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님 강의 중 황선생님 강의가 젤 명확한거 같네요~저도 40중반이 넘었어도 역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여러 역사 강의를 봐도 선생님 강의가 젤 명쾌하고 쏙쏙들어오네요~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기왕이면 외국어 자막도 좀 넣어서 널리 널리 배포 됐음 하는 바램이네요~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황현필선생님강의를 듣다보면 특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하겠습니다..눈물이 앞을 가리네요.덕수이씨 종친이기도 해서 더더욱.. 장군의 충정이 느껴지는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라.." 우리가 이런 위대한 장수의 후손일진대 일제치하부터 오늘날까지도 친일매국노들이 아직도 득세하는 걸 보신다면 지하에서라도 통탄해 마지 않으실거 같습니다..
정말 감명깊은 강의네요,,, 감사합니다. 7살 아들이 이순신장군님에 빠져 한국사 공부에 한창이여서 엄마인 제가 이순신 장군님의 생애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게 되었네요.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이순신 장군님의 도서를 여러권 가지고 있는데 아이에게 읽어줄때마다 애잔하고 장군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아이가 좀 더 크면 강사님의 강의도 많이많이 보여줘야겠어요^^
반갑습니다 저의 아들도 초등학교1.2학년 이순신장군 대광펜이었어요 그림대회에서도 이순신장군이 부활하신듯 용맹함을 어찌나 잘 표현했던지요 당시 청나라 배 이름을 궁금해해서 어렵게 같이 알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샘은 훌륭한 위인이 많으니 커가면서 바뀔거라 했지만 22살이 된 지금도 이순신장군을 제일 존경합니다 커다란전지에 그림을 그리며 전쟁을 표현했던게 생각납니다 그 그림들을 많이 보관못한게 아쉽네요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그 내용을 첨부해서 공개해 보시면 어떨까요? 한국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있는데 그 기록들 전부 근거도 있고 실존하고 있는 자료들인데 어디서 그런 자료가 있는지 확실한 근거(글이나 추측이 아닌)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그런 자료가 있는 곳(출처)이 있으면 읽어볼 마음은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지성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은 엉망입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탐욕과 부 그리고 구차한 권력을 위해 열심히 영업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지만. 일본은 협한을 내세우는 자민당 독재가 지속되고 이런 독재를 방관 또는 지지하는 시국이니 한국보다 역사 왜곡이 더 심할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암튼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가지고 한중일이 노력한다면 분명 후세들이 더욱 돈독하게 사이좋게 지내는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일본 서점에 갔을 때 협한책들을 보고 많이 놀랬습니다. 한국 서점에는 이런 책들이 인기도 없거니와 찾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제가 구입했던 일본 역사책에는 이순신과 조선의 의병들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메일 알려 주시면 제가 첨부해서 보여드겠습니다.
@@미라클부산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쓴 내용에는 모두 증거가 있다. 당신은 나의 기사의 키워드를 사용해 간단하게 검증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이 증거에 근거해 역사를 인식하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노벨상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에 의한 교육에 의해 한국인은 소변으로 얼굴을 씻어 길에서 대변을 하는 습관을 멈췄지만 선진국 수준의 민도 수준에는 먼 것 같다.
430년이 지난 이 시대에 아직도 일부 친일 세력이 언론, 사법, 경제단체등 여러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분열 시키고 있습니다 황선생님처럼 역사를 혼신을 더한 영상 매체를 통해 알리는 훌륭한 일을하시는것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렇게 좋은 영향력으로 세월이 갈수록 깨어있는 국민들이 많아질것이며 더욱 단합하는 대한민국이 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으로 청강하였습니다!
확실히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냥 전사하신거라고 보는게 합리적인거 같네요. 자살설,은둔설 모두 선조의 질투로 인한 화가 두려워 나왔다는 반증인데, 이미 조정으로부터 그 모진 수모를 다 감내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쟁을 치루고 계신 분이 전쟁이 끝난 이후가 두려워 그런 선택을 하셨을리는 없다고 봅니다. 오늘도 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큐 두 자리 한글 읽을 줄 알면 당연한 것을 식민사학관의 근거 없는 쓰레기 논리로 자살설을 믿는가. 이분은 논리적인 강의가 아니라 당연한 생각을 쉽게 풀어 말씀하시는거에요. 무식한 인간들아 성웅 이순신을 욕되게 하지마라. 허긴 어떤 색히는 지구가 평지라고 하니까 ㅋㅋㅋㅋ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김민수-v3g 머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의 장수를 세계적으로 누가 압니까? 우리나라 역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같고 기리는 것은 좋지만 사실 과장이 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을 좀 그래로 이야기 하면 좋겠어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는 둥.....징키스칸 알랙산더 정도 되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손발이 오글거려서리
@@열혈폐인 뭘 말하고픈거야? 수비형 공격형 나눠서 공격형이 더 우수하고 수비형이라 모자란다고 얘기하고픈거니? 니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은 받나? 니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수비형 공격형 그거 구분해서 누가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나? 축구는 공격수가 인기지만 야구는 수비수 투수가 인기야. 덜 떨어진 생각 드러내지 마라.
@@treesummer5838 징기스칸 알랜산더 시저 등 정복 전쟁을 했던 공격형 장수들을 세계에서 높이 처주죠..왜야하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지면 백성 병사 장수 모두 목숨이 날아가니까 모두 절박하게 싸우지만 공격하는 군대는 수비하는 군대 보다 명분이 떨어지니 목숨을 걸기 싫을 수 밖에 장수나 병사나 그리고 수비의 10배나 되는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이길 수 있으니 더 어렵죠. 그러니 더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 랍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이시우-m7w 조선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史記'이지만 그 때부터 이미 '燕'에 지배되고 있었다. 이후 수천년간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이었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미녀를 선발하고 성노예로 중국에 헌상했다. 「공녀」라고 부른다. 때로는 중국 사신이 선택한 '공녀'는 모두 추악하다고 불평을 했기 때문에 재선발도 있었다. 조선은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독립했다. 서울독립문을 기념해 일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식민지 압력이 높아지면서 조선은 일본에 보호를 요청했다. 그것은 1910년 한일 병합이다. 일본은 조선의 노예를 해방하고, 철도와 학교를 만들고, 음식을 충분히 유통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자고 먹고 섹스를 했다. 그 결과 한반도 인구는 35년 동안 두배로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일본 인구는 300만 명 줄었지만 조선 인구는 계속 늘었다. 일본인이 싸우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섹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도 위안부를 모집했다. 현재 가치로 1월 3000만원의 고급이었기 때문에 모집에 따른 위안부는 많았지만 조선인 브로커도 이에 주목해 시골 소녀를 속였다. 일본 경찰은 악덕 브로커를 체포하고 많은 소녀를 구출했다. 그러나 불행한 경험을 한 소녀도 있었다. 이 위안부 문제의 원인이다. 한국은 4.3사건으로 제주도 주민 6만명 학살하는 등 공산세력을 무차별로 탄압했다. 그러자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해갔다. 한국 부산까지 패주했지만 김석원 장군 등 일본군 조선인 병사의 참여와 일본 무기 공급으로 역전했다. 이때 한국은 자국의 소녀를 강제연행해 아군과 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오해하고 있지만 위안부의 비극 대부분은 이때 생겼다. 일본은 한국의 국가예산의 2년분을 넘는 5억 달러를 지불하는 한일조약을 맺어 합병시대의 청산을 마치고 국민의 개인배상은 한국이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과 합의했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빈곤 때문에 일본은 1997년까지 무상자금과 기술공여만 1조원이 넘는 원조를 실시했다. 또한 2009년에는 700억 달러의 통화 스왑에 응하고 있다. 이런 경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의 은혜를 잊어 청산이 끝난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를 재제시하고 있다. 한국 부끄러움이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
@hiroono1 어이? 반갑고? 저번에 명량 강의때도 헛소리 지껄이다 깨갱하고 글삭튀하게 만든 형이야 나 기억 하지?^^ 그래 거두절미 하고 백번, 천번, 만번 양보해서 네 말이 다 맞다고 치자. 제해권을 빼앗겨 그 중요한 본진을 뚜드려 맞은건 생각 안하고 지켰다고 정신승리 하고 있는데 전쟁에 있어서 본진 수비는 당연한거야 제 얼굴에 침뱉는 글 지우고, 본진이 함락되지 않았는데 왜 그 직후 도요토미는 왜 갑자기 명과의 강화협정을 했을까? 설명해볼래? 그리고 명량해전은 진짜ㅋㅋㅋ 파낼수록 너만 곤란해지는건 왜 생각 못하니? 수 백여척의 대 함대로 단 한척의 판옥선도 깨지못한 그 전쟁을 진짜 전략적 후퇴를 억지로 패퇴라고 우겨 붙여가며 너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거야?ㅋㅋ 순천해전? 아아 순천 왜교성 전투를 말하는것 같은데 너는 수군과 육군이 싸운걸 해전이라고 그러니? 그리고 애초에 속전속결이 중요한 침략군이 돈 들여가며 성을 쌓고 버티는것 부터가 패전아니냐? 노량해전은 너네가 공식적인 항복을 한것도 아니고 그게 쪽팔려서 숫자만 믿고 후퇴한거다 너네가 약속을 받았다면 그 증거를 가져와, 세계 전쟁 그 어디에도 항복을 하고 패퇴하는 군대는 놔줄지언정 퇴각하는 적을 곱게 보내주는 경우는 없다. 반박해보시지? 또 글삭튀 하지 말고.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단순 국사 선생님인줄 알았습니다. 단순 수능준비 공무원 준비를 위해 딱 점수를 올려주는, 그정도만 학습시킬줄 아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다른 국사선생님과 비슷한 지식수준으로 강단위에 서있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얄팍한 의심뿐이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의 머릿속은 이미 깊고 깊은 역사로 가득차있네요. 선생님을 존경하며 오늘도 가르침에 고마움을 표현하고싶습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저도 감성적으로 은둔설에 기대고있던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선생님에 논리는 반박할수가 없네요. 그바탕에는 인간 이순신의 정체성과 인간됨이 기초하기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관하여 의구심을 오랫동안 품어왔던 저로서는 이영상을 통하여 말끔히 해결하게되었습니다. 노량해전이 마지막전투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던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카루마-q4j 당시 조선에는 바퀴를 가진 대차가 없었지만 일본에는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보급 루트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기 위한 전선기지가 필요했다. 이순신이 이기면 명량해협을 점거하고 있었다. 당연히 배의 정비도 거기서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순신의 당초 전투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200km나 패주한 것이다. 일본군은 한반도 서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15만명의 군대에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은 부산을 지키면 충분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도망치면 깊이 쫓을 필요는 없었다.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등 조선인 장관 클래스는 많이 죽었지만 일본인 장관 클래스에는 죽은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은 최소한의 전력으로 충분한 전과를 꼽았을 뿐이다.
난중일기 읽어 본 사람이면 자살설, 은둔설은 코웃음이 나오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조총에 맞고, 또는 고문 후유증에 매일을 고통으로 신음하실 때, 제일 아끼던 막내 아들 면이 적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때 모두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바닥을 뒹굴며 통곡하신 분이신데요. 본인의 생에 일말의 미련도 없으셨고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도 넘치던 분이셨습니다. 이순신의 품성으론 선조를 일순간 원망했었을 순 있으나 반역을 꾀하거나 미워 하진 않았을 걸로 봅니다. 그러기에는 국가와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를 다하였으며 애민 정신이 누구보다 특출난 분이섰죠. 암튼 난중일기는 그 분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몇년 전 새로 찾은 20~30일치 일기가 추가로 번역된 걸로 아는데 모두 다시 읽어 봅시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팩플레이Packplay 13척만이었던 것은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다. 조선군이 칠강 양해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의 점유를 목적으로 했지만 실패해 200km 도망친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사실이며 일본군이 부산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작전 목표 달성에 성공한 것이다. 명확한 이순신의 패전이다. 이순신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선생님 강의 매번 너무 잘 듣고 있습니다. 덕수 이씨의 후손으로써 이순신 장군님의 대한 존경심은 선생님 강의 이후로 더욱 커졌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라는 말을 잘 새겨 하루하루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이 시기 모두 화이팅입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오늘도 영상 잘보고 갑니다! 자살설은 확실히 말이 안 되죠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께서 지휘하셨던 해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할 만큼 정말 중요했던 싸움인데 여기서 총사령관이 끝까지 지휘 안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건 이순신 장군을 깎아내리는 말밖에 안 되는 거죠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영화에서 광해의 입을 빌어 장군이 가셨음에도 대장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직 못다한 말이, 아직 못다한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메세지가 마음이 아픕니다. 임란이 끝난지 불과 300 여년 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로 인한 분단, 전쟁으로 한반도는 너무나 큰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장별이 편히 쉴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갑시다.
김훈 선생님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국왕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으로 적고 있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칼의 노래를 어느 정도 참고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장면과 책의 대사를 드라마에 그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는 명나라 황제가 면사첩을 내린 것이었군요. 선생님의 강의를 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희생까지 탐탁치 않게 여겼던 국왕 선조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기가 찰 뿐입니다. 나중에 선조는 이런 질투심을 세자인 광해군에게 보이기도 하죠. 많이 늦었지만 선생님의 강의 영상 잘봤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부모님외에 세종대왕 할아버님과 이순신장군할아버님을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50대 후반 이공계열 연구직 직장인입니다. 황현필선생님을 조카들 덕분에 알아서 구독하게되었고 매주는 아니지만 한달에 한 번 정도는 토요일아침부터 특정 씨리즈를 구독하게됩 니다......그런데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일련의 강의는.....좀 쉴려고 아침부터 맥주 한캔 하면서 시청하다가 결국은 줄줄 흐르는 눈물로 마감 을해서 식구들한테 울보라고 놀림?을 받게됐습니다. ㅎㅎㅎ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난것도 내 뜻이 아니고 지금 살아가는 것도 내가 원하던 100%의 삶이 아니지만, 성웅 이순신장군 할아버님의 일생을 이렇게 황현필 선생님께서 두서있게 그리고 고증을 거쳐서 될수있는대로 편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덕분에 미래에 대한민국에 어떠한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때...성웅 이순신장군을 생각하면 최소한 가족을 지키기위해서 기꺼이 떨쳐일어날수있는 명확한 명분과 당위 성을 재확인합니다. 감사합니다......오늘 또 눈 두덩이가 부었습니다. ㅎㅎㅎ
영화 보고 계속 이순신 장군님 관련 영상만 보게 되네요.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너무 벅찬 느낌이 듭니다. T.T 정말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인품과 능력이 너무 출중합니다. 그는 진짜 신의 경지에 있는 분이세요. 후손들을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아요.....
나중에 광해군/정묘호란 하실 때쯤, 이순신 장군님 조카로써 부끄럽지 않은 기개와 정의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참 군인의 상을 보여주신 조카분 이완 장군님의 영상도 부탁드립니다. 북벌론의 동명이인 이완 장군에 비해 너무 일반인이 모르는 분이라 안타깝습니다. 장군님 돌아가실 때, 북채를 잡은 '이완'으로만 기억해 드리기엔... 실록의 기록만으로 스스로 평가해봐도, 이순신 장군님 곁에서 모시면서 정말 많은걸 배우셨고, 그 배움대로 사신분이다 느껴지는 분입니다. 똑같이 장렬한 죽음에 대해 폄하하는 이설이 존재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우리가 영의정, 삼도수군통제사, 명나라 수군도독을 쉽게 얘기해서 그렇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높은 관직이고 이 댓글을 쓰는 99%의 일반인은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사람들인 만큼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고급 정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접한 이들이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할 정도면 그게 맞았겠죠. 말씀하신대로 진린은 이순신의 시신을 분명히 봤을 겁니다. 최소 은둔설은 아닐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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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과 애민의 영원한표상 이순신 장군님. 500년 후에도 온 국민이 존경합니다. 우리 민족의 머리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우리 선조들이 피흘리고 수 많은 순국선열들이 희생하여 이어져 온 이 대한민국, 작금 친일무리들이 판치는 이 세상이원망스럽고 심한 무력감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장수보다 백성을 사랑하신 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은
"왜구를 박멸하라!"였지요..
일본의 역사 왜곡 아닐까요
자살설, 은둔설이 돌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가슴 아픕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
.ㅎ.ㅎㅡㅡㅡ
이순신 급의 사람이 숨어 살았다는 건 지금으로 치면 유재석, 강호동 같은 사람이 갑자기 연락 끊고 숨어 살았다는 것과 같음. 안 들킬 수가 없음, 도저히 말이 안 됨
@@epsdm시대기 다르져
미디어가 없던 시대에 이순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져,이름만 알지
임금 얼굴도 모르던 시대에
@@epsdm 일반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 실물을 모를텐데. 뭐가 도저히 말이 안된다는건지😂 님 지금 해군참모총장 얼굴 아세요?
@@epsdmㅋ
이순신 장군님 강의 중 황선생님 강의가 젤 명확한거 같네요~저도 40중반이 넘었어도 역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여러 역사 강의를 봐도 선생님 강의가 젤 명쾌하고 쏙쏙들어오네요~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기왕이면 외국어 자막도 좀 넣어서 널리 널리 배포 됐음 하는 바램이네요~
네.적극 공감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도 적극 공감입니다. 영어와 일어 넣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화이팅~~~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니써-w4l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hiroono1쪽아 니말데로 조선수군이 약했는데 왜 조선을 니들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남해성에서 나오지 않았냐~??
조선의 과오는 성리학이라는 잘못된 제도를 도입하면서 망조의 길을 걸은것이다
선생의 강의가 찰지게 너무나 짝짝 귀에 달라붙어 몸속 깊이 스며드니 세포속 우리의역사가 줄기세포로 생성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
성함만 떠올려고 가슴에 뭔가 뜨거운 에너지가 벅차게 타오릅니다.
너무 훌륭하신 품격과 미덕을
갖추신 크리스틱 워리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을 조상으로 모실수있는것이 한없는 영광입니다.
제 삶도 그분의 충정과 품격을 본받을수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현필선생님강의를 듣다보면 특히 이순신장군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하겠습니다..눈물이 앞을 가리네요.덕수이씨 종친이기도 해서 더더욱.. 장군의 충정이 느껴지는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라.." 우리가 이런 위대한 장수의 후손일진대 일제치하부터 오늘날까지도 친일매국노들이 아직도 득세하는 걸 보신다면 지하에서라도 통탄해 마지 않으실거 같습니다..
개같은 왜구가 또 대댓글로 배설하네
@@투움바-t1y 한글로 이간질하는 토착왜구매국노와 일본인과 중국인 들 어떻게 이들을 제거해야할지 여러사람과 의논합니다 !!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한게 일본뿐이었나 중공놈들의침략은 셀수없을만큼 수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백성들잡아가고 노략질하고 현재까지도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을 조종하며 우리대한민국을 삼키려는 야욕을 숨기지않고있다
저들의 후손이 우리의 후손을 업씬여기지 못하게하라
눈물이 핑 도네요
수많은시간이 지나도 장군님이 어떤마음이셨는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저들의 후손은 누구인지도 모르나, 원균의 후손은 원균 기녀ㅁ관을 짓는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어찌되었는지 모르겠네요.😢
황현필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후손들이 바른역사의식을
갖을수 있도록 강의 많이 해주세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순신....
생각할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하필이면 선조같은 무능하고
쪼잔한 임금을 만났을까요.
"한놈의 왜군이라도 더 죽여, 저들의 후손이 우리 후손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라"
장군님의 말씀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인고백인가요?
몽정 후기
불매운동하고, 난리발광하는 토왜들 엿맥이는거죠.
400년이 지난 지금...이순신 장군의 말씀은 정확하셨다....혐한으로 한국을 우롱하고 업신여기는 왜군들의 후손들과 그들에 피를 팔아 동족을 팔아먹었던 토착왜구들이 엄연히 지금..이시간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pubilc 왜 쫄리냐?
정말 훌륭하십니다 더 많은 국민들이 이 영상을 시청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황현필 선생님 오늘도 의미있는 강의 감사드립니다.이순신 장군께서 비록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지만 우리 한민족에게는 천만년 불멸의 이순신이십니다.
정말 감명깊은 강의네요,,, 감사합니다.
7살 아들이 이순신장군님에 빠져 한국사 공부에 한창이여서 엄마인 제가 이순신 장군님의 생애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게 되었네요.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이순신 장군님의 도서를 여러권 가지고 있는데 아이에게 읽어줄때마다 애잔하고 장군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아이가 좀 더 크면 강사님의 강의도 많이많이 보여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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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에 이순신장군 탐구하는건 영재인걸로...
@@소나무한그루 앗 감사해용 영재는 아닌데,, 즤 아버지가 역사전공이시고 시댁이 경주다 보니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친정이 하필 또 천안이여서 아산 현충사에 어릴때 많이 데려갔더니 지금 이순신 장군님 덕후됐어요 ㅋㅋㅋ^^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갑습니다 저의 아들도
초등학교1.2학년
이순신장군 대광펜이었어요
그림대회에서도 이순신장군이
부활하신듯 용맹함을 어찌나
잘 표현했던지요
당시 청나라 배 이름을 궁금해해서 어렵게 같이
알아봤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샘은 훌륭한
위인이 많으니 커가면서
바뀔거라 했지만 22살이
된 지금도
이순신장군을 제일 존경합니다
커다란전지에 그림을 그리며
전쟁을 표현했던게 생각납니다
그 그림들을 많이 보관못한게
아쉽네요
우리아들도7살인데 명랑등열심히공부하고한산꼭본답니다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당시 분들은 얼마나 슬펐을까요. 이순신 장군님은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ㅋㅋㅋㅋㅋ
그 내용을 첨부해서 공개해 보시면 어떨까요? 한국에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있는데 그 기록들 전부 근거도 있고 실존하고 있는 자료들인데 어디서 그런 자료가 있는지 확실한 근거(글이나 추측이 아닌)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그런 자료가 있는 곳(출처)이 있으면 읽어볼 마음은 있습니다. 왜곡된 역사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지성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은 엉망입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탐욕과 부 그리고 구차한 권력을 위해 열심히 영업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지만. 일본은 협한을 내세우는 자민당 독재가 지속되고 이런 독재를 방관 또는 지지하는 시국이니 한국보다 역사 왜곡이 더 심할 수 밖에 없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암튼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가지고 한중일이 노력한다면 분명 후세들이 더욱 돈독하게 사이좋게 지내는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일본 서점에 갔을 때 협한책들을 보고 많이 놀랬습니다. 한국 서점에는 이런 책들이 인기도 없거니와 찾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제가 구입했던 일본 역사책에는 이순신과 조선의 의병들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메일 알려 주시면 제가 첨부해서 보여드겠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지도자 없이도 국민들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DNA가 있습니다. 많은 침략과 잘못된 지도자들 덕에 생긴 아주 우수한 DNA라고 생각합니다.
@@미라클부산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쓴 내용에는 모두 증거가 있다. 당신은 나의 기사의 키워드를 사용해 간단하게 검증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이 증거에 근거해 역사를 인식하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노벨상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인에 의한 교육에 의해 한국인은 소변으로 얼굴을 씻어 길에서 대변을 하는 습관을 멈췄지만 선진국 수준의 민도 수준에는 먼 것 같다.
왜놈의 후손의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게 하면 안된다는 이순신 장군님 말씀에 가슴이 찡해져요. 국력이 있어야 업신여김 당하지 않음을 다시 깨닫습니다.
430년이 지난 이 시대에 아직도 일부 친일 세력이 언론, 사법, 경제단체등 여러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분열 시키고 있습니다
황선생님처럼 역사를 혼신을 더한 영상 매체를 통해 알리는 훌륭한 일을하시는것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렇게 좋은 영향력으로 세월이 갈수록 깨어있는 국민들이 많아질것이며 더욱 단합하는 대한민국이 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으로 청강하였습니다!
그냥 넌 북한으로 가라... 한국 엘리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데.. 헛소리하지 마라
@@johndavid6338 한국 엘리트중 한사람으로서 고상하게 충고해주는거다.
뭐 멍청하니 일베하고, 아니면 가면 핵인싸되고 ㅋ, 멍청하니 1도 못알아먹겠지만 말이다. ㅉㅉㅉ
@@johndavid6338위 아래 선생님 말씀 새겨들어라 임마 틀린말 하나없네 ㅋㅋ
@@johndavid6338치열하게 살아서 대장동 돈 50억 아들계좌 받아먹은 판.검사출신. 곽쌍도가 무죄냐?
@@johndavid6338치열하게 독도 섬상납하더라
황현필선생님~! 건강 잘 챙기셔서 오래오래 역사의 진실을 많이 많이 알려주세요.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강의 잘 들었습니다 노량 영하보고나서 선생님 임진왜란 강의 몇개를 또 봤습니다. 정말 재밌었고 자살설에 대해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설득력있는 분석이었습니다. 명강의 감사합니다.
이순신장군
왜적들을 물리친 위대한장군이라고만
알았는데
선생님 강의 듣고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님 동상앞에서 그냥 지나가지말고
묵념 이라도 드리고 가야할듯요...
감사하고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확실히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그냥 전사하신거라고 보는게 합리적인거 같네요. 자살설,은둔설 모두 선조의 질투로 인한 화가 두려워 나왔다는 반증인데, 이미 조정으로부터 그 모진 수모를 다 감내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쟁을 치루고 계신 분이 전쟁이 끝난 이후가 두려워 그런 선택을 하셨을리는 없다고 봅니다. 오늘도 영상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쟁후 죽는것이 무서운게 아니라, 그전까지 당하는 치욕이 두려웠겠죠...지금도 보면 검찰이 범죄 용의자의 혐의만이 수사중 드러난 여러 것들을 언론에 흘리면서 사회적으로 죽이는데...그때는 더했겠죠
선조가 암살 시켜 이순신을 전사하게 하여 영웅을 만들어줄
이유도 없겠죠
이순신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자살하지 않았었겠죠 하지만 처가 본가에까지 화가 미친다면 어찌해야할까요?? 이순신장군께서는 순직함으로써 충무공이 되셨고 집안은 무사하게 되었지않나요
아이큐 두 자리 한글 읽을 줄 알면 당연한 것을 식민사학관의 근거 없는 쓰레기 논리로 자살설을 믿는가.
이분은 논리적인 강의가 아니라 당연한 생각을 쉽게 풀어 말씀하시는거에요.
무식한 인간들아 성웅 이순신을 욕되게 하지마라.
허긴 어떤 색히는 지구가 평지라고 하니까 ㅋㅋㅋㅋ
반증 -> 방증
투명함이 결의된 역사의열정있는 황현필선생님의 강의, 들을 수록 감동이에요.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아~~~ 오호통제라 ! 이순신의 내면 속 갈등이 피부로 느껴지는강의네요 ㅠㅠ 얼마나 힘드셧을까 ! 😭😭😭😭😭 선조 18
정말 인류역사상 이런 위인은 만들려고 해도 힘든 이순신장군!!!!
ㅠㅠ존경합니다
졸은 영상 감사합니다
이순신이 만약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았다면?
선조:이순신은 어덯게 되었소?
권준: 그......그게.... 목숨을 읽으셨습니다.
선조:?????
선조:죽었다고요?
송희립:그렇습니다. ㅠㅠㅠㅠ
선조:아싸!!!! 개꿀 무야호 아모르 파티다!!!!
감완:(게X끼 ㅂㄷㅂㄷ)
이회:(저 딴게 임금이라고 아버지가 불쌍하다.)
2순신:(진짜 1대 치고싶다.)
이완:저...... 전하 쫌 나무하신 것 같습니다.
권준:맞습니다.
류성룡:뭐?! 이순신이 죽었다고?
우치적:대감.......
류성룡: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권율:이장군...........
진린:회야 내가 황재패하께 보고하여 니가 출사하게 해주마......
이회:됐습니다.
진린:ㅠㅠㅠㅠㅠㅠ
잠시후...........
우치적:아니 X발 이게 말이 됩니까?
2순신:그렇소이다.
이운룡:어덯게 사람이 죽었는대 이리 좋아할수 있습니까?
김완:그건 그렇고 손문욱 자네
김완:혹시 자네가 통제사 영감을 죽인것 아니요?
손문욱:아...아닙니다.
이운룡:그만하시요. 조방장님
권준:송군관 총탄 맞은댄 괜찮은가?
송희립:예 장군
한편.......
이영남:장군 진짜 안돌아가실 겁니까?
이몽구:그냥 놔두시요. 이첨사
이순신:네가 미쳤다고 가겠냐?
원균:다를 그냥 일들이나해...
이언량:휴.... 잠시 사냥좀 다녀오겠습니다.
남유:전 나물좀 케오겠습니다.
이순신:그래
원균:난 누가오나 보고 오갰소.
송희립:장군?
이순신:??????
송희립:장군께서 왜?
이영남:소...송군관
송희립:이첨사님?
원균:저기 송군관 우리들 본거 비밀로 해주게.....
이순신:부탁하네
진린:통재공??
이순신:장군?
이회:아버지?
이완:숙부님?
이순신:얘들아?
진린:우...우선 고금도로 가시죠...
이영남:예......
남유:뭐 뭐야?
이언량:나군관
나대용:자...장군?
잠시후.......
김완:아니 이게 어덯게 된거요?
이영남:..........
그렇게 이순신이 살아있다는게 선조에게 까지 알려지는대........
윤두수:전하 명나라 황제께서 편지를 보내셨사옵니다.
선조:이게....무슨.....?
선조: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라고?
그렇게 이순신은 1599년 영의정에 임명됐다.
유형:다시 모시는 일이 있었음 좋겠습니다.
이순신:수고들 하시게
송희립:다시봅시다. 영상대감
이순신:그래^^
이영남:장군
이순신:모두.....
이영남:잘가십시요.
권준:장군
이순신:모두 잘있으시게
그렇게 이순신은 1600년 고니시,진린과 함께 도쿠가와군을 몰살 시키고 1601년원균이 죽고
1607년 류성룡도 죽고 이순산은 병마절도사가 되고
1608년 여진족들을 소탕하고 후금(청나라)은 멸망했다.
그 이후.... 1609년
이순신:성룡형님....원균형님..... 이제모두 끝났습니다.
이회:이재 여진족,외군과의 전투가 끝난거죠?
이순신:그래.....
그렇게 이순신은 1610년 명나라로 이민을가고
1613년 조선으로 돌아오는대
임해군:야! 이순신 딸꾹 너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욕먹는거 아니야?
이순신:?????
임해군:이게 대답을 안하네? 딸꾹
임해군:이게!
퍽 퍽 퍽 퍽 퍽
임해군:죽어! 죽어!
이영남:뭐하는 짓이야?!
임해군:이게 감히!
찰싹!
이순신:으윽
임해군:ㅋㅋㅋㅋㅋㅋㅋㅋ
퍽 퍽 퍽 퍽
이영남:안돼!!!~~~~~
이순신:왜군을 경게하ㄹ 컥!
이영남:장군!!!
그렇게 이순신은 유배지에서 도망간 임해군에게
발펴죽고 이건 명나라에 까지 알려지는대.....
만력제:감히ㅂㄷㅂㄷ 우리 명나라를 구해준 야(어르신을 높혀말하는 말)를 죽여?
만력제:당장 임해군을 처형하라 명하라!
그렇게 이순신을 죽인 임해군은 능지처참형을 받고
몆 백년뒤 정조가 자기가 존경하는 이순신을 죽였다고
임해군에게 부관참시형을 내렸다.....
인류 역사까지는 아니지요 ..이장군 수비형 장군입니다. 지형 천문에 능하고 신중해고 올곧아서 방어를 잘 했지만...딱 거기까지 지요...
@@김민수-v3g 머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의 장수를 세계적으로 누가 압니까? 우리나라 역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같고 기리는 것은 좋지만 사실 과장이 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학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을 좀 그래로 이야기 하면 좋겠어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는 둥.....징키스칸 알랙산더 정도 되야 그래도 그렇게 말하지 손발이 오글거려서리
@@열혈폐인 뭘 말하고픈거야? 수비형 공격형 나눠서 공격형이 더 우수하고 수비형이라 모자란다고 얘기하고픈거니? 니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은 받나? 니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수비형 공격형 그거 구분해서 누가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나? 축구는 공격수가 인기지만 야구는 수비수 투수가 인기야. 덜 떨어진 생각 드러내지 마라.
@@treesummer5838 징기스칸 알랜산더 시저 등 정복 전쟁을 했던 공격형 장수들을 세계에서 높이 처주죠..왜야하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지면 백성 병사 장수 모두 목숨이 날아가니까 모두 절박하게 싸우지만 공격하는 군대는 수비하는 군대 보다 명분이 떨어지니 목숨을 걸기 싫을 수 밖에 장수나 병사나 그리고 수비의 10배나 되는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이길 수 있으니 더 어렵죠. 그러니 더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 랍니다.
강의를 들으며, 황현필이라는 이름을 가슴 속에 기억 합니다. 매번 세밀하면서도 과장된 추측보다는 사료에 충실하고 당시 추론 관계는 치우침이 없고 위배됨이 없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늘 강의지만 감동을 먼저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hiroono1 이새끼는 뭐야? 원균후손임? 선조후선임?
@@이시우-m7w 조선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史記'이지만 그 때부터 이미 '燕'에 지배되고 있었다. 이후 수천년간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이었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미녀를 선발하고 성노예로 중국에 헌상했다. 「공녀」라고 부른다. 때로는 중국 사신이 선택한 '공녀'는 모두 추악하다고 불평을 했기 때문에 재선발도 있었다. 조선은 일청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독립했다. 서울독립문을 기념해 일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식민지 압력이 높아지면서 조선은 일본에 보호를 요청했다. 그것은 1910년 한일 병합이다. 일본은 조선의 노예를 해방하고, 철도와 학교를 만들고, 음식을 충분히 유통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자고 먹고 섹스를 했다. 그 결과 한반도 인구는 35년 동안 두배로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일본 인구는 300만 명 줄었지만 조선 인구는 계속 늘었다. 일본인이 싸우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섹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에서도 위안부를 모집했다. 현재 가치로 1월 3000만원의 고급이었기 때문에 모집에 따른 위안부는 많았지만 조선인 브로커도 이에 주목해 시골 소녀를 속였다. 일본 경찰은 악덕 브로커를 체포하고 많은 소녀를 구출했다. 그러나 불행한 경험을 한 소녀도 있었다. 이 위안부 문제의 원인이다.
한국은 4.3사건으로 제주도 주민 6만명 학살하는 등 공산세력을 무차별로 탄압했다. 그러자 북한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공격해갔다. 한국 부산까지 패주했지만 김석원 장군 등 일본군 조선인 병사의 참여와 일본 무기 공급으로 역전했다. 이때 한국은 자국의 소녀를 강제연행해 아군과 미군의 성노예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오해하고 있지만 위안부의 비극 대부분은 이때 생겼다.
일본은 한국의 국가예산의 2년분을 넘는 5억 달러를 지불하는 한일조약을 맺어 합병시대의 청산을 마치고 국민의 개인배상은 한국이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국과 합의했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빈곤 때문에 일본은 1997년까지 무상자금과 기술공여만 1조원이 넘는 원조를 실시했다. 또한 2009년에는 700억 달러의 통화 스왑에 응하고 있다.
이런 경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일본의 은혜를 잊어 청산이 끝난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를 재제시하고 있다. 한국 부끄러움이지만, 한국의 많은 사람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
@hiroono1 어이? 반갑고? 저번에 명량 강의때도 헛소리 지껄이다 깨갱하고 글삭튀하게 만든 형이야 나 기억 하지?^^
그래 거두절미 하고 백번, 천번, 만번 양보해서 네 말이 다 맞다고 치자.
제해권을 빼앗겨 그 중요한 본진을 뚜드려 맞은건 생각 안하고 지켰다고 정신승리 하고 있는데 전쟁에 있어서 본진 수비는 당연한거야 제 얼굴에 침뱉는 글 지우고, 본진이 함락되지 않았는데 왜 그 직후 도요토미는 왜 갑자기 명과의 강화협정을 했을까? 설명해볼래? 그리고 명량해전은 진짜ㅋㅋㅋ 파낼수록 너만 곤란해지는건 왜 생각 못하니? 수 백여척의 대 함대로 단 한척의 판옥선도 깨지못한 그 전쟁을 진짜 전략적 후퇴를 억지로 패퇴라고 우겨 붙여가며 너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거야?ㅋㅋ 순천해전? 아아 순천 왜교성 전투를 말하는것 같은데 너는 수군과 육군이 싸운걸 해전이라고 그러니? 그리고 애초에 속전속결이 중요한 침략군이 돈 들여가며 성을 쌓고 버티는것 부터가 패전아니냐? 노량해전은 너네가 공식적인 항복을 한것도 아니고 그게 쪽팔려서 숫자만 믿고 후퇴한거다 너네가 약속을 받았다면 그 증거를 가져와, 세계 전쟁 그 어디에도 항복을 하고 패퇴하는 군대는 놔줄지언정 퇴각하는 적을 곱게 보내주는 경우는 없다.
반박해보시지? 또 글삭튀 하지 말고.
@@BangGood2 200km나 도망치면 배는 망가지지 않지만 전투를 이길 수는 없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명량해협의 쟁탈이다. 이순신이 이겼다면 조선군은 해협을 점거하고 부산공격에 거점으로 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대답하십시오.
이순신 장군님.
늘 가슴속 깊이 존경합니다.
그 모진환경에서 오로지 우리나라만 생각하시고 견디셨는데 가슴이 아픕니다.
조만간 아산 장군님묘소에가서 큰절올리고 술한잔 올리겠습니다.
황현필 선생님.
늘 많이배웁니다.황선생님도 우리나라의
자랑입니다.늘 건투하십시요~^^
이순신장군님 생각하니 울컥하고, 새삼 더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대해 내가 들은 가장 믿을만하고 가장 명예로운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조와 당시 기득권세력에 대한 분노는 참기 힘드네요. 훌륭한 민족에 어울리지 않는 저열한 기득권 지배세력.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단순 국사 선생님인줄 알았습니다. 단순 수능준비 공무원 준비를 위해 딱 점수를 올려주는, 그정도만 학습시킬줄 아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다른 국사선생님과 비슷한 지식수준으로 강단위에 서있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얄팍한 의심뿐이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의 머릿속은 이미 깊고 깊은 역사로 가득차있네요.
선생님을 존경하며 오늘도 가르침에 고마움을 표현하고싶습니다
정말 잘듣고 있습니다
저희 유일한 휴식시간에 보는 유튜브강으입니다
선생님 멋집니다
황현필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수많은 역사 인물들의 이름, 모든 행적들 역사내용을 토씨하나 틀리지않고
정확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강의해주시는거 들으면서
천재 라는 생각들어요
이런분과 세대를 같이한다는것만으로 영광입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무슨 증거로 그런 얘기를 하죠? 님이나 역사 날조 하지마세요
@@hiroono1님 말이요
@@hiroono1진짜 어이없내
@@inaehan 한국인은 여기에서도 역사를 날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제가 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의 역사서에 적혀 있습니다. 결국 한국인이 주장하는 역사에 증거는 없습니다. 거짓말이니까요.
저도 감성적으로 은둔설에 기대고있던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선생님에 논리는 반박할수가
없네요. 그바탕에는 인간 이순신의 정체성과 인간됨이 기초하기에 이순신장군의 죽음에 관하여 의구심을 오랫동안 품어왔던
저로서는 이영상을 통하여 말끔히 해결하게되었습니다. 노량해전이 마지막전투가 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던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hiroono1 개소리냐
@@카루마-q4j 당시 조선에는 바퀴를 가진 대차가 없었지만 일본에는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보급 루트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부산을 탈환하기 위한 전선기지가 필요했다. 이순신이 이기면 명량해협을 점거하고 있었다. 당연히 배의 정비도 거기서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순신의 당초 전투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200km나 패주한 것이다.
일본군은 한반도 서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15만명의 군대에서 수천명밖에 수군에 배치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은 부산을 지키면 충분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도망치면 깊이 쫓을 필요는 없었다.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등 조선인 장관 클래스는 많이 죽었지만 일본인 장관 클래스에는 죽은 사람이 전혀 없었다. 일본군은 최소한의 전력으로 충분한 전과를 꼽았을 뿐이다.
댓글 중에 개소리하는 인간이 있네요. 위에서 이미 털려놓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연구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열정은 우리를 강하게 만듬니다.
난중일기 읽어 본 사람이면 자살설, 은둔설은 코웃음이 나오죠.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조총에 맞고, 또는 고문 후유증에 매일을 고통으로 신음하실 때, 제일 아끼던 막내 아들 면이 적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때 모두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바닥을 뒹굴며 통곡하신 분이신데요.
본인의 생에 일말의 미련도 없으셨고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도 넘치던 분이셨습니다. 이순신의 품성으론 선조를 일순간 원망했었을 순 있으나 반역을 꾀하거나 미워 하진 않았을 걸로 봅니다. 그러기에는 국가와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를 다하였으며 애민 정신이 누구보다 특출난 분이섰죠.
암튼 난중일기는 그 분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몇년 전 새로 찾은 20~30일치 일기가 추가로 번역된 걸로 아는데 모두 다시 읽어 봅시다.
영상을끝까지보세요
@@장민호-i8g ?
대단한 강의입니다
수긍이 절로 가네요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 전사에 대한 분명하고 합리적인 선생의 고견에 존경을 보냅니다
이제 비로서 이순신장군을 더욱더
존경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수십년전 어릴 적에 부친께서 이순신장군의 은둔설에 대해 말씀하시던 것을 듣고 그럴수도 있었겠다 싶어 인상에 깊이 남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이순신장군이 좀더 오래 사셨길 바라는 마음에서 은둔설이 맞기를 바랐었다는...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팩플레이Packplay 13척만이었던 것은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다. 조선군이 칠강 양해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의 점유를 목적으로 했지만 실패해 200km 도망친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사실이며 일본군이 부산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작전 목표 달성에 성공한 것이다. 명확한 이순신의 패전이다. 이순신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팩플레이Packplay 일본군이 철수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식 역사서인 '명사'에도 "중조(명)와 속국(조선)을 이길 전망은 없고,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사망하게 되어 전쟁은 종식했다"고 서 했다.
@팩플레이Packplay 덧붙여 40척의 이타야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조선측의 자료에 신용성은 없다. 순천해전에서도 노량해전에서도 조선은 일본군에 대해 공격했지만 모두 쉽게 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중형선을 만든 것만으로 전력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자 이제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안그래도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을 선생님의 강의로 인하여 더욱 깊이 존경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항왜원조해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수백년전에 벌써 일본넘들의 노예가 되었을거요 감사히 여기시오
천재는 자신의 재능을 인류에 헌신하는 데 바치고
둔재는 자신의 재능을 인류를 핍박하는 데 바친다.
세종과 충무공께서 이 땅에 난 것만큼 큰 복이 없다.
아이슈타인은 둔재인가요? 피폭
세종!도 신하들을 중용했고 그들이 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셨죠! 세종의 업적을 깍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최고경영자들이 그러하셔야한다고봅니다!
잘 들었습니다. 현충사 근처에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님의 사망에 대해 여러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 부로 완전히 정리를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심장은 두근두근 속은 시원합니다.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통찰력이십니다. 저도 평소에 의문을 많이 가졌던 부분입니다.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저는 자살설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안시성전투 등 올린 여러가지 글을 보니, 역시 대단한 분석력을 가진 분이라 생각합니다. 구독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일본인?
선생님 강의 매번 너무 잘 듣고 있습니다.
덕수 이씨의 후손으로써 이순신 장군님의 대한 존경심은 선생님 강의 이후로 더욱 커졌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라는 말을 잘 새겨 하루하루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이 시기 모두 화이팅입니다!!
훌룡한 가문이십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hiroono1아이고 역사학자 나셨네? ㅋㅋ
@@민라디언트 한국에 역사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자로 쓰여진 역사 자료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에서는 한국인이 날조한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 등을 배운다. 거북선이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은 한자로 쓰여진 원본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hiroono1진짜 머리가 어떻게 됬나? 증거도 없으면서 소설쓰네
오늘도 영상 잘보고 갑니다! 자살설은 확실히 말이
안 되죠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께서 지휘하셨던
해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라고 할 만큼 정말
중요했던 싸움인데 여기서 총사령관이 끝까지
지휘 안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건
이순신 장군을 깎아내리는 말밖에 안 되는 거죠
거의 다 이겻는걸 보고 돌아가셧음
장군께선 본인은 원치않았지만 이미 조선 최고군벌이 되어있었음..거기다 왕과사이는 누가봐도 상극임 ..이순신 자살설의 배경엠 이순신장군이 선조에게 당할걸 걱정해서가 아니라 휘하 제장과 백성들이 자신을 옹립할까 걱정되서란 이유가 더큼
충을 선택하면 죽음.생을 원하면 반란혹은 은둔....
@@nyq12 다른 사람들의 억울한 피해를 막으려면 본인께서 다 짊어지실 수 밖에....
@@nyq12 그래서 자살한다고?
황현필선생님 강의를 들을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늘 고맙습니다.
하 정말 그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할수밖에 없었던 이순신장군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이면서 심리분석까지~
참 좋은 강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hiroono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자 실력이 부족하니 실록 원문을 읽을 수가 없지 ㅋㅋㅋㅋㅋㅋ
@@paralvientos 그것은 한국인 전원이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날조된 한글 번역까지 있어, 거기에는 일본군 앞에 거북선이 등장한다.
@@hiroono1일제시대때 조작된 역사만 선택적으로 믿는 당신은 현대판 친일파이군요 당신의 왜곡된 역사관을 다수에게 강요 마시고 더 깊이 공부하시길
@@hiroono1어리석은 것. 원문 사진이 누구나 볼 수 있게 열려있는데 날조? 이래서 멍청하면 뭣도 안되는거야..
아름다운 강의입니다
감명깊게 배웠습니다
황현필 선생님 오늘도 의미있는 강의 감사드립니다.
황현필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존경받는 장군이신데 그렇게 아픈삶을 사셔야 했다니 가슴아파서 눈물납니다
ㅠㅠ
지금시대처럼 간신들의 농간땜에 확실히는 몰겟지만 그러것갇아요 지금남조선에 한자리 얻어걸처보려고 간신들 우글바글 하잔어요 1년남았으니
그러게요. 마음이 아프네요 위대하신분☆☆☆
영화에서 광해의 입을 빌어 장군이 가셨음에도 대장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직 못다한 말이, 아직 못다한 일이 있지 않겠느냐는 메세지가 마음이 아픕니다.
임란이 끝난지 불과 300 여년 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로 인한 분단, 전쟁으로 한반도는 너무나 큰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대장별이 편히 쉴수 있는 역사를 만들어갑시다.
와. 열정적인 강의에 감동의 물결이
입니다. 황현필선샘의 나라사랑하시는맘이 느껴집니다.
좋은강의... 황현필 선생님 강의는 예능보다 재밌어요 항상🙏
이순신 장군 시리즈를 보면서 감탄과 분노가 함께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감탄과 하성군 이연에 대한 분노입니다.. 아 열 받아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동안 은둔설 믿고 있었는데 선생님 말씀 들어보니 이순신 장군님은 절대로 자살, 은둔 하실 분이 아닙니다!
김훈 선생님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국왕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으로 적고 있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칼의 노래를 어느 정도 참고한 면이 있기 때문에 그런 장면과 책의 대사를 드라마에 그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는 명나라 황제가 면사첩을 내린 것이었군요. 선생님의 강의를 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희생까지 탐탁치 않게 여겼던 국왕 선조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에
기가 찰 뿐입니다. 나중에 선조는 이런 질투심을 세자인 광해군에게 보이기도 하죠. 많이 늦었지만 선생님의 강의 영상 잘봤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부모님외에 세종대왕 할아버님과 이순신장군할아버님을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50대 후반 이공계열 연구직 직장인입니다.
황현필선생님을 조카들 덕분에 알아서 구독하게되었고 매주는 아니지만 한달에 한 번 정도는 토요일아침부터 특정 씨리즈를 구독하게됩
니다......그런데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일련의 강의는.....좀 쉴려고 아침부터 맥주 한캔 하면서 시청하다가 결국은 줄줄 흐르는 눈물로 마감
을해서 식구들한테 울보라고 놀림?을 받게됐습니다. ㅎㅎㅎ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난것도 내 뜻이 아니고 지금 살아가는 것도 내가 원하던 100%의 삶이 아니지만, 성웅 이순신장군 할아버님의 일생을
이렇게 황현필 선생님께서 두서있게 그리고 고증을 거쳐서 될수있는대로 편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덕분에 미래에 대한민국에
어떠한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때...성웅 이순신장군을 생각하면 최소한 가족을 지키기위해서 기꺼이 떨쳐일어날수있는 명확한 명분과 당위
성을 재확인합니다. 감사합니다......오늘 또 눈 두덩이가 부었습니다. ㅎㅎㅎ
선조대에 문무 안가리고 난세 영웅들이 많이 나왔는데 선조때문에 유배가거나 낙향하거나 죽은 사람이 반임..심지어는 허준도 선조 병치레 보살피다 죽으니까 책임지고 유배감.
허준 뿐만 아니라 어의는 왕의 붕어시 책임지고 파직되거나 유배를 가는게 보편적이었음. 그러다가 슬그머니 복권되곤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왕이 사망했으니까요. 악습이라면 악습이죠.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책임을 신하들에게 묻는 행위라
나쁘게 볼만한건 아니라고 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조상님의 후손이라는게 다시 한 번 자랑스럽습니다 18대손인 제가 어디서든 힘을 내어 보겠습니다
불멸의 이순신 처음 봤을땐 그저 대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고증적인 측면에서
선을 씨게 넘었네... 명장으로 둔갑한 원균 +
명량에서 싸운 김억추 + 노량에서 갑주 벗고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이순신 장군, 쓰리콤보ㄷㄷ
김명민의 열연이 모든 오류를 덮은 드라마
액션씬은 볼만해도 역사적으론 왜곡이 많죠.. 그래도 김명민의 이순신 연기는 명품이라고 봅니다
그 드라마에 황진 장군도 안나오지 않았나요... 물론 저도 황쌤 영상 보기 전까지는 이 인물에 대해 아는게 없었습니다만
@@다까끼마사오-k9c 닉값오지네ㅋㅋ
@@다까끼마사오-k9c 병신 ~
내일모래면 60인데
참눈물이 납니다.
이순신장군님이 안계셨이면
이나라가 어찌 됐을까요.
고맙습니다.황교수님
황현필선생님 말씀에 매우 공감이 됩니다
긴 전투에서의 고충을 잠시나마 풀어내시고 돌아가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강의 잘 봤습니다.
지금도 이순신장군님의 DNA가 우리국민에게 이어져 구국의 영웅이 있을꺼라 믿습니다.
면사첩은 공부가 부족해서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분들의 마음은 몇 백번이고 이해가 가지만 정황상 노량해전에서 돌아가신게 맞는 것 같습니다.
장말 마음이 뭉클해 지네요
잘봣읍니다
이순신장군님 강의는 언제들어도 울컥해집니다. . .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죽지 않았으면 분명히 선조가 죽였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국민의 지지가 왕을 넘어서는 장수를 왕이 남겨두지 않았을거라 생각해봅니다.
어떻게든 이순신을 못 살게 했겠죠.
성웅 이순신 존경합니다
저도 입니다
동감입니다.
노량에서 살았어도 선조에 의해 귀양가거나 사형 당하셨을듯 ㅠㅠ
영화 노량을 보고 다시 보니 더 가슴에 와 닿고 영화는 어떤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알게 되서 너무 좋습니다. 영화보면서 오랜만에 운것 같아요. 이순신은 사랑입니다.
날마다 듣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
영화 노량 보고 다시 와서 듣습니다.
갚은 한숨... 그리고 눈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상 제목에서 설마 자살했다.
은둔했다 라고 말씀하실까봐 걱정했습니다.
자살,은둔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존경하는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좋은영상 앞으로도 많이 부탁드릴께요
황현필선생의 이순신장군님 역사강의에 경의를 표합니다.
쉼없이 강의들었습니다
처음 강의듣는데 감명받았습니다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아 쓰바 소주한잔 마시며 강의 들었는데 선생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슬픈 역사...
좋은 강의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말씀처럼
과거부터 조정에서도 적의 돌아갈 갈을 막아라는 명령을 이행하고자 하셨으니..
죽지 않으셨다면 제해권의 수복하기 위해 더욱 분전하셨을 것입니다.
영화 보고 계속 이순신 장군님 관련 영상만 보게 되네요.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너무 벅찬 느낌이 듭니다. T.T
정말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인품과 능력이 너무 출중합니다.
그는 진짜 신의 경지에 있는 분이세요. 후손들을 위해 지금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아요.....
그러게요ㅠㅠ
저도요
저는 영화보고 여러영상들 보다 난중일기 구매했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님의난중일기책 리뷰가 넘 재밌더라구요
정말 좋은 교육영상 잘 봤습니다!
선조를 미워하는만큼 자살설,은둔설로 기울었었는데 바로잡아줘서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모든 의심을 접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
시원하게 결론을 내려주시네요
영상 발 봤습니다
올바른 역사 해석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숙제죠. 오늘도 잘 듣고 갑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더라도 신하는 목숨을 바쳐 충성(민족)을 해야한다. 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되시는 분이시죠. 쩝.
ㅣ
맞습니다. 백의종군 전에는 매달 1일과 15일 왕향해 망궐례 올리는 것이 나오는데 백의종군 이후 에는 망궐례 안나옵니다.
황선생님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황박사님..
밤마다 강의 듣고 있습니다.
설모씨..최모씨 하고는 차원이 다른
역사를 역사답게 강의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연락 꼭 부탁드립니다.
구제길 드립니다.
나중에 광해군/정묘호란 하실 때쯤, 이순신 장군님 조카로써 부끄럽지 않은 기개와 정의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참 군인의 상을 보여주신 조카분 이완 장군님의 영상도 부탁드립니다. 북벌론의 동명이인 이완 장군에 비해 너무 일반인이 모르는 분이라 안타깝습니다. 장군님 돌아가실 때, 북채를 잡은 '이완'으로만 기억해 드리기엔... 실록의 기록만으로 스스로 평가해봐도, 이순신 장군님 곁에서 모시면서 정말 많은걸 배우셨고, 그 배움대로 사신분이다 느껴지는 분입니다. 똑같이 장렬한 죽음에 대해 폄하하는 이설이 존재하는 분이기도 하고요.
적극 동감 입니다. 감사 합니다.👍👍👍👍👍👍👍
선조가 정말 정말 찌질한 왕이었구나.... 강의를 듣는데 정말 마음이 아프네....
존경하는 황샘 이순신 책나오면 바로사서보겠습니다.. 유튜브 임진왜란편 진짜~~재밌었습니다.
좋은 영상 강의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되면 월송대랑 아산 묘도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매번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노량해전 마지막 이순신장군님 전사시 같이 대장선에 타고 있었던 손묵욱이란 의문의 인물에 대해서도 약간 다루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순신은 23전 23승이 아니다. 활약한 것은 최초의 2개월만으로, 그 후는 연전 연패이다. 3승 20패 정도다. 다음은 조선 문헌의 설명이다.
부산포해전 1592년 8월29일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철수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후퇴했다. 난중 일기, 정한록
순천해전 1598년 10월 3일 명·조선군은 수륙 양면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총공격을 했지만 일본군이 격퇴해 조선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삼로의 싸움(제2차 울산성의 싸움, 사천의 싸움, 순천의 싸움)에서 명·조선군은 모든 공격으로 패퇴하여 이에 따라 삼로로 나뉘었다 명·조선군은 녹을 수 있도록 함께 무너져, 인심은 무서워져, 도피의 준비를 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 무혈철퇴의 쌍방 합의를 설치한 뒤 철퇴하려는 일본군에 대해 명국·조선군이 약속을 깨고 공격을 가했지만 일본이 격퇴하고 이순신은 죽었다.
한편, 와키자카나 도고히라하치로가 이순신에 대해 말한 기록은 없고, 와키자카의 후손이 이순신을 생각해 미역을 먹는 것도 전혀 없다. 한국인에 의한 날조이다.
@@hiroono1여기에도 이짓거리 해놨내
@@hiroono1역알못 놈
@@inaehan 한국인은 여기에서도 역사를 날조하고 있습니다.
싸우다 전사하신게 정설이네요!
좋은강의 잘들었습니다
우리가 영의정, 삼도수군통제사, 명나라 수군도독을 쉽게 얘기해서 그렇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높은 관직이고 이 댓글을 쓰는 99%의 일반인은 쳐다보지도 못할 높은 사람들인 만큼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고급 정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접한 이들이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할 정도면 그게 맞았겠죠. 말씀하신대로 진린은 이순신의 시신을 분명히 봤을 겁니다. 최소 은둔설은 아닐거에요
이순신을 띄우기 위한 노력에 불과 합니다.
선조는 멍칭이 여야 하고 원균은 전장에서 죽으면 안되고 이순신은 피살아닌 자살로 바꾸면 효과가 낳을 겁니다.
@@sgkm5141 뭐개소리야
이순신 띄우기 라니?
@@sgkm5141 애 낳냐?
드디어..! 올라왔어요 선생님
기다렸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곁에 살아계실거임
👍...
진실된 역사를 배우고싶습니다.
건강하세요.🍵
나도 믿지 않아요^^
자살이라고 믿고 싶지고 않아요.
어딘가 몸을 피하셨을거예요.
그래주셨기를 바래요.
장영실 처럼, 은둔설을 믿고 싶어요.
이순신 장군님 사랑합니다.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항상 정확한 자료를 예로들어 말씀주셔서 믿음이 갑니다~!
아...당연한건가?? 안그런 사람들이 요즘 많아서;;;;;;;;;
맞는 말씀 이순신 장군님이 살아 계셨으면 부산포는 물론 대마도까지 쫓아가서 섬멸 하셨을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