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때 독일은 Walter Model 말고도 Paul Ludwig Edwald von Kleist ( 파울 루드비히 에드발트 폰 클라이스트), Friedrich Paulus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Erich von Manstein (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win Rommel ( 에르빈 롬멜), Gerd von Rundstedt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Günther von Kluge ( 귄터 폰 클루게), Wilhelm Keitel ( 빌헬름 카이텔), Fedor von Bock ( 페도르 폰 복) Heinz Guderian (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좋은 육군 원수들이 있었지요.
@@산일-d2h 그 이유가 발터 모델 원수는 행보관 원수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전선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이 힘든 부분을 일일히 듣고 있으면서 그들을 최대한 도와주려고 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전공이니 뭐니 하는 부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서툴렀다고나 할까요?
천재 군인이 나치에 심취했다고 하기 보다는 나치 정권이라고 해도 독일인에 의해 선거로 뽑힌 지도자와 정권이기도 하고 군인 특히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상명하복에 가장 철저하게 길들여진 군대라는 겁니다. 모델은 철저하게 그 원칙을 지킨 장군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델 원수도 1945년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 이후에도 동행한 참모들과 함께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괴벨스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붓는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그런 모델의 말에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모델 원수는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본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 이후 모델 원수는 '독일의 원수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라는 말을 남긴 뒤 자결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모델은 진정한 군인이었지만 적어도 나치는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모델 장군이 전간기 시절 참모로 일하며 배웠던 장군이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ßberg라고 1차 대전 방어전의 대가라 불린 명장이랍니다.. 모델 장군과 연이 있는 사람 중에 미군 장군들도 있었는데, 휘르트겐 숲 전투 때 겨뤘던 오마 브래들리와 훗날 한국전쟁 때 활약한 매슈 리지웨이입니다. 아르덴 공세 실패 이후 루르 포위전 때 리지웨이 장군이 직접 모델을 찾아가 항복을 권유했지만, 모델은 그 특유의 고지식한 프로이센 군인 정신을 내세워 거부하죠. 그리고 휘하 장병과 국민돌격대원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급했는데, 당시 히틀러의 국민총동원령으로 탈영 낙오한 자는 장성급이라도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제대증을 만들어서 자기 병사들의 안위를 도모한 겁니다. 비록 9군 지휘관 시절 각종 전쟁범죄 혐의가 상당했지만 자기 나라 병사 국민들 한해서는 충직했던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국방군 장교들 중에 나치와 안 엮이거나 히틀러에 안 충성한 인간이 오히려 더 드물었어요.. 그 롬멜조차 히틀러의 정치적 권위 위상을 이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니까요. 모델은 도리어 만슈타인과 더불어 히틀러와 말싸움에서 이긴 몇 안 되는 장성급 지휘관이었어요... ㅎㄷㄷ
발터 장군도 동서양 역사에서 종종 나오듯 유능하고 충직한 장수가 잘못된 왕을 섬기다 망한 사례인가 보네요. 종전후 전쟁범죄도 밝혀지며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나왔는데 만약 연합국 장군이었다면 역사적 평가나 위상이 달라졌을수도. (러시아의 정찰을 져대로 속이며 엄청난 대군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공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느낌이라서...)
5:28초 제9군 전체를 싸잡아서 이야기하시는데 9군 소속예하부대중 무장친위대와 부대들이 돌발적으로 벌인일이고 이에대하여 모델이 직접적으로 "지시"를 하라는 사항을 뒷받침할만 근거는 부족해서 전사학자들사이에서도 의견이 매우 갈리고 있고 무조건 영국군 전사학계에서 발표한 일방적인 사료만 힘을 실어서 몰아가는게 좀 편파적이네요 ㅋㅋㅋ.. 그리고 전범국이고 전쟁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당연한거지만 전형적인 서구자유주의진영의 승리를 위한 과대한 악의제국식으로 포장하여 소련의 독일민간인 전쟁중 강간 살인 방화 약탈 납치 소아강간과 제국주의 영국의 뱅골대기근과 아프간학살 프랑스의 잔혹식민통치와 마약으로 이득보려는 더러운 영국식민주의 전쟁, 벨기에 콩고 대학살, 스탈린식 독재주의를 나중에는 서방이념전쟁으로 써먹기위해 자신들 잘못은 싸그리 처 말아먹은거 마냥 나는 티끌의 죄도 없다 이러는 뽕빨 프로파간다 같네요 ㅋㅋ
@@문재경-f4d /무장 친위대는 통수 계통이 달라서 국방군의 직접적인 명령 체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특히 아인자츠 그루펜 같은 학살 부대의 경우 국방군 내에서 설쳐댔을때 모델 원수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방군 장성들은 그 활동을 묵인했었고 몇몇 나찌 당원 장성들은 오히려 국방군을 동원해서 협조 했습니다. 1944년 이후 무장 친위대가 사실상 징병제로 전환되고 국방군 명령 체계 하에 들어가서는 통제가 되었지만 독소전 초기때는 이러한 가혹행위를 제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딱 하나 고위 장성중 적극적으로 아인자츠 그루펜과 SS의 정치적 학살극을 막았던 사람이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였는데 그는 대전 기간 내내 자신의 작전 구역에서는 SS의 활동을 엄금하고 심지어 자기 부하를 보내서 몰아내기까지 했던 거의 유일한 장성이였는데 솔직히 클라이스트 였기 때문에 가능했었지 왠만한 장성이였으면 대번에 짤렸을 위험한 행동이였죠. 심지어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조차 SS의 이러한 만행을 제지하지 못했고 이는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때 모두 기소 사유가 되었었죠. 딱히 모델 원수가 적극적으로 SS에 협조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버팔로 작전 때 구 쏘련군 출신 군속 Hiwiss 30만명과 친 독일계 쏘련 주민까지 전부 데리고 철수 작전을 했다는 점으로 봐도 모델 원수 성격상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가혹 행위 자체가 전혀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장 친위대는 "돌발적으로" 학살을 저지른게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성이 더 크다고 본 것이죠.
글세요,, 친나치라는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독일국방군소속으로 ss근처도 가지 않았고 롬멜처럼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한 장군도 아니고 , 당시 동부전선 전체를 봐도 9군이 특별히 더 잔인했다는 얘기도 들어본적 없습니다만. 소련쪽 주장을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하시는듯 한데 당시 소련군은 독일장성들이라면 무조건 전범으로 몰고 있던 상황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을수도 있으니 저도 공부를 더해보겠습니다.
작전 섹타 내에서 SS와 아인자츠 그루펜의 학살 활동을 말하는것 같은데 그건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문제였고 오직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 정도 만이 자신의 작전 섹타 내에서 SS 의 학살극,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심지어는 부대까지 보내서 몰아내기까지 했었고 그 외의 나머지 독일 장성들은 방관, 혹은 적극 협조 하는 형편이라 딱히 모델 원수만 그랬던건 아닌듯 합니다.
그리고 발터 모델이 히틀러의 입맛을 맞춘 방법이 무조건 사수만 주장하는 히틀러에게 일단 후퇴는 하지만 적어도 적이 약해지먼 일격을 가해서 적을 밀어낼 수도 있다는 공세적 방어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일지도............. 그러니 후퇴에는 지랄하는 히틀러에게는 오히려 적어도 적이 약해지면 공격을 해서 밀어낼 수도 있다 하는 발터 모델의 방법이 더 구미가 당겼을지도..........
놀랍게도 독일이 2차대전때 무척 즐겨 쓰던 무기, 3호돌격포도 발터모델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어느곳에서도 말한 컨텐츠가 없더군요. 모델이 돌격포 개념을 창안했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습니다.(ruclips.net/video/3wj7KMb6bgg/видео.html)
민간인과 병원의 환자들이 가장 먼저 오렐 방면으로 이송되면서 3월 1일, 철수 작전이 개시됐다.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 매설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금 도로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썰매에 신속하게 옮겨 실으면서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진행됐다.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 발터 모델 원수, 1944년 서부전선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다.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도 조종사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히틀러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모델은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하였다. "총통 각하, 9군 사령관이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저입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결정한다 일련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사령관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에 대해 불평했다. "1941년에 보여줬던 투쟁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 거요? 그렇게 용맹했던 사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령관들의 면전에서 장병들을 모욕하는 총통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941년의 그 사내들이 전사했으니까요. 그들의 무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히틀러의 분노를 직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을 옹호하고 애도한 단 한 명의 사령관이 모델이었다. 히틀러는 원수와 상급대장, 대장급의 고위 장성들에게 현금, 수표, 귀중품, 부동산 등의 거액 뇌물을 지급해왔고, 나치와 거리가 먼 군인이었다고 평판을 얻은 장성들조차 히틀러에게 수십만 마르크에 달하는 '충성의 대가'를 수령하였다. 모델은 총통의 뇌물을 거절했고, 여기에는 두 가지 증언이 있다. 북부집단군 장군참모였던 요아힘 폰 브룬 대령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모델이 생일 선물로 받은 히틀러의 수표를 반송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반송된 수표가 나치 당수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재차 모델에게 도착하자, 이에 모델은 답신을 보냈다. "명령대로 수표를 수령했고 같은 날, 같은 금액을 적십자사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가 B집단군 사령부에 체류할 때 한스 크렙스 참모장이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 수 있도록' 들려준 말에 따르면, 육군 인사청장이자 히틀러의 수석 보좌관인 루돌프 슈문트 장군이 먼저 모델에게 총통의 증여 의사가 있음을 알려준 뒤, 모델의 의사를 타진해보았다. 탁월한 중재자였던 슈문트는 뇌물이 거절당할 경우, 총통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임을 우려했다. 모델과의 친분 덕분에 슈문트는 그의 성격과 물질적 혜택을 필요치 않는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모델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에만 포상금이 지급되는 게 프로이센의 오랜 전통인데, 우리가 전쟁을 이미 승리로 끝냈던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신하는 모델의 말을 듣고, 슈문트는 더 이상 해당 논의가 진행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항상 모노클을 착용하고 각 잡힌 군복 차림과 경례 자세 등 외양에서부터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온 모델은 비정치적인 성향, 용전을 펼친 적에 대한 기사도 정신 등 사상적으로도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포위망에 갇힌 채 항공 탈출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부하들의 곁에 남았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한 제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Mikhail Grigoryevich Yefremov) 중장에 대하여 독일군 장교들은 포로가 된 소련군 장교들과 함께 2열로 마주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였고 종전 후 소련 국립 묘지에 이장할 때 예프레모프의 유해에는 금장 손목시계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2009년에 방영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를 '상대편의 야전 병원에도 포격이 가해지던 시기에 무척이나 이례적인 경우'라고 표현하였다. 지독한 나치주의자 x 히틀러 신봉자 x 르제프에서 제9군에게 민간인학살 명령내림 x 도대체 무슨 기록을 가져왔노???
나무위키 보고 긁어오신거 같은데 44년의 벨라루스에서 초토화작전에는 명백한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기록은 없지만, 동부전선에서 학살전담부대였던 ss의 아인자츠그루펜에 협력은 하였습니다. 저 인간말종부대의 이동, 식량, 탄약 등 각종 '편의'를 봐 주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살인자가 사람 죽일거 빤히 아는 사람이 각종 연장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그 사람이 과연 책임이 없을까요? 진짜 전쟁범죄와 관련없는 독일 장성을 보고 싶으면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또, 하인츠 구데리안도 깔끔하게 행동해서 무죄로 방면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모델은 전쟁범죄에 대해 '그릇된 일이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정도로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을 시찰하고, 그토록 뛰어난 관찰력과 두뇌를 가진 사람이 자기 관할의 구역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델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직속 참모들을 제외한) 그의 인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극찬을 한 것을 보면 그 범죄가 옳았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결국, 모델은 군인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군인으로써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군인은 전쟁에서 승리를 최우선시해야하기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단, 나치에 심취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개소리가 맞습니다. 군사들의 안위나 작전에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비행기 타고 늑대굴로 날아가서 히틀러에게 대들던 사람이 나치라는건 말이 안 됩니다. 그냥 히틀러를 독일을 다시 강하게 만들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게 맞는 거 같습니다.
신임을 얻게끔 잘 처신을 했고(만슈타인만 해도 앞에서는 별말없다가 뒤에서 뒷다마 까는 스타일이라 히틀러가 매우 싫어 했으며 상당수 독일 장성들이 히틀러의 무능한 군사적 역량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직 간접적으로 보였지만 모델은 절대로 그런 언행을 내비친적이 없었죠.) 방어할 만큼 방어하다가 정 안되면 일부 영토를 내어주고 적을 반격하겠다는 선제 조건으로 제시하고 설득했던것이 히틀러 총통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봐야죠. 실제 르제프 돌출부 방어전은 누구라도 모델의 공적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잘 싸웠기 때문에 히틀러도 다른 사람은 파면으로 답했어도 모델만큼은 한번 믿어보았던것 같고 그 기대에 부응하죠.
퇴각을 저렇게 온존시켜 성공시키다니 정말 대단한 장군이었네요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게 후퇴하는거라고 알고있습니다. 정말대단한 장군이네요.
후퇴를 저렇게 완벽에 가깝게 했다는거 자체가 진짜 대단한거같아요 ㄷㄷ
전세계연합군을 상대로 환상의 방어똥꼬쇼를 보여줬던 모델원수...43년기준으로 병력차가10배는 되는데 2년이나 버텼다는건 정말 대단한거다
아재들의 로망 프라모델
여자들의 로망 슈퍼모델
밀덕들의 로망 발터모델
(합격목걸이)
버팔로 기동을 저는 처음 듣는데 대단하네요. 그래서 전쟁이 더 길어졌겠지만.
다음편 또 기다리겠습니다.
모델이 또 명령을 잘들은건 모델은 자고로 군인이라면 상명하복이 원칙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발터 모델에 대해 이렇게 디테일하고 깔끔하게 설명해 주는 분은 남보람 소령님이 처음입니다👍 이런분이 대한민국 군대의 장교출신 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국민으로서 안전하게 느낌니다🙏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20세기 마지막 기사,소련이 가장 증오하고 두려워 했던 독일 장군,공격과 수비를 모두 완전한 명장 클라이스트 편도 해주세요
그리고 전후 유일하게 쏘련 땅에서 사망한 독일 원수이기도 했었죠.
남보람님 방송 알게되고 국방TV 다시 가입했습니다. 차분히 하나씩 볼게요 좋은 방송 고맙습니다.
만슈타인.구데리안.발터 모델.헤르만 호트.롬멜 그 누구도 부정 할수 없는 독일군 최고의 명장들
몽케장군도 있음 베를린방어전에서 활약한
클라이스트도 있음 인격까지 좋은...
침공이 성공하게 된건 만슈타인, 구데리안 때문이고 폐색이 짙어진 전쟁이 길어진건 모델때문이죠... 독일군 입장에서는 세사람의 공이 크긴합니다..
상급대장 클루게 해군 유보트 제독 칼되니츠
1만슈타인 2구데리안 3롬멜 4칼되니츠 5발터모델 6클루게
칼되니츠 유보트 울프백 전술의 창시자
그런데
독일의
최상급명장들이
왜
소비에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가
어려운가????
제발 오래 오래 깊게 깊게 방송해주세요!
군을 알고 전쟁의 역사를 공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존남! 응원합니다.
크.. 드디어 최강모델장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는군요 ㅠㅠ 롬멜이나 구데리안 만슈티인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모델은 언급이 많이 없더라구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습니다! GOOD!!!
고맙습니다!!! THANKs!!!
저도 짧은지식으로 모델장군에 열광했었었는데 이렇게 집어주시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유익한 영상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일단은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명령을 따라야 하기는 하지만 잔혹한 면이 있었죠..
그래도 모델이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임..
독일군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그의 말을 따랐다고....
"지원군이 어디 있냐고?"
"나"
밀덕으로써 모델장군
다뤄주셔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디테일하게
3부작으로 방송해주시길
팬으로써 간청드립니다
르제프 쿠르스크 특히 기동방어등 역할등 ...
열심히 반복해서 보는 왕팬입니다
개인적으로 발터모델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제 채널에서 더 자세히 다뤘습니다.
소련의 화성 작전을 막은 우주방어
@@sanitarycordon5298 그 대표적 전투가 라지민 전투였습니다. 제 채널에서도 다룬바 있습니다.
와 너무 재밌게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사랑 사랑 사랑
넘나 재밌네요 후퇴할때 이런 전술이었군요 전술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저한 계획에 의거한 지휘관이라 정의 되군요. 이거 절대로 쉬운 게 아닌데..
모델이 왜 많이 유명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어서 좋네요 그냥 천재라는 생각 밖에 안드네요 어떻게 보면 1943년에 많은 독일인들을 살렸지만 전쟁을 연장시켰으니 오히려 많은 이들을 고생하고 죽게 한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착잡하네요
전쟁범죄를 알고도 방조한 점이 전쟁범죄를 반대하고 금지한 클라이스트나 파울루스와 비교되니 좋게 평가받을 수는 없죠
발터모델 일화로는 차량을타고 길가던중 P-38라이트닝에 공격을받자 하인리히 슈프링어 소령과 운전병을 비롯해 전부다 차를버리고 도량으로 대피했지만
발터모델장군은 잠자느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운전병이 소리지르며 뛰어나가 차를몰고 도량으로 끌고나왔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기총 받으면 바로 잠에서깨는데 그럴리가,, ㅋㅋ
주코프 / 몽고메리 같은 상승장군들에게도 참패를 남리고 연합군의 사령관들을에게 무패장군
성질 좆같은 패튼 장군도 모델에게 88mm로 뚜드러 맞았어요..
몽고메리는 명장반열 아님
시기상 운좋게 엘알라메인에서
이긴거지 전임자가 수행했어도
엘 알라메인 이길수밖에 없음
15:42 에서 아메리카를 아프리카로 실수하여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시는센스ㅎㅎ좋은 교육자료 항상 잘보고 있습니다
2차대전때 독일은 Walter Model 말고도 Paul Ludwig Edwald von Kleist ( 파울 루드비히 에드발트 폰 클라이스트), Friedrich Paulus (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Erich von Manstein (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win Rommel ( 에르빈 롬멜), Gerd von Rundstedt (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Günther von Kluge ( 귄터 폰 클루게), Wilhelm Keitel ( 빌헬름 카이텔), Fedor von Bock ( 페도르 폰 복) Heinz Guderian ( 하인츠 구데리안) 등의 좋은 육군 원수들이 있었지요.
이제 와서 얘기하는건 우습지만, 구데리안은 상급대장으로 끝났고, 카이텔은 무능으로 유명했고, 롬멜은 동료들에게 사단장 수준의 재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르제프 전역은
아직도 그 기록이 공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크게 박살이 났으면 공개를 못할까요?
러시아 지들도 부끄러움은 아는 것 같습니다
그 기록은 독일등 서방에서도 정확한 기록이 없어요
그래서 엄청난 전투였음에도 기록이 아직까지도 정확치 않는 애매모호한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산일-d2h 그 이유가
발터 모델 원수는
행보관 원수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전선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이 힘든 부분을 일일히 듣고 있으면서
그들을 최대한 도와주려고 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전공이니 뭐니 하는 부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서툴렀다고나 할까요?
독일군. 우수한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돋보인 군대
3:03 2차대전독일 같은 나라를 볼때 많이 했갈려 하는건데 독일에는 준장이 없었습니다..
소장 중장 대장 상급대장 원수 순이죠. 소장은 독일에서 투스타가 아니라 원스타입니다..
강점/약점이나 그를 좋아했던, 싫어했던 사람을 생각해 보면
예전 다뤘던 몽고메리가 떠오르게 하는 인물형이네요
하루에 3-4시간 자면서 전방에 전투에 집중한 사람이 후방일에 관여를 했을까요? 후방에 신경쓸 새가 있었을까요?
이제 그가 나오는 구나...
두체...
담 영상 오프닝송은 푸니쿨라로 합시다!
방어의 사자, 총통의 소방수, 동부전선의 수호자
존테일 만세 만세 만만세!! 발터 모델을 잘 다뤄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로 깔고 철수한건 진짜 레전드네
믿고 보는 남보람님!!
처음부터 정주행!!
다음주에 무솔리니 기대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편 언제 나올까 🤔?!
훌륭한 명강의였네여!
2차대전 최고의 명장으로 롬멜을 꼽지만 모델도 만만치않다
정말 깔끔하게 설명 잘하시네요
전달력이 대단하신게 평소에 조사를 얼마나 많이하시고 정리하신건지 드러나는거 같습니다
"저승으로 기동방어"
근데 만슈타인같은 이들은 히틀러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달랐던 데 반해, 발터 모델은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같아서 히틀러가 모델을 더 신뢰했다는 말도 있다죠.
확실히 도박없이 변수없이 철저히 준비하고 적을 친다.
이걸 미국같은 초강대국의 국가지도자가
이런 마인드로 전쟁을 준비한다면 그 전쟁은 도저히 질 수가 없지만
일선에서 지휘하는 야전지휘관이 이런 성향이라면 과감한 돌격이 필요한 시점에선 단점으로도 작용하겠군요.
모델의 특징이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맞으나 필요시 즉각적인 공세나 타 작전으로의 전환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 그런 상황이 왔다면 주저없이 치지 않았을까 사료됩니다.
전형적인 리더 스타일이었네
요즘 너무 재밌음...👍🏻
잘보았습니다 ❤
저사람 1차대전때 총참모부 소속 이었습니다. 군수관련.. 누구냐.. 루덴도르프? 총애하던사람으로 1차대전 최후 독일공세때ㅡ 루덴도르프공세? 야전파견가서 실패한이유 직접본 사람
2:54 일반참모가 아니라 장군참모입니다
롬멜과 동급이라기 보다 롬멜보다 두 수쯤 위죠
롬멜은 전술가
모델은 전략가
? 중부집단군은 클루게 아니었나
르제프 방어전도..
다음주: 두체, 주유소에서 거꾸로 메달려 숨진채 발견
양으로 백일을 사느니 사자로 하루를
살겠다는 그사람 철저한 파시스트
@@신종욱-z4e 현실은 양으로 하루를 살아버림
농구에는 신명호님이라고 수비에 극단적으로 특화된분이 계시죠.
발터 모델이 다른 국방군 장성들처럼 군사적으로 패배가 확실하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마지막까지 국민돌격대를 희생시키려는 점, 르제프,벨라루스 민간인 희생을 외면한 점 등 전쟁범죄에 연관된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도로도 도로인데 철도 깔 생각을 하다니....
5:08 11:40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엄청난 사람이었군요
르제프가 스탈린그라드에 잊혀져서 그렇지 고기분쇄기라고 불릴정도의 막대한 사상자가 난 전투에요
스탈린그라드에 잊혀진게 아니라 르제프 전투는 소련의 치부 중에 하나인데 독일측보다 훨씬 자세하게 적혀있던 소련측 기밀문서가 소련해체되고 공개되면서 주목을 덜 받게 된거임.
저 사람 이름 처음 들었을때 무슨 총기이름인줄 알았는데
이름은 발터요, 성은 모델..ㅎㅎㅎㅎㅎ
대단한 사람이었던만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사실상 20세기 - 2차대전 장군들의 최고존엄 내지 진주인공
쨋든 자살했고, 전쟁은 연합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쉬쉬하고 묻혀진 감이 있음
왜 인기가 없어?
이렇게 재밌는데 흠...
보인다.. 호이가 보인다.....
독일인이 보기엔 25만의 병사를 온전히 살려 후퇴 시켰으니 영웅시 했을수도...
20만의 부하를 쌈싸먹고도 책임을 부하들에게돌린 렌야와는 완전 정반대의 인물이네;; ㅋㅋ
공세적 방어의 대가
천재 군인이 나치에 심취했다고 하기 보다는
나치 정권이라고 해도
독일인에 의해 선거로 뽑힌 지도자와 정권이기도 하고
군인
특히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상명하복에 가장 철저하게 길들여진 군대라는 겁니다.
모델은 철저하게 그 원칙을 지킨 장군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델 원수도
1945년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 이후에도 동행한 참모들과 함께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는데,
괴벨스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붓는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그런 모델의 말에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모델 원수는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본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 이후
모델 원수는
'독일의 원수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라는 말을 남긴 뒤
자결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모델은 진정한 군인이었지만
적어도 나치는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차대전 발발 당시인 1939년에 모델장군 계급이 소장이라고 하시면서 투스타라고 하셨는데 독일군 장군 계급은 소장 중장 대장 상급대장 원수로 되어 있어서 소장은 원 스타에 해당하는 준장입니다
발터 장군은 1938년에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독일군 관련해서 찾아볼 때마다 헷갈리는 부분이죠 ㅋㅋㅋㅋ
맞습니다. 서방측 계급 체계에서 유일하게 준장이 없이 소장부터 출발하죠. 대신 상급 대장이 있어 상급 대장이 바로 서방측 대장에 해당되죠.
독일 제갈량
모델 장군이 전간기 시절 참모로 일하며 배웠던 장군이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ßberg라고 1차 대전 방어전의 대가라 불린 명장이랍니다..
모델 장군과 연이 있는 사람 중에 미군 장군들도 있었는데, 휘르트겐 숲 전투 때 겨뤘던 오마 브래들리와 훗날 한국전쟁 때 활약한 매슈 리지웨이입니다. 아르덴 공세 실패 이후 루르 포위전 때 리지웨이 장군이 직접 모델을 찾아가 항복을 권유했지만, 모델은 그 특유의 고지식한 프로이센 군인 정신을 내세워 거부하죠. 그리고 휘하 장병과 국민돌격대원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급했는데, 당시 히틀러의 국민총동원령으로 탈영 낙오한 자는 장성급이라도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제대증을 만들어서 자기 병사들의 안위를 도모한 겁니다. 비록 9군 지휘관 시절 각종 전쟁범죄 혐의가 상당했지만 자기 나라 병사 국민들 한해서는 충직했던 인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국방군 장교들 중에 나치와 안 엮이거나 히틀러에 안 충성한 인간이 오히려 더 드물었어요.. 그 롬멜조차 히틀러의 정치적 권위 위상을 이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니까요. 모델은 도리어 만슈타인과 더불어 히틀러와 말싸움에서 이긴 몇 안 되는 장성급 지휘관이었어요... ㅎㄷㄷ
발터 장군도 동서양 역사에서 종종 나오듯 유능하고 충직한 장수가 잘못된 왕을 섬기다 망한 사례인가 보네요. 종전후 전쟁범죄도 밝혀지며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나왔는데 만약 연합국 장군이었다면 역사적 평가나 위상이 달라졌을수도.
(러시아의 정찰을 져대로 속이며 엄청난 대군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공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느낌이라서...)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히틀러와 유일하게 말싸움을 한 장군이고 유일하게 말싸움에서 이긴 장군이죠 ㅋㅋㅋ 그때 주변에있던 병사들 장교들은 믿기지가않던 상횡이었다합니다 ㅋㅋㅋㅋ
발터…….모델……….벽뒤의 강철의 벽이라는….별명이….
최고로 좋아하는 장군님 !
버팔로 기동, 철수4주, 300km철로, 도로200km, 간이도로600km, 29개사단, 220km방어선
서부전선 특히 아프리카 전선은 전범행위가 별로 안나왔는데 독소전과 태평양 전선에서는 전범행위가 많았던듯 아프리카 전선에선 영국군이 물이 떨어지자 롬멜 장군이 물을 가져다 주고 영국군은 위스키로 답례했다는 1차대전 크리스마스에 같이 축구했던 것 같은 훈훈한 일화가 ㅎㅎ
민간인이 별루 없었고 인종적으로 열등하게 여겼던 슬라브 인이 아닌 같은 게르만 인종들 간의 전쟁이였고 무엇보다 부차적인 전선이라 SS등 정치 부대들이 들어가질 않았으니 학살극도 없었죠.
@@hawk8873님의 분석에 공감합니다
제갈량이네요 공성은 언제나 실패하고 수성은 일도 아니었던 .........
신은 공평해요
형 근데 머리 왜그래요..미용실 소개해줄까요?
독일의 최공셩장
만슈타인 발터 모델 구데리안
자켓 저도 입고 싶습니다. 멋지세요!!
호주군 군복이 좀 독특하죠.
토전사 빼앗기고 유일하게 보는 국방TV 패널
역전다방도 잼나요!!
역전다방 안보셨나?
ㄹㅇ 유일하게 보는 국방티비 프로.
역전다방은 역사에서 배움보다는 초반에 감정적 반일 선동이 너무 노골적이었어서 그 다음부터 안 봄.
@@eliyahaverial ㅇㅇ 나머진 괜찮은데 원장 말하는거 보고 바로 손절함
5:28초 제9군 전체를 싸잡아서 이야기하시는데 9군 소속예하부대중 무장친위대와 부대들이 돌발적으로 벌인일이고 이에대하여 모델이 직접적으로 "지시"를 하라는 사항을 뒷받침할만 근거는 부족해서 전사학자들사이에서도 의견이 매우 갈리고 있고 무조건 영국군 전사학계에서 발표한 일방적인 사료만 힘을 실어서 몰아가는게 좀 편파적이네요 ㅋㅋㅋ..
그리고 전범국이고 전쟁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당연한거지만 전형적인 서구자유주의진영의 승리를 위한 과대한 악의제국식으로 포장하여 소련의 독일민간인 전쟁중 강간 살인 방화 약탈 납치 소아강간과 제국주의 영국의 뱅골대기근과 아프간학살 프랑스의 잔혹식민통치와 마약으로 이득보려는 더러운 영국식민주의 전쟁, 벨기에 콩고 대학살, 스탈린식 독재주의를 나중에는 서방이념전쟁으로 써먹기위해 자신들 잘못은 싸그리 처 말아먹은거 마냥 나는 티끌의 죄도 없다 이러는 뽕빨 프로파간다 같네요 ㅋㅋ
본인 말 다 맞다 쳐도 휘하 무장친위대가 "돌발적으로" 학살을 저지르는데 아무 일도 없었으면 묵인 혹은 무능인데 이걸 실드라고ㅋㅋㅋ
@@문재경-f4d /무장 친위대는 통수 계통이 달라서 국방군의 직접적인 명령 체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특히 아인자츠 그루펜 같은 학살 부대의 경우 국방군 내에서 설쳐댔을때 모델 원수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방군 장성들은 그 활동을 묵인했었고 몇몇 나찌 당원 장성들은 오히려 국방군을 동원해서 협조 했습니다. 1944년 이후 무장 친위대가 사실상 징병제로 전환되고 국방군 명령 체계 하에 들어가서는 통제가 되었지만 독소전 초기때는 이러한 가혹행위를 제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딱 하나 고위 장성중 적극적으로 아인자츠 그루펜과 SS의 정치적 학살극을 막았던 사람이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였는데 그는 대전 기간 내내 자신의 작전 구역에서는 SS의 활동을 엄금하고 심지어 자기 부하를 보내서 몰아내기까지 했던 거의 유일한 장성이였는데 솔직히 클라이스트 였기 때문에 가능했었지 왠만한 장성이였으면 대번에 짤렸을 위험한 행동이였죠. 심지어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조차 SS의 이러한 만행을 제지하지 못했고 이는 나중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때 모두 기소 사유가 되었었죠. 딱히 모델 원수가 적극적으로 SS에 협조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버팔로 작전 때 구 쏘련군 출신 군속 Hiwiss 30만명과 친 독일계 쏘련 주민까지 전부 데리고 철수 작전을 했다는 점으로 봐도 모델 원수 성격상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가혹 행위 자체가 전혀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장 친위대는 "돌발적으로" 학살을 저지른게 아니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성이 더 크다고 본 것이죠.
1주일동안 기다렸음 ㅋㅋ..
글세요,, 친나치라는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독일국방군소속으로 ss근처도 가지 않았고 롬멜처럼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한 장군도 아니고 , 당시 동부전선 전체를 봐도 9군이 특별히 더 잔인했다는 얘기도 들어본적 없습니다만.
소련쪽 주장을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하시는듯 한데 당시 소련군은 독일장성들이라면 무조건 전범으로 몰고 있던 상황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을수도 있으니 저도 공부를 더해보겠습니다.
작전 섹타 내에서 SS와 아인자츠 그루펜의 학살 활동을 말하는것 같은데 그건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문제였고 오직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 정도 만이 자신의 작전 섹타 내에서 SS 의 학살극,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막았고 심지어는 부대까지 보내서 몰아내기까지 했었고 그 외의 나머지 독일 장성들은 방관, 혹은 적극 협조 하는 형편이라 딱히 모델 원수만 그랬던건 아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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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터 모델이 히틀러의 입맛을 맞춘 방법이
무조건 사수만 주장하는 히틀러에게
일단 후퇴는 하지만
적어도 적이 약해지먼 일격을 가해서
적을 밀어낼 수도 있다는 공세적 방어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일지도.............
그러니
후퇴에는 지랄하는 히틀러에게는
오히려 적어도 적이 약해지면 공격을 해서 밀어낼 수도 있다 하는 발터 모델의 방법이 더 구미가 당겼을지도..........
저승으로 기동방어
다음 편에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만날 수 있겠군요. 20세기 4대 명장으로 미국의 조지 마셜, 독일의 발터 모델, 중국의 주덕, 베트남의 무원갑을 꼽을 수 있을까요?
축구로애기하자면 수비형 미드필드...
회계는 최고인데 경영은 잼병이군....발터 모델
신명호는 놔두라고의 군인버젼
놀랍게도 독일이 2차대전때 무척 즐겨 쓰던 무기, 3호돌격포도 발터모델의 아이디어였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어느곳에서도 말한 컨텐츠가 없더군요. 모델이 돌격포 개념을 창안했다는 사실은 무척 놀랍습니다.(ruclips.net/video/3wj7KMb6bgg/видео.html)
철조망이랑 지뢰는 알겠는데 목책 이라는건 효과 있는건가... 미국집 앞에 울타리 같은 느낌이...
장애물이 있으면 장애물 제거 및 주변 조사를 위해 부대가 일시 정지 할 수 밖에 없는데 시간을 벌거나, 아군 포대의 포격이 가능한 상태에서 적의 정지를 발견했다면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음.
몽고메리가 독일에 있었으면 비슷한 유형이었나...
아니요. 전혀 스타일이 다릅니다. 주요한 방어전에 성공했다는 하나 빼곤 공통점이 없습니다.
몽고메리는 시기가 좋아 승전이
있었죠 마켓가든 말아먹는거로
봐서 그닥
5:39초 "윈스턴 처질은 대영제국을 승리하게 만든 위대한 수상이야!"
인도 학살,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신봉자
지나친 영국미화와 같은예시네요
정말 좋아하는 장군 철벽의 발터
원수 직속 명령으로 항복문서 발급해준거 관련 설명해주실줄 알았는데 뭔가 긁다가 만거같음
믿고 보는 남박사님
버팔로인데 왠 아프리카...
물소, 들소 다 버팔로임
실전없는 이론가가 몇번에 실전 검증을 거쳐서 확신을 하면 무섭고 무식한 독재자로 변한다. 히틀러도 발터도 비슷했내요. 아는 만큼 이긴듯 싶내요 ㅎㅎ 잘봤습니다. 존남 남보람 소령님~!!
아~! 몰랐던 사실이네요 민간인과 포로 학살이면 말씀하신 것처럼 중형을 못 피해 갔을거네요 오늘도 한가지 배우고 갑니다
그와 그의 직속 국방군에서 한것이 아니라 작전 섹터 내의 SS 와 아인자츠 그루펜 소행인지라 논란은 있습니다. 딱히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으니 소극적 협조를 했다는 혐의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민간인과 병원의 환자들이 가장 먼저 오렐 방면으로 이송되면서 3월 1일, 철수 작전이 개시됐다.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 매설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금 도로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썰매에 신속하게 옮겨 실으면서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진행됐다.
"군대는 반드시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며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무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다."
발터 모델 원수, 1944년 서부전선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참모들은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가족들과도 전쟁, 정치에 관한 대화를 절대로 하지 않았고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것이다.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도 조종사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히틀러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모델은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하였다.
"총통 각하, 9군 사령관이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저입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결정한다
일련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사령관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에 대해 불평했다. "1941년에 보여줬던 투쟁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 거요? 그렇게 용맹했던 사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령관들의 면전에서 장병들을 모욕하는 총통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941년의 그 사내들이 전사했으니까요. 그들의 무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히틀러의 분노를 직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을 옹호하고 애도한 단 한 명의 사령관이 모델이었다.
히틀러는 원수와 상급대장, 대장급의 고위 장성들에게 현금, 수표, 귀중품, 부동산 등의 거액 뇌물을 지급해왔고, 나치와 거리가 먼 군인이었다고 평판을 얻은 장성들조차 히틀러에게 수십만 마르크에 달하는 '충성의 대가'를 수령하였다.
모델은 총통의 뇌물을 거절했고, 여기에는 두 가지 증언이 있다. 북부집단군 장군참모였던 요아힘 폰 브룬 대령은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모델이 생일 선물로 받은 히틀러의 수표를 반송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진술했다. 반송된 수표가 나치 당수의 엄중한 경고와 함께 재차 모델에게 도착하자, 이에 모델은 답신을 보냈다.
"명령대로 수표를 수령했고 같은 날, 같은 금액을 적십자사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5년 1월 말,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가 B집단군 사령부에 체류할 때 한스 크렙스 참모장이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 수 있도록' 들려준 말에 따르면, 육군 인사청장이자 히틀러의 수석 보좌관인 루돌프 슈문트 장군이 먼저 모델에게 총통의 증여 의사가 있음을 알려준 뒤, 모델의 의사를 타진해보았다.
탁월한 중재자였던 슈문트는 뇌물이 거절당할 경우, 총통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할 것임을 우려했다. 모델과의 친분 덕분에 슈문트는 그의 성격과 물질적 혜택을 필요치 않는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모델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에만 포상금이 지급되는 게 프로이센의 오랜 전통인데, 우리가 전쟁을 이미 승리로 끝냈던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신하는 모델의 말을 듣고, 슈문트는 더 이상 해당 논의가 진행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항상 모노클을 착용하고 각 잡힌 군복 차림과 경례 자세 등 외양에서부터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충실히 지켜온 모델은 비정치적인 성향, 용전을 펼친 적에 대한 기사도 정신 등 사상적으로도 프로이센 장교의 전통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포위망에 갇힌 채 항공 탈출을 거부하고 최후까지 부하들의 곁에 남았다가 중상을 입고 자결한 제33군 사령관 미하일 예프레모프(Mikhail Grigoryevich Yefremov) 중장에 대하여 독일군 장교들은 포로가 된 소련군 장교들과 함께 2열로 마주 서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였고 종전 후 소련 국립 묘지에 이장할 때 예프레모프의 유해에는 금장 손목시계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2009년에 방영된 러시아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를 '상대편의 야전 병원에도 포격이 가해지던 시기에 무척이나 이례적인 경우'라고 표현하였다.
지독한 나치주의자 x
히틀러 신봉자 x
르제프에서 제9군에게 민간인학살 명령내림 x
도대체 무슨 기록을 가져왔노???
감사합니다. 정확하게 평가해주셔요.
나무위키 보고 긁어오신거 같은데 44년의 벨라루스에서 초토화작전에는 명백한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기록은 없지만, 동부전선에서 학살전담부대였던 ss의 아인자츠그루펜에 협력은 하였습니다. 저 인간말종부대의 이동, 식량, 탄약 등 각종 '편의'를 봐 주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살인자가 사람 죽일거 빤히 아는 사람이 각종 연장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그 사람이 과연 책임이 없을까요?
진짜 전쟁범죄와 관련없는 독일 장성을 보고 싶으면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세요. 또, 하인츠 구데리안도 깔끔하게 행동해서 무죄로 방면되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모델은 전쟁범죄에 대해 '그릇된 일이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정도로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을 시찰하고, 그토록 뛰어난 관찰력과 두뇌를 가진 사람이 자기 관할의 구역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델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직속 참모들을 제외한) 그의 인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극찬을 한 것을 보면 그 범죄가 옳았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결국, 모델은 군인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군인으로써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군인은 전쟁에서 승리를 최우선시해야하기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단, 나치에 심취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개소리가 맞습니다. 군사들의 안위나 작전에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비행기 타고 늑대굴로 날아가서 히틀러에게 대들던 사람이 나치라는건 말이 안 됩니다. 그냥 히틀러를 독일을 다시 강하게 만들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게 맞는 거 같습니다.
철도짯으면 독일 군부에선 엘리트중 엘리트 . 프로이센 사관학교 1순위는 포병이아니고 기차시간표짜는 철도청갔다던. 보불전쟁이나. 1차대전 초기 동부전선 힌덴부르크가 했던 기동방어가 기차효율적으로 돌려서 그렇다덩
6:11 ???: 신명호는 놔두라고
약간 제갈량같은 과네…
알아? 누가 최고인지 어떻게 알아
히틀러가 맨날 철수하지 말라고 죽을 때까지 지키라고 거품 물었는데 모델 장군은 너무 신임해서 철수 작전 승인해준 건가요?? 알려주세요ㅠㅠ
신임한것도있지만 다른장군들은 말하다가 모가지 날거같아서 뇌절안했는데 모델은 이악물고 히틀러랑 맞다이칠정도로 말하면서 그것도안되면 이보전진을위한 일보후퇴 라면서 교묘하게 후퇴아니라고 꼼수질함
@@wat1353 아하..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신임을 얻게끔 잘 처신을 했고(만슈타인만 해도 앞에서는 별말없다가 뒤에서 뒷다마 까는 스타일이라 히틀러가 매우 싫어 했으며 상당수 독일 장성들이 히틀러의 무능한 군사적 역량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직 간접적으로 보였지만 모델은 절대로 그런 언행을 내비친적이 없었죠.) 방어할 만큼 방어하다가 정 안되면 일부 영토를 내어주고 적을 반격하겠다는 선제 조건으로 제시하고 설득했던것이 히틀러 총통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봐야죠. 실제 르제프 돌출부 방어전은 누구라도 모델의 공적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잘 싸웠기 때문에 히틀러도 다른 사람은 파면으로 답했어도 모델만큼은 한번 믿어보았던것 같고 그 기대에 부응하죠.