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믿으니 지혀의사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생각 이 있고 분별이 있기에 사람 인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깨어남 ? 선교사들의 도움 으로부터 교육 문화 의료 모두가 시작 된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조들의 기도와 노력의 ?... 소중히 따라야 할 피 흘려 나라지킨 선열들 의 뜻을 소중히 알고 뺏겠다고 전 세계의 날강도를 우린 바로 옆에 ? 힘실어주는 그 물질은 누구것인지 크게 잘못된 것 임이 ? 오늘은 무얼 쏘았네~ 구경하며 전쟁공포로 몰아느은 정치를 ? 탈북하신분들 남한이 라도 잘 살기에 올 곳이 있었으니 다행 어쩔 뻔 했느냐는 통탄의 말 들을때 가슴 져미는 ? 지켜냅시다 지키는 방법 그들이 권력 잡고 그들의 사생활 어땠는지 그리고 지금은 영원히 그리살겠다고 호언 장담 온 국민을 선동 소리치게 만든 우파랍시고 표 받았던 지난 국의원들 죄는 더 크다고 이젠 바로세우잖음 북 보다 더 아주 ? 지금 보세요
꼭 24년 전의 다큐를 보면서 다시금 느낌니다. 김구가 국제정세와 세상울 바라보는 안목도 없었거니와 지혜도 없었습니다. 애국심은 있었으나 민족을 이끌 지도역량은 절대 부족 했슴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이었고. 설령 김구의 통일국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운이 하늘이 돕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슴을 실감합니다. 더욱 사랑해야 할 대한민국 입니다.
@@jyang00김구의 통일은 공산주의 통일이며 그는 기회주의자 일 뿐입니다. 그는 역사에 다시없을 살인마이며 그의 살인행위만해도 공개된건만 50여건이 넘습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은 그의 처참한 살인행위도 미화하더군요. 그는 그냥 살인자가아니라 살인마 입니다. 존경의 대상이 있다면 그에 대해 객관적이고 심도깊게 연구하시고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민족 분단이 가슴아픈 일이지만 김일성은 사회주의 통일의 야망을 위해 소련을 등에 지고 민족해방 운동을 펼쳤기에 불손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이승만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세계 정세를 알았기에 사회주의 통일에서 자유대한민국을 잉태케 하였고 지금의 자유선진대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존경해야 할 이유입니다!!
웃기네. 이승만 보도연맹 4.3 학살자 반민특위 해산으로 친일파 청산 불가능하게 만듦 미국에서 사기행각으로 경찰 조사 받음 임시정부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 부정선거로 하야한 대통령인데 뭘 세계정세를 잘 봐요? 진짜 학살자 좋으면 핑계대지 말고 북한이나 일본으로 꺼지세요!!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막상 북에가서 측근들에게는 남한의 군사력이 북의 군사력에 너무 열세라 북이 침공하면 북에게 먹힐 것이라 판단하고 북에 김일성에게는 아부하고 남으로 돌아와서는 북이 남을 절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김구의 모호한 기회주의적 발상이 그가 무장독립투쟁에서 민초들에게 폭탄을 쥐어주고 김구자신은 빠지는 그러한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치하포 살인사건도 열등감에 의한 살인 일본상인이 본인보다 국밥을 먼저 받았다고 죽임..알고보니 일본인이 먼저 주문함.. 김일성에게 간 이유도 이승만 대통령애 대한 열등감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지 김일성 오른손 성시백이 꼬셨을때 공산통일하고 남한을 통치하게 해준다 하니 홀랑 넘어감..근데 이주장은 김대중 문재인이 말한 고려연방제와 일맥상통~!
일부의 주장처럼 남북한 단일선거를 했다고 합시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 당시는 주변 국가들의 영향에 따라, 또 일제시대 때 민족주의 물결에 따라, 좌익세력과 그와 유사한 군소정당들이 다수였습니다. 단일선거가 일어났다면, 그 결과는 선거를 통해 좌익세력의 집권하였음이 명확했습니다. 민주선거를 통한 공산정권의 수립,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맞습니다. 김구가 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이미 북한은 공산주의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한달후 5월달에 치뤄질 선거에 자신의 입지를 내세우기 위한 무모한 행동이었지요. 그당시 남한은 박헌영 남로당에 의해 제주에서는 4.3폭동이 일어나 구석구석이 공산주의 남로당 좌파로 크나큰 혼란한 무정부 상태였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남한을 먹으려는 김일성의 계략을 알고 선거를 준비한 상황이었지요.
맞습니다. 김구가 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이미 북한은 공산주의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한달후 5월달에 치뤄질 선거에 자신의 입지를 내세우기 위한 무모한 행동이었지요. 그당시 남한은 박헌영 남로당에 의해 제주에서는 4.3폭동이 일어나 구석구석이 공산주의 남로당 좌파로 크나큰 혼란한 무정부 상태였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남한을 먹으려는 김일성의 계략을 알고 선거를 준비한 상황이었지요.
@@금숙-m7p 학살자나 좋아하긴. 당당하게 보도 연맹 말도 못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쓰레기들. 지우기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우리의 힘으로 해방도 못한 처지에 - 너무도 푸른 꿈을 꾸신~ 김구선생! 국제정치경제의 살벌함을 모르시고~ 감성적으로 ‘민족’만 내세운 당시 지도자상의 한모습! 지금도~ 이런 감성적인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하지요. ㅠ 자주독립과 통일을 논하려면 - 국력이 우선되어야합니다!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ㅎㅎㅎㅎ우리 힘으로 독립못했으니 민족주의를 주장하신 것이재.... 국제정치경제는 또 무슨 소리고 ㅎㅎㅎ감성은 무슨.....에끼,,,이 사람아......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을 한번 이라도 읽어봤으면 이리 댓글을 달지는 않았을터인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을 전혀 이해못하니 이딴 말이나 하고 ㅋㅋㅋㅋㅋ
이용을 당해요? 이용을 하려다가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김구는 공산사회주자들의 속셈을 경시했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당시 김일성 말고는 모두 몰랐겠죠. 공산주의!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받는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분배가 균등분배가 아니라 김일성 일당이 다 차지하고 아주 조금 떼어서 똑 같이 나눠줘 김일성 일당 외에는 모두가 균등하게 가난하게 분배해주기는 했죠.
저의 소견으로는 김구 씨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기에는 맞지않는데 국내 지지세를 믿고 국제정치에 관한 지식도 없이 그때 의 국제 상황에는 맞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분은 애국심 만은 있으나 그는 스탈린이 얼마나 slicky 한지는 몰랐을 것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사람도 아니고 구루지아 사람이었다
1948년 7월 11일 김구는 유어만 공사를 만나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를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 김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도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30일 4개 항으로 구성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해서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것이라고 단언했음. 그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였다는거것임.
@@jonathanlee8792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jonathanlee8792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김구 유어만 대화록이 공개되기 전에 만들어졌나보네. 김구는 북한에서 강력한 군대를 보았고 남한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니 남한단독 정부눈 무너질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은 남쪽에 알리지 않았다. 위선적인 부분이다. 거기에다가 국제정세를 보지 못하고 민족만 부르짖었던 좁은 그릇.. 이승만이 북괴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이 얼마나 천운인지…
저는 대학을 55년 전에 졸업한 사람 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김구 씨를 존경 하지않았읍니다 내 눈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애국자로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애국을 하기는 했으나 완전한 애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를 이끌어갈 자질이 없었다 사회주의 색채는 이승만 과는 자질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이 독립자금으로 하와이에서 호의 호식했다라는 인간들은 이승만대통령이 왜 미국적을 취득해 편히 살지않았을까... 서재필박사처럼. 이박사는 미국최상위의 계층에 속할수 있는 자격을 갖췄는데.. 더구나 윌슨대통령이 지도교수일 정도의 강력한 인맥도 있었는데. 이박사는 이광수의 백범일지 같은 글로 포장안된 순수 애국자였다..
김구 선생의 행보 이해하지만...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힘의 크기를 김구선생은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음 그나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준 것이라 생각함. 한편, 이승만의 국제 외교 혜안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수립한 것임. 이제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숙제는 우리가 이루어야겠지요.
살인자에 도적질에 강도전과 인 김구가 무슨통일을 염원했다고 존경합답니까? 역사공부를 전교조 에 듣다보니 교육이 잘 안된것 같습니다 김구 이자는 그냥 살인자 도적질 쟁이예요 당시소비에트연방 과 김일성이 앞세운 허수아비에 불과 해요. 얼굴 생긴거 보세요 꼭 도적늠 같잉생겼자나요 살인도적질만 했을까요? 그외 숱한 나쁜짓을 조선인에게 저질렀어요
소비에트 연방과 김일성 하수인으로 본인의 야욕을 위해. 남한을 공산주의화 시키는데. 일조한 사람을 존경이라니요? 북한같으면 저런자는. 부관참시 대상입니다 .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활동하고 있는 민주당 이나 문재인 같은 간첩들이 김구 김원봉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우상화 시키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는거겠죠 이승만 은 아예 지우려고 지금도 난리랍니다 문재인 부친 노무현 부친 검색만 해도 행적들이 적나라 하게 나옵니다
김구는 기회주의자 사기꾼이라는 것을 건국전쟁의, 소련기밀 문서를 보면 알게 될것이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 앞에서, 남한체제를 북한체제로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데 도장을 찍고와서, 중국대사에게 남한은 북한군대에게 점령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 문서를 보면, 김구는 기회주의자 사기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겠더라.. 김구는 개야..
좀 공부 좀 해야겠네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지지를 받은거고 민족주의자들 대다수는 그냥 일본에 굴복한 상태였음 해방 당시 식민지 조선의 거두가 사회민주주의자인 여운형이었고 그의 뜻대로라면 건준이 나라를 세웠으면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건설 되었겠지
골이 띵하지요. 사회주의 사회가 되었을까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독재국가가 한반도 전역에 성립되지않았을까요? 소련은 러시아 대위였던 김일성 더 좋았겠지요. 말안듣는 먹물, 민족주의자인.'여운형, 김구보다는 요. 2023년 북조선 아사자 300만, 정치수용소 수용자 150만..굶주림..고문. 시체의 산..인권이란 단어조차 생소한 탈북자들의 증언..
@@유수윤-m4o 북유럽 좋아한다. 죄다 환상에 빠져있는데 가장 큰 착각: 스탈린이 어디 니들 맘대로 하게해 둔대? 당시 한반도는 스탈린이 속내 공개안해서 그렇지 뛰어봤자 부처님 아니 스탈린 손바닥 안이었다 그말이야. 신탁이니 반탁이니 단독이니 공동이니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이딴건 스탈린이 봤을때 "놀고있네 허허. 내가 가두리 양식장 한다고 니들이 대양에 나와 몸푸는줄 알지 이 피래미들아." 였어. 김영삼시절 러시아가 준 당시 스탈린과 박헌영 김일성 회담 극비해금문서부터 읽어보고 얘기해. 박, 김이 스탈린 앞에서 얼마나 저자세인지, 마오쩌뚱한테도 강압적으로 명령질. (니들이 북한 도와. 우린 뒤로 숨는다.) 스탈린의 계획은 오직 하나, 전세계의 스탈린식 공산화였고 (이건 그냥 전체주의) 그걸 위해 서유럽부터 먹을지 동양으로 일단 주의를 분산시킬지 고민했으며 동아시아에 코민테른 세워 최대한 "평화롭게" 지들 스스로 속아 소련체제로 걸어들어와 흡수하고자 하였고 그 유일한 걸림돌은 이를 간파하고 2차대전 종전과 동시에 즉시 컨테인먼트 전략을 수립한 미국이었으나 여전히 프로파간다나 모든 면에서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술수와 매력은 미국보다 몇수 위였고 (지주, 자본가 죽이고 토지, 공장 나눠줘서 농민, 근로자 천국만든다는게 너무 당연한거아냐. 당장 요새도 우리집 아줌마 하시는 말씀 "우리같은 어짜피 가진거 없고 잃을것 없는 사람이야 나라가 확 어찌되어 물구나무 서면야 좋죠.") 특히 문맹율 70-80%였던 신생개도국 한반도는 그냥 두면 스스로 알아서 스탈린품에 안기게 되어있었다고 본거야. 사회주의? 이건 공산주의조차도 아냐. 그냥 스탈린 전체주의야. 스탈린은 딱 그것만 용인한거야. 새파란 김일성이 산전수전 다 겪은 지식인 박헌영을 죽일수 있었던 이유도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무조건 자기명령이라면 절대복종하고 별 생각이 없이 단순한 사실상의 노비였으나 박헌영은 사상적 철학적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야. 김일성이 지맘대로 박헌영 죽일수있었던게 아냐. 백이면 백 스탈린 결제요 명령이야. 즉 당시엔 결국 딱 2체제로 수렴하게 결론은 이미 나있었던거야 - 스탈린의 위성이 되거나 (동유럽) 아니면 미국의 우산으로 들어가거나. 그 이분법 줄서기가 바로 냉전이라는 체제야. 여기서 어영부영 눈치코치 없이 "어이 주모, 우리 나름 도시락 싸왔으니 주문 안할께요" 했다간 철퇴 날라오는거야. 미국 우산 없이 스탈린 피할 방법은 없었고 미국은 소련과 달리 여론에게 꼼짝 못하는 민주국가였기에 중국이건 동유럽이건 한반도건 어디건 마음대로 파병해서 소련에 맞서싸울 여건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1945-1949 핵을 가진 유일한 국가였음에도 불구 세계의 절반이 스탈린 수중에 넘어가는걸 보고만 있었던 바보같은 나라야. 625는 가두리 양식장 뒀더니 왠 미국출신이 나타나 단독선거니 뭐니 그물 끊어내 저절로 자기 품에 들어올 공산이 사라질거 같다는 스탈린의 불안과 김일성의 부추김 (당시 남한은 빨치산과 프락치로 전쟁없이 승부보려 했었으나 이승만은 그것도 간파하고 이들의 씨를 말리기 시작. 만약 여순반란 등 빨치산을 그냥 뒀으면 결국 625때 후방교란으로 적화되었을터. 군대조차 빨치산이 숨어있어 적화 저지를 위해 이승만은 유일하게 총을 다룰수 있는 반공세력 일제시대 경찰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는데 이걸 노려 북쪽에선 집요하게 이승만이 친일이니 토착왜구니 공격해댐) 또 스탈린의 야금야금 세계정복 잠식을 더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는 미국과 미국최고 관료들에게조차 거의 TA 격인 이승만의 절절한 미국의 복음주의에 대한 호소가 맞아떨어져 그해 1월까지만 해도 애치슨라인 동해에 긋고 등돌렸던 미국이 이틀만에 개입하자 스탈린은 먹던 후식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와버릴 정도로 놀람. 결론적으로 한반도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사실상 스탈린 외에 없었으나 그걸 어디서 미국물 먹은 이상한 노인네가 서양색시 데리고 나타나 남한 단독선거로 인위적으로 억지로 비틀어 막아버리자 (공동선거하면 누가 니와도 무조건 김일성 당선수순) 이에 격분한 스탈린이 처음엔 여순반란, 4.3.사건 등 빨치산부대 통해 양민들 꼬시고 선동하여 어찌해보려다 또 이를 간파한 이승만이 빨치산 소탕에 들어가고 국회의 사실상 공산당 해산시키자 쳐들어온 사건이 625, 그러다가 이게 너무 길어지고 희생이 커서 미국은 한반도 포기하려고 이승만에게 니들 영구중립국 안해볼래 그거 참 좋은건데 어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우리가 일본에서 지켜보다 니들 침공 당하면 즉시 도와주면 되잖아... 오만 감언이설러 꼬셔보지만 노인네 고집을 도저히 꺾을수가 없어 ("강물 폴짝 뛰어넘으면 중공이건 소련이건 한반도 땅인데 니들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며 지켜보겠다고라?") 하는수없이 미군생명을 볼모처럼 남한땅에 두게된게 바로 한미상호안보조약이고 이거 덕분에 푸에블로호, 도끼만행 등등 오만사건이 다 발발했어도 북중소의 625 같은 전면침공은 이뤄지지 않았음. 왜? 그건 미국에 전쟁선포와 동일해서임. 그래서 오늘도 빨치산들은 미군철수만 부르짖음. 끝.
@@유수윤-m4o 북유럽식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입니다 통일에 몰입해서 어떤 체제를 택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ᆢ 모두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분들에 대한 가치는 중요하나 이 나라의 독립을 왕정에서 처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준비를 한 지도자기 있었음에 더 가치두는 이유입니다
공산화도 지금의 김일성(김성주)같은 사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당시 미국의 횡포와 언행들을 본다면 그당시에 당신이라고 같은생각이 들것이오 다만 소련군에선 김일성을 뽑았고 스탈린은 후회했지만 이승만은 미국 친일 일본 세력들의 힘을 얻어 광복이후 초대대통령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한국입국금지였는데 미국장군 꼬셔서 일본들렸다가 초대대통령이라고 홍보하고 독립운동가는 찬밥되서 한국들어온것은 아는가 3.1절에 감사함은 아는가 독립운동가라 도와달라고 유학생화롸던 이승만에게 독립운동가 +대통령이라하고 미국에 알린린물이다 자기멋대로 1세대 하와이 연합된 동포동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후 이승만이 방문해서 연설후 대학졸업하고 독립자금 돈보내주면서 생활자금으로 쓰고 자기세력에 반기하는 사람들은 총살로 시위 했고 한국 대통령으로 인정안해주는 세력들이 생기려고 할때 총살 2명이나 명령해서 죽었다 그중 김구이다. 동네 형이며 아무리 뒷통수 쳐도 사석에서 형님하던 동생을 어찌 애국심은 없고 그냥 자기를위한 반역위선자같은 인물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니 하야만 2번 한 대통령이지 그리고 두명의 대통령이나왔지먼 병풍이었고 군 쿠대타 해서 박정희 전두환 쭈루룩 뭐 역사 외곡하는 일본인이랑 별다를게 없지않은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하신 김구선생님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로 치닫는 20세기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갇혀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좌익의 흐름에 이용당하고 결국에는 김일성에 포섭되어 소련의 남침야욕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관한 실패한 정치인으로 기억됩니다
김구는 댜양한 재덕을 갖춘게 전혀 아닙니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쓴 것이고 ( 물론 내용은 김구가 불러준 것이라 거짓이 엄청 많습니다), 여기 영상에 김구것처럼 보여주는 글씨도 남의 것이며, 김구는 국가를 지도할만한 지식도 경험도 안목도 없는 사람이었음. 김구는 북에 가서 이미 ㅃㄱ이들이 남침 준비를 다 마친 것을 다 알았고, 그 사실을 그 당시 한국에 주재했던 자유중국 대사에게만 알려 주었고 이 모든 것이 그 대사의 회고록에 그대로 있음. 김구는 자기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이승만 박사나, 남한의 누구에게도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를 알리지 않았고, 아마도 간첩들이 알려준대로 통일(ㅃㄱ이에 의한) 한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기대하고 기다렸던 기회주의자이며 역적.
맞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용당했지요..현실은 이상과 다른데..국제정세에 무지해서..공산주의의 거짓과 잔혹함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아서..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볼줄 알아야하고 현실을 감안해 정확한 판단력으로 국민을 이끌고 국가를 경영해야지 이상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김구의 선택은 틀렸다는걸 오늘의 역사가 증언해주지 않나요? 명백한 현재를 보면서 왜 자꾸 김구를 띄우려고 하는지 어떤 세력의 의도가 숨어있는지 의심이 듭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대한민국의 선택함이 지금의 나라가 있는것이다. 어려서부터 이승만대통령을 제일 존경했다. 매년도 강원도 화진포 이승만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한다. 어릴적부터 이승만대통령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 정신을 배웠다. 이화장 (서울 ) 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인해천경이라는 말씀을 참 좋아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김구는 김일성을 택하였으나 역시 총살로 죽었다. 역사의 왜곡 바로잡아야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dmson9729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dmson9729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김구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지나 사실 상 그건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한 구상이었다고 봅니다. 이미 당시 북한은 소련군정 , 남한은 미군정의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이죠. 애시당초 우리나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대로 해방 후 미군만 상주를 했어야만 바로 통일이 달성되었을 것인데.. 난데없이 소련이 꼽사리끼는 바람에 38도선으로 나누어져 버렸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자들이 어떠한지를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으니까.. 단독으로라도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정말 대단한 천재이지요..
김구는 자유민주주의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한반도가 갈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인민공화국이 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오로지 통일만 된다면 된다란 생각뿐이었다. 그때 적화통일이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가 어찌되었을지 너무나 끔찍하다. 이승만대통령이 있었기에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됨을 너무 감사하다.
김구는 과대포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남북 분단과정에서 김구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38선 남쪽지역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역에서도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고향이 공산주의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배우고 방송에서 보고 한 것처럼 임시정부의 활동이 대단했고 그 영향이 국내에까지 미쳤다면 해방국면에서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있었을까?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고 김일성은 소련군의 초급장교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상태였는데 그들에게 대적도 못 해 보고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별로 영향력이 없는 인물에 불과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해방국면에선 오히려 평양의 조만식선생님보다도 영향력이 없었던 것 같다.
김구가 애국자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구가 애국자고 독립운동을 했다니까 김구를 존경하는데, 김구는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몰랐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그는 자유대한독립을 원한 것이 아니고 조선독립을 원한 사람이다. 임시정부 사람중에 자유민주주를 아는 사람은 이승만 뿐이었다. 고종과 순종이 집권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황제가 되었다.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 집권했으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커녕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주민들처럼 김일성의 노예가 됐을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학위가 있을 정도로 국제정치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눈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한 배경으로 자기들 밥그릇 챙기는 능력없는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래서 갈등이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사람들이 너무도 무능했기에 친일파를 싫어했지만 할 수 없이 일제하에서 공무원 했던 사람들을 등용한 것이다. 이승만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증거는 이승만이 미국정부가 일본에서 조달한 일본에서 만든 일제 원조품을 거절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승만은 한반도의 독립은 물론 자유 대한민국 수립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는 걸 일아야 한다. 이승만이 미국 정부와 영리하게 담판을 잘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를 북한과 소련 중국으로부터 구해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법 연구회 출신 판사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 모른다. 그들은 선전선동이 전쟁행위의 전술이라는 걸 이해 못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좌익에게도 허용하는 것이다. 좌익에게 표현의 자유를 적용하는 판사놈들도 반역행위 협조죄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 공부는 드라마, 예능같은 방송을 보면서 배우면 절대 안됩니다
자료를 찾아보시고 고증이 잘 되어 있는 책으로 공부를하세요.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북한도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인민민주주의.
좌파 조작 책을 보면 안됩니다. 김구 북한이 그때 잘살고 군사력보고 중국 관리 한테 북한으로 흡수 통일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한 사람
양다리 전략을 함
오늘도 긴 시간 라이브 감사해요.. 근데, 아니 이준석은 반문으로 뭉친 미래통합당이 망한거 못 봤어요? 왜 그짓을 또 하는지 모르겠어요.. 으유 배지따라가는 인간들.. 크게 될 사람으로 봤었는데...제가 큰 실수했군요.
@@NPHGlobal맞습니다 인민 민주주의에 우리는 속으면 안됩니다 그간 똑같은 민주인줄알고 살았죠. 자유가 들어가야. 진정한 우리 민주입니다 저들이 교묘히 민주라는 단어이용해 국민을 속였죠
문씨는 교과서에도 자유를. 뺐다죠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기에 오늘의 김덕영 감독님을 쓰시는것같네요
사이비 기독교인들. 뇌 좀 챙기세요
만세 만만세
이승만전대통령 만세입니닷
@@장효완-r4c 그럼 북한으로 꺼져
그렇네요.
기도의 힘이 대단합니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믿으니 지혀의사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생각 이 있고 분별이 있기에 사람 인 것이지요 우리 민족의 깨어남 ?
선교사들의 도움 으로부터 교육 문화 의료 모두가 시작 된것입니다 바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조들의 기도와 노력의 ?...
소중히 따라야 할
피 흘려 나라지킨 선열들 의 뜻을 소중히 알고 뺏겠다고 전 세계의 날강도를 우린 바로 옆에 ? 힘실어주는 그 물질은
누구것인지 크게 잘못된 것 임이 ?
오늘은 무얼 쏘았네~
구경하며 전쟁공포로 몰아느은 정치를 ? 탈북하신분들 남한이 라도 잘 살기에 올 곳이 있었으니 다행 어쩔 뻔 했느냐는 통탄의 말 들을때 가슴 져미는 ?
지켜냅시다 지키는 방법 그들이 권력 잡고 그들의 사생활 어땠는지 그리고 지금은 영원히 그리살겠다고 호언 장담 온 국민을 선동 소리치게 만든 우파랍시고 표 받았던 지난 국의원들 죄는 더 크다고 이젠 바로세우잖음 북 보다 더 아주 ? 지금 보세요
꼭 24년 전의 다큐를 보면서 다시금 느낌니다.
김구가 국제정세와 세상울 바라보는 안목도 없었거니와 지혜도 없었습니다.
애국심은 있었으나 민족을 이끌 지도역량은 절대 부족 했슴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이었고.
설령 김구의 통일국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더라도 바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운이 하늘이 돕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슴을 실감합니다.
더욱 사랑해야 할 대한민국 입니다.
김구? 개버린ㅆㄲ와같음
소련의 스티코프 중장을 연석회의에서 쫒아내고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려는 김구 선생을 모독하지 마라
@@jyang00 민족끼리 통일?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 통일이다.
김구는 애국주의가 아니고 기회주의자 이며 살인마 입니다.
@@jyang00김구의 통일은 공산주의 통일이며 그는 기회주의자 일 뿐입니다.
그는 역사에 다시없을 살인마이며 그의 살인행위만해도 공개된건만 50여건이 넘습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은 그의
처참한 살인행위도 미화하더군요. 그는 그냥 살인자가아니라 살인마 입니다.
존경의 대상이 있다면 그에 대해 객관적이고 심도깊게 연구하시고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영화 건국전쟁을 보면
더 정확한 역사를 알게 될것입니다
역사를 꺼꾸로 이해했다는것은
부끄럽고 후회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만이
21세기 가장위대한
대통령이 라는게 사실입니다~~^^
그당시는 빨갱이 천지였는데 남한은 자유민주주의가 됐디는게 넘 기쁘네요 역시 이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소련 공산당 따랐으면 우리도 저런 가난에서 못벗어넜울듯
소련에 식민지가됐겠죠.
그당시에 소련군이 오면 마을마다 난리였다고합니다.젊은남자는 강제징병을피하기위해 숨었고 여자들경우는 얼굴에 숫칠을하고다니고, 숨어있었다고합니다.
이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은 소련군을 해방군!미군을 점령군이라합니다.
미군이 일본을 점령했지,조선을 점령하진않았죠.
그걸 떠나서 김정은 초상화나 닦고 있었을걸요. 배고파하며 살면서
김구는간첩
해방직후 남한단독정부 건국 저시절 국민들이 지금의 국민들 보다 똑똑 했던것 같음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소중함을 어렴풋이라도 알았던듯
@@partisanmoon9187 그때는 자유의소중함을 갈망할때이기에 절실했지만,지금은 과하다보니,자유의 소중함을 망각하고있음.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자유대한민국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김구 살해범 김창렬과 김창렬을 지원한 이승만. 역사를 부정하고 조작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꿈속에서라도 행여 공산화 정권에서 산다는 것은 끔찍하다.
이승만이 옳았다. 감사하다
오죽하면 우리아버님이 평양에서 1ㆍ4후퇴때 내려오셨을까요
전처가 아주 골수 ㅃㄱㅇ 였대요
@@레아-k7f 저희 외가도 1.4후퇴때 기차 지붕에 올라타서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했어요.
눈오는날 어떻게든 빈자리 찾아서 올라타서 찬 겨울바람 맞으며 내려왔다는데
어릴때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모든게 이해됩니다.
지우지나 말지?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호구들
민족 분단이 가슴아픈 일이지만 김일성은 사회주의 통일의 야망을 위해 소련을 등에 지고 민족해방 운동을 펼쳤기에 불손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이승만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세계 정세를 알았기에 사회주의 통일에서 자유대한민국을 잉태케 하였고 지금의 자유선진대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존경해야 할 이유입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옳소
웃기네. 이승만 보도연맹 4.3 학살자 반민특위 해산으로 친일파 청산 불가능하게 만듦 미국에서 사기행각으로 경찰 조사 받음
임시정부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 부정선거로 하야한 대통령인데 뭘 세계정세를 잘 봐요? 진짜 학살자 좋으면 핑계대지 말고 북한이나 일본으로 꺼지세요!!
또 지워보시지
지금 이라도
이승만 대통령 님 과. 김구. 두분에 대해
제대로. 알게도. 천만다행 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님 이이나라의초대 대통령 이 돼신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요. 하나님 께 감사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김구선생이 그냥 보편적인 인물인것이고...
공산주의가 얼마나 악한것인지.. 스탈린과 모택동이 어떤짓을 할 것인지... 우리나라가 그들을 머리 위에 두고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자유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본 이승만 국부가 진정 외교 천재이자 선각자이다.
외교천재ㆍ교육의아버지ㆍ 안보대통령ㆍ100년을 앞서간. 이승만 대통령님. 존경합니다ㅡㅡ건국전쟁ㅡ을 보았습니다👍👍👍🇰🇷🇰🇷🇰🇷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쓰레기 꺼져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이승만초대대통령되신것은 대한민국의 천만다행이다.
이승만은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진 똑똑한 리더 였더군요 교과서만 보고 이승만을 몰라봤습니다 이번에 건국전쟁 영화보고 그분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사랑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미국 앞잡이 였는데 뭔 안목이요 ?
@@kanatahn 미국 앞잡이라는 근거가 뭐지? 무슨 말도 안되는 근거?
미국앞잡이라 다행이지. 소련 앞잡이였어봐. 이승만 미국아니였으면 공란주의로 살아야했는데 뷱한보고도 ㄱ.런말이나오냐 멍청아
김구같이 지식에 어두운사람이 국정운영을 하기엔 역부족이죠. 사람이 좋은것만으로는 안되죠. 나라 흥망성쇄가 걸린 긴박한 상황에서는 이승만이야말로 정말 건국에 맞춰 우리나라에 보내준 선물입니다.
정치적 냄새를 풀풀 풍기는 댓글 뿐.
덩신도 여러잘아지.
김구는 살인마 입니다.
김구가 사람이 좋다고요?아주 악질적이고 교활하고 전형적인 범죄심리를 가진 사이코패스에다가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큰 인물입니다 그렇게도 상황파악이 안되나요
무고한 사란 살인하고 민비자객이라고 둘러대기 까지 한 살인마
다른걸 떠나 그 시대에 여성에게 투표권을 줬다는 사실이 놀랍다.
위대한 선각자.
농지개혁은 전세계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이외에는.
막상 북에가서 측근들에게는 남한의 군사력이 북의 군사력에 너무 열세라 북이 침공하면 북에게 먹힐 것이라 판단하고 북에 김일성에게는 아부하고 남으로 돌아와서는 북이 남을 절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김구의 모호한 기회주의적 발상이 그가 무장독립투쟁에서 민초들에게 폭탄을 쥐어주고 김구자신은 빠지는 그러한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그자가 처자식이 있는 겨우 23살짜리 청년에게 폭탄을 들려서 사지로 보내는 것을 보면 인간이 아니다.
치하포 살인사건도 열등감에 의한 살인 일본상인이 본인보다 국밥을 먼저 받았다고 죽임..알고보니 일본인이 먼저 주문함.. 김일성에게 간 이유도 이승만 대통령애 대한 열등감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지 김일성 오른손 성시백이 꼬셨을때 공산통일하고 남한을 통치하게 해준다 하니 홀랑 넘어감..근데 이주장은 김대중 문재인이 말한 고려연방제와 일맥상통~!
옳은 말씀 ...
이봉창전에 치아포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유튜버는 김구를 중동의 극단 이슬람주의 단체들 같다던데요
이승만 박사가 옳았습니다.
지도자를 정확하게 만나서 민족중흥을 이룬 것 ❤~건국대통령각하 이승만박사님 ~중흥대통령각하
박정희장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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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패착은 좌우합작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좌우는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시도한 것이 정치생명의 실패인것 이다
아무리 김구의 평가를 높이려 하지만 건국을 한 이승만 평가에 비하면 넘 작은것이며 이승만 옳았습니다
김구가 자기 욕심 때문에 그랬죠. 무학인 김구가 무슨 대통령감이 됩니까. 이승만 외에도 훌륭하신 분들은 대부분 반공주의자라서. 공산주의자들이 할수없이 협조요청한게 김구이고. 그걸 자기가 깜이 되어 그러는 줄 덥썩 받아들인 김구가 원망스럽네요.
독립투사 김구는 추앙 받아야 하지만...
공산주의 김구는 비난 받아야 합니다.
@@sskimmotix공산주의라기보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도 관심도 없던 분이고, 오로지 한민족 통일에 대한 신념만 가득하셨을듯. 즉 아주 위험한 사람
중국의 대일본 국공합작의 결과를 보면 우리의 좌우합작의 결과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구 선생은 왜 공산당과의 공생은 힘들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요?
@@CJYUM-ou3ui김구선생 무학자 그랬고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으신 이승만대통령 있었기에 현재의 번영이 있지요.
스탈린을 믿느니 개를 믿어.
일부의 주장처럼 남북한 단일선거를 했다고 합시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 당시는 주변 국가들의 영향에 따라, 또 일제시대 때 민족주의 물결에 따라, 좌익세력과 그와 유사한 군소정당들이 다수였습니다. 단일선거가 일어났다면, 그 결과는 선거를 통해 좌익세력의 집권하였음이 명확했습니다.
민주선거를 통한 공산정권의 수립,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맞습니다. 김구가 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이미 북한은 공산주의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한달후 5월달에 치뤄질 선거에 자신의 입지를 내세우기 위한 무모한 행동이었지요. 그당시 남한은 박헌영 남로당에 의해 제주에서는 4.3폭동이 일어나 구석구석이 공산주의 남로당 좌파로 크나큰 혼란한 무정부 상태였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남한을 먹으려는 김일성의 계략을 알고 선거를 준비한 상황이었지요.
맞습니다. 김구가 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이미 북한은 공산주의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한달후 5월달에 치뤄질 선거에 자신의 입지를 내세우기 위한 무모한 행동이었지요. 그당시 남한은 박헌영 남로당에 의해 제주에서는 4.3폭동이 일어나 구석구석이 공산주의 남로당 좌파로 크나큰 혼란한 무정부 상태였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남한을 먹으려는 김일성의 계략을 알고 선거를 준비한 상황이었지요.
가자지구의 하마스단체가 떠오릅니다ᆢ가자시민들이 하마스당을 지지하였습니다ᆢ그들이 지지한 하마스가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하마스는 배를 불렸습니다ᆢ
단일선거막은건 공산진영쪽아니였음?? 남북 인구차이가 난다고 해보지도않고 빤스런친걸로아는데
저도 한 때는 김구가 대한민국 독립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위대한 애국자로 배웠고 알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순수
공산주의 신봉자였다는 걸 알고 김구에
대한 저의 소신과 생각을 다 지웠습니다.
순수한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다시 시작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쳐야ㅈ합니다.
ㅡ건국전쟁ㅡ 보시면ㅡ이승만 대통령님이ㆍ 정치 천재ㆍ외교달인ㆍ 교육 의개혁ㆍ등등 100년을 앞서가신분ᆢ최고ᆢ👍👍👍👍👍🇰🇷🇰🇷🇰🇷🇰🇷🇰🇷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학살자나 좋아하긴. 당당하게 보도 연맹 말도 못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쓰레기들. 지우기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이승만대통령님은 세계적 안목과 하늘의 지혜를 받으신분이요 김구는 통일이라는 벽에 갇혀서 그게 공산통일인지,자유통일인지를 구분못한분 김구가 집권했다면 1년도못가서 공산화 김일성발굽에 짓밟혔으리라 끔찍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자유대한민국 이승만대통령주심에 감사감사합니다
끔찍합니다ㆍ대한민국🖼라오스처럼 될뻔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빨들은 김구를 우상화하고 이승만대통령을 배신자 독재자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공감해요ㆍ 김구선생의생각은 옳은것같았어도 리더로서는 결단력없는ᆢ
극 공감합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이렇게 옳은것을 옳다 못하는 자들은 어떤뇌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요즘은 역사 선생들이 수업 시간에 택시? 5.18.이런 영화를 보여주고 그걸 본 아이들은 그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있어요. 그리고 그 내용들을 아이들은 잘 기억하고 있고요. 그렇게 세뇌가 되고 있어요.
김구는 서당교육 이외에는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못했고 세계정세에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세계 정세에 해박ㆍ이승먀 대통령님ㆍ 정치ㆍ외교 ㆍ 교육개혁ㆍ농지 개ㆍ한미상호조약 으로. 우리는 이렇게 발전한것ㅡ 이승만대통령님 존경합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학살자 옹호하긴. 지우기나 하면서
호구들 꺼져!!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jaycha9899
북으로 가서
조선 민주주의나
하고 살어~
왜 ? 여기서 살어~?
그러고
어이 가서
건국전쟁이나 보고
현대사 공부 다시해 !!!
우리의 힘으로 해방도 못한 처지에 - 너무도 푸른 꿈을 꾸신~ 김구선생!
국제정치경제의 살벌함을 모르시고~ 감성적으로 ‘민족’만 내세운 당시 지도자상의 한모습!
지금도~ 이런 감성적인 지도자들이 대한민국의 현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하지요. ㅠ
자주독립과 통일을 논하려면 - 국력이 우선되어야합니다!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ㅎㅎㅎㅎ우리 힘으로 독립못했으니 민족주의를 주장하신 것이재....
국제정치경제는 또 무슨 소리고 ㅎㅎㅎ감성은 무슨.....에끼,,,이 사람아......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을 한번 이라도 읽어봤으면 이리 댓글을 달지는 않았을터인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을 전혀 이해못하니 이딴 말이나 하고 ㅋㅋㅋㅋㅋ
@@주초위왕-z6d어떤 선택의 의지? 김구가 북에 갔을때 김일성추종자들이 민족통일하면 김구를 지도자로 세워주겠다고하니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한거죠.
@@주초위왕-z6d 자기 자서전에 자기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지
김구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이승만에게 밀려 정권도 못잡게 되니
김일성과 손잡으려다가 암살당하게 됨
♡♡♡♡♡
@@주초위왕-z6d 천하의 김일성을 상대로한 몽상가였을뿐
70년 지난 지금 밤하늘엔 북쪽은 전깃불 없어 어둠이..남쪽은 대낮같이 밝다.
그게 결과이고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이고
이승만 전 대통령님의 선견지명이다.
지금까지 그 분 만큼 외교 잘 하시는 분 나오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세워진 대한민국 ❤
왕과 벼슬아치 밑에서 종처럼
살던 백성에게
자유를 알려주고
자유롭게 살게해준
이승만 대통령은
민초들의 은인 임
노예해방을 시켜준 링컨과
비견될 인물-
이승만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맞아요. 링컨에 비견될 인물이 이승만 박사
@@e.k.8835 링컨이 국민을 학살했나? 비교가 되는걸 하길
@@modelcode-g2v 이승만이 뭔 민족을 학살했나요?
독립운동 했다고 무조건 애국자 아니다~
@@modelcode-g2v못된 공산주의자 학살 한거가 무슨 잘못인가요~
북에가서 철저히 이용당한거 아닙니까?
제 말이 그말이요.. 태영호의원이 욕 얻어먹은게 억울한디..-_-
그러면 이해는 되는데, 갔다 와서도 모르쇄. 전쟁? 그런거 절대 안일어 납니다라고 구라치고 다녔죠. 핵대중이 선배님. 핵이요? 절대 핵은 없습니다. 이지랄 하고 다니니 의인이 나서서 죽인거죠. 갓승만이 사주해서 죽였겠습니까?
이용당한거도 맞지만 본인이 대통령 하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힌자.
이용을 당해요?
이용을 하려다가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김구는 공산사회주자들의 속셈을 경시했던 것입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당시 김일성 말고는 모두 몰랐겠죠.
공산주의!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받는다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 분배가 균등분배가 아니라 김일성 일당이 다 차지하고 아주 조금 떼어서 똑 같이 나눠줘 김일성 일당 외에는 모두가 균등하게 가난하게 분배해주기는 했죠.
빙고...
김구선생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아니여서 천만다행입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없었을듯합니다.
다행입니다
김구가 대통령이 됐다면 작금의 재벌대기업들만 배터지게 호의호식하고 나머지 국민들은 개돼지 취급하고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지구상 최악의 갑질공화국이 아닌 정의롭고 평등한 나라가 됐을 것임
네 옳은말씀에 공감합니다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김구선생
기회주의자 김구
맞습니다
김구가 진짜 통일을 생각했다면 김일성과 박헌영이부터 제거하고 봤어야 한다고 생각함.
너무하네요. 김구 선생 탓하는게 우습네요.
야 김구 속마음 어렵소 김성주 박헌영이는 아니었다.
간단명료한 답이군요 김구의 해보를 보면 그는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죠
그러기에는 박헌영은 굉장히 똑똑한 인물이었고.
김일성은 배후에 소련이 있어서.
어느 쪽이든 김구는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음. 그러니 애먼 대한민국 건국만 반대했던 거임.
오래전부터 이미 초중고 교과서가 얼마나 좌경화된 건지를 이제야 알듯~
소름~!
건국전쟁 봐야합니다
만세
저의 소견으로는 김구 씨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기에는 맞지않는데 국내 지지세를 믿고
국제정치에 관한 지식도 없이 그때 의 국제 상황에는 맞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분은 애국심 만은 있으나 그는 스탈린이 얼마나 slicky 한지는 몰랐을 것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사람도 아니고 구루지아 사람이었다
1948년 7월 11일 김구는 유어만 공사를 만나 “내가 남북지도자회의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북한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한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만한 병력을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를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
김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도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30일 4개 항으로 구성된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해서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것이라고 단언했음. 그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였다는거것임.
소름 끼치는 김구씨네요. 나쁜 김구씨 인간인데 이제라고 알아서 다행입니다.
김구와 유어만공사의 대화록이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좌빨들은 이제 유어만의 대화록이 가짜라 개거품물고
나올 것입니다.
이제 부터 김구라고 부르지 말고, 김구라 라고 부릅시다
어쨋던 이승만 대통령의뜻이 옳았다 나는 남한이좋다~~
맞습니다 김구는 세계정세를 몰랐죠
이승만 대통령님. 존경합니다 👍🇰🇷
@@jonathanlee8792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jonathanlee8792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일본으로 꺼져 학살자나 좋아하는 주제에. 당당하지도 못하고
여기에 댓글을보니 1년전에 여러분들은 김구의 정체를 알고들 계셨군요 저는 건국전쟁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께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이 물밀듯 밀려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어서 좋다.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김구 유어만 대화록이 공개되기 전에 만들어졌나보네. 김구는 북한에서 강력한 군대를 보았고 남한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니 남한단독 정부눈 무너질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은 남쪽에 알리지 않았다. 위선적인 부분이다. 거기에다가 국제정세를 보지 못하고 민족만 부르짖었던 좁은 그릇.. 이승만이 북괴 정체를 꿰뚫어 본 것이 얼마나 천운인지…
김구는 전쟁이 날것이라는걸 잘 알면서도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을 속였습니다.
그런 김구를 무슨 민족의 영도자인것처럼 추앙하는 좌파들은
우리나라가 적화되지 않은걸 안타까워하는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 ..김자점의 후손 ㅋㅋㅋ그후손이어디가겠서요
백퍼맞는말씀입니다
이승만대통렁이아님지금우리도공산치하에있겠죠
천운 입니다
20대 청년입니다 자유대한민국에 살게 해주셔서 이승만 대통령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대학을 55년 전에 졸업한 사람 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김구 씨를 존경 하지않았읍니다
내 눈에는 완전한 민주주의 애국자로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애국을 하기는 했으나 완전한
애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 를 이끌어갈 자질이 없었다 사회주의 색채는
이승만 과는 자질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잘 보셨습니다 어르신!
영화 건국전쟁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대부분 좌파들이 모여 회의 하는데 역사적으로 좌우합작후엔 공산주의로 되었다는 것이 역사인데 그럼 공산화가 되었어야 사회주의가 되었어야. 되었다는 건가요?
뛰어난 혜안을 가지신 분입니다
저희아버지 께서도 이승만 박정희대통령 때문에 자유롭게 살수있다고 하셨어요 ~
맞습니다,저도 ,김구는 존경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통일만 하자?
김일성을 만나 전쟁이 날걸알면서도 이승만에게 함구했다!
맞습니다.김구의 이중성 존경받을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8년 평양에서 열린 낭북연석회에 참석한 김구가 김일성과 스티콥프에게 이용당한건 사실. 그때 북한은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고 김구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에 와서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중국 대사에게는 전쟁이 일어날거 같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김구의 이중성,
비난받아야 합니다.
ㅡ건국전쟁ㅡ 에서 나옵니다ㅡ김구의 친중 ᆢ 친북으로ㅡ>>😫
맞습니다
이대통령이 독립자금으로 하와이에서 호의 호식했다라는 인간들은 이승만대통령이 왜 미국적을 취득해 편히 살지않았을까... 서재필박사처럼.
이박사는 미국최상위의 계층에 속할수 있는 자격을 갖췄는데..
더구나 윌슨대통령이 지도교수일 정도의 강력한 인맥도 있었는데.
이박사는 이광수의 백범일지 같은 글로 포장안된 순수 애국자였다..
공산주의를 잘 몰랐던 이상주의자.민족주의자.테러주의자인 김구. 학벌좋고 공산주의가뭔지 정확히 알고있었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승만. 결국 대한민국 을 미국외교와 토지캐혁으로 자본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건국의 아버지! 종교의자유 감사합니다
여성참정권 남녀평등 도 이승만의 업적에서 뺄수 없죠 ㅎㅎ
종교의 자유가 그냥 교회를 갈수있다는 물리적인것만이 아닌 결사의 자유, 발언의자유, 언론의자유, 사상의자유 다 포함입니다 정말 위대하신분입니다.
김구 선생의 행보
이해하지만...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힘의 크기를 김구선생은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음
그나름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준 것이라 생각함.
한편,
이승만의 국제 외교 혜안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수립한 것임.
이제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숙제는 우리가
이루어야겠지요.
👍👍👍👍
♡♡♡♡♡
👍👍👍👍👍
👍👍👍👍
남북간 좌우이념이 다르면 민족통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주도의 자유흡수통일만 한반도의 진정한 민족통일입니다!
👍👍👍👍👍👍👍👏🏻👏🏻👏🏻👏🏻👏🏻👏🏻👏🏻 명철한 정의를 박수합니다
이말을 북한에서 정은이 시다바리들이 똑같이 쳐 하고 있겠지 거울보는것마냥
@@jhn5332 00ㅇ0000ㅇ0 ㅈㅇㅊㅇㅊㅈㅈㅈㅆ
맞습니다
사회주의 공산당은 싫습니다
이승만님이 아니었으면 이나라는 지금의 북한으로 살고있어야 되었겠지요
소름끼치고
치가 떨립니다
우리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독재자 김정은의 백두혈통이 존재하는한 자유민주주의적 협상적 툥일은 어려우니 좌빨에게 선동당하지말고 시대의 흐름에 맡겨라 좌빨식 자주독립을 운운하는 국민은 간첩
김구에 대한 전문가들의 공개적 토론과 다양한 평가가 있어야된다고 봄. 그러나 이념만으로 국가의 발전은 없다. 철저한 이념국가 북한 거지나라.
자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건국전쟁을 봐야함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최고의 다큐멘터리
오늘 아이들과 두번 보고 왔습니다 감동은 또 두배의 감동이고👼✨️🤍🕊
감사입니다💒💟👍
민족주의만 앞세운 김구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알게 해 준 대한민국 건국 영웅 이승만
이승만이 대통령이어서 너무 잘 된것은 그래도 우리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보호하심입니다.
김구의 통일민족을 위한 노력에 대해 존경을 표하지만 약소국 입장에서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던 이승만의 생각이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일 것이다
살인자에 도적질에 강도전과 인 김구가 무슨통일을 염원했다고 존경합답니까? 역사공부를 전교조 에 듣다보니 교육이 잘 안된것 같습니다
김구 이자는 그냥 살인자 도적질 쟁이예요 당시소비에트연방 과 김일성이 앞세운 허수아비에 불과 해요. 얼굴 생긴거 보세요 꼭 도적늠 같잉생겼자나요
살인도적질만 했을까요? 그외 숱한 나쁜짓을 조선인에게 저질렀어요
통일민족이 사회주의라도~ 오케이 였습니다. 존경이라니 끔찍한 소리예요
@@hanmj5766
니가 좋아한 북으로 가라우~~ㅉㅉ
병적이구만!
소비에트 연방과 김일성 하수인으로 본인의 야욕을 위해. 남한을 공산주의화 시키는데. 일조한 사람을 존경이라니요? 북한같으면 저런자는. 부관참시 대상입니다 .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활동하고 있는 민주당 이나 문재인 같은 간첩들이 김구 김원봉 같은 공산주의자들을 우상화 시키는 운동을 끊임없이 하는거겠죠
이승만 은 아예 지우려고 지금도 난리랍니다
문재인 부친 노무현 부친 검색만 해도 행적들이 적나라 하게 나옵니다
김구는 기회주의자 사기꾼이라는 것을 건국전쟁의, 소련기밀 문서를 보면 알게 될것이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 앞에서, 남한체제를 북한체제로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데 도장을 찍고와서,
중국대사에게 남한은 북한군대에게 점령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 문서를 보면, 김구는 기회주의자 사기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겠더라.. 김구는 개야..
반갑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
멸공으로 다스려라 ❤😂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요 ❤😂
우리의 코딱지 만큼의 땅덩어리가 지정학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국제정치학적으로 김구는 잘 알지
못했다.. 난 6학년 8반 오지에서 농사짓는 민초 입니다..
김구의 딜렘마는 그의 이상주의가 당시 남북 지도층들의 즉 북의 공산주의자 남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현실주의의 에너지와 숫자에 태부족했던 것ㆍ
우리한민족의 역사되풀이일뿐ㆍ
그는 존경받을 이상주의적 선각자였다ㆍ
요즘의 윤석열같은ㆍㆍ
김구선생님 방식으로 통일정부 수립했다면 아마 한반도는 공산화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전국민 반이상이 공산당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한민족 비상의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좀 공부 좀 해야겠네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지지를 받은거고 민족주의자들 대다수는 그냥 일본에 굴복한 상태였음 해방 당시 식민지 조선의 거두가 사회민주주의자인 여운형이었고 그의 뜻대로라면 건준이 나라를 세웠으면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건설 되었겠지
골이 띵하지요. 사회주의 사회가 되었을까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독재국가가 한반도 전역에 성립되지않았을까요? 소련은 러시아 대위였던 김일성 더 좋았겠지요. 말안듣는 먹물, 민족주의자인.'여운형, 김구보다는 요. 2023년 북조선 아사자 300만, 정치수용소 수용자 150만..굶주림..고문. 시체의 산..인권이란 단어조차 생소한 탈북자들의 증언..
@@유수윤-m4o 북유럽 좋아한다. 죄다 환상에 빠져있는데 가장 큰 착각: 스탈린이 어디 니들 맘대로 하게해 둔대? 당시 한반도는 스탈린이 속내 공개안해서 그렇지 뛰어봤자 부처님 아니 스탈린 손바닥 안이었다 그말이야. 신탁이니 반탁이니 단독이니 공동이니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이딴건 스탈린이 봤을때 "놀고있네 허허. 내가 가두리 양식장 한다고 니들이 대양에 나와 몸푸는줄 알지 이 피래미들아." 였어. 김영삼시절 러시아가 준 당시 스탈린과 박헌영 김일성 회담 극비해금문서부터 읽어보고 얘기해. 박, 김이 스탈린 앞에서 얼마나 저자세인지, 마오쩌뚱한테도 강압적으로 명령질. (니들이 북한 도와. 우린 뒤로 숨는다.)
스탈린의 계획은 오직 하나, 전세계의 스탈린식 공산화였고 (이건 그냥 전체주의) 그걸 위해 서유럽부터 먹을지 동양으로 일단 주의를 분산시킬지 고민했으며 동아시아에 코민테른 세워 최대한 "평화롭게" 지들 스스로 속아 소련체제로 걸어들어와 흡수하고자 하였고 그 유일한 걸림돌은 이를 간파하고 2차대전 종전과 동시에 즉시 컨테인먼트 전략을 수립한 미국이었으나 여전히 프로파간다나 모든 면에서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술수와 매력은 미국보다 몇수 위였고 (지주, 자본가 죽이고 토지, 공장 나눠줘서 농민, 근로자 천국만든다는게 너무 당연한거아냐. 당장 요새도 우리집 아줌마 하시는 말씀 "우리같은 어짜피 가진거 없고 잃을것 없는 사람이야 나라가 확 어찌되어 물구나무 서면야 좋죠.") 특히 문맹율 70-80%였던 신생개도국 한반도는 그냥 두면 스스로 알아서 스탈린품에 안기게 되어있었다고 본거야. 사회주의? 이건 공산주의조차도 아냐. 그냥 스탈린 전체주의야. 스탈린은 딱 그것만 용인한거야. 새파란 김일성이 산전수전 다 겪은 지식인 박헌영을 죽일수 있었던 이유도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무조건 자기명령이라면 절대복종하고 별 생각이 없이 단순한 사실상의 노비였으나 박헌영은 사상적 철학적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야. 김일성이 지맘대로 박헌영 죽일수있었던게 아냐. 백이면 백 스탈린 결제요 명령이야. 즉 당시엔 결국 딱 2체제로 수렴하게 결론은 이미 나있었던거야 - 스탈린의 위성이 되거나 (동유럽) 아니면 미국의 우산으로 들어가거나. 그 이분법 줄서기가 바로 냉전이라는 체제야. 여기서 어영부영 눈치코치 없이 "어이 주모, 우리 나름 도시락 싸왔으니 주문 안할께요" 했다간 철퇴 날라오는거야. 미국 우산 없이 스탈린 피할 방법은 없었고 미국은 소련과 달리 여론에게 꼼짝 못하는 민주국가였기에 중국이건 동유럽이건 한반도건 어디건 마음대로 파병해서 소련에 맞서싸울 여건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1945-1949 핵을 가진 유일한 국가였음에도 불구 세계의 절반이 스탈린 수중에 넘어가는걸 보고만 있었던 바보같은 나라야. 625는 가두리 양식장 뒀더니 왠 미국출신이 나타나 단독선거니 뭐니 그물 끊어내 저절로 자기 품에 들어올 공산이 사라질거 같다는 스탈린의 불안과 김일성의 부추김 (당시 남한은 빨치산과 프락치로 전쟁없이 승부보려 했었으나 이승만은 그것도 간파하고 이들의 씨를 말리기 시작. 만약 여순반란 등 빨치산을 그냥 뒀으면 결국 625때 후방교란으로 적화되었을터. 군대조차 빨치산이 숨어있어 적화 저지를 위해 이승만은 유일하게 총을 다룰수 있는 반공세력 일제시대 경찰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는데 이걸 노려 북쪽에선 집요하게 이승만이 친일이니 토착왜구니 공격해댐) 또 스탈린의 야금야금 세계정복 잠식을 더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는 미국과 미국최고 관료들에게조차 거의 TA 격인 이승만의 절절한 미국의 복음주의에 대한 호소가 맞아떨어져 그해 1월까지만 해도 애치슨라인 동해에 긋고 등돌렸던 미국이 이틀만에 개입하자 스탈린은 먹던 후식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와버릴 정도로 놀람. 결론적으로 한반도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사실상 스탈린 외에 없었으나 그걸 어디서 미국물 먹은 이상한 노인네가 서양색시 데리고 나타나 남한 단독선거로 인위적으로 억지로 비틀어 막아버리자 (공동선거하면 누가 니와도 무조건 김일성 당선수순) 이에 격분한 스탈린이 처음엔 여순반란, 4.3.사건 등 빨치산부대 통해 양민들 꼬시고 선동하여 어찌해보려다 또 이를 간파한 이승만이 빨치산 소탕에 들어가고 국회의 사실상 공산당 해산시키자 쳐들어온 사건이 625, 그러다가 이게 너무 길어지고 희생이 커서 미국은 한반도 포기하려고 이승만에게 니들 영구중립국 안해볼래 그거 참 좋은건데 어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우리가 일본에서 지켜보다 니들 침공 당하면 즉시 도와주면 되잖아... 오만 감언이설러 꼬셔보지만 노인네 고집을 도저히 꺾을수가 없어 ("강물 폴짝 뛰어넘으면 중공이건 소련이건 한반도 땅인데 니들 미국은 일본에 주둔하며 지켜보겠다고라?") 하는수없이 미군생명을 볼모처럼 남한땅에 두게된게 바로 한미상호안보조약이고 이거 덕분에 푸에블로호, 도끼만행 등등 오만사건이 다 발발했어도 북중소의 625 같은 전면침공은 이뤄지지 않았음. 왜? 그건 미국에 전쟁선포와 동일해서임. 그래서 오늘도 빨치산들은 미군철수만 부르짖음. 끝.
@@유수윤-m4o 북유럽식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입니다
통일에 몰입해서 어떤 체제를 택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ᆢ 모두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분들에 대한 가치는 중요하나 이 나라의 독립을 왕정에서 처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준비를 한 지도자기 있었음에 더 가치두는 이유입니다
공산화도 지금의 김일성(김성주)같은 사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당시 미국의 횡포와 언행들을 본다면 그당시에 당신이라고 같은생각이 들것이오 다만 소련군에선 김일성을 뽑았고 스탈린은 후회했지만 이승만은 미국 친일 일본 세력들의 힘을 얻어 광복이후 초대대통령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한국입국금지였는데 미국장군 꼬셔서 일본들렸다가 초대대통령이라고 홍보하고 독립운동가는 찬밥되서 한국들어온것은 아는가 3.1절에 감사함은 아는가
독립운동가라 도와달라고 유학생화롸던 이승만에게 독립운동가 +대통령이라하고 미국에 알린린물이다 자기멋대로 1세대 하와이 연합된 동포동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후 이승만이 방문해서 연설후 대학졸업하고 독립자금 돈보내주면서 생활자금으로 쓰고 자기세력에 반기하는 사람들은 총살로 시위 했고
한국 대통령으로 인정안해주는 세력들이 생기려고 할때 총살 2명이나 명령해서 죽었다 그중 김구이다.
동네 형이며 아무리 뒷통수 쳐도 사석에서 형님하던 동생을 어찌 애국심은 없고 그냥 자기를위한 반역위선자같은 인물이라고 할수있다 그러니 하야만 2번 한 대통령이지 그리고 두명의 대통령이나왔지먼 병풍이었고 군 쿠대타 해서 박정희 전두환 쭈루룩 뭐 역사 외곡하는 일본인이랑 별다를게 없지않은가
이승만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대한민국에 심고 선진국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십니다.
김구선생의 통일정부에대한 노력과 애국정신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세계의 흐름 미소의역량과 공산주의의 야욕등을 직시하지못한 근시안적행보는 찬양받지못할 아집에 불과한 부분이다
김구는 스티코프, 김일성에게 이용당했거나 같은 편이었던거죠. 김구의 비서 성시백은 월북했죠.
김구의 노력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그 순수함은 고양이 앞에 쥐일뿐이다.
오늘날도 평화 외치는 자들속에 많은 이리들이 설치고 있다는 사실을 좌파라 이름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깨닫기 바란다.
순수는 무슨 얼어죽을
이승만한테 밀려서 정권을 잡을수 없게됐으니
노선을 바꾼거지
김구의 일대기를 보면 권력욕이 엄청났음
@@toa_payoh_ 여기서 박정희가 왜나오니?
머리가 어떻게 된거냐?
세상을 두쪽으로 나눌수 있다고 생각해?
너 심각하다 병원가라
김구나 문재이랑 똑같다고 생각 합니다
순수..??!!!엉큼한 이중성을 건국전쟁 영화를보고 알고서야 분노가 치밀어서 잠을 못이루었구만..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이 영상의 분위기는 김구를 띄우는 방향이네요. 좌우합작한 나라들의 결말을 넣었어야지요
이전에는 나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건국전쟁을 보기 전과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동감해요 👍
테러주의자 북한 감일성에 이용당한 김구띄우기
몇년전 것이니 좌파때 나온거네요
김구는 김일성에 이용당한 것이다. 이 간단한 진실을 왜곡하면 안된다.
정확합니다~
한마디로 딱맞는 말입니다
❤❤❤❤❤
이용당한게 아닙니다. 김구가 남한에서도 권력이 붕 떴죠. 김구는 그 결과로 북한에 의한 통일을 원했습니다.
46년 5월 김일성의 초대를 받고 북한으로 갈때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꺼라는 걸 알고 있있지만 김구에게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지. 그저 반등의 기회만 노릴 수밖에 없는 처지.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하신 김구선생님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결로 치닫는 20세기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갇혀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좌익의 흐름에 이용당하고 결국에는 김일성에 포섭되어 소련의 남침야욕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방관한 실패한 정치인으로 기억됩니다
이승만대통령님께서는.세계적인천재인갑씁니다.이영화를보니.그얼우운시기에.이승만의이나라건국에감사합니다이나라영웅입니다감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에도지금도 애국자들이많습니다 그러나진정한애국을하려면 자격과실력이필요합니다 또한 헌신적충성이있어야합니다 김구는다양한재덕을가춘자였으나 현실감각에민감하지못했고 선견지명을갖지못했음으로 애국하는일을완성하지못했습니다
김구는 서당 졸업도 못한 미련한자가 정치 흉내를 내기나 하고 기회주의 방해꾼 이였습니다 ㅡ큰 등치 먹여 살리느라 ㅡ국밥이 늦었다고 살인까지 한자랍니다 ㅡ역사교육자들의 말에의하면
@@나침판羅針盤 말로배워서되로써먹는사람있고 되로배워서말로써먹는사람있습니다
김구는 댜양한 재덕을 갖춘게 전혀 아닙니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쓴 것이고 ( 물론 내용은 김구가 불러준 것이라 거짓이 엄청 많습니다), 여기 영상에 김구것처럼 보여주는 글씨도 남의 것이며, 김구는 국가를 지도할만한 지식도 경험도 안목도 없는 사람이었음. 김구는 북에 가서 이미 ㅃㄱ이들이 남침 준비를 다 마친 것을 다 알았고, 그 사실을 그 당시 한국에 주재했던 자유중국 대사에게만 알려 주었고 이 모든 것이 그 대사의 회고록에 그대로 있음. 김구는 자기가 형님이라고 불렀던 이승만 박사나, 남한의 누구에게도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를 알리지 않았고, 아마도 간첩들이 알려준대로 통일(ㅃㄱ이에 의한) 한국의 대통령이 되려고 기대하고 기다렸던 기회주의자이며 역적.
국제관계를 잘 알지 못한 자가 크고 넓게 보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않으면 혈관이 막히듯 하여지고 그 막힌곳은 썩어버립니다.
김구 선생은 폭이넓고
진정한 애국자이다
당시 국내외 정세를 간파하지 못하고 소련의 각본에 의한 북한의 연출에 이용만 당했다
이름에 비해 급은 한참 떨어지는 인물 김구
이승만ㆍ만세 ㅡ 준비된 100년의 앞을. 자유 민 주주의 ᆢ👍👍👍👍👍🇰🇷🇰🇷🇰🇷🇰🇷🇰🇷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금숙-m7p 학살자나 좋아하는 호구들 꺼져
@@금숙-m7p 당당하지도 못하고 삭제나 하면서~그렇다고 보도연맹 사건이 없어져? 꺼져~
@@금숙-m7p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건국전쟁이 순수 다큐기에 재미를 추구하는 젊은층에겐 다소 지루할수 있다. 그렇지만 올바른 국가관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봐야되는 영화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스티코프의 수첩은 굉장히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정부는 어떻게해서든 입수해야할것
돌이켜보면 김구 정도의 리더쉽으로는 대한민국이 건국전에 북한 공산댱에게 넘어가고 그 후손들은 지금의 북한 주민꼴밖에 나지 않았겠나!
끔찍하다!
그런 이들이 당시 지도자급들이었다. 부끄러운 수준들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은, 정치지향적
독립운동가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원폭으로 인한 일제 멸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우리의 미래가 강해집니다
공감합니다. 쓰리고 아픈 역사지만 스스로 독립을 이루지 못했고, 은혜를 알고, 역사를 바로 써야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김구를 환영하고 참석케 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정권수립을 합리화하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어떤 자들인지를 알아야지. 그 노력은 가상하고 감사하지만 이용당한 게 맞다. 하지는 그것을 간파한 것이다.
맞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용당했지요..현실은 이상과 다른데..국제정세에 무지해서..공산주의의 거짓과 잔혹함의 심각성을 모르고 속아서..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볼줄 알아야하고 현실을 감안해 정확한 판단력으로 국민을 이끌고 국가를 경영해야지 이상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김구의 선택은 틀렸다는걸 오늘의 역사가 증언해주지 않나요? 명백한 현재를 보면서 왜 자꾸 김구를 띄우려고 하는지 어떤 세력의 의도가 숨어있는지 의심이 듭니다.
김구는 스티코프, 김일성에게 이용당했거나 같은 편이었던거죠. 김구의 비서 성시백은 월북했어요.
김구는 독립운동한다고 욕봣다.
허나.,
통일에 집착하여 그의 말대로햇다면 우리는 지금 지옥이다.
이승만이 옳앗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대한민국의 선택함이
지금의 나라가 있는것이다.
어려서부터 이승만대통령을 제일 존경했다.
매년도 강원도 화진포 이승만대통령 기념관을 방문한다.
어릴적부터 이승만대통령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 정신을 배웠다.
이화장 (서울 ) 에도 여러번 다녀왔고 인해천경이라는 말씀을 참 좋아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김구는 김일성을 택하였으나 역시 총살로 죽었다.
역사의 왜곡 바로잡아야한다.
이승만 대통령님 최고❤
케이비에스야 너도 이승만 대통령님
덕분에 자유롭게 방송하는거야
정신차려라!!!
이승만대통령님의 정신을 길이 밝힙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검속은 6월 25일 전쟁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이 곧바로 점령한 경기·강원 북부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행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 짧게는 2∼3일,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되었다.
일부지역에서 특무대(CIC)와 사찰계 경찰, 그리고 헌병 등이 구금된 보도연맹원의 과거 활동을 심사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취조를 받았고, 활동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고, 구금기간이 길었던 영남 남동부의 인민군 미점령지역에는 심사가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살해 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연행·살해한 기관은 경찰(정보수사과, 사찰계)과 육군본부 정보국 CIC(지구, 파견대)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 검찰과 헌병·공군정보처(G-2)·해군정보참모실(G-2)·우익청년단체 등 국가기관이 관여했다. 이 중 CIC와 경찰 사찰계가 이 모든 과정을 주도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학살은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행과 사살 명령이 누구로부터 내려왔으며 언제, 어떤 단위에서 결정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군·경의 수사·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기관이 일사분란하게 이 사건에 동원된 것은 최고위층의 결정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접기/펼치기사건 결과
당시가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와 비상사태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국민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형’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근거와 절차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경찰과 CIC, 헌병, 우익단체 등은 임의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한 절차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결성 이후 그 조직 규모에 비춰봤을 때 사망자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수만 명에서 20만 명 내외의 보도연맹원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유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사실상 일부 권리가 배제된 채 감시와 차별을 받아왔으며 경제적 곤궁과 피해의식, 사회적 소외, 정치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다.
접기/펼치기조직해소
국민보도연맹은 공식적으로 해단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1950년 7월 말 이후 이 조직은 공식·비공식적으로 활동하거나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이 다시 공론화된 시기는 1951년 11월 19일이었다. 이날 제2대 국회 본회의 제11회 임시회의에서 최성웅(崔成雄) 의원 외 15인은 「전 보도연맹원 포섭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했다. 안건의 취지는 보도연맹원으로서 6·25전쟁 이후 본의가 아닌 좌익혐의를 받고 있는 자 등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까지 보도연맹원은 각 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정부는 각종 회의기구를 통해 보도연맹을 운영·관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보도연맹 조직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으며, 정부도 더 이상 조직을 운영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7월 말까지는 일부 지부 차원에서 단편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조직이 와해된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소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했다
너나 정신차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좌파방송노조가 문제
역사를모르면 나라가망한다 소식 감사합니다 ~^^
김구나 김규식은 북과 소련에 잘 이용 당했다 봐야지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 등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정부가 위험인물로 분류해오던 보도연맹원을 연행해 법적절차 없이 살해했다는 점에서 ‘즉결처형’ 형식을 띤 정치적 집단학살이었다
일본으로 꺼져
그만큼 국제사회와 사상을 모르는것이죠.
반면 이승만박사는 국제사회를 누구보다잘알고있고 사상에 무서움을 잘알고있었음.
@@dmson9729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dmson9729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1950년 6.25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김구선생님 감사합니다 초대대통령이 아니셔서요
개인의 미련스러운 고집과 확신이 통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쉬운 말로 가만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라는 말이 떠오른다.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미련한 용맹스런 김구.
김구선생은 가방끈이 짧아서 공산주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리고, 무장투쟁만으로는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도 몰랐다.
국가를 경영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한다. 실패한 북조선도당과 남한의 주사파정권이 좋은 본보기다.
독립군 젤 많을 때 오천명, 세계적인 군사대국인 일본을 상대로 무장독립투쟁으로 독립하겠다고? 정세보는 눈이 부족했죠. 봉오동 청산리 대첩 당시, 일본이 한 명 죽으면 우리 백성과 가옥 수백, 수천 보복.
맞소 옳소
지당혀
최고의 정답입니다.
무식한 사람은 자기의만 앞서지요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 -이경규명언
김구는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지나 사실 상 그건 너무 이상적이고 순진한 구상이었다고 봅니다. 이미 당시 북한은 소련군정 , 남한은 미군정의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이죠.
애시당초 우리나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대로 해방 후 미군만 상주를 했어야만 바로 통일이 달성되었을 것인데.. 난데없이 소련이 꼽사리끼는 바람에 38도선으로 나누어져 버렸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자들이 어떠한지를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으니까.. 단독으로라도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정말 대단한 천재이지요..
이승만 전 대통령님 진짜 대단하심
감사합니다
이승만 대통령님!!
당시 김구의 일기에 연석회담에서 이미 김일성공산당은 마치 큰 일이 이루어진 듯 축제 분위기라고 했었고 자신이 왠지 불편한 자리였다고 말했으며 만남이 이어지지않은 이유로 북한 공산당이 약속을 어겼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무지, 아니면 욕심이었다고 봅니다.
김구는 자유민주주의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한반도가 갈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인민공화국이 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오로지 통일만 된다면 된다란 생각뿐이었다.
그때 적화통일이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가 어찌되었을지 너무나 끔찍하다.
이승만대통령이 있었기에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됨을 너무 감사하다.
김구는 스티코프, 김일성에게 이용당했거나 같은 편이었던거죠. 김구의 비서 성시백은 월북했어요.
소련과 스티코프의 치밀한 시나리오에 놀아나는 김구와 남노당.
김일성하고 소련한테 철저하게 이용당한것 맞구만
김구는 스티코프, 김일성에게 이용당했거나 같은 편이었던거죠. 김구의 비서 성시백은 월북했어요.
김구가 대통령 됐으면 끔찍하다 좌우합작하고 조금후에 공실화
나의 판단 이지만 김구 는 애국자였지만 대통령으로 국정을 이끌 국제적 감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걍 민중운동가스탈임
애국자이긴 했을까요..?
맞읍니다
@@아이셔-s2f그러게요
실력도 안되고 자기 개인 영달만 꾀햇을거 같은데요
자질이 부족했죠 ㅡ 이승만 건국대통령님ㅡ 존경합니다 ㅡㅡ👍👍👍🇰🇷🇰🇷🇰🇷
김구선생의 낭만주의는 이해는 되나 현실과 괴리가 큰 천진난만한 주장이었습니다
김구는 기회주의자 였습니다.
@@낭만두꺼비-q6e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joyfullee9330 기회주의자 맞는데
낭만주의자..?기회주의자 맞습니다.!엉큼한 이중성..
@@낭만두꺼비-q6e👍
이승만의 선견지명과 지혜는
김구의 구닥다리 한학의 지혜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지도자의 이상이 민족을 암흑으로 몰아가는거다
김구는 과대포장되어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남북 분단과정에서 김구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38선 남쪽지역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쪽지역에서도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고향이 공산주의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배우고 방송에서 보고 한 것처럼 임시정부의 활동이 대단했고 그 영향이 국내에까지
미쳤다면 해방국면에서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있었을까?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했고 김일성은 소련군의 초급장교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상태였는데
그들에게 대적도 못 해 보고 일방적으로 밀렸다는 것은 별로 영향력이 없는 인물에 불과했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해방국면에선 오히려 평양의 조만식선생님보다도 영향력이 없었던 것 같다.
몇일전에 건국운동을 보고 많이 울엇다 ㆍ어떻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몰을수 있을까 그저 좀 아는게4,19때 하야하는장면과 쫏겨서 망명가는 장면ᆢ영화가 끝나고 나서 박수를처본 것도 한 50년전 일일것이다 ㆍ70만 돌파햇다니 3월말 까지 100만돌파하길 바랍니다 ㆍ
맛아요 저도 지금 에서야 조금 알게되었네요
진실은 언젠가 반듯이 밝혀진다는것~^^
정답입니다
통일? 통일이 전부가 아니다.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섞인 통일은 생각도 하기싫다. 대한민국에 흡수되는 자유민주주의 의 통일만이 답이다.
동의합니다!!
자유 없는 통일이 되었다면 끔찍
김구선생은
북한의 사정
너무나
몰랐어요
해방과
동시에
북한에 진군한
소련은 지방까지
공산주의 조직을
해놓고
형식에 불과한
해방운동
공산주의을
너무나 몰랐다
남한에도
남노동이
판을 치는 판에
이승만
결단이없었으면
공산치하에서
자우민주주의을
대한민국에
없었을것입니다
주장은
이 주장은 정말 사견없이 그시대에 정곡을 찌르고 보여주는 견해 올시다!
아무리 통일이 중요해도 자유보다 위 일 수는 없다.
자유는 위
통일은 아래
민족주의?
개나 주어라.
편협한 종족주의에 불과하다.
알고보면 사실은 붕당의 원인이다.
김구는 통일에 묻혀 한반도가 공산당에 의한 통일정부가 될것을 알았음에도 남한 단독정부에 반기를 든 어리석은 자이다. 그가 암살당한것이. 자유대한민국에게 천운이었다
류위완 비망록 보세요
중국영사관 류위완과 김구의 대화내용입니다.
그당시 김구의 생각이 나와요.
코리아 ... 지금은 과연 완전한 자주 독립국 인가 ?
지금도 모든 국가는 자국익이 최우선이 아닌가 ?
힘을(핵)을 가져야 한다 .
어떻하든지 !
이승만 초대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로 살아 가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 국민은 행복합니다
결국 광복은 우리힘으로할수있다는 시도는
외교정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것이고 유학한 이승만만이 외교정세안에서 나라의 방향을 이해하고 있었음
김구가 애국자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구가 애국자고 독립운동을 했다니까 김구를 존경하는데, 김구는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몰랐던 사람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그는 자유대한독립을 원한 것이 아니고 조선독립을 원한 사람이다. 임시정부 사람중에 자유민주주를 아는 사람은 이승만 뿐이었다. 고종과 순종이 집권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정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황제가 되었다.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이 집권했으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커녕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주민들처럼 김일성의 노예가 됐을 것이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 박사학위가 있을 정도로 국제정치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눈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한 배경으로 자기들 밥그릇 챙기는 능력없는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래서 갈등이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사람들이 너무도 무능했기에 친일파를 싫어했지만 할 수 없이 일제하에서 공무원 했던 사람들을 등용한 것이다. 이승만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증거는 이승만이 미국정부가 일본에서 조달한 일본에서 만든 일제 원조품을 거절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승만은 한반도의 독립은 물론 자유 대한민국 수립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이라는 걸 일아야 한다. 이승만이 미국 정부와 영리하게 담판을 잘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를 북한과 소련 중국으로부터 구해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법 연구회 출신 판사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 모른다. 그들은 선전선동이 전쟁행위의 전술이라는 걸 이해 못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좌익에게도 허용하는 것이다. 좌익에게 표현의 자유를 적용하는 판사놈들도 반역행위 협조죄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김구 사상을 함 재검토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배움의 중요성. 이승만은 미국박사, 김구는 서당출신. 정치철학 세계정세 미래를 꿰뚫는 시야가 다름. 김구 구상대로 세가쎈 북한과 통일 됐다면, 우린 지금 세끼 밥걱정하며 살고 있을듯.
여러 면에서 올바른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국민과 미래의 자손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은 역시 배워야 미래를 개척 할 수가 있다는 것.
교육울 잘 시켜야 겠다. 미래 세대를!
김구는 욕망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방북 목적은 스티코프와 유어만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김일성의 사회주의가 어떤건지 잘 몰랐던 김구.. 어찌보면 순진한 이상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