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올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선홍밫 여전한 단풍잎이 아직 낙하(落下)도 하지 않았는데 그 위로 흰 눈이 내려앉아 여태 낙엽이 되지 않고 무얼 했냐고 따지는 것만 같습니다. 연초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이제 좀 실천해 보나 싶었는데 연말이 불쑥 나타나 여태 무얼 했냐고 따져 묻는 것만 같습니다. 이때 제가 떠올리는 말은 이것입니다. “더딘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춰 있는 것을 두려워 하라(不怕慢,就怕站).” 비록 늦었다 할지라도 지속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멈춰버린 자신의 나태가 ‘너’ 때문이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스스로 꾸준했다면, 비록 그 속도는 느렸다 해도 괜찮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여전히 느린 나를 독려하며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인문학 강의를 하나만 더 만들어 보라고 다그쳐 보지만, 역시 속도는 잘 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많고 행동은 굼뜬 까닭입니다. 아니, 쓸데없이 많은 생각의 무게가 행동을 누르고 있는 까닭입니다. 세상에 강의를 제공하지만, 그 강의를 만들기 위해 다시 배우는 자세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까닭이든 저런 까닭이든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요? 이미 아는 것이라 자부하면서 그 자부심에 기댄 채 강의를 만드는 오만에서 벗어나, 늘 다시 확인하고 다시 읽는 자세만 잘 견지한다면 어떤 이유로든 속도의 느림이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강의는 2024년 9월 26일에 업로드했던 "유교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확장본’입니다. 기존 강의에서 빠졌던 후반부 내용(7분)을 추가한 후 재편집한 것이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십년을 유교 세계관에 살아온 저에게 이 유투브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며, 그렇구나 하고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유교의 핵심 사상이, 바로 창조의 중요성이라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던 유교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생각할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행복을 달성하라고 가르치는데, 개인적으로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허무함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서양의 니체는 비슷한 허무함의 상황에서 창조의 의지를 가진 위버맨쉬가 되라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면, 공자는 나라는 개념의 범위를 나의 후대까지 넓힘으로써, 나는 죽음을 넘어 계속된다고 이해함으로써 허무함을 깨트린 것 같습니다. 업로드에 감사드립니다.
유학자란 존재에 대해 너무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학자는 학자 이전에 관료 이전에 성직자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관료들은 영혼도 없고 소신도 없는데 조선시대 관료는 당당하고 소신있었던 이유가 성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지나친 신념에 타협을 모르는 답답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종교가 신을 믿는 것이라면 불교도 유교도 종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세계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틀이고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가르침이라면 불교와 유교는 분명 종교입니다. 개인적으로 유교의 매력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거부하지 않고 쓰리게 가슴 속에 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예전에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바른 걸 말하는데도 세상을 떠돌게 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옳았든 틀렸든, 공자 사후에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든지 간에 살아 생전 떠도는 삶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은 바꾸지 못하고 바꿀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며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옳은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실 그 모든 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세상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영상을 보니 공자가 그토록 떠돌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제 나름대로 추측하게 되었고 제가 논어를 읽으며 울었던 것을 저 또한 제가 추측하는 공자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저번에 초기 불교에 대한 영상을 보고 종교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불교의 관점을 보기 위해 초기 불교 사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힘들 때면 다시금 무기력해지고 사는 것에 대해 허무해지는 것에서 논리적 반박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번 영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 기쁩니다. 주역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그 내용이 와닿지 않았는데 중간중간 언급하시는 내용에서 주역을 보는 시각의 시점 하나를 잡은 것 같아서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순자 같은 유가 내용이 현대 사회에 어느 정도 의의와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 사회의 유교는 비판점과 한계가 또한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4:23 에서 나온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대표되는 유교적 가르침이 현대사회에서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장기기증 문화를 저해한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또한 후사를 잇지 않으면 불효 패륜이라는 가르침 또한 현대 사회의 적지 않은 비혼 독신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공공연히 정당화되는 용도로 쓰이고요. 물론 유교 역시 역사 시대별로 수많은 분파와 해석이 있었던 만큼 옛 유교의 내용과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적용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매번 감사히 경청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날보다 다가올 날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죽음' 에 길고 짧음이 없음을 매번 실감합니다. 하여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리학적 시각이긴 하지만 열역학 법칙에서 형체의 변형이지만 원소의 증감이 없는 1 법칙이나 불확실성의 엔트로피 증가 현상인 제 2 법칙 등을 생사의 관점에서 유추하는 생각들입니다. 성리학의 이기 논쟁이 에너지 보존 법칙과 점점 흩어지는 2법칙 (엄밀히 다르지만)같은 것이 아닐까? 공간은 다르지만 우주의 삶과 죽음이 좌표 상 같은 것이 아닐까? 늦가을 망상을 해 봅니다.
예. 잘 보았습니다. 유교가 천당, 극락을 말하는 기독교와 대승불교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즘 백세시대이다보니 요양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시체같은 삶을 살아가는 노인분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존엄사를 찬성하는 비율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사회적으로 [존엄사]에 대한 본격논의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예민한 문제라 그런지 누가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빛님께서 존엄사 문제도 다뤄 주세요. ㅎㅎ
서양인, 주로 미국인, 특히 고학력자들일수록 이 내용에 처음엔 번뜩할 겁니다. 그러나 영혼이 신체보다 낫지 않다는 전제를 거쳐 신체도 귀하다는 결론에 근거하여, 현세를 잘 살아야 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실망을 하더군요. 그런 반응에서 이렇게 문화와 인식의 차이가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국 백인들의 위선적 습성이 이렇게 상식화 된다고도 여겨지더라구요. 잘 사는 법은 부를 쌓는 것 밖에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에서 온 사람이 제 나라 백성들의 아우성을 달래줄 방법엔 관심없으면서, 대우주가 어찌 생겼고,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벌써 사후세계를 탐구하겠다는 걸 천재라고 여길 지경이니, 구역질이 느껴지더군요.
조선의 성리학을 참으로 증오합니다만.. 본시 유교 자체를 싫어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유교도 아니고 도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유불선 세 종교가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유교가 규율과 엄격한 규범과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사회의 아름다운 조화에 머물렀더라면 오늘날 이토록 미움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부모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신가 하는 생각을요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존중 어차피 죽어서도 숭배 받을 것 이라는 믿음과 그 바탕을 깔아 놓았기때문에 굳이 사후세계에 대한 사상을 적립하지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상은 지배가 최후의 목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권력에만 목숨걸었던게 아닐지. 군사부일체! 군주가 최고의 목표일뿐 사후이던 인간철학-휴머니즘 에는 그 본질 조차 없는 애초에 인간 본질을 탐구하지 못한 사상과 학문. 그 결과를 보더라도 인간사상에 접근 조차 하지 못한 버려야할 사상 이지만 왜? 이를 탐구하고 예를 중시 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 에 대해서는 밝히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이유가 되어 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듦. (예라는 것도 상하 수직적인 관계 를 통해 상위 집단이 하위 집단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 되었을 뿐- 하위 계층과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것에서 부터 오류) 조선이 봉건주의를 거처 신분타파 근대사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대주의로 신분사회로 정체되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인 사상 이라 생각함. 차라리 단군신화를 탐구하고 연구 하여 홍익인간의 정신을 고취시키 고 우리 사상의 근본과 뿌리를 밝히는것이 생산적인것!
어느덧 올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선홍밫 여전한 단풍잎이 아직 낙하(落下)도 하지 않았는데 그 위로 흰 눈이 내려앉아 여태 낙엽이 되지 않고 무얼 했냐고 따지는 것만 같습니다. 연초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이제 좀 실천해 보나 싶었는데 연말이 불쑥 나타나 여태 무얼 했냐고 따져 묻는 것만 같습니다.
이때 제가 떠올리는 말은 이것입니다.
“더딘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춰 있는 것을 두려워 하라(不怕慢,就怕站).”
비록 늦었다 할지라도 지속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멈춰버린 자신의 나태가 ‘너’ 때문이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스스로 꾸준했다면, 비록 그 속도는 느렸다 해도 괜찮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여전히 느린 나를 독려하며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인문학 강의를
하나만 더 만들어 보라고 다그쳐 보지만,
역시 속도는 잘 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많고 행동은 굼뜬 까닭입니다.
아니, 쓸데없이 많은 생각의 무게가 행동을 누르고 있는 까닭입니다.
세상에 강의를 제공하지만, 그 강의를 만들기 위해 다시 배우는 자세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까닭이든 저런 까닭이든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요?
이미 아는 것이라 자부하면서 그 자부심에 기댄 채 강의를
만드는 오만에서 벗어나, 늘 다시 확인하고 다시 읽는 자세만 잘 견지한다면
어떤 이유로든 속도의 느림이 문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강의는 2024년 9월 26일에 업로드했던 "유교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확장본’입니다. 기존 강의에서 빠졌던 후반부 내용(7분)을 추가한 후 재편집한 것이니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쩐지 봤던거 아닌가 했는데 좀 더 추가되었군요 잘 보겠습니다
연말에 정말이지 와닿는 말씀입니다. 느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멈춰있는게 문제인데 늘 속도를 염려했네요. 정신이 반짝드는 글입니다.❤
화이팅입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보고있습니다~!
피드백받고 상경하는길에 이 글을 읽고 나니 어쩐지 위로가 되네요.(제 속도는 굼벵이 이만배는 되는것 같아요! )올해도 수고 많으셨어요. 늘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한 컷 한 컷 잘 만들어 보자구요~❤🎉😊
저에게도 정확히 해당되는 내용이네요.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맘 속에 품은 계획을 꾸준히 해나가 보겠습니다. 올해도 지혜의 빛님 덕에 유익하고 재밌는 영상을 잔뜩 봤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는게 힘들고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나같은게 살아서 뭐하나 라는 비관을 하고 있었는데..
강의를 듣고 부모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눈물이 좀 나네요.
난 혼자가 아니었구나.. 싶어서 힘을 내 보겠습니다.
맞아요.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나같은게...? 당신은 누구보다도 값진 사람입니다. 부모님께서 당신을 조금도 부족하지않게 만들어주셨다고 생각됩니다. 그 소중한 내면의 당신 모습에 귀기울려주시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실거에요. ❤❤❤
덕분에 유교의 죽음관을 알게 됩니다. 내세보다는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확실히 지혜의 빛님께서 강의하시니 유교의 뜻이 잘 전달됩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군요. 그래서 오해도 더 많이 받았나 봅니다. 강의 마무리에서 하신 현대적 활용은 함께 고민해야할 중요한 과제라봅니다.
수십년을 유교 세계관에 살아온 저에게 이 유투브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며, 그렇구나 하고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유교의 핵심 사상이, 바로 창조의 중요성이라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던 유교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생각할때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행복을 달성하라고 가르치는데, 개인적으로 그것으로 충분한가 하는 허무함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서양의 니체는 비슷한 허무함의 상황에서 창조의 의지를 가진 위버맨쉬가 되라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면, 공자는 나라는 개념의 범위를 나의 후대까지 넓힘으로써, 나는 죽음을 넘어 계속된다고 이해함으로써 허무함을 깨트린 것 같습니다.
업로드에 감사드립니다.
지혜의 빛님 덕분에 유교에 대한 지식이 더해지는 시간을 갖습니다
귀한 강의 감사합니다 🎉😊
훌륭한 강의 늘 감사합니다
유교의 죽음관에 대한 현대적 활용, 이 주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고립된 개인의 문제, 고독사의 문제 등등 공동체 윤리의 회복을 위해 유교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어보이네요. 너무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살벌한 세상, 님의 영상이 평온를 가져다주네요, 응원 합니다 👍👍
좋은아침입니다.
오늘도 귀한 강의 듣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응원합니다 👏 👍 💕
강의 내용이 감동 그 자체입니다. 유교의 현대적 활용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도 와닿으며 신체를 낮게 본 서구사상의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도 귀하네요. 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입니다!!!!!😊
많은 느낌을 주는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유교의 가치를 인식하게 하네요.
믿고 보는 인문학 채널~! 후반부 기대했었는데 감사합니다~~~|
유학자란 존재에 대해 너무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학자는 학자 이전에 관료 이전에 성직자였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관료들은 영혼도 없고 소신도 없는데 조선시대 관료는 당당하고 소신있었던 이유가 성직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지나친 신념에 타협을 모르는 답답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종교가 신을 믿는 것이라면 불교도 유교도 종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세계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틀이고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가르침이라면 불교와 유교는 분명 종교입니다. 개인적으로 유교의 매력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거부하지 않고 쓰리게 가슴 속에 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예전에 공자의 논어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바른 걸 말하는데도 세상을 떠돌게 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옳았든 틀렸든, 공자 사후에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든지 간에 살아 생전 떠도는 삶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은 바꾸지 못하고 바꿀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며 그리고 그가 말하는 옳은 길로 가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실 그 모든 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세상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영상을 보니 공자가 그토록 떠돌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제 나름대로 추측하게 되었고 제가 논어를 읽으며 울었던 것을 저 또한 제가 추측하는 공자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저번에 초기 불교에 대한 영상을 보고 종교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불교의 관점을 보기 위해 초기 불교 사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힘들 때면 다시금 무기력해지고 사는 것에 대해 허무해지는 것에서 논리적 반박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번 영상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가 생겨서 기쁩니다. 주역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그 내용이 와닿지 않았는데 중간중간 언급하시는 내용에서 주역을 보는 시각의 시점 하나를 잡은 것 같아서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체에 대한 죽음의 해석✍️✍️
메모리 경청합니다.
항상 좋은 영상📷📷📷
최고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영상 너무좋아요~잘듣고 있어요 ^^* 요즘 너무 바빠서~ 댓글 늦게올려서 미안합니다 ~ 공부열심히 할게요 ~^^*♡
감사합니다
정말 지혜가 가득 쌓이는 이 영상!!
오늘 영상도 진짜 편안하고 기분 좋아져요❤
알람 뜨면 언제나 챙겨보고 있답니다 ㅎㅎ
제 일상에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주는 채널⚘️
감사해요 ^^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지혜의 빛을 따라서 왔습니디.
소홀했던 인문학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익한 내용 재밌게 잘 봤습니다. 담 영상도 기대할게요~
목소리도 너무좋으시고
친절하신 설명에 재밌게보고 가요
자주오겠습니당❤❤❤
선생님 늘 배우며 시청하고 있습니다..^^ 23년 마지막 영상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년도도 마지막 달이네요 ㅎ 올해도 정말 많이 배우고 감사하였습니다 최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 호상하고 싶네요😊
잼난 컨텐츠 감사합니다!
저도 순자 같은 유가 내용이 현대 사회에 어느 정도 의의와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 사회의 유교는 비판점과 한계가 또한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4:23 에서 나온 신체발부 수지부모로 대표되는 유교적 가르침이 현대사회에서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장기기증 문화를 저해한다는 주장들이 많습니다.. 또한 후사를 잇지 않으면 불효 패륜이라는 가르침 또한 현대 사회의 적지 않은 비혼 독신자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공공연히 정당화되는 용도로 쓰이고요. 물론 유교 역시 역사 시대별로 수많은 분파와 해석이 있었던 만큼 옛 유교의 내용과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적용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옛날에 읽었던 글에서 청나라 유학자가 조선유학자에게 왜 구닥다리 성리학같은걸 배우냐고, 양명학을 모르냐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언젠가 양명학을 비롯한 유학의 전체적인 변화에 대해서도 듣고싶습니다.
매번 감사히 경청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날보다 다가올 날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죽음' 에 길고 짧음이 없음을 매번 실감합니다. 하여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리학적 시각이긴 하지만 열역학 법칙에서 형체의 변형이지만 원소의 증감이 없는 1 법칙이나 불확실성의 엔트로피 증가 현상인 제 2 법칙 등을 생사의 관점에서 유추하는 생각들입니다. 성리학의 이기 논쟁이 에너지 보존 법칙과 점점 흩어지는 2법칙 (엄밀히 다르지만)같은 것이 아닐까? 공간은 다르지만 우주의 삶과 죽음이 좌표 상 같은 것이 아닐까? 늦가을 망상을 해 봅니다.
잘보았습니다~~
이웃맺고 갑니다 ❤
선비처럼 걸어왓슴니다~ 엣헴~
예가 존재한다면 죽음 또한 예가 될 것이니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서양철학과 다리 유교는 윤리덕목일 뿐이고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이론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학문적 탐색이 아니라 정치사회질서를 합리화하기 위한 윤리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혼기와 형백, 죽음을 관찰하면서, 알아보다. 해석하시는 분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현실을 중시한게 아니라 기득적 정치질서를 절대화하기 위한 정치논리가 유교의 핵심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 잘 보았습니다.
유교가 천당, 극락을 말하는 기독교와 대승불교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요즘 백세시대이다보니 요양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 곳에는 시체같은 삶을 살아가는 노인분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존엄사를 찬성하는 비율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사회적으로
[존엄사]에 대한 본격논의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예민한 문제라 그런지
누가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빛님께서 존엄사 문제도 다뤄 주세요. ㅎㅎ
효
서양인, 주로 미국인, 특히 고학력자들일수록 이 내용에 처음엔 번뜩할 겁니다.
그러나 영혼이 신체보다 낫지 않다는 전제를 거쳐 신체도 귀하다는 결론에 근거하여, 현세를 잘 살아야 한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실망을 하더군요.
그런 반응에서 이렇게 문화와 인식의 차이가 있구나, 싶기도 했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미국 백인들의 위선적 습성이 이렇게 상식화 된다고도 여겨지더라구요.
잘 사는 법은 부를 쌓는 것 밖에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나라에서 온 사람이 제 나라 백성들의 아우성을 달래줄 방법엔 관심없으면서, 대우주가 어찌 생겼고,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벌써 사후세계를 탐구하겠다는 걸 천재라고 여길 지경이니, 구역질이 느껴지더군요.
조선의 성리학을 참으로 증오합니다만.. 본시 유교 자체를 싫어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유교도 아니고 도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유불선 세 종교가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유교가 규율과 엄격한 규범과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인간사회의 아름다운 조화에 머물렀더라면 오늘날 이토록 미움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부모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신가 하는 생각을요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존중
어차피 죽어서도 숭배 받을 것
이라는 믿음과 그 바탕을 깔아
놓았기때문에 굳이 사후세계에
대한 사상을 적립하지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상은 지배가 최후의 목표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권력에만
목숨걸었던게 아닐지.
군사부일체!
군주가 최고의 목표일뿐
사후이던 인간철학-휴머니즘 에는
그 본질 조차 없는 애초에 인간
본질을 탐구하지 못한 사상과 학문.
그 결과를 보더라도 인간사상에
접근 조차 하지 못한 버려야할 사상
이지만 왜? 이를 탐구하고 예를
중시 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
에 대해서는 밝히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킬 이유가 되어
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듦.
(예라는 것도 상하 수직적인 관계
를 통해 상위 집단이 하위 집단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 되었을
뿐- 하위 계층과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것에서 부터 오류)
조선이 봉건주의를 거처 신분타파
근대사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사대주의로 신분사회로 정체되어
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인 사상
이라 생각함.
차라리 단군신화를 탐구하고 연구
하여 홍익인간의 정신을 고취시키
고 우리 사상의 근본과 뿌리를
밝히는것이 생산적인것!
현실을 중점에 둬야 한다는 입장에선 유교도 불교 이상인듯
논어맹자에는 죽음에 대한 고찰이 없고
혼백에 대한 언급은 주희.정이 등이 불교에 대적하기 위해 주렴계의 태극도설 등을 끌어더려 본성과 이기론을 만든 이후의 추상적인 관념론임.
정이가 주희보다 앞세대죠. 그리고 선진유교에도 죽음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상례는 주요 예식이었으니까요. 다만 형이상학적 성격이 송유로부터 강화된 것이고요. 본강의에도 관련 설명이 나옵니다.
사후세계가 없다고하기엔
조상신을 너무 열심히 섬기는것같은데요,
3대까지 제사니까 3대의 시간동안 혼이 흩어진다는건가요?
중국은 3대보다 더 많은 느낌인데... 디즈니 뮬란이 왜곡한건가ㅡ
말 속도가 너무 빨라요. 좀 느리게 할 수 없나요.
공자가 가르치는 내용은 양반같은 계층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라고 하는 범위에 그 하위계층은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다고 함
유교무류(有敎無類)는 공자가 한 말입니다.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했고 호향 사람이라도 과거 일로 차별 두지 않는다고 했죠.
@@sharonjo8787이사람은 단지 어떤 쇼츠를 보고왔을 뿐입니다
@@sharonjo8787진지한 고찰이 아니니 깊게 대응하실 필요 없을것 같습니다
제자로 벋아들일 때도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논어에능 여성차별도 없었어요. 조선시대 후기에 성리학이 정치와 결탁하면서 지배자의 입장이 강화되고 남녀차별이 극심해졌어요.
그래봤자 의미없는 말장난일뿐
인간은 단지 부모의 성욕으로 태어났을뿐이고
죽으면 모든게 아무 의미없다 .
인생에 의미란 없다
의미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봐도 의미로 가득찬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이죠. “의미없음”조차 하나의 의미를 가지죠.
내세관이 없는데 종교라 할 수 있나? 조선의 교생들이 지어낸 것이다.오직 답답했으면 이여송이 양명학을 권했겠나?
결론만 말하면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화이트헤드)
즉 플라톤의 절대적 이데아론이 서양철학을 지배했고
동양의 제자백가철학에 비하면
거의 초딩수준임 근데도 아직 서양철학이 뭐 대단하다고 지껄이는 놈들은 절대성에 함몰된 편견중이자들이라 보면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