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해서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 미화됐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미화요?? 그럼 일본인들이 명성황후의 모든 사진 기록을 철저하게 치밀하게 없애고 (명성황후는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은 사람이었다는데 현재 사진한장이 남아 있는게 없음) 사실왜곡을 시킨 정도가 어느 역사를 뒤져봐도 없을 정도의....그 정도가 말도 안되게 지나친데.....여기에 균형을 맞추려면 당연히 미화를 해도 모자른거 아닙니까? 네? 미화를 좀 했다고 해서....참 나... 일본넘들이 "미화라는 것의 반대방향"을 이미 해 놓은 정도를 생각하면요 발란스 균형이 맞아야 뭐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워 질 것 아니예요?
지금이라도 한국에서 특별재판부를 만들어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형을 선고해야 합니다. 관련자 48명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일본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관련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만큼 그걸 증거자료해서 한국의 법원에서 지금이라도 그 범죄에 합당한 판결을 해서 역사에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일본인과 그 자손들도 그 범죄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고 양국 국민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해 보긴 해야 될 것이.....일본이 왜 왕을 놔두고 굳이 여왕을 그것도 여자들이 힘도 못쓰는 사회적인 구조였는데....핵심인 왕과 왕세자는 놔두고 왕비를 제거하려고 기를 썼나? 그 당시 외교관계 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으로써는 모험이었는데 굳이 핵심인 왕은 놔두고 왜 일개 왕비를 애를 써서 작전까지 펼치면서 제거해야만 했나? 그리고 왕비를 죽인뒤에 무엇이 두려워서 (일본은 당시 군사력이 한국보다 막강했는데도 왜?) 왕비의 살아생전 모든 사진들을 없애고 사진 1장이 안남게 했나? 사진도 많이도 찍었다던 그 왕비를.....죽인후에 왜 시체까지 토막내서 불태워 없애고 왕비에 대한 모든 사진을 없애고 왕비에 대한 것이라면 전부다 철저히 왜곡시키고 세뇌시키는 작업부터 해 나갔어야만 했는가?? =>>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거 아닌가? 왕비 없앤 직후 일사천리로 일본의 뜻대로 모든게 돌아가고 되었다 어찌되었든 결론적으로 보면 시기적 역사적 사실로 볼때 그랬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욕하는 우리지만 명성황후 하나 없어지고 나니까 마지막 바람막이 버팀목이 없어졌던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 대원군은 쇄국으로 (= 멸망의 지름길) 신식 무기 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데도 명상황후보다 (= 개화파) 비난받지 않는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하고 서양문물 신문물을 빠르게 흡수해서 받아들이고 있던 시기에 쇄국을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가장 치명적인 핵심타격이었다 ! 오히려 대원군이야 말로 나라 말아먹은 위인이다. 군사적 전략적 정치적 3가지 모두의 측면으로 따져 보아도 명성황후가 아니라 대원군이 핵심 멸망요인 이었다. 대원군이 아니였어도 그 누구라도 그 당시에 쇄국을 주장하고 밀어붙인 자는 누구나 멸망 요인 1등 공신인 것이다.
왕비 시해자들의 일부 후손들이 뒤늦은 사죄를 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죄에 대한 벌은 지은 만큼 돌려 받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몇분 남지않은 위안부 피해자와 조선인 강제노역 피해자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731부대의 생체실험까지...역사왜곡으로 일제의 후손들은 알지못해도 우주의 법칙은 돌아 온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명성황후를 찔러죽인 토오 가쓰아키의 칼이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되있고 칼집에는 한순간에 번개처럼 늙은여우를 베었다고 적혀있고 이칼로 명성황후를 죽였다고 쓰여진 문서까지 같이 보관되어있는거 모르냐? 또 그칼 이름은 뭔지아냐? 당연히 모르겠지
민비가 국고를 탕진하고 된장녀 처럼 살았다면 과연 일본이 저렇게 두려운 사람으로 낭인들을 보내어 민비를 시해하게 했을까 민비로 인해 조선은 곧 망할 것이다 하면서 내벼려 두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민비가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 그 만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아름슬기 민비는 친청이였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일이 지고 조선에서 철수 일본은 흥선쪽 민비도 힘이 필요해서 반대쪽 러시아와 손을 잡은 거뿐이고 러시아도 세력확장으로 남하정책을 펴서 일본이 러시아와 근접한 국가 이고 나름대로 개화로 근대화 되었고 해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주둔시켜 러시아를 견제하게 하였고 미국의 도움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러시아도 철수 하게 되었는 데 무슨 러시아가 승전국인가요 그리고 그때 당시 러시아는 안으로 혼란을 격고 있었습니다 혁명파의 내란이죠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 하였더라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급속적으로 빠르게 진행 되었을 것이고 미국도 조선을 자기쪽으로 끌어 당기려고 했을 겁니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딸이 조선을 방문하였기 때문이죠 이는 외교적으로 큰변수가 될수 있는 것이였습니다 이럴듯 일본의 식민지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러시아의 식민지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역사를 알고 얘기 하세요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ㅋㅋㅋㅋ 선택적 자료 갖고오기로 날조하는 것좀 보소 sillok.history.go.kr/id/kza_13210010_001 조령을 내리기를,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 sillok.history.go.kr/id/kza_13410012_001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하였다. sillok.history.go.kr/id/kza_13411006_001 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비(皇妃)가 도와준 성과이다. 하늘의 보살핌이 극진하고 조상들의 음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고 황후도 따라서 높아졌으니, 새로운 천명을 이어받아 선대를 빛내고 후대에 은택을 끼치게 되었다. 훌륭한 공적이 드러났으니 진실로 시호를 올려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어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자세히 법을 상고해서 공경히 천지, 종묘(宗廟), 태사(太社), 태직(太稷)에 고하도록 한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시호(諡號)를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매천야록」이나 「대원군전」은 역사적 사료로 보기 어렵다는게 일반 대부분의 학자들 지론입니다 일반인분들은 이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거 같아요 ㅠㅠ 매천야록의 황현은 궁전을 들락거리거나 궁전 근처나 즉 내부사정을 직접 옆에서 본 신하들보다도 못한, 역사의 목격자로써는 부적합한 분이 황현이었기 때문에 (= 옆에서 직접 본 사람들보다도 못한 거라면) 떠도는 소문이나 전해 들을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매천야록의 대부분의 내용을 썼다고 보는게 황현이라는 분의 그 당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봤을때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생각하지 않은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 풍문 전해들은 이야기 역사의 객관적 목격자가 아닌 황현의 주관적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매천야록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게.....참... 그렇네요 좀... 역사라는 것엔 악인과 의인 둘 다 존재하는것인데..... 한사람 입에서 다른 사람 입으로 건너간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왜곡되는지....그래서 10사람의 입만 지나가도 원래 말의 내용이 거의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는 결과가 나온 실험을 tv나 매체들을 통해서 보신분들이 있을겁니다. 떠도는 풍문이나 자기 주관적인 생각들이 주된 기록인게 객관적인 역사자료 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정부가 머리숙이고 우리국민들한테 용서를 빌어라... 일본할아버지가 용서를 구했지만은 이것가지고는 절대로 용서를 해서는 안됩니다...이영상을 보고 울컥했어요 너무 분합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놈들한테 무시만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일본정부는 반성하고 역사를 똑바로 아이들에게 똑봐로 가르켜라 일본놈들이 이렇게 잔인하고 사악한 일본놈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민자영, 즉 민비가 올바른 정치인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일국의 왕비를 이렇게 시해하는 미개한 섬나라의 민족들은 본인들의 동료 일본인들도 이것을 인정하고 사죄하는것만이 한국과 한국인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라는것을 잊지마라. 그리고 뼈저리게 반성하고 항상 사죄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것이 동남아에 당신들이 펼쳐놓은 온갖 악행을 그나마 달래는 일일 것이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2024년 지금 안하는 판국에 할리가 만무 하잖아요 일본 그땐 나 지금이나 남의 나라 침략 한 놈들 숭배나 처하고 신처럼 받들고 그게 뭐 자랑거리라고 미친 일본임 그 어느나라도 전쟁 하면 했지 왕실의 세자 왕비 시해 한적이 없음 지금도 정신도 못차리니 아직도 자랑이라고 숭배나 처하고 날조 역사나 알려주거나 안알려 주거나 사죄 하고 배상 하라는게 당연한 말인데 미친 일본 전형적인 싸패임 임신한...여성 을... 배를 ;;;독일도 그렇게 안했다 목을 누가더 베어가나 시합도 하고 지금 해도 버스 물건너갔음
민비라는 호칭은 잘못된 호칭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민비는 일제(일본 국내성)가 만든 멸칭임을 밝혔습니다. ‘민비(閔妃)’라고 불린 이유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낙리(蟾樂里) 사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민치록(閔致祿)이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생부인 민유중(閔維重)의 후손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 1866년 16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그녀가 죽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이다. 황후란 황제의 부인이란 뜻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황후가 아니었으니 명성황후란 호칭도 있을 수 없었다. 과거 명성황후 대신 널리 쓰인 호칭으로 민비(閔妃)를 들 수 있다. 민씨(閔氏)의 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다. 하지만 민비라는 호칭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민씨 성을 가진 왕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민비(閔妃)라는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공식적으로 쓰인 용어가 아닌 셈이다.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명성황후가 생존했을 때의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민비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자료에서는 대부분 ‘왕후(王后)’, ‘중궁(中宮)’, ‘중전(中殿)’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중궁민씨(中宮閔氏)’처럼 민씨를 뒤에 붙이는 경우는 있지만 민비(閔妃)처럼 성을 앞세우는 경우는 없었다. 민비의 용례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10년 9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돌아가신 민비전하(閔妃殿下)의 육순을 맞아 이왕전하(李王殿下)께서 경효전(景孝殿)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순종 황제가 1910년 병합 이후 이왕(李王)이 되었으므로 민비(閔妃)라는 말은 이 무렵 붙여진 호칭인 셈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뒤에 민비는 다시 명성황후가 되었다. 1920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는 돌아가신 이태왕 전하의 존호를 고종태황제로 올리면서 민비전하의 호칭도 명성황후로 승격시키기로 일본 궁내성이 내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제는 명칭을 민비로 격하하였다가 명성황후로 원위치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로도 격하시킨 명칭만이 그대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민비는 별로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닌 셈이다.
@펭수의날개 황현의 매천야록은 쓰레기책입니다. 근거는 1. 고종과 명성황후가 밤을 새우고 정사를 보는 것에 놀기좋아해서 라고 기록했는데, 실상은 잦은 암살미수가 있어서 밤에 잠을 못자고 정사를 보았습니다. 당시 내관, 서양의사 내지 김옥균의 책을봐도 그렇게 나오는데 황현은 놀기좋아해서라고 썼습니다. 2. 대원군이 쌓은 국부, 뭐 이런 헛소리 나오는데 무시해도 됩니다. 그런 국부 없었고요. 고종이 친정하기전과 친정한 이후 국가예산 흐름을 보아도 잠시 적자를보지 금방회복하고 계속 성장합니다. 3. 오히려 고종임기내내 처음 집권할때 480만원여이던 국가예산이 1918년 5000만원, 1919년 4000만원 정도까지 성장합니다. 그말은 고종임기동안 조선은 최대 경제호황이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4. 명성황후가 금강산 봉우리마다 1000냥을 받쳤다라고하는데 헛소리인게 계산해보면 240만원정도이고 국가예산의 절반이 나옵니다. 그냥 미친 소리죠.
@펭수의날개 황현이 중앙정계에 단한번도 진출한적이 없는 시골선비라 뜬 소문 위주의 기록이 많은데, 당시 대원군과 권력투쟁 중이였고(대원군은 7번 쿠테타시도했습니다. 거기에 임오군란에도 궁궐침입할때 압장섰다가 벼슬아치들을 죽였고, 동학농민운동에도 일본에서 소총 4000정 밀수해서 동학군 무장시켰고, 을미사변도 개입했습니다), 일제의 을미사변 전후 공작 등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악성 루머가 너무 많습니다.
지구상의 악행이란 일 은 다한 일본. 반성을 모르는 일본인.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 해 철처히 조사해야하 지만 현 정부의 태도로 는 즉 일본압잡이로 한 국인의 자식들이 또 문 제입니다. 일본인이지만 촬영에 협조해준 사람은 역사 관이 뚜렸한분이십니 다. 전 "사극의 전설" "고 김재형 감독님" 이 생 각남니다. 'KBS 그날' 피디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좋고 바른 이웃이 돼지 못하고 역사 왜곡을 뻔뻔하게 저지르고 있다. 그렇게 어린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기고 거짓을 하라고 뻔뻔하게 가르치고 있는 저들에겐 동정을 줘선 안 된다. 항상 잊지 말고 좌시해선 안 된다.
아무리 명성왕후가 개차반 같았어도 다른 나라의 왕비를 전쟁 중도 아닌 평상시에 궁에 난입해 살해한 일본인들의 극악무도한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도, 용서해서도 안 되는 행위이다. 명성왕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보니 보수니 뭐니를 떠나 한민족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은 같아야 하지 않을까?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일본의 압박이 심해져서 위험을 느낀 고종이 궁에 유럽 러시아 대사관 사람들을 묵게 하였고 그 시해 당시때 그 유럽사람들이 자세히 보았고 증언하였습니다. 러시아에 자세히 기록된 문서가 있고 티비에서도 방영하였네요. 시신은 끌고가서 불에 태웠다고 기억합니다.
명성왕후의 악행은 악행이고, 이 사건은 다른 나라의 자객이 국가지도자급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인데 포인트를 이상하게 잡는 사람들이 약간 있네요. 미국 대통령이 실정을 저지른답시고, 중국 지도자가 악행을 한답시고 한국에서 암살한다면 그 나라에서 좋아할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그날로 바로 한국 끝장이지.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시신이 있으면 증거고 없으니까 안죽인거다? 존나 무적의 논리인데? 한국말은 잘한다만 위에 선조분들 시신이 있어서 한국사람인가보네 본인은ㅋㅋ 방증이란 게 있음 모든 역사적 사실이 그런 하나하나 대응대는 증거를 들고 검증되는 게 아닐텐데 왜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었다는 친필 서명이라도 받아와야되고 이순신도 시신 불러와야되고 사도세자 죽은 뒤주도 찾아오라하지;;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루어져있다고하면 원자핵도 들고오라고할 사람이네 댓글 도배하면서 물흐리지말고 그렇게 본인이 보고싶은만큼 세상을 보고 살라면 제발 “혼자” 그리 보고 사세요 좀.. ㅋㅋㅋ 도배해놓은 거 개 소름돋네 ㄹㅇ..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창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재편찬 합니다. 그 시절 바뀌게 된 것 중 마치 우리의 역사인냥 근대까지 믿어온 것 중 하나가 나이많은 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려장 입니다. 일본 에도시대에 우바스테야마 라는 고려장과 같은 풍습이 있었음을 일본 자국내 소설, 영화로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왜놈들이 조선에 들어와 도굴을 위해 조선인을 이용하려 하나 유교사상이 뿌리깊게 박힌 조선인들이 거부하자 너희 조상은 노약자를 산에 버리는 극악무도한 놈들이니 이 묘들은 그 패륜아들의 묘이니 문제될 것 없다 라며 그들 편의를 위해 세뇌한 것 입니다. 일본의 사료 많죠. 조선사편찬을 하며 관련서적을 몰수해간게 50만권이 넘어 가나 그 사서들이 전부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를 이용해 조작, 날조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낸 것이 일본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증명해 줄 사료가 많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가진 사료가 객관성이 있고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어 있다곤 절대 말 할수 없습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시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시해가 아니라 살해죠 시해는 아랫 사람이 모시는 윗사람(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것을 시해(弑害_윗사람 죽일 '시' / 해할 '해' 직역하면 윗사람을 죽여서 해함)라고 하는데 그 당시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아랫사람이었나요? 아니죠 그런데 왜 윗사람을 죽일 때 쓰이는 말인 자꾸 시해라고 합니까 시해범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살해범이지 무슨 시해범입니까 표현부터 제대로 알고 쓰세요!!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이통영-y9v 저는 명성황후 민씨를 일본인들의 의하여 처참히 살해 당했다고 두둔하고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국뽕도 아니고요 역사를 아시려면 제대로 바르게 아시라는 겁니다. 왜곡된 역사를 알지 마시고요! 그리고 일본이 왜곡한 일본 정부가 주장한 역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없죠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누가 봐도 가해자로 보이는데 그 사람이 자신이 안 죽이고 다른 사람이 피해자와 싸우다가 죽인 거에요 저는 몰라요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가해자가 유리하게 만든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를 민비가 밉다고 그것만 보고 역사를 저버리지 마시길.. 일본이 한 짓은 세계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극악한 만행입니다.
@펭수의날개 디스커버리 채널 / BBC 채널 / History 채널 (한국 말고 미국내 채널 2000년대 초나 그 전껏들이 좋음) / 국내 KBS 역사전문 프로 다큐들 등에 출연한 전세계의 저명한 전문가들 및 학자들 인터뷰를 참고하시고 사실 진짜 깊이 있는 공부는 대영도서관 (영국) 또는 미국 & 한국내 등에 있는 오래된 책들과 자료들 및 구한말에 대한 실제 역사적 자료들만을 연구한 학자들을 만나서 인터뷰 직접 하거나 그 밑의 문하생으로 배우는게 제일 좋습니다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많아서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 분야에 이미 속해 있거나 방송계통에 종사해서 직업적으로 다큐 프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거나 아니면 미국 등의 나라에서 역사전공해서 학자로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뿐일겁니다. 2000년도 이전에 예를들어 1990년 ~ 2000년도 사이에 미국내에서 Discovery채널과 History 채널 등에서 정말로 심층적인, 퀄러티 높은 다큐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는데 이런 다큐들에는 전세계 톱 10 안에 드는 역사학자들의 인터뷰 및 전문가들이 많이 출연했었습니다. 이제는 디스커버리 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이 오락과 예능프로로 흘러서 그 높은 퀄러티는 거의 완전히 퇴색되어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다큐 전문 채널들이 한때는 고퀄러티 다큐로 떴다가 이제는 오락과 예능에만 치중하니 말입니다 다 먹고살려다 보니 타락해 가는거죠
@펭수의날개 제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시니 답변 드립니다만 일반 시민들보다 학자들이 더 맞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일반 시민들 대부분이 고서 등의 전문적인, 실제 역사자료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학자들은 그래도 그러한 역사자료에 대한 연구를 평생 해야만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자도 학자 나름이지만요. 일반인들이 역사학자들처럼 역사적 고증 등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역사학자들 얘기를 귀담아 들을 수 밖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역사학자들 조차도 조선 말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는게 별로 없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며 일부 자료들은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조작한 자료로 나중에 밝혀진 것들도 있어서...조선 말기라는 시대상을 보았을때 일본에 의한, 전쟁에 의한 역사적 자료 고증의 어려움이 매우 많은것 또한 사실입니다.
과거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아픈 역사지만 잊지 말아야할 역사고 결코 잊혀져서도 안될 통한의 사실이거늘 달나라를 오가는 21세기 주인공들은 거의 남의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현실이 안타갑기도 하고 사과는커녕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바다건너 일본 제국 주의자들의 현실또한 능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여 깨어 나십시요
명성왕후, 민비를 비롯해 그 일가가(더 나아가서는 조선조 지배계층)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 말고 국가적 주권을 지키는 것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모든게 반일에 맞춰져서 조선조 사회의 후진성, 퇴행성, 부패를 모두 잊거나 묻어버리고 가려하는데 그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교훈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후기 분명히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혈안... 자기 혁신, 개혁을 못해 망한 왕조는 지금의 북한 사회와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남의 탓(반일)만 부추기는 세상으로 변해 가나요? 역사를 극복하는게 아니라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 하는 지름길입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처음 부분에 다른나라 왕비를 시해한 사건을 설명하는데 웃으면서 말하는 사람들은 뭐지? 그리고 일본 사람들 일제 만행에 대해서 옛날 일이고 지금 사과를 바라는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던데 칼 설명하는 사람이 딱 그 입장같다 그 때 일이라면서 할말 없냐니 암말도 안하네... 독일좀 보고 배웠으면
15년전에는 참 이런 명품 다큐를 많이 방영했는데.
정말 많은 이들이 꼭 봐야하는 영상이다.
가담자중에 기자, 교육자가 의외로 많아서 꽤나 충격이네.
당시 일본의 기자들 중엔 이른바 사무라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해서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 미화됐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미화요?? 그럼 일본인들이 명성황후의 모든 사진 기록을 철저하게 치밀하게 없애고 (명성황후는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은 사람이었다는데 현재 사진한장이 남아 있는게 없음) 사실왜곡을 시킨 정도가 어느 역사를 뒤져봐도 없을 정도의....그 정도가 말도 안되게 지나친데.....여기에 균형을 맞추려면 당연히 미화를 해도 모자른거 아닙니까? 네? 미화를 좀 했다고 해서....참 나... 일본넘들이 "미화라는 것의 반대방향"을 이미 해 놓은 정도를 생각하면요 발란스 균형이 맞아야 뭐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워 질 것 아니예요?
ㅇㅇ 심지어 야사에서 명성황후가 악녀라고 나온걸 사람들이 믿고 있는거보니 진짜 무식하다 생각함
앞으로 한국 다큐도 수출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유튜브라는 좋은 소재가 있으니 각 나라의 언어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영어요
네플릭스가 좋은 다큐를 상영하고있으니 곧 나올거라 생각해요
소중한 다큐네요. 잘 봤습니다.
지금이라도 한국에서 특별재판부를 만들어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형을 선고해야 합니다.
관련자 48명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일본재판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관련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만큼 그걸 증거자료해서 한국의 법원에서 지금이라도 그 범죄에 합당한 판결을 해서 역사에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일본인과 그 자손들도 그 범죄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고 양국 국민들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시킨겁니다
궁궐 근위대대장이 3명이나 침투에 가담했고
그들이 길을 열어주어서 800명 근위병들을 뚫고 무혈입성한겁니다
고종이 도망치고 흥선이 집권하자마자 민비를 서인으로 폐위시켜버립니다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민비 시해 사건은 용서할 수 없는사건이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이미 죽인거 밝혀졌는데 지혼자 딴소리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불태워졌으니 없어졌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몇백년이 지난 시신이 지금까지 온전하면 그게 정상임?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일제 수뇌부에서 살해 계획 짰다는 증거들 발견된지가 언젠데 친일파인 너는 딴소리냐 자꾸 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시신이 존재 하고 안하고를 왜 걸고 넘어지는거임? 말장난함?
그리고 한 가지 생각해 보긴 해야 될 것이.....일본이 왜 왕을 놔두고 굳이 여왕을 그것도 여자들이 힘도 못쓰는 사회적인 구조였는데....핵심인 왕과 왕세자는 놔두고 왕비를 제거하려고 기를 썼나? 그 당시 외교관계 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으로써는 모험이었는데 굳이 핵심인 왕은 놔두고 왜 일개 왕비를 애를 써서 작전까지 펼치면서 제거해야만 했나? 그리고 왕비를 죽인뒤에 무엇이 두려워서 (일본은 당시 군사력이 한국보다 막강했는데도 왜?) 왕비의 살아생전 모든 사진들을 없애고 사진 1장이 안남게 했나? 사진도 많이도 찍었다던 그 왕비를.....죽인후에 왜 시체까지 토막내서 불태워 없애고 왕비에 대한 모든 사진을 없애고 왕비에 대한 것이라면 전부다 철저히 왜곡시키고 세뇌시키는 작업부터 해 나갔어야만 했는가?? =>>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거 아닌가? 왕비 없앤 직후 일사천리로 일본의 뜻대로 모든게 돌아가고 되었다 어찌되었든 결론적으로 보면 시기적 역사적 사실로 볼때 그랬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욕하는 우리지만 명성황후 하나 없어지고 나니까 마지막 바람막이 버팀목이 없어졌던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 대원군은 쇄국으로 (= 멸망의 지름길) 신식 무기 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상황을 만든 장본인인데도 명상황후보다 (= 개화파) 비난받지 않는것은 무엇인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하고 서양문물 신문물을 빠르게 흡수해서 받아들이고 있던 시기에 쇄국을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가장 치명적인 핵심타격이었다 ! 오히려 대원군이야 말로 나라 말아먹은 위인이다. 군사적 전략적 정치적 3가지 모두의 측면으로 따져 보아도 명성황후가 아니라 대원군이 핵심 멸망요인 이었다. 대원군이 아니였어도 그 누구라도 그 당시에 쇄국을 주장하고 밀어붙인 자는 누구나 멸망 요인 1등 공신인 것이다.
정말 공감 가는 댓글을 여기서 만나네요…♡
적을 없애고 싶을땐 그 오른 팔을 먼저 베라❗
죽여서 득이 되는것은 일본 제국❗
그후 그들의 뜻대로 뜻을 이룬셈이죠…😳
일본어 제목과 일본어 자막으로 일본인이 볼 수있게 할 필요가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 일본인이 알아야 한국에 관한 내용이나 정보가 한국의 국내 밖에없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왕비 시해자들의 일부 후손들이
뒤늦은 사죄를 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죄에 대한 벌은 지은 만큼 돌려 받는 것이 카르마의 법칙이다.
몇분 남지않은 위안부 피해자와 조선인 강제노역 피해자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731부대의 생체실험까지...역사왜곡으로 일제의 후손들은 알지못해도 우주의 법칙은 돌아 온다.
이런 일본낭인들..저늠들 아직도 군신대우받으며 신사에 살아있다능게 늠 열받네
ㅋㅋㅋㅋㅋ어자피 능지처참 당할년 대신 죽여줬는데 군신취급 받나 안받나 뭐 어때 ㅋㅋ
너희~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이냐?
사람은 맞냐? 어쩜~이리 악마같냐..
무섭다~
@@박숙재-w2j 조선족임. 신경쓰면 지는 겁니다.
@@박숙재-w2j 너는 좀 느그 연변으로 돌아가라~
@@kay-tb5yk 고종 정실 왕비가 개ㄴ이긴 한데 마리앙뚜아네트처럼 자국민들이 처단했어야지 왜놈들이 궁에 처들어와서 여러명 학살해놓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는게 열받음
명성황후님이 잘 하셨던 잘 못 하셨던 조선의 국모셨는데 외국 사람 즉 일본 사람들이 시해를 했다는것은 말도 않되는 행동이죠
잘했으니 죽인겁니다
나라 말아먹었다면 뭐하러 죽입니까
그렇죠 죽여도 우리나라 사람이 죽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민비를 좋아하든 말든 열받아 해야 마땅
슬픕니다. 그 시해사건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는 일본인들을 보는 것이 더 가슴아프네요.
눈물로 사죄하는 분을 보니 되레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어느 나라나 양심을 잃지 않고 서로 밝혀간다면 바른 역사를 만들어가겠지요.
친인척들의 악행을 방치하고 온갖 사치로 국가재정을 낭비해 조선인들에게 고통을 준 민비의 죽음은 조선인의 입장에선 동정받기 어렵지만 일본의 만행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다.
사치로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는건 팩튼가요?
왕녀가 죽자 도성백성이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불렀다? 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것이 팩트다. 민비가 악녀인지 아닌지는 사서를 보고 판단하나 한 나라의 국모의 그 심판을 우리가 아닌 왜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drunkenlhs 국사안배우나보네 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명성황후를 찔러죽인 토오 가쓰아키의 칼이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되있고 칼집에는 한순간에 번개처럼 늙은여우를 베었다고 적혀있고 이칼로 명성황후를 죽였다고 쓰여진 문서까지 같이 보관되어있는거 모르냐? 또 그칼 이름은 뭔지아냐? 당연히 모르겠지
명성황후는 다시 조사해야 왕을 죽이지 않고 왕비를 죽인다니 굉장히 똑똑했을것이다. 지금도 잘한 대통령 하늘나라 가셨지?
이거는 올라 가야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6년전 영상인데도 아직까지 별 진전이 없군요...
인과 응보란 말이 있다. 민 황후 시해에 참가했던 놈들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를 할 수가 없다. 그 죗값은 받게 될 거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지시한
일이니 일본 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진정한 사과와 처벌이 수행 안될 땐
용서가 없는 것이다.
민비님,삼가 고인의 띵복을 빕니다.
민비가 국고를 탕진하고 된장녀 처럼 살았다면 과연 일본이 저렇게 두려운 사람으로 낭인들을 보내어 민비를 시해하게 했을까 민비로 인해 조선은 곧 망할 것이다 하면서 내벼려 두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민비가 조선의 근대화에 있어 그 만큼 아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민비가 친러파거든 러시아 한테 식민지 됬으면 우린 아직도 독립못했다 러시아는 승전국이거든 이 모지라
@@아름슬기 민비는 친청이였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일이 지고 조선에서 철수 일본은 흥선쪽 민비도 힘이 필요해서 반대쪽 러시아와 손을 잡은 거뿐이고 러시아도 세력확장으로 남하정책을 펴서 일본이 러시아와 근접한 국가 이고 나름대로 개화로 근대화 되었고 해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주둔시켜 러시아를 견제하게 하였고 미국의 도움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러시아도 철수 하게 되었는 데 무슨 러시아가 승전국인가요 그리고 그때 당시 러시아는 안으로 혼란을 격고 있었습니다 혁명파의 내란이죠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 하였더라면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급속적으로 빠르게 진행 되었을 것이고 미국도 조선을 자기쪽으로 끌어 당기려고 했을 겁니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딸이 조선을 방문하였기 때문이죠 이는 외교적으로 큰변수가 될수 있는 것이였습니다 이럴듯 일본의 식민지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러시아의 식민지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이 직접 개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역사를 알고 얘기 하세요
무도한 일본인의 본질
분명 사과 해야 합니다
민비가 쓰레기였던건 맞지만 일본인이 죽일 권리는 없지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재밌니?
좋은 말씀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나보네 근데 어쩌냐 헛소리라서 타격감 1도 없는 것 ^^ 평생 그러고 살아 잼민아 불쌍하다 인생이..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매식은 졔임 에베베베베베베 ㅋㅋㅋㅋ 너는 뇌가 90퍼 정도 잘렸자너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ㅋㅋㅋㅋ 선택적 자료 갖고오기로 날조하는 것좀 보소
sillok.history.go.kr/id/kza_13210010_001
조령을 내리기를,
"왕후(王后) 민씨(閔氏)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키고 이달 8월 22일 조령을 격소(繳銷)하라."
sillok.history.go.kr/id/kza_13410012_001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산호만세 등을 창하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배참(陪參)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면을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국궁(鞠躬), 삼무도(三舞蹈), 삼고두(三叩頭), 산호만세(山呼萬世), 산호만세(山呼萬世), 재산호만세(再山呼萬世)를 창하였다.
sillok.history.go.kr/id/kza_13411006_001
생각건대 황후 민씨(閔氏)는 영특하고 슬기로우며 착하고 온화하며 단정하고 엄숙한 자품으로 왕비에 간택되어 왕실의 빈(嬪)이 되었다. 아름다운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계승하여 정성과 효도가 두터웠고 종묘(宗廟)를 공손히 받들어 엄숙하게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궁중에서는 새벽부터 정사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짐을 일깨웠고, 태자를 낳아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복이 깃들게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 궁중 안을 다스림으로써 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때를 거듭 만나서 온갖 근심을 다 맛보았으며 사변에 대처하여서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에 합치되었고, 황후로서의 위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위태로운 상황을 편안한 데로 인도하여 태평의 기반을 다졌으니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내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2년이 되는 을미년(1895)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궁내의 사변은 너무나 불측스러운 것이어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원수를 갚지 못한 채 상복을 벗은 지금, 나의 슬픔과 동궁의 애통함은 끝이 없다.
생각건대 오늘날 큰 왕업을 중흥하여 자주 국권을 찾은 것은 실로 황비(皇妃)가 도와준 성과이다.
하늘의 보살핌이 극진하고 조상들의 음덕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되고 황후도 따라서 높아졌으니, 새로운 천명을 이어받아 선대를 빛내고 후대에 은택을 끼치게 되었다. 훌륭한 공적이 드러났으니 진실로 시호를 올려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어 해당 관청에 신칙하여 자세히 법을 상고해서 공경히 천지, 종묘(宗廟), 태사(太社), 태직(太稷)에 고하도록 한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시호(諡號)를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의와 정리에 부합되므로 큰 은택을 널리 베푸노라.
「매천야록」이나 「대원군전」은 역사적 사료로 보기 어렵다는게 일반 대부분의 학자들 지론입니다 일반인분들은 이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거 같아요 ㅠㅠ 매천야록의 황현은 궁전을 들락거리거나 궁전 근처나 즉 내부사정을 직접 옆에서 본 신하들보다도 못한, 역사의 목격자로써는 부적합한 분이 황현이었기 때문에 (= 옆에서 직접 본 사람들보다도 못한 거라면) 떠도는 소문이나 전해 들을 이야기들을 조합해서 매천야록의 대부분의 내용을 썼다고 보는게 황현이라는 분의 그 당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봤을때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생각하지 않은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 풍문 전해들은 이야기 역사의 객관적 목격자가 아닌 황현의 주관적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매천야록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는게.....참... 그렇네요 좀... 역사라는 것엔 악인과 의인 둘 다 존재하는것인데..... 한사람 입에서 다른 사람 입으로 건너간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왜곡되는지....그래서 10사람의 입만 지나가도 원래 말의 내용이 거의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는 결과가 나온 실험을 tv나 매체들을 통해서 보신분들이 있을겁니다. 떠도는 풍문이나 자기 주관적인 생각들이 주된 기록인게 객관적인 역사자료 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분명 명성황후의 그당시 정치적 실책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한 나라의 왕후를 타국의 자객이 시해했다는 사건은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정부가 머리숙이고 우리국민들한테 용서를 빌어라... 일본할아버지가 용서를 구했지만은 이것가지고는 절대로 용서를 해서는 안됩니다...이영상을 보고 울컥했어요 너무 분합니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일본놈들한테 무시만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일본정부는 반성하고 역사를 똑바로 아이들에게 똑봐로 가르켜라 일본놈들이 이렇게 잔인하고 사악한 일본놈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살인사건은
전 세계에 그 어떤 나라도
이런 처참하고 반인륜적인 살인은 없었다
전세계에 알려야한다
저 영상의 이중인격자들은
겉으로는 잘못됐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일본을 위해 잘한일이다
라고 생각한다는거
민자영, 즉 민비가 올바른 정치인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일국의 왕비를 이렇게 시해하는 미개한 섬나라의 민족들은 본인들의 동료 일본인들도 이것을 인정하고 사죄하는것만이 한국과 한국인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라는것을 잊지마라. 그리고 뼈저리게 반성하고 항상 사죄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라. 그것이 동남아에 당신들이 펼쳐놓은 온갖 악행을 그나마 달래는 일일 것이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좋아요를 한개뿐이 못 누른다는것이 천추에 한이요👍👍👍👍
2024년 지금 안하는 판국에 할리가 만무 하잖아요 일본 그땐 나 지금이나
남의 나라 침략 한 놈들 숭배나 처하고 신처럼 받들고 그게 뭐 자랑거리라고
미친 일본임 그 어느나라도 전쟁 하면 했지 왕실의 세자 왕비 시해 한적이 없음
지금도 정신도 못차리니 아직도 자랑이라고 숭배나 처하고 날조 역사나 알려주거나 안알려 주거나 사죄 하고 배상 하라는게 당연한 말인데 미친 일본
전형적인 싸패임 임신한...여성 을... 배를 ;;;독일도 그렇게 안했다 목을 누가더 베어가나 시합도 하고 지금 해도 버스 물건너갔음
나라가 나라 다워야한다.
민비라는 호칭은 잘못된 호칭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민비는 일제(일본 국내성)가 만든 멸칭임을 밝혔습니다.
‘민비(閔妃)’라고 불린 이유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낙리(蟾樂里) 사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민치록(閔致祿)이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생부인 민유중(閔維重)의 후손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玆暎)이었다. 1866년 16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그녀가 죽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이다. 황후란 황제의 부인이란 뜻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황후가 아니었으니 명성황후란 호칭도 있을 수 없었다. 과거 명성황후 대신 널리 쓰인 호칭으로 민비(閔妃)를 들 수 있다. 민씨(閔氏)의 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다.
하지만 민비라는 호칭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민씨 성을 가진 왕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 민비(閔妃)라는 용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공식적으로 쓰인 용어가 아닌 셈이다.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명성황후가 생존했을 때의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민비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자료에서는 대부분 ‘왕후(王后)’, ‘중궁(中宮)’, ‘중전(中殿)’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중궁민씨(中宮閔氏)’처럼 민씨를 뒤에 붙이는 경우는 있지만 민비(閔妃)처럼 성을 앞세우는 경우는 없었다.
민비의 용례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10년 9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돌아가신 민비전하(閔妃殿下)의 육순을 맞아 이왕전하(李王殿下)께서 경효전(景孝殿)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순종 황제가 1910년 병합 이후 이왕(李王)이 되었으므로 민비(閔妃)라는 말은 이 무렵 붙여진 호칭인 셈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뒤에 민비는 다시 명성황후가 되었다. 1920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는 돌아가신 이태왕 전하의 존호를 고종태황제로 올리면서 민비전하의 호칭도 명성황후로 승격시키기로 일본 궁내성이 내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제는 명칭을 민비로 격하하였다가 명성황후로 원위치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로도 격하시킨 명칭만이 그대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민비는 별로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닌 셈이다.
@펭수의날개 정말 황당한 것은 유시민 같은 자가 방송에 나와서 "명성황후가 아니라 민비에요."라고 무슨 자기가 깨어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죠. 굳이 일제의 멸칭이 아닌 공식명칭을 써도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펭수의날개 먼저 바른인식을 하고 싶으시면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현대사에서 고종은 무능한 왕, 명성왕후는 부패, 대원군은 권력욕 쪽으로 이미지가 잡혀있는데 그거 식민사관입니다.
@펭수의날개 황현의 매천야록은 쓰레기책입니다. 근거는
1. 고종과 명성황후가 밤을 새우고 정사를 보는 것에 놀기좋아해서 라고 기록했는데, 실상은 잦은 암살미수가 있어서 밤에 잠을 못자고 정사를 보았습니다. 당시 내관, 서양의사 내지 김옥균의 책을봐도 그렇게 나오는데 황현은 놀기좋아해서라고 썼습니다.
2. 대원군이 쌓은 국부, 뭐 이런 헛소리 나오는데 무시해도 됩니다. 그런 국부 없었고요. 고종이 친정하기전과 친정한 이후 국가예산 흐름을 보아도 잠시 적자를보지 금방회복하고 계속 성장합니다.
3. 오히려 고종임기내내 처음 집권할때 480만원여이던 국가예산이 1918년 5000만원, 1919년 4000만원 정도까지 성장합니다. 그말은 고종임기동안 조선은 최대 경제호황이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4. 명성황후가 금강산 봉우리마다 1000냥을 받쳤다라고하는데 헛소리인게 계산해보면 240만원정도이고 국가예산의 절반이 나옵니다. 그냥 미친 소리죠.
@펭수의날개 서울대학교 이태진 교수님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이책은 꼭 보시기 바랍니다.
@펭수의날개 황현이 중앙정계에 단한번도 진출한적이 없는 시골선비라 뜬 소문 위주의 기록이 많은데, 당시 대원군과 권력투쟁 중이였고(대원군은 7번 쿠테타시도했습니다. 거기에 임오군란에도 궁궐침입할때 압장섰다가 벼슬아치들을 죽였고, 동학농민운동에도 일본에서 소총 4000정 밀수해서 동학군 무장시켰고, 을미사변도 개입했습니다), 일제의 을미사변 전후 공작 등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악성 루머가 너무 많습니다.
조직적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하고서는 낭인들이 한 짓이라고 발뺌하고... 이제야 낭인들이 아닌 조직적 정치적 암살계획이었던 것을 밝히는 구나!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발뺌하고 왜곡하고..
무조건 웃는 모습이 정신적으로 정상인들이 아닌 듯 ~~😤😡🤬
한번 엎지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 애쓰지마..
지구상의 악행이란 일
은 다한 일본.
반성을 모르는 일본인.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
해 철처히 조사해야하
지만 현 정부의 태도로
는 즉 일본압잡이로 한
국인의 자식들이 또 문
제입니다.
일본인이지만 촬영에
협조해준 사람은 역사
관이 뚜렸한분이십니
다.
전 "사극의 전설" "고 김재형 감독님" 이 생
각남니다.
'KBS 그날' 피디님 수고하셨습니다.
후손들에게 조선의 왕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할리가 없지. 그냥 죽인게 아니고 죽은 시신을 모두 돌아가면서 칼로 또 찌르고 죽은 시신에 강간(시간) 하고 불로 태워버렸는데. 부끄러워서 말 했겠냐?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중국과 일본은 좋고 바른 이웃이
돼지 못하고 역사 왜곡을 뻔뻔하게 저지르고 있다. 그렇게 어린
자라나는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거짓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기고 거짓을 하라고 뻔뻔하게 가르치고 있는 저들에겐
동정을 줘선 안 된다. 항상 잊지 말고 좌시해선 안 된다.
1 우리나라 국모를 능욕하고 살인한죄
2 우리나라 왕과 왕비를 죽이고 백성을 노예로 삼았던죄
3 우리나라 역사를 난도질한죄...
4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에서 사과하지않는죄
5 범죄자들을 신으로 모시는죄 야스쿠니 신사
6 우리냐라 사람들을 학대.고문 .살해한죄
결론은 상종못할 나라다
21:40 아니 왜 믿을수없다면서 실실 웃는데? 일본은 이상한나라같다
ruclips.net/video/ZzuXi-dUhbM/видео.html
국모를 일본정부가 파견한 자객에의해
칼로 약간베어 저항못하게 한상태로
강간하고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보는 앞에서... 사죄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되나요
과거의 잘못을 일부러 들어내고싶은 사람은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하고 참회 할 수 있는 용기있는 일본인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히려 잘 했다고 포장하는 제국주의 쓰레기들도 많은데
아무리 명성왕후가 개차반 같았어도 다른 나라의 왕비를 전쟁 중도 아닌 평상시에 궁에 난입해 살해한 일본인들의 극악무도한 행위는 절대 용서할 수도, 용서해서도 안 되는 행위이다. 명성왕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보니 보수니 뭐니를 떠나 한민족이라면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은 같아야 하지 않을까?
ㅇ 민비는 죽어도돼 동학군도 못죽였는데 잘도 죽이겠다 ㅋ
고종도 황제 시호가 아니거늘 명성왕후는 뭔가요
왕의 부인으로 부를거면 그냥 민비나 중전민씨로 불러야지
명성왕후는 숙종과 순종 모친쪽에 따로 있습니다
기본은 알고 말합시다
@@HolicCaffeine 어쨌든 고종의 정비이니 왕후라 칭하는 게 맞지 않겠소? 황후라고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왕의 정비더러 왕후라 하는 것에 무슨 기본 운운한단 말이오.
그다지? 왜 그래야 되는데? 개차반같은 민비를 인본 낭인들이 죽여서 아쉬워서 그런가? 왜 생각을 강요하지? 같은민족이라는 논리로? 나치인가?
일본사람중에도올바른역사관을가진사람도있네요. 모든것이잘되었으면함니다
을미사변 때, 일본 낭인들만 들어온게 아니라, 대원군이 이들과 함께 들어왔음..개충격..
대원군이 자의해서 들어온게 아니라 일본군이 명분이 필요해서 강제로 끌려들어온 것입니다.
@@야채박사과일도사 그렇습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일본의 압박이 심해져서 위험을 느낀 고종이 궁에 유럽 러시아 대사관 사람들을 묵게 하였고 그 시해 당시때 그 유럽사람들이 자세히 보았고 증언하였습니다. 러시아에 자세히 기록된 문서가 있고 티비에서도 방영하였네요. 시신은 끌고가서 불에 태웠다고 기억합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그당시에 목격자가 있어요 러시아기사 사마틴. 그리고 영국영사관 힐리더가 현장에 있었음
@@야채박사과일도사 대원군이 자의로 들어온것입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 시해의 조선인 협력자였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에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다
저런 일반인한테 당한것을보면 궁궐 수비가 허술했네..
궁궐을활짝 열어줬지용 조선 의 호의무사가 ㅎㅎ
참고로 우장춘 아버지 우범선이 궁궐수비대장 이였는데 문을 활짝 열어줬습니다 얼마나 민비가 민심을 잃었으면 자국군인들한테도 미움을 받았을까요?
조선인 협력자가 있었습니다
대원군도 그중에 한명이었고요
@@아름슬기 민심을 잃은게 아니라
친일파들이 판치고 있었어요
명성황후가 죽자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어요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죄. 라고 했습니다
명성왕후의 악행은 악행이고, 이 사건은 다른 나라의 자객이 국가지도자급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인데 포인트를 이상하게 잡는 사람들이 약간 있네요. 미국 대통령이 실정을 저지른답시고, 중국 지도자가 악행을 한답시고 한국에서 암살한다면 그 나라에서 좋아할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그날로 바로 한국 끝장이지.
임오군란때 민비는 백성손에 죽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짜증나는년이지
일본이 일국의 황후를 시해한 것도 ㅈㄴ잘못 된 만행이고 민비가 조선을 좀먹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골때리네 ㅋㅋㅋ
시신이 어디있냐고?
아니면 뭐 살아있기라도 한가? ㅋㅋ
안죽였다는 증거는 없나? 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시신이 있으면 증거고 없으니까 안죽인거다?
존나 무적의 논리인데?
한국말은 잘한다만 위에 선조분들 시신이 있어서 한국사람인가보네 본인은ㅋㅋ
방증이란 게 있음
모든 역사적 사실이 그런 하나하나 대응대는 증거를 들고 검증되는 게 아닐텐데
왜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었다는 친필 서명이라도 받아와야되고 이순신도 시신 불러와야되고 사도세자 죽은 뒤주도 찾아오라하지;;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루어져있다고하면 원자핵도 들고오라고할 사람이네
댓글 도배하면서 물흐리지말고 그렇게 본인이 보고싶은만큼 세상을 보고 살라면 제발 “혼자” 그리 보고 사세요 좀.. ㅋㅋㅋ
도배해놓은 거 개 소름돋네 ㄹㅇ..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증거가 없다는 사람이
저딴 뉴스는 존나게 잘믿네 ㅋㅋㅋㅋ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ㄹㅇ 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 명성황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엄마가 행실이 정말정말많이나빴어 이웃집아저씨가와서 누구엄마와 그집식구들까지 개패듯패고 엄마를 죽여버렸어 누구네가족들은 이웃집아저씨가 정당하다고 느낄까요
힘없는 나라 조선 국력을길려야지요
아직도 형제끼리 싸우는 나라가 힘을 키운다? 소웃다 자빠지겟네
명성황후 가 아니라 민비라고 부르면 잡혀가나요?
누가 잡아 가나요? 진실을 말했는데요! 민자영이라 해야 된다고 봅니다!!!
민씨임
응.. 잡혀가서 전나게 쳐맞을껄??? ㅋㅋ
슬픈역사도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
과거의 역사를 잘 배워 오늘은 내일은 부끄럽지 않도록 일반국민이 깨어 있읍시다 그리고 일본의 악랄함은 과거에도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왜 이런일본을 우리가 품어야할까요?
조선왕조와 민비는 싸우는것은 둘째고 백성들의 최악의 파탄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무능함으로 나라를 통째로 갖다바쳤다는것이 전체적 정황이 맞습니다.
통채로 가져다 받쳤으면 일본에서 죽일 이유가 없다
명성황후는 일본 침략야욕의 걸림돌이었고
일본에서 거액의 뇌물을 주면 협조할것을 회유했지만
명성황후가 단박에 거절한수 시해당했다
명성황후가 죽자 일본에서는 20년 묶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110년만에 와 사과하면 뭐해 진짜 불쌍한 명성왕후 자식4명 읽고 하나마저 자식을 못얻으니 친 손자는 없죠 자연스레 서거 하신것도 아니고 일본놈 칼에 죽음을 당했으니 너무 불쌍하죠
일본의 사료는 진짜 방대하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창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재편찬 합니다. 그 시절 바뀌게 된 것 중 마치 우리의 역사인냥 근대까지 믿어온 것 중 하나가 나이많은 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려장 입니다. 일본 에도시대에 우바스테야마 라는 고려장과 같은 풍습이 있었음을 일본 자국내 소설, 영화로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왜놈들이 조선에 들어와 도굴을 위해 조선인을 이용하려 하나 유교사상이 뿌리깊게 박힌 조선인들이 거부하자 너희 조상은 노약자를 산에 버리는 극악무도한 놈들이니 이 묘들은 그 패륜아들의 묘이니 문제될 것 없다 라며 그들 편의를 위해 세뇌한 것 입니다. 일본의 사료 많죠. 조선사편찬을 하며 관련서적을 몰수해간게 50만권이 넘어 가나 그 사서들이 전부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를 이용해 조작, 날조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낸 것이 일본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증명해 줄 사료가 많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가진 사료가 객관성이 있고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되어 있다곤 절대 말 할수 없습니다.
대원군을 앞세웠다는 부분 역사 오류 같아요 대원군은 삼고초려 끝에 겨우 가마에 올랐으며 동조하진 않았고 떠났습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송도 (목포) 매립
송도 신사
Japanese temple
한일협정에의해 일본으로부터 받은보상금속에는 분명히 명성황후
시해사건에관한문제는 포함되어있지 않읍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확실하게 알고있어야합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민씨 너무 싫어!!
내가 전생에 노비였는지 농민이였는지 몰라도 너무 싫음
군인도아니고 일반인들이 십시일반모여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이다니,,
처음 나오는 할아버지 참 일본인이시네. 저런분이 많아져야 세계평화가 빨라지는데
열쇠고리 소품은 용도가 무엇인가요. 민비꺼라는 증표 있나요
민비인지 황후인지 참 그래도 조선이라는나라의 왕비였다 근데 외국인이 죽엿다
그럼 그게 일본이였든 중국이였든 그어느나라라도 사과는 받아야하지않나?
우째 자국인 우리나라사람들이
죽을짓을해다니 죽어마땅하다니
생각이없는건가?? 아무리 힘이없고
무너져가는 나라였다해도 100여년전에
살았던 우리나라 사람이다!
죽임을지시하고 실행으로옮겨 살인을했다면 그누구든 어느나라든 사과받아야한다 알겠나? 생각좀하고 댓글을 달아
민비를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냐?
사무라이 40명이 800명 근위병을 뚫고 무혈입성했다
그 사무라이들은 분신술을 쓰는 닌자들이었을까? ㅋㅋㅋ
근위대대장 우범선을 검색해봐
제1 대대장~ 제3대대장까지 민비살해작전에 동참했다
그 근위대장들을 움직인 사람이 누구였을까?
민비가 죽자마자 흥선대원군 세력들이 집권하고 민비를 폐위시켰다
자.. 민비를 누가 죽였을까 생각해봐
아니 근데 왜 웃는거여?
지 감정을 컨트롤 못할때 어영부영 잘 저러죠w
우리정부가 잠잠하니 상황 파악 안되겠죠 😳
여러분 @고구려백제중국사들-전라왜구임나일본사 이 친구 영구정지먹게 신고합시다. 진짜 헛소리 무진장 떠들어대네요.
능지처참 감
민비가 죽은게 가슴아픈 일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 손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외세가 새치기한게 가슴아플 뿐이다. 덕분에 추악한 조선 왕실의 행각이 자꾸 미화되어 역사를 바로세우질 못하니...
시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시해가 아니라 살해죠 시해는 아랫 사람이 모시는 윗사람(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것을 시해(弑害_윗사람 죽일 '시' / 해할 '해' 직역하면 윗사람을 죽여서 해함)라고 하는데 그 당시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아랫사람이었나요? 아니죠 그런데 왜 윗사람을 죽일 때 쓰이는 말인 자꾸 시해라고 합니까 시해범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살해범이지 무슨 시해범입니까 표현부터 제대로 알고 쓰세요!!
👍👍!!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이통영-y9v 저는 명성황후 민씨를 일본인들의 의하여 처참히 살해 당했다고 두둔하고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국뽕도 아니고요 역사를 아시려면 제대로 바르게 아시라는 겁니다. 왜곡된 역사를 알지 마시고요! 그리고 일본이 왜곡한 일본 정부가 주장한 역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없죠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누가 봐도 가해자로 보이는데 그 사람이 자신이 안 죽이고 다른 사람이 피해자와 싸우다가 죽인 거에요 저는 몰라요 하면 믿을 수 있을까요 가해자가 유리하게 만든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를 민비가 밉다고 그것만 보고 역사를 저버리지 마시길.. 일본이 한 짓은 세계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극악한 만행입니다.
@@mirsonkang3518 내 얘기도 바로 그얘기입니다 역사를 알려면 제대로된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얼토당토않은 남의 말을 듣고 부화뇌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단세포동물임을 공인하는 훌륭한 일이지요
음향이 너무큽니다ㅜ
소리볼륨 엄청작게했는데도
거실까지 다들림 ㅜ
역사를모르면 나라가망한다
현시대 정치인 공부를 해라!!??
교육문화 역사교육이 엉망이다
현시대 교육제도 확 바꿔야합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
민비가 아무리 실정을 거듭하고 서태후같은 악녀였다고 평가받아도 내쫒거나 벌하는건 조선이 해야할 일이었음. 박근혜 탄핵 심판도 우리나라 사람이 했듯이 민비의 경우도 일본이 끼어들어선 안되는 일이 맞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 마땅한 범죄일 뿐이다.
나라가 힘이 없어 생긴 일입니다. 누구의 탓을 하겠습니까?
1995 11 찬란한 여명
미우라 고로 이성웅
2001 5 명성황후
미우라 고로 임혁
먹방 트로트 골프 이제그만...이런프로 많이좀 나왔으면좋겠어요
역사적 기본 시각 및 자세도 안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분통이 터져서 복사해서 댓글 달게 됩니다 휴 .....
@펭수의날개 디스커버리 채널 / BBC 채널 / History 채널 (한국 말고 미국내 채널 2000년대 초나 그 전껏들이 좋음) / 국내 KBS 역사전문 프로 다큐들 등에 출연한 전세계의 저명한 전문가들 및 학자들 인터뷰를 참고하시고 사실 진짜 깊이 있는 공부는 대영도서관 (영국) 또는 미국 & 한국내 등에 있는 오래된 책들과 자료들 및 구한말에 대한 실제 역사적 자료들만을 연구한 학자들을 만나서 인터뷰 직접 하거나 그 밑의 문하생으로 배우는게 제일 좋습니다만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하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많아서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 분야에 이미 속해 있거나 방송계통에 종사해서 직업적으로 다큐 프로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거나 아니면 미국 등의 나라에서 역사전공해서 학자로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뿐일겁니다. 2000년도 이전에 예를들어 1990년 ~ 2000년도 사이에 미국내에서 Discovery채널과 History 채널 등에서 정말로 심층적인, 퀄러티 높은 다큐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는데 이런 다큐들에는 전세계 톱 10 안에 드는 역사학자들의 인터뷰 및 전문가들이 많이 출연했었습니다. 이제는 디스커버리 채널과 히스토리 채널이 오락과 예능프로로 흘러서 그 높은 퀄러티는 거의 완전히 퇴색되어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다큐 전문 채널들이 한때는 고퀄러티 다큐로 떴다가 이제는 오락과 예능에만 치중하니 말입니다 다 먹고살려다 보니 타락해 가는거죠
@펭수의날개 제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시니 답변 드립니다만 일반 시민들보다 학자들이 더 맞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일반 시민들 대부분이 고서 등의 전문적인, 실제 역사자료 자체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학자들은 그래도 그러한 역사자료에 대한 연구를 평생 해야만 되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자도 학자 나름이지만요. 일반인들이 역사학자들처럼 역사적 고증 등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역사학자들 얘기를 귀담아 들을 수 밖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역사학자들 조차도 조선 말기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는게 별로 없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며 일부 자료들은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조작한 자료로 나중에 밝혀진 것들도 있어서...조선 말기라는 시대상을 보았을때 일본에 의한, 전쟁에 의한 역사적 자료 고증의 어려움이 매우 많은것 또한 사실입니다.
1897 목포 개항
세이세이코 학교
설립자 외 추가 1
매금아 어찌 생각하냐??
호야님☀️새해 복 많이 받아요🙇🏻♂️늘 댓글 잼나게 보고있어요ㅎ
@@단테의신곡-n4h 새해잘보내십시오^^ ❤️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살아있네 새해인사했는데 씹더니 물고 뜯으니깐 나타나네 역시 매금이답다
ㅋㅋㅋㅋㅋ
@@고구려백제중국사들 구수하다 구수해 짜장맛집 매금각
정말 다행입니다.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팩스후진국 일본이 됐으니... 죽음의귀신섬 일본을 정복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영상을 보신건지 의문이네요 ㄷㄷ
@@rbjs95 한번 흘러간 역사는 변하지 않아요.. 이 영상이 면죄부는 아닙니다.
@라퓨타 토착왜구 집단서식지... 대구경북 신천지일베충님이 보기엔 그렇군요.
인천과 아산.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굳판을 벌였던
...............
이런 진실은 덮어두나 ?
불편한 진실 !
나라에 힘이 없으니깐 어쩔수없지
일본의 만행을 잊지는말ㅈ
과거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아픈 역사지만 잊지 말아야할 역사고 결코 잊혀져서도 안될 통한의 사실이거늘 달나라를 오가는 21세기 주인공들은 거의 남의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현실이 안타갑기도 하고 사과는커녕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바다건너 일본 제국 주의자들의 현실또한 능욕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젊은이들이여 깨어 나십시요
일본은ㆍ독도가한국땅인데요ㆍ다께시마라고해요ㆍ교과서두왜곡해요ㆍ역사를ㆍ가린다고해서ㆍ될일이아니에요
저기요 고구려백제중국사어쩌구하시는분자꾸 행패부리지마삼
명성왕후, 민비를 비롯해 그 일가가(더 나아가서는 조선조 지배계층)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 말고 국가적 주권을 지키는 것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모든게 반일에 맞춰져서 조선조 사회의 후진성, 퇴행성, 부패를 모두 잊거나 묻어버리고 가려하는데 그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교훈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후기 분명히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에만 혈안... 자기 혁신, 개혁을 못해 망한 왕조는 지금의 북한 사회와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남의 탓(반일)만 부추기는 세상으로 변해 가나요? 역사를 극복하는게 아니라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 하는 지름길입니다.
가토 기요마사
이노우에
민비가 나라 말아먹은건 맞지만 한나라에 국모를 저렇게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은 평생 사죄하는게 맞다 민비가 얼마나 억울하겠노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나라 말아먹었다는것는 어디서 나온 소설이냐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인 이유는 조선정치가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이었고
일본의 침략야욕의 걸림돌이기 때문이었다
요시다 시게루
암헬이칸 말인 코스와 나우
명동 한일관 불고기
군정 정식데스
어겐으와 니미 도모
감사 캄사 알히맛쓰.
호소카와 시게가타
9:20
고종 마음이 너무약해 대원군한테 욱박질을 받아서 그래서 아닌지 대원군은 본인만 내 새울려고만 하고 그러니 뭐가 되겠어요 고집센 흥송대원군 누가 말리겠어요
민비를 왜놈들이 죽인게 너무 억울하다
우리 백성 손에 죽어야 대대손손 욕을 먹을건데 드라마로 역사를 배운 놈들은 민비를 무슨 비운의 왕후처럼 알더라
@@고구려백제중국사들 질문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아무도 대답이 없는것은 알고있나..ㅋㅋㅋ 지식인에 물어봐요 시신이없는데 죽인게 맞냐고
@@92nike 쟤 걍 무시하세요 ㅋㅋㅋ 무식한데 신념만 강합니다
@@고구려백제중국사들 당신 정말 웃겨! 정말 최고야! ^^
@@sunghyunjo8388 쟤 매금이임
비운의 황후는 맞죠. 시아버지 대원군의 사랑도 못 받고, 첫째가 항문이 막혀 며칠만에 죽고 둘째 순종은 병약하게, 셋째 넷째 모두 비명에 가고 추후에 일본낭인들에 의해 희생되었으니 명성황후의 인생으로 보면 정말 비운했지요.
자손이 멸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네
저 찌랄하는 것도 자손이 피해갈까봐 저 찌랄함
31:40 왼쪽사진속 사람 무슨 현상이지?? ㄷㄷㄷ
그러네요. 흐릿하게 얼굴윤곽이 있어요. 노인
뭐가요? 잘안보이는데요?
규슈 일일 신문
다른 사람들에겐 두려운 존재였으나 천한 무당 진령군에겐 벌벌 떨고, 빌빌 꼬며 기어갔던 민자영의 미천하고 비루한 최후.
일본진짜 무서운 나라다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 쓰레기 나라
정말 그렇게생각했어요
이런역사보고 더
ㅈㄹㅋㅋ 우리나라는 잔혹한 사건 없었냐? 쓰레기 나라 ㅇㅈㄹ하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후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시해 후 조선에서 신문 사업도.
처음 부분에 다른나라 왕비를 시해한 사건을 설명하는데 웃으면서 말하는 사람들은 뭐지?
그리고 일본 사람들 일제 만행에 대해서 옛날 일이고 지금 사과를 바라는건 부당하다고 생각하던데 칼 설명하는 사람이 딱 그 입장같다 그 때 일이라면서 할말 없냐니 암말도 안하네...
독일좀 보고 배웠으면
권력에눈먼자들이여 굶주린백성들의고통은 전혀생각없엇겟지 왜세를불러 권력을 차지하려다 이게무슨꼴인가
명성황후는 정식 시호이긴 하나 조선이 발전할 기회를 발목잡은 짓에 비하면 넘 추켜세워주는 거 같고 민비는 일본에서 조선의 격을 낮춰 부르기 위해 부르는 명칭이라 뭐라고 불러줘야할지 모르겠다
멋있는 일본분이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