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 감사 합니다. 후손은 당사자와 관계 없읍니다. 그 때 그 사람들도 그런 환경에 휩쓸려 죄악을 범했던게지요. 나쁜 친구를 사귄죄 . 역사를 돌아켜 보건데 슬픔이 앞섭니다. 자신이 태어난 세상의 종교를 믿고 따르는게 세상의 이치. 부끄러운 역사의 죄인이 된것도 일종의 불행이 아닐수 없읍니다.그러니 후손들 양심의 어깨에 멍에가 걷힐 날이 없지요.
난 힘없는 나라에서 500년동안 대대손손 착취당해서 1년에 닭한마리도 못먹는 그 백성들이 불쌍하다. 민비는 내정간섭 다하는데 온갖 친인척에 지금같으면 김건희가 땅투기 해도 그 난리인데 민비는 진짜 어디까지 해처먹었는지 이해가 되냐? 거기다 무슨 무덤이 크기 보소 일반 백성들 하루에 밥한그릇 쌀밥도 제대로 못먹었는데 호위호식 쳐 하면서 500년동안 해 처먹은 조선왕조 거기다 나라팔아먹고 그 후손들 전주이씨라고 아직도 왕족인줄 착각하는놈들이 더 심한거 아니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하고, 후에 고종까지 독살 한 일본. 그 후손들이 사죄하고 조상의 죄를 조금 이라도 덜고 싶어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일본은 조선에 너무도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많이 했다. 대를 이어서 두고두고 사죄를 한데도 끔찍한 일을 겪은 우리 후손의 입장에선 결단코 용서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현대로 치면 청와대에 목적을 가진 외국인 암살자들이 와서 경비원등 일부를 살해하고 행정부 주요 내각진중 누군가를 살해한격.. 현대라면 이건 외교관계 파탄나도 이상하지않을정도의 문제죠. 당대 이 일이 생각보다 평범하게 흘러간 이유는 임오군란처럼 당시 상황이 도주했을걸로 판단되었던 조선 수뇌부의 오판+을미사변에 흥선대원군이 용인하였다는 두가지 상황이 얽이면서..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모두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하는데...타국의 왕비를 강간시해하는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이 일본에게 계속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때문이라 보는가? 일본인들은 한국과의 과거문제와 관련해선, 어투 하나하나 굉장히 조심하고 극존칭을 써야만 한국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일수 있지 않겠는가? 진정성 없는 사과는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매번 정부가 바뀌어도 한일간 역사갈등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알고있는 것은 반일주사파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주워들은 것입니다 한일합방은 절대로 강제로 된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국의 고종과 일본의 합법적인 국가매매이고 이는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적으로 다 인정된 사실입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위해 열린 도쿄국제 전범재판의 공소장에 기재된 일본의 전쟁범죄의 시점은 1931년 만주사변 발발부터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일합방은 일본의 범죄가 아니고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합법적인 국가매매이고 그댓가로 고종은 엄청난 돈을 받아 처먹었지요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gotamabuta 그런게 아니고 왕권정치를 반대하는 동학운동 이였지요 양반과 상민의 차별대우 이런운동은 잘한것이지만 명성황후의 지략은 일본놈들 한테는 걸림돌이였지요 러시아와 각 유럽나라와 연합회의를 주동하시고 고종의 뒤에서 큰 정치적 공전자셨든것을 아는 일본놈들이 여우사냥 이라는 명분으로 시해했든것이지요.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라니? 명성황후는 이유를 막론하고 조선의 국모였고 그를 치욕스럽고 잔인하게 죽인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다. 이는 분명히 조선의 치욕이고 모독이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다니 고약하기 짝이 없는 놈들....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역사를 바로 알고 배워야 두번 다시는 힘 없어서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합니다.
민 황후님 후손분 민간 차원은 이해하지만 결코 용서나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어떻게 일반인도 그런데. 한 나라의 국모를 그렇게 잔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유기할 수가 있습니까? 더욱이 우리나라는 지네들에게 은사의 나라가 아닙니까? 은혜를 원수로 갑은 저놈들은 근본이 틀린 놈들입니다. 절대로 같이 할 수 없는 놈들입니다. 지네 국모를 그렇게 시해했다면 지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과거에 매달리면 후세엔 발전이없다 ᆢ과거는 과거 에서 잊지않고 알고는 있어야지만 후세에 자손이 사죄까지 한다는것은 매우 환영할일이다 끝까지 자기들이 잘했다고 우긴다면 서로간에 금이가고 앞날에 발전도없고 오히려 이득될게 없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보는 우리들도 위안이되는 프로이다 ᆢ용서와 화해는 훗날 우리의 자손들에게도 발전이 있는것이다 ᆢ 그타고 조선에 국모를 살해한것이 잘했다고 하는건 절대 아니니까 ᆢ 일본인 후손들도 후회와 용서를 진심으로 빌었다고본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그나마 양심은 있다 사과 한 번으로 되는 게 아니다 ㅇㅈㄹㅋㅋㅋㅋ 그나마의 양심으로 한 행동이 아니고 오히려 할 의무조차 없는 사과를 선심써서 해준 거니까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거임ㅋㅋㅋㅋ 애초에 사과를 할 의무가 없는데 사과 한 번으로 되는 게 맞다 아니다를 운운하는 게 양심 없는 거임
사죄를 받는다? 우리는 사죄를 받는 위치에 와 있다는 것에 생각을 해봐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이고 우리를 알기 위함이고 우리의 생활을 알기 위함이다. 앞으로 우리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 과거 역사의 발자취이다. 이제 다시는 반목하고 질시하고 민족을 배반하는 그런 짓을 하지말고 서로 결속하고 열정을 다하는 삶으로 우리 미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자주국방 증강도 신무기 개발과 사회구성원간의 신뢰와 결속으로 좀더 진화된 우리 생활을 만들어 나가자
@@soavo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비롯한 우리영토를 완전회복하였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 대륙전체주의 독재의 침략을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진압하였죠. 뿐만 아니라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식 민주정치를 도입하여 오천년 역사삼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민주공화국. 정치를 시행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pd가 어린 한국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명성황후 시해자 후손을 한 장면에 담아 '과거와 현재의 만남(?)' 비스무리 의미있는 연출을 하고싶어 했던것 같다... 하지만 나온 중학생들은 어리둥절 카메라가 찍는 것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듯 하다. 분명 pd가 즉석으로 불러모은 애들로 보이는데, 차라리 대학생층의 젊은이들(사회의식이 생겼을 나이대)한테 인터뷰하고 악수도 시키지.
일본 천왕이 와서 무릎꿇고 사죄해야지... 물론 시해한 사람들이 사죄하는 것도 당연하지.. 야만인들이 한 짓들이지... 부끄러워해야지.. 아직도 전범기업들이 부귀를 누리고 전범자들이 일본을 통치하고 있고 ... 자기들의 야만적인 행위들을 정당화하고 ... 아직도 정신 못차렸지..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일본과 과거사를 대할 때는 반드시 개인과 정부를 구분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단 한 번도 명성황후 시해를 당시 일본 정부에서 사주한 것이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개인과 정부의 입장을 바꾸어 한국을 대하면서 교묘하게 넘어가면서 역사적 진실을 그들의 이익에 따라 변질시키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막상 딱 부러지게 판단하는 성급한 한국인들은 일본의 한 개인의 입장을 마치 일본이란 국가의 입장인 것 처럼 오해한다. 저 후손은 일본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역사적 기록을 동반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성황후 시해에 갖는 의미는 한 왕비의 생명권 문제가 아니라, 국권침탈의 상징에 있다. 따라서 저 후손의 코스프레는 무시하면 된다. 전범국 일본의 상징 히로히토나 정부의 책임자가 범죄를 인정해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의 증언은 그저 앵무새의 읊조림, 즉 립서비스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에게 동의하고 동조하는 것은 한국인뿐이기 때문이다.
와…어릴때 명성황후 시해 당시 전리품으로 훔쳐간 열쇠주머니를 손자인 이 할아버지가 어릴때 가지고 놀았다니… 그걸 가지고 놀다니… 대대손손 살인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아도 될만큼 황후의 유품을 하찮게 여겼다니…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은 대단한 큰 용기가 필요한겁니다.
굥석열이 나라를 작살내고 반성도 사과도 없는 걸 보면 그렇긴 하죠
그런데 어찌 이 일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냐는것이죠
한국은 배트남 전쟁가서 배트남 여자 강간하고 성포행하고 민간인 학살햇는데 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북한인권에는 그렇게 열변을 토하고 일본한테는 사과하라고 선동질하는데 진보좌빨정부시절에 정부차원에서 왜 한번도 사과 안했을까요???
조상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 감사 합니다. 후손은 당사자와 관계 없읍니다.
그 때 그 사람들도 그런 환경에 휩쓸려 죄악을 범했던게지요. 나쁜 친구를 사귄죄 .
역사를 돌아켜 보건데 슬픔이 앞섭니다.
자신이 태어난 세상의 종교를 믿고 따르는게 세상의 이치. 부끄러운 역사의 죄인이 된것도 일종의 불행이 아닐수 없읍니다.그러니 후손들 양심의 어깨에 멍에가 걷힐 날이 없지요.
용서를 구할줄 아는 저런분이 많았으면 합니다 슬픈역사네요
'시해'가 아니라 '살해'가 맞습니다. 시해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반역' '패륜'이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일본군이 '타국'의 왕후를 죽인 건 살해입니다.
힘없는 나라의 황후라 잔인한 일제의 칼날에 비참한 생을 마쳤네요~~국력이 얼마나 중요 한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해준 을미사변 후대에 많은 교훈을준 사건 입니다
난 힘없는 나라에서 500년동안 대대손손 착취당해서 1년에 닭한마리도 못먹는 그 백성들이 불쌍하다. 민비는 내정간섭 다하는데 온갖 친인척에 지금같으면 김건희가 땅투기 해도 그 난리인데 민비는 진짜 어디까지 해처먹었는지 이해가 되냐? 거기다 무슨 무덤이 크기 보소 일반 백성들 하루에 밥한그릇 쌀밥도 제대로 못먹었는데 호위호식 쳐 하면서 500년동안 해 처먹은 조선왕조 거기다 나라팔아먹고 그 후손들 전주이씨라고 아직도 왕족인줄 착각하는놈들이 더 심한거 아니여?
용서가 되겠습니까...
6:22 정신못차림 ㅋㅋㅋ 작은일이라니 ?? 별것도아닌일에 호들갑떨어서 사과해주러온다 뭐 이런건가 ???
그래도 사과한다는게 큰의미인데 굳이 그렇게 말하냐....
일국의 왕비를 시해하고, 후에 고종까지 독살 한 일본. 그 후손들이 사죄하고 조상의 죄를 조금 이라도 덜고 싶어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일본은 조선에 너무도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많이 했다. 대를 이어서 두고두고 사죄를 한데도 끔찍한 일을 겪은 우리 후손의 입장에선 결단코 용서하기 쉽지 않다.
명성황후의 평가와는 별도로 국왕의 아내인 국모를 칼로 시해한것은 세계에도 없는 끔찍한 일...그것도 국가 정부에서 주도해서 당시 일제의 잔인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현대로 치면 청와대에 목적을 가진 외국인 암살자들이 와서 경비원등 일부를 살해하고 행정부 주요 내각진중 누군가를 살해한격.. 현대라면 이건 외교관계 파탄나도 이상하지않을정도의 문제죠. 당대 이 일이 생각보다 평범하게 흘러간 이유는 임오군란처럼 당시 상황이 도주했을걸로 판단되었던 조선 수뇌부의 오판+을미사변에 흥선대원군이 용인하였다는 두가지 상황이 얽이면서..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황후가튼소리 하네 백성들 피골을 빨아먹은 집안 인데 개민비가 답이여
사과를 하면서도 작은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당신은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는것입니까? 한 나라의 국모를 무참히 시해한 일인데 어찌 작은일이 될 수 있나요..
"신봉승" 작가님도 대단하신분이지요.
그런분이 안계시니
안타깝습니다.
이런일을.안당할려면.국력을튼튼하게해야한다.ㅡ두번다시생각하고싶지안다.ㅡ분통터진다.ㅡ
약육강식...! 승자는 여유만만 패자는 전전긍긍....!
역사교과서에 제대로 싣지 않는 건 확실히 잘못이다. 젊은 일본인들은 아예 모를거 아냐
사죄를 대신이나마 해주시고 정말 인식이 훌륭한 분인걸 알수 있네요 일본은 이상한 세력도 많치만 저렇게 깨어있는분도 많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에 우러나와서 온게 아니고 집안이 저주에 시달려서 사죄하러온게 아닐까
책임을 져야할 국가가 민간 사절이라는 일반인뒤에 숨어서 사죄랍시고 후손을 보내는 쇼를 한것...
저분들의 사과보다 일본의국가적 사과와책임을 져야지요
일본은 국가차원에서 사과와 배상을 했고 민간인들도 저렇게 사과를 하는데 중공과 북괴는 사과는 커녕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중공과 북괴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빨리 강한 나라가 되어 일본의 국가적인 반성과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hong-w6t 중공과 북괴는 우리민족의 존엄성을 무참히 훼손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중공북괴를 두려워하며 침묵한다면 이런자야말로 반민족행위자이며 매국매족노입니다.
님은 매국매족노가 되지마시길 바랍니다.
@@Kim-ig3qq
중공과 북괴는 이 영상에서
다루어질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범봉-w8s 중공 북괴에게 일본수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야죠.
중공을 비호하는 매국매족노같은 언행은 삼가하세요.
시해 치욕스런 사건이지. 나라강탈 어찌 말로 사죄하며 돈으로도 환산 안된다. 일본 전국민과 정부 황실이 소리높혀 사죄하고 일제36년 강탈해간 식량 금광 귀중품 문화제 등등 다 물어내라. 현재 시세로. 침략해서 가져간 모든것 위안부들의 일생을 보상해야한다 현재 시세로
명성황후 시해를
여우사냥이라고 하는데, 박영효가 모든 소스를
제공했군요.
나쁜 인간
굳이 왜 왔겠노 집안에 우환이 끈임없이 일어나고 있거든 ㅋㅋㅋㅋ 이집안말고 다른집안에서는 대대로 제사지낸다며? 그럼 그렇게 죽이고 잘살것같앗니
민씨 일가의 독재 횡포에 임오군란의 군인들과 그 가족들, 동학농민운동의 동학인들과 그 가족들의 한은 누가 풀어주나?
아몰랑 일본 나빠
선조들이 저지른 만행을 후손들이 떠안고 가야한다니...안타깝지만 감정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역사적 문제지요.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일본에도 좋은분들 많이계십니다.전 일본에 사십년이상 살고있기에 잘 알고있읍니다.
작은일에 연연하지 말라는건 무슨 말인지… 사죄 맞는지 쇼하는거 아닌지 …
물론 사죄하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역사상 절대 일본과 중국을 믿어선 안됩니다
모두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하는데...타국의 왕비를 강간시해하는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이 일본에게 계속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때문이라 보는가? 일본인들은 한국과의 과거문제와 관련해선, 어투 하나하나 굉장히 조심하고 극존칭을 써야만 한국인들에게 진정성을 보일수 있지 않겠는가? 진정성 없는 사과는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매번 정부가 바뀌어도 한일간 역사갈등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신 어르신입니다… 본인 조상의 잘못으로 인해 후손인 할아버지께서 직접 우리나라까지 와서 진정있게 사과하시는 모습은 정말 멋져보입니다. 못되고 나쁜 일본놈들만 있는건 아닌가 봅니다.
당신이 알고있는 것은 반일주사파들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잘못 주워들은 것입니다 한일합방은 절대로 강제로 된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국의 고종과 일본의 합법적인 국가매매이고 이는 한국을 제외한 전세계적으로 다 인정된 사실입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후 일본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위해 열린 도쿄국제 전범재판의 공소장에 기재된 일본의 전쟁범죄의 시점은 1931년 만주사변 발발부터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일합방은 일본의 범죄가 아니고 인류사에서 유일하게 정당한 합법적인 국가매매이고 그댓가로 고종은 엄청난 돈을 받아 처먹었지요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쿠데타에 3명의 근위대대장이 호위를 했고
흥선이 앞장서서 궁궐문을 열었다
근정전까지 통과할때까지 거의 무혈입성이었고
그 뒤로 사무라이들이 도망치는 민비를 살해했다
아마도 자손들에게 좋지 않았으리라...
돌아가신 영혼이 있다면 그들을 행복하게 두었을까?
일왜왕 하고 일본 이토 히로부미 후손들이 직접 한국 에 와서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 에뫄서무릎 끓고 사죄 해야함
6:19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작은일인가;;? 작은일에 연연하지 말자니...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말씀 잘못 하십니다
사죄할 마음이 없었던거임.
작은일?!!작은일이라니 그러니 왜놈이란 소리를 아직도 하는거임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사죄는받아주느나,영원히 용서할수는없다.추악하고더러운과거,일본정치인들이사죄를하거라.그리고중간에 작은일에연연하지말자라고 애기햇는데 절때작은일이아니고 엄청난 큰 죄라는것만알아라 늙은노인네가 이제 관속으로갈때가됫나보네
...마음에서우러나는사죄였으면....왕비인줄모르고 시해했다는 변명하지말고!!참모든게 쉽게용서되네!!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사죄는 일본 이라는 국가 차원에서 아루어 져야 한다. 쇼인 과 이또의 제자들, 즉 시해에 참여했던 정객들 의 후예 즉 현제 알본 극우파 들이 직접 선두에 사죄하고 죄없는 젊은 일본인들 어린 학생들 에게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명성황후가 정식 칭호입니다.... 민비 라 호칭하는 순간 일본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이며,,, 조선 침탈, 대한제국 합병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후손에게 자신들의 과오를 교육시키지 않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음
국가적 문제지만서도 직접 시해한 자손에게도 엄청난
응보가 따릅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여러 정황상 민비암살은 일본보다는 대원군의 제안에 대해 일본이 받아들인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본은 굳이 민비를 죽일이유까지는 없었거든요 민비와 철천지원수가 된것은 대원군이지 일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과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과 민비가 너무 감정적으로 철천지원수가 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사람이 화해할 것을 여러번 권유했습니다
민비가 대원군의 장손자 이준용을 교동도로 유배보낸것에 대해 대원군은 거의 이성을 잃고 민비를 씹어먹고자 이를 갈았는데
대원군이 민비암살 당일 마포 아소정에서 시간을 끈 건 암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값을 가지고 일본과 밀당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공모해서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김홍집 친일내각의 섭정으로 집권했고 고종을 사실상 인질로 잡은 상태에서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다가 고종이 도망가는 바람에 김이 빠져서 실각한 것입니다
대원군과 일본의 인질상태에서
왕은 엄상궁(후일 엄비, 영친왕 모친)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아관파천에 성공하는데 이는 사실 대원군이 아들 고종의 감시업무를 민씨 부인께 맡기면 서 예고된 일입니다
사실 모든 여자는 모성애가 있으니까 남편보다 아들편인데 결국 부대부인은 아들 고종의 탈출을 알면서도 눈감아 준것이지요 그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간 고종은 러시아 군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어명을 내려 김홍집 어윤중 등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죽인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면서 일본에 얹힌 대원군도 자연스럽게 실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고종은 탈출하고자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이는
민비의 사망으로 재혼을 한다는 명분으로 간택한 신부감을 입궐시킬때 호위병력 약5백여명을 들이면서 그들을 친위쿠데타 병력으로 만들어 친일파 대신들을 죽인후 왕을 춘생문으로 탈출시키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전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사과한다고 절한다고 그죄는 안없 짐니다 일본 나라와 정치하시는분들 다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남의나라 국모한테
칼로 찌르고 강간까지
한놈들 저런것들 소름돋아
이등박문이었는가.
안중근 의사가
참 잘하셨그만.
안중근은 죄없는 히토 암살한 범죄자다
@@정아미-i3l
거꾸로 말하고있네여
장난칩니까
아직도 돌아갈집이없어 구천을
떠돌고있는데 도대체 죄없는독립군을
사형시키고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찾을수가없는지 아시면
가르쳐주세요
이등박문은 한국의 범죄자입니다
@@정아미-i3l 또라이 미친 뭘알고 씨부러쌌나 일본인정아미 꺼져라!!!
@@minali2022 민비의 유해는 살해된 장소옆 녹산에서 화장되었고 우범선이 이장면을 보았다고 지입으로 표현한것이 자료로 남아있고, 타다남은 유해는 땅속에. 또일부는 못에 던졌다는데 정확하지는 않죠 맞았다면 이미 찾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아미-i3l 👎👎
솔직히 후손이 저렇게 나서서 특히나 카메라까지 있는데 저러기는 쉽지않습니다.
어른신 생각이 참 똑똑하고 바르시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라는것이 어떤좋은것보다 마음이라는걸 느꼈다고, 일본에도 한국을 좋아하고 그런 후손들이 많다고 하시는걸보니 마음이 아프네..
저의 친정엄마는 명성황후의 후손입니다. 지략과 외교에 탁월하셨음은 후손들이 알고 팩트입니다. 왜곡된 내용들이 많으나 지금이라도 올바른 역사를 밝혀 후손들에게 알리고 세계에도 알려야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왜일어났는지
역사공부를 하시고, 민비는 자기권력을 지키기위해 왜세를
끌어들여 결국 왜세에 의해 참극을 당했습니다
현대판 최순실 입니다
나라 망하게 한것도 팩트같은데
@@gotamabuta 그런게 아니고 왕권정치를 반대하는 동학운동 이였지요 양반과 상민의 차별대우 이런운동은 잘한것이지만 명성황후의 지략은 일본놈들 한테는 걸림돌이였지요 러시아와 각 유럽나라와 연합회의를 주동하시고 고종의 뒤에서 큰 정치적 공전자셨든것을 아는 일본놈들이 여우사냥 이라는 명분으로 시해했든것이지요.
지략과외교로 나라망친 팩트 후손뿐아니라 저희도알고있습니다
나라를망하게했다는말이뭡니까그시댄일본을견제하기위해러친하듯이하셨고신문물을받아대한을일으키려하신거죠그렇다고대한을러시아에받친것이아니랍니다
가와노선생,이에이리여사 참말로 고맙습니다.
어찌됫건 한 나라에 국모를시해한건
대단히잘못된것이니 천황이사과해야한다
@@장민우-b1g 일왕은 감성적인 표현이고 천황이 옳은 표현임
@@장민우-b1g 천황이라고 높여 칭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이름 그대로 천황임
일본왕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bhop7744
ruclips.net/video/ZzuXi-dUhbM/видео.html
국모를 일본정부가 파견한 자객에의해
칼로 약간베어 저항못하게 한상태로
강간하고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보는 앞에서... 사죄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되나요
나 거짓말 하지않고 말한다. 울 친 할머니쪽으로 나에게 증조 할머니가 충주에 피난온 명성황후를 보았는데, 작은체구에 얼굴이 인형 같다더라, 이후 역사시간에 명성황후가 충주에 왔는데 임호군란으로 피난길임을 알았다.
임오군란...
역사의 증인이었겠네요. 명성황후를 직접 보셨다니...
ㅎㅎ인형?? 백인이 맞는가 보네!!
그럼 도주중인데 어떻게 보셨다는건지요
사방팔방 소문 내고 도주할리는 없고?
@@심문선-m8v 저희 할머님집이 대대 충주에 살다보니 임오군란때 피난온 황후 동내소문나고 그래도 국가황후인데 행렬중 본가 싶습니다. 글구 제가 할머님에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야만인들이라서 왕비를 시해를
하다니 세계에서 없는일이다.무당은 뭐했는가?
미래를 신이 알려주는데.
저렇게 한번와서 사죄했다고
쉽게 용서될문제인가? 황후의
열쇠고리주머니을 가져와 가족의
노리개로 주다니 절대쉽게 용서해선안된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라니? 명성황후는 이유를 막론하고 조선의 국모였고 그를 치욕스럽고 잔인하게 죽인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다. 이는 분명히 조선의 치욕이고 모독이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다니 고약하기 짝이 없는 놈들....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역사를 바로 알고 배워야 두번 다시는 힘 없어서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합니다.
이화면을 보고 어떤생각이 드십니까 절차가 틀렸다는 점입니다
앞머리는 떼여버리고 중간에서 해결하려는 진실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지켜보면 답이 나오겠죠
그럼에도 저 사람은 자신의 조상이 얼마나 짐승이었는지 모를꺼 같다
자신의 조상이 일국의 국모를 시해 한것도 모자라 시간까지하고 불태워 죽였다는건 짐작도 못하리라
참 이런 분들도 있다. 이런사람이 많아져야한다.
우리가북한은우리동포,그다음릴본이우리민족과똑같습니다,
우리가북한은우리동포,그다음릴본이우리민족과똑같습니다,
훌륭하십니더
훌륭하십니더,할아버지는 이찌니산시고륙
고맙습니다이령상을1ㅗ는저도눈물이납니더,
가슴이 답답하네
가슴이 답답해
너무 원망스럽다
민 황후님 후손분 민간 차원은 이해하지만 결코 용서나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어떻게 일반인도 그런데. 한 나라의 국모를 그렇게 잔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유기할 수가 있습니까? 더욱이 우리나라는 지네들에게 은사의 나라가 아닙니까?
은혜를 원수로 갑은 저놈들은 근본이 틀린 놈들입니다. 절대로 같이 할 수 없는 놈들입니다.
지네 국모를 그렇게 시해했다면 지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과거에 매달리면 후세엔
발전이없다 ᆢ과거는 과거
에서 잊지않고 알고는 있어야지만 후세에 자손이
사죄까지 한다는것은 매우
환영할일이다 끝까지 자기들이 잘했다고 우긴다면 서로간에 금이가고 앞날에 발전도없고 오히려 이득될게 없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보는 우리들도 위안이되는
프로이다 ᆢ용서와 화해는
훗날 우리의 자손들에게도
발전이 있는것이다 ᆢ
그타고 조선에 국모를 살해한것이 잘했다고 하는건 절대 아니니까 ᆢ
일본인 후손들도 후회와
용서를 진심으로 빌었다고본다
용서는 받는것이지 용서를 강요 하는게 아니다
당신들의 노력은 가상하나 ..당신들의 정부는 지금현재 개판을 만들어 놓고 있구나~
민비때문에 조선이 망하고 일제시대가 된것을 잊어선 안되죠 황손님
무거운 바위를 자기가 다 짊고 죄값을 치루겠다고....
후손들이 저래 사과하고 티비에 나오는거 그냥 관종같다. 일본 나라 자체에서 국가적 사과 한것도 아니고 민간차원에서 저렇게 비공식적으로 사과 하니깐 뭐 어쩌란건지 무슨 영향력이 있는지 왜 저러는지 싶다.
힘이 없어 나라를 지키지 못해 국민들이 36년간 당한 모진 설움과 인권유린은 어찌 할까요. 누구에게 탓을 돌릴까요
일본정부의 인정과, 교과서가 문제.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민관군이 합세해서 저지른 일을 민에게만 떠넘기지 말고 정부가 나서서 인정하라. 끝까지 비겁한 일본정부!!
6:20 작은 일에 연연하지말자고????? 저 할아버지 참....
처음봤는데 좀 가슴이 아프네요
사죄한다고 국모를 살해한 사건이 용서가 되나요 지들은 일왕을 신으로 받들면서
근데 이갑 친할매는 민자영이 아니라 민자영 투기땜에 궐에서 쫓겨난 장상궁임
남의 나라를 없에려했고 국모와 궁에있는 궁녀와 다 시해 했는대 그거한번 했다꼬 감동 안받아요
일본 왕의 사죄를
진심 원한다
명성황후를 낮춰부르는 민비사건이라고 보도하는 일본인들 인터뷰도 민비라하는데 자막만 명성황후라고 적고있네요 일본언론도 아직 반성이 멀어보입니다
그나마 양심은 있다 사과 한 번으로 되는 게 아니다 ㅇㅈㄹㅋㅋㅋㅋ 그나마의 양심으로 한 행동이 아니고 오히려 할 의무조차 없는 사과를 선심써서 해준 거니까 고맙게 여겨야 하는 거임ㅋㅋㅋㅋ 애초에 사과를 할 의무가 없는데 사과 한 번으로 되는 게 맞다 아니다를 운운하는 게 양심 없는 거임
사죄를 받는다?
우리는 사죄를 받는 위치에 와 있다는 것에 생각을 해봐야 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이고 우리를 알기 위함이고 우리의 생활을 알기 위함이다.
앞으로 우리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이 과거 역사의 발자취이다.
이제 다시는 반목하고 질시하고 민족을 배반하는 그런 짓을 하지말고 서로 결속하고
열정을 다하는 삶으로 우리 미래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자주국방 증강도 신무기 개발과 사회구성원간의 신뢰와 결속으로 좀더 진화된 우리 생활을 만들어 나가자
독도를 니들 땅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예 오지마라
독도는 이승만대통령의 탁월한 정책으로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해방후 70여년간 우리땅 간도를 불법강점하고 있는 중공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중공과 북괴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Kim-ig3qq
많은 민중과 애국자를 학살 한 이승만이 탁월하다?
남괴 다운 발언이다
당시 다케시마의 영유권을 주장 한 것은
당시 민중의 의사로서 결코 이승만의 업적이 아니다.
한번 정신 병원에 가십시오.
@@soavo 다케시마가 아니라 독도임
일본땅
@@soavo 이승만 대통령은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비롯한 우리영토를 완전회복하였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 대륙전체주의 독재의 침략을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진압하였죠.
뿐만 아니라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식 민주정치를 도입하여 오천년 역사삼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민주공화국. 정치를 시행하였습니다.
똑같이 갑아줘야 됀다 ㆍ
지금도 무역 보복 하는 놈들이다 ㆍ
철딱서니없는애들아, 거기서 그렇게 히히덕거리며 웃어야되겠니?
사죄해야지 당연히. 민비는 국민들한테 죽었어야 마땅했는데 선수를치고
더욱 큰 문제는 한국 강단사학계가 식민사관 개혁을 못하고 추종하는 거.
저 후손분은 어떠한 생각과 누낌으로 살아가실지
모르겠네요 정말정말로 사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사가 바뀌지는 않지만 적어도라도요..
시작부분에 사죄하는 일본인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반성은 이렇게 상대의 응어리를 달래주는데... 일본 정부는 왜 국가 차원의 반성과 사죄를 안하는가?
우리 국가와민족이 강할때강해졌을때
까지 판단을 잠시미루워봅시다
공감합니다
이런 프로그램 볼때마다 맘이 너무 아픕니다.
항상 독일정부와 일본정부의 전후 태도가 비교가 됩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일본도 개념있고 양심적인 분들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일본 정치인들이 자기들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대신 저들을 보내 온게 않일까 생각합니다.
괘심한 생각이 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일본 정치인들이 저지르고 몇몇 후손들 보내서
개인들이 사죄하는 선에서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모습이 더 괘심한 생각이듭니다
참 안타까운게 민비 시해한게 미우라가 손자가 아니라 미우라인데 왜 손자가 사죄를 하는걸까...
조상들이 다 죽고 없는데..? 후손들에게 잘못했다 얘기를 했으니 사죄를 하러 온 거잖아?
잘보고있습니다^^ 좋은소식이라 여기에 글을쓰고싶네요 반크가 구글에서 중국김치를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정정시켰다네요 독도문제에도 열심히 싸워주는 반크 구독부탁드려요 동해 표기도 이젠 40%정정했구요 60%남았어요 반크에 힘을실어주세요
철 없이 웃는 학생들 너무나 어이가 없다.
15:45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겨 주신 역사의 그날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좀더 우리나라의 역사를 많이 다루어 주세요. 앞으로도 좋은 영상 기대할게요.
아직도교육계에도친일파일당들이만아서우리역사를제대로가르치지안는것같다
아무래도 당시 pd가 어린 한국학생들과 나이 지긋한 명성황후 시해자 후손을 한 장면에 담아 '과거와 현재의 만남(?)' 비스무리 의미있는 연출을 하고싶어 했던것 같다... 하지만 나온 중학생들은 어리둥절 카메라가 찍는 것에 더 호기심을 보이는듯 하다. 분명 pd가 즉석으로 불러모은 애들로 보이는데, 차라리 대학생층의 젊은이들(사회의식이 생겼을 나이대)한테 인터뷰하고 악수도 시키지.
나도
울분울 토하며 욕하길 바란건 아니지만,,,,,그냥 말하고 싶지않다 하며 피하길 바랬다
예나 지금이나 진지한 모습은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당하고 살았지
사죄한다더니기모노입고!무슨사죄를한거야
큰 용기를 내셨네요
얼마나 부끄러울까
저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짐을 더는게 낫지
국민들에게 사실적인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일본정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
지금의 일본 모습인듯
일본 천왕이 와서 무릎꿇고 사죄해야지... 물론 시해한 사람들이 사죄하는 것도 당연하지.. 야만인들이 한 짓들이지... 부끄러워해야지.. 아직도 전범기업들이 부귀를 누리고 전범자들이 일본을 통치하고 있고 ... 자기들의 야만적인 행위들을 정당화하고 ... 아직도 정신 못차렸지..
천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쓸일은 아닌듯 하네요. 그냥 일왕 이라 칭하면 될일입니다.
저사람들도 저렇게 사죄하는데 우리나라 친일파들은 도데체 뭐야?
"그렇다면 조선에서 노비는 전체 인구 중 어느 정도나 차지했을까요.
학계에선 조선 인구를 1000만명 정도라고 봤을 때, 대략 40%에 해당하는 400만명 정도가 노비였을 것으로 추산합니다.조선 전기 유명한 재상이던 한명회는 “공사 노비 중 도망 중인 자가 100만명”이라고 말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비를 잡아들이거나 노비 소송을 전담하는 장예원(掌隸院)이라는 국가기관을 따로 둘 정도였습니다.
성종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일천즉천’이 확정됩니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는 것을 법으로 명문화한 것이죠"
"그동안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첨단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즉 백제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고대사회를 여는 야요이 문명의 흔적은 일본 본토 전역에서 나타나지만, 도래인에 의해 규슈 북부지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연구로 야요이인은 한반도 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의 반이 조선백성이다라는 기록이있다.조선은 백성의 40프로가 노예인 노예국가였다.
흑노예들처럼 매매됐고 자식들은 태어나자마자 주인소유의 노예가 됐다.인류역사상 동족을 노예로 부린 국가는 예를 찾기 힘들다.
이순신 덕분에 조선백성이 노예로 400년을 더 고통 받았다.
한일합방 당시 일본 지배층은 통일했다고 생각했으며 내선일체 정책으로 조선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심지어 위안부조차 일본인이 더 많았다. 또한 조선근대화를 위해 일본 전체 예산의 30프로나 되는 막대한 금액을 매년 쏟아부었다.
유전자분석에의하면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더 순수한 한국인 혈통인것으로 밝혀졌다.한국일본은 같은 민족이다.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일동맹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한일합병 해야한다.중국과 중국몽들이 가장 두려워하는게 한일동맹이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처럼..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졌으면 한국인들 전부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해서 지금 벌목하고있을거다.대만과 동남아국가들 모두 일본에 감사하고있다.인도네시아 총리는 일본군에게 쫓겨달아나는 영국군을 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했고 지금도 일본군전사자들을 추모하고있다.전세계에서 반일국가는 중국 한국뿐이다.
만리장성 북쪽은 중국땅이 아니다.몽골족 만주족 한국인들이 지배하던 곳이다.진시황이 소위 북방오랑캐를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만든거.
이후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금나라와 몽골에 정복 당했었고 청나라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나라다.
고조선문명이 중국황하문명보다 1500년 앞섰다.중국사관학자들이 환빠라고 거품 물며 발악하는 이유도 고조선문명이 중국역사를 뿌리부터 흔드는 역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중화주의 흔적이 많이 남아 나라의 혼을 빼앗고 있다....
좌익들의 만행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kaizazerem816 친일얘기하는데 왜 빨갱이가나와? 왠 동문서답? 친일파는 일본으로 빨갱이는 북한으로 보냅시다 안가려고 떼쓰면 빨갱이는 고사총으로 친일파는 바다속에 쳐박아 쥑입시다 이나라는 순수한 혈통만 살아야해
😢ㅠㅠ
민씨가 무당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일제 강점기 37년을 겪지 않았을 수도? 김 명신이를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이유임!
안보불감증 한국 국민. 객관적으로 보면 안보불감증 국민은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원흉은 국민 안보불감증. 아직도 정신차리지 못한 안보불감증 국민이 주는 교훈은 향후 주사파, 북한군, 중공군으로 부터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라는 국가에서 사죄 대한민국국민들 한 풀어주세요
왜~~
Show 하는거 같지
자꾸 내가 이상한거지…
대한민국은 황실을 보존했어야했는데
정치인들이 황실을 보존하지 안았따
6:19일본인이 한 만행은 작은일
원폭투하 같은건 큰일이라고 생각하나보군요 일본인들은 원폭투하 사과받으려다
원폭개발자에게 개쪽당한일이 있었지 유투브에 원폭투하 사과라고 검색해보세요
일본 정부에서 한국에가 약간 사죄하는척
코스프레 하라 한거겠지
음흉한 놈들인데 그걸 믿어
에효 ~ 믿을걸 믿어야지
일본과 과거사를 대할 때는 반드시 개인과 정부를 구분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단 한 번도 명성황후 시해를 당시 일본 정부에서 사주한 것이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개인과 정부의 입장을 바꾸어 한국을 대하면서 교묘하게 넘어가면서 역사적 진실을 그들의 이익에 따라 변질시키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막상 딱 부러지게 판단하는 성급한 한국인들은 일본의 한 개인의 입장을 마치 일본이란 국가의 입장인 것 처럼 오해한다. 저 후손은 일본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역사적 기록을 동반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성황후 시해에 갖는 의미는 한 왕비의 생명권 문제가 아니라, 국권침탈의 상징에 있다. 따라서 저 후손의 코스프레는 무시하면 된다. 전범국 일본의 상징 히로히토나 정부의 책임자가 범죄를 인정해야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일본 학자들의 증언은 그저 앵무새의 읊조림, 즉 립서비스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에게 동의하고 동조하는 것은 한국인뿐이기 때문이다.
저런 양심 있는분들은 몇분에 불과하지..잘못은 선조들이 하고 자손들이 사죄하고 참..
민비는 추앙받을 인물이 아니죠
일본 왕비의 자결과
일본인 위안부 십만명을 요구하자
무식하지만 쟈들도 그 범죄에 놀라야함
이제 와서 후손들의 사죄 가지고 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