil7A3c/видео.html 2차대전 종전된지 불과 몇 개월 후인, 1945년 12월3일 경사장갑갑판의 영항모 오션에서 세계 최초의 제트 함재기 이착륙이 일어났습니다. 착륙 후 이륙 순으로 성공했습니다. 에릭 윙클 브라운 이라는 테스트 파일럿은 487종의 연합국과 추축국 비행기를 시험 비행한 깨지지 않을 세계 최다 기종 테스트 비행사입니다. 영국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 테스트 파일럿으로 전향했습니다. 최다 기종, 최다 항모 이착륙 기록, 기타 수 많은 기록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최다 기종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겁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신기종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또한 에릭은 1944년 영공군의 모스키토 폭격기를 항모에 최초로 착함시켰고, 종전 직후 독일의 제트기와 로켓 항공기등 추축국 항공기들을 시험비행했습니다. 소련의 인류 최초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글라이더, 복엽기, 전투기, 폭격기, 민항기, 헬기, 수직이착륙기 등 거의 모든 기종을 포함한 487종.) 제트기를 항모 갑판 거의 끝에서 착륙시켜 아주 짧은 거리에서 멈춘 놀라운 착함 모습입니다. 전쟁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영국과 미국은 제트 함재기로 태평양 하늘을 휩쓸었을 겁니다. 미국 일본 항모와 달리, 지중해와 북해라는 육지로부터 가까워 적 공군력에 노출되기 쉬운 조건이라 영국 항모는 장갑갑판을 먼저 도입하게 되었고, 지중해에서 여러 직격탄에서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정도엔 벌써 경사갑판으로 개조된 영국 장갑항모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미국도 이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갑갑판, 경사갑판, 광학식 착륙유도장치, 증기 캐터펄터 등 항모에 필수적인 거의 모든 요소들이 영국 해군에서 도입되어 미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미국이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항모의 스키점프대 역시 마찬가지죠. 유명한 고성능 미 함재기 코르세어의 항모 사용도 미해군이 아닌 영해군이 먼저 도입했습니다. 전방동체가 크고 길어서 항모 착함시에 시야를 막아 미 해군은 해병항공대의 육상기지 사용으로 돌리고 항모 도입을 하지 않았지만 영국 해군에서 새로운 착륙방법을 도입해서 최초로 항모에 탑재했고 미항모에 그 착함 방식이 이전되었습니다. 직선 경로로 착함하지 않고, 선회하면서 착함하는 방식으로 시야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curved approch : 영 해군이 개발한 corsair 착륙법, corsair 전방 시야가 좋지 않아 항모 접근시 관측하기 용이하도록 (항모 주변을 곡선을 그리며 선회하면서 접근하며 측면에서 갑판을 보며 고도를 맞추어 착륙) 7분35초 이후 보시길 ruclips.net/video/rNcV13uayxw/видео.html 위키백과 인용 (1943년 11월 영국 해군은 보우트사가 납품한 95 기의 F4U-1 커세어를 커세어 MK I 으로 분류하여 배치하였다.[62] 첫 비행중대는 미국 동부 연안에서 결성되어 훈련을 받은 뒤 대서양을 건넜다. 영국 해군은 커세어를 항공모함에 탑재하고 즉시 작전에 투입하였다. 작전이 실행되자 다수의 커세어의 착륙 특성 문제가 드러났고, 다수의 커세어가 이 과정에서 파손되었지만 영국 해군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영국 해군에 납품되는 커세어는 영국의 항공모함의 격납고 크기에 맞추기 위해 윙팁이 8 인치(200 mm)정도 짧았다.[63] 주익의 폭을 줄인데다 갑판의 활주로도 짧은 영국의 항공모함에서 운용된 커세어는 미국의 경우 보다 오히려 착륙 사고가 적었는데, 영국 해군의 조종사들은 착륙시 갑판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현 방향으로 돌아서 접근하면서 하반각을 이루는 날개뿌리 너머로 활주로를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은 미국 해군의 함상 커세어 운용에도 전파되었다.[64] 영국 해군은 F4U-1A 커세어를 차례로 도입하여 510 기를 추가로 배치하고 커세어 MK II로 호칭하였다. 커세어 MK II중 마지막 150기는 F4U-1D였으나 별도의 구분 없이 모두 MK II로 분류되었다.[65] 이후 도입된 F3A-1 커세어 334 기와 F3A-1D 96기는 커세어 MK III[66] 400 기의 FG-1/1A와 457 기의 FG-1D는 커세어 MK IV로 호칭되었다.[67] 실제 전투에 투입된 기종은 MK II와 MK IV 뿐이었다.[68] 몇 가지 개량을 거친 뒤 영국 해군은 아무런 문제 없이 커세어를 함상 전투기로 운용하였다. 심지어는 갑판이 작은 호위 항공모함에서도 이착륙에 문제가 없었다. 영국은 총 2,012 기의 커세어를 공급받았다.[46] 영국의 첫 함대 항공단은 미국 퀀셋 포인트 항공 기지에서 결성된 1830 비행 중대로 HMA 일러스리어스에 배속되었다.[69] 1945년 7월에서 8월사이 영국의 함대 항공단 소속 1834, 1836, 1841, 1842 비행 중대는 일본 본토 공격에 참가하였다.[70] ) 유투브 게시물 댓글 인용 (Altered Beast 2년 전 The F4U was notoriously difficult to land on a carrier because of the huge elongated nose and massive Pratt & Whitney R2800 engine. Being a tail dragger the attitude of the aircraft on the ground was almost impossible to achieve accurate forward visibility. As with many big radial engine fighters of the period such deck take offs and landings were very risky and resulted in considerable losses. So much so that the US marines who flew Corsairs operated them from ground based airstrips. It wasnt until the British who effectively solved this problem but implementing the curved approach for deck landings that led to US navy pilots adopting the same method. Like many other examples of great ingenuity the British learned to adapt and overcome.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British aircraft test pilot Eric "winkleman" Brown was responsible for many feats of aerial genius. Even making several successful carrier landings in the TR-33 Sea Mosquito. As well as later going on to become the first pilot to successfully land a jet aircraft on the deck of a carrier. He was a true aviation legend, sadly missed..... )
1945년 종전 무렵 영국 태평양 함대, task force 57 함대항모 4(모두 장갑항모), 호위항모 15, 전함 4, 순양함 11, 구축함 약 40, 잠수함 약 30. 기타 수 많은 보급함. 탑재 함재기 약 750기 탑재된 함대방공전투기의 과반 이상은 콜세어. 방공 전투기로는 콜세어, 핼켓, 씨파이어.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도 미제 영국제 기체 섞인.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 및 43년 하반기 대서양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 후 독일 유보트 함대 철수로 영국 해군에 대한 독일의 압력이 많이 약화되어 인도양과 태평양으로의 전개 여력이 매우 커짐. 하지만 미 해군 총사령관인 킹 제독과 태평양의 미 함대 최고 지휘부 내 할시 제독 등은 영국해군의 태평양 진입 반대. 처칠과 루즈벨트의 담판에 의해 영국해군이 태평양 해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급 문제 때문에 준비가 필요. 44년 2월 영해군성은 각종 보급선 약 130척, 톤수로 약 150만톤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추산. 태평양의 영함대 보급 거점으로 필리핀을 제안했지만 미국측 거부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와 인도 등 기존 영국령 사용. 일본군과 실제 교전했던 대다수 미 해군 장병들은 영국해군의 참전을 반겼지만, 미 해군 최상부의 입장은 전혀 달랐던 것. 전쟁 때 마다 흔히 일어나는 정치적 목적, 즉 미 해군 단독의 승리를 더 원했던 것. 1.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ndefatigable 45년 4월1일 ruclips.net/video/5p6Ll7PKepA/видео.html 2.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llustrious 45년 4월6일 ruclips.net/video/y_sqoDQTgqM/видео.html 3.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Formidable 45년 5월4일 ruclips.net/video/u57eMtz-PAE/видео.html 카미카제에 직격당하는 영 장갑항모들. 나무갑판이었던 미 항모와 달리 직격당한 후에도 잔해 치우고 바로 작전 가능했습니다. 카미카제에 손상당한 함교 부분과 화재 진압 및 직격당한 장갑갑판 일부가 조금 패인 모습 등도 나옵니다. (장갑갑판 패인 부분 시멘트로 체워 응급 복구 후 작전 재개) 1번 영상 초반부에 항모 내 레이더 관제실 모습이 나옵니다. 2차대전 후반기면 영국과 미국은 거의 동일한 레이더와 관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저 무렵이면 이미 함대 대공포의 포탄도 근접신관이 장착된 최신형 포탄 사용. 지상 방공포의 경우 최전선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해군의 함대 방공포탄은 적군에 노획될 위험이 없었기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지상 방공포대엔 영국 본토의 v-1 요격용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마그네트론과 근접신관 기술로 미국이 대량 생산 공급한 레이더와 근접신관. 씨파이어는 육상기를 급하게 개조했기에 약한 착륙기어와 착륙기어간 좁은 간격으로 착륙 때의 비전투 손실율이 매우 컸습니다. 지중해, 북해 전장 특성상 독일 공군 상대는 영국 해군 아닌 영국공군이 주역이였기에 함재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미제 함재기 의존율이 높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전 말 영해군의 주력 방공전투기는 미제 콜세어였고, 종전 직후에야 영국제 고성능 씨퓨리가 배치됩니다. 하지만 이미 45년 12월에 영국은 제트 함재기의 항모 이착륙 실험에 성공했기에 고성능 프로렐러 함재기는 수명이 매우 짧았고. 콜세어와 씨퓨리 모두 한국전쟁에서 미그15기 격추 전과를 세웠죠. 미그기 격추한 씨퓨리는 현재 호주 비행 동호인 소유라고 합니다. 4. 씨퓨리 Hawker Sea Fury - Awesome Footage of the fastest piston fighter ever ruclips.net/video/K11NTbaxzvs/видео.html
2차대전 독일, 과학기술 압도했는가? Never! 1. 1940년 티저드 미션,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21개 기술 : 핵 임계질량, 마그네트론, 제트엔진, 근접신관, 소나... airandspace.si.edu/stories/editorial/tizard-mission-%E2%80%93-75-years-anglo-american-technical-alliance 2. 근접신관 장착 대공포탄으로 V-1 요격 장면 : 10초~23초 ruclips.net/video/mIzCBY8xeyI/видео.html : 포탄 사용량 1/20 이하로 줄이는. 독일 일본 추축국은 2차대전에서 근접신관을 사용하지 못했음. 태평양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의 수 많은 함재기들이 마리아나 칠면조 사냥당한 원인중 하나가 미 함대의 대공포탄이 근접신관 사용. 영국이 최초 설계했지만, 대량생산할 여력이 없어 미국에 기술 이전. 초기 1발 생산 비용은 승용차 1대 가격. 대량 생산 성공 후 가격은 1발당 약 20달러로 가격 급락. 당시 자원 비용 투입상 영국으로선 불가능해 미국 제공. 핵 임계질량 계산을 통해 현실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곳은 영국. 미국과 독일은 멍 때렸고. 1940년 본토가 극심한 공습에 시달려, 핵개발 시설을 캐나다로 옮기고, 이후에도 전황이 불리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이 드는 핵개발을 단독으로 할 수 없어 모든 데이터 미국에 넘기고 맨허턴 계획에 미국 영국 캐나다 3국 공동 실시. 물론 물주는 미국이고. 미국, 아인쉬타인 편지로 핵개발 시작한 것 아님. 마그네트론의 경우, 기존 미국제 보다 출력이 무려 1,000배가 높아 10CM 단파장 레이더가 가능. 충격받은 미국 고위 인사가 미국 건국 후 미국에 들어온 가장 가치 있는 화물이라고 함. 티저드 계획에 참여했던 영국측이 미국측과 함께 MIT를 선정해서 당시 4000명 인원의 레이더 연구소 설립. 2차대전 당시 사용된 모든 영국과 미국의 고성능 레이더는 영국 기술로, 물주 미국이 대량 생산해 공급. 독일의 경우 추락한 영국 항공기에 장착된 마그네트론을 입수하고도, 기술적으로 불가능 판단 무시 알아채지 못함. 제트엔진. 전후 최초의 음속 돌파 역시 음속 돌파 전후 항공기 분해 파괴 실패 반복되자, 전후 입수한 독일측 설계에서 힌트를 얻은 영국 개발진이 꼬리 날개 설계를 전면 수정 최종 테스트 직전, 프로젝트 취소. 모든 관련 데이터 미국에 넘겨, 미국에서 새로 시험해서 바로 성공함. 미국은 제트기가 아닌 로켓기로 척예거가 첫 초음속. 영국이 초음속 비행에 여러번 실패한 이유는 손쉬운 로켓이 아닌 제트기로 시도했고, 설계상 취약점은 독일 설계로 극복했 지만 결국 미국에 데이터 넘겨 미국이 최초 초음속 돌파하게 된 것. 제트엔진 수명 영국제가 압도적으로 김, 독일제 제트엔진은 당시 수십 시간. 영국은 원시적 원심식? 독일은 오늘날과 같은 압축식? 프랭크 휘틀의 제트엔진 특허가 압축식임. 당시 재료공학 기술로 고온고압을 버틸 금속재료가 없어 우회수단으로 원심식 채택한 것임. 페니실린, 전후 당시 대량생산에 공을 세운 관련 과학자들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페니실린의 경우 최초 연구자 외에 생산 공정 개발로서 이례적 수상. 2차대전 전시 수 많은 인명을 구했기 때문. 암호해독 분야에선 독일의 압도적 열세. 종전 무렵 영국은 오늘날의 프로그래밍 컴퓨터 기기로 거의 실시간 암호해독 성공. 1970년대 기밀 해제된 이후에야 독일 암호가 뚫렸다는 것 세상에 알려짐. 피탄 시 항공기의 연료탱크 자동 봉입 기술과 전투기 목표추적 사이트 등도 21가지 미국 제공 기술에 포함됨. 미국 자체 개발한 기술로 내세울만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일 정도.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분명 기술적으로는 영국, 독일에 뒤진 상태였음. 영국과 독일은 분야 별로 서로 우세와 열세인 기술이 섞인 상태였고. 독일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이는 V-1, V-2 로켓 분야에서의 기술 격차도 의외로 미영과 6개월 정도. 즉 구태여 그런 무기 개발할 필요를 못 느껴 시도를 안했다는 거지, 깡통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날 마다 4발 중폭격기로 폭격하는 마당에 그런 로켓 개발할 필요도 없음. 독일 전차의 품질 높은 철강재료 기술, 관통력 방어 능력에서 미영 측 보다 대략 5% 정도 우세한 기술. 소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수준. 전차의 조준경 정확도에선 독일이 압도적 우세, 하지만 전차 장갑을 뚫는 대전차탄의 관통력에선 영국이 훨씬 우세. 전차전에서의 초탄 명중률 차이는 독일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우세해서 영국측 관통력 우세가 별 의미가 없을 정도. 정리하면 2차대전, 독일의 압도적 과학기술 우세는 근거 없는 환상.
일본만화 [지팡구]에서도 이 항모 그라프체펠린이 나옵니다. 일본에서 독일까지 장거리 항공기를 타고 온 일본 방문단을 환영하기 위한 환영식이 열리는 장소로 쓰이는데 일본 방문단중 한명인 젊은 일본군 장교와 독일군 장교 한명이 둘이서만 은밀히 만납니다. 근데 그 독일군 장교는 반나치파 였습니다. 그는 만난 일본군 장교에게 독일의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신뢰를 쌓기 위해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결국 일본군 장교는 독일군 장교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독일군 장교는 물에 빠져 죽습니다. 죽은 독일군 장교의 계획이 성공 했는지 독일은 그를 죽인 일본군 장교에게 감사하며 감사의 뜻으로 그가 독일군 장교를 쏴 죽인 권총을 선물로 건넸고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도 히틀러 총통을 암살 하려는 장소로 나온 늑대소굴에 가서 히틀러 총통을 독대하게 됩니다. 2차대전 추축국에서 독일은 육군에서도 기갑부대가 특히 강세를 보였고 일본은 해군에서도 항모를 중심으로 한 항모함대 전력이 강세를 보였죠. 아마 두나라가 처한 환경조건에 따른 발전 이었겠죠? 2차대전중 일본이 연합군에 비해 열세인 전차전력 강화를 위해 그들이 보유한 최대 크기의 잠수함을 독일로 보내 독일의 티거전차를 일본으로 운반해 오려 했던 일은 두나라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라프체펠린이 정말 실전에 투입 되었다면 어떤 전투기가 함재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새로 채널 인수하신 조종 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좋은정보 잘부탁 드립니다 ^^
ㅋㅋㅋㅋㅋㅋㅋ
소련이 그라프 체펠린을 가져간 후 항모 기술을 알아내었는데, 당시 해군 엔지니어인 코스트미치노프는 그라프 체펠린을 확장개량한 대형항모 프로젝트 코스트미치노바를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8:14 CV-6군요...요크타운 급의 행운아...회색 유령...
독일에 항모가 있었다는걸 이걸보고 알았슴
1:12 왠지 워쉽 암시아섭에서 팀원에 대해 분개하는 나 자신을 보는거 같다
ㅈ격
그라프 체펠린 불발의 계기가 된 독일 해군 최악의 추태이자 졸전인 바렌츠 해 해전도 다뤄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날개 달린 것은 무엇이는 다 내 꺼 - 괴링.
새도 괴링 허락 못 맡으면 함부로 못 잡았다고...
미국 항모+영국 항모 =그라프체펠린
÷3 빼먹으셨네
@@Akimond033 사칙연산:???
@@딸기찹쌀떡-m3q ÷2 하려다 덩치가 넘 작아서
3:15
이게 항공모함이야 항공 순양함이야.....
아뇨 그냥 창고입니다 - 크릭스마리네
@Unknown_Account 세계 최대의 항구 호텔
이번 에피소드는 독일의 미완의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이로군요.
그라프 체펠린은 월드 오브 워쉽에서 독일의 8티어 프리미엄 항공모함으로써 만나볼 수 있는데요.
건조와 중단을 반복했던 탓에, 군함으로서의 함생은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후세 사가들에게 있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끔 하는거 같네요.
대전기 수많은 군함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져 있지만, 그라프 체펠린만큼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군함들은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차기 에피소드는 미국의 무훈함 중 원탑으로 꼽을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로군요.
차기 회차가 기대됩니다!
월오쉽에서 최애 항모인 그라프체펠린 네이비썰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종님
사실 미드웨이 해전이후 일본군은 항공전력을
매우기 위해 어느 정도 건조된 그라프를
구매할까 고민했으나 결국 거래가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사실 이 거래에 가장 긍정적인
국가는 특이하게도 미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일본으로 운송해올 그라프를 근처
항공기군이 조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래가
불발 되면서 미국의 꿈은 결국...)
미국:아ㅋㅋ 항모를 구매한다고? 그럼 운송중에 조지면 개뀰잼이겠지?
@@o7o7o-k4m 언박싱 가로체기
그라프체펠린을 만든 엔지니어들 겁나 현타왔겠다...ㅋㅋㅋ
내가 이럴려고 항모 만들었나 자괴감들고 괴로워
???:독일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
ㅇㅈ
14:45 점점 갈수록 영상미가 발전을...
티르피츠 광고영상 입니다.
에구......결국 활약도못허고....
독일의 기술력은 세계제일!!!
와 다음은 엔터프라이즈인가
이거 리워크전 옛날에 처음 나왔을때 개사기 였음. 폭격기 편대로 와서 전함 한큐에 대기실 보냈던거 한두번 본게 아님. 나오고 얼마 안되서 바로 없어졌음
댓글에 그라프체펠린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하나 짚어드립니다.
-그라프체펠린은 괴링 때문에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닙니다. 42년 뒤에 괴링의 견제로 그라프체펠린이 제때 태어나지 못한건 사실이긴 하고, 괴링이 말도 안되는 쌉소리를 해대면서 방해한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 이유는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영상에서도 말했듯 독일은 42년 이후, 자원난에 허덕이기 시작헀고, 당장 독소전에서 소련군을 막기 바빴습니다. 거기에 대서양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로열네이비와 미 해군이 제해권을 놓친적이 없었고요. 크릭스마리네의 역할은 대서양에서 통상파괴로 영국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주는것이며, 제대로 된 해군 전력으로는 영국해군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라프체펠린을 건조하는건 운용효율이 떨어지는 방침입니다. 스타로 비유하자면 상대는 멀티 먹었는데, 견제를 하는게 아니라 배틀쿠르저 뽑으려고 테크올리는거랑 비슷한 상황이죠(수지타산에 안 맞는 행동을 의미하는겁니다)
결국 그라프체펠린이 건조되지 못한 이유를 짚자면 괴링보다는 크릭스마리네가 건조하지 않았다가 더 크고, 전황이 급박해진 탓입니다.
카를되니츠가 수상함 보다는 잠수함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춘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죠.
NAVY Crew(도와주신분들)
-iafpjh2003(썸네일)
-래리(촬영)
조종님 영상이 니무 좋아오요
독소전만 안했어도...
덕후게임중에 지금 네이비필드라는 게임이 있어요~2차세계대전 배경으로 독 프 영 미 일 이 소 이렇게 국가 선택하고 수병육성해서 전함트리 타거나 항모트리 잠수함트리 타는데
독일 항모트리중에 저 그라프체펠린이라는 항모가 있습니다...함재기는 3종류로 나눠지는데 급강하폭격기/뇌격기/정찰 날려서 적함을 격침 시키는 게임입니다...고인물게임이긴해도 직접 항모를 몰수있고 함재기를 조종해야되서 어느정도 손피지컬이 요구되는 게임인데 밀덕들이 좋아할만할꺼에요....무료게임입니다....
기술자의노력no 갈려나가는 기술자o
괴링은 개짓거리를 많이 했지만 항모를 방해한건 덩캐르트 이후로 내가 제일 괴링을 싫어하는 이유...
드디어 다음은 엔터프라이즈인가요
예전보다 더 퀄이 좋아진것 같아
다음은 엔터프라이즈의 함생도 한번쯤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생방에서 물어봤는데 최후의 컨탠츠
라고 하십니다
@@헨더슨-j5e 아...앗
3:59 옆으로 넘어뜨리는걸 많이 봤는데 얘는 뒤로 스르르 하네
2:42 왼쪽 구축함 측면에 붙어있는거 뭔지 아시는분 그물같이 생긴거
피격 당한 구축함 승무원 또는 바다에 빠진 인명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물입니다. 구축함이라지만 전고가 높기 때문에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력으로 올라오는 불가능 하고 사라디의 무게, 부피가 무겁기 때문에 그물을 사다리 대신 사용합니다. (요약:사다리 같은 역할)
@@사상사부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대륙 점령 하는데 몰두 하는중이라서 항공모함 운영이 필요 했나?
생각보다 설계도가 많이 들어갔네...
ps.혹시 그첼 선저에있는 동그란거 뭔지 아시는분?
아마 전함에도 있는걸로 봐서는 사통장치의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봅니다
선수 추진기입니다
좁은항구를 돌아다니기위해 부착이되어있죠
항모가나와도 미-영-프함대한테 털렸겠지만...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아작이 난 이후로 대륙은 바다에선 도망다니기 급급 혹은 붙었다간 개박살을 면치 못하고 맥을 못추는듯 영국 이후 본격적으로 해양세력의 시대가 열린듯 ㅎㅎ
주인이 독일이라 쓸줄도 모르고 성능은 좋은 무기 였으나 주인 잘못 만나서 무기 실험함으로 쓰다가 버려진.. 안타깝다
소련을견제 할수 있을꺼 같은대..
옆동네에서는 증오눈나 (읍읍)
B가 페터 슈트라서인가?
미국 영국 소련이 군사강대국? 그시초가 2차대전때 독일과학자들 납치?해가지고, 기술이 발전됐다. 독일은 진짜 대단하다.
독재 국가의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
성급한 독재자의 전쟁 촉발과 쓸데 없는 간섭.. 괴링의 용렬한 행동 등등. 항모가 불쌍.
연돌이 뭐예요
굴뚝이요
그라프 체펠린? 알죠. 만트레드한테 항모지분 다 뺏기고 남은 골쉽항모 자리도 물수제비로 옆구리를 후려치는 막스에게 뺏긴 비운의 항모 아닌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크로열은 장갑갑판 아니지않나
미국-영국-나치-항공모함 =그라프체펠린-비스마르크
그놈의 괴링의 꼰머짓만 없었어도...
새부터 비행기 까지 내꺼라능 모르핀돼지와 콧수염 뜰딱아저씨의 삽질로 완성되지못한 비운의 항모
헤르만 -마이어- 괴링 : ㅎㅎ;; ㅈㅅ;; ㅋㅋ;;
나치 항공모함만든어!!
군인 네!
워게이밍의 소뽕의 의해 인게임 그라프 체필린은 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빨리 개발했다면 영국 본토 항공전때 쓰였을 텐데
그때도 크릭스마리네가 상륙함도 없는 호구였음...
혼자 나가면 얻어맞을 게 뻔하니까 아예 안 나갔을 듯...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섬들에서나 필요한게 당시의 항공모함이죠.
육지 기까이 다가가면 육지 공국기지에서 출격하는 수많은 항공기의 공격에 견디지 멋함.
왜국이 과달카날에서 진것도.. 과딜카닐섬에 있는 비행장에서 출격하는 항공긱가 두려워 섬 근처엔 항모 자체가 접근하지 못하고..
그래서 수송도 제대로 못해..결국은 소총만들고 돌격하는 덜떨어진 전술만 반복하다..다 죽은것이죠.
그래서.. 당시 유럽에선 항모라는게 쓸데없는 물건이었죠.
과달카날 전투 중, 동부 솔로몬해전과 산타쿠르즈 해전은 과달카날 섬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미국의 함대항공전입니다. 이때 양측간 큰 피해로 인해, 남게 된건 과달카날 항공기지였고요.
유럽전장에서 항공모함이 쓸모없었다뇨? 나치독일의 무제한 잠수작전을 막아낸건 항공모함의 역할이 가장 컸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은 육상 기지와 달리 이동하며, 바다에 몸을 숨길 수 있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아무리 육상에서 이륙한 항공기가 강력하다고 한들 기습의 효과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퀼라(이탈리아), 그라프 체펠린(독일), 베아른(프랑스), 일러스트리어스(영국)으로 봐도 딱히 쓸모없다기에는....
나치 해군이 아니라 해적아니었나요?
하는 짓이랑 규모가 해적 같은 해군임
근데 영국도 2차대전때 항공모함으로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음
쳐 맞는거요
1942년 8월 operation pedestal 최대 몰타 호송선단 : 상선14, 전함2, 항모5, 순양함7, 구축함32, 잠수함7등
ruclips.net/video/0inR2jRW_P8/видео.html Operation Pedestal: The Convoy That Saved Malta
(2분25초 이후 지중해 진입할 때의 페데스탈 선단 배치 그래픽으로 나옴.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선단 배치 모습.)
ruclips.net/video/11173sD3kgc/видео.html Battle Of The Convoys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Xf3vzsT40aI/видео.html Malta Convoy Battle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qjUmRzKZH-E/видео.html Malta Convoy - Further Pictures (1942) 실제 전투 영상
ruclips.net/video/it3pOYM0JkA/видео.html HMS Nelson Hit in Convoy Attack 실제 전투 영상blog.daum.net/mybrokenwing/387 몰타를 살리기 위한 발악들(5) 국내 블로거 봉달이님 글.
독일 이태리 추축국의 공격을 뚫고 보급을 성공시켰지만,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거의 모든 함정이 손상당했고 격침된 함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선9, 항모1, 순양함2, 구축함1.
격침된 항모는 장갑항모 이전의 함대항모 이글, 독 유보트에게 격침당했습니다. 장갑항모 인도미터블은 대파.
상선은 14척이 출발해서 몰타엔 겨우 5척만 도착했죠.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세계 최대 유조선이었던 오하이오는 겨우 도착.
오하이오는 원래 미국 유조선이었지만 영국해군이 임대해서 승무원은 모두 영국인.
거의 1만톤급 유조선 오하이오 역시 피해가 커 전승무원이 퇴함하기도 했으나 구축함3척이 양 옆과
앞에서 지탱하며 끌고 반쯤 가라앉은 상태로 몰타 입항. 몰타 도착후에 기름 거의 다 퍼낸 상태에서 결국 침몰했습니다.
4척의 일반 상선과 1척의 유조선 도착으로 보급받은 물자는 약 5만5천톤, 그 중 석유는 약 9000톤, 식량과 탄약 4만5천톤.
페데스탈 작전 피해가 너무 커 다시는 이런 작전을 시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5만5천톤의 보급은 몰타를 살려냈고, 역으로 살아난 몰타로 인해 롬멜의 보급이 끊기고 몇 달 후 엘알라메인.
동원된 전함중 1척은 어뢰에 피격되었지만 천운으로 별 타격 입지 않았고,
동원된 항모 5척은 장갑항모2척, 구형의 함대항모였던 이글과 퓨어리어스, 그리고 세계최초의 전갑판 항모 아거스.
아거스는 세계최로로 상부구조물이 제거된 전갑판 항모였지만 함대항모가 아닌 소형 호위항모.
퓨어리어스는 항대방공 임무가 아닌, 몰타에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영공군 스핏파이어를 탑재, 몰타 약 1000km 전방에서
항공기를 몰타로 출격시키고 지브롤터로 바로 귀환했습니다. 즉 장갑항모 2척이 몰타 인근 해상까지 함대방공 임무를 수행
하다, 몰타의 영공군이 엄호하기 시작한 직후 역시 잽싸게 지브롤타로 후퇴. 아거스는 대잠 항공작전 위주.
피데스탈 작전 이외 여러 호송작전에서도 영국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죠.
그러나 영국 장갑항모는 여러번 직격탄에 피격되었어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일러스트리어스 경우 피격된 상태에서 몰타 입항, 항구에서 다시 공습에 노출되자 밤에 탈출해 미국까지 도피, 수리 때문에.
영국 본토도 폭격에서 자유롭지 않아 병신된 몸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가 수리받음. 인도미터블은 슈투카에게 대형 폭탄 2발
직격당하고도 꾸역 꾸역 후퇴했죠. 장갑갑판이 찢어졌지만 갑판 아래 핵심 선체는 손상당하지 않아서 탈출에 성공했죠.
미국과 일본의 나무갑판 항모였다면 지중해 진입하면 다시는 못빠져나갑니다.
타격당하는 순간 끝이나 다름 없습니다. 몰타 가는 중에 피격되면 살려면 지브롤타까지 도망가야 하죠.
문제는 적 공군이 계속 추격할 수 있는 추축국 점령지대가 튀니지 알제리등 지브롤타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호송선단은 대략 3일 정도 항해합니다. 그 3일 밤낮으로 항공기, 잠수함, 수상함의 공격을 당했고, 심할 경우엔 한 번의 공습에
대략 300기 정도의 추축 공군기들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대가 생존한 이유는 하늘엔 몰타의 영국 공군도 출격해서
추축국 공군도 대함공격만 집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죠. 몰타의 영공군 엄호가 없는 구간에서는 항모 함재기와 함대의 대공포
만으로 버텨야 했습니다.
미드웨이나 태평양에서의 항모전투는 몇 시간 이내에 일단 끝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죠.
항모가 격침되거나 대파되면 전장에서 이탈되어서 쉬는 거고, 항모 피해 별로 없더라도 무장 떨어지면 보급 때문에 후퇴.
지중해의 호송선단 전투는 약 3일간 밤낮 없이 지속되고, 적 항공기들은 육상기지에서 재급유 재무장받고 다시 출격.
즉 공격하는 측의 공군기지는 격침될 위험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리하고, 방어하는 함대의 항모는 격침되거나 대파될 위험.
태평양에서 항모 대 항모 전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항모와 공군력의 대결이었습니다.
항모 단독은 아니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타에서 출격한 영국공군의 호위 아래 영국 항모들이 생존했던 것.
미국 일본의 항모전단이 만일 그 당시 지중해에 진입했다면, 항모전단 자체 세력만으로 살아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나무 갑판이라 피격되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적 공군과 잠수함이 끊임없이 추격 반드시 격침시킵니다.
태평양의 항공모함전 때는 잠수함들 활약 어렵죠. 잠수함이 항모 따라다닐 속도가 못되니. 잠수함을 전장에 항상 미리
배치 매복시킬 수도 없고. 하지만 지중해에선 잠수함들은 상시 매복 상태. 강력한 대잠세력을 가지지 못한 항모전단 자체
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태평양과 달리 대서양에선 독일 상대로 항모 대 항모 전투는 불필요,
북해에선 적 공군력 위협이 너무나 커 무르만스크 호송과 같은 임무 이외엔 항모가 진입도 꺼렸고,
지중해에선 몰타 보급 때문에 정말 목숨걸고 들어가 죽다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영국공군 엄호 아래서 겨우 생존했죠.
그러한 지형적 작전 제한 조건 때문에
영국은 장갑갑판을 채택하면서, 함재기 탑재수를 희생했고,
여러 곳에 산재한 영국 공군기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전쟁 전 함재기 개발 필요성 덜 느겼던 것.
전쟁 터진 이후엔 독일 상대하기 바빠 2차대전 중엔 대부분 미 함재기 의존, 45년 종전 후에야 고성능 씨퓨리와 제트기.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 보급 측면에서 살펴보면,
독일 이태리 추축국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수백km 해상교통로,
영국은 최단거리 직항로라고 해도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수천km, 전황이 악화되어
지중해 직항로를 택할 수 없을 경우엔 대서양-희망봉-인도양-홍해-이집트로 아프리카 대륙 우회 수만km.
짧디 짧은 해상교통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보급이 말라버린 것, 그 자체로 추축국은 승리할 기본 자격이 없었던 것.
최초의 제트기 항모 이착륙:1945년 12월3일, 놀라운 2차대전 전시 기술발전 속도
ruclips.net/video/PNoUBil7A3c/видео.html
2차대전 종전된지 불과 몇 개월 후인, 1945년 12월3일 경사장갑갑판의
영항모 오션에서 세계 최초의 제트 함재기 이착륙이 일어났습니다. 착륙 후 이륙 순으로 성공했습니다.
에릭 윙클 브라운 이라는 테스트 파일럿은 487종의 연합국과 추축국 비행기를 시험 비행한 깨지지 않을 세계 최다 기종 테스트 비행사입니다. 영국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 테스트 파일럿으로 전향했습니다. 최다 기종, 최다 항모 이착륙 기록, 기타 수 많은 기록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최다 기종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겁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신기종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또한 에릭은 1944년 영공군의 모스키토 폭격기를 항모에 최초로 착함시켰고, 종전 직후 독일의 제트기와 로켓 항공기등 추축국 항공기들을 시험비행했습니다. 소련의 인류 최초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글라이더, 복엽기, 전투기, 폭격기, 민항기, 헬기, 수직이착륙기 등 거의 모든 기종을 포함한 487종.)
제트기를 항모 갑판 거의 끝에서 착륙시켜 아주 짧은 거리에서 멈춘 놀라운 착함 모습입니다.
전쟁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영국과 미국은 제트 함재기로 태평양 하늘을 휩쓸었을 겁니다.
미국 일본 항모와 달리, 지중해와 북해라는 육지로부터 가까워 적 공군력에 노출되기 쉬운 조건이라 영국 항모는 장갑갑판을 먼저 도입하게 되었고, 지중해에서 여러 직격탄에서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정도엔 벌써 경사갑판으로 개조된 영국 장갑항모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미국도 이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갑갑판, 경사갑판, 광학식 착륙유도장치, 증기 캐터펄터 등 항모에 필수적인 거의 모든 요소들이 영국 해군에서 도입되어 미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미국이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항모의 스키점프대 역시 마찬가지죠.
유명한 고성능 미 함재기 코르세어의 항모 사용도 미해군이 아닌 영해군이 먼저 도입했습니다. 전방동체가 크고 길어서 항모 착함시에 시야를 막아 미 해군은 해병항공대의 육상기지 사용으로 돌리고 항모 도입을 하지 않았지만 영국 해군에서 새로운 착륙방법을 도입해서 최초로 항모에 탑재했고 미항모에 그 착함 방식이 이전되었습니다. 직선 경로로 착함하지 않고, 선회하면서 착함하는 방식으로 시야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curved approch : 영 해군이 개발한 corsair 착륙법, corsair 전방 시야가 좋지 않아 항모 접근시 관측하기 용이하도록
(항모 주변을 곡선을 그리며 선회하면서 접근하며 측면에서 갑판을 보며 고도를 맞추어 착륙) 7분35초 이후 보시길
ruclips.net/video/rNcV13uayxw/видео.html
위키백과 인용
(1943년 11월 영국 해군은 보우트사가 납품한 95 기의 F4U-1 커세어를 커세어 MK I 으로 분류하여 배치하였다.[62] 첫 비행중대는 미국 동부 연안에서 결성되어 훈련을 받은 뒤 대서양을 건넜다. 영국 해군은 커세어를 항공모함에 탑재하고 즉시 작전에 투입하였다. 작전이 실행되자 다수의 커세어의 착륙 특성 문제가 드러났고, 다수의 커세어가 이 과정에서 파손되었지만 영국 해군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영국 해군에 납품되는 커세어는 영국의 항공모함의 격납고 크기에 맞추기 위해 윙팁이 8 인치(200 mm)정도 짧았다.[63] 주익의 폭을 줄인데다 갑판의 활주로도 짧은 영국의 항공모함에서 운용된 커세어는 미국의 경우 보다 오히려 착륙 사고가 적었는데, 영국 해군의 조종사들은 착륙시 갑판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현 방향으로 돌아서 접근하면서 하반각을 이루는 날개뿌리 너머로 활주로를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은 미국 해군의 함상 커세어 운용에도 전파되었다.[64]
영국 해군은 F4U-1A 커세어를 차례로 도입하여 510 기를 추가로 배치하고 커세어 MK II로 호칭하였다. 커세어 MK II중 마지막 150기는 F4U-1D였으나 별도의 구분 없이 모두 MK II로 분류되었다.[65] 이후 도입된 F3A-1 커세어 334 기와 F3A-1D 96기는 커세어 MK III[66] 400 기의 FG-1/1A와 457 기의 FG-1D는 커세어 MK IV로 호칭되었다.[67] 실제 전투에 투입된 기종은 MK II와 MK IV 뿐이었다.[68] 몇 가지 개량을 거친 뒤 영국 해군은 아무런 문제 없이 커세어를 함상 전투기로 운용하였다. 심지어는 갑판이 작은 호위 항공모함에서도 이착륙에 문제가 없었다. 영국은 총 2,012 기의 커세어를 공급받았다.[46]
영국의 첫 함대 항공단은 미국 퀀셋 포인트 항공 기지에서 결성된 1830 비행 중대로 HMA 일러스리어스에 배속되었다.[69] 1945년 7월에서 8월사이 영국의 함대 항공단 소속 1834, 1836, 1841, 1842 비행 중대는 일본 본토 공격에 참가하였다.[70] )
유투브 게시물 댓글 인용
(Altered Beast
2년 전
The F4U was notoriously difficult to land on a carrier because of the huge elongated nose and massive Pratt & Whitney R2800 engine. Being a tail dragger the attitude of the aircraft on the ground was almost impossible to achieve accurate forward visibility. As with many big radial engine fighters of the period such deck take offs and landings were very risky and resulted in considerable losses. So much so that the US marines who flew Corsairs operated them from ground based airstrips. It wasnt until the British who effectively solved this problem but implementing the curved approach for deck landings that led to US navy pilots adopting the same method. Like many other examples of great ingenuity the British learned to adapt and overcome.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British aircraft test pilot Eric "winkleman" Brown was responsible for many feats of aerial genius. Even making several successful carrier landings in the TR-33 Sea Mosquito. As well as later going on to become the first pilot to successfully land a jet aircraft on the deck of a carrier. He was a true aviation legend, sadly missed..... )
1945년 종전 무렵 영국 태평양 함대, task force 57
함대항모 4(모두 장갑항모), 호위항모 15, 전함 4, 순양함 11, 구축함 약 40, 잠수함 약 30. 기타 수 많은 보급함. 탑재 함재기 약 750기
탑재된 함대방공전투기의 과반 이상은 콜세어. 방공 전투기로는 콜세어, 핼켓, 씨파이어. 뇌격기와 급강하폭격기도 미제 영국제 기체 섞인.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 및
43년 하반기 대서양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 후 독일 유보트 함대 철수로
영국 해군에 대한 독일의 압력이 많이 약화되어 인도양과 태평양으로의 전개 여력이 매우 커짐.
하지만 미 해군 총사령관인 킹 제독과
태평양의 미 함대 최고 지휘부 내 할시 제독 등은 영국해군의 태평양 진입 반대.
처칠과 루즈벨트의 담판에 의해 영국해군이 태평양 해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보급 문제 때문에 준비가 필요.
44년 2월 영해군성은 각종 보급선 약 130척, 톤수로 약 150만톤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추산.
태평양의 영함대 보급 거점으로 필리핀을 제안했지만 미국측 거부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호주와 인도 등 기존 영국령 사용.
일본군과 실제 교전했던 대다수 미 해군 장병들은 영국해군의 참전을 반겼지만,
미 해군 최상부의 입장은 전혀 달랐던 것. 전쟁 때 마다 흔히 일어나는 정치적 목적, 즉 미 해군 단독의 승리를 더 원했던 것.
1.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ndefatigable 45년 4월1일
ruclips.net/video/5p6Ll7PKepA/видео.html
2.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Illustrious 45년 4월6일
ruclips.net/video/y_sqoDQTgqM/видео.html
3. 카미카제 공격당하는 HMS Formidable 45년 5월4일
ruclips.net/video/u57eMtz-PAE/видео.html
카미카제에 직격당하는 영 장갑항모들.
나무갑판이었던 미 항모와 달리 직격당한 후에도 잔해 치우고 바로 작전 가능했습니다.
카미카제에 손상당한 함교 부분과 화재 진압 및 직격당한 장갑갑판 일부가 조금 패인 모습 등도 나옵니다.
(장갑갑판 패인 부분 시멘트로 체워 응급 복구 후 작전 재개)
1번 영상 초반부에 항모 내 레이더 관제실 모습이 나옵니다.
2차대전 후반기면 영국과 미국은 거의 동일한 레이더와 관제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저 무렵이면 이미 함대 대공포의 포탄도 근접신관이 장착된 최신형 포탄 사용. 지상 방공포의 경우 최전선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해군의 함대 방공포탄은 적군에 노획될 위험이 없었기에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지상 방공포대엔 영국 본토의
v-1 요격용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마그네트론과 근접신관 기술로 미국이 대량 생산 공급한 레이더와 근접신관.
씨파이어는 육상기를 급하게 개조했기에 약한 착륙기어와 착륙기어간 좁은 간격으로 착륙 때의 비전투 손실율이 매우 컸습니다.
지중해, 북해 전장 특성상 독일 공군 상대는 영국 해군 아닌
영국공군이 주역이였기에 함재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 미제 함재기 의존율이 높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전 말 영해군의 주력 방공전투기는 미제 콜세어였고, 종전 직후에야 영국제 고성능 씨퓨리가 배치됩니다.
하지만 이미 45년 12월에 영국은 제트 함재기의 항모 이착륙 실험에 성공했기에 고성능 프로렐러 함재기는 수명이 매우 짧았고.
콜세어와 씨퓨리 모두 한국전쟁에서 미그15기 격추 전과를 세웠죠. 미그기 격추한 씨퓨리는 현재 호주 비행 동호인 소유라고 합니다.
4. 씨퓨리 Hawker Sea Fury - Awesome Footage of the fastest piston fighter ever
ruclips.net/video/K11NTbaxzvs/видео.html
2차대전 독일, 과학기술 압도했는가? Never!
1. 1940년 티저드 미션,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21개 기술 : 핵 임계질량, 마그네트론, 제트엔진, 근접신관, 소나...
airandspace.si.edu/stories/editorial/tizard-mission-%E2%80%93-75-years-anglo-american-technical-alliance
2. 근접신관 장착 대공포탄으로 V-1 요격 장면 : 10초~23초
ruclips.net/video/mIzCBY8xeyI/видео.html : 포탄 사용량 1/20 이하로 줄이는.
독일 일본 추축국은 2차대전에서 근접신관을 사용하지 못했음. 태평양 마리아나 해전에서
일본의 수 많은 함재기들이 마리아나 칠면조 사냥당한 원인중 하나가 미 함대의 대공포탄이 근접신관 사용.
영국이 최초 설계했지만, 대량생산할 여력이 없어 미국에 기술 이전. 초기 1발 생산 비용은 승용차 1대 가격.
대량 생산 성공 후 가격은 1발당 약 20달러로 가격 급락. 당시 자원 비용 투입상 영국으로선 불가능해 미국 제공.
핵 임계질량 계산을 통해 현실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곳은 영국. 미국과 독일은 멍 때렸고.
1940년 본토가 극심한 공습에 시달려, 핵개발 시설을 캐나다로 옮기고, 이후에도 전황이 불리해
막대한 자원과 비용이 드는 핵개발을 단독으로 할 수 없어 모든 데이터 미국에 넘기고
맨허턴 계획에 미국 영국 캐나다 3국 공동 실시. 물론 물주는 미국이고.
미국, 아인쉬타인 편지로 핵개발 시작한 것 아님.
마그네트론의 경우, 기존 미국제 보다 출력이 무려 1,000배가 높아 10CM 단파장 레이더가 가능.
충격받은 미국 고위 인사가 미국 건국 후 미국에 들어온 가장 가치 있는 화물이라고 함.
티저드 계획에 참여했던 영국측이 미국측과 함께 MIT를 선정해서 당시 4000명 인원의 레이더 연구소 설립.
2차대전 당시 사용된 모든 영국과 미국의 고성능 레이더는 영국 기술로, 물주 미국이 대량 생산해 공급.
독일의 경우 추락한 영국 항공기에 장착된 마그네트론을 입수하고도, 기술적으로 불가능 판단 무시 알아채지 못함.
제트엔진.
전후 최초의 음속 돌파 역시
음속 돌파 전후 항공기 분해 파괴 실패 반복되자, 전후 입수한
독일측 설계에서 힌트를 얻은 영국 개발진이 꼬리 날개 설계를 전면 수정 최종 테스트 직전, 프로젝트 취소.
모든 관련 데이터 미국에 넘겨, 미국에서 새로 시험해서 바로 성공함. 미국은 제트기가 아닌 로켓기로 척예거가 첫 초음속.
영국이 초음속 비행에 여러번 실패한 이유는 손쉬운 로켓이 아닌 제트기로 시도했고, 설계상 취약점은 독일 설계로 극복했
지만 결국 미국에 데이터 넘겨 미국이 최초 초음속 돌파하게 된 것.
제트엔진 수명 영국제가 압도적으로 김, 독일제 제트엔진은 당시 수십 시간.
영국은 원시적 원심식? 독일은 오늘날과 같은 압축식? 프랭크 휘틀의 제트엔진 특허가 압축식임.
당시 재료공학 기술로 고온고압을 버틸 금속재료가 없어 우회수단으로 원심식 채택한 것임.
페니실린, 전후 당시 대량생산에 공을 세운 관련 과학자들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페니실린의 경우 최초 연구자 외에 생산 공정 개발로서 이례적 수상. 2차대전 전시 수 많은 인명을 구했기 때문.
암호해독 분야에선 독일의 압도적 열세.
종전 무렵 영국은 오늘날의 프로그래밍 컴퓨터 기기로 거의 실시간 암호해독 성공.
1970년대 기밀 해제된 이후에야 독일 암호가 뚫렸다는 것 세상에 알려짐.
피탄 시 항공기의 연료탱크 자동 봉입 기술과 전투기 목표추적 사이트 등도 21가지 미국 제공 기술에 포함됨.
미국 자체 개발한 기술로 내세울만한 것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일 정도.
2차대전 당시,
미국은 분명 기술적으로는 영국, 독일에 뒤진 상태였음.
영국과 독일은 분야 별로 서로 우세와 열세인 기술이 섞인 상태였고.
독일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이는 V-1, V-2 로켓 분야에서의 기술 격차도 의외로 미영과 6개월 정도.
즉 구태여 그런 무기 개발할 필요를 못 느껴 시도를 안했다는 거지, 깡통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
날 마다 4발 중폭격기로 폭격하는 마당에 그런 로켓 개발할 필요도 없음.
독일 전차의 품질 높은 철강재료 기술,
관통력 방어 능력에서 미영 측 보다 대략 5% 정도 우세한 기술. 소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수준.
전차의 조준경 정확도에선 독일이 압도적 우세, 하지만 전차 장갑을 뚫는 대전차탄의 관통력에선 영국이 훨씬 우세.
전차전에서의 초탄 명중률 차이는 독일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우세해서 영국측 관통력 우세가 별 의미가 없을 정도.
정리하면 2차대전, 독일의 압도적 과학기술 우세는 근거 없는 환상.
이당시 헬조선은 소달구지밖에 못만들었는데;;
일본만화 [지팡구]에서도 이 항모 그라프체펠린이 나옵니다.
일본에서 독일까지 장거리 항공기를 타고 온 일본 방문단을 환영하기 위한 환영식이 열리는 장소로 쓰이는데
일본 방문단중 한명인 젊은 일본군 장교와 독일군 장교 한명이 둘이서만 은밀히 만납니다.
근데 그 독일군 장교는 반나치파 였습니다.
그는 만난 일본군 장교에게 독일의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신뢰를 쌓기 위해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결국 일본군 장교는 독일군 장교를 권총으로 쏴 죽이고 독일군 장교는 물에 빠져 죽습니다.
죽은 독일군 장교의 계획이 성공 했는지 독일은 그를 죽인 일본군 장교에게 감사하며
감사의 뜻으로 그가 독일군 장교를 쏴 죽인 권총을 선물로 건넸고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도
히틀러 총통을 암살 하려는 장소로 나온 늑대소굴에 가서 히틀러 총통을 독대하게 됩니다.
2차대전 추축국에서 독일은 육군에서도 기갑부대가 특히 강세를 보였고
일본은 해군에서도 항모를 중심으로 한 항모함대 전력이 강세를 보였죠.
아마 두나라가 처한 환경조건에 따른 발전 이었겠죠?
2차대전중 일본이 연합군에 비해 열세인 전차전력 강화를 위해 그들이 보유한 최대 크기의 잠수함을
독일로 보내 독일의 티거전차를 일본으로 운반해 오려 했던 일은 두나라가 가지고 있는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라프체펠린이 정말 실전에 투입 되었다면 어떤 전투기가 함재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긴 합니다.
한국도 독일 항모 기술 받아서 항공모함 만들면 되겠네요. 독일식이 더 한국에 잘 맞네요. 수투카와 메샤슈미츠가 함재기면 적에겐 악몽이였을텐데 러시아 해군이랑 비빌만 했고.
그라프 체펠린은 2차 대전기 항모라서 저 개념을 지금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고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으니 아마 지금 독일도 자기네가 만들었던 항모 기술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항모를 만들어본적 없는 국가에게서 항모 기술을 배운다라... 이게 시벌 말이여 방귀여 차라리 아프리카에 사시는 김상덕씨한테 핵미사일 기술을 배워오지 그래?
결론 : 크릭스마리네는 전함이나 항모 따위가 아닌 유보트에 올인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