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 [영원한 지금 30]_‘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법문 중에서 (1) 새해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아마 천국을 떠난 적은 없어. 그렇죠? 본래 우리는 깨달음으로 존재하니까, 깨달음 아닌 적이 한순간도 없었잖아요. 단지 우리가 이제 망상에 잡혀 가지고 둘로 나눠보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둘로 나눠진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 이름일 뿐이지. 그런데 세상은 어때요? 이미지 간에 서로 비교 경쟁하고 싸움하는 세상 아닐까? 그림자를 놓고 전쟁하는 세상이지. 그건 이제 우리가 나의 본래 모습을 깜박 놓치고, 본래 그냥 이대로 사는 여래임에도 불구하고, 망상에 잡혀가지고 그것을 놓친 것뿐이야. 결국은 그 이미지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노예로, 그것을 實在(실재)로 알고. 세상이 그렇잖아요? 그 이미지 가지고 전쟁하는 것 아닌가? 정치도 그렇고. 그렇죠? 여야가 전부 다 프레임 가지고 장난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미지를 누가 선점하느냐 가지고 서로 다퉈. 그리고 그것뿐이겠어요? 정치뿐이겠어요? 모든 산업구조나 모든 우리의 삶이 비교를 서로 극대화시켜 가지고 서로 전쟁하는 사회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그림자에 속아서 그러는 거야. 그것을 가지고 苦海(고해)라고 그러잖아요.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는 한 번도 천국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이미지의 세상이 어떻게 실재하겠어요? 우리는 그냥 망상 속에 잡혀있어도, 지금 여기 이대로, 이대로를 살지.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모두가 이대로이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걷고 앉는 이대로이지. 여기 일이지. 그것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사실은 우리가 천국을 놓쳤다고 망상을 할 뿐이지, 사실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어떻게 우리가 진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한마디로 한다면 “한 물건도 없다.”지. 본래 한 물건도 없다. 그것 다 동의하시잖아요? 우리가 동서남북이 이미지이고 과거 현재 미래가 이미지이고 너다 나다 이런 것이 다 이미지이잖아요. 이미지 놀음 아니에요? 그럼 이제 한 물건도 없어. 이 세상은 그야말로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야. 꿈이야 꿈. 그렇다면 우리가 여래를 발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 어때요?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다.” 그러면 “여..몽..환..포..영..이..다..” 이것이 실재하지 않을까? 그림자가 무슨 “여..몽..환..포..영..이..다..” 이렇게 말을 하겠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여..몽..환..포..영..이..다..” 이것이 실재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사실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망상에 잡혀있을 뿐이지. 한 물건도 없음에도 우리 일상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한 물건도 없는데, 보세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걷고 앉고 눕잖아요. 그게 우리 일상이지. 그렇죠? 한 물건도 없는데 그러고 살잖아. 거기가 천국이에요. 한 물건도 없는데 그러고 살잖아. 이대로 살잖아요. 우리는 천국에 대한 어떤 또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왜 천국이라는데 내 삶이 이렇게 고달플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보다, 자꾸만 의심을 하지. 생각이 없는 자리가 그냥 천국이야. 희노애락(喜怒哀樂) 하는 자리가 그대로 천국이야. 그것 말고 다른 삶이 없어. 단지, 그것들은 다 실체가 없어. 이름일 뿐이다. 그 깨달음만이 필요한 거라요. 그러니까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한 現存(현존)하는 一念(일념)이지. “11시 10분이다.” 이것이 현존하는 일념 아니에요? “탁 탁” 이것 현존하는 覺(각) 아니에요? 이것뿐이야. 이것뿐이야. 우리 늘 일상이 그렇게 살잖아요. “道(도)가 무엇입니까?” 하니까, “이놈아 일상이 도야. 네가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하는 것이 그대로 도야. 거기가 천국이야.” 이런 얘기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일이죠. 만물의 일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일상은 지금 여기 일이지. 지금 여기, 너 없는 나의 일이지. 그러고 살지 않아요? 이대로, 이대로 한 물건도 없음에도 우리 삶이 진행되고 있잖아요. 그게 이대로이지. 그런데 한 물건도 없으니까, 저기 일이라고 할 수가 없어, 만물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어. 여기 일이지. 지금 여기가 생명 자리 아닐까? 말씀이지. 우리가 지금 여기다 해서 말을 안 따라가면 그것이 말씀이야. 생명이지, 생명. 예부터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아왔어요. 한 번도 천국을 벗어난 적이 없어. 생노병사(生老病死)하는 이대로,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이대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삶 이대로, 이대로 전부 여기 일이라요.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삶이 온다면 이상한 것이지. 그렇죠? 우리는 진리로 살아왔지. 그것을 이대로 사는 것 외에 진리가 따로 있을까? 한 물건도 없어서 이름을 붙일 수 없어. 이 자리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그것 뿐이라요. 이름을 붙여서 알 수는 없어. 그런데도 너무나 自明(자명)하잖아요. “세상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야 그림자야.” 그렇다면 “세..상..이.. 여..몽..환..포..영..이..야.. 그..림..자..야..” 이 實在(실재)를 어떻게 부정을 해? 이 확연한 것을. 그런데도 자꾸만 세상을 나눠보아서 이름을 붙여가지고, 이름에 해당하는 놈이 따로 있다는 망상, 이것이 비교와 갈등을 낳죠. 이 세상 구조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부 비교를 팔아먹고 사는 구조에요. 그 허깨비 싸움이지 사실은. 왜 이 苦海(고해)냐? 그러니까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닫고 한 물건도 없어. 한 물건도 없음을 발견하면 거기가 바로 그냥 천국 아니에요? 둘이 아닌 안목(眼目)으로 이 세간(世間)을 사는 거예요. 이름으로 나누어진 세간을, 둘이 아닌 안목으로 세간을 살아가는 거야. 영원히 그래왔어요. 영원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존재할 것이고.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가 물을 필요가 있을까? 안목만이 필요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다시 둘로 보는 거야. 이렇게 살아야 될까, 저렇게 살아야 될까. 그것 묻는 질문이거든. 그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돼. 안목(眼目)만이 필요하지.
2024년 1월 14일 [영원한 지금 30]_‘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법문 중에서 (2) 우리 조사선에서 一句(일구) 얘기를 하잖아요. 一句. 전에 시간에도 천국의 열쇠가 뭐냐? 그것 일구잖아요. 일구. 그렇지? “뜰 앞의 잣나무다.” 이게 생명이잖아요. 생명, 말이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말씀이잖아요, 말씀. 말씀, 생명이야. 그 일구를 가지고 진언이라 그래. 진언, 참된 말씀이다. 진언이라 그러잖아요. 진언, 그거 생명이야. 참된 말이라요. 말씀이 참된 말이라요. 참된 말, 거기 생명이 있잖아. 생명이 거기 함축되지 않은 우리 일상이 어디 있겠어? 다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해도 거기 생명이 드러나고 있고, 뭘 봐도 거기 생명이 드러나고 있지. 이렇게 너무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생각이 났어. 우리 고등학교 때 할머니께서 “너는 꼭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고 살아라.” 그러셔. 뜻도 설명이 없어. 그때는 그냥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면은 인생이 편하다 그랬어. 지금 생각하면 그게 一句(일구)야. 그게 一句였어. 六字大明王眞言(육자대명왕진언) 그러잫아. 여섯 자로 된 진언 참된 말씀 그게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이것 놓치지 말고 살아라. 그렇게 할머니 말씀하셨거든. 그러니 옛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웠어? 이것 뜻 풀이 하지 말고 그냥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아라.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지. 생명이니까. 뜻을 따라가면 그만 그림자가 되어버리는데, 안 따라가면 진언이잖아요. 생명 참된 자리잖아요. 그 진언 중에는 이것도 또 있잖아요. 반야심경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이것 해석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가 천국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열쇠야 열쇠. 그러니까 참 우리가 여태까지 둘이 아닌 자리를 밝히느라고 10여 년 밝혀 왔지만은, 사실은 옛 조상들은 아 그냥 이것만 하고 살아 그러면 너 편해 했지. 천수경에도 많잖아요 진언이.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 진언이라요. 그것은 절대로 뜻을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랬거든. 그렇게 배웠잖아. 뜻이 없는 거라면 그것 참되지 않아요? 뜻으로 가니까 그만 뜻에 머물러서 생명을 놓치지. 그렇게 보면 一句(일구) 아닌 것이 없어. 참된 말씀 아닌 것이 없어. 진언 아닌 것이 없어. 우리 일상 오늘 무슨 말을 해도 거기 참되죠. 말을 따라가지 않으면. 말을 따라가면 그만 말에 머물러서 참된 것을 놓치기가 쉬운 거라. 그러니까 옛 스승들이 이렇게 구차하게 둘이 아닌 자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간단히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아라 그랬던 것 같아. 참으로 지혜로운 가르침이야. 그러니 우리가 알고 보면 一句(일구) 아닌 것이 있을까? 알고 보면 보고 듣고 말하고 이런 것이 다 覺(각)이야. 참으로 그래요. 우리 일상에서 말할 때만 빼놓으면 主客合一(주객합일)이잖아요. 말할 때만 빼놓으면 主客合一이야. 언제나. 볼 때 들을 때 主客合一 아니에요? 둘인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말할 때만 말을 따라가서 말에 머물으면 그만 생명 자리를 놓친 적은 없지만 놓쳐버리지. 그래서 말에 머물러 가지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그러면서 살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대로가 한 물건도 없다면, 이것이 우선 와 닿아야 돼. 시간과 공간이 무너져. 그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는 만물이 전부 실체가 없어져 버려. 그렇다면 “한 물건도 없구나.”가 있잖아. “한.. 물..건..도.. 없..구..나..”이게 생명이지. 거기서 생명을 발견하면, 생명 아닌 一句(일구)가 어디 있어? 그렇잖아요. 생명 아닌 一句가 어디 있어요 우리 삶에? 지금 여기 이대로가 영원히 이대로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대로입니다. 여기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온 것이 이대로라면, 지금 여기 이대로라면, 이게 본래 모습이에요. 그것 말고 우리 본래 모습이 어디 따로 있겠어? 그러니까 생노병사하는 이대로, 생노병사(生老病死)하는 이대로가 여래의 삶이지.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이대로가 여래의 삶이지. 오욕칠정(五慾七情) 이대로가 지금 여기 일이지. 여기 일이잖아요? 한 물건도 없는데, 기뻐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고 그러잖아요. 그것을 이름만 붙이지 않으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우리 그냥 이대로의 삶이지. 그러니까 공부가 참으로 간단한 거야. 우리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그러니까 “道(도)가 무엇입니까?” “우리 일상이 도다.” 그것은 우리 일상이 천국이야 이런 소리야. “도를 어떻게 얻어야 합니까?” “그것은 얻으려고 하면 어긋나 이놈아.” 아니 천국에 살면서 천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안 되잖아. 그렇죠? 중국 속담에 서울에서 “서울은 어디로 가야 되요?” 묻는 것과 똑같아. 물고기가 바다를 찾아서 길을 떠났어. 아무리 가도 바다는 안 나와. 그런데 가다가 고래를 만났어. 고래 아저씨는 나이도 많으니까 알겠지 하고 물어봤어. “바다를 어디로 가야 되요?” “이놈아 여기가 바다야.” 안 믿어. 그런 거예요. 우리가 그냥 여기가 천국이야. 여기가 천국이야. 이 지지고 볶고 하는 삶이 그대로 천국이야. 다른 삶이 없어. 어떻게 다른 삶이 있을 수 있을까? 그냥 단지 선악과를 따먹고 딱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자리를 놓치고 사는 거라요. 오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제목을 또 가져와 봤습니다.
『영원한 지금』 p227-228 67. 사사(事事)는 여여(如如)하다 우리의 일상인 견문각지(見聞覺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모든 일에, 주객이 분리된 적이 없다. 그 하나하나가 주객 합일(主客 合一)인 통째이다. 마음과 삼라만상이 둘이 아니어서, 삼라만상이 마음이요, 마음이 삼라만상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마음이라 해도 어긋나고, 삼라만상이라 해도 어긋난다. 그런데 그 불이(不二)의 존재는, 이름을 짓자마자 마음과 삼라만상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마음이나 삼라만상은 이름일 뿐으로 실체가 없다. 마음이라는 물건이 따로 없고 삼라만상이라는 물건도 따로 없다. 하는 일마다 불이(不二)이므로, 따로 불이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노력하면 어긋난다. 남전은 조주에게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고 가르쳤다. 조주가 남전에게 “그 평상심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남전은 “어떻게 하려 하면 어긋난다.”고 가르쳤다. 어느 경우나 주객 합일의 불이인데, 거기에 어찌 불이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주객 합일의 불이(不二)는 이름을 짓자마자 둘로 나누어지므로, 그 불이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알았다 하면 이름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전은 조주에게 “도는 알고 모르고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 본래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 이 불이(不二)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려고 하는 데 있다. 알자마자 불이의 존재는 개념화되어 이름뿐이게 된다. 알기 이전을 두고 첫 번째라고 한다면, 아는 것은 두 번째이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항상 이름뿐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름뿐인 해석의 세상을 실재로 알고 사는 것을 두고, 망상(妄想)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망상은 두 번째일 때만 망상이다. 그러나 두 번째라는 것은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망상 역시 언제나 첫 번째일 뿐이다. 아무리 망상이 들끓어도, 망상 하나하나에서 주객이 분리된 적이 없다. 주객 불이의 실재를 두고 말하는 자와 말을 나눈다면, 이는 두 번째가 되어 또한 망상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은 첫 번째일 뿐이다. 즉 아무리 망상을 해도 주객불이의 통째일 뿐이다. 망상이 보리(菩提)이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라. 언제나 주객 불이의 통째이다. 일체가 지금 여기 일일 뿐이어서, 사사(事事)가 여여(如如)하고 만물이 둘이 아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 🙏🏻 🙏🏻
감사합니다
🙏🙏🙏
너무쉽습니다
선생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
선생님!
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
2024년 1월 14일 [영원한 지금 30]_‘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법문 중에서 (1)
새해 건강하십시오.
우리가 아마 천국을 떠난 적은 없어. 그렇죠?
본래 우리는 깨달음으로 존재하니까,
깨달음 아닌 적이 한순간도 없었잖아요.
단지 우리가 이제 망상에 잡혀 가지고 둘로 나눠보는 것뿐이지.
그러니까 둘로 나눠진 세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 이름일 뿐이지.
그런데 세상은 어때요?
이미지 간에 서로 비교 경쟁하고 싸움하는 세상 아닐까?
그림자를 놓고 전쟁하는 세상이지.
그건 이제 우리가 나의 본래 모습을 깜박 놓치고, 본래 그냥 이대로 사는 여래임에도 불구하고, 망상에 잡혀가지고 그것을 놓친 것뿐이야.
결국은 그 이미지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노예로, 그것을 實在(실재)로 알고.
세상이 그렇잖아요?
그 이미지 가지고 전쟁하는 것 아닌가?
정치도 그렇고. 그렇죠? 여야가 전부 다 프레임 가지고 장난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미지를 누가 선점하느냐 가지고 서로 다퉈.
그리고 그것뿐이겠어요? 정치뿐이겠어요?
모든 산업구조나 모든 우리의 삶이 비교를 서로 극대화시켜 가지고 서로 전쟁하는 사회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그림자에 속아서 그러는 거야.
그것을 가지고 苦海(고해)라고 그러잖아요.
그렇지만 사실은 우리는 한 번도 천국을 떠난 적이 없잖아요.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이미지의 세상이 어떻게 실재하겠어요?
우리는 그냥 망상 속에 잡혀있어도, 지금 여기 이대로,
이대로를 살지.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모두가 이대로이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걷고 앉는 이대로이지. 여기 일이지.
그것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사실은 우리가 천국을 놓쳤다고 망상을 할 뿐이지, 사실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어떻게 우리가 진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한마디로 한다면 “한 물건도 없다.”지.
본래 한 물건도 없다.
그것 다 동의하시잖아요?
우리가 동서남북이 이미지이고 과거 현재 미래가 이미지이고 너다 나다 이런 것이 다 이미지이잖아요.
이미지 놀음 아니에요?
그럼 이제 한 물건도 없어.
이 세상은 그야말로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야.
꿈이야 꿈.
그렇다면 우리가 여래를 발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
어때요?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다.”
그러면 “여..몽..환..포..영..이..다..” 이것이 실재하지 않을까?
그림자가 무슨 “여..몽..환..포..영..이..다..” 이렇게 말을 하겠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여..몽..환..포..영..이..다..” 이것이 실재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이지.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사실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망상에 잡혀있을 뿐이지.
한 물건도 없음에도 우리 일상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한 물건도 없는데,
보세요.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걷고 앉고 눕잖아요.
그게 우리 일상이지. 그렇죠?
한 물건도 없는데 그러고 살잖아.
거기가 천국이에요.
한 물건도 없는데 그러고 살잖아.
이대로 살잖아요.
우리는 천국에 대한 어떤 또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왜 천국이라는데 내 삶이 이렇게 고달플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보다, 자꾸만 의심을 하지.
생각이 없는 자리가 그냥 천국이야.
희노애락(喜怒哀樂) 하는 자리가 그대로 천국이야.
그것 말고 다른 삶이 없어.
단지,
그것들은 다 실체가 없어. 이름일 뿐이다.
그 깨달음만이 필요한 거라요.
그러니까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한 現存(현존)하는 一念(일념)이지.
“11시 10분이다.” 이것이 현존하는 일념 아니에요?
“탁 탁” 이것 현존하는 覺(각) 아니에요?
이것뿐이야. 이것뿐이야.
우리 늘 일상이 그렇게 살잖아요.
“道(도)가 무엇입니까?” 하니까,
“이놈아 일상이 도야. 네가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하는 것이 그대로 도야. 거기가 천국이야.” 이런 얘기야.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일이죠.
만물의 일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일상은 지금 여기 일이지.
지금 여기, 너 없는 나의 일이지.
그러고 살지 않아요?
이대로, 이대로 한 물건도 없음에도 우리 삶이 진행되고 있잖아요.
그게 이대로이지.
그런데 한 물건도 없으니까, 저기 일이라고 할 수가 없어, 만물의 일이라고 할 수가 없어.
여기 일이지.
지금 여기가 생명 자리 아닐까?
말씀이지.
우리가 지금 여기다 해서 말을 안 따라가면 그것이 말씀이야.
생명이지, 생명.
예부터 우리는 지금 이대로 살아왔어요. 한 번도 천국을 벗어난 적이 없어.
생노병사(生老病死)하는 이대로,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이대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삶 이대로,
이대로 전부 여기 일이라요.
깨달았다고 해서 다른 삶이 온다면 이상한 것이지.
그렇죠?
우리는 진리로 살아왔지.
그것을 이대로 사는 것 외에 진리가 따로 있을까?
한 물건도 없어서 이름을 붙일 수 없어. 이 자리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그것 뿐이라요.
이름을 붙여서 알 수는 없어.
그런데도 너무나 自明(자명)하잖아요.
“세상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야 그림자야.”
그렇다면 “세..상..이.. 여..몽..환..포..영..이..야.. 그..림..자..야..” 이 實在(실재)를 어떻게 부정을 해?
이 확연한 것을.
그런데도 자꾸만 세상을 나눠보아서 이름을 붙여가지고, 이름에 해당하는 놈이 따로 있다는 망상, 이것이 비교와 갈등을 낳죠.
이 세상 구조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부 비교를 팔아먹고 사는 구조에요.
그 허깨비 싸움이지 사실은.
왜 이 苦海(고해)냐?
그러니까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닫고 한 물건도 없어.
한 물건도 없음을 발견하면 거기가 바로 그냥 천국 아니에요?
둘이 아닌 안목(眼目)으로 이 세간(世間)을 사는 거예요.
이름으로 나누어진 세간을, 둘이 아닌 안목으로 세간을 살아가는 거야.
영원히 그래왔어요.
영원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존재할 것이고.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우리가 물을 필요가 있을까?
안목만이 필요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다시 둘로 보는 거야.
이렇게 살아야 될까, 저렇게 살아야 될까. 그것 묻는 질문이거든.
그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돼.
안목(眼目)만이 필요하지.
2024년 1월 14일 [영원한 지금 30]_‘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법문 중에서 (2)
우리 조사선에서 一句(일구) 얘기를 하잖아요.
一句.
전에 시간에도 천국의 열쇠가 뭐냐?
그것 일구잖아요. 일구. 그렇지?
“뜰 앞의 잣나무다.” 이게 생명이잖아요.
생명, 말이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말씀이잖아요, 말씀.
말씀, 생명이야.
그 일구를 가지고 진언이라 그래.
진언, 참된 말씀이다.
진언이라 그러잖아요.
진언, 그거 생명이야. 참된 말이라요.
말씀이 참된 말이라요.
참된 말, 거기 생명이 있잖아.
생명이 거기 함축되지 않은 우리 일상이 어디 있겠어?
다 생명이 드러나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해도 거기 생명이 드러나고 있고,
뭘 봐도 거기 생명이 드러나고 있지.
이렇게 너무 분명하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생각이 났어.
우리 고등학교 때 할머니께서 “너는 꼭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고 살아라.” 그러셔.
뜻도 설명이 없어.
그때는 그냥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면은 인생이 편하다 그랬어.
지금 생각하면 그게 一句(일구)야.
그게 一句였어. 六字大明王眞言(육자대명왕진언) 그러잫아. 여섯 자로 된 진언 참된 말씀 그게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이것 놓치지 말고 살아라. 그렇게 할머니 말씀하셨거든.
그러니 옛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웠어?
이것 뜻 풀이 하지 말고 그냥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아라. 그러면 거기가 천국이지. 생명이니까.
뜻을 따라가면 그만 그림자가 되어버리는데,
안 따라가면 진언이잖아요. 생명 참된 자리잖아요.
그 진언 중에는 이것도 또 있잖아요.
반야심경에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 이것 해석하지 말라고 그러잖아요.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 승아제”가 천국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에요. 열쇠야 열쇠.
그러니까 참 우리가 여태까지 둘이 아닌 자리를 밝히느라고 10여 년 밝혀 왔지만은,
사실은 옛 조상들은 아 그냥 이것만 하고 살아 그러면 너 편해 했지.
천수경에도 많잖아요 진언이.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 진언이라요. 그것은 절대로 뜻을 알려고 하지 말아라 그랬거든. 그렇게 배웠잖아.
뜻이 없는 거라면 그것 참되지 않아요?
뜻으로 가니까 그만 뜻에 머물러서 생명을 놓치지.
그렇게 보면 一句(일구) 아닌 것이 없어.
참된 말씀 아닌 것이 없어.
진언 아닌 것이 없어.
우리 일상 오늘 무슨 말을 해도 거기 참되죠. 말을 따라가지 않으면.
말을 따라가면 그만 말에 머물러서 참된 것을 놓치기가 쉬운 거라.
그러니까 옛 스승들이 이렇게 구차하게 둘이 아닌 자리를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간단히 “옴 마니 반메 훔” 하고 살아라 그랬던 것 같아. 참으로 지혜로운 가르침이야.
그러니 우리가 알고 보면 一句(일구) 아닌 것이 있을까?
알고 보면 보고 듣고 말하고 이런 것이 다 覺(각)이야.
참으로 그래요.
우리 일상에서 말할 때만 빼놓으면 主客合一(주객합일)이잖아요.
말할 때만 빼놓으면 主客合一이야. 언제나.
볼 때 들을 때 主客合一 아니에요?
둘인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말할 때만 말을 따라가서 말에 머물으면 그만 생명 자리를 놓친 적은 없지만 놓쳐버리지. 그래서 말에 머물러 가지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그러면서 살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대로가 한 물건도 없다면,
이것이 우선 와 닿아야 돼.
시간과 공간이 무너져.
그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는 만물이 전부 실체가 없어져 버려.
그렇다면 “한 물건도 없구나.”가 있잖아.
“한.. 물..건..도.. 없..구..나..”이게 생명이지.
거기서 생명을 발견하면, 생명 아닌 一句(일구)가 어디 있어?
그렇잖아요. 생명 아닌 一句가 어디 있어요 우리 삶에?
지금 여기 이대로가 영원히 이대로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대로입니다.
여기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온 것이 이대로라면,
지금 여기 이대로라면,
이게 본래 모습이에요.
그것 말고 우리 본래 모습이 어디 따로 있겠어?
그러니까 생노병사하는 이대로,
생노병사(生老病死)하는 이대로가 여래의 삶이지.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이대로가 여래의 삶이지.
오욕칠정(五慾七情) 이대로가 지금 여기 일이지.
여기 일이잖아요?
한 물건도 없는데, 기뻐하고 슬퍼하고 노여워하고 그러잖아요.
그것을 이름만 붙이지 않으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우리 그냥 이대로의 삶이지.
그러니까 공부가 참으로 간단한 거야.
우리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어.
그러니까 “道(도)가 무엇입니까?”
“우리 일상이 도다.” 그것은 우리 일상이 천국이야 이런 소리야.
“도를 어떻게 얻어야 합니까?”
“그것은 얻으려고 하면 어긋나 이놈아.”
아니 천국에 살면서 천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안 되잖아. 그렇죠?
중국 속담에 서울에서 “서울은 어디로 가야 되요?” 묻는 것과 똑같아.
물고기가 바다를 찾아서 길을 떠났어. 아무리 가도 바다는 안 나와. 그런데 가다가 고래를 만났어. 고래 아저씨는 나이도 많으니까 알겠지 하고 물어봤어.
“바다를 어디로 가야 되요?”
“이놈아 여기가 바다야.”
안 믿어. 그런 거예요.
우리가 그냥 여기가 천국이야.
여기가 천국이야. 이 지지고 볶고 하는 삶이 그대로 천국이야.
다른 삶이 없어.
어떻게 다른 삶이 있을 수 있을까?
그냥 단지 선악과를 따먹고 딱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자리를 놓치고 사는 거라요.
오늘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는 제목을 또 가져와 봤습니다.
『영원한 지금』 p227-228
67. 사사(事事)는 여여(如如)하다
우리의 일상인 견문각지(見聞覺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모든 일에, 주객이 분리된 적이 없다. 그 하나하나가 주객 합일(主客 合一)인 통째이다. 마음과 삼라만상이 둘이 아니어서, 삼라만상이 마음이요, 마음이 삼라만상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마음이라 해도 어긋나고, 삼라만상이라 해도 어긋난다.
그런데 그 불이(不二)의 존재는, 이름을 짓자마자 마음과 삼라만상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마음이나 삼라만상은 이름일 뿐으로 실체가 없다. 마음이라는 물건이 따로 없고 삼라만상이라는 물건도 따로 없다.
하는 일마다 불이(不二)이므로, 따로 불이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노력하면 어긋난다. 남전은 조주에게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고 가르쳤다. 조주가 남전에게 “그 평상심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남전은 “어떻게 하려 하면 어긋난다.”고 가르쳤다. 어느 경우나 주객 합일의 불이인데, 거기에 어찌 불이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주객 합일의 불이(不二)는 이름을 짓자마자 둘로 나누어지므로, 그 불이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알았다 하면 이름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전은 조주에게 “도는 알고 모르고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다. 본래 아무 일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 이 불이(不二)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려고 하는 데 있다. 알자마자 불이의 존재는 개념화되어 이름뿐이게 된다. 알기 이전을 두고 첫 번째라고 한다면, 아는 것은 두 번째이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항상 이름뿐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름뿐인 해석의 세상을 실재로 알고 사는 것을 두고, 망상(妄想)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망상은 두 번째일 때만 망상이다. 그러나 두 번째라는 것은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망상 역시 언제나 첫 번째일 뿐이다. 아무리 망상이 들끓어도, 망상 하나하나에서 주객이 분리된 적이 없다. 주객 불이의 실재를 두고 말하는 자와 말을 나눈다면, 이는 두 번째가 되어 또한 망상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은 첫 번째일 뿐이다. 즉 아무리 망상을 해도 주객불이의 통째일 뿐이다.
망상이 보리(菩提)이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라. 언제나 주객 불이의 통째이다. 일체가 지금 여기 일일 뿐이어서, 사사(事事)가 여여(如如)하고 만물이 둘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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