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 베트남 표류기, 호이안을 가다 (역사기행 2007.3.25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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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Опубликовано: 5 сен 2024
  • 17세기, 한척의 배를 탄 제주도민 24명이 표류한다. 그곳은 바로 베트남 ‘호이안’ 이었다.
    베트남의 호이안. 300여 년 전 24명의 제주도민이 표류한 곳이다. 1년여 만에 조선으로 귀국한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베트남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하얀 전쟁]의 안정효 작가와 함께 호이안의 역사를 제주도민의 흔적을 따라 추적한다.
    ▶▶ 취재 내용
    베트남 중부 쿠앙남다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호이안(Hoi An).
    호이안은 후에(Hue)에서 4시간, 다낭(Da Nang)에서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고대 항구 도시이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잠시 머문 곳에 불과했지만, 이 후 동남아의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된다. 호이안이 국제 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6세기 중반, 말레이시아의 해안도시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베트남 중부 해안에 위치한 호이안에서 교역을 시작한다. 호이안에는 포르투갈 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7세기에 베트남이 남, 북으로 분단되자 주민들의 왕래가 금지되었는데, 외국 상인들은 남과 북 사이의 교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했으며, 명나라의 멸망에 대응해 부흥운동을 벌이던 세력들이 호이안에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면서 17세기에 호이안은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하게 된다.
    ▶ 24명의 제주도민, 호이안에 표류하다
    1806년 정동유가 쓴 ‘주영편’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왕조 숙종 때, 조선인 24명이 베트남에 표류하여 호이안 앞에 있는 ‘꾸 라오 짬’ 섬에 머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베트남 지배자인 응웬 푹 떤(Nguyen Phuc Tan)왕을 알현하고, 21명이 생존하여 1년 만에 귀국했다.
    ▶ 한국이 이어준 길, 따이한 루트
    한국의 청룡부대는 베트남 전쟁 당시 약 5년 동안 호이안 일대에 주둔했다. 베트남의 중북부에 위치한 다낭에서 호이안까지 이어지는 일부 도로는 청룡부대가 건설한 것이다.
    ▶ 화교들이 세운 복건회관
    국제적 무역항인 호이안에는 각국의 상인들이 집결하면서 복건회관특색 있는 거리와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중국의 화교들은 호이안에 정착하면서 여러 회관을 지었는데, 복건회관은 1697년에 지어진 것으로 광동성 출신자들의 단합과 결속을 위해 세웠다.
    ▶ 일본인과 중국인의 경계, 일본교
    호이안 거리에는 베트남 고유의 양식과 어우러진 이채로운 건물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일본교는 1593년에 일본인들이 세운 목조지붕이 있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경계로 일본인 거리와 중국인 거리가 형성되었다.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다리를 건설했다고 전해지며 다리 안에 작은 절을 만들어서 괴물의 힘을 눌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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