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이있고 논리적인 이해를 나눠주니 고맙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저 성적유혹을 이긴 요셉에서 더 나아가, 불이익을 겪더라도, 주인의 명령을 불복종한 더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되는군요. 그럴수 있었던게, 그 여자의 권위보다 더 위의 권위인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여야 함을 알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택을 했으니까요. 요셉은 하나님께 충성함과 동시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분의 법에 순종하길 원했습니다.
권력자가 명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것이든,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것이든 권력자의 마음은 그와 동침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는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명령과 유혹은 이 경우에 오십보 백보인듯 싶네요. 요셉은 명령 또는 유혹하는 방식에 거절한 것이 아니라 동침에 대해 거절한 것이기에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은 조금 무리한 적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짓하다는 말은 현대어로 말하면 음란한 마음을 품고 계속해서 눈으로 자신의 욕구를 전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행위를 나타내는 "낫싸"(강요 혹은 열망)라는 단어가 계속적인 어떤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지속적인 자신의 속내(유혹)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청하다는 말은 우리말 성경이 좀 완곡하게 표현을 한 것뿐이며 주인이 종에게 부탁할 리는 없으니 자신과 동침할 것에 대한 명령이 맞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종을 도구를 여기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나 숨은 뜻은 전혀 없습니다.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뜻을 어느정도 반영하여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모든 부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앞서 보디발의 명에 의해 요셉의 행위가 제안되었습니다. 즉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할 수 없는 일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요셉에게 금해진 행위는 보디발의 음식이었습니다. 먹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위임했다고 말합니다. 음식은 주인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간섭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포괄적으로 아내 역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아내를 마음대로 하라고 내 줄 남편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성적 유혹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39: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바로 요셉의 용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말을 한 이유는 곧 이 용모로 인한 유혹이 뒤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저자의 의도 때문입니다. 권력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행위도 당연히 이 사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과는 크게 상관 없이 단지 권력자에 대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용기를 말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운듯 합니다.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문맥상 유혹에 따른 요셉의 결단으로 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요셉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하나님꼐 대한 범죄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명령에 불복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인 보디발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불의하게 접근하여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뎌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충실한 복종이 오히려 그를 곤궁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는 의로우며 선한 자였으나 오히려 그 의와 선이 그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그런 결과를 그냥 두고 보셨을까요? 왜 요셉이 할 바를 충실해 다 행하고도 왜 하나님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셨는지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성적인 유혹을 이긴 것이냐 권력자의 명령에 불복한 것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 본문의 핵심은 아닙니다.
원어 몇개 안다고 거기에 맞추려고 전체적인 뜻을 뒤집어 엎는 우를 범하고 있군요. 물론 원어를 많이 아시겠지만 성경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성령님은 영감성도 모르고 이 밖에 하나님의 의도성도 집어 던지고. 이단들도 산에 들어가서 지 엇대로 해석하고 나와서 해 억고 있습니다.
성적 이슈가 나오면 “유혹”과 “음란”만 생각하지만, 계급사회에서 계급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성적 이슈는 그보다 권력형 범죄와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보통은 남성 상급자와 여성 상급자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여성 상급자와 남성 하급자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런 상황이 고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나면, 요셉이 상급자의 불의한 명령에 불응했다고 말 할 수 있는겁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서 이성의 접근을 무조건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으로 받아들인다고 단정지으면 안 됩니다. 남성들도 사회상활 하면서 이성 권력자의 그런 접근이 유혹이 아닌 엄청난 압박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쾌하고 힘들어도 대놓고 거절 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어요. 아무리 사회가 옛날과 많이 달라서 그런 부분에 대한 사법처리가 보편화되었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서 저는 유혹을 이긴 케이스일 수도 있고 동시에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용감하게 거부한 케이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보디발이 정말 어떤 남자가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면, 요셉은 유혹을 이겨낸 겁니다. ^^ 무엇보다 어느 케이스가 되었든, 요셉은 보디발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도덕성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는 믿음을 지키는 실천을 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칼레오-d9z 그럴수도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님의 댓글은 공격성을 띠고 있는것으로 보여집니다. 영상말미마다 결론을 내지않고 있는 부분을 못보셨나봅니다. 님이 보시기에 이 영상에 오류가 있다면,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말씀해주시는게 좋은 토론자의 모습이라 보여집니다. 이런 공격적 댓글은 님의 인격과 품위를 의심하게 합니다.
원어적으로 성경을 살펴볼 수 기회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성경을 더욱 신중하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기존의 해석이 정말 그럴까 하는 질문도 더 자주 던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강의와 관련해서는 성적 유혹과 권력에의 거부 등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39장 6절에서 요셉이 이성에게 호감을 줄 만한 외모를 갖추었음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강의가 좋은 것은 고정된 답을 찾기 보다 성경에 근거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살피고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 7절의 '청하니'는 분명히 아쉬운 번역이 맞습니다 ㅜㅜ 영어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구요. 보디발의 먹다(아칼) 동사를 저렇게 해석하는 것 또한 구약학자 월터 부르그만의 논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찾아드릴게요..) ////// 팀 켈러 목사님도 7절에 대해 요셉 설교 중에서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팟캐스트에서 들었습니다.] '이 곳의 원문은 생각보다 더 강압적입니다. 이 번역에는 잘 담기지 않았지만 'SEX, NOW!'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 제 생각에도 7절은 충분히 강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고, 이 부분은 논문으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김유기. "요셉과 주인의 아내 이야기가 드러내는 폭력." 「구약논단」 29권 1호 (2023), 57.에서는 동사가 명령형이라는 점과 삼상 13장에 나오는 암논의 강제추행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면서 여주인의 언어가 굉장히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쓸데없는 거다, 뭐다 욕을 하시는 건 자유지만, 이렇게 주해를 하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원어를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원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무슨 적그리스도인 것 마냥 말씀하시는 건 지나치다고 봅니다. 또한 자신이 듣지 못한 해석이라고 해서 별난 해석도 아닙니다. 영상만 보시고서 이 사람은 본문 몇 번 보고 되는대로 뱉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많은 해석이 있고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과 개역개정을 비교만 해보셔도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시각이 펼쳐지실 겁니다. 본인의 생각과 다른 주장이 내 앞에 있다면 이것은 그저 한 사람의 주장이라고 받아들이거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박해야 합니다. 연구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한 후에 섣불리 판단하는 모습은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적어도 타당한 근거를 들면서 반박해주시면 서로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표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권력자의 말에 항상 순종해왔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권력자의 말보다 하나님을 따른 요셉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권력자에게 불순종한 요셉”이라는 표현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옆에 누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유혹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위해 누우라고 한 것 인가요? 유혹하기 위해 누으라고 한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초반에 기준을 잡은 ‘먹는(아칼)’ 히브리어는 구약에 총 700번 나오는데, 거의 무엇을 입으로 먹는 의미로 나옵니다. 그리고 가끔 불에 소멸된 것을 표현할 때 ‘아칼’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완곡하게 성관계의 의미로 표현될 수 있나요? 어느 문헌을 보고 그런 표현을 쓰신건가요? 설사 잠언 30:20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구약의 700개 표현 중 불분명한 1구절만 보고 어떻게 맞다고 확신할 수 있으신가요?
샬롬~^^ 히브리어 원문으로 해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혹에 거절하는 것보다 충동적인 욕망을 가지고 명령하는 안주인, 권력자의 명령에 거절했다는 원문해석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요셉의 경건과 담대함을 극적으로 강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더욱 은혜가 됩니다. "아칼' 먹다는 의미가 완곡한 의미의 '성관계'라는 것에 적극 동의합니다. 잠언에서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간음과 행음'은 '도둑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고 마심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잠 5:15~18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잠 9:13~17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혹시 댓글 다시는 분들 중에 비난성 글 쓰시는 분들 중에 믿는 분이 계시다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말씀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자신의 인격 먼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무례한 신자분들이 많아보입니다. 아니다 싶으면 제 갈길 가면 되지 입에 독을 품고 남발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연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서로 나누는 자립니다. 1세기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주의적으로 행동한것에 대해 예수님께 지적받았지만 율법도 없으면서 율법적인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던가요? 저마다 가르치려고만 들고 배울생각들은 없어보입니다. 빛에 대해 논하기 전에 빛을 담을 그릇이 어떤지를 먼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동의안되면 존중함 가운데 이것은 이러이러하니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은 이러이러해서 이렇다 이런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질서도 없이 불신자들이 보면 복음이 나오다가도 도망가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아름다운 논쟁자리 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원어 해석자들은 문구에 집착 문장의 흐름과 행간의 숨은 뜻을 놓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것 같지만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들은 원어를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과시하며 남이 모르는 대단하고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 듯 우쭐되는 자들이다. 문장위에 계신 하나님은 언어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다. 한글에 막혀 자신의 말씀전달이 막히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냥 종교의 신일 뿐이다.
유혹이 아니라 명령이었다는 주장에 이의가 있습니다. 제시하신 창세기 39장 7절에 “청하니”로 번역된 동사가 있습니다. 쉬크바 바로 앞에 3인칭 여성 단수 ”아말“(말하다, 요구하다 등) 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나와 함께 동침하자고 그녀가 말했습니다(요구했습니다)“ 입니다.
본문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느냐 진보적 시각에서 해석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혹이든 강압이든 요셉이 신앙으로 이겨낸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개인적으로는 강압의 의미가 더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여지네요 설교 포커스로 사용하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보여주는것이 오히려 뜬금없는데요. 창세기를 후대에 기록하게 하시면서 아주 직관적인 목적을 두고 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오히려 더 강조되야 할 점이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 이라고 봐집니다. 요셉의 삶을 죽~ 이어봤을때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에 권력(힘)의 관점에서 보자면 더 높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둘의 관계는 상하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상하관계에 있는 남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유혹했다고 볼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요셉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사람 = 미남 창39:6)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강제로 추행을 한다거나 한 것이 아닌, 매일 같이 동침하자고 이야기했고(39:10) 이내 성관계를 맺기 위해(유혹하기 위해) 아무도 없을 때 가까이 다가가 옷자락을 만지며 이야기 한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39:11-12) 그리고 요셉은 왜 옷을 놔둔채 나갔을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보자면, 요셉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자입니다. 왕의 아내이면 미녀임에는 눈에 보듯 훤합니다. 그런 미녀가 다가와 둘만 있는 공간에서 속삭이니 충동적인 마음이 들어 힘으로 내칠수도 없고, 옷을 붙잡고 있었기에 옷이라도 벗어던진채 박차고 나온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의견을 한번 던져 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권력의 힘으로 성적 요구를 하는 한 여성이 오히려 처량하게 느껴져서 한번 편을 들어 봅니다^^ 진짜 권력자라면 굳이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는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란 말에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미 요셉이 '갑'이라는게 느껴집니다. 여러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했을 때 그 여인이 받은 수치심은 상당했을 텐데요. 굳이 그 여인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사건은 남녀 간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네요.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항상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여성이 자자고 했을 때는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그것이 명령이든 간구이든 간에, '유혹'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제가 그 위치에 있지 않아봐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성적 요구를 했을 때, 단순히 힘으로만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이미 실패했음) 최대한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매력적이었다면 아마도 더욱더 그랬을 것 같네요. '유혹'이란 단어가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유혹'을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뭐 요셉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겐 유혹이 되겠네요.) 결론은, '유혹'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이 사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해석에 있어 심리적인 관점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해석은 다양한 관점을 첨가할 수록 오히려 더 정확해 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저항이라는 언어적 관점 또한 매우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범행 현장과 범인을 이해하기 위해 범죄 심리학이 필요하듯, 성경 해석에 있어 심리학적 관점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선 먹다(아칼) 동사에 대해서 게제니우스와 BDB를 찾아보았지만 consumes을 제외하고 직접 성관계를 하다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요셉과 보디발 아내의 상황을 잠언 30:20에서 먹다(아칼) 동사를 성관계로 의역해서 창세기 상황에 다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있다고 생각합니다. NRSV, SCH, BHS LXX 등을 찾아서 읽고 보면 모두 "eat"해석했고 NLT 에서만 "consumes"으로 "남녀가 밤을 보내다"라는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황을 권력자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재해석하셨는데,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성폭력(추행)에 대한 의미로 보는 것이 좋지않을까요. sexual harassment(성추행)은 지위를 이용해서 상대방에게 성욕에 관계되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폭력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해석에서 진보적인 해석이 있어야 성서해석에 발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영상을 보며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내가 악을 행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의 해석은 방향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먹고 입을 싹 닦았다라는 관용적표현이 있는 것처럼 음녀가 악을 행하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인것 같습니다.
그니까 여주인이 요셉을 계속 노예 취급하고 어서 하자 어서 하자 이러니까 요셉이 거부하니까 여주인이 요셉을 괘씸하게 보았다 이 얘기인데. 아무리 그래도 여주인의 남편이 진짜 진정한 주인이고 여주인은 그저 아내에 불과하고. 남편이 자기 아내가 노예랑 관계 맺는걸 바람직하게 볼리도 없고 그것이 공공연히 해도 되는거면 여주인이 눈짓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여주인이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했다 이러는걸 보면 그런건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짓임을 알 수 있고. 그럼 요셉이 정당하게 제대로 행동한거고. 결국 유혹한게 맞는데. 자극적인 제목과 아리달송한 내용으로 영상을 보게 만들고 뭔가 말하고싶은 본론을 바로 얘기하지않는건 그렇다치더라도 뭐랄까 원어를 알아서 약간 잘난체하는 느낌이 있음. 그래도 원어를 살펴보는건 뜻 깊은 것이다. 다만 너무 원어에만 집착해서 하나님이 제대로 보존해주신 킹제임스를 보지않고 자기 지식으로 새로운 성경을 만들려는 느낌이 없지않아있다.
다른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적만족을 얻기 위한 것인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엿보고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명확하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로지 학문적인 측면에서 논쟁거리를 만들어 이야기하고자 하는거라면 구약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유대인들을 섬기는것이 이 채널에 더 유익할듯 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관점 감사합니다! 사실 이성의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요셉의 상황에 크게 공감을 하지 못했었는데 권력의 잘못된 명령에 대항하는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감이 되네요! 근데 4:09 에 "먹고" 라는 단어를 성관계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관용구에 "입을 싹 닦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물론 히브리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먹고 입을 씻는 것"을 전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하지 않은척 하다"라는 식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것과도 잘 이어질 듯 합니다. 좋은 영상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잠언30:20절 말씀의 "아칼"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 음녀라는 말이 있어 그것과 연관시키려 하고 싶겠지만 그와 연관된 문장은 본문 하반절인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음녀가 악을(성적 죄악으로 보는 이유는 음녀가 가지는 특성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음녀 역시 부도덕한 행위 곧 간음을 한 죄를 지은 여인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을 행하고도 시치미를 뗀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관계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잠3019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녀가 함께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했고 20절에서는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는 행위 중 하나가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나면 그 흔적인 입에 남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입을 씻습니다. 지금 본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음식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닦듯이 죄를 짓고도(간음을 하고도) 마치 간음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이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그 흔적을 그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나 증인 없이는 그 죄의 유무를 가릴 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21번 부활절은 왜 1월 17일(음력)인가 ? 오늘날 세계의 모든 목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소경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활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주를 맞이하여 구원을 받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3장5절 민수기 28장 16절을 보면 정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였고 요한복음 19장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하였으니 유월절의 예비일은 유월절 전날인 13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날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잡혀 심판을 받기 시작하여 14일 아침에 재판이 끝나고 14일 오후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요한복음 18장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하였고 누가복음 23장44절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며 이때 예수님이 운명 하시었다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인 정월 14일이고 이 날부터 3일에 다시 살아 나신다 하였으니 정월 14일에 3일을 더하면 정월 17일이 되므로 부활절은 정월 17일이 분명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정월 17일을 부활절로 행사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목자들은 전부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2번 성탄절은 왜 2월 27일(음력)인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활절,성탄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아 구원을 얻겠는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성탄일이 왜 2월 27일인가 하면 예수님이 1월 17일 부활 하시어 40일간 공중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시었으니 하늘로 올라가신 날은 2월 27일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시였으니 즉 하늘로 올라가신 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이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일은 2월 27일 (음력)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무슨상관인가요? 핵심은 요셉이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양심과 정결함을 지키고자 결단했다는 것이 중요한것이죠. 성경에서 원문을 자세히 살펴 들여다보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겠지만 중요한건 성경을 온전히 깨닫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뿐이십니다. 번역된 한국어 성경에도 성령이 역사하시고 지금 번역된 성경을 보며 은혜를 받는 것도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고 부족함이 없을것이라 생각되네요. 왜? 이 성경을 읽는 성도를 주관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분이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이시니까요.
21번 부활절은 왜 1월 17일(음력)인가 ? 오늘날 세계의 모든 목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소경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활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주를 맞이하여 구원을 받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3장5절 민수기 28장 16절을 보면 정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였고 요한복음 19장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하였으니 유월절의 예비일은 유월절 전날인 13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날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잡혀 심판을 받기 시작하여 14일 아침에 재판이 끝나고 14일 오후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요한복음 18장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하였고 누가복음 23장44절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며 이때 예수님이 운명 하시었다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인 정월 14일이고 이 날부터 3일에 다시 살아 나신다 하였으니 정월 14일에 3일을 더하면 정월 17일이 되므로 부활절은 정월 17일이 분명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정월 17일을 부활절로 행사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목자들은 전부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2번 성탄절은 왜 2월 27일(음력)인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활절,성탄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아 구원을 얻겠는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성탄일이 왜 2월 27일인가 하면 예수님이 1월 17일 부활 하시어 40일간 공중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시었으니 하늘로 올라가신 날은 2월 27일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시였으니 즉 하늘로 올라가신 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이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일은 2월 27일 (음력)이 분명한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지 말고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유혹한 기사 앞에 바로 39:6절에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라고 기록하는 것에 근거해서 봐야한다. 요셉의 용모를 갑자기 기록한 것은 앞에있을 것에 대한 의도적인 기록이다. 노예로서 가지는 권력에 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다음 단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영상을 보고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댓글 적습니다 ㅋ 1. 성경을 그렇게 다 뜯어서... 말 단어 하나 하나 다 분석 해석 하다보면 ... 배가 산으로 갑니다 ㅋㅋㅋㅋ 2 뜻 풀이 해석에 모순이 있네요 ... [보디발의 아내]라는 권력자 보다는 [보디발]이 더 우위의 권력자 이기 때문에 ... 권력자의 권한에 저항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는 요셉이었다 .... 는 뜻풀이는 .... 맞지 않는 논리 입니다 ^^
*보디발의 아내:가짜 남편 거짓하나님을 섬기고 드리고 예배짓으로 간음중인 오늘 날의 기독교인들이다. *요셉: 예수 예수는 그리스도를 품고 온 설명용 껍데기다. 예수는 진리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진리다. 주는 예수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와 동침해야 하는거다. 예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지옥임을 명심해야~~
자기의 조그만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네요.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아요. 번역할때 여러 뜻을 다 기술할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분이 왜 남은 틀리고 자기가 옳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나요? 언어의 풍성함을 전달하고 싶으면 표현을 겸손하게 하세요.
중세 시대 스콜라 철학자들도 아니고 뭔 나눌 필요도 없는 해석을 쥐어짜서 나누고 있나요? 이건 이 한 구절뿐만 아니라 주변 문맥 자체가 성적인 유혹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충동적 감정을 나터낸다는 것은 주석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이고(이 관용적 표현을 구약에서 나올 때마다 비슷한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는 한 개연성 제로라고 봄), 성적인 유혹이 성립하는 것은 당연히 그녀가 권력자의 아내라는 직위 때문인데 유혹과 권력을 분리시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스콜라적인 쓸데없는 주장일 뿐. 유튜브의 성경 컨텐츠 만드는 사람들이 뭔가 기존적인 해석을 비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하러 그러는지 모르겠음. 본인이 해석을 잘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따라올텐데. 성경은 비틀라고 있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됨. 성경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 있고 능력이 있다는 걸 못 믿으시는 건 아니죠? 또 잠언 본문을 아칼을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건 직유법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입니다. 목마른 사슴이...처럼이란 시편의 문구에서 사슴이 “내 영혼”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그냥 시인이 내포적 의미로는 아무 연결이 없는 사슴과 영혼을 직유법으로 연결시킨 거죠. 잠언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다”란 동사에 정말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신다면 그건 정말로 극히 초보적인, 해석학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ㅎㅎ 결국 성경 본문은 그 내용이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 사족에 관심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지식 자랑하지 말고 진짜 왜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는지 관심 갖기 바랍니다 이단 사이비는 판을 치고 교회 성도들이 왜 신천지에 속아 넘어가는지 정말 가르쳐 줘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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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있고
논리적인 이해를 나눠주니 고맙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저 성적유혹을 이긴 요셉에서 더 나아가,
불이익을 겪더라도, 주인의 명령을 불복종한 더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게 되는군요.
그럴수 있었던게, 그 여자의 권위보다 더 위의 권위인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여야 함을 알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택을 했으니까요.
요셉은
하나님께 충성함과 동시에,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분의 법에 순종하길 원했습니다.
권력자가 명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것이든,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자는 것이든 권력자의 마음은 그와 동침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는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명령과 유혹은 이 경우에 오십보 백보인듯 싶네요. 요셉은 명령 또는 유혹하는 방식에 거절한 것이 아니라 동침에 대해 거절한 것이기에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해석은 조금 무리한 적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짓하다는 말은 현대어로 말하면 음란한 마음을 품고 계속해서 눈으로 자신의 욕구를 전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행위를 나타내는 "낫싸"(강요 혹은 열망)라는 단어가 계속적인 어떤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지속적인 자신의 속내(유혹)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청하다는 말은 우리말 성경이 좀 완곡하게 표현을 한 것뿐이며 주인이 종에게 부탁할 리는 없으니 자신과 동침할 것에 대한 명령이 맞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종을 도구를 여기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나 숨은 뜻은 전혀 없습니다. 그 문장이 가지고 있는 뜻을 어느정도 반영하여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모든 부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앞서 보디발의 명에 의해 요셉의 행위가 제안되었습니다. 즉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할 수 없는 일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요셉에게 금해진 행위는 보디발의 음식이었습니다. 먹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위임했다고 말합니다. 음식은 주인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간섭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포괄적으로 아내 역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아내를 마음대로 하라고 내 줄 남편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성적 유혹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하는 구절이 39: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바로 요셉의 용모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말을 한 이유는 곧 이 용모로 인한 유혹이 뒤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저자의 의도 때문입니다. 권력자의 명령에 불복하는 행위도 당연히 이 사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과는 크게 상관 없이 단지 권력자에 대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용기를 말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운듯 합니다.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인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문맥상 유혹에 따른 요셉의 결단으로 보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그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요셉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하나님꼐 대한 범죄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명령에 불복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인 보디발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기 위해 불의하게 접근하여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견뎌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충실한 복종이 오히려 그를 곤궁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는 의로우며 선한 자였으나 오히려 그 의와 선이 그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그런 결과를 그냥 두고 보셨을까요? 왜 요셉이 할 바를 충실해 다 행하고도 왜 하나님은 그를 곤경에 빠뜨리셨는지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성적인 유혹을 이긴 것이냐 권력자의 명령에 불복한 것이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이 본문의 핵심은 아닙니다.
보디발 아내는
권력을 의지해서
잘생긴 요셉을
유혹하고 명령함.
예를 들어 변사또가
이쁜 춘항이를 숙청들라 했을때
거절하니 옥에 갇히는 거라 똑같음
고로 요셉은 죄가 없음.
원어 몇개 안다고 거기에 맞추려고 전체적인 뜻을 뒤집어 엎는 우를 범하고 있군요. 물론 원어를 많이 아시겠지만 성경을 주신 목적도 모르고 성령님은 영감성도 모르고 이 밖에 하나님의 의도성도 집어 던지고. 이단들도 산에 들어가서 지 엇대로 해석하고 나와서 해 억고 있습니다.
성적 이슈가 나오면 “유혹”과 “음란”만 생각하지만, 계급사회에서 계급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성적 이슈는 그보다 권력형 범죄와 관련될 때가 많습니다. 보통은 남성 상급자와 여성 상급자 사이에서 일어나지만, 여성 상급자와 남성 하급자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런 상황이 고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나면, 요셉이 상급자의 불의한 명령에 불응했다고 말 할 수 있는겁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서 이성의 접근을 무조건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으로 받아들인다고 단정지으면 안 됩니다. 남성들도 사회상활 하면서 이성 권력자의 그런 접근이 유혹이 아닌 엄청난 압박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리 불쾌하고 힘들어도 대놓고 거절 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있어요. 아무리 사회가 옛날과 많이 달라서 그런 부분에 대한 사법처리가 보편화되었다고 해도 말이죠.
그래서 저는 유혹을 이긴 케이스일 수도 있고 동시에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용감하게 거부한 케이스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보디발이 정말 어떤 남자가봐도 매력적인 여자였다면, 요셉은 유혹을 이겨낸 겁니다. ^^
무엇보다 어느 케이스가 되었든, 요셉은 보디발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도덕성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는 믿음을 지키는 실천을 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칼레오-d9z 그럴수도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님의 댓글은 공격성을 띠고 있는것으로 보여집니다. 영상말미마다 결론을 내지않고 있는 부분을 못보셨나봅니다. 님이 보시기에 이 영상에 오류가 있다면,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말씀해주시는게 좋은 토론자의 모습이라 보여집니다. 이런 공격적 댓글은 님의 인격과 품위를 의심하게 합니다.
원어적으로 성경을 살펴볼 수 기회를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성경을 더욱 신중하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기존의 해석이 정말 그럴까 하는 질문도 더 자주 던져 봐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강의와 관련해서는 성적 유혹과 권력에의 거부 등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39장 6절에서 요셉이 이성에게 호감을 줄 만한 외모를 갖추었음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강의가 좋은 것은 고정된 답을 찾기 보다 성경에 근거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살피고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보게 되어 자주 청강합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7절의 '청하니'는 분명히 아쉬운 번역이 맞습니다 ㅜㅜ 영어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구요.
보디발의 먹다(아칼) 동사를 저렇게 해석하는 것 또한 구약학자 월터 부르그만의 논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찾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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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목사님도 7절에 대해 요셉 설교 중에서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팟캐스트에서 들었습니다.]
'이 곳의 원문은 생각보다 더 강압적입니다. 이 번역에는 잘 담기지 않았지만 'SEX, NOW!'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
제 생각에도 7절은 충분히 강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고, 이 부분은 논문으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김유기. "요셉과 주인의 아내 이야기가 드러내는 폭력." 「구약논단」 29권 1호 (2023), 57.에서는 동사가 명령형이라는 점과 삼상 13장에 나오는 암논의 강제추행 이야기에 나오는 단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면서 여주인의 언어가 굉장히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쓸데없는 거다, 뭐다 욕을 하시는 건 자유지만, 이렇게 주해를 하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원어를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원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무슨 적그리스도인 것 마냥 말씀하시는 건 지나치다고 봅니다.
또한 자신이 듣지 못한 해석이라고 해서 별난 해석도 아닙니다. 영상만 보시고서 이 사람은 본문 몇 번 보고 되는대로 뱉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많은 해석이 있고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과 개역개정을 비교만 해보셔도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시각이 펼쳐지실 겁니다.
본인의 생각과 다른 주장이 내 앞에 있다면 이것은 그저 한 사람의 주장이라고 받아들이거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반박해야 합니다. 연구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한 후에 섣불리 판단하는 모습은 굉장히 마음이 아픕니다.
적어도 타당한 근거를 들면서 반박해주시면 서로 발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표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권력자의 말에 항상 순종해왔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권력자의 말보다 하나님을 따른 요셉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권력자에게 불순종한 요셉”이라는 표현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 옆에 누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유혹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무엇을 하기위해 누우라고 한 것 인가요? 유혹하기 위해 누으라고 한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초반에 기준을 잡은 ‘먹는(아칼)’ 히브리어는 구약에 총 700번 나오는데, 거의 무엇을 입으로 먹는 의미로 나옵니다. 그리고 가끔 불에 소멸된 것을 표현할 때 ‘아칼’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완곡하게 성관계의 의미로 표현될 수 있나요? 어느 문헌을 보고 그런 표현을 쓰신건가요? 설사 잠언 30:20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구약의 700개 표현 중 불분명한 1구절만 보고 어떻게 맞다고 확신할 수 있으신가요?
권력의 횡포의 내용이 유혹인것 같아요~~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컨텐츠 너무 좋아요! 사실 많은 설교들을 통해 주구장창 들은 해석이 너무나 견고(?)해서 하나의 해석을 뛰어넘는 성경읽기를 하는게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생각을 확장시켜주는 컨텐츠들이 너무 반갑네요 :)
샬롬~^^ 히브리어 원문으로 해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혹에 거절하는 것보다 충동적인 욕망을 가지고 명령하는 안주인, 권력자의 명령에 거절했다는 원문해석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요셉의 경건과 담대함을 극적으로 강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더욱 은혜가 됩니다.
"아칼' 먹다는 의미가 완곡한 의미의 '성관계'라는 것에 적극 동의합니다. 잠언에서는 건강한 부부관계를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간음과 행음'은 '도둑질한 물과 몰래 먹는 떡'을 먹고 마심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잠 5:15~18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잠 9:13~17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재밌네요ㅎ 감사합니다.
요약) 기존에 성경 표현대로라면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치밀한 유혹을 당해왔던 것처럼(불륜, 원나잇 제의) 이해하기 쉬운데,
히브리 원어를 따져보니 그보다는 보디발의 아내가 권력적으로 강요한 것을 거부하고 이겨온 정황(직장 권력에 의한 성관계 강요)이 더 근거있다.
권력을 동반한 더욱 강한 유혹이 되어버리는군요.
권력 자체가 유혹덩어리죠..
배우자의 멋진모습과 미모가 유혹 그 자체죠..
문맥을 보면 되는 것을......보편적인 해석에서 벗어난 해석은 검증이 필요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뻬레쉬트 최초에 창세기39장12절에 그런데 그녀가 그의 의복과 함께 그를 붙잡았다. 말하기를 , 나와 함께 누우라. 그러자 그가 그의 의복을 그녀의 손에 버렸으며, 그리고 그가 도망하였고, 그가 그 외부로 떠났다.
혹시 댓글 다시는 분들 중에 비난성 글 쓰시는 분들 중에 믿는 분이 계시다면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말씀에 대해 논하기 전에 자신의 인격 먼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무례한 신자분들이 많아보입니다. 아니다 싶으면 제 갈길 가면 되지 입에 독을 품고 남발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연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서로 나누는 자립니다. 1세기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주의적으로 행동한것에 대해 예수님께 지적받았지만 율법도 없으면서 율법적인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던가요? 저마다 가르치려고만 들고 배울생각들은 없어보입니다. 빛에 대해 논하기 전에 빛을 담을 그릇이 어떤지를 먼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동의안되면 존중함 가운데 이것은 이러이러하니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은 이러이러해서 이렇다 이런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질서도 없이 불신자들이 보면 복음이 나오다가도 도망가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아름다운 논쟁자리 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그러게요. 만약에 제가 비그리스도인이었다면 교회를 다니고 싶던 마음이 있어도 싹 접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댓글창을 보면요. 마음이 아픕니다…
39장 전체가 그대로 그내용 사실을 증명하고있다
9절은 하나님까지 등장한다. 성경은 정확하다. 해석이 못따라가니까 문제다.
@@wildernesschristiancommuni9965
39장 전체가 그내용 그대로 있는데로 다루고 있다
9절은 기록된 사실대로 하나님도 등장한다. 성경은 정확하다
해석이 못따라가니까 문제다
그말이 그말이네요. 유혹이 본질입니다
영상을 끝까지 안보시고 비난적인 댓글을 다시는 분들이 많아보이는것 같습니다.ㅠ
원어 해석자들은 문구에 집착 문장의 흐름과 행간의 숨은 뜻을 놓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것 같지만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들은 원어를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과시하며 남이 모르는 대단하고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 듯 우쭐되는 자들이다. 문장위에 계신 하나님은 언어에 제한되는 분이 아니다. 한글에 막혀 자신의 말씀전달이 막히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냥 종교의 신일 뿐이다.
맞아요 특히 유투브에 넘 많음..
유혹이든 명령이든 무슨 차이가 있나요~???
유혹이 아니라 명령이었다는 주장에 이의가 있습니다. 제시하신 창세기 39장 7절에 “청하니”로 번역된 동사가 있습니다. 쉬크바 바로 앞에 3인칭 여성 단수 ”아말“(말하다, 요구하다 등) 입니다. 정확한 번역은 ”나와 함께 동침하자고 그녀가 말했습니다(요구했습니다)“ 입니다.
야살의 책에는 보디발의 아내 슬리카가 상사병이 들어서 요셉을 붙들고 간청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간청과 명령이 혼합된 것쯤으로 보면 좋으리라 생각되는데 참고 바랍니다.
본문을 보수적으로 해석하느냐 진보적 시각에서 해석하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혹이든 강압이든 요셉이 신앙으로 이겨낸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개인적으로는 강압의 의미가 더 드라마틱하게 받아들여지네요 설교 포커스로 사용하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힌구두나 백구두나 같은 이야기지 말장난 같은 생각. 밥 먹고 배부르면 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것처럼 마음을 홀리는 사람들의 방법 같네요
요셉의 인생을 보면 잘못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보여주는것이 오히려 뜬금없는데요. 창세기를 후대에 기록하게 하시면서 아주 직관적인 목적을 두고 기록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오히려 더 강조되야 할 점이 '유혹에 빠지지 않은 것' 이라고 봐집니다. 요셉의 삶을 죽~ 이어봤을때요.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에 권력(힘)의 관점에서 보자면 더 높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본문에서 둘의 관계는 상하 관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상하관계에 있는 남녀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유혹했다고 볼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요셉을 성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사람 = 미남 창39:6)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강제로 추행을 한다거나 한 것이 아닌, 매일 같이 동침하자고 이야기했고(39:10) 이내 성관계를 맺기 위해(유혹하기 위해) 아무도 없을 때 가까이 다가가 옷자락을 만지며 이야기 한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39:11-12)
그리고 요셉은 왜 옷을 놔둔채 나갔을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보자면,
요셉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자입니다. 왕의 아내이면 미녀임에는 눈에 보듯 훤합니다. 그런 미녀가 다가와 둘만 있는 공간에서 속삭이니 충동적인 마음이 들어 힘으로 내칠수도 없고, 옷을 붙잡고 있었기에 옷이라도 벗어던진채 박차고 나온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 의견을 한번 던져 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번 권력의 힘으로 성적 요구를 하는 한 여성이 오히려 처량하게 느껴져서 한번 편을 들어 봅니다^^
진짜 권력자라면 굳이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는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란 말에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미 요셉이 '갑'이라는게 느껴집니다. 여러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했을 때 그 여인이 받은 수치심은 상당했을 텐데요. 굳이 그 여인의 편을 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사건은 남녀 간의 문제임을 말하고 싶네요.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항상 갑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여성이 자자고 했을 때는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그것이 명령이든 간구이든 간에, '유혹'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제가 그 위치에 있지 않아봐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성적 요구를 했을 때, 단순히 힘으로만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이미 실패했음) 최대한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녀가 매력적이었다면 아마도 더욱더 그랬을 것 같네요. '유혹'이란 단어가 정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유혹'을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뭐 요셉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겐 유혹이 되겠네요.) 결론은, '유혹'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이 사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해석에 있어 심리적인 관점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해석은 다양한 관점을 첨가할 수록 오히려 더 정확해 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권력에의 저항이라는 언어적 관점 또한 매우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범행 현장과 범인을 이해하기 위해 범죄 심리학이 필요하듯, 성경 해석에 있어 심리학적 관점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영상과 댓글을 보니, 신학교육은 개인이 아니라 공적 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교수 자격을 지닌 개인의 과목이어도 그런 의식이 전제되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선 먹다(아칼) 동사에 대해서 게제니우스와 BDB를 찾아보았지만 consumes을 제외하고 직접 성관계를 하다는 용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요셉과 보디발 아내의 상황을 잠언 30:20에서 먹다(아칼) 동사를 성관계로 의역해서 창세기 상황에 다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있다고 생각합니다. NRSV, SCH, BHS LXX 등을 찾아서 읽고 보면 모두 "eat"해석했고 NLT 에서만 "consumes"으로 "남녀가 밤을 보내다"라는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황을 권력자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재해석하셨는데,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성폭력(추행)에 대한 의미로 보는 것이 좋지않을까요. sexual harassment(성추행)은 지위를 이용해서 상대방에게 성욕에 관계되는 행위를 요구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폭력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서해석에서 진보적인 해석이 있어야 성서해석에 발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영상을 보며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내가 악을 행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의 해석은 방향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먹고 입을 싹 닦았다라는 관용적표현이 있는 것처럼 음녀가 악을 행하고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인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구지 음녀라 표현 안하고 악인이라고 하겠죠
그니까 여주인이 요셉을 계속 노예 취급하고 어서 하자 어서 하자 이러니까 요셉이 거부하니까 여주인이 요셉을 괘씸하게 보았다 이 얘기인데. 아무리 그래도 여주인의 남편이 진짜 진정한 주인이고 여주인은 그저 아내에 불과하고. 남편이 자기 아내가 노예랑 관계 맺는걸 바람직하게 볼리도 없고 그것이 공공연히 해도 되는거면 여주인이 눈짓할 이유도 없고. 그리고 여주인이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했다 이러는걸 보면 그런건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짓임을 알 수 있고. 그럼 요셉이 정당하게 제대로 행동한거고. 결국 유혹한게 맞는데. 자극적인 제목과 아리달송한 내용으로 영상을 보게 만들고 뭔가 말하고싶은 본론을 바로 얘기하지않는건 그렇다치더라도 뭐랄까 원어를 알아서 약간 잘난체하는 느낌이 있음. 그래도 원어를 살펴보는건 뜻 깊은 것이다. 다만 너무 원어에만 집착해서 하나님이 제대로 보존해주신 킹제임스를 보지않고 자기 지식으로 새로운 성경을 만들려는 느낌이 없지않아있다.
창세기 39장 6절 본문에 אכל이란 단어는 없는데요? 여기서는 הלחם 즉 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전달하려는 의미는 잘 알겠으나 그 의도가 옳더라도 인용하는 원문을 바꾸시면 안될것 같습니다
다른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적만족을 얻기 위한 것인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엿보고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명확하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오로지 학문적인 측면에서 논쟁거리를 만들어 이야기하고자 하는거라면 구약의 하나님만 바라보는 유대인들을 섬기는것이 이 채널에 더 유익할듯 합니다
권력에이겨내고 유혹에 이겨내고 권력과유혹에 이겨낸 요셉... 하나님이 말씀하시는건 요셉은 하나님과동행한인물인거 같습니다.
요셉의 강직한 신앙에 대하여 구체적 설명 감사🎉드려요
미묘한 차이인데... 결국 죽음을 각오한 것은 둘 다의 결과 인 것 같습니다. 떠벌릴 수 없는 항명...ㅎㅎ 항명으로 고소할 수 없는 상황이니...ㅋ
아주 흥미로운 관점 감사합니다! 사실 이성의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요셉의 상황에 크게 공감을 하지 못했었는데 권력의 잘못된 명령에 대항하는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공감이 되네요!
근데 4:09 에 "먹고" 라는 단어를 성관계의 완곡한 표현이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관용구에 "입을 싹 닦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물론 히브리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먹고 입을 씻는 것"을 전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하지 않은척 하다"라는 식으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것과도 잘 이어질 듯 합니다.
좋은 영상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잠언30:20절 말씀의 "아칼"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것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 음녀라는 말이 있어 그것과 연관시키려 하고 싶겠지만 그와 연관된 문장은 본문 하반절인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음녀가 악을(성적 죄악으로 보는 이유는 음녀가 가지는 특성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음녀 역시 부도덕한 행위 곧 간음을 한 죄를 지은 여인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을 행하고도 시치미를 뗀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관계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잠3019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남녀가 함께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했고 20절에서는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는 행위 중 하나가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나면 그 흔적인 입에 남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입을 씻습니다. 지금 본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음식먹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닦듯이 죄를 짓고도(간음을 하고도) 마치 간음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이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그 흔적을 그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유전자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나 증인 없이는 그 죄의 유무를 가릴 수 없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설명을 듣다 보니 나뭇가지는 보이는데 숲이 보이지 않네요..
[질문]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그럼 보디발이 요셉을 형벌로서 죽이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봐야하는지요?
21번 부활절은 왜 1월 17일(음력)인가 ?
오늘날 세계의 모든 목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소경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활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주를 맞이하여 구원을 받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3장5절
민수기 28장 16절을 보면 정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였고 요한복음 19장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하였으니 유월절의 예비일은 유월절 전날인 13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날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잡혀 심판을 받기 시작하여 14일 아침에 재판이 끝나고 14일 오후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요한복음 18장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하였고 누가복음 23장44절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며 이때 예수님이 운명 하시었다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인 정월 14일이고 이 날부터 3일에 다시 살아 나신다 하였으니 정월 14일에 3일을 더하면 정월 17일이 되므로 부활절은 정월 17일이 분명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정월 17일을 부활절로 행사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목자들은 전부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2번 성탄절은 왜 2월 27일(음력)인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활절,성탄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아 구원을 얻겠는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성탄일이 왜 2월 27일인가 하면 예수님이 1월 17일 부활 하시어 40일간 공중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시었으니 하늘로 올라가신 날은 2월 27일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시였으니 즉 하늘로 올라가신 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이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일은 2월 27일 (음력)이 분명한 것입니다.
@@가을하늘-c4q-l8h 댓글에 대한 답을 이상한 글로 채워넣으셨네요. 질문은 "보디발이 요셉을 형벌로서 죽이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 봐야하는지요?" 였는데. 이 글에 대한 답변이 맞습니까?
유혹이나 강요나 그말이 그말이지…말장난으로 혼란스럽게 하지마시길 바랍니다.
왜? 요셉이 그렇게 했는지 가 중요 할듯 합니다. 권력에 불순종 했다 ? 왜 ?
그 이유가 있어야지 답이 될것 같은데요~
그리고 권력에 대한 불응이라고 해석하려면 최종 권력자가 보디발이 아니라 보디발에 아내였어야 지요, 새로운 해석을 위해 조금은 억지스러운 방향을 잡은 듯한 생각이 듭니다.
뭔 소리입니까?
권력에의한 명령은 유혹이 아니라니~~
여직원이 하면 유혹이고~~
사장부인이 하면 유혹이 아니고 명령입니까?
제발~~~성경을 아는체 하지 마세요!!!!
내가 봤을 때는 좋은 내용인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들 뿔이 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그러니깐요 다른 해석도 해볼수 있다는건데 이해가 안됨 ㅜㅜ
킹제임스권위역
[창세기 39장 7절]
그리고 이 일들 뒤에 다음 일이 일어났다. 곧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나와 함께 누워라."
야샬의 책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섭을 유혹하고 요셉때문에 병이 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요셉을 유혹했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물론 야샬의 책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성경에도 두번이나 언급된 책이니 근거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이러나 저러나 무슨상관인가요? 핵심은 요셉이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양심과 정결함을 지키고자 결단했다는 것이 중요한것이죠. 성경에서 원문을 자세히 살펴 들여다보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겠지만 중요한건 성경을 온전히 깨닫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 뿐이십니다. 번역된 한국어 성경에도 성령이 역사하시고 지금 번역된 성경을 보며 은혜를 받는 것도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하고 부족함이 없을것이라 생각되네요. 왜? 이 성경을 읽는 성도를 주관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시는분이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님이시니까요.
참 댓글들 보니 참담하네요! 유혹과 명령도 구분도 못하고 자기식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다니!
말씀을 정확히 이해 하지 않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세뇌 당한 사람들의 참담한 모습들이네요ㅠㅠ
유혹(X) 명령(O)
포도가 더 자극적이니
히브리어 잘 아는가요? 헬라어를 좀 안다하며 신약을 엉터리 해석하는 사람들을 여러번 보아왔기에 속고 싶은 마음이 들지않네요. 이런 테마는 자신있으면 논문을 써서 신학자들 끼리 충분한 토론을 하세요.
100% 공감합니다..
어설프게 이상한 논리로 성경을 왜곡하는 사람 정말 싫어요..
21번 부활절은 왜 1월 17일(음력)인가 ?
오늘날 세계의 모든 목자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소경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부활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으면 어떻게 도적같이 임하는 재림주를 맞이하여 구원을 받겠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레위기 23장5절
민수기 28장 16절을 보면 정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 하였고 요한복음 19장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때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하였으니 유월절의 예비일은 유월절 전날인 13일을 말하는 것인데 이날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잡혀 심판을 받기 시작하여 14일 아침에 재판이 끝나고 14일 오후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요한복음 18장27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하였고 누가복음 23장44절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며 이때 예수님이 운명 하시었다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인 정월 14일이고 이 날부터 3일에 다시 살아 나신다 하였으니 정월 14일에 3일을 더하면 정월 17일이 되므로 부활절은 정월 17일이 분명한 것입니다.그러므로 정월 17일을 부활절로 행사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목자들은 전부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22번 성탄절은 왜 2월 27일(음력)인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활절,성탄절 하나도 모르는 목자들에게 인도를 받아 구원을 얻겠는가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성탄일이 왜 2월 27일인가 하면 예수님이 1월 17일 부활 하시어 40일간 공중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시었으니 하늘로 올라가신 날은 2월 27일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시였으니 즉 하늘로 올라가신 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날이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일은 2월 27일 (음력)이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나의 갈급함입니다. 판단만 한다면 바리세인과 다를게 없습니다
조심하자
여러 사람을 보기만 하지말고, 자신은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비판적 수용을 하는지 그 지식 수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반론도 아니고....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니 못 믿겠다....? 그건 이상한 논리인데여.
유혹의 눈초리
유혹의 명령
좀 억지스런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지 말고 보디발의 처가 요셉을 유혹한 기사 앞에 바로 39:6절에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라고 기록하는 것에 근거해서 봐야한다. 요셉의 용모를 갑자기 기록한 것은 앞에있을 것에 대한 의도적인 기록이다. 노예로서 가지는 권력에 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다음 단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의섭리에 의해 정확한 성경은 지구인에게 두루 보급되어야한다.
지금 성경에 반하는 유다복음 도마복음 안수복음 등등은 다 개소리라고보면된다
흥미있는 주제거리이기는 한데 말씀을 한낱 지적유희의 대상으로 희화하는듯 하는 우려감도 듭니다.
당연히 사단은 유혹을 한다구요
귿이 이 주제를 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
잘 모르겠네요?
~~;
불필요한 논쟁이 아닐까요?
메세지가 달라지니 불필요한 논쟁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을 정확히 보려는 노력의 가치는 큽니다
성경내용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말씀을 왜곡 해석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거나 그분의 노한 징계를 크게 받을 것입니다.
유익한 내용 감사드립니다
하와의 아담을 유혹하는 도구로 선악과를.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던진 추파.
드릴라와 삼손의 사랑과 전쟁.
이세벨과 아합의 권력의 야합.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
헤로디아의 경거망동으로 죽은 세례요한..
히브리어 동사 אכל을 후음 고려하지 않고 읽는 것을 보니 히브리어를 잘 아는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은 둘째치고 읽는 것부터 바로 해야하지 않을까요? 😢
신학자들이 이런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건가요??.....음..
영상을 보고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댓글 적습니다 ㅋ
1. 성경을 그렇게 다 뜯어서... 말 단어 하나 하나 다 분석 해석 하다보면 ... 배가 산으로 갑니다 ㅋㅋㅋㅋ
2 뜻 풀이 해석에 모순이 있네요 ... [보디발의 아내]라는 권력자 보다는 [보디발]이 더 우위의 권력자 이기 때문에 ... 권력자의 권한에 저항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는 요셉이었다 .... 는 뜻풀이는 .... 맞지 않는 논리 입니다 ^^
아칼. 짐승 이 사람이 되는 변형시키는 것으로. 지식을 받아들어야 겠지요.
히브리 원문 올려보세요
학자들에 의한 중론이 중요함 개인적 사견은 뭐라 상상의 날개를 펴도 그냥 사견일뿐 가치없음
*보디발의 아내:가짜 남편 거짓하나님을 섬기고 드리고 예배짓으로 간음중인 오늘 날의 기독교인들이다.
*요셉: 예수 예수는 그리스도를 품고 온 설명용 껍데기다. 예수는 진리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진리다. 주는 예수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와 동침해야 하는거다. 예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지옥임을 명심해야~~
권력자의 말에 불순종한 요셉?약자에 함께한 하나님?
인간을기준으로본 시각아닌가요
요셉은 하나님앞에 죄를 지을수없다는 말씀에 순종한거죠
성경은 공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볼수 있도록 돕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했는데요?
하나님을 성경 외에서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자기의 조그만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네요.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아요. 번역할때 여러 뜻을 다 기술할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분이 왜 남은 틀리고 자기가 옳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나요? 언어의 풍성함을 전달하고 싶으면 표현을 겸손하게 하세요.
멋진데?
굳이...쓸데없는 내용이였다고 생각됨.
한번의? 권력에대한 반항이였을까? 맥락도 주제도 별로였음
중세 시대 스콜라 철학자들도 아니고
뭔 나눌 필요도 없는 해석을 쥐어짜서 나누고 있나요?
이건 이 한 구절뿐만 아니라 주변 문맥 자체가
성적인 유혹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충동적 감정을 나터낸다는 것은 주석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장이고(이 관용적 표현을 구약에서 나올 때마다 비슷한 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는 한 개연성 제로라고 봄),
성적인 유혹이 성립하는 것은 당연히 그녀가 권력자의 아내라는 직위 때문인데
유혹과 권력을 분리시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스콜라적인 쓸데없는 주장일 뿐.
유튜브의 성경 컨텐츠 만드는 사람들이 뭔가 기존적인 해석을 비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뭐하러 그러는지 모르겠음.
본인이 해석을 잘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연히 따라올텐데.
성경은 비틀라고 있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됨.
성경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 있고 능력이 있다는 걸
못 믿으시는 건 아니죠?
또 잠언 본문을 아칼을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건 직유법에 사용되는 도구일 뿐입니다.
목마른 사슴이...처럼이란 시편의 문구에서
사슴이 “내 영혼”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그냥 시인이 내포적 의미로는 아무 연결이 없는 사슴과 영혼을 직유법으로 연결시킨 거죠.
잠언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다”란 동사에 정말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신다면 그건 정말로 극히 초보적인,
해석학적 오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단어 한개를 갖고 다른뜻이 있다고 해서 성경의 근본을 달리 해석하는 ..
뭔소리야
천박한 소리
말장난으로 어그로 끌려고 환장했네
(개역 성경 📚)
39장 전체가 그대로 그내용 사실을 증명하고있다 9절은 하나님까지 등장한다
성경은 정확하다
해석이 못따라가니까 문제다
유혹에는 명령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고 요셉이 신앙을 위해 보디발의 아내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것도 맞지 않음
바울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라 했고 다니엘과 같은 결단이 사람마다 있기도 함
감옥에 갈 정도라면 사소한 명령을 거절했다 보기 어려움
애쓴다///////////
참 문해력이 아쉽네요.
위계에 의한 성적 착취?
권력이건 유혹이건 어쨌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 스타일이 아니었네요..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예수그리스도이야기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의 해석을 한글로 쓰여있는 뜻으로 풀면 안됩니다. 모든 단어는 나쁜 의미의 단어는 없습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의미를 성관계로 확대해석하면 jms 교리와 유사해지기 때문에 찰저히 배격해야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것이 하와가 어떤대상과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성적으로 더럽혀졌다는 해석을 인정하는 꼴이되기때문에 절대 말씀하신대로 확대하면 안됩니댜.
정명석은 히브리어, 헬러어도 모르는 무뇌한 입니다.
ㅎㅎ 결국 성경 본문은 그 내용이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 사족에 관심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지식 자랑하지 말고 진짜 왜 그리스도가 오셔야 하는지 관심 갖기 바랍니다
이단 사이비는 판을 치고 교회 성도들이 왜 신천지에 속아 넘어가는지
정말 가르쳐 줘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합시다
할일없는자가 관종짓거리하네 관심없다
장난하나 정말 난해 구절을 풀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