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마지막 영광, 사수 전투 [2차 고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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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27 янв 2025

Комментарии • 55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0

    자체 제작 영상이므로 오디오 품질이 좋지 않아 영상 후반에 잡음이 많이 섞여 죄송합니다.
    경험을 더 쌓으면서 적어도 오디오 품질 만큼은 불편함 없이 들으실 수 있도록 맞춰 보겠습니다.

    • @jin.24.
      @jin.24. Год назад +7

      내용에 집중하느라 잡음은 신경도 안 썼어요. 늘 양질의 내용이 담긴 영상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 @덕후나무늘보
      @덕후나무늘보 Год назад +2

      ​​@@jin.24.
      진짜로 음질은 신경도 못쓰고 내용에만 집중했죠
      그만큼 알찬 내용이라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2

      제 2차 고당전쟁을 .... 넷플릭스 시리즈로 드라마화 한다면 ...아마 대히트를 칠것이라 본다.

  • @jin.24.
    @jin.24. Год назад +10

    고수전쟁, 고당전쟁때 고구려가 보여준 전쟁수행능력은 진짜 대단하긴 합니다. 가끔 고구려에 반감을 품고 "고구려뽕에 왜 빠져있냐? 이게 다 민족사관이 만든 과장이다" 라고 말하는 몇몇 사람도 있는데, 당시 고구려 후계를 자처하는 발해, 고려가 등장한것만 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옛날에 존재했던 강대국의 계승성을 내세워 나라를 건국하는게 효과적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과한 국뽕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려치기하는것도 잘못된거 같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3

      저도 국뽕에는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고구려가 보였던 전쟁 역량에 대해서는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내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척박한 토지를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가 그 정도로 정복 활동을 벌이고, 너른 영역에서 영향권을 확장했으며, 머릿수로 승부하는 중국 세력에게 맞서 그렇게까지 엄청난 승리를 거두어 댔다는 건 충분히 국뽕의 소재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신라면-r9b
    @신라면-r9b Год назад +1

    진짜 너무 재밌어요ㅎㅎ 개인적으로 연개소문 못지않게 김유신 또한 진짜 레전드네요. 연개소문과 김유신의 만남이 있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해요ㅎㅎ 타임머신 타고 저 때로 가고싶어요ㅎㅎ

  • @덕후나무늘보
    @덕후나무늘보 Год назад

    이번에도 아주 흥미진진한 영상이네요
    2차 고구려 당나라의 전쟁과 1차 사수전투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여파가 이제야 맞물리는 느낌입니다
    그렇죠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를 놓친게 백제의 마지막 대규모 기회인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요인중 하나일수 있죠
    즉 이 전쟁은 고구려가 고구려의 위용을 드러내나 동시에 신라와 당나라의 숨 돌리기와 어쩌면 역사가 달나질수도 있었던 변곡점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재밌네요

  • @MiReukGungYe
    @MiReukGungYe Год назад +5

    고구려의 멸망은 뭐랄까... 한창때의 사내가 궂긴것같은 안타까움이 있는것 같습니다.
    물론 수나라 당나라를 막아내면서 국력이 쇠퇴한것이겠지만
    전성기와 견주어도 밀리지않는 강력함이 있던 시절이 고구려 말기인것 같다고 느낍니다.

    • @jin.24.
      @jin.24. Год назад

      오랜 전쟁으로 약화된것도 있지만 연개소문 정권 수립이 신의 한수였죠. 연개소문은 능력이라도 있어서 당을 막아내긴 했는데 연개소문이 집권하면서 귀족 180명 참살해버려서 고급인력이 씨가 말랐고 연씨 삼형제는 아버지 능력의 발끝도 못따라감. 태왕까지 죽여가며 만든 기형적인 독재체제 권력을 세 아들한테 나눠서 물려준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그냥 내전나라고 제사지낸거죠 ㅋㅋㅋ 연개소문 입장에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는데 연씨 삼형제 물려받은 이후엔 이게 당나라한테 신의 한수가 돼버림. 연남생이 자기 영지 당나라한테 갖다바쳐서 당나라는 평양까지 바로 밀고 들어올 수 있었고 왜 우리가 태왕과 고구려를 위해서 싸우는것도 아니고 연씨들의 권력을 위해 싸워야 하나며 고구려 내 회의감이 극도로 커졌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8

      말씀하신 비유가 참 와닿습니다.
      사실 멸망 직전의 고구려는 내분이 심했기에 힘을 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렇지, 아무리 나당 연합군이 위아래에서 동시 공격을 한다 해도 버티면서 이겨낼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개소문이 참 아쉽습니다. 영류왕 체제가 좀 더 이어졌더라면 고구려가 그 힘을 유지한 채로 더 수명을 연장해서 그 다음 중국 혼란기의 기회를 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2차 고당 전쟁에서 기겁을 한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아예 포기하다시피 합니다만, 끝없는 신라의 뽐뿌질과 더불어 연개소문 아들들의 극단적인 내분 때문에 이번엔 혹시? 하는 심정으로 나선 게 3차 고당 전쟁이었고, 그게 성공해 버리면서 고구려는 멸망했지요.

  • @jungbrain5989
    @jungbrain5989 Год назад +1

    고구려나 백제 두국가 모두 멸망당하기전 모습은 비슷하네요 백제도 귀족들과의 내분으로 제때 힘을 모으지 못해 망하고 고구려도 권력자들의 내분으로 망하고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게 내부의 적이라고 하는데 역사를 보면 새삼 이말이 진실인게 와닫는거 같습니다 이번영상도 최고네요 잘봤습니다 👍👍👍👍😊😊😊😊

  • @doongmang2460
    @doongmang2460 Год назад +1

    본인이 너무 유능한 나머지 오로지 자신만이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놓고 부족한 후대가 오판 혹은 실패하여 망국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이 마치 독일제국의 비스마르크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역사란 기록의 행간을 읽어나가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러한 역사의 매력을 역사멘터리님의 영상들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됩니다. 언제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항상 영상 잘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행간을 채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상상력에 의존해서 채우는 경우 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지만,
      주관의 개입이 심해지면서 억측을 자주 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상상력의 개입을 배제하고,
      최대한 사료의 기록 그 자체를 종합하여 1차적인 추정만 하려고 합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억측을 하게 될 우려는 감소하지만 아무래도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데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고,
      그 과정에 있어서 제 방식을 공감해 주시는 분들께 최대한 좋은 영상을 소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 부탁드립니다.

  • @miya0714
    @miya0714 Год назад +1

    감사합니다 저또한 고구려멸망 너무 아쉽죠 그때 을지문덕 장군께서 중원으로가 영토를 수복해야된다는게 맞는것 같은데 넘 아쉬워요 역사에 만약이 없으니까 왈가왈부 못하지만 넘아쉽 😢

  • @shanestory3879
    @shanestory3879 Год назад

    연개소문 그는 실로 전쟁의 신이었군요. 오래 살든지 아님 살 생전에 자식 교육을 똑바로 시켰든지 해야지... 이 사단을 만들어,,,, ㅠㅠㅠ 아들들이 사이가 좋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 아쉽네요. 이렇게 좋은 영상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굉장히 흥미롭네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연개소문은 전쟁과 외교에 있어서는 정말 엄청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자식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아버지의 유능함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사실 왜 아버지만큼 잘나지 못했냐고 비난하기는 또 애매하지요.
      그가 정치적으로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고구려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기에 결국 고구려가 망국으로 향하게 되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게 아쉽습니다. 그 엄청난 역량을 다른 시기에 다른 기회에 활용했다면 훨씬 더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면 전성기를 지나 점점 쇠약해지던 고구려에 내분도 심해지는 마당에 연개소문 정도의 인물이 있었기에 그나마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사르면서 최대한 버텨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상 잘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도 유익하다고 느끼실 수 있는 영상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miya0714
    @miya0714 Год назад

    현재 내 상황에 잘대입시켜 거울 삼을수있게 무료배포 외길만 걸어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유이쾁니다 😅

  • @ONE2LOVE3
    @ONE2LOVE3 Год назад +2

    정말 신성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방어에 탁월했나봐요 그리고 평양성은 요동성처럼 평지성이고 내외성이라고 들었는데 방어력이 대박이네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신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요동 방어선의 맨 끝자락에 위치한 알짜배기 성이었습니다.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려고 하는 적을 요격해야 하는 임무도 있었고, 요동 방어선의 다른 성들이 공격 받으면 지원군을 파견하는 역할도 하는 등 꽤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정명진은 요동 방어선 중앙 돌파보다는 우회하면서 가장 끝에 있는 신성을 공격했는데 아마 우회할 경우 신성의 병력에게 후방을 공격 당할까 두려워 선제적으로 공격해서 위축시키든가 가능하면 점령하든가 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전사하면서 신성이 자기 무덤이 되어 버렸지요.
      평양성의 경우 4중 중첩 구조로 되어 있어서 방어에 꽤나 신경 쓴 성이었으므로 수나라의 침략 당시에도 내호아의 침입을 견딜 수 있었고, 소정방의 포위에도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은석이-c1j
    @은석이-c1j Год назад +3

    우리나라 국호 Korean 코리아가 고구려에서 유래되었을정도로
    우리나라 사람치고 고구려 뽕에 취하는것도 이해갑니다
    특히 백제나 신라는 군사적으로 큰 업적이 없는데 고구려는 남진으로 영토 확장에
    중원에도 쳐들어가서 당나라를 굴복시키기도 하고 그 이전 수나라도 우리 홈그라운드에서 싸운거지만 사실상 자멸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시련을 딛고 살아남았는지 알수있는 나라죠.....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3

      말씀하셨던 내용 중 고구려가 당나라의 세력권까지 비집고 들어가면서 자신의 영향권을 확장하고 압박했던 것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함락시켰다는 얘기는 유사역사학에서만 주장하는 바입니다만,
      (연개소문이 양만춘과 추정국 두 장수를 거느리고 장안으로 들어가서 당나라의 항복을 받아 냈다는 얘기가 이른바 류 사서에 나오기는 합니다.)
      적어도 만리장성 너머까지 침투해서 당나라 동북방 영토까지도 활동 거점을 확보했었고,
      내몽골 지역에서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전진 기지들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함을 보였던 국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박지현-h4o3r
    @박지현-h4o3r 2 месяца назад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 부대를 살려줘서 3차 침략때 당나라가 30~40만으로 연남건이 지휘하는 평양성 포위하고 평양성이 한달버티진 문무왕이 친정하여서 고구려를 멸망시키죠 이때 김유신 장군이 계책을 내었다고 하죠 역시 김유신 장군님의 혜안은

  • @swiftboyinsw
    @swiftboyinsw Год назад +2

    너무 재밌게 봤습니다. 고대사는 사료가 너무 적어서 아쉽네요. 고구려의 군사 능력과 외교적 능력, 그 당시 대외정책 등 궁금한 게 더 많아지는 영상이었네요.
    특히 1차 사수 전투는 엄청났다는 걸 또 배워갑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3

      재미있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수성전인 안시성 전투가 가장 유명하기는 합니다만,
      사수전투의 경우에는 성이 아닌 강을 배경으로 해서 맞붙은 전투이기에 고구려군의 기동성과 회전 능력이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1차와 3차 고당 전쟁까지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swiftboyinsw
      @swiftboyinsw Год назад

      @@Hmentary 오우 기대됩니다!
      그렇네요 대회전에서는 주필산 전투처럼 패전 이야기는 조금 들어봤는데, 기가막히게 성과를 낸 회전들도 꽤 있는 것 보니 고구려도 기동성이나 지휘력 면에서 참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주필산 전투는 남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대패가 맞습니다만,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패하긴 했되 치명적인 대패를 하고 15만 병력이 모두 와해되는 수준의 패배는 절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각에서 제기되는 설과 같이 주필산 전투 이후의 잔여 고구려 병력이 해당 전쟁의 주인공이고, 안시성은 그냥 버티기만 했을 뿐이라는 주장까지는 너무 나간 이야기 같고요.
      다만 주필산 전투 이후 여전히 야전에 남아 활동하던 고구려군의 숫자와 의미는 상당했을 것이고, 그게 어떻게든 안시성의 파인 플레이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주필산 전투에 대해 다룰 수 있도록 준비해 보겠습니다.

    • @swiftboyinsw
      @swiftboyinsw Год назад

      @@Hmentary 오호 감사합니당

  • @까마귀용
    @까마귀용 Год назад +3

    대고구려!

  • @hong-ya
    @hong-ya Год назад

    2차 고당전쟁 당시 보여준 연개소문의 개쩌는 컨트롤은 지금봐도 대단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구려 포위망을 뚫고 당군을 지원하러간 김유신도 대단한것 같습니다.
    ※ 썸네일을 좀 바꿔보시는게 어떨까요?
    평소 보던 역사멘터리가 아닌줄 알았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커뮤니티 공지에 올렸다시피 제가 자체 제작하여 영상을 업로드하다 보니 썸네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익숙치 않아 그냥 텍스트만 올렸습니다.
      올려주신 댓글 보고 썸네일을 나름 수정해 보긴 했습니다만, 그저 제 똥손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틈나는 대로 편집 관련 공부를 해서 자체 제작한 영상 업로드 시에도 최대한 보시기에 불편함 없도록 하겠습니다.

  • @ruvoluble
    @ruvoluble Год назад

    고구려 연구자가 쓴 '지도로 보는 한국사'를 보면 신라 영토의 북방 한계를 한강 유역(북한강)정도로 표시한 게 나와 있어요. 나도 그 책의 지도가 맞다고 생각하는 게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모든 지역을 신라가 계속 지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영상의 지도는 몇 십 년 전 내 학창시절의 역사부도와 거의 동일해서 나름 근거가 있지만요.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2

      이 영상의 지도는 일부러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담은 지도를 수록했습니다. 그 외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저는 가급적 교과서에 나오는 지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설이라는 게 사실 연구자들 중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지 진리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학문적으로 정설이라는 게 지니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연구자들은 각기 다른 개인만의 견해를 갖고 있는데 그 견해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타당한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추론으로 인정 받아야 비로소 정설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학계의 정설이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저의 기본적 관점과는 별개로 저 역시 삼국 시대 신라 북방 영토의 한계는 북한강 정도가 현실적으로 맞다고 보는 중입니다. 진흥왕 때 치고올라간 건 신라가 하이런을 찍었을 때 잠시의 활동이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점유하고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격해서 도달했다는 걸 영토로 간주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고구려는 내몽골까지도 지배했다는 식으로 지도에 색칠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으니까요.

    • @ruvoluble
      @ruvoluble Год назад

      @@Hmentary 헉!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의 실시간 대댓글을...아무튼 감사합니다.

  • @Werner4voss
    @Werner4voss Год назад

    연개소문이 대단한게...전투에서 군대를 부리는 용병뿐만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읽는 대전략도 너무 뛰어남. 1차 고당 전쟁 때도 이세민이 친정하고 있는걸 파악하자마자 바로 15만 군대로 (비록 졌지만) 과감한 도박성 참수 작전을 걸어온것도 그렇고, 2차 고당전쟁 전 당나라가 압록강이랑 요동에서 깽판치며 소모전 걸어오자 요서와 요북으로 진격해서 전장을 고구려 외지로 옮겨 소모전으로 국토가 유린되는 걸 막는 판단...역적이지만 인물은 인물인거 같음 ㅇㅇ 괜히 나중에 조선 인조가 연개소문의 재주가 조조에 뒤지지 않는다고 했던게 아님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능력치 하나만 놓고 보자면 정말이지 탈인간급이 연개소문 같습니다.
      전쟁 능력 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기가 막히게 유리한 상황 조성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진짜 대단한 인재였지요.
      다만 내부 정치 분야에서는 독재 정권 수립은 잘했지만, 다른 정치 세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긴 안목에서 국가의 장기 플랜을 설계하는 건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게 연개소문의 가장 큰 약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장기플랜?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요.
      역사적으로 .... 중원의 통일제국을 상대로 대전쟁 두번을 치러내고...
      나라 안밖의 군사.외교. 정치까지 ...모두 다 연개소문 처럼 모두 다 운명적으로 껴안고 책임과 컨트럴 한 이는 단 1명도 없을것이요.
      선대의 광개토왕도....후대에 ....세종도 ..
      이순신도 ....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한번 보시오.
      내부 정치하나 만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연개소문은 운명적으로 떠안은 엄청난 일들을 할만큼 다 한 인물이지라.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인조 따위가.... 연개소문에 조조 비교 평가를 운운 한다는게 어불성설

  • @dragon9947
    @dragon9947 11 месяцев назад +1

    언제 당나라가 북경(유주)에 까지 진출했나?
    당나라 수도는 어디인지 알고 역사 강의하시나요?
    이 지도는 동북공정지도라고 보여집니다. 중공의 동북공정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런 지도를 사용해선 안될 것.

    • @health-korea
      @health-korea 10 месяцев назад +1

      ㅋㅋ 진짜 어딜가나 영토충 환빠 쥰내많아서 속이 뒤집어진다

  • @도쿄의아침
    @도쿄의아침 Год назад

    연개소문의 군재는 당대 최강이기는 하나 김유신이 약간 저평가 되어있는 거 같습니다. 나당전쟁 때에도 건강해서 직접 활약했었으면 조금 더 평가가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네요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ㅡ 662년 ....역사에 기리 남을 ..
    연개소문에 사수대첩을 기억하는 이는 ..
    오늘날 거의 없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사실 우리 역사에서 정말 두고두고 기억될 엄청난 전투인데 의외로 사수대첩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쉽습니다.

  • @학윤이-w9m
    @학윤이-w9m Год назад +1

    약한 나라라 하여 신라보고 알아서 찌그러져 있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 아쉽습니다

    • @Hmentary
      @Hmentary  Год назад +1

      신라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 길 찾은 것이니 후대인들의 시각에서 비난할 수도 없고, 다만 결과론적으로는 아쉬운 상황이 되었지요.

  • @박지현-h4o3r
    @박지현-h4o3r 2 месяца назад

    고구려군이 1만이상 입니다. 당나라에 소정방군이 물러나고 방효때의 부대를 격파한 고구려군의 다음타곗은 보급위주의 신라군 이었습니다.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하지만 ...신라는 더이상 통수를 칠 나라가 없자..
    신라는 망하고 말앗다.
    국가간의 신뢰를 최후에 연명줄로 팔앗으니 .... 시간 연명에는 성공햇겟지만 근본문제가 해결될수는 없엇다.

  • @박정명-r3j
    @박정명-r3j Год назад

    사수대첩... 정말 한국사 탑5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한 전투죠... 이 전투가 끝나고 고구려가 내분으로 얼마안가 멸망해서 잘알려지지 않았을뿐이지 진짜 연개소문 개인의 역량이 거대제국 당나라를 짓밟아 버렸으니 진짜 개인의 역량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개소문 이 신라 김유신 처럼 오래 장수했음 저 삼국의 지형이 어떻게 돌아갔으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덕후나무늘보
    @덕후나무늘보 Год назад

    연개소문이 효웅으로 표현되고 김유신이 대태각간에 올려지다 못해 왕으로 추존될 정도니
    그 두명다 뛰어난 인물인데 그 뒤의 영항이 달랐던것 뿐이죠
    근데 고구려를 더 좋아 하지만 그렇다고 신라에 대한 기존의 외교에 대한 반박을 하자면
    흔히 신라를 외세 끌여들이고, 배신하고, 옹졸한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많은데
    우선 외세는 분명 아쉽긴 하지만 그 외세를 끝끝내 몰아낸것도 신라고
    외교는 사람들이 잘 간과하는게 신라는 늘 먼저 손을 잡은 상대로부터 먼저 배신을 당하죠
    고구려하고 손잡고 간신히 위기를 넘기나 갑질만 당하고
    백제하고 손잡으니 기고만장해서 낮추어 보면서 신라른 백제의 속국이라 말하지를 않나
    끝에는 당나라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취리산 회맹을 강요하질 않나 점입가경으로 계림도독부를 설치해 선을 넘지 않나
    신라는 이런 흐름을 전부 타파한 역전의 국가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번도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 진짜 임전무퇴의 나라죠

  • @부산시민-p2s
    @부산시민-p2s Год назад

    ㅡ 한민족 4000년 전체를 아울러 봐도....
    연개소문 만큼 ..... 당대에 정치.외교.군사 해당 문제 3박자를 모두 당대에 치열하게 겪으며... 어느 한가지만 결여되도 운명적 패배를 동시에 겪을수 밖에 없엇고... 이과정을 혹독하게 치러내고 성공적으로 끌어냔 인물은 단 없엇다.
    광개토왕처럼 군주도 아니엿고..
    을지문덕처럼 군왕이 협조하지도 않앗다.
    할수없이 역성 반정으로 군권을 장악한 것은 필연이라고 본다.
    후대에 고려 현종은 정치력 한가지로 당대를 끌어 나갓고..
    공민왕도 절반의 개혁? 을 성공하엿을까 ?
    조선의 세종이 현재 제 1의 성군으로 묘사되지만 .. 당대에 ..
    7세기 중엽 고구려에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고 위급한 처지는 아니엿다.
    내치.외치에만 성공햇다고 본다.
    이후에 이순신도 역사적 인물로 추대되는 것은 인종하나....그는 당면에 전쟁에만 성공적으로 수 행할수 잇엇다.
    하지만
    당대에 연개소문 앞에 당면해 잇던 상황은 ...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모두 절대절명 사실상 최악에 상황을 물려 벋엇더고 본다.
    정치는 당시 친당파들이 득세햇고..
    영류왕과는 극도의 관게.
    오늘날의 정치 상황을 그냥 떠올리면 될거다.
    외교는 앞서 영류왕의 외교를 보면 노답이 절로 나온다
    오랜 전쟁으로 경제사정도 매우 녹록차 않앗을것은 당연....
    군사적으로도 당과 신라. 여터의 북방민족들과의 복잡한 관계와 함쎄.....
    어느 하나 덩대 연개소문에게 ..
    유리한 상황을 물려받은 것이 없다고 본다.
    후대에 어느 군왕이 .....
    어떤 장수가 이런 내우외환의 복잡한 상황을 복합적으로 떠안고 ....
    당대에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간이가 있엇을까?
    그애게 유일한 오점이라면 ..후계 문제 엿는데..... 다만 이점이 너무 아쉬울 뿐이다.
    만약 .. 연개소문이 10년 만 더 수명을 이어갓다면 .. 한반도에 역사는 완존히 달라졋을 것이다 . 생각해 본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