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통탄"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100년간 식민사관에 부역했던 매국노들이 누렸던 명예 와 부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작금의 현실 입니다.'역사바로세우기'는 범국민적운동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꿈은 이루어 집니다. 꿈을 주신 이덕일선생님과 여러 광복사학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정한론은 1400 년대 이전부터 정립된 이론이라고 봅니다..일본내에서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내부의 힘을 외부로 돌리기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 사할린, 인도, 중국, 만주, 조선을 병합해서 대제국을 만든다는 이론을 펴기시작...이게 1600년대 후반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에게 전해져 1800년대 더욱 확립된 이론..
이런 주장할 때, 참실한 역사학자들은 뭐 했나요? 정치가 썪어도 바른 역사관을 위해 평생을 받치셨는데, 목숨 걸어야지요. 千言은 一行之無라! 행동하지 않음은 헛 말이다. 지역적 감정이란^^ 교수님, 저 너무 열받아서 한 잔 합니다. 핑게인가요^^ 저는 몸으로 겪은 바다 남자 입니다. 지금은, 제가 배울땐 북한은 도깨비고, 고조선은 한마디, 교과서에 그것도 중등 국사에~^^ 고등도, 우리나라 역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공부 해야한다는 걸 얘기하면 왜? 하고, 그냥^^ 그랬는데 지금은 조카들이 가르치고 있어요^^ 이건 가짜다 하고, 강토원 선생께서도 72년 초등3년 때인가? 이건 시험에 관계 없으니 외우지 않아도 된다 하셨는데,
▶▶▶ ▶ 1. 열도에 파견된 백제의 관료인 을 "열도 전역을 지배하는 "으로 조작 ▶ 2. 광개토태왕 때 신라에 대거 항복한 을 403년에 열도 나라 지역에 집단 이주시킨 사건을 "가공의 이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인 집단을 이끌고 온 것"으로 조작 ※ 이 2가지 외에는 의 모든 기사를 열도 내 한반도 열국(백제/신라/가라/고구리/진한/모한)들의 분국인 마을국가로 보고 해석하면 됩니다. ※ 를 만들 당시에는 백제가 열도를 지배한 흔적을 지우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즉, 열도는 천황이 죽 지배한 고대국가라는 것을 천명!
이를 위하여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역사 조작을 시작하여, 을 위해서는 , 을, 에 관해서는 , 을 제작합니다. 물론 을 위하여 광개토태왕비문을 깨부수어 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부분에서 와 등만 남겨놓았습니다. 지워진 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부분은 로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들은 중 1.과 2.는 백퍼센트 추종하고 있으며, 은 가 아닌 이다 하며, 을 자신들이 극복했다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 ▶ 실제로는 열도가 670년에 비로소 중앙집권 고대국가를 세웠는데, ▶ 그 이전인 3세기 중반에 중앙집권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워서 부족연맹상태인 한반도 남부(남삼한)를 간접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단식민주의소설학자들은 ,의 초기 기록을 부인하여 3세기 중반까지 부족연맹상태인 한반도 남부(마한 54국, 진한 24국, 변한 24국이 우글우글한 상태인 남삼한)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로 ▶ 야마토왜가 상륙하던 => 즉, 직접 지배 ▶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 즉, 간접 지배 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죠. 그리고, 가야의 멸망 연도 562년 만 ,를 따르고 나머지 가야의 기사는 를 모두 따르고 있습니다. → 즉, ,의 가야 기사는 무시함.
그래서, 가야사 복원 사업에서 시민단체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부르고 있습니다. 즉, 남원과 합천을 일본서기의 기문과 다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시도하려다 제지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남원 전시관 학예연구가가 담당임이 분명한 전시관 해설 석비에 아직도 기문과 다라로 표시하고 항의하려 방문하자 기문에만 청테이프를 붙여놓고 다라는 왜 안 붙이냐고 하자 자신은 남원 담당자이니 다라는 책임 아니라는 어이없는 모습도 있었고 보나마나 항의 방문자들이 돌아간 뒤에 청테이프를 떼고 그대로 전시하고 있을 것입니다(관련 영상 검색어 : [남원, 왜? 왜왕의 땅 기문국을 포기하지 않는가?]"기물(奇物)의 실체강론).
역사를 왜곡 기술한 일본이 원초적인 문제였지만 해방 이후에 그것을 띁어고치지않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총구를 일본이 아니라 우리로 돌려야하고 작금의 역사조작은 중국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닌지요? 일본만 비난하는 여론만 외울것이 아니라 중국을 향한 비난으로 정책전환은 어떨런지요.
[서기 395년 백잔신라 구시속민(百殘新羅 舊是屬民), 서기 400년 석 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서기 395년 이전의 오랜 과거에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과거부터 서기 395년까지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395년. 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 ( 영락5년 세재 을미. 永樂五年歲在乙未.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 서기 400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조공하지 않았었습니다. 서기 400년 이후에 신라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과거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와서 여쭈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 영락 십년 경자, 교견 보기오만 왕구신라. ... 석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 □국[]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복 구□□□□조공. [永樂]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 따라서, 서기 400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조공하고 있는 신라가 있고, 서기 400년 이후부터 고구려에 조공하고 있는 신라매금이 있습니다. 신라와 매금신라가 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 400년에 고구려가 구원한 것은 매금신라입니다. 이때, 매금신라는 지리적으로 임나가라 및 왜와 가깝게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 신라성에 이르렀다. 왜가 있었다.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 군대가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임나가라의 성을 복속하였다. ... 과거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와서 여쭈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조공하였다 ( 영락 십년 경자, 교견 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0, 0배급추 지임나가라 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 수 병. 0신라성0성 왜구대궤 성000진000, 안라인 수 병. 신0000기0000000언0…0사0…0궤, 안라인 수 병. 석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 □국[]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복 구□□□□조공. [永樂]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 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 서기 400년에 매금신라와 가깝게 있는 임나와 가깝게 있는 왜국이 있습니다. 서기 400년에 고구려 군대가 왜국에 가서 왜국을 공격했습니다.
[서기 395년 이전에 신라의 조공을 받은 나라] 매금신라의 문제 이전에, 우선 신라가 있습니다. 광개토왕의 나라는 서기 395년 이전에 신라의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때, 무엇을 읽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백제본기 [서문]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기세계, 여고구려 동출 부여, 고 이부여 위 씨. 其世系,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BC 6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그들이 강역을 침략하므로, 편안하지 않다. 도읍을 옮겨야겠다. [낙랑 남쪽에 있는] 한수(漢水)의 남쪽에 좋은 땅이 있다. 그 곳으로 옮기는 것이 구안지계(久安之計)이다.” ( 하5월, 왕위신하왈, 국가 동유낙랑 북유말갈, 침질강경 소유녕일. 황금 요상루현 국모기양, 세부자안 필장천국. 여작출순 관 한수지남, 토양고유 의도어피, 이도 구안지계.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况今妖祥屢見, 國母弃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BC 6년. 8월에,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백제본기의 영역은] 북쪽으로 패하(浿河)에 이른다. ( 8월, 견사 마한, 고 천도. 수획정 강장, 북지 패하, 남한 웅천, 서궁 대해, 동극 주양.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두 나라는 한 곳에서 나왔는데, 나뉘었습니다. 이를테면, BC 6년 8월에 강역을 정했고, 패수를 경계로 하였습니다. 다만, 그 왕은 BC 6년 8월 이전에 낙랑 서쪽에 있었다가 한수 남쪽의 마한으로 온 왕입니다. 낙랑 서쪽에는 마자수 서쪽 현도군 졸본부여 혹은 졸본고구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잠정적으로 백제본기에서 기록하고는 있지만, 그 나라는 마한에 있는 졸본고구려왕의 나라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마한은 고구려이다, 라는 것에 해당합니다. @삼국사기. 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문집에 당나라의 태사(太師) 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마한은 고구려이다." ( 동해지외유3국, 기명마한변한진한,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 진한즉신라야. 고려백제전성지시 강병백만, 남침 오월, 북요 유연제로, 위중국거두. 수황실어 유어정료. 복걸, 대사시중 부강태은 특사 수륙권첩. 령소재공급 주강숙식 급 장행려마초료 병 차군장감송지가전.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伏乞, 大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劵牒. 令所在供給舟舡·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并差軍將, 監送至駕前.) @후한서 한국 마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립(共立)하여 자기들 중에서 진왕(辰王)을 세운다. 진왕(辰王)은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의 왕으로서 다스린다. 삼한 여러 나라들의 왕들의 선대는 모두 마한의 사람이다. ( 마한 최대, 공립기종위진왕, 도목지국 진왕삼한지지. 기제국왕 선개시마한종인언.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삼한 파사매금] 야마대왕국은 오사카 지역 주변에 있습니다. 편의상, 오사카 야마대왕국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사카 야마대왕국도 신라왕 파사매금을 만납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신공여왕 즉위전기)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했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파진간기를 질자로 삼아서 금은채색 및 능라겸견을 80척의 배에 실어서 야마대 왕국의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규모로써 일본국에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때, 고려와 백제도, 서번(西蕃)이라 일컬으면서, 왕래하겠다고 하였다.] 이로써 내관가 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대 신공神功이 말하는] 삼한(三韓)이다. 왕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 동10월 기해삭신축, 종화이진 발지. 시 비렴기풍 양후거랑, 해중대어 실부부선, 즉 대풍순취 범박수파, 불로로즙, 편도신라. 冬十月己亥朔辛丑, 從和珥津發之. 時飛廉起風, 陽侯擧浪, 海中大魚, 悉浮扶船. 則大風順吹, 帆舶隨波. 不勞櫨楫, 便到新羅. 즉 이왕후소장모 수어신라왕문 위후엽지인. 고 기모 금유수 우 신라왕지문야. 원 신라왕 파사매금 즉이 미질기지파진간기 위질, 잉재 금은채색급릉라겸견 재우80소선 령종관군. 卽以皇后所杖矛, 樹於新羅王門, 爲後葉之印. 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시이, 신라왕 상 이80선지조공 우 일본국, 기시지연야. 어시, 고려 백제 2국 왕, 문 신라 수도적 항어일본국, 밀령사기군세 즉지불가승, 자래 우 영외, 고두이관왈, 종금이후 영칭서번 부절조공. 是以, 新羅王, 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 其是之緣也. 於是, 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 降於日本國, 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而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고 인이 정 내관가 둔창, 시 소위지 삼한야. 왕후 종신라 환지. 故因以, 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 오사카 야마대왕국은 신라매금이 사는 장소를 삼한 땅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매금신라의 땅은 삼한 땅입니다.
[야마대의 신공神功] 서기 200년 겨울 음력 10월 즉, 양력 11월 겨울 바람을 맞은 야마대왕국의 배는 순풍을 따라서 즉 바람 방향을 따라서 이동했고 노를 젓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필리핀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장마비가 옵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붑니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 바람이 불어서 춥습니다.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붑니다.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지난 1만년간 방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북극 위쪽에서 우리가 약간 고개를 숙여서 아래로 지구를 바라보면서 양팔을 양쪽으로 편하게 놓을 때, 우리의 오른손 쪽에서 왼손 쪽 방향으로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구가 자전하면서 우주공간에 부딪히는 그 방향을 동쪽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빛을 받는 부분은 밝아지게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아침이라고 부르고, 해가 뜬다고 말합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게 됩니다. 다만 이때,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그 진행 방향으로 햇빛을 만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길고 불편하므로, 편의상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은 과학에 어긋나지만, 인간의 이성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은 그러한 존재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해협에서는 기본적으로,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인해, 항상 해류가 동쪽으로 흐릅니다. 즉, 대한해협에 나무와 같은 물체를 하나 올려놓고 외부에서 별도의 힘을 가하지 않으면, 그 물체가 동쪽으로 갑니다. 혹시, 서기 200년 겨울에 큐슈에서 야마대 왕국의 배가 출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마대왕국의 여왕이 살고 있다는 풍포궁은 오사카 나라 지역에 있는 것인데, 혹은, 시모노세키 지역에도 풍포궁이 있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592년 12월 8일 (추고여왕 즉위전기), 추고왕후가 풍포궁(豐浦宮 - 오사카 나라현 지역)에서 왕위에 올랐다. (동12월 임신 삭 기유, 왕후 즉천왕위 어 풍포궁, 冬十二月壬申朔己卯, 皇后卽天皇位於豐浦宮.) @일본서기 서기 193년 (중애왕 2년), 7월 5일, [각록에서 출발하였던] 신공왕후가 풍포진(豐浦津)에 정박하였다. 이날, 신공왕후는 바닷 속에서 여의주를 얻었다. ( 추7월 신해 삭 을묘, 왕후 박 풍포진. 시일, 왕후 득 여의주 어해중.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豐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 9월, [정황상 신공왕후가] 궁실을 혈문에 짓고 머물렀다. 이것은 혈문(穴門 - 시모노세키 지역)의 풍포궁(豐浦宮)이다. ( 9월, 흥 궁실 우혈문 이거지. 시위 혈문 풍포궁. 九月. 興宮室于穴門而居之. 是謂穴門豐浦宮.) 서기 592년과 서기 193년은 단지 40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신공여왕은 내맘대로 할 수 있는 구슬을 갖게 되었으므로, 시간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오사카 풍포궁에서 출발하는 여왕은 세토내해를 항해할 수 있습니다. 세토내해에서도 지구자전의 영향으로 인해 시계 반대방향의 해류가 흐르므로, 오사카에서 노를 젓지 않은 배는 그 서북쪽으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도착 장소는 지구 좌표 (34°30' 133°50') 쯤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카야마(Okayama, 강산시 岡山市, Japan) 지역 쯤입니다. 이 곳은 섬이 많아서 배가 멈출 것입니다. 다만, 큐슈 지역 풍포궁에서 출발하는 여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서기 200년 겨울에 큐슈를 출발하여 노를 젓지 않으면서 겨울 바람을 따라서 항해하는 배는 지구 좌표 (35°20' 132°45') 쯤의 지역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시마네 지역 (Shimane 도근현 島根県) 쯤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에 매금신라가 있고, 그 곳이 삼한 땅의 일부입니다. 혹은, 신공왕후와 매금신라는 이미 서로 알고 지내는 관계였다, 라는 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공왕후의 이야기에는 여러 종류의 설이 있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12월 14일 (신공 즉위전기) 일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중애왕이 죽은 후,] 신공왕후는 신의 가르침대로 제사를 지냈다. 왕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쳤다. 그때에 신이 인도하였다. 배에 따라온 큰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때,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이 [신공왕후를] 마중 나왔다. ( 일운, 一云, 시야 천왕홀병발이붕지. 연후, 왕후 수신교 이제, 즉 왕후 위남속장, 정신라, 시 신류도지, 유시, 수선랑지 원급우신라국중. 어시,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 참영궤지. 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 然後, 皇后隨神敎而祭. 則皇后爲男束裝, 征新羅. 時神留導之. 由是, 隨船浪之, 遠及于新羅國中. 於是,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 參迎跪之,)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만한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라는 설도 가능합니다. 이럴 경우, 신공왕후의 여의주는 야마대왕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애왕의 죽음을 야마대왕국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중애 9년), 봄 2월, 5일, 중애왕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 이때 나이 52세였다.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은 것이다. 이때 왕후와 대신 무내숙니는 중애왕의 죽음을 감추고 천하에 알리지 않았다. ( 9년, 춘2월 계묘삭 정미, 천왕홀유통신 이 명일 붕. 시년52. 즉지, 불용신언이조붕 [일운, 천왕 친벌웅습중적 시이붕야.] 어시, 왕후 급 대신 무내숙니, 닉 천왕지상, 불령지천하. 九年 春二月癸卯朔丁未. 天皇忽有痛身. 而明日崩. 時年五十二. 卽知. 不用神言而早崩[一云. 天皇親伐熊襲中賊矢而崩也.]. 於是皇后及大臣武內宿禰. 匿天皇之喪. 不令知天下.) @후한서 왜 비미호가 능히 술수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 유일여자 명왈비미호, 연장 불가 사 귀신도, 능이요혹중 어시공립위왕.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일본서기 서기 200년. 신공여왕 서문. 부친인 기장숙니가 그 딸 기장족희존을 기이하게 여겼다. ( 기장족희존 치일본근자언태일일천왕지증손 기장숙니왕지녀야. 모왈 갈성고상원, 족중언천왕2년, 립 위왕후. 유이 총명예지 모용장려. 부왕이언. 氣長足姬尊, 稚日本根子彥太日日天皇之曾孫, 氣長宿禰王之女也. 母曰葛城高顙媛. 足仲彥天皇二年, 立爲皇后. 幼而聰明叡智. 貌容壯麗. 父王異焉.)
[이도왜국에서 뱃길로 30일 + 약간더의 거리에 있는 야마대왜국] 고대에 왜는 거리를 말할 때, 공간 간격으로써 말하지 않고, 시간 간격으로써 말합니다. 이도왜국에서 난파 오사카 야마대왜국까지 뱃길로 30일 + 약간더 걸립니다. @북사 왜 왜인들은 거리에서 리수(里數)를 알지 못하여, 거리를 단지 날수로 계산한다. (이인 부지 리수, 단계 이일. 국경, 동서5월행, 남북3월행. 각지어해, 기지세, 동고서하.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國境,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 東高西下. ) @삼국지 위지 왜 [대마도 남쪽으로 2칸 ~ 3칸의 바다를 건넌 후,] 말로국에서 동남쪽으로 육상으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른다. (동남 륙행 오백리, 지이도국.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 이도국에서 동남쪽으로 1백리를 가면 노국(奴國)인데, 이 나라에는 2만여 호가 있다. (동남 지노국 백리, 관왈시마고 부와비노모리, 유이만여호. 東南至奴國百里, 官曰兕馬觚,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 ) 노국에서 동쪽으로 1백리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인데, 이 나라에는 1천여 가(家)가 있다. (동행 지불이국 백리, 관왈다모 부왈비노모리 유천여가. 東行至不彌國百里, 官曰多模, 副曰卑奴母離, 有千餘家.)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바닷길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에는 5만여 호 정도가 있다. (남지투마국 수행이십일, 관왈미미 부왈미미나리, 가오만여호.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官曰彌彌, 副曰彌彌那利, 可五萬餘戶.) 투마국에서 남쪽으로 바닷길로 10일을 가고, 또 육상으로 1개월을 가면, 야마일국(邪馬壹國 야마대국)에 이르는데, 여왕(女王)이 도읍한 곳이다. 이 나라에는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남지야마일국 여왕지소도 수행십일 륙행일월, 관유이지마 차왈미마승 차왈미마획지 차왈노가제, 가칠만여호.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는, 이도국에서 불미국까지 육로로써 7백리 쯤 즉, 7일을 이동합니다. 그후 불미국에서 투마국을 거쳐 야마대국까지 뱃길로 30일 걸립니다. 옛날 1일 이동거리를 일반적으로 1백리라고 인식합니다. 이도국의 서쪽 해안에서 이도국의 동쪽 해안까지 7일, 이도국의 동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 30일이고, 합치면 37일입니다. 즉, 큐슈의 서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 37일 거리입니다. 큐슈의 동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는 30일 거리입니다. 이러한 값은 축자국 이길련박덕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서기 서기 659년 7월 3일 (제명왕 5년) 소금하 판합부련석포 및 대선하 진수련길상을 사신으로 당에 파견하였다. 도오(道奧)의 하이(蝦夷 *일본 동북방 숙신 계통) 남녀 두 명을 당나라왕에게 보였다. 이길련박덕의 기록(伊吉連博德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 천왕 시대에 소금하 판합부석포련 및 대산하 진수길상련 등이 탄 두 척의 배가 오당로(吳唐路)를 통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오당로(吳唐路) : 양자강 하류로 직행하여 횡단하는 경로. 산동을 경유하지 않음.) 기미년, 7월 3일에 난파의 삼진포(三津之浦)에서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축자의 육진포(六津之浦)에서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남쪽 해안에 있는 섬에 닿았다. 섬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9월] 14일 인시(寅時)에 [백제의 남쪽 섬을 출발하여] 두 척의 배가 나란히 큰바다(대해大海)로 나아갔다. [*-> 이후, 2척의 배가 서로 함께 정10월 한달 동안 황해를 횡단 항해한다.] [*즉, 9월 14일 백제 남쪽 섬 -> 정10월 한달 소요 -> 정황상, 정10월 15일 및 정10월 16일에 두 척의 배가 당나라 동쪽해안에 닿았다.] (*판합부석포련의 배) [정 10월] 15일 해가 질 무렵에 판합부석포련의 배가 갑작스럽게 역풍을 만나 남쪽 바다에 있는 섬에 표착하였다. 섬의 이름은 이가위(爾加委)라 한다. 그곳에서 섬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동한장직아리마와 판합부련도적 등 5명이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고 도망쳐 괄주(括州 - 중국 동남해안)에 도착하였다. 주현의 관인이 낙양의 도읍으로 보내주었다. (*진수길상련의 배) [정 10월] 16일, 한밤중에 진수길상련의 배가 월주(越州) 회계현(會稽縣) 수안산(須岸山)에 도착하였다. 동북풍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정 10월] 23일, 여요현(餘姚縣 : 백제월주일 것임.)에 도착하였다. 타고 온 배와 여러 가지 비품을 그곳에 남겨 두었다. 윤10월 1일, 월주의 관청에 도착하였다. [*윤 10월 앞에 정 10월이 하나 있음.] 윤10월 15일, 역마를 타고 당나라의 수도(경京)에 들어갔다. 윤10월 29일, 말을 달려 낙양(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당나라왕이 낙양에 있었다. ( 추7월 병자 삭 무인, 견 소금하 판합부련석포 대선하 진수련길상, 사어 당국. 잉이 도오하이 남녀2인, 시당천자. 秋七月丙子朔戊寅, 遣小錦下坂合部連石布·大仙下津守連吉祥, 使於唐國. 仍以道奧蝦夷男女二人, 示唐天子 [ 이길련 박덕서 왈, 동천왕지세, 소금하 판합부석포련 대산하 진수길상련등 2선, 봉사 오당지로. [伊吉連博德書曰, 同天皇之世, 小錦下坂合部石布連·大山下津守吉祥連等二船, 奉使吳唐之路. 이 기미년 7월 3일, 발자 난파 삼진지포, 8월 11일, 발자 축자 육진지포. 9월 13일, 행도 백제남반지도, 도명 무분명. 이 [9월] 14일 인시, 2선 상종, 방출 대해 以己未年七月三日, 發自難波三津之浦. 八月十一日, 發自筑紫六津之浦. 九月十三日, 行到百濟南畔之嶋. 嶋名毋分明. 以十四日寅時, 二船相從, 放出大海. [10월] 15일 일입지시 [판합부]석포련선 횡조역풍 표도남해지도, 도명 이가위, 잉위도인소멸, 변 동한장직아리마 판합부련도적등 5인, 도승 도인지선 도도 괄주. 주현관인, 송도낙양지경. 十五日日入之時, 石布連船, 橫遭逆風, 漂到南海之嶋. 嶋名爾加委. 仍爲嶋人所滅. 便東漢長直阿利麻·坂合部連稻積等五人, 盜乘嶋人之船, 逃到括州. 州縣官人, 送到洛陽之京. [10월] 16일 야반지시, [진수]길상련선 행도월주 회계현 수안산, 동북풍 풍태급. 입2일 행도 여요현, 소 승대선 급 제조도지물 류착피처. 十六日夜半之時, 吉祥連船, 行到越州會稽縣須岸山. 東北風. 風太急. 廿二日, 行到餘姚縣. 所乘大船及諸調度之物, 留着彼處. 윤10월 1일 행도월주지저, [윤10월] 15일, 승역입경. [윤10월] 입9일, 치도동경, 천자 재 동경. 潤十月一日, 行到越州之底. 十五日, 乘驛入京. 廿九日, 馳到東京. 天子在東京.) @일본서기 서기 667년 11월 13일 (천지왕 6년), 웅진도독부의 사마(司馬) 법총 등이 [축자도독부에서] 일을 마치고 [웅진도독부로] 돌아갔다. 이때, [축자도독부의] 소산하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 및 대을하 입신제석을 송사(送使)로 삼아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축자도독부는 백제 5도독부 중에서 금련도독부 혹은 덕안도독부에 해당할 것임.] ( 11월 정사 삭 을축, 백제진장 류인원, 견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상주국 사마 법총 등, 송 대산하 경부련석적 등 어 축자도독부. 十一月丁巳朔乙丑,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府熊山縣令上柱國司馬法聰等, 送大山下境部連石積等於筑紫都督府. 기사, 사마 법총등 파귀, 이 소산하 이길련박덕 대을하 립신제석, 위 송사. 己巳, 司馬法聰等罷歸. 以小山下伊吉連博德·大乙下笠臣諸石, 爲送使.) 서기 659년에 축자국 사람 이길련박덕이 난파에서 당나라까지 사신을 수송합니다. 난파항에서 출발하여 큐슈 서북쪽 해안을 경유하여 백제 남쪽을 경유하여 양자강 하류로 갑니다. 이때에도, 난파항에서 출발하여 큐슈 서북쪽 해안까지, 7월 3일부터 ~ 8월 11일까지, 38일 소요됩니다. 따라서, 중국 사서와 야마대왕국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큐슈 동쪽 해안 쯤에서 오사카 까지 30일 항해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임나 일본부가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부지방에 발굴된 전방후원분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key hole tomb 로 검색해 보면 bbc 다큐멘터리로도 많이 다루어 지고 있고 야마토 정권의 고분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무덤이라고 합니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다음가는 그렇다면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도래인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규모의 문명 이라면 한반도에 분국을 세웠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대가리야... 한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가 있던 200년~600년은 일본이 건국되기전 고분시대라고 일본인들이 역사책에다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고 있다. 고분시대... ㅋㅋㅋ 일본이 한반도로 들어왔다면 고분시대가 아닌 일본의 대륙 정복기라고 써야 맞는데 그런 기록이 없어 왜냐고?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섬에다 분국을 만들고 대륙의 황제국에서 제후로 봉해져 그 분국들끼리 서로 패권다툼하고 살다가 황제국 백제가 멸망하니 이때다 하고 독립을 한 거지 그 게 바로 일본이란 나라야. 결정적으로 가야가 일본에 분국을 만들기 전에는 일본섬에는 말이 없었음. 말은 누가 탄다? 바로 북방 기마민족들이지. 전국토의 70%이상이 산지이고 길도 닦여있지 않던 미개척 불모지 한반도에서는 동서남북 이동을 위해 말을 탈 일이 거의 없지. 몽골과 만주에서 길러진 우수한 말들은 배를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도시와 일본섬으로 공급이 되는 거지. 그래서 말이 일본으로 들어가게 된거야. 기마병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당시에 말도 없던 야마토가 한반도에 분국을 어떻게 세워? 소설을 써라 소설을 쯔쯔쯔
3세기 야마토정권이 있었다면, 7세기 일본국이 성립되므로, 정상적인 나라의 역사라면, 3세기 야마토시대, 7세기 일본시대라고 해야 합니다. 한국이 고려시대, 조선시대라고 하듯이 말이죠. 정상적인 왕조 국가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세계 공통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 구분은 고분시대, 아스카시대입니다. 그 이유가 야마토정권이 에도 없는 조작된 왕조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야마토시대, 일본시대라고 했다가 조작이 밝혀지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이라는 인덕왕릉 등 다 메이지 시대에 조작한 봉분 규모입니다. 일본은 7세기 말 신라의 지원으로 최초의 고대국가가 출범하기 전까지 도성/왕성도 없었습니다. 일본 학자도 인정하는 최초의 도성/왕성 유적이 후지와라교(등원경)입니다. 에 나오는 1~38대 왕까지는 조작이라 일본 중세 시대까지 제사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방후원분 발굴을 하지 않습니다. 한반도계 유물이 줄줄이 출토되기 때문입니다. 대체 어떤 발굴된 전방후원분을 보시고 생각이 바뀌셨는지 궁금하네요?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덕일 교수님을 널리 알려야합니다~~^^
역사독립운동의 힘든 길을 걷고 계신 이덕일선생님 존경합니다 많은 분들이 항상 믿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이덕일 선생님 부디 건강하셔서 이 나라의 혼을 바로 세워 주세요.
우리도 그 일에 힘을 보태 겠습니다.
여 야가 싸워도 역사가 하나로 되어 있으면 나라 무너 질 일이 없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분노,통탄"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100년간 식민사관에 부역했던 매국노들이 누렸던 명예
와 부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작금의 현실
입니다.'역사바로세우기'는 범국민적운동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꿈은 이루어 집니다. 꿈을 주신 이덕일선생님과
여러 광복사학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역사왜곡 처벌법
반듯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
역사
강의는
이덕일 교수님이 답이다^^
민족반역자 친일청산 특별법을 되살려야 합니다.
국민들이 깨어나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없네요!...
계곡에서 전혀 물이 불어나는 기미가 없었는데 갑자기 큰 물결이 덮쳐 야영하던 사람들이 휩쓸려 죽어버리듯,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선생님 화이팅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역사를 빼앗기면 종국에는 영토를 침탈당하게 됩니다. 중화주의 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거짓을 밝혀 바른 역사의 길로 안내하는 이덕일 교수님과 대한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바로 세워 우리땅을 다시 찾읍시다. 지속적으로 고서와 고문서도 찾읍시다.
그동안의 왜곡 사기질로 인한 피해보상도 받고 예전처럼 다시 조공을 받읍시다.
교수님의. 역사 바로잡기가 잘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이덕일 박사님 건강하셔야돱니다
후손으로 고맙게 잘 봤습니다 종친회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좋습니다 ^^
응원합니다~
이덕일 소장님 감사합니다. 우리 역사를 바르게 지켜 주세요.
제발 이 강의 내용이 티브이
방송을 늘 기원합니다
예~맞습니다
역사는 식민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역사에 관심을 갖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때입니다
이덕일 선생님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덕일 교수님~👍
5.18 특별법 처럼 역사왜곡처단법을 만들라! 그놈들과 역사토론 및 반론 보다 처벌법 제정에 앞장서서 전국민 홍보로 나가면 된다. 시민단체들과 함께 대국민 홍보를 하면 된다.
겨레와 나라의 맥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친일청산은 못했어도 역사바로세우기는 기필코 하자
정한론은 1400 년대 이전부터 정립된 이론이라고 봅니다..일본내에서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내부의 힘을 외부로 돌리기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 사할린, 인도, 중국, 만주, 조선을 병합해서 대제국을 만든다는 이론을 펴기시작...이게 1600년대 후반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에게 전해져 1800년대 더욱 확립된 이론..
수능시험이 문제입니다.
이런 주장할 때,
참실한 역사학자들은
뭐 했나요?
정치가 썪어도 바른 역사관을 위해 평생을
받치셨는데,
목숨 걸어야지요.
千言은 一行之無라!
행동하지 않음은 헛 말이다.
지역적 감정이란^^
교수님,
저 너무 열받아서 한 잔
합니다.
핑게인가요^^
저는 몸으로 겪은 바다
남자 입니다.
지금은,
제가 배울땐 북한은 도깨비고,
고조선은 한마디,
교과서에 그것도 중등
국사에~^^
고등도, 우리나라 역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공부
해야한다는 걸 얘기하면
왜? 하고,
그냥^^
그랬는데 지금은 조카들이 가르치고 있어요^^
이건 가짜다 하고,
강토원 선생께서도 72년 초등3년 때인가?
이건 시험에 관계 없으니 외우지 않아도
된다 하셨는데,
강단사학자들
모조리 없애야한다.
추방하자
추방하자
추방하자
이덕일 선생 얘기로는 야마토 왜가 우리 고대사로 자리잡은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누가 그 따위 역사를 주장한단 말인가.
올습니다 감사합니다!
❤
※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은 체계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
▶ 1단계 : 의 역사 왜곡
▶ 2단계 : 의 역사 왜곡
▶▶▶
▶ 1. 열도에 파견된 백제의 관료인 을 "열도 전역을 지배하는 "으로 조작
▶ 2. 광개토태왕 때 신라에 대거 항복한 을 403년에 열도 나라 지역에 집단 이주시킨 사건을 "가공의 이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인 집단을 이끌고 온 것"으로 조작
※ 이 2가지 외에는 의 모든 기사를 열도 내 한반도 열국(백제/신라/가라/고구리/진한/모한)들의 분국인 마을국가로 보고 해석하면 됩니다.
※ 를 만들 당시에는 백제가 열도를 지배한 흔적을 지우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즉, 열도는 천황이 죽 지배한 고대국가라는 것을 천명!
이를 위하여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역사 조작을 시작하여, 을 위해서는 , 을, 에 관해서는 , 을 제작합니다. 물론 을 위하여 광개토태왕비문을 깨부수어 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부분에서 와 등만 남겨놓았습니다. 지워진 광개토태왕의 열도 정벌 부분은 로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들은 중 1.과 2.는 백퍼센트 추종하고 있으며, 은 가 아닌 이다 하며, 을 자신들이 극복했다고 국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
▶ 실제로는 열도가 670년에 비로소 중앙집권 고대국가를 세웠는데,
▶ 그 이전인 3세기 중반에 중앙집권 고대국가인 야마토왜를 세워서 부족연맹상태인 한반도 남부(남삼한)를 간접 지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단식민주의소설학자들은 ,의 초기 기록을 부인하여 3세기 중반까지 부족연맹상태인 한반도 남부(마한 54국, 진한 24국, 변한 24국이 우글우글한 상태인 남삼한)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로
▶ 야마토왜가 상륙하던 => 즉, 직접 지배
▶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 즉, 간접 지배
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죠.
그리고, 가야의 멸망 연도 562년 만 ,를 따르고 나머지 가야의 기사는 를 모두 따르고 있습니다. → 즉, ,의 가야 기사는 무시함.
그래서, 가야사 복원 사업에서 시민단체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부르고 있습니다.
즉, 남원과 합천을 일본서기의 기문과 다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시도하려다 제지당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남원 전시관 학예연구가가 담당임이 분명한 전시관 해설 석비에 아직도 기문과 다라로 표시하고 항의하려 방문하자 기문에만 청테이프를 붙여놓고 다라는 왜 안 붙이냐고 하자 자신은 남원 담당자이니 다라는 책임 아니라는 어이없는 모습도 있었고 보나마나 항의 방문자들이 돌아간 뒤에 청테이프를 떼고 그대로 전시하고 있을 것입니다(관련 영상 검색어 : [남원, 왜? 왜왕의 땅 기문국을 포기하지 않는가?]"기물(奇物)의 실체강론).
너무 길어져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잡혀갈까봐겁나서그러나 왜 댓글이 하나도 없네 ?
돌아가신 최태영박사님이 후지산대나무숲속에서 가야의족보를 보셨답니다. 가야의족보가왜 일본에있을까요? 북한역사학자가 주장한데로 일본땅에 삼국의분국들이존재했다고 보는게타당합니다. 북쪽으로바다가있다고써있다면서요.
왜 강단사학자들이 틀린 역사를 주장하는데, 자리에서 쳐내지를 못하는지 궁금? 교육부는 뭐 하는지~?
전정부가 추진했던 가야사 역사는 무엇이고 현 정부는 가야사를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가요
일본학회에서는 이미 이거에 대한 결론이 나왔고 아무도 임나일본부설을 언급하지 않은데 왜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 언제까지 이런 엉망을 ,,,
한국에 식민사학에 물든 역사학자들 때문입니다..😊
역사를 왜곡 기술한 일본이 원초적인 문제였지만 해방 이후에 그것을 띁어고치지않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총구를 일본이 아니라 우리로 돌려야하고 작금의 역사조작은 중국이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닌지요?
일본만 비난하는 여론만 외울것이 아니라 중국을 향한 비난으로 정책전환은 어떨런지요.
책보고 검색해보세요
[서기 395년, 서기 400년, 서기 404년]
[서기 395년 백잔신라 구시속민(百殘新羅 舊是屬民), 서기 400년 석 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서기 395년 이전의 오랜 과거에 신라는 고구려의 속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과거부터 서기 395년까지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395년. 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의 속민이 되었다. 그후 계속해서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
(
영락5년 세재 을미.
永樂五年歲在乙未.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
서기 400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조공하지 않았었습니다.
서기 400년 이후에 신라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과거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와서 여쭈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
영락 십년 경자, 교견 보기오만 왕구신라.
...
석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 □국[]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복 구□□□□조공.
[永樂]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
따라서, 서기 400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조공하고 있는 신라가 있고, 서기 400년 이후부터 고구려에 조공하고 있는 신라매금이 있습니다.
신라와 매금신라가 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기 400년에 고구려가 구원한 것은 매금신라입니다.
이때, 매금신라는 지리적으로 임나가라 및 왜와 가깝게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
서기 400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
신라성에 이르렀다.
왜가 있었다.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 군대가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임나가라의 성을 복속하였다.
...
과거 신라매금은 고구려에 와서 여쭈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매금이, 조공하였다
(
영락 십년 경자, 교견 보기오만 왕구신라.
종남거성 지신라성 왜만기중, 관군방지 왜적퇴0, 0배급추 지임나가라 종발성, 성즉귀복, 안라인 수 병.
0신라성0성 왜구대궤 성000진000, 안라인 수 병.
신0000기0000000언0…0사0…0궤, 안라인 수 병.
석신라매금 미유 신래론사, □국[]상광개토경호태왕 □□□□ 매금□□복 구□□□□조공.
[永樂]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
新□□□□其□□□□□□□言□□□□□□□□□□□□□□□□□□□□□□□□□□辭□□□□□□□□□□□□□潰□▨▨▨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 )
서기 400년에 매금신라와 가깝게 있는 임나와 가깝게 있는 왜국이 있습니다.
서기 400년에 고구려 군대가 왜국에 가서 왜국을 공격했습니다.
[서기 395년 이전에 신라의 조공을 받은 나라]
매금신라의 문제 이전에, 우선 신라가 있습니다.
광개토왕의 나라는 서기 395년 이전에 신라의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때, 무엇을 읽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백제본기
[서문]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기세계, 여고구려 동출 부여, 고 이부여 위 씨.
其世系, 與髙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BC 6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그들이 강역을 침략하므로, 편안하지 않다.
도읍을 옮겨야겠다.
[낙랑 남쪽에 있는] 한수(漢水)의 남쪽에 좋은 땅이 있다. 그 곳으로 옮기는 것이 구안지계(久安之計)이다.”
(
하5월, 왕위신하왈, 국가 동유낙랑 북유말갈, 침질강경 소유녕일. 황금 요상루현 국모기양, 세부자안 필장천국.
여작출순 관 한수지남, 토양고유 의도어피, 이도 구안지계.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况今妖祥屢見, 國母弃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BC 6년. 8월에,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백제본기의 영역은] 북쪽으로 패하(浿河)에 이른다.
(
8월, 견사 마한, 고 천도.
수획정 강장, 북지 패하, 남한 웅천, 서궁 대해, 동극 주양.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두 나라는 한 곳에서 나왔는데, 나뉘었습니다.
이를테면, BC 6년 8월에 강역을 정했고, 패수를 경계로 하였습니다.
다만, 그 왕은 BC 6년 8월 이전에 낙랑 서쪽에 있었다가 한수 남쪽의 마한으로 온 왕입니다.
낙랑 서쪽에는 마자수 서쪽 현도군 졸본부여 혹은 졸본고구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잠정적으로 백제본기에서 기록하고는 있지만,
그 나라는 마한에 있는 졸본고구려왕의 나라에 해당합니다.
이를테면, 마한은 고구려이다, 라는 것에 해당합니다.
@삼국사기. 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문집에 당나라의 태사(太師) 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마한은 고구려이다."
(
동해지외유3국, 기명마한변한진한, 마한즉고려, 변한즉백제, 진한즉신라야.
고려백제전성지시 강병백만, 남침 오월, 북요 유연제로, 위중국거두. 수황실어 유어정료.
복걸, 대사시중 부강태은 특사 수륙권첩. 령소재공급 주강숙식 급 장행려마초료 병 차군장감송지가전.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隋皇失馭, 由於征遼.
伏乞, 大師·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劵牒. 令所在供給舟舡·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并差軍將, 監送至駕前.)
@후한서 한국
마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립(共立)하여 자기들 중에서 진왕(辰王)을 세운다.
진왕(辰王)은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의 왕으로서 다스린다.
삼한 여러 나라들의 왕들의 선대는 모두 마한의 사람이다.
(
마한 최대, 공립기종위진왕, 도목지국 진왕삼한지지. 기제국왕 선개시마한종인언.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삼한 파사매금]
야마대왕국은 오사카 지역 주변에 있습니다.
편의상, 오사카 야마대왕국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사카 야마대왕국도 신라왕 파사매금을 만납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신공여왕 즉위전기)
겨울 10월 3일,
화이진에서 출발했다.
순풍이 불어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 없이도 곧 신라에 이르렀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은 미질기지파진간기를 질자로 삼아서 금은채색 및 능라겸견을 80척의 배에 실어서 야마대 왕국의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은 항상 배 80척의 규모로써 일본국에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때, 고려와 백제도, 서번(西蕃)이라 일컬으면서, 왕래하겠다고 하였다.]
이로써 내관가 둔창(內官家屯倉)을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대 신공神功이 말하는] 삼한(三韓)이다.
왕후가 신라에서 돌아왔다.
(
동10월 기해삭신축, 종화이진 발지. 시 비렴기풍 양후거랑, 해중대어 실부부선, 즉 대풍순취 범박수파, 불로로즙, 편도신라.
冬十月己亥朔辛丑, 從和珥津發之. 時飛廉起風, 陽侯擧浪, 海中大魚, 悉浮扶船. 則大風順吹, 帆舶隨波. 不勞櫨楫, 便到新羅.
즉 이왕후소장모 수어신라왕문 위후엽지인. 고 기모 금유수 우 신라왕지문야.
원 신라왕 파사매금 즉이 미질기지파진간기 위질, 잉재 금은채색급릉라겸견 재우80소선 령종관군.
卽以皇后所杖矛, 樹於新羅王門, 爲後葉之印. 故其矛今猶樹于新羅王之門也.
爰新羅王波沙寐錦, 卽以微叱己知波珍干岐爲質, 仍齎金銀彩色及綾·羅·縑絹, 載于八十艘船, 令從官軍.
시이, 신라왕 상 이80선지조공 우 일본국, 기시지연야.
어시, 고려 백제 2국 왕, 문 신라 수도적 항어일본국, 밀령사기군세 즉지불가승,
자래 우 영외, 고두이관왈, 종금이후 영칭서번 부절조공.
是以, 新羅王, 常以八十船之調貢于日本國, 其是之緣也.
於是, 高麗·百濟二國王, 聞新羅收圖籍, 降於日本國, 密令伺其軍勢. 則知不可勝,
自來于營外, 叩頭而款曰, 從今以後, 永稱西蕃, 不絶朝貢.
고 인이 정 내관가 둔창, 시 소위지 삼한야.
왕후 종신라 환지.
故因以, 定內官家屯倉. 是所謂之三韓也.
皇后從新羅還之.)
오사카 야마대왕국은 신라매금이 사는 장소를 삼한 땅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매금신라의 땅은 삼한 땅입니다.
[야마대의 신공神功]
서기 200년 겨울 음력 10월 즉, 양력 11월 겨울 바람을 맞은 야마대왕국의 배는 순풍을 따라서 즉 바람 방향을 따라서 이동했고 노를 젓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여름에는 필리핀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장마비가 옵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붑니다.
겨울에는 시베리아에서 바람이 불어서 춥습니다.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붑니다.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지난 1만년간 방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구의 북극 위쪽에서 우리가 약간 고개를 숙여서 아래로 지구를 바라보면서 양팔을 양쪽으로 편하게 놓을 때, 우리의 오른손 쪽에서 왼손 쪽 방향으로 지구가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구가 자전하면서 우주공간에 부딪히는 그 방향을 동쪽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빛을 받는 부분은 밝아지게 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아침이라고 부르고, 해가 뜬다고 말합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게 됩니다.
다만 이때, 지구가 자전을 하면서 그 진행 방향으로 햇빛을 만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길고 불편하므로, 편의상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은 과학에 어긋나지만, 인간의 이성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은 그러한 존재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한해협에서는 기본적으로,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인해, 항상 해류가 동쪽으로 흐릅니다.
즉, 대한해협에 나무와 같은 물체를 하나 올려놓고 외부에서 별도의 힘을 가하지 않으면, 그 물체가 동쪽으로 갑니다.
혹시, 서기 200년 겨울에 큐슈에서 야마대 왕국의 배가 출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마대왕국의 여왕이 살고 있다는 풍포궁은 오사카 나라 지역에 있는 것인데,
혹은, 시모노세키 지역에도 풍포궁이 있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592년 12월 8일 (추고여왕 즉위전기),
추고왕후가 풍포궁(豐浦宮 - 오사카 나라현 지역)에서 왕위에 올랐다.
(동12월 임신 삭 기유, 왕후 즉천왕위 어 풍포궁,
冬十二月壬申朔己卯, 皇后卽天皇位於豐浦宮.)
@일본서기
서기 193년 (중애왕 2년),
7월 5일,
[각록에서 출발하였던] 신공왕후가 풍포진(豐浦津)에 정박하였다.
이날, 신공왕후는 바닷 속에서 여의주를 얻었다.
(
추7월 신해 삭 을묘, 왕후 박 풍포진. 시일, 왕후 득 여의주 어해중.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豐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
9월, [정황상 신공왕후가] 궁실을 혈문에 짓고 머물렀다. 이것은 혈문(穴門 - 시모노세키 지역)의 풍포궁(豐浦宮)이다.
(
9월, 흥 궁실 우혈문 이거지. 시위 혈문 풍포궁.
九月. 興宮室于穴門而居之. 是謂穴門豐浦宮.)
서기 592년과 서기 193년은 단지 40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신공여왕은 내맘대로 할 수 있는 구슬을 갖게 되었으므로, 시간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오사카 풍포궁에서 출발하는 여왕은 세토내해를 항해할 수 있습니다.
세토내해에서도 지구자전의 영향으로 인해 시계 반대방향의 해류가 흐르므로, 오사카에서 노를 젓지 않은 배는 그 서북쪽으로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도착 장소는 지구 좌표 (34°30' 133°50') 쯤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카야마(Okayama, 강산시 岡山市, Japan) 지역 쯤입니다. 이 곳은 섬이 많아서 배가 멈출 것입니다.
다만, 큐슈 지역 풍포궁에서 출발하는 여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서기 200년 겨울에 큐슈를 출발하여 노를 젓지 않으면서 겨울 바람을 따라서 항해하는 배는 지구 좌표 (35°20' 132°45') 쯤의 지역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시마네 지역 (Shimane 도근현 島根県) 쯤입니다.
그렇다면, 그 곳에 매금신라가 있고, 그 곳이 삼한 땅의 일부입니다.
혹은, 신공왕후와 매금신라는 이미 서로 알고 지내는 관계였다, 라는 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공왕후의 이야기에는 여러 종류의 설이 있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12월 14일 (신공 즉위전기)
일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중애왕이 죽은 후,]
신공왕후는 신의 가르침대로 제사를 지냈다. 왕후는 남장하고 신라를 쳤다. 그때에 신이 인도하였다. 배에 따라온 큰 파도가 멀리 신라 나라 안까지 미쳤다.
이때,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이 [신공왕후를] 마중 나왔다.
(
일운,
一云,
시야 천왕홀병발이붕지.
연후, 왕후 수신교 이제, 즉 왕후 위남속장, 정신라, 시 신류도지, 유시, 수선랑지 원급우신라국중.
어시,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 참영궤지.
是夜天皇忽病發以崩之.
然後, 皇后隨神敎而祭. 則皇后爲男束裝, 征新羅. 時神留導之. 由是, 隨船浪之, 遠及于新羅國中.
於是,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 參迎跪之,)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만한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라는 설도 가능합니다.
이럴 경우, 신공왕후의 여의주는 야마대왕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애왕의 죽음을 야마대왕국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본서기
서기 200년 (중애 9년), 봄 2월, 5일,
중애왕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죽었다. 이때 나이 52세였다.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은 것이다.
이때 왕후와 대신 무내숙니는 중애왕의 죽음을 감추고 천하에 알리지 않았다.
(
9년, 춘2월 계묘삭 정미, 천왕홀유통신 이 명일 붕. 시년52. 즉지, 불용신언이조붕 [일운, 천왕 친벌웅습중적 시이붕야.]
어시, 왕후 급 대신 무내숙니, 닉 천왕지상, 불령지천하.
九年 春二月癸卯朔丁未. 天皇忽有痛身. 而明日崩. 時年五十二. 卽知. 不用神言而早崩[一云. 天皇親伐熊襲中賊矢而崩也.].
於是皇后及大臣武內宿禰. 匿天皇之喪. 不令知天下.)
@후한서 왜
비미호가 능히 술수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
유일여자 명왈비미호, 연장 불가 사 귀신도, 능이요혹중 어시공립위왕.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일본서기
서기 200년. 신공여왕 서문.
부친인 기장숙니가 그 딸 기장족희존을 기이하게 여겼다.
(
기장족희존 치일본근자언태일일천왕지증손 기장숙니왕지녀야. 모왈 갈성고상원, 족중언천왕2년, 립 위왕후. 유이 총명예지 모용장려. 부왕이언.
氣長足姬尊, 稚日本根子彥太日日天皇之曾孫, 氣長宿禰王之女也. 母曰葛城高顙媛. 足仲彥天皇二年, 立爲皇后. 幼而聰明叡智. 貌容壯麗. 父王異焉.)
[이도왜국에서 뱃길로 30일 + 약간더의 거리에 있는 야마대왜국]
고대에 왜는 거리를 말할 때, 공간 간격으로써 말하지 않고, 시간 간격으로써 말합니다.
이도왜국에서 난파 오사카 야마대왜국까지 뱃길로 30일 + 약간더 걸립니다.
@북사 왜
왜인들은 거리에서 리수(里數)를 알지 못하여, 거리를 단지 날수로 계산한다.
(이인 부지 리수, 단계 이일.
국경, 동서5월행, 남북3월행. 각지어해, 기지세, 동고서하.
夷人不知里數, 但計以日.
國境,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各至於海. 其地勢, 東高西下. )
@삼국지 위지 왜
[대마도 남쪽으로 2칸 ~ 3칸의 바다를 건넌 후,]
말로국에서 동남쪽으로 육상으로 5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른다.
(동남 륙행 오백리, 지이도국.
東南陸行五百里, 到伊都國)
이도국에서 동남쪽으로 1백리를 가면 노국(奴國)인데, 이 나라에는 2만여 호가 있다.
(동남 지노국 백리, 관왈시마고 부와비노모리, 유이만여호.
東南至奴國百里, 官曰兕馬觚,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 )
노국에서 동쪽으로 1백리를 가면 불미국(不彌國)인데, 이 나라에는 1천여 가(家)가 있다.
(동행 지불이국 백리, 관왈다모 부왈비노모리 유천여가.
東行至不彌國百里, 官曰多模, 副曰卑奴母離, 有千餘家.)
불미국에서 남쪽으로 바닷길로 20일을 가면 투마국(投馬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에는 5만여 호 정도가 있다.
(남지투마국 수행이십일, 관왈미미 부왈미미나리, 가오만여호.
南至投馬國, 水行二十日, 官曰彌彌, 副曰彌彌那利, 可五萬餘戶.)
투마국에서 남쪽으로 바닷길로 10일을 가고, 또 육상으로 1개월을 가면, 야마일국(邪馬壹國 야마대국)에 이르는데, 여왕(女王)이 도읍한 곳이다.
이 나라에는 7만여 호 정도가 있다.
(남지야마일국 여왕지소도 수행십일 륙행일월,
관유이지마 차왈미마승 차왈미마획지 차왈노가제, 가칠만여호.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삼국지 위지 기준으로는, 이도국에서 불미국까지 육로로써 7백리 쯤 즉, 7일을 이동합니다.
그후 불미국에서 투마국을 거쳐 야마대국까지 뱃길로 30일 걸립니다.
옛날 1일 이동거리를 일반적으로 1백리라고 인식합니다.
이도국의 서쪽 해안에서 이도국의 동쪽 해안까지 7일, 이도국의 동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 30일이고, 합치면 37일입니다.
즉, 큐슈의 서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 37일 거리입니다.
큐슈의 동쪽 해안에서 오사카까지는 30일 거리입니다.
이러한 값은 축자국 이길련박덕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서기
서기 659년 7월 3일 (제명왕 5년)
소금하 판합부련석포 및 대선하 진수련길상을 사신으로 당에 파견하였다.
도오(道奧)의 하이(蝦夷 *일본 동북방 숙신 계통) 남녀 두 명을 당나라왕에게 보였다.
이길련박덕의 기록(伊吉連博德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 천왕 시대에 소금하 판합부석포련 및 대산하 진수길상련 등이 탄 두 척의 배가 오당로(吳唐路)를 통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오당로(吳唐路) : 양자강 하류로 직행하여 횡단하는 경로. 산동을 경유하지 않음.)
기미년,
7월 3일에 난파의 삼진포(三津之浦)에서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축자의 육진포(六津之浦)에서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남쪽 해안에 있는 섬에 닿았다. 섬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다.
[9월] 14일 인시(寅時)에 [백제의 남쪽 섬을 출발하여] 두 척의 배가 나란히 큰바다(대해大海)로 나아갔다.
[*-> 이후, 2척의 배가 서로 함께 정10월 한달 동안 황해를 횡단 항해한다.]
[*즉, 9월 14일 백제 남쪽 섬 -> 정10월 한달 소요
-> 정황상, 정10월 15일 및 정10월 16일에 두 척의 배가 당나라 동쪽해안에 닿았다.]
(*판합부석포련의 배)
[정 10월] 15일 해가 질 무렵에 판합부석포련의 배가 갑작스럽게 역풍을 만나 남쪽 바다에 있는 섬에 표착하였다.
섬의 이름은 이가위(爾加委)라 한다. 그곳에서 섬사람에 의해 살해되었다. 동한장직아리마와 판합부련도적 등 5명이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고 도망쳐 괄주(括州 - 중국 동남해안)에 도착하였다. 주현의 관인이 낙양의 도읍으로 보내주었다.
(*진수길상련의 배)
[정 10월] 16일, 한밤중에 진수길상련의 배가 월주(越州) 회계현(會稽縣) 수안산(須岸山)에 도착하였다. 동북풍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정 10월] 23일, 여요현(餘姚縣 : 백제월주일 것임.)에 도착하였다. 타고 온 배와 여러 가지 비품을 그곳에 남겨 두었다.
윤10월 1일, 월주의 관청에 도착하였다. [*윤 10월 앞에 정 10월이 하나 있음.]
윤10월 15일, 역마를 타고 당나라의 수도(경京)에 들어갔다.
윤10월 29일, 말을 달려 낙양(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당나라왕이 낙양에 있었다.
(
추7월 병자 삭 무인, 견 소금하 판합부련석포 대선하 진수련길상, 사어 당국.
잉이 도오하이 남녀2인, 시당천자.
秋七月丙子朔戊寅, 遣小錦下坂合部連石布·大仙下津守連吉祥, 使於唐國.
仍以道奧蝦夷男女二人, 示唐天子
[ 이길련 박덕서 왈, 동천왕지세, 소금하 판합부석포련 대산하 진수길상련등 2선, 봉사 오당지로.
[伊吉連博德書曰, 同天皇之世, 小錦下坂合部石布連·大山下津守吉祥連等二船, 奉使吳唐之路.
이 기미년 7월 3일, 발자 난파 삼진지포,
8월 11일, 발자 축자 육진지포.
9월 13일, 행도 백제남반지도, 도명 무분명.
이 [9월] 14일 인시, 2선 상종, 방출 대해
以己未年七月三日, 發自難波三津之浦.
八月十一日, 發自筑紫六津之浦.
九月十三日, 行到百濟南畔之嶋. 嶋名毋分明.
以十四日寅時, 二船相從, 放出大海.
[10월] 15일 일입지시 [판합부]석포련선 횡조역풍 표도남해지도, 도명 이가위, 잉위도인소멸,
변 동한장직아리마 판합부련도적등 5인, 도승 도인지선 도도 괄주. 주현관인, 송도낙양지경.
十五日日入之時, 石布連船, 橫遭逆風, 漂到南海之嶋. 嶋名爾加委. 仍爲嶋人所滅.
便東漢長直阿利麻·坂合部連稻積等五人, 盜乘嶋人之船, 逃到括州. 州縣官人, 送到洛陽之京.
[10월] 16일 야반지시, [진수]길상련선 행도월주 회계현 수안산, 동북풍 풍태급.
입2일 행도 여요현, 소 승대선 급 제조도지물 류착피처.
十六日夜半之時, 吉祥連船, 行到越州會稽縣須岸山. 東北風. 風太急.
廿二日, 行到餘姚縣. 所乘大船及諸調度之物, 留着彼處.
윤10월 1일 행도월주지저,
[윤10월] 15일, 승역입경.
[윤10월] 입9일, 치도동경, 천자 재 동경.
潤十月一日, 行到越州之底.
十五日, 乘驛入京.
廿九日, 馳到東京. 天子在東京.)
@일본서기
서기 667년 11월 13일 (천지왕 6년),
웅진도독부의 사마(司馬) 법총 등이 [축자도독부에서] 일을 마치고 [웅진도독부로] 돌아갔다.
이때, [축자도독부의] 소산하 이길련박덕(伊吉連博德) 및 대을하 입신제석을 송사(送使)로 삼아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축자도독부는 백제 5도독부 중에서 금련도독부 혹은 덕안도독부에 해당할 것임.]
(
11월 정사 삭 을축, 백제진장 류인원, 견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상주국 사마 법총 등,
송 대산하 경부련석적 등 어 축자도독부.
十一月丁巳朔乙丑, 百濟鎭將劉仁願, 遣熊津都督府熊山縣令上柱國司馬法聰等,
送大山下境部連石積等於筑紫都督府.
기사, 사마 법총등 파귀, 이 소산하 이길련박덕 대을하 립신제석, 위 송사.
己巳, 司馬法聰等罷歸. 以小山下伊吉連博德·大乙下笠臣諸石, 爲送使.)
서기 659년에 축자국 사람 이길련박덕이 난파에서 당나라까지 사신을 수송합니다.
난파항에서 출발하여 큐슈 서북쪽 해안을 경유하여 백제 남쪽을 경유하여 양자강 하류로 갑니다.
이때에도, 난파항에서 출발하여 큐슈 서북쪽 해안까지, 7월 3일부터 ~ 8월 11일까지, 38일 소요됩니다.
따라서, 중국 사서와 야마대왕국 사서에서 공통적으로 큐슈 동쪽 해안 쯤에서 오사카 까지 30일 항해거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60년대에 조선이였다고 말하는게 왜곡. 대명=배달임. 1910부터 조선
1897년에 대한제국은
인정 못합니다.
해방후 1948년으로
봅니다.
저는 임나 일본부가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부지방에 발굴된 전방후원분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key hole tomb 로 검색해 보면 bbc 다큐멘터리로도 많이 다루어 지고 있고 야마토 정권의 고분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무덤이라고 합니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다음가는 그렇다면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도래인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규모의 문명 이라면 한반도에 분국을 세웠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일 쏘는 나라가 딱총쏘는 나라한태 항복했다는 말로 들리네요 ㅎ
돌대가리야... 한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가 있던 200년~600년은 일본이 건국되기전 고분시대라고 일본인들이 역사책에다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고 있다. 고분시대... ㅋㅋㅋ
일본이 한반도로 들어왔다면 고분시대가 아닌 일본의 대륙 정복기라고 써야 맞는데 그런 기록이 없어 왜냐고? 대륙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섬에다 분국을 만들고 대륙의 황제국에서 제후로 봉해져 그 분국들끼리 서로 패권다툼하고 살다가 황제국 백제가 멸망하니 이때다 하고 독립을 한 거지 그 게 바로 일본이란 나라야.
결정적으로 가야가 일본에 분국을 만들기 전에는 일본섬에는 말이 없었음. 말은 누가 탄다? 바로 북방 기마민족들이지. 전국토의 70%이상이 산지이고 길도 닦여있지 않던 미개척 불모지 한반도에서는 동서남북 이동을 위해 말을 탈 일이 거의 없지. 몽골과 만주에서 길러진 우수한 말들은 배를 이용해 한반도의 해안도시와 일본섬으로 공급이 되는 거지. 그래서 말이 일본으로 들어가게 된거야.
기마병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당시에 말도 없던 야마토가 한반도에 분국을 어떻게 세워? 소설을 써라 소설을 쯔쯔쯔
3세기 야마토정권이 있었다면, 7세기 일본국이 성립되므로, 정상적인 나라의 역사라면, 3세기 야마토시대, 7세기 일본시대라고 해야 합니다.
한국이 고려시대, 조선시대라고 하듯이 말이죠. 정상적인 왕조 국가라면 당연한 것입니다. 세계 공통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시대 구분은 고분시대, 아스카시대입니다.
그 이유가 야마토정권이 에도 없는 조작된 왕조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야마토시대, 일본시대라고 했다가 조작이 밝혀지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이라는 인덕왕릉 등 다 메이지 시대에 조작한 봉분 규모입니다.
일본은 7세기 말 신라의 지원으로 최초의 고대국가가 출범하기 전까지 도성/왕성도 없었습니다.
일본 학자도 인정하는 최초의 도성/왕성 유적이 후지와라교(등원경)입니다.
에 나오는 1~38대 왕까지는 조작이라 일본 중세 시대까지 제사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전방후원분 발굴을 하지 않습니다.
한반도계 유물이 줄줄이 출토되기 때문입니다.
대체 어떤 발굴된 전방후원분을 보시고 생각이 바뀌셨는지 궁금하네요?
알려주실 수 있나요?
7세기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겼는데 그 이전에 일본부?
그고분을 일본에서 발굴하다가 덮어버리고 입다물고 있는이유를 알고있나요?
선생님!~ 넘 존경합니다
그냥 선생님~ 좋아합니다~
선생님! 저도 함께 할겁니다. 혓직 공무뭔^^!!!!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